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대답(욥기 16:1-5)
욥과 그의 친구들은 논쟁자들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그 방식대로, 서로의 의견과 지혜와 처사를 과소평가하고 있다. 논쟁이 오래 벌어질수록 그것은 더욱 가열된다. 이처럼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 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 엘리바스는 욥의 이야기가 무료하며, 무익하고,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욥도 그의 말을 그것과 마찬가지로 여기고 있음이 여기에 드러나 있다. 그렇게 하기는 쉬우면서 그것은 끝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cui bono?-즉 그것에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그것은 사람의 감정을 격동케 하나, 판단력을 잃을 뿐만 아니라, 진상을 규명해 낼 수도 없게 한다. 여기 욥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엘리바스를 책망하고 있다.
1. 쓸데 없이 말을 반복한 것에 대해서였다(2절).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노라. 네가 말한 것은 내가 이미 들은 것이고, 네 스스로가 전에도 또한 말했던 것이다. 네 말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계속 되풀이해 온 말이다." 욥은 그것이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 어느 것과 같이, 그의 인내를 크게 시험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처럼 반대편이 같은 의견으로 설득시키려 하는 것은 격노와 지겨움을 초래한다. 그러나 교사들에게는 가끔 그런 것이 필요하고, 더욱이 "경계의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여야 하는" 배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조금도 서글픈 일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다시 들으면 들을수록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많은 것들을 들어 왔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것들을 더 잘 이해하고 기억하게 되었고, 또 그것들에 의해 더욱 감동되고 더 많은 영향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2. 그들의 서투른 조언에 대해서였다. 그들은 욥을 안위하기 위해 왔으나, 그들은 그것을 매우 서투르게 진행시켰다. 그리고 그들이 욥의 경우를 다룰 때 그것을 매우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너희는 다 번뇌케 하는 안위자로구나. 그리하여 고통을 진정시켜 주기보다는 더욱 상심케 하는도다." 환자에게 극히 불행한 일은 그의 약이 독약이 되며, 그의 의사가 그 병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다. 욥이 여기에서 그의 친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모든 피조물에게 진실로 해당된다. 즉 우리는 모두 하나님과 비해 볼 때, 번뇌케 하는 안위자가 되는 것을 때로 경험할 것이며,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죄책감에 사로 잡히고 양심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 속에 묶여 있을 때, 우리를 진정으로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은 축복된 성령 뿐이다. 성령이 없는 안위는 번뇌케 하는 것이며, 무거운 마음에 노래를 불러 주는 것이므로 헛된 것이다.
3. 계속 무례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욥은 "허망한 말이 끝나기를" 바랬다(3절). 허망한 말이라면 처음부터 꺼내지 않는게 좋으며, 빨리 끝날수록 더 나은 것이다. 유익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지혜로운 자들은 또한 그들이 그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충분히 말한 때와 그것을 중단시켜야 할 때를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지혜롭다.
4. 아무런 근거 없이 완고했기 때문이었다. "네가 무엇에 격동되어 이같이 대답하는고?" 엘리바스처럼 특별한 증거도 없이 다른 사람의 범죄함을 책망하고, 외적인 상황만을 살피고는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판단하고, 또 거듭 반복하여 반박하는 말을 하는 것은 무례하고도 책임성 없는 일이다.
5. 그의 형제가 그의 간섭을 받기를 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도 그의 형제에 의해 간섭 받기를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형제가 그를 간섭함으로써 우정에 대한 신성한 법을 깨뜨렸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신랄한 책망으로서 매우 감동적이다(4, 5절).
(1) 욥은 그의 친구들이 잠시동안 그와 위치를 바꾸어 그의 영혼의 자리에 그들의 것을 대치시켜 생각해 주기를 원했고, 그들이 그처럼 번뇌하고 있으며, 그는 그들처럼 편안한 위치에 있다고 상상해 주기를 원했다. 이것은 어렵거나 낯선 가정이 아니라, 사실을 빨리 규명해 낼 수 있는 방법이다. 매우 이상하고 갑작스럽게 그리고 자주 인간의 일들은 변하며, 체바퀴 돌 듯 그것은 끊임없이 바뀐다. 우리 친구들의 슬픔이 어떠한 것이든지 우리는 그들을 동정하여 우리 자신의 슬픔으로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언제 그런 슬픔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2) 그들이 그와 같은 처지에 있다면, 그가 그들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보임으로써, 욥은 그들의 태도가 그에 대해 불친절했음을 시사했다.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다." 몰락한 자를 짓밟기는 쉬운 일이다. 그리고 극심한 고통과 환난에 처한 자들이 한 말을 책잡기도 쉬운 일이다. "너희가 나를 친 것과 같이 나도 말을 지어 너희를 칠 수 있다. 너희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겠으며, 어떻게 그것을 견디겠는가?"
