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욥기 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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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빌닷에 대한 욥의 대답(욥기 19:1-7)

욥의 친구들은 그가 이처럼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를 악인이라 하며, 매우 냉혹하게 책망했다. 이제 욥은 그를 얼마나 나쁘게 여겨 이처럼 책망 했는가를 여기에서 말하고 있다. 빌닷은 두 번씩이나 "어느 때까지"라는 말로 그를 책망했다(8:2; 18:2). 그러므로 욥도 그에게 대답할 때 특별히 "어느 때까지"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2절). 좋아하지 않는 일은 보통 지루하게 느껴진다. 욥이 그 자신을 옹호한다고 여겨서 그를 책망하는 자들이 느끼는 것보다 공격을 당하는 욥이 더욱 그것을 지루하다고 느낄 것이다. 우리에게 권한이 주어졌다면, 우리 스스로를 옹호할 때가 비록 우리가 권한을 얻었을지라도 우리의 형제를 비난할 때보다 더 나은 주장을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살펴보자.

Ⅰ. 욥은 그에 대한 그들의 불친절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 그들은 "그의 마음을 번뇌케 했다." 그것은 뼈가 떨리는(시 6:2, 3) 것보다 더욱 번민스런 일이었다. 그들은 그의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그에게 가장 훌륭한 조언을 해 준다는 구실로, 그를 위로하러 왔다. 그러나 매우 큰 위협과 함께, 지혜와 경건을 위장하고서, 그들은 이제 그가 선하신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선한 양심과 선한 이름 안에서 얻을 수 있었던 그 유일한 위로마저 빼앗아갔다. 이것이 그의 마음을 번뇌케 하였다.

2. 그들은 그를 "말로 꺾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을 갈갈이 찢을 수 있는, 분명히 심하고 매우 잔인한 말이었다. 그들은 그를 번뇌케 하여, 그를 꺾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강퍅한 말은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간주될 것이다(유 15).

3. 그들은 "그를 꾸짖었다"(3절). 그들은 그를 나쁜 자로 몰아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을 책망했다. 정결한 마음을 지닌 자들에게 있어서 꾸짖음은 매우 날카롭게 받아들여진다.

4. 그들은 "그를 학대하였고," 그가 환난 가운데 처했다고 해서 이제 그를 부끄럽게 여겼다. 그리고도 그를 모르는 자들인 것처럼 보였다(2:12). 또한 그가 번영했을 때처럼 그와 허물없이 지내지 못했다. 그들의 친구들이나 하나님의 친구들이 환난 중에 있을 때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은, 참된 영예나 사랑의 원리에 의해서 지배받는 자들이 아니라, 이 세상의 영에 의해 지배받는 자들이다. "친구는 언제나 사랑한다."

5. 그들은 그와 멀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를 향하여 자긍하였다"(5절). 그들은 그를 부끄럽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 자긍하여 그를 위축시키면서 그를 경멸했다. 이처럼 불행에 처한 자들을 짓밟는 것은 천한 일이며, 야비한 일이다.

6. "그들은 그에게 수치될 행위가 있다고 증명하였다." 그들은 그의 고통을 그가 악인됨을 증명하는 논쟁거리로 이용했다. 그들은 그의 결백함을 변호해 주고 고통 속에 있는 그를 위로하도록 힘썼어야 했다. 그리하여 그의 비난거리를 막아(사도 바울처럼, 고후 1:12) 변호해 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기는커녕, 그의 결백함을 거스려 비난함으로써, 불친절했을 뿐만 아니라, 매우 부당하게 행했다. 정직한 자도 비난의 대상이 된다면, 정직한 자는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Ⅱ. 그들의 불친절은 그를 매우 괴롭혔다.

1. 그들은 때때로 그를 모욕했다(3절).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꾸짖었다." 이러한 것은 창세기 31장 7절과 민수기 14장 22절에 나타난 것과 같이 매우 흔한 일이다. 그들은 다섯 번 말했으나, 그것은 모두 비난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욥은 그들이 책망한 것을 특별히 기억하고 있기에 그것이 몇 번이었는지를 정확히 말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했다. 그처럼 행한 것은 단지 까다롭고 불친절한 일로서 앙갚음이나 보복을 뜻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손상을 입고 불친절한 대우를 받은 것을 들추어 내어 기억하는 것보다, 그것들을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의 평안에 더 유익하다.

2. 그들은 여전히 그를 모욕하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그렇게 하겠느냐?"(2, 5절) "내가 나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많은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나를 대적하여 너희 스스로를 높이려 하는구나." 지나치게 많은 말을 하는 자들은 그들이 충분히 말했다고 생각하는 적이 거의 없다. 감정이 격하여 입을 열 때는 사리를 판단해야 할 귀가 막힌다.

3. 그들은 말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3절). 그들은 인간답지 않게 냉혹했고, 선한 인간답지 않게 무자비 했으며, 친구답지 않게 속이고 있었으므로 부끄러워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부끄러워 했는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이 거듭 그것을 들었지만, 그들은 얼굴을 붉힐 줄 몰랐다.

