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욥기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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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엘리바스의 두 번째 연설(1)(욥기 15:1-16)

엘리바스는 여기에서 욥과 바로 충돌하고 있다. 그것은 욥이 그와 그의 동료들의 말을 반박했으며, 그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그들의 말에 순종하거나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교만한 사람들은 그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시하고 법도를 주는 기회를 얻지 못했을 때는 이처럼 그것을 매우 잘못된 일로 여기는 경향이 있으며, 모든 면에서 그들처럼 말할 수 없는 자들을 무식하고 완고한 자로서, 그리고 아무 쓸모 없는 자로서 비난한다. 엘리바스는 여기에서 여러 가지 중죄를 들어 욥을 책망하고 있는데, 그것은 단지 그가 그 자신이 사곡한 자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Ⅰ. 엘리바스는 욥이 미련하고 어리석다고 하여 그를 책망하고 있다(2, 3절). 욥은 전에 지혜로운 자로 명성이 나 있었으나, 지금은 그의 명성을 완전히 빼앗겨 버린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의 지혜가 그에게서 떠나갔으므로 그의 말은 지나치고 별 유익이 없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빌닷도 그렇게 그의 서두를 시작했고(8:2), 소발도 또한 그러했다(11:2, 3). 논쟁자가 노했을 때는 그의 형제를 "라가" 그리고 "미련한 자"라고 부름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내려질 저주를 잊고서 상대방의 이론을 필요 이상으로 건방지고 우스꽝스러운 것이라고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해 낼 수 있다.

1. 이 세상에는 헛된 지식, 유익함이 없으므로 무가치한 소위 그릇된 과학이 너무도 많다.

2. 이것은 그들 자신의 재능에서 우러나오는 기발한 착상으로서, 그들의 마음을 부풀게 만드는 지식이다.

3. 자기의 머리 속에 어떠한 헛된 지식이 들어있든지 간에, 만일 그가 지혜로운 자로 간주되고 있다면, 그는 그것을 발설해서는 안 되며, 그것이 마땅히 그 자신과 더불어 죽도록 해야 한다.

4. 무익한 이야기는 악한 것이다. 우리는 심판 날에 사악한 말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부주의한 말에 대해서도 해명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유익함이 없는 말, 하나님이나 우리 이웃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며, 우리들 자신을 의롭게 하지 않는 말, 그리고 교화시키는 일에 있어서 결코 소용이 없는 말은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 바람과 같이 가볍고 허황된 말들, 특히 동풍처럼 해치기 쉽고 유독한 말들로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채운다는 것은 해로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야기 속에서 매우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5. 헛된 지식이나 무익한 이야기는 책망받아야 하며, 저지되어야 한다. 특히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것은 가장 합당치 못한 것이며, 그들의 그러한 본보기는 매우 해로움을 끼칠 것이다.

Ⅱ. 엘리바스는 욥이 경건치 못하여, 믿음이 없다고 하여 그를 책망하고 있다(4절).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폐하였구나." 다시 말해서 "마땅히 네가 지녀야 하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을 폐하여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믿음이 어떻게 요약되어 있는가를 보라.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그 앞에 묵도하는 것으로서, 전자는 가장 필요한 원칙이며, 후자는 가장 필요한 실천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곳에서는 그 어느 유익도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기도없이 살아가는 자들은 분명히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자들이다.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 자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경외하는 일을 폐한 증거를 보인다. 분명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위엄에 대해 경외심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그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도 지니고 있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과 영원에 대한 관심이 없으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간청하지 않는다. 기도하지 않는 자들은 경외하는 일과 은혜 받는 일을 폐한 자들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폐했을 때 죄는 들어오며, 불경으로 향하는 모든 문은 열려진다. 하나님께 약간의 경외심은 가지고 있었다가 그것을 버리는 자들, 즉, 때로 하나님 앞에 묵도를 하다가 그것을 그치는 자들은 더욱 나쁘다. 그들은 어떻게 타락했는가! 그들의 첫 번째 사랑은 어떻게 상실되었는가! 그것은 그들 자신으로부터 나온 일종의 폭력을 시사하고 있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은 그들에게 달라붙으려 하나 그들은 그것을 떼어버린다. 기도가 입 밖으로 나오려 할 때도 그들은 그것을 억압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서 그들의 확신을 좌절시킨다. 양자의 영을 억압하고, 그들의 의무 속에서 취해야 할 자유를 스스로 거부하면서, 기도를 빼거나 그 속에 몰두하려는 그들 자신을 괴롭히고 방해하는 자들은 묵도하기를 중단한다. 이것은 매우 나쁜 일이다. 그러나 다리오 왕처럼(단 6:7), 다른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을 억압하고 방해하며 그것을 좌절시키는 것은 더욱 나쁜 일이다. 다음과 같은 점에서

