소발에 대한 욥의 대답(욥기 21:1-6)
욥은 여기에서 그의 친구들이 그의 상황과 그의 이야기 그가 겪고 있는 것과 그가 말한 것에 대해 동정적으로 생각해 줄 것을 바라고 있다.
1. 소발처럼 그의 발언을 중간에서 막음으로써 그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그를 괴롭히지 말라는 그의 간청은 매우 정당한 것이었다(3절). 모든 사람들 중에서 재난을 당하는 자에게 말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만일 고소당하고 책망당한 자들에게 그들 스스로를 위해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치료될 수 없는 과오를 범하는 것이고, 그들의 권리를 결코 회복시켜 줄 수 없게 된다. 그는 그들에게 그를 진심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자들로서 그의 말을 열심히 들어 줄 것을 간청하고 있다(2절). 그리고 그들이 잘못을 범했다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도 그들이 "그를 보기"를 간청하고 있다(5절). 왜냐하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주의하여 듣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잘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2. 이에 대한 그의 권고는 매우 타당했다.
(1) 그들은 그를 위로 하기 위해 왔다. "자" 그는 말했다. "이것이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니라(2절). 너희가 나에게 도움을 줄 위로가 도무지 없다면, 이것을 거절하지는 말라. 즉 나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 줄만큼 친절하고 공정하라. 그것이 바로 나에게 주는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로 하여금 그의 상황을 알리고 그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를 위로할 수가 없었다. 또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너희 친구들을 잔인하게 대하지 않고 부끄럽게 대했다는 사실을 회고해 볼 때 그것은 너희 스스로에게 위로가 될 것이다."
(2) 그들이 말 할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기꺼이 그들의 말을 듣고자 했다. "내가 말한 후에 너희는 계속 말할 수 있으며, 비록 너희가 나를 조롱한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방해하지 않겠다." 논쟁하는 자들은 가혹한 말을 듣더라도 그것을 끈기있게 참고 견뎌야 한다. 대체로 조롱하는 자들은 어떠한 말을 듣더라도 조롱하려 하기 때문이다.
(3) 그는 그들이 깨닫기를 원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들은 후에 조롱하려거든 하라. 그러나 너희가 내 말을 주의 깊게 듣는다면 나를 조롱하기보다는 너희의 생각을 달리하여 나를 불쌍히 여기리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4) 그들이 그의 재판장은 아니었다(4절). "나의 원망이 사람을 향하여 하는 것이냐? 아니다. 그 원망이 내가 볼 수 있는 자에게 한 것이라면 원망을 해도 소용이 없다. 그러나 나의 원망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며, 나는 그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 하여금 너와 나의 재판장이 되시게 하자. 그의 앞에서 우리는 모두 공평히 설 수 있으므로 나는 너희와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다. 만일 내 원망이 사람들에게 향한 것이라면, 내 영이 괴로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나를 존중해 주지도 않고 나를 올바로 이해해 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원망은 하나님께 향한 것이고, 너희는 내게 말할 권리를 주지 않더라도 그는 주실 것이다." 때로 우리 친구들이 우리에게 행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당하게 대하신다면 퍽 불행한 일인 것이다.
(5) 그의 경우는 매우 놀랍고 특이한 것이므로, 그들은 매우 신중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것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 특수한 경우였다.
[1] 욥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환란과 그의 친구들의 책망에 대해 스스로도 이상하게 여겼다(6절). "내가 갑자기 나의 모든 즐거움을 빼앗기고, 심한 종기로 고통을 당한 그 무서운 날을 추억하기만 하여도, 너희 모두가 내게 냉혹한 말을 하여 나를 번뇌케 한 것을 추억하기만 하여도, 답답하고 두려움이 내 몸을 잡는다는 것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구나.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 흥하고 그 이웃들의 찬사를 얻는 사실을 나의 상태와 비교해 볼 때는 특히 그러하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 세상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때로 우리를 매우 어리둥절하게 만들며, 지혜롭고 선한 자들까지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2] 욥은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이상히 여기게 하려했다(5절). "나를 보아라. 놀라라. 나의 환난을 설명하는 대신에 너희는 너희가 악인이라고 생각지 않았던 자가 이처럼 환난 당하는 것에서 이해할 수 없는 섭리의 신비를 두려운 마음으로 경외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손으로 입을 가리우고 가만히 그 결과를 기다리라. 그리고 때가 되기 전에는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하나님의 길은 바다에도 있고 그의 첩경은 큰 물 속에도 있다. 악인이 흥하고, 경건한 자가 환난을 겪는 일 속에서 우리가 그의 행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을 때, 그리고 그 일의 깊이를 측량할 수가 없을 때, 우리는 가만히 앉아 그것을 우러르는 것이 합당하다. 정직한 자는 이를 위하여 놀라나니(17:8), 너희도 그리하라."