Ⅲ. 욥은 그들의 심한 비난에 대해 어떻게 응답하였는가 보라. 그는 그들이 정죄한 것은 용서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1. 그의 판단이 잘못된 것은 용서 받을 수 있었다(4절). "무지와 실수로 인해 잘못 행하여, 내가 과연 허물이 있었다 하자." 인간이 선한 인간이라할지라도 허물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Humanum es errare-즉 모든 인간에게는 허물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도 그렇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욥은 말했다.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는 것이다." 즉 "나는 반박하기 위한 의도에서가 아니라, 내 최선의 판단에 의해 진실된 마음으로 말하는 것이다." 또는 "만일 내게 허물이 있었다면, 나는 스스로 그것을 책임지고 너희들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가하지 않겠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일에 간섭하여 그들을 훈계하거나 정죄하지 않는다." 사람이 잘못을 범했을 때, 그 스스로가 그 책임을 지고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욱 용서 받을 수 있다. "네가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을 너 자신만이 가지고 있도록 하라."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내게 허물이 있었다면 그것에 대한 징계를 받아야 할 자는 나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간섭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 그것에 대해 엄한 징계를 받아야 할 자는 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를 책망함으로써 내 고통을 더할 필요가 없다."

2. 그가 격분한 것은 의롭지 못한 행위였다 할지라도, 그의 번뇌가 많고 상황이 극심했던 만큼 용서받을 수 있었다. "너희는 내가 불평한 말들을 모두 헐뜯으려 하고, 그것을 악용하여 나를 치려하지만, 그 불평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라. 너희가 그 불평을 정죄하고 나를 비난하기에 앞서 그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나를 굴하게 하신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6절). 욥이 그들에게 잘 생각해 보기를 원했던 것은 다음 세 가지 일이었다.

(1) 그의 고통을 매우 컸다. 그는 굴복되어 그물에 둘러싸인 것처럼 꼼짝할 수도 없었고, 또 빠져 나올 수도 없었다.

(2) 하나님이 바로 그 당사자였으므로, 그는 그 속에서 하나님과 싸워야 했다. "나를 굴하게 한 것은 그의 손이었다. 나를 에워 싼 것은 그의 그물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처럼 나서서 나를 칠 필요는 없다. 내가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맞붙어 싸우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나로 하여금 너와도 또 그렇게 하도록 만들지 말라. 너희가 논쟁을 시작하기에 앞서 하나님과 나와의 논쟁이 끝나야 한다.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는 것"은(시 69:26) 야비한 일이다.

(3) 그는 고통이 거두어지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가 없었다(2절). 그는 고통을 호소했으나, 편안함을 얻을 수 없었다-그가 환난에 처하게 된 이유를 알고자 간청했으나 그것을 알 수가 없었다-그의 결백함을 밝혀 줄 것을 하나님의 법정에 호소했으나, 응답을 듣지 못했다. 더욱이 그 호소에 대해 형벌만 더할 뿐이었다. "내가 포학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구나." 하나님은 잠시동안 그의 백성들로부터 귀를 돌리시고, 그들의 기도를 화내시며, 그들의 호소를 외면하시는 것처럼 보일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경우에 그들이 비통하게 한탄했다면 그들은 틀림 없이 용서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신다면 우리에게 화가 있으리라!

 

19:2 없음.

 

19:3 없음.

 

19:4 없음.

 

19:5 없음.

 

19:6 없음.

 

19:7 없음.

 

19:8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대한 욥의 불평(욥기 19:8-22)

빌닷은 악인의 비참한 상태로 묘사하면서 욥의 탄원을 매우 불성실하게 악용했었다. 이제 욥은 여기에서 다시 탄원을 반복함으로써, 만일 그들의 마음 속에 조그만치의 동정심이나 선한 성품이 남아 있다면, 그들의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고 선한 성품에 호소하려 하고 있다.

Ⅰ. 욥은 그가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얻어 극심한 환난과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을 불평했다. 그가 불평하는 일들이란 얼마나 슬픈 것인가! "그가 나를 향하여 진노하사, 나를 위협하시고 고통으로 나를 태우시는도다"(11절). 하나님의 진노가 지옥의 불이 아니고 무엇인가? 무딘 양심은 장차 앞으로는 그것을 느낄 것이나, 현재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밝은 양심은 지금 그것을 두려워하나, 앞으로는 그렇게 느끼지 않을 것이다. 욥은 현재 "하나님이 그를 원수같이 보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그를 진실한 친구로서 사랑하셨고, 그를 영예롭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의 적으로 위협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오이나, 매우 흔한 것이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은 "그가 사랑하시는 자를 꾸짖으시고 징계하신다." 그것은 그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훈계이다. 욥은 무엇을 보든지 간에 그것이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증거라고 생각했다.