1. 엘리바스가 욥을 책망하였다.

(1) 욥 자신의 행실에 대해 책망하였다. 그는 욥이 마치 하나님과 동등한 자인 것처럼 방자하게 하나님께 대해 이야기 했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매우 가혹하게 대하셨다하여 하나님을 격렬하게 비방하였다고 생각했고, 그가 이처럼 자주 그 공정한 재판에 도전하는 것을 보니, 그가 하나님께 대한 모든 믿음을 완전히 저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망은 완전히 그릇된 것이었지만, 여기에는 어떤 구실이 없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기도를 항상 지키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할 뿐만 아니라, 믿음에 있어서의 우리의 성실함과 끈기를 심문할 구실을 찾아내려는 자들에게 기회를 주게 될지도 모르는 경솔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2) 또는 다른 사람들이 그가 주장했던 이론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사실에 관해 책망했다. "만일 사람이 이처럼 심한 고통을 당할지라도 선한 자일 수 있다는 욥의 말이 사실이라면"(엘리바스는 말했다) "모든 믿음과 기도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은 사라져 버린다. 만일 모든 일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라면, 그리고 가장 선한 자가 이 세상에서 최악의 대우를 받을지도 모른다면 모든 사람들은 물론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말 3:14), 내가 내 손을 씻은 것이 실로 헛되도다(시 73:13, 14). 강도의 장막이 형통한다면(12:6) 누가 정직하겠는가? 만일 하나님께 용서하심이 없다면(7:21), 누가 주를 경외할 것인가?(시 30:4) 만일 그가 무죄한 자의 고난을 비웃으신다면(9:23), 만일 그에게 접근하기가 그처럼 어렵다면(9:32), 누가 그에게 기도할 것인가?"

지혜롭고 선한 자들도 맹렬히 논쟁할 때에는 상대방을 책망하는 그들의 의견이 그들로부터 정당하게 나온 것이 아니고, 또 그들이 정말로 상대방을 하다보니 그 상대방을 비난하는 일에서 흔히 불의를 범한다. 이것은 우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2. 이런 부자연스러운 풍자를 바탕으로 해서 엘리바스는 욥이 경건치 못하다고 큰 책망을 세우고 있다(5절). "네 입이 네 죄악을 발설하는구나." 낱말 그대로의 뜻을 보면,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는구나"라고 볼 수 있다. "너는 다른 사람들도 네 자신처럼 하나님과 믿음에 대해 가혹한 생각을 가지도록 가르치는구나."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는" 것은 나쁘며,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더욱 나쁘다(마 5:9). 만일 우리가 악한 생각을 품었다면, 우리 손으로 입을 막아 그 악한 생각을 누르도록 하고(잠 30:32), 결코 그것을 발설하지 않도록 하자. 그것은 하나님을 영예롭지 못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해하도록 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허가장"이 되기 때문이다. 다음을 주목하라.