악인의 흥함(욥기 21:7-16)
욥의 세 친구들은 이 세상에서 악인의 비참한 상황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모두 매우 유사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악평이 자자한 죄인들에게 때로 현저하게 심판이 내린다는 것은 사실이다"라고 욥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공개적으로 대담하게 악을 행하는 자들이 크게 그리고 오랫동안 흥하는 것을 많이 보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이 흥하여 더 악을 범하더라도 그들은 계속 흥한다."
Ⅰ. 욥은 여기에서 그들이 흥하는 높이와 폭과 그 길이를 묘사해 놓고 있다. "너의 말대로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찌하여 악인이 수를 누리는가를 부디 말해 달라"(7절).
1. 사실은 당연하게 받아들여 진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매일 보기 때문이다.(1) 그들은 살아간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복의 일격으로 갑자기 죽임을 당하지는 않는다. 하늘을 대적하는 입을 가진 자들이 계속 말을 한다. 하늘을 대적하여 손을 뻗친 자들이 여전히 행한다. 그들은 살아갈 뿐만 아니라(즉 그들을 잠시 살려둔다), "부하게 산다"(삼상 25:6).
(2) 더욱이 그들이 "수를 누린다." 그들은 영예와 만족을 얻고, 그들의 가족과 재물이 흥할 만큼 충분히 오래 사는 유익을 누린다. 우리는 "죄인이 백세"나 되도록 산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사 65:20). 그러나 이것 뿐만이 아니다.
(3) 그들은 "세력이 강하고," 권세와 신망을 받는 위치에 오른다. 그리고 그들은 큰 인물이 될 뿐 아니라, 큰 동요에도 잘 견디어 낸다. vivit imo, et in senatum venit-즉 그는 살 뿐만 아니라, 정치 무대에도 나타난다. 어찌하여 그렇게 되는가?
악인이 외적으로 번창하는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땅을 버리신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들의 사악함을 보지 않거나, 미워하지 않거나, 또는 처벌하실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불법의 도가 아직 다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하나님이 참으시는 때이다. 그는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그들을 이용하시사, 그들의 흥함으로 그의 뜻을 이루시는 한편, 그것이 무르익을 때에 그들은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된 이유는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에서 보응이 있으리라는 것을 그가 알려 주시려 하시기 때문이다.
2. 악인의 흥함이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1) 그것은 완전하고 광대하다.
[1] 그들의 수는 불어나 그들의 가정이 당당하게 서고, 그들은 그것을 보며 기뻐한다(8절). "씨가 그들 앞에서 굳게 선다." 이것이 큰 즐거움과 기쁜 전망으로서 제일 처음에 제시되어 있다.
[2] 그들은 편하고 평안하다(9절). 소발은 그들의 끊임없는 놀라움과 공포에 대해 말했지만, 욥은 "그 집이" 위험으로부터 그리고 그 두려움으로부터 "평안하며"(9절), 하나님의 칼 또는 활로 인해 상처를 입고 죽는 일이 그들과는 극히 멀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징벌"은 물론, 그 쓰라림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3] 그들의 산은 번창하여 풍족하게 된다. 이에 대해 그는 단 한가지의 예를 제시하고 있다(10절). 그들의 가축이 번성하여 그들의 기대를 채워준다. 즉, 암소가 새끼를 낳아 그것들은 점점 급증한다. 이것은 출애굽기 24장 26절과 신명기 7장 14절에 약속되어 있다.