1. 그는 그의 예전의 번영을 상기해 보았는가? 그는 하나님의 손이 그것을 막으시는 것을 보았다(9절). "그가 나의 영광을 벗기시며, 내 재산과 영예, 권력 그리고 내가 선행을 행할 모든 기회를 벗기시는도다. 나의 자손들은 내 영광이었으나, 나는 그들을 잃었다. 그리고 나의 면류관이 되는 것은 모두 그가 내 머리에서 취하셨고, 나의 모든 영예를 흙 속에 묻으셨도다." 세상적인 영광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보라. 그것은 우리가 곧 빼앗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빼앗기든지 간에, 우리는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손을 보고 시인해야 하며 그의 계획에 순응해야 한다.

2. 그는 자기의 현재 고통을 살펴보았는가? 하나님은 현재의 고통들에게 명하시어 그를 치도록 허락하신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의 명을 받은 "군대로서 그를 둘러 진을 쳤다"(12절). "하나님의" 군대가 그를 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그를 괴롭히는 것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를 대적하여 싸우시고, 그를 멸하려 하시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강한 성을 포위하고 그곳으로 운반되던 모든 물자의 통로를 막으면서 계속 공격하는 군사들과도 같이 하나님의 군대가 "그 장막을 둘러 진을 쳤다." 욥의 장막도 이처럼 포위당했다. 하나님의 군대가 그의 안전을 위해 그를 둘러 진을 친 적도 있었다. "주께서 그 주위에 울타리를 만드시지 않았나이까?" 그러나 이제 그것과는 반대로, 그를 위협하기 위해 그를 둘러싸고 "사면으로 그를 헐으셨다"(10절).

3. 그는 구출되기를 기대했는가? 그는 하나님의 손이 그 모든 소망을 꺾는 것을 보았다(8절).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지 못하게 하셨다. 나를 이 환난에서 구해내거나, 그 고통을 덜어 줄만한 도움을 나는 하나도 얻지 못하고 있구나. 내가 움직여 구출되도록 방안을 모색해야 하는가? 나는 내 길이 막힌 것을 보았다. 나는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가 없다. 앞으로 내가 구출되리라는 전망을 가지고 기뻐한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행할 수가 없다. 그것은 내 힘이 닿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볼 수도 없는 곳에 있다. 하나님은 내 첩경에 흑암을 두셨고,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지, 내게 말해 줄 사람도 없도다"(시 74:9). 그는 이렇게 단정짓고 있다(10절). "나는 죽었구나. 이 세상에서 나는 모두 잃어 버린 채 파멸해 버렸다. 그가 내 소망을 나무 자르듯, 또는 그 뿌리를 뽑듯 뽑으시어 다시 자라나지 못하게 하시는구나." 이 생에서의 소망은 소멸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나 선한 자의 소망은 그것이 이 세상에서 뽑힘을 당한 때, 나무처럼 뽑히어 주님의 동산에 이식된다.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을 모래에서 반석으로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옮기신다면 불평할 이유가 없다.

Ⅱ. 욥은 그의 친척들과 옛 친구들의 불친절을 불평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또한 하나님의 손을 인정하고 있다(13절). "그가 나의 형제들로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는구나." 즉 "그가 나에게 이러한 재앙을 주시어, 그들이 두려워하며 나를 떠나고, 나의 아픔을 외면하게 하시는구나." 그것은 그들의 죄이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만들지는 않으셨다. 왜냐하면 환난 중에 있는 형제들을 외면하도록 만드는 것은 사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의 환난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의 시련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 그것도 허락하셨다. 우리가 적으로부터 받는 모든 재산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손을 주시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주께서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도록 명하셨다") 우리 친구들로부터 받는 멸시와 불친절 속에서도 그것을 주시해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더욱 참을성 있게 견디어 낼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친절하거나 불친절하거나, 위로를 주거나 못 주거나)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우리에게 작용한다. 그렇다고 해서 욥의 친척들과 친구들이 매우 무례하고 부당하게 그를 대한 죄가 용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욥은 그것을 불평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욥처럼 그렇게 잘 참아낼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다. 그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중시하고 있다.