(3) 이러한 경우에 그는 그들에게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말해 줌으로써, 그들의 행해야 할 바를 알려 주었다(5절). "내가 너희를 강하게 하며, 너희의 번뇌를 격동케 하는 말이 아니라, 그것을 진정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최선의 말을 해 주겠다." 고통을 당하는 자들은 양상이 달라졌을 때 그들이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속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행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명령에 대한 의무를 행할 때보다 우리가 그 혜택을 요구하게 될 때, 우리는 그 명령의 합당함과 중요성을 더욱 쉽게 느낄 수 있다. 고통 당하고 있는 형제들에게 우리가 행할 의무는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1]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확신을 가지도록 격려해 주고, 그들의 위축된 영을 도와 주기에 합당한 말을 하고, 행함으로써 그들을 강하게 하기에 최선을 기울여야 한다. 믿음과 인내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들을 강하게 한다. 그 어떤 도움보다도 하나님의 은총이 그 연약한 자를 굳게 세워 주신다.
[2] 우리는 그들의 번뇌, 즉 번뇌하는 이유를 알아 위로를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것으로 인해 격노하고 있는 그들을 진정시켜 주어야 한다. 좋은 말은 비용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슬픔을 당한 자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친구들이 그들을 염려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위로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 슬픔을 함께 나눌 때 그 짐이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비록(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무자비한 말이 뼈를 꺾지는 못할지라도, 친절한 말은 꺾인 뼈를 기쁘게 해 줄 수는 있다. "지식을 지닌 자의 혀는 곤고한 자에게 들려 주는 적합한 말"을 알고 있다.
욥의 근심(욥기 16:6-16)
욥의 불평은 여기에서도 그의 다른 대화 속에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비탄스럽다. 그는 그것을 숨겨야 할지 또는 폭로해야 할 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에게는 기분과 상황에 따라 어느 때는 이것이 또 어느 때는 저것이 위안의 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욥은 그 어느 방법으로도 위안을 얻을 수가 없었다(6절).
1. 때로는 근심을 폭로했을 때 마음에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내가 말을 하여도"(욥은 말한다)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며, 내가 불평을 털어 놓는다고 해서 내 영이 조금도 편해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내가 말한 것이 오해를 받아 내 근심을 더하게 하는구나."2. 또 어떤 때에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고통을 덜어 주며, 더 빨리 그것을 잊게 한다. 그러나(욥은 말하고 있다) "내가 잠잠한들 그것이 내 고통을 덜어 주지 못하니 어찌 평안하랴?" 만일 그가 불평을 털어 놓는다면, 그는 성미가 급한 자라고 책망받으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또 침울한 자라고 책망 받았다. 또 그가 고결할지라도 그것이 그의 잘못으로 간주되었다. 그가 그들의 책망에 대답하지 않으면, 그의 침묵은 그의 죄를 시인하는 것으로 간주 되었다.
여기에 욥의 근심에 대한 슬픈 진술이 나와 있다. 이와 같은 탄식을 할 필요가 없는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께 찬미를 돌려야 마땅하겠는가? 욥은 다음과 같은 일들을 호소하고 있다.
Ⅰ. 그의 가족들이 흩어졌다(7절). "주께서 나를 곤고케 하시었다. 그리하여 나는 말하기에도 지치고, 참을성도 지키기가 어렵다. 또 친구들이나 인생 자체에 대해 싫증을 느끼고 있다. 세상 나그네길이 너무 괴로우므로, 나는 이제 지쳐버렸다." 그의 무리가 패괘케 되고, 그의 자손과 하인들이 죽임을 당했으며, 그 나머지 하인들 마저 모두 흩어져 버렸다는 사실은, 그 무엇보다도 그의 인생을 싫증나게 했다. 선한 백성들의 무리가 믿음의 일을 위해 그의 집에 모이곤 했었으나, 이제는 모두 흩어져 버렸고, 그는 안식일을 침묵과 고독 속에서 보냈다. 그는 많은 무리들을 얻었으나, 그들은 오히려 없으니만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가 황폐케 되자, 개가를 부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무리를 패괘케 한 그 일에서 하나님의 손을 보아야 하며, 또 그것을 시인해야 한다.