[4] 그들은 즐거워하고 유쾌한 삶을 누린다(11, 12절). "그들은 그 아이들을" 이웃들과 섞어 놀도록 "내어 보냄이 양떼같이" 무수하구나. 그들이 무도회를 열고 음악회를 여는 그 자리에서 "그 자녀들을 춤추는구나." 춤추는 것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모르는 아이들에게 가장 적합한 오락이며, 그들의 순진함은 일반적으로 그 순진함에 따르는 재앙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준다. 그 부모들은 춤출 만큼 매우 어리지도 않고, 유쾌하지도 않지만, "그들은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한다." 그들은 피리를 불고 그 자녀들은 거기에 맞추어 춤춘다. 그리고 그들은 악기를 치우거나, 마음의 기쁨을 거둘 만한 어떠한 슬픔도 알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그들이 흥한 것과 같이 또한 허영에 물들어 있는 본보기로서 간주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들이 아브라함처럼 그들의 자손에게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게 하도록" 주의를 기울였다는(창 18:19) 말은 없다. 그들은 기도하거나 교리문답을 말하지 않고, 춤추며 노래했고, 또 "피리를 불며 즐겼다." 감각적 즐거움은 정욕에 물든 사람들이 취하는 기쁨이며, 그들은 자녀들도 그렇게 기른다.
(2) 그것은 꾸준히 계속된다(13절). "그들은 그 날을" 그 모든 날을 "형통하게 지내며," 부족함이 없이 즐겁게 지낸다. 그리고 슬픔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마지막에도, 그들을 놀라게 하는 두려움의 전조를 느끼지 않고, 어떤 근심이나 번민을 느낌이 없이 "경각간에 음부에 내려간다." 거기에는 그들의 죽음을 알리는 전조도 없다. 만일 이 세상 후에 또 다른 생이 없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곧 죽어버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음부에 내려가는" 것이 가장 먼 우리의 여행이라면, 우리는 쓴 약을 씹지 않고 삼키는 것처럼 "경각간에 내려가기"를 원할 것이다.
그는 어떻게 그들이 그들의 번성함을 오용하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사악함을 계속 고집하는 가를 보여주고 있다(14, 15절).
1. 그들의 금과 은은 그들을 무자비하게 만들며, 더욱 무례하고 오만하게 악을 행하게 만든다. 이제 그가 여기에서 이러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까닭은 다음과 같은 까닭이 있기 때문이다.(1) 그것에 대한 항의를 더욱 고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사악한 사람들이 이처럼 흥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하나님께 공공연히 도전하면서 그의 면전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극히 사악한 자들이 흥하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그들이 더욱 하나님을 대적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흥한다. 그들이 그 무기로 그와 싸우려 할지라도 그들은 무력적인 대항을 받지 않는다.
(2) 또 그것에 대한 항의를 완화시키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그들이 흥하도록 내버려 두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놀라지 말자. 왜냐하면 "미련한 자의 안일은" 계속 죄를 짓게 만듦으로써 "자기를 멸망시키기" 때문이다(잠 1:32; 시 73:7-9).
2. 흥하는 이 죄인들이 얼마나 하나님과 믿음을 경하게 여기는가 보라. 그들은 마치 이 세상에서 매우 풍족하므로 저 세상을 바랄 필요가 없는 듯이 말하고 있다.
(1) 그들이 하나님과 믿음을 얼마나 싫어하고 있는가를 보라. 그들은 그것들을 버렸고, 그것들에 대한 생각을 팽기쳤다.
[1]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두려워하며, "그에게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하나님의 눈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만듦으로써 우리를 괴롭히지 마시고, 또 그에 대한 두려움으로 억압받게 하지 마소서." 또는 그들은 그를 필요치 않는 자로 여겨 또 그가 필요할 경우가 결코 없으리라고 여겨 그에게 떠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이 세상은 그것을 택하고 차지하며, 그곳에 있는 것이 행복하리라고 생각하는 자들의 몫이다. 그들이 그것을 가지고 있는 한, 그들은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그에게 떠나 달라고 말한 자들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실 것이다(마 25:41). 그리고 지금도 그는 그들의 말을 듣고 계시다.