1. 그의 친척과 친구들과 이웃들 그리고 이전에 그와 친하게 지내던 자들의 불친절한 태도를 주목하고 있다. 이들은 그와 우정과 예의라는 법으로 묶여있던 자들로서, 그를 방문하고 그의 안부를 물으며 그들의 능력껏 그에게 모든 봉사를 아끼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에게 외인이 되었다(13절). 그들은 처음부터 전혀 몰랐던 외인들에게 보다도 그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가 번영했을 때는 그와 친척임을 열심히 주장했던 자들이 이제는 그를 버렸다. 그리고 그와 친구임을 고백한 자들도 이제는 조그만치의 친절도 베풀려 하지 않았다. 그가 신뢰했던 그의 절친한 친구들까지도 이제는 그를 잊었다. 그들에 대해 예전에 베푼 그의 우정을 잊었고, 또 그의 현재의 비참함을 외면해 버렸다. 그들은 그의 환난에 대해 들었고, 그를 방문할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은 참된 애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으므로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와 가장 친하며 흉금을 털어 놓았던 마음의 친구, 은밀한 친구들은 그를 잊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혐오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될 수 있는 한 그를 멀리하려 했다. 왜냐하면 그는 가난했고, 이전처럼 그를 환대해 줄 수 없었으며, 그가 이제 비참하고 쓰라린 몰골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사랑했던 자들, 그리고 그가 환난에 처했다하여 그를 사랑하지 않는 이 외인들보다도 못한 자들은 그로부터 돌아섰을 뿐 아니라, 그를 적대시 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하여 그를 증오했고, 그가 그들에게 외인이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정당화했다(19절). 이처럼 인간의 우정은 믿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친구가 되신다면 그는 우리가 곤고할 때에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이제 인간성이나 기독교 신앙을 외치는 자들이 욥의 친구들처럼 그들의 친구들을 대하는 일은 없도록 하자. 재난이 참된 우정을 증명해 준다.

2. 그는 집안 사람들과 그의 가족들의 태도를 주목하고 있다. 때로 우리는 예상 밖으로 형제보다 더 가까운 친구가 있음을 실로 발견하게 된다. 가장은 일반적으로 그의 온 가족들에 의해 시중을 받고, 보살핌을 받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가 육신으로나 정신적으로 연약해져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사게 되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불쌍한 욥은 그의 가족들에게서도 학대를 받았으며, 그의 가장 나쁜 적들 가운데 몇 명은 그의 집안 사람들이었다. 그는 그의 자손들에게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모두 죽었다. 그의 생존해 있는 친척들이 그에게 불친절했으므로, 그는 그의 자손들의 죽음을 더욱 더 탄식했으리라고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만일 그들의 살았다면,"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그들 가운데서 위로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이제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자.

(1) 그의 종들이 그를 무시했다. 그의 계집 종들은 병석에 있는 그를 돌보지 않고, "그를 외인으로 여기니 그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다"(15절). 그의 다른 종들도 그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만일 그가 그들을 부르면 그것을 듣고 그에게 오지 않고 못들은 척했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무엇을 물을 때, 그들은 거만하게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였다"(16절). 욥은 그들에게 선한 주인이었고, "그들이 그와 더불어 쟁변할 때에 그들의 사정을 멸시하지" 않았었다(31:13). 그러나 그들은 이제 그에게 무례하게 대했고, 그가 그들과 쟁변하고자 할 때, 그의 사정을 멸시하였다. 우리가 훌륭한 대우를 받을 만한 자로부터 나쁜 대우를 받았다고 해서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비록 그가 지금 병석에 있을지라도, 사람들이 흔히 그러는 것과는 달리 그들을 괴롭히지 않았고, 또 강권을 쓰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가 강권을 명령할 권한을 가지고 있을 때에도 입으로 그의 종들에게 부드럽게 청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에게 정중히 행하지 않았고, 친절하거나 공정하게 대하지도 않았다.

병과 슬픔 가운데 있는 자들은 모든 일들을 잘못 받아들이기가 쉬우며, 무시당하는 것을 화내며 그들에게 행해진 극히 작은 불친절에도 오해를 사기가 쉽다. 욥이 고통 중에 있을 때 그의 종들까지도 그를 무시하는 것이 그를 매우 괴롭혔다.



(2)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버릴지라도, 그품의 아내는 그에게 다정했으리라고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그녀가 설득한대로 그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몸을 그녀도 역시 싫어하였다. 즉 그녀는 그 가까이에 오는 것을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17절). 그는 권위어린 말로가 아니라, 남편으로서의 다정함을 가지고 그녀에게 말했고, 명령한 것이 아니라, 자손들을 낳아준 그녀에게 부부의 사랑을 가지고 부드럽게 청했으나, 그녀는 그를 거들떠 보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비록 내가 자손으로 해서 탄식하고 슬퍼하지만," 즉 "내 몸에서 난 자식들이 죽어 슬퍼하지만"으로 해석하고, 그녀도 그와 마찬가지로 슬픔 속에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제 마귀는 그녀를 이용하여 그의 유혹자가 되게 할 뿐 아니라, 그를 괴롭히는 자가 되게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녀가 처음으로 그에게 한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말을 살펴볼 것 같으면, 그녀는 거의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눈 앞에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는 자들에게 어떻게 친절과 선행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3) 그의 집에서 태어난 어린 아이들까지도, 그의 종의 자식이므로 태어날 때부터 그의 종이 된 아이들까지도 그를 경멸하였고 그를 조롱했다(18절). 비록 그가 정중하게 일어나 그들에게 다정하게 말한다 할지라도, 혹은 그들을 제어하기 위한 위엄을 띄고 일어선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에게 공공연히 표했다.