Ⅱ. 그의 육신은 병과 고통으로 쇠약해졌다. 그러므로 그는 뼈와 가죽만 남은 앙상한 모습이 되었다(8절). 그의 얼굴은 주름이 잡혔으나, 그것은 나이 때문이 아니라 고통 때문이었다.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나이다." 그의 몸은 온통 심한 종기로 곪아 있었으므로 그의 "파리한 모양이 일어났다." 즉 전에는 살 속에 묻혔던 그의 뼈가 드러나게 되었다(33:21). 그는 이것이 "그의 죄를 증거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그의 친구들이 그를 사악한 자로 비방하게 되는 그 증거가 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는 "그것들은 나를 위한 것이며, 내 호소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다." 혹은 "그것들은 내가 시들어가고 있어 곧 죽게 되리라는 것을 나에게 증거하고 있다."
Ⅲ. 그의 대적이 그를 두렵게 하며, 위협하고 놀라게 했다. 그리고 무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그에게 온갖 분노를 표시하였다(9절).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었다." 그러나 이 대적은 누구인가?
1. 엘리바스였다. 그는 욥에게 매우 분노한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는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 분노의 표시를 스스로 표현했을 것이다. 적어도 그가 한 말은 욥의 선한 이름을 갈갈이 찢었고, 그에게 던져 준 것은 단지 공포밖에는 없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욥을 책망할 것을 찾아내기에 급급했고, 그와 나머지 사람들은 그를 야비하게 취급했다.2. 또는 사탄이었다. 그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대적이 되었다. 아마도 그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어떤 사람들의 견해처럼) 우리 주님을 위협한 것과 같은 환영으로 나타나 욥을 위협하여, 동산에 있는 그를 번뇌케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탄은 그로 하여금 이처럼 하나님을 저주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욥이 말한 대적은 사탄을 의미한다고 봐도 틀리진 않을 것이다.
3. 또는 하나님인지도 모른다. 만일 그가 의미한 것이 바로 하나님이었다면, 우리는 이 표현이 그가 말한 어느 내용과 마찬가지로 정말 무례하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창조하신 것을 그 어느 것도 미워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욥의 암담한 마음은 이처럼 그로 하여금 전능자를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을 대적으로 인식하는 것보다, 선한 자에게 더 슬픈 일은 없다. 왕의 진노가 죽음의 사자로 느껴진다면, 왕의 왕이 되시는 분의 진노는 어떠하랴!
Ⅳ. 그 주위에 있는 모두가 그를 학대했다(10절). 그들은 마치 그를 산 채로 삼키려는 듯이, 그를 삼키고자 입을 열고 그에게 다가왔다. 이처럼 그들의 위협은 두려웠으며, 그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매우 모욕적이었다. 그들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모욕을 그에게 퍼부었고, "그 빰을" 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공모로 행해졌던 것이다. 비열한 자들까지도 "저희가 서로 모여 나를 치도다"(시 35:15). 많은 옛사람들의 견해대로 여기에서의 욥은 그리스도의 원형이 되고 있다. 즉 "그들이 내게 그 입을 벌리고"(시 22:13),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미 5:1)라는 이 표현은 고통을 당할 그리스도의 일을 예언하는 것으로서, 글자 그대로 그것이 이행되었던 것이다(마 26:67). 그를 괴롭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생겼던가!
Ⅴ. 하나님은 그의 소망대로 그를 그들의 손에서 구해 주시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손에 붙이셨다(11절). "하나님이 나를 악인의 손에 붙이셨구나." 그것이 위로부터 허락된 일이 아니라면 그들은 그를 칠 능력을 행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다윗이 시므이의 저주를 받을 때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은 소홀히 여기고 그들에게 허락을 내리신 하나님을 바라 보았다. 그러나 그의 대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대적인 자들이 그를 칠 능력을 지니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고, 거의 가혹하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때로 악인들을 이용하시어 서로 칼을 치게 만드시며(시 17:13), 그의 막대기로 그의 자손을 치게 하신다(사 10:15). 여기에서 또한 욥은 그리스도의 원형이 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악인의 손에 붙이심을 당하여,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것이다(행 2:23).