[2] 그들은 하나님의 지식과 그의 뜻 그리고 그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두려워한다.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나이다." 하나님의 길로 걸으려 하지 않는 자들은 그것을 알려하지 않는다. 그 지식은 불순종하는 그들은 끊임없이 책망할 것이기 때문이다(요 3:19).
(2) 그들이 하나님과 믿음에 대해 어떻게 변론하는가를 보라(15절). "전능자는 누구이냐?" 영원한 피조물이 이처럼 무례하게 말하고 영원한 모순덩어리의 피조물이 이처럼 어리석고 불합리하게 말한다는 것은 퍽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믿음에 대해 지켜야 할 두 가지의 큰 약속은 의무와 그것으로 인한 이익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이제 이 약속을 깨뜨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1] 그들은 신앙적으로 되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고 있다.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는가?" 바로왕처럼(출 5:2),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겠는가?" 다음을 살펴보자.
첫째,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무례하게 말하고 있는가! "전능자가 누구인가?" 그들은 마치 그가 단지 이름 뿐인 자인 것처럼, 단지 허수아비에 불과한 것처럼, 또는 그들이 그와 아무런 상관 없으며, 그도 그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둘째, 그들은 믿음에 대해 얼마나 냉혹하게 말하고 있는가! 그들은 그것을 "섬기는 것" 즉 고된 봉사라고 부르고 있다. 그들은 그 전능자와 훌륭히 교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그를 반드시 섬겨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들은 이것을 노역과 고역으로 간주했다.
셋째,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는가! "우리가 섬겨야 한다. 이처럼 부유하고 세력이 강한 우리가 그의 종이 되어 그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가? 안 된다. 우리가 놓였느니라"(렘 2:31).
[2] 그들은 신앙적이 되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이익을 얻으랴?" 그들은 온 세상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혜를 얻는 것을 소홀히 여겼다. 왜냐하면 지혜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말 3:13, 14). 기도가 빚을 갚아 주거나, 자녀를 주지는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매우 경건한 태도가 인간의 출세를 방해할지도 모르며, 또한 그에게 손해를 줄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이 세상의 재물과 영예 이외에는 소득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는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얻고, 영적이며 영원한 축복을 얻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 인해 잃은 것을 원망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기도에 의해 아무런 유익도 얻을 수 없었다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고(사 58:3, 4), 또한 잘못된 것을 구하기 때문이다(약 4:3). 믿음 그 자체는 헛된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에게서 믿음이 헛된 것이라 생각한다면 우리는 지금 믿음 밖에 있기 때문이다(약 1:26).
Ⅲ. 욥은 이에 대한 그들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면서, 모든 것들이 그들에게 협력한다는 사실을 단호하게 부인하고 있다(16절). "그들의 복록이 그들의 손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라." 즉 그들은 하나님 없이 그것을 얻을 수는 없으므로, 그들이 그를 이처럼 무시한다는 것은 매우 배은망덕한 행위이다. 그들이 이러한 재물을 얻게 한 것은 "그들의 세력이 아니고, 그 손의 권세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해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 없이 그것을 보존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가 떠나기를 청하며, 그가 주는 이득을 잃는다는 것은 슬기롭지 못한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보고 있다. "그들의 재물이 곳간과 자루 속에 쌓여있다.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그들이 그것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 재물이 무슨 유익을 행하겠는가?" "그러므로" 욥은 말했다. "악인의 계획은 나와 판이하니라. 내가 그들과 같은 마음이 되어 그들이 말하는 대로 말하고 그들이 행하는 대로 행하는 것은 내게 너무도 먼 일이다. 나의 가치관이 그들과는 매우 다르다.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나, 후세 사람은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하리로다(시 49:13). 그러나 나는 그들의 계획을 좇는 것보다 더 나은 길들을 알고 있다."
악인의 필연적인 절망(욥기 21:17-26)
욥은 악인의 흥함을 넓게 묘사했었다.