사람들이 경외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을 폐한다면 그들의 입은 죄악을 내게 된다. 선한 일 행하기를 그치는 자들은 악을 행하는 것을 곧 배운다. 죄악을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로써 스스로를 무장하지 않는 자들로부터 어느 면이나 불의한 것 이외에 그 무엇을 우리가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택하였구나." 다시 말해서 "상인들이 좋은 물건과 함께 섞어서 나쁜 물건도 파는 것처럼, 네가 좋은 말과 나쁜 말을 섞어가며 경건을 보이도록 가장함으로써 네 죄악을 드러내는 구나." 불의한 입은 간사한 자의 혀 없이는 그처럼 많은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뱀은 그의 간교함으로 하와를 속였다(롬 16:18 참조). 간교한 자의 혀는 의도적으로 그리고 신중하게 말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사용한 자들은 그것을 "택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정직한 자의 혀보다 그들 목적을 더 잘 도와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직이 가장 훌륭한 방편이라는 사실이 결국 드러날 것이다.

엘리바스는 그의 첫 번째 연설에서 단순한 추측으로 욥에게 대들었던 일이 있었으나(4:6, 7), 이제 그는 욥 자신의 이야기로부터 그를 대적할 증거를 끌어내고 있다(6절).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그러나 엘리바스는 그와 그의 친구들이 욥을 격노케 했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그들이 지금 트집을 잡고 있는 말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공정하지 못했다. 스스로 정죄하는 자는 가장 심한 정죄를 받는다(딛 3:11; 눅 19:22). 많은 사람들은 그 자신의 혀로 자기를 정죄한 자를 더 이상 위축시킬 필요가 없다.

Ⅲ. 엘리바스는 참을 수 없는 오만과 자만으로써 욥을 책망하고 있다. "나도 너희 같이 총명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 달라"는 욥의 요구는(12:3), 공정하고 타당하며 겸손한 것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욥을 칠 기회를 찾는가를 보라. 욥이 마치 다른 사람보다 더 지혜로운 척 했던 것처럼 오해하고 있다. 욥이 그들로 하여금 지혜를 독점하는 것을 허용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가 그것을 독점하려는 요구를 한 것처럼 생각했을 것이다(7-9절). 그들은 마치 욥이 그 스스로를 모든 인간들보다 다음과 같은 점에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오해했다.

1. 이 세상과 오랜 친분을 맺어온 점에서 오해했다. 그것은 사람에게 더욱 풍부한 경험을 주기 때문이다. "네가 제일 처음 난 사람이냐? 따라서 네가 우리보다 선배이며, 최초의 가장 일찍 난 자로서, 가장 지혜롭고 결백한 자로서의 판단과 고대인의 상식을 알려주기에 더 나은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 네가 아담보다 앞선 자이냐?" 그것을 이렇게도 풀이할 수 있다. "그가 죄로 고통당하지 않았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큰 고통을 당하는 네가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느냐? 네가 지혜처럼 땅이 생기기 전부터 세움을 입었느냐?(잠 8:23 이하) 그 위대한 산들과도 같고(시 36:6), 영원한 땅처럼 움직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 네 의견에 복종하여 허리를 굽혀야 하겠느냐? 네가 우리 중의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세상을 아느냐? 아니다. 너는 우리들과 같이 어제부터 있었던 자에 지나지 않는다"(8:9).

2. 또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한 점에서 오해했다(8절). "하나님의 모의를 네가 들었느냐? 네가 하늘의 내각에 속한 자로서,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행사를 위해 더 나은 변론을 할 수 있는 척하느냐?" 그곳에는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비밀이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헤아리는 척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헤아리는 자들은 매우 무례한 자이다. 그는 또한 욥을 이런 사람이라고 말했다.

(1) 그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은 지식을 그 자신은 가지고 있는 체 하는 자라고 하였다. "마치 너 이외에는 아무도 지혜롭지 못한 것처럼,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 욥은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13:2)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칭찬할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열띤 논쟁자들의 방식대로 그에게로 향해 공세를 퍼붓고 있다. "너의 아는 것이 무엇이기로 우리가 알지 못하겠느냐?"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는 자들에게서 이러한 대답이 나오는 것은 얼마나 당연한 일인가! 그러나 후에 그것을 반성해 본다면 그것은 얼마나 단순한 것들인가!