Ⅵ. 하나님은 그를 악인의 손에 붙이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손에 붙이시어 두려운 일이 임하게 하셨다(12절).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뻐하면서 내가 평안하였고, 풍족함 속에서도 불평하고 부족하게 여기는 가운데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빼앗긴 자들처럼 불평하고 불안해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나를 꺾으시며, 고통의 늪에 빠뜨리시고, 내 몸을 갈갈이 찢으시는도다."
1. 하나님께서 욥을 괴롭게 하시는 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노하지 않으셨다 해도, 하나님께서(노기에 차 있는 힘센 자가 아이를 빼앗는 것과 같이) "그 목을" 잡아 던지시고, 그를 부숴뜨리실 때,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행하신 이 항거할 수 없는 권능 가운데 개가를 올리고 계신다고 생각했다.2. 마치 하나님께서 편파적인 태도를 취하시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나를 다른 인간들과 구별하시사, 이처럼 가혹히 행하시도다. 그가 나를 과녁으로 삼으시고 그 과녁에 화살을 쏘시면서 기뻐하시는구나. 내게로 겨누어진 화살은 그냥 스쳐가지 않고, 마치 내가 동방 사람들 중 가장 큰 죄인인 듯이, 또는 내가 단 하나의 표적인 듯이 내게로 와서 꽂힌다." 하나님께서 그를 과녁으로 삼으셨을 때, 곧 "그 살은 그를 사방으로 쏘았다." 하나님께서 그 살들을 지휘하시어 틀림 없이 그가 세우신 과녁을 맞히도록 하셨다. 우리의 적이 누구든지 간에, 우리는 그들을 하나님의 화살로 간주해야 하며, 그를 화살의 방향을 지시하는 자로 보내야 한다. "그것은 여호와이시다. 그로 하여금 그가 선히 여기시는 것을 행하시도록 하라."
3. 마치 하나님께서 잔인한 자와 같았다. 그리고 그의 권능을 항거할 수 없듯이, 그의 진노 또한 냉혹한 것 같았다. 마치 그가 그 가장 연약한 부분을 다치시고자 하여 지극한 통증과 함께 "그의 허리를 뚫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의 신장 부위에 있는 결석이 신장의 고통을 주었을 것이다. 마치 하나님이 그를 위해 조금의 자비도 남겨 놓지 않으신 것처럼, 그는 인정을 베풀지 않으셨고, 또 그 지독한 고통을 조금도 덜어 주지 않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가장 극심한 아픔 가운데 꼭 죽이려고 작정하신 것 같았다. 사람들이 들짐승을 잡아 죽이고 배를 가른 후 쓸개를 보고 얼굴을 찡그리며 꺼내버리듯이, "그가 내 쓸개로 땅에 흘러나오게 하시는구나." 그는 그의 피가 귀하지도 않으며 오직 미움받는 물건처럼 뽑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4. 마치 하나님은 부당한 자인 것 같았고, 또 그의 처사에 대해 만족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14절). "그가 나를 꺾고, 다시 꺾고 계속 내게 상처를 입히시는구나." 그에게 처음 온 환난도 이와 같았다. 즉 한 사자가 슬픈 소식을 전하는 동안 또 다른 환난의 소식이 이르렀었는데, 그러한 상태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매일 새 종기가 생겼으므로 그의 환난이 끝날 전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용사같이" 그에게 달려든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용사 앞에 설 수도 없었고, 또 감히 대항할 수도 없었다. 하나님은 마치 가난한 이웃을 짓밟고 그들을 학대한 옛 용사들과도 같았다. 선한 사람들도 그들이 극심한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을 가혹한 자로 생각지 않으려고 애쓴다.
Ⅶ. 하나님은 그의 모든 영예와 위안을 빼앗으시고, 그 주위의 환경을 고통스러운 것이 되도록 섭리하셨다. 사람들은 그들의 고통을 감춤으로써, 예전처럼 고개를 높이 들고 기쁜 안색을 지음으로써, 그 고통을 감소시킬 수 있다. 그러나 욥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는 그 충격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진실로 회개하는 자로서, 또한 진실로 인내하는 자로서 강한 하나님의 손 아래 스스로를 굴복시켰다(15, 16절).