Ⅰ. 욥은 악인이 이 생애에서 분명 멸망하리라고, 그의 친구들이 언급한 말을 반박하고 있다. "악인의 등불이 꺼지는 일을 몇 번이나 너희가 보았는가? 내게 말해다오, 너희는 그것이 심지까지 타들어가 저절로 꺼지는 것을 자주 보지 못했는가?(17절) 재앙이 그들에게 임함이나,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을 곤고케 하심을 너희가 몇 번이나 보았는가? 너희는 그들의 즐거움과 번영이 끝까지 지속되는 것을 아주 보지 못했는가?" 아마도 악명 높은 죄인들이 비참하게 그들의 날을 끝마치기도 하지만, 또한 화려하게 끝마치는 예도 많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욥에 대한 그들의 논쟁이 무효하며, 외적 상황으로써 한 인간에게 내린 심판을 확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충분히 알려 줄 것이다.
Ⅱ. 욥은 이것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에 부합시키고 있다. 비록 악인은 그들이 사는 동안 줄곧 번성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그들의 사악함을 언제나 처벌하지 않고 지나간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1. 그들이 이처럼 번영하는 동안에도 그들은 "폭풍우 앞에 검불과 겨같이 된다"(18절). 그들은 가볍고 가치없는 인간으로서, 하나님이나 지혜롭고 선한 자들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멸망하기에 합당하며, 그 위험성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극도로 세력이 강하여 우쭐대고 있을 때에도 그들의 멸망은 일보 직전에 있다.2. 그들이 항상 풍족하게 살더라도 하나님은 "그의 죄악을 쌓아 두셨다가" 그들이 죽은 후 "그 자손에게 갚으신다"(19절). 그 압제자는 그의 자손들을 위해 재물을 쌓아두었다가 그들을 양반으로 만들려 하나,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그의 죄악을 쌓아 두셨다가 그들을 거지로 만드신다. 그는 그 아버지의 죄악을 정확히 헤아리시고 "그것들을 그 곳간에 봉하여 두신다"(신 32:34). 그리고 그 자손들을 공의롭게 징벌하실 것이다. 한편 그들의 손에 있는 재물이 저주가 되었음이 드러날 것이다.
3. 그들이 이 세상에서 흥할지라도, 저 세상에서는 심판 받을 것이다. 비록 그의 악한 일에 대해 징벌이 곧 내리지는 않더라도, 드디어 그 행위대로 "그에게 갚으신다"(19절). 그는 지금 장차 받을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서, 그 스스로에게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되리라는 속삭임으로 자위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날에 그는 그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는 그것을 알게 된다(20절). 그가 결코 믿으려 하지 않았던 "자기의 멸망을 자기 눈으로 보게 하실 것이다." "그들이 보지 아니 하려 하나 보게 하시리라"(사 26:11).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완고하게 감겨 있던 눈이 떠져 그의 멸망을 보게 될 것이다. "그가 전능자의 진노를 마시게 될 것이다." 그것이 그의 잔의 소득인 것이다(시 11:16 을 계시록 14:10 과 비교).
죄인들의 저주받은 비참한 상태가 여기에서 몇 마디 말로 제시되어 있으나, 매우 두려운 것이다. 그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며,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시킴으로써,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리신다. 그가 저 세상에서 이러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이 세상에서의 번영이 그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가 자기 집에 대하여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21절) 우리의 주님은 부자가 죽은 후 그의 집에 남겨둔 재물이 지옥에 있는 그에게 어떠한 즐거움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즉 그가 생전에 소유했던 재물을 회고하는 것이 그의 혀를 서늘하게 하지 못했고, 단지 그의 고통만 더해 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매우 슬퍼하면서 그의 집에 남아 있는 그의 다섯 형제가 이 고통스런 곳으로 그를 뒤따라 오지 않기를 원했던 것이다(눅 16:25-28). 영혼을 잃은 자에게 이 세상의 소득은 거의 유익을 주지 못할 것이다.