Ⅲ. 욥은 그의 몸이 쇠하는 것을 탄식했다. 육신의 힘과 아름다움은 사라졌다. 주위 사람들이 그를 멸시했을 때, 만일 그가 건강했고 또 편안했다면, 그는 그 자신에 대해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스스로에 대해 거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20절). 예전에 내 살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내 피부가 뼈에 붙었구나." 그러므로 이것은 "그를 시들게 했던" 것이다(16:8). 즉 그는 가죽과 뼈만 남은 앙상한 몰골이 되었다. 더욱이 그의 피부도 거의 쇠하여 "잇꺼풀" 즉 그의 잇몸과 입술 밖에는 상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 나머지 부분은 심하게 곪아 상해 있었다. 우리가 육신을 지배할 수 있는 이유가 얼마나 빈약한 가를 보라. 우리가 온갖 정성을 기울이고 난 후에도 육신은 그 속에 숨어 있는 병으로 인해 이처럼 소멸되는 것이다.

Ⅳ. 이 모든 이야기를 하고서 욥은 친구들의 동정을 간청하고, 오늘의 가혹한 태도를 탓하고만 있다. 그의 이 슬픈 탄식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다.

1. 그들은 그를 불쌍히 여겼어야 했다(21절). 그는 가장 절실한 말로 이것을 간청하고 있는데, 그의 호소는(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듯이) 무정한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너희가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없다면, 나를 애석히 여기고 내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나의 경우는 정말 슬프다. 왜냐하면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떨어져, 내 영이 그의 진노하심으로 얻어 맞았으니, 그 누구보다도 가장 심한 재앙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어떠한 고통에 처했을 때는 서로 불쌍히 여기고, 동정심을 막지 않는 것이 합당하다.

2. 더욱이 그들은 그를 핍박해서는 안 되었다. 만일 그들이 동정으로써 그의 고통을 위로하지 않으려 했다하더라도, 그들은 책망과 비난으로 그것을 가중시키는 야비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되었다(22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핍박하느냐? 하나님의 책망만으로도 한 사람이 참아내기에는 벅차다. 너희는 그가 내 손에 주신 고통의 잔에 쓴 것을 더 넣을 필요가 없다. 그것만으로도 매우 쓰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나를 다스리실 권세를 가지고 계시므로 그가 원하시는 대로 내게 행하실 수 있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도 그렇게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우리는 그의 가장 거룩하고 가장 자비로우신 것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하나, 그의 지극히 높으시고 지극히 강대하신 것을 닮으려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가 행하신 어떠한 일도 평가하지 않으시나, 우리는 우리의 일을 평가해야 한다. 만일 그들이 그의 재앙을 기뻐한다면 상하고 닳은 그의 살로써 만족하게 하자. 그러나 그들은 조금이라도 그의 영을 해하고 그의 선한 이름을 멸해서는 안 된다. 지극한 자비는 고통 중에 있는 자들 특히 마음의 고통이 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19:9 없음.

 

19:10 없음.

 

19:11 없음.

 

19:12 없음.

 

19:13 없음.

 

19:14 없음.

 

19:15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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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신앙 고백(욥기 19:23-29)

욥과 그의 친구들의 대담 속에서 우리는 이것보다 더 무게 있고 중요한 구절은 발견할 수 없다. 누가 그것을 기대했겠는가?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와 하늘에 대해 많은 것이 언급되어 있다. 이같이 말하는 그의 믿음이 조상들처럼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것을 찾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히 11:14).

우리는 여기에서 욥의 신조 또는 신앙 고백을 알 수 있다. 그는 때때로 전능하신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자연 종교의 으뜸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계시 종교를 모르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당시 약속된 후손과 약속된 유업에 대한 계시는 단지 여명처럼 희미했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알며, 살아계신 구속자를 믿고, "죽은 자의 부활과 장차 다가올 세상의 생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가 이러한 것들을 알고 이야기했음이 틀림 없다. 이러한 기대를 가지고 그는 스스로를 위로했던 것이지, 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그가 그 환난 가운데서 벗어나거나 이 세상의 행복을 되찾고자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만일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이 일시적인 구출을 뜻한다면, 그가 이 세상에서 다시 번영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매우 명백한 사실이므로, 그가 여기에서 구속자가 "후일에 땅에 서리라"는 것과 하나님을 보리라는 것 그리고 "내가 친히 그를 보리라"는 것은 억지로 사용한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길이 막히고"(8절), "그의 소망이 나무 뽑듯 뽑혔다"(10절)고 방금 말했다. 그리고 이 말을 한 뒤에도 그는 이 생에서의 위안이 모두 끊어졌음을 시사했다(23:8, 9; 30:23).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며 그를 영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데 이것은 시편 49편 15절에 언급되어 있다.