(2) 모든 논쟁하는 무리들이 서로 자기네들의 은신처로 삼으려하는 옛날 사람들, 곧 존경할 만한 사람들의 흐름을 거역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10절). "우리 중에는 머리가 세기도 하고 연로하기도 한 자가 있느니라. 우리 편에도 조상들이 있다. 교계의 옛날학자들도 모두 우리와 같은 의견을 지니고 있다." 말은 쉽게 하여도 곧 증명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증명될 때에도 진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밝혀지지 않는다. 다윗은 옛날 사람들보다 성경 지식에 더 밝았다(시 119:100).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또는 욥의 이 세 친구들 가운데 한 두 사람은 욥보다 더 연로하므로(32:6), 그들은 그가 그들을 옳다고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그 논쟁자들로 하여금 사소한 물의를 일으키게 했다. 만일 그들이 그들의 적수보다 연로하고 그들의 적수가 태어나기 전에 그들이 안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해도 이것은 그들의 오만하고 횡포한 태도를 정당화시키는 것을 돕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연로한 자라고 해서 반드시 가장 지혜로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32:9).

Ⅳ. 엘리바스는 욥이 그의 친구들의 권고와 위로를 경멸했다고 해서 그를 책망하고 있다(11절). "하나님의 위로를 네가 어찌 작다 하느냐?"

1. 엘리바스는 욥이 그에게 주어진 그와 그의 친구들의 위로를 굉장히 소홀히 여기고, 그들의 모든 말을 진실되고 중요한 것으로 환영하지 않은 것을 나쁘게 여기고 있다. 그들이 어떤 것에 대해서는 매우 훌륭한 말을 들려 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욥에게 적용시켰을 때 그들은 매우 형편없는 위로자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말한 것을 위대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매우 타당한 이유와 함께 그것을 보잘 것 없고 사소한 것으로 여길는지도 모른다. 바울은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저 유명한 이들이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갈 2:6).

2. 엘리바스는 이것, 실상은 매우 귀한 하나님의 위로를 욥이 마치 보잘 것 없는 것으로 경시했던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욥이 하나님의 위로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의 이러한 고통을 참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1) 하나님의 위로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작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위로,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위로, 특히 하나님 안에 있는 위로는 큰 것이다.

(2) 하나님의 위로는 그것 자체가 작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그것을 작게 여긴다면 그것은 매우 비참한 일이다. 영적인 기쁨을 과소평가하고 경시하는 것과, 그 즐거운 나라를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큰 모욕이며, 타락하고 부패한 마음의 증거이다. "온유하게 하시는 말씀을"(엘리바스는 말하고 있다) "네가 어찌 작다하느냐? 너는 그 누구도 가진 척 할 수 없고, 또 알지도 못하는 프로프리엄(proprium)과 알카럼(arcarum)이라는 강심제로 네 원기를 회복하였느냐?" 또는 "하나님의 위로의 효력을 방해하는 어떤 은밀한 죄가 네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느냐?" 세상과 육체를 은밀히 자랑하는 자들 이외에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위로를 경시하지 않는다.

Ⅴ.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과 믿음에 대항한다고 하여 그를 책망하고 있다(12, 13). "어찌하여 네가 마음에 끌리며 이처럼 고상하지 못하고 불신앙적인 말을 하느냐?"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라"(약 1:14).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의 의무로부터 도피하거나 잘못된 곳으로 들어간다면 우리를 끌어 내는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이다. "네가 만일 조롱한다면 그 책임은 네가 져야 한다." 영혼의 전환 속에는 맹렬함, 제어할 수 없는 운동력이 있다. 따라서 타락한 마음은 그들의 확신에 대결하여 억지로 그들을 끌어낸다.