Ⅲ. 욥은 하나님의 지혜와 권세가 이 악인과 저 악인을 각각 다르게 섭리하시는 것을 밝혀 놓고 있다(22절).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는가?" 감히 우리가 하나님의 처사를 규탄하거나, 그의 행위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감히 하나님께 어떻게 이 세상을 다스려야 하며, 어떠한 죄인은 용서하고 누구를 처벌해야 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는 높은 자들을 심판하실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땅 위에 있는 방백과 재판장들을 헤아리실 수 있으며,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이 어떻게 심판해야 하는가를 배워야 한다. 그가 그들을 조종하시고 그가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그들을 사용하신다. 그러한 그가 우리들로부터 헤아림을 받거나 우리로부터 충고를 받으실 수 있겠는가? 그는 온 땅의 심판자이시므로 물론 공의로 행하실 것이다(창 18:25; 롬 3:6). 그리고 그는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섭리를 행하시어, 그것들이 서로 합치할 뿐만 아니라, 함께 그의 계획을 돕도록 만드실 수가 있다.
한 악인이 회개하지 않고 평화롭고 영화로운 상태에서 죽어 가는 것과 또 다른 악인이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죽어 가는 것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다. 그들은 결국 지옥에서 함께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빨리 죽는 자나 천천히 죽어 가는 자나, 곧 무덤 속에서 함께 만나게 될 것이므로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욥은 예증하고 있다. 시간과 영원의 차이는 매우 큰 것이므로 모든 죄인들이 결국 지옥으로 모이게 된다면 한 사람이 노래 부르면서 또 한 사람은 한숨지으면서 그곳으로 간다 하더라도 별 차이가 없다.
1. 죽어 가는 사람들의 상황은 얼마나 다양한가 보라. 이 세상으로 오는 방법은 하나지만, 떠나가는 상황은 매우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이 평강하고 안일하게 사는 반면, 또 다른 사람들은 어렵고 고통스럽게 살아간다.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것은 후자보다는 전자의 사람들에게 더 두렵게 느껴진다. 그리고 몸의 죽음은 영혼의 탄생이므로 죽음의 침상에서의 고통은 갓난아이의 침상에서의 진통과 잘 비교될 수 있다. 그 차이점을 살펴보자.(1) 어떤 사람들은 늙거나 병으로 쇠약해 짐이 없이 "기운이 충실하여 죽도록 평강하고 안일하게" 살다가(23절), 죽임이 다가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두려워하지도 않고, 갑자기 죽어간다. 그러나 반대로 "그 그릇에는 젖이 가득하며 그 골수는 윤택하기" 때문에(24절), 즉 그가(비대하고 건강한 젖소처럼) 건강하고 기운차며 혈기 왕성하기 때문에, 그는 환락과 즐거움 속에서 여러 해를 사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처럼 그는 생을 즐기나, 죽음의 일격에 의해 일순간에 죽임을 당한다.
기운이 충실하고 가장 혈기 왕성하여, 죽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고 그 스스로가 그것에 대해 최대의 무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죽음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도전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라도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므로 결코 안심하지는 말자. 왜냐하면 잘 지내던 많은 사람들이 그 주간에, 그 날에, 그 시간에 아니 아마도 바로 그 순간에 죽어 가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죽음에 대비하자.
(2) 어떤 사람들은 천천히 죽는다. 그리고 불쌍한 욥이 지금 겪고 있는 것과 같이 "죽도록 마음에 고통하는" 그 큰 고통과 비참함을 미리 겪는다. 그리고 그들은 병이나 노쇠함 또는 마음의 슬픔으로 인해 "복을 맛보지 못하고," 맛있는 음식이나 그 흥취를 즐기지 못한다(25절). 건강한 상태에서 언제나 식욕을 즐기는 자들은 얼마나 깊이 감사해야 하는가! 그리고 때로 이러한 즐거움을 못 가지는 자라 할지라도, 결코 그것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원망 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다는 걸 깨달을 수 있는가!