우리는 욥이 바로 이제 축복된 성령의 놀라운 충동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성령은 욥 자신도 놀랄 정도로 그 자신을 딛고 일어서게 했고, 그에게 빛을 주었고, 또 할 말을 주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우리가 전에 읽은 것과 같이 하나님과 그의 섭리에 대한 격렬하고 까다로우며 어울리지 않는 불평을 그의 이야기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즉 이 소망이 그의 영을 진정시키고, 그 폭풍우를 가라 앉혔던 것이다. 그리고 천국에 닻을 내렸으므로 이제부터는 그의 마음의 안정을 지킬 수 있었다.

Ⅰ. 어떠한 의도로 여기에서 욥은 신앙 고백을 하였는가 살펴보자. 이것보다 여기에서 더 적절한 것은 또는 더 유익한 것은 없었다.

1. 욥은 지금 비난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을 그는 탄원하였다. 욥의 친구들은 그를 사특한 자라고 책망했고, 또 악한 자라고 그를 정죄했다. 그러나 그는 무죄할 뿐만 아니라 축복된 부활에 대한 소망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그의 신조, 그의 믿음, 그의 소망, 그리고 그 자신의 양심에 호소했다. "이것은 마귀에게 잡힌 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그는 법정 문 앞에서 더 이상 논쟁하지 않고, 법정의 재판장 곧 모든 심판을 맡고 계시며, 앞으로 오실 구속자에게 호소했다. 그는 그 구속자가 그를 구해주실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날이 오리라는 생각은 "사람에게 판단받는 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작은 일"로 여겨지게 만들 것이다(고전 4:3, 4). 우리가 구속자의 영광스런 출현과, 마지막 날의 그의 구속, 그리고 그 때에는 육체는 물론 명예도 부활하리라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 한, 사람들의 부당한 비방과 책망은 얼마나 참기가 쉬울 것인가!

2. 욥은 이제 고통 중에 있었고, 이것은 그의 원기를 돋구었다. 그가 무거운 고통에 억눌려 있을 때, 그가 "살아날 땅에서 주의 선하심을 보리라"는 믿음은 그를 질식하지 않게 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날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은 자의 땅이기 때문이다.

Ⅱ. 욥은 얼마나 엄숙한 서론과 함께 그 신앙 고백을 시작했는가 살펴보자(23, 24절). 그는 갑자기 호소하던 말을 중단하고, 즐거운 환호를 부르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그 자신의 만족감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이 앞으로 올 후손들을 위해 기록되기를 원한다. "나의 말이, 내가 지금 하려는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이것은 마치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도 같았다. "나는 충고가 되지 못하는 말들을 많이 했음을 인정한다. 나는 그것들이 잊혀지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나를 영예롭게 하지 못하며,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신중하게 말하려 하고, 그것이 온 세상에 알려지며, 앞으로 올 세대들을 위해 영원한 기념으로 보존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씌어지거나 혹은 크고 읽기 쉬운 필체로 작성되어 후손들이 쉽게 읽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흩어져 다니는 종이 조각에 기록되지 않고 "책"에 기록되어 보존되었으면 한다. 혹, 그것이 헐어버리게 된다면 어떻게 하나! 그러니 기념비의 비문처럼 연이나 돌 위에 철필로 새겨졌으면 좋겠다. 그것을 새기는 자는 후손에게 오래 전해질 수 있도록 그의 온갖 힘을 기울이게 하라."

여기에서 욥이 열렬하게 원한 것을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허락해 주셨다. 그의 말이 기록되었다. 그것들이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것이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그 책이 읽혀지든지 누구나 욥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다.

Ⅲ. 욥의 고백은 어떤 것이었는가 살펴보자. 그가 꼭 기록하려던 말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다(25-27절).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욥은 구속자의 영광을 믿었고, 그 자신도 거기에 참여할 것을 믿었다(25절).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다시 말해서 그가 존재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시니 후일에(마지막 날에 또는 장차)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다." 그는 일어서실 것이다. 또는 후일에(즉, 때가 차면: 복음의 날은 마지막 섭리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마지막 때"라고 불리운다) 땅 위에 오실 것이다. 이것은 구속자의 성육신을 가리킨다. 또는 땅으로부터 들리시거나(이라는 것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가리킨다), 또는 땅에서 일어나실 것이다(이것은 그가 부활한 것을 가리킨다). 또는 우리가 보통 이해하고 있듯이, 마지막 때에 땅 위에 나타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며, 모든 사람이 그 눈으로 그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땅 가까이 오실 것이다. 그는(문자 그대로) 티끌 위에 그의 모든 적들 위에 설 것이다. 그리하여 그 적들은 그 발 밑의 티끌처럼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들을 밟고 이기실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자.

(1) 타락한 자를 위한 구속자가 계시다. 그 구속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구속자를 나타내는 "고엘"(Go l)이라는 단어는 원래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 사람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 그 친척의 저당잡힌 기업을 도로 회수해 줄 권한을 가지고 있다(레 25:25). 우리의 천국의 기업도 죄로 인해 몰수되었다. 우리 스스로는 그것을 결코 다시 살 수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다시 사 줄 수 있는 우리의 근친이 되신다. 그는 우리의 빚을 갚아 주시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켜 주셨으므로, 그 저당잡힌 것을 회수해 주시고, 새로운 기업을 마련해 놓으셨다. 우리 몸 역시 구속자가 필요하다. 우리는 죄로 인해 죄 아래서 팔린 것이다. 우리 주 예수는 우리를 위해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어 우리를 다시 사셨음을 선포하셨으니, 그는 진실로 우리의 구속자가 되신다.