"어찌하여 네 눈을 번쩍이느냐? 어찌하여 너는 반쯤 잠들어 있는 상태에서 듣고 있는 것처럼 네게 말한 것에 대해 그리 부주의하고 소홀히 여기느냐? 어찌하여 너는 우리가 말한 것을 눈여겨 볼 필요도 없는 것처럼 그리 냉소적으로 멸시하느냐? 우리가 말한 것이 그처럼 보잘 것 없느냐. 아니, 네 영으로 하나님을 반대하느냐?"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떠난다는 것은 나쁜 일이다. 그러나 자기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은 더욱 나쁜 일이다. 하나님을 버린 자는 곧 그와 적대 관계에 돌입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너는 하나님과 그의 의와 선하심을 비난하는 말들을 네 입 밖으로 내놓았다." "저희 입은 하늘에 두는 것"이 악인들의 성품인데(시 73:9), 이것은 그 영이 하나님을 반대하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엘리바스는 욥의 영이 하나님을 싫어하여 이전의 상태에서 돌아섰고 하나님께서 그를 다루시는 일에 분노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엘리바스에게는 솔직한 면과 자애로운 면이 부족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이처럼 경건하기로 이름이 나있고, 지금 시련을 겪고 있는 한 사람의 말을 이렇게 무자비하게 판단해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실상 사탄의 편을 드는 것이었고, 사단의 말처럼 욥이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Ⅵ. 엘리바스는 욥이 인간 본성의 공통적인 타락과 불결함 속에 있는 그 자신의 몫을 거부할 정도까지 그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다고 하여 그를 책망하고 있다(1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즉, 깨끗한 척하거나 깨끗한 자기를 발견하리라 기대하느냐? "여인에게서 죄 있는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

1. 의로움은 깨끗함이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도록 만들며 우리 자신을 편하게 한다(시 18:24).

2. 인간은 타락한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깨끗하고 의로운 척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공의에 스스로를 복종시키거나, 그의 은총을 구해야 한다.

3. 인간은 여인에게서 태어나기 때문에 깨끗하거나, 의롭다는 판단을 얻을 수가 없다. 그는 그 여인으로부터 타락한 성품을 물려 받았으므로 그것은 그의 허물과 타락이 되었다. 엘리바스는 이러한 명백한 사실들을 욥에게 설득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욥은 방금 전에 이와 같은 말을 했었다(14:4).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그렇다고 해서, 욥 자신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욥이 사곡한 자이며 악한 자라고 할 수 있는가? 결코 할 수 없다. 사람이 여인에게서 낳기 때문에 깨끗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성령으로 거듭 날 때에는 깨끗하다.

4. 이것을 더욱 명시하기 위해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리고 있다.

(1) 가장 뛰어난 자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불완전하며 불결하다(15절). 하나님은 거룩한 자와 천사들을 신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사용하시나, 그들의 봉사에 의지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위해 새로운 힘과 지혜를 그들에게 제공하지도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스스로는 충분하지 않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은총이 부여해 주는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천군들에게서도 만족을 취하시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리 깨끗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결점과 흠투성이로 보인다.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하다." 카라일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해가 보기에 별들은 빛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 같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햇빛 또한 어떠겠는가!(사 24:23 참조)

(2) 인간은 더욱 그러하다(16절). "하물며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들이겠느냐!" 거룩한 자들도 신뢰를 받지 못한다면, 죄인들은 더욱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셨을 때의 그 상태를 지금도 지니고 있는 천군들이 깨끗지 않다면, 현재 타락해버린 인간은 더욱 그러하다. 아니,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하고 부패한 존재이다. 그리고 그가 회개했다 하더라도,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자신을 증오한다. 죄는 가증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증오하도록 만든다. 죄의 육체도 그러하므로 그것은 "죽은 육체"요, 미운 것이라 일컬어진다. 사람이 돼지 음식을 먹거나, 진저리나는 불쾌한 음료를 마시는 것을 볼 때 그것은 어떤 사람을 병들게 만들 정도로 더러운 것이 아닌가? 이처럼 게걸스럽고도 기쁘게 "불의(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가증한 것)를 마실" 정도로 더럽다. 그것을 인간은 끊임없이 마신다. 그러므로 죄인들이 범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그 노인의 욕구를 채워 주나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그것은 수종증에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의 물과 같다. 사람들은 죄를 지을수록 더욱 죄를 범하게 된다.

 

15:2 없음.