2. 무덤 속에서 이러한 차이는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건강한 자와 건강하지 못한 자가 모두 거기에서 만난다(26절). "이 둘이 일반으로 흙 속에 눕고 그 속에 구더기가 덮여," 그들을 맛있게 파먹는구나! 이처럼 만일 한 악인은 궁전에서 죽고 또 다른 악인이 토굴 속에서 죽었더라도, 그들은 죽어 저주받은 자의 회중에서 만날 것이며, 죽지 않은 구더기와 꺼지지 않은 불꽃이 그들에게 모두 임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차이점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며, 또 깊이 생각할 만한 가치도 없는 것이다.
악인의 형벌(욥기 21:27-34)
Ⅰ. 욥은 그의 친구들의 의견을 반박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악인인 지금 욥이 겪고 있는 것처럼, 이렇게 눈으로도 식별될 만큼 현저하게 멸망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그들이 욥을 악인으로 간주하여 정죄하고 있다는 것을 욥은 알고 있었다. "내가 너희의 생각을 안다." 욥은 말했다(27절). "나는 너희의 견해가 나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너희의 판단은 나에 대한 언짢음과 편견으로 착색되어 너희가 내 위로와 영예를 거스려 나를 해하려는 궤휼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이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는가?
욥의 친구들은 악인의 흥함에 관한 욥의 질문에 대해 이미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왕후의 집이 어디 있느냐?(28절) 욥의 집 또는 그의 자손들이 잔치를 베풀던 그 장자의 집이 어디 있느냐? 욥의 집과 그 가족들의 형편을 살펴보자. 그리고서 악인이 거하던 장막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면서, 그들을 함께 비교해보자. 그러면 너희는 욥의 집이 포학자와 학대자의 집과 같은 궁지에 몰려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도 그러한 자라는 것을 서슴없이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욥은 이와 반대되는 그 자신의 판단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전 인류의 감정과 관찰에 호소하고 있다. 그는 그의 견해가 옳다는 것에 매우 자신이 있었으므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그 변론을 의뢰하고자 했다(29절). "너희가 길가는 사람들에게 묻지 아니하였느냐? 우리와 무관한 사람들에게 물어 그들의 답을 듣지 않았느냐? 엘리바스처럼 거룩한 자에게(5:1)가 아니라, 인간의 자손들에게 묻지 않겠느냐? 너희가 원하는 그 어떤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너희는 그들이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의 예언대로(유 14) 악인의 심판은 이 세상보다도 저 세상을 위해 더욱 계획되어 있다고 모두 말하는 것을 들을 것이다. 너희가 이 세상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잘 관찰하고서 너희에게 이처럼 말하는 이 진리의 증거를 알지 못하느냐?"
1. 욥이 여기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두 가지 일이다.(1)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은 반드시 저 세상에서 형벌을 받을 것이고, 보통 그들에 대한 심판은 그때까지 연기될 것이다.
(2) 그러므로 그들이 이 세상에서 크게 번영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눈에 띄게 그들에게 임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을 그때에 심판하기 위해 그것은 이 세상에서 보류된다. "그러므로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시 92:7). 여기에서 묘사된 죄인의 상태는 다음과 같다.
[1] 죄인은 살아 있을 동안 큰 세력을 누려 "생존 세상에서 용사의 두려움"(겔 32:27)이 될 뿐이니라, 지혜롭고 선한 자들의 두려움이 된다. 그는 이처럼 그들을 두렵게 하여 아무도 감히 "그의 행위를 면박하려" 하지 않는다(31절). 그를 책망하고 그의 사악함에 대해 그에게 말해 주고 악인의 결국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알려줄 만한 자유를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안심하고 죄를 지으며, 부끄러워 하거나 두려워 할 줄을 모르게 된다.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킨다." 왜냐하면 그들은(그들 스스로 영리하다고 생각하고서) 다른 사람들의 훈계를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 후에는 그들의 멸망을 그들 홀로 막아야 하는 후회스러운 결말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홀로 죄 안에 거하려는 자들은 버림을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다(호 4:17). 그리고 아무도 감히 그를 면박하려 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그가 행한 것을 갚으려 하지 않을 것이며, 그가 불의로써 얻은 것을 돌려 주도록 그에게 권고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는 보잘 것 없는 것들만 걸려들게 되어있는 율법의 거미줄에 날아든 큰 곤충들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공의를 꾸짖으며, 그들에게 간섭하려는 자들을 두렵게 만들면서, 악한 길을 걸어가는 죄인들을 대담하게 만든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의 잘못을 결코 들으려 하지 않는 자들이 그것들을 듣게 되고, 그들의 죄가 그들 앞에서 낱낱이 밝혀지며, 그들이 면박당하여 영원히 당황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들이 지금은 그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그들이 행한 잘못을 회개하려하지 않지만 그들이 그렇게 해야 할 날이 오고 있다.