(2) 그는 살아 계신 구속자이시다.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듯이 우리는 또한 살아 계신 구속자에 의해 구원되었다. 그는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므로 끝까지 우리를 구하실 수 있다. 그 분은 산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히 7:18; 계 1:18). 우리는 죽어가나 그는 살아 계신다. 그리고 그는 "그가 사셨으므로 우리도 살 것이라"는 것을(요 14:19) 확증해 주셨다.

(3) 은혜로 말미암아 이 구속 사업에 참여할 자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선한 동기 위에서 그 구속자를 그들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욥은 그의 모든 재산과 모든 친구들을 잃었을 때에도 그리스도로부터 떠나지 않았고, 또한 그와의 관계도 끊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나의 구속자이시다." 그의 모든 친척들이 그를 버렸을 때에도 그 근친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으므로, 그는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4) 우리는 구속자와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그것을 아는 자들은 승리를 거두며, 모든 슬픔을 평정시킬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내가 알기에는"(그가 바로 이 일에 대해 확신을 가진 자로서 얼마나 자신 있게 말하는가 보라)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다." 그의 친구들은 때때로 무지하게 혹은 헛된 지식으로 그를 꾸짖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가 그의 구속자라는 것을 충분히 그리고 훌륭히 알고 있었다.

(5) 후일, 마지막날, "지체하지 아니할 때가" 올 것이다(계 10:6). 이것은 우리가 매일 관심을 가지고 생각해야 할 날이다.

(6) 우리의 구속자는 그날에 땅에 또는 땅 위에 서서 죽은 자들을 무덤으로부터 불러 모으실 것이며, 그들에게 확고한 지위를 정해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모든 심판이 맡겨졌기 때문이다. 그는 마지막에 땅이 큰 불로 망한 잿더미 위에 서게 될 것이다.

2. 욥은 구속의 행복을 믿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믿는 자들이 영광스럽게 일어나 하나님의 환상과 결실 속에서 온전히 축복 받게 될 때에 그 자신도 영예를 얻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는 이러한 믿음을 그 자신에게도 적용시켰다.

(1) 그는 무덤 속에서 그의 육신이 썩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는 무관심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것에 대해 거룩하게 언급하고 있다. "나의 이 가죽"(이미 닳아 없어져 잇꺼풀 밖에는 남지 않은, 20절) "이것이 썩은 후에"(그는 17장 14절에서 구더기와 무덤이 그것을 썩게 하는 것에 대해 말했다), 하나님을 보리라. 이것(즉 이 육신)이라는 단어가 덧붙어 있다. "비록 그들이 이것이며, 이 그림자(17:7), 내 손을 얹은 이것이 썩게 할지라도" 또는(그의 약하고 기운 없는 사지를 가리키면서) "너희가 보는 이것을 너희 마음대로 부르라. 나는 그것이 곧 구더기의 잔치감 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썩지 않지만 우리의 몸은 썩어야 한다. 욥은 그가 믿고 바라는 부활의 영광이 더욱 밝게 빛나리라는 것을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육신에 죽음이 다가올 뿐 아니라, 그것이 무덤 속에서 썩어 없어지리라는 것을 자주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것이 부활하리라는 소망을 위축시켜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처음에 사람의 몸을 만든 것과 같은 권능이 그것을 그 흙으로부터 다시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이처럼 돌보고 음식을 공급해 주는 이 몸은 곧 썩어질 것이다. "내 마음이"(욥은 말하고 있다) "조급하구나"(27절). 몸의 가장 깊숙이 있는 것들이 아마도 제일 먼저 썩을 것이다.