1. 그는 그의 모든 장식물과 훌륭한 옷을 거들떠 보지 않았다. 그는 또한 평안하거나 화려한 장신을 구단 의복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서, 굵은 베를 꿰어 매어 그 피부에 덮었다. 그런 옷이 이처럼 불결한 몸에 매우 합당하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이처럼 종기가 난 몸에 비단 옷을 걸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보다는 베옷이 더 잘 어울렸다. 병과 노령으로 그리고 욥처럼 "시들고 파리한 모양"으로(8절) 고통을 당하지 않은 자들은 진정 화려한 복장을 즐긴다. 그는 베옷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꿰어 매어 입어, 고통이 계속되는 한 굴복하는 태도를 지속시키고자 하는 결심을 표했다.2. 그는 어떤 영예로운 것을 주장하지 않고서, 겸손하게 하는 섭리 밑에 스스로 굴복했다. "그는 그의 뿔을 티끌에 더럽혔고," 그의 권세에 대해 그리고 능력과 지위에 대해 베풀어졌던 존경을 얻기를 거절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환경을 침체시킬 때,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낮추어야 한다. 섭리의 뜻을 거슬려서 뿔을 높이 들다가 부러뜨리게 하느니 보다는, 고개를 숙여 뿔을 티끌 속에 묻어 버리는 것이 더 낫다. 엘리바스는 욥을 오만하고 무례한 자이며, 환난 속에서도 굽힐 줄 모르는 자라고 묘사했다. "아니다." 욥은 말했다. "나는 그보다 더 나은 것들을 알고 있다. 이제 내게는 티끌에 앉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3. 그는 환락을 극히 부당한 것으로서 내어 쫓았고, 스스로 눈물을 뿌렸다(14절). "내 죄로 인해, 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그리고 내 친구들의 불친절함으로 인해 계속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구나. 이것이 내 눈꺼풀에 죽음의 그늘을 가져왔도다." 그는 그의 외모에 상관하지 않고 울었을 뿐만 아니라,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이런 면에서 그는 또한 그리스도의 원형이 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슬픈 자로서 많은 눈물을 흘렸으며, 애통하는 자를 축복하면서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양심의 증거(욥기 16:17-22)
욥의 상태는 매우 비참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를 도와 주고 위로해 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는가? 아니, 있었다. 그는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Ⅰ. 욥은 항상 올바른 길을 걸었으며, 결코 중한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양심의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욥처럼 그의 연약한 죄를 순순히 시인하는 자는 없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아도 그 자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비참하게 된 데에 대한 그의 중한 죄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17절).
1. 욥은 깨끗한 양심을 지니고 있었다.(1) 사람들에게 대해서 결백했다. "내 손에는 포학이 없구나. 나는 재물을 부당하게 얻으려 하거나 간직하고자 하지 않았다." 엘리바스는 그를 포학하고 강포한 자로 취급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 욥은 말했다. "나는 결코 어떤 사람을 해한 일이 없으며, 강포하게 재물을 취하는 것을 항상 혐오했다."
(2) 하나님께 대해 결백했다. "또한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우리의 손에 포학"이 있는 한, 우리의 기도는 정결할 수가 없다(사 1:15). 엘리바스는 그의 믿음이 위선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욥은 믿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행위인 기도에 대해 상세히 밝히면서 그의 기도가 정결했음을 자백했다. 비록 그의 기도가 연약한 것이긴 했지만, 결코 거짓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사람들에게 그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며, 그 보답을 얻는 바리새인들의 기도와는 달았다.
2. 욥은 그 자신의 결백함을 단언하면서, 만일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부끄러움과 혼돈에 대한 엄숙한 저주가 그에게 임할 것을 원했다(18절).