[2] 그는 죽어 매우 장엄하고 웅대한 가운데 묻히게 된다(32, 33절). 그는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한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운명이다. 그러나 그의 온갖 영화로움이 그 죽음에 대한 비난을 막아줄 것이다.
첫째, 그는 웅장한 장례식을 가질 것이다-이러한 광경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것은 불쌍한 일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퍽 권위 있는 일로 여긴다. 죽음의 나라로 먼저 가는 선구자적 역할에 대한 찬사를 그에게 보내면서, "그를 무덤으로 메어가고" 그의 친구들은 그의 유족들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한다. "부자가 죽어 장사되었다"는 말은 있으나 가난한 자에 대한 언급은 없다(눅 16:22).
둘째, 그 위에는 당당한 비문이 세워질 것이다. 많은 찬사와 구절과 함께 "그가 여기 누웠노라"고 씌어진 비문 옆에서 "사람이 그 무덤을 지키리라." 아마도 이것은 그의 몸을 썩지 않게 보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옛날 애굽 사람들은 위대한 사람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이렇게 했던 것이다. 그는 망대에서 파수하는 사람처럼(단어 그대로) "그 무덤을 지키면서" 그곳에서 홀로 조용히 거하리라.
셋째, "그는 골짜기의 흙덩이를 달게 여기리라." 즉, 무덤 속의 악취를 제거하기 위해 온갖 풍요한 향료를 뿌리고, 또한 어두운 무덤 한편에 등불을 켜 놓았는데, 아마도 이것이 앞에서 "그 무덤을 지키리라"는 구절이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우스꽝스러운 것에 불과하다. 죽은 사람에게 등불이나, 향료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넷째, 죽음이 영예롭지 못한 것이라는 이론을 완화시키기 위해, 그는 그것이 모든 사람들의 운명임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그는 단지 그 운명에 항복한 것 뿐이다. "그 앞선 자가 무수함 같이 모든 사람이 그 뒤를 좇으리라."
죽음은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따르는 길이다. 우리가 그 어두운 계곡을 지나게 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① 우리를 앞서 그 길을 따라간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이러한 생각은 죽음의 두려움을 제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죽음은 "무수한 사람들을 좇아 가는 것이다."
② 모든 사람들이 우리 뒤를 따를 것이다. 앞서간 분명한 발자취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뒤를 따르는 긴 발자취도 있다. 우리는 그 어두운 통로를 지나가는 첫 번째 사람이 아니고, 맨 마지막 사람도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기 순서대로 가야 하며 그 순서는 하나님이 정하신다.
2. 이 모든 말에서 욥은 그들의 이야기가 무례했음을 언급해 놓고 있다(34절).(1) 그들이 이야기한 근거는 썩은 것이며, 그들의 전제는 그릇된 것이다. "너희의 대답은 거짓뿐이니라. 너희가 말한 것이 증명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역으로 증명되었고, 그것은 너희가 제거할 수 없는 거짓 누명임이 밝혀 주었다."
(2) 그러므로 그들이 세운 건물은 약하며 흔들린다. "너희의 위로가 헛되도다. 너희가 내게 말한 모든 것은 내게 아무 위로도 주지 못했다. 너희는 내가 하나님께 돌아오면 다시 흥하리라고 내게 말했다. 그러나 너희의 이 말은 경건한 자는 반드시 번영하리라는 가정 위에 세워진 것으로서, 잘못된 말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너희의 추론이 어떻게 내게 위로를 줄 수 있겠느냐?" 진실이 없는 곳에서는 거의 위로를 기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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