(2) 그는 죽음과 무덤 저편에 있는 행복에 대한 소망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내가 깨어난 후"(난외에 적혀 있는 대로),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1] 영혼과 몸은 함께 다시 살아날 것이다. 무덤에서 썩어야 하는 몸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일어날 것이다. "내가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역주. 우리말 개혁 성경에는 "육체 밖에서"라고 번역되었지만, 영어 KJV 성경에서는 육체 안에서 in my flesh라고 되어 있다). 분리된 영혼은 하나님을 보기 위한 눈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마음의 눈이다. 그러나 욥은 육체의 눈으로 "육체에 있는 내 눈으로" 그를 보리라고 말하고 있다. 즉 죽은 바로 그 몸이 참된 육체로, 그러나 저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에 합당한 영광된 몸인 "신령한 몸"으로써(고전 15:44), 다시 일어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체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육체를 위해 이러한 영광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2] 욥과 하나님은 함께 다시 올 것이다. 내가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즉 영광을 입으신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곧(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인간의 눈으로도 볼 수 있는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리라." 비록 무덤 속에 있는 몸은 초라하고 비참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환상 속에서 존귀하고 행복하게 될 것이다. 욥은 그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음을 불평했으나(23:8, 9), 영원히 그를 만나 보지 않게 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면서 곧 그를 보게 되기를 바랬다. 그리고 이 현재의 흑암과 거리감이 걷힌 후에 그를 보게 되는 것은 더욱 반가운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며, 그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게 되며, 더 이상 거울로 희미하게 보지 않고, 얼굴을 맞대고 보리라는 것은 축복받은 자의 축복이다. 거룩한 욥은 이 일을 얼마나 기쁘게 이야기하고 있나 보라(27절). "내가 친히 그를 보리라." 다시 말해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만족과 함께 그를 보고 기뻐하리라. "나는 그를 특이한 광경과 함께 나의 하나님으로서 보리라"(계 21:3).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저희 하나님이 되리라." "저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나"(요일 3:2), 저희 스스로 그를 보게 되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첫째, "그를 대신한 다른 사람이 아닌 그를 볼 것이다. 즉 그의 원형이나 상징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을 볼 것이다." 영광을 입은 성도들은 그들이 속임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것-"거짓된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완전히 확인한다.

둘째, "나를 대신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가 그를 보리라. 비록 내 살과 몸이 없어졌을지라도, 나는 대리인이 필요하지 않다. 나는 내 자신의 눈으로 친히 그를 보리라." 이것이 바로 욥이 바라는 것이었고, 또한 진심으로 원하는 것으로서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의미가 마지막 구절에 담겨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다시 말해서 "나의 모든 소망을 요약한다면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것이 내 모든 소망을 장식하고 완성할 것이다. 내 소망은 이것이다. 이것 외에는 더 바랄 것이 없다. 그것으로 모두 충분하다." 이러한 말로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는 끝난다.

Ⅳ. 욥은 이것을 그의 친구들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그의 신앙 고백은 그에게 위안을 주나, 그를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경고와 두려움을 주었다.

1. 그것은 그들이 더 이상 그에게 불친절한 대우를 하지 말라는 그들에게 주는 경고의 말이었다(28절). 욥은 그들이 말한 것에 대해 책망했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들이 그들 스스로를 바로 잡기 위해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그리고 서로 어떻게 대해야 하는 가를 그들에게 말해 주고 있다.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꼬? 일의 뿌리가, 또는 말의 뿌리가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서도, 왜 우리가 그를 책망하고 정죄하여 그를 근심케 하고 화나게 하겠는가?" 이것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지시하고 있다.

(1)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모든 일의 뿌리가 우리 안에 있지 않는가를 살피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마음에 있는 은혜의 원리를 활발히 진척시키고 명하는 것은 나무에게 있어서 뿌리와 마찬가지로, 우리 믿음에 있어서 필요한 일의 뿌리이며, 그것은 그것의 견고성과 결실에 의해 좌우된다. 하나님과 우리 형제에 대한 사랑, 그리스도 안의 믿음, 죄에 대한 증오-이러한 것들이 일의 뿌리이다. 이 밖의 것들은 이러한 것들에 비해 잎에 지나지 않는다. 참된 경건은 필요한 한 가지 일이다.

(2) 우리는 형제에 대한 우리의 처신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 곧 어리석음과 연약함과 허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안에도 일의 뿌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러한 자들을 학대하는 것이 우리에게 해롭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 작은 자들 하나라도 거스리는 자들에게 화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격노하시며 그것을 갚아 주실 것이다. 욥과 그의 친구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견해는 달랐지만, 그들은 일의 뿌리와 다른 세상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러한 차이점으로 해서 서로를 학대해서는 안 되었다.

2. 그것은 그들에게 위협의 말이었다. "동무들을 때리다가"(마 24:49) 들키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매우 두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칼을 두려워할지니라"(29절). 그것은 사방으로 번쩍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칼이다. 너희가 그것으로 처벌받지 않도록 두려워하라. 선한 자들은 놀라며, 죄로부터 떠나기 위해 전능자의 위협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것이 그들의 형제를 경솔하게 비판하는 죄일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마 7:1; 약 3:1). 그들의 형제에게 화를 내고 무례하게 행하며 그들을 비방하고 그들에 대해 악의를 품는 자들은 그것이 그들이 받을 진노이며 그것이 어떠한 일을 가장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행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1) 그들은 이 세상에서 그에 대한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칼의 형벌을 부른다." 분노는 심판자의 칼을 받게 되는 범죄를 야기시킨다. 하나님은 때때로 그 자신이 그것을 보복하시며, 긍휼을 베풀지 않는 자들은 긍휼을 얻지 못하게 된다.

(2)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그것은 더욱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이것으로써 우리는 현재의 세상에서 뿐만이 아니라, 미래의 세상에서도 심판이 있어서, 가혹한 말은 기필코 형벌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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