(1) 만일 그의 손에 포학이 있었다면, 그는 그것이 숨겨지지 않기를 원했다. "땅아, 내 피를 가리우지 말라." 즉 "내가 흘렸다고 생각되는 다른 사람의 무죄한 피를 가리우리 말라." 살인자는 밝혀질 것이다 "만일 내가 그 죄를 범했다면," 욥은 말했다. "그것을 밝혀지게 하라"(창 4:10, 11).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낼"(사 66:21) 날이 올 것이나, 선한 자는 그 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2) 만일 그의 기도에 부정함이 있었다면, 그는 그것이 용납되지 않기를 원했다. "나의 부르짖음으로 쉴 곳이 없게 되기를 원하노라."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 법도대로 그는 기꺼이 심판을 받고자 하였다. 그의 이 말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추론해 낼 수 있다. 즉 그는 매정한 비난으로 그를 상심케 한 그의 친구들에게 그의 죽음을 책임 지우고, 그의 피에 대한 죄를 그들에게 전가 시키면서, 하나님께 그것을 갚아 주시기를 간청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피의 부르짖음이 숨겨지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 피에 대해 살피시는 하나님께 상달 되기를 원했다.
Ⅱ. 그는 그의 결백함에 대해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호소할 수 있었다(19절). 만일 하늘로부터 우리를 위한 증인을 얻을 수 없다면,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증인은 우리에게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광대하시며," 우리는 우리의 재판장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은 욥을 기쁘게 해 주었다. 형제로부터 책망을 받을 때, 그의 결백함을 아시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사, 그것을 조만간에 분명히 밝히시리라는 사실은 그 선한 자에게 말할 수 없이 큰 위로를 준다(요 5:31, 37 참조). 이 한 사람의 증인이 다른 천 사람보다 낫다.
Ⅲ. 욥에게는 앞에 나아가 흉금을 털어 놓을 수 있는 하나님이 계셨다(20, 21절).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살펴보자.
1. 그와 그의 친구와의 관계는 어떠하였는가? 그는 어떻게 해야 그들과 허물없게 지낼 수 있는가를 알지 못했다. 또한 그들에게 훌륭한 조언을 듣거나, 그들로부터 공평한 대우를 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다. "나의 친구들이(그들은 스스로를 친구라 불렀다) 나를 조롱하는도다. 그들은 나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나를 공격하고 있다. 그들은 나를 거슬러 조언한다. 그리고(그 단어가 의미하듯이) 나를 멸망시키려고 모든 기교와 능변을 사용하고 있다." 친구들의 조롱은 적의 조롱보다 더욱 큰 상처를 준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일을 예측하고 미리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2.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하였나?
(1) 그는 단지 하나님께서 그의 슬픔을 인지해 주실 것을 의심치 않았다.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는도가." 그는 많이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16절). 그리고 이제 여기에서도 그는 왜 눈물을 흘렸고, 무엇을 원하여 그렇게 했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의 슬픔은 세상적인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좇으려는 데서 기인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와 앞에서 울고 그에게 상한 심령의 제물을 드렸다. 눈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 성별된 것은 괴로운 영을 편하게 해 준다. 그리고 사람들이 우리의 슬픔을 돌아보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살피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2) 그는 그의 무죄함을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밝혀 주시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21절).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변백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람들이 보통 재판장에게 나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법정에 나갈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면, 그는 이제 틀림 없이 그 앞에 나가 그의 억울함을 호소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심판관이신 하나님은 그의 결백함을 증거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소망은 이사야 50장 7, 8절에 표현된 말과 같았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있으니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복음적인 의미로 풀이하고 있으며, 원문도 그런 의미를 분명히 지니고 있다. "그가 사람과 하나님 사이 곧 인자와 그 친구, 혹은 그 이웃 사이에 변백하시길 원하노라"(즉 변백하실 자가 계시다).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자들은 거리가 멀고 불리한 여건 때문에 그들이 스스로를 변백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그들을 위해 변백해 줄 친구 곧 인자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용납하시리라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Ⅳ. 욥은 그의 모든 고통을 끝맺어 줄 죽음을 내다 보았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죽음이 다가 오는 것을 즐겁게 생각했다. 그는 영원한 상태로 돌아가게 되면, 그에게는 더 좋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수 년이 지나며(나에게는 이미 "해의 수"가 결정되었다)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
1. 죽는다는 것은 "우리가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가는 것"이다. 그것은 여행, 영원하고 긴 여행으로서 이곳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시 이 세상에 돌아올 수 없으며, 또 저 세상을 되돌아 나올 수도 없다.2. 우리 모두는 분명히 그리고 빨리 이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것을 생각하면서 선한 양심을 지킨 자는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백함의 면류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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