 

15:3 없음.

 

15:4 없음.

 

15:5 없음.

 

15:6 없음.

 

15:7 없음.

 

15:8 없음.

 

15:9 없음.

 

15:10 없음.

 

15:11 없음.

 

15:12 없음.

 

15:13 없음.

 

15:14 없음.

 

15:15 없음.

 

15:16 없음.

 

15:17

엘리바스의 두 번째 연설(2)(욥기 15:17-35)

엘리바스는 욥의 대답을 책망하면서 그가 왜 욥을 견책하는 가에 대한 그의 주장을 여기에 논거해 놓고 있다. 그의 주장은, 악인은 필히 비참하게 되고, 여기에서 비참하게 되는 자는 분명 악인이리라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으므로, 욥도 그러한 자라는 것이었다. 다음을 관찰하라.

Ⅰ. 엘리바스는 이 대화에서 엄숙하게 서두를 꺼내고 있다. 그는 욥이 말한 것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았으며, 높이 평가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욥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리라고는 거의 기대할 수 없었지만 그는 이 대화에서 욥이 주의를 기울여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17절).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그리고 네가 행한 것처럼 무익한 이야기로 변론하지 않겠다." 이처럼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이론은 반박하면서, 자기네들의 이론을 칭찬하는 경향이 많다. 그는 욥에게 가르침을 줄 것을 약속했다.

1. 그것은 그의 경험과 관찰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여러 가지 일 가운데서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인간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를 관찰하는 것은 매우 유익하며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훌륭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우리들 자신이 잘 관찰하여 얻은 유익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그들에게도 유익함을 나누어 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본 것을 설명할 때는 담대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2. 그것은 옛 선조들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었다(18절). "이는 지혜로운 자들이 그 열조에게서 받아 전한 것이라."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와 학식 가운데에서 옛날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 매우 많다. 훌륭한 자녀들은 훌륭한 부모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조상들로부터 배운 것을 우리 후손들에게 전하여 주며, 다음 세대에게 숨기지 말아야 한다(시 78:3-6, 참조). 여러 세대 동안 전해 내려오는 지식의 끈이 어떠한 사람의 부주의 때문에 끊어져 버리고, 그것을 순수하고 온전하게 보존하기 위한 어떠한 대책도 마련해 놓지 않았다면 그 후손들은 많은 타격을 받을 것이다. 엘리바스가 그 예로 든 자들은 실상 "이 땅을 그들에게 준"(19절) 고귀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 하늘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며, 이 땅의 일을 가장 잘 보살필 만한 능력이 있는 자들이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솔로몬과 같이 권세와 권능의 자리에 있었던 자들로부터 슬기로운 지혜가 나왔다. 그러나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한"(고전 2:7, 8) 지혜도 있다.

Ⅱ. 엘리바스는 이 대화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이고자 했다.

1. 지혜롭고 선한 자들은 대체로 이 땅에서 번성한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이 땅이 주어지며, 오직 그들에게만 그것을 맡길 수 있다는 그 사실을 그는 암시하였다(19절). 그들은 온전하고 평화롭게 그 속에서 즐거움을 누렸으며, 어느 외인도 그곳을 왕래하지 못하게 했다. 따라서 그 누구도 그들의 몫을 나누어 가지지 못했고, 그들을 괴롭히지도 못했다. 욥은 "세상이 악인의 손에 붙이웠고"라고 말했다(9:24). 이에 대해 "그렇지 않다"라고 엘리바스가 말했다. "그것은 성도들의 손에 붙이웠고 믿음과 함께 그들에게 계속 맡겨졌다. 그리고 그들은 네가 스바 사람들과 갈대아 사람들에게 당했던 것처럼, 이방인이나 적들에 의해 도적질 맞지 않았고, 약탈당하지도 않았다."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이 이 세상에서 놀랍게 번성했다. 그렇다고 해서 욥과 같이 고난을 당하고 망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2. 사악한 백성들 특히 압제자들과 폭군들은 끊임없는 공포에 매어있기 때문에 매우 불안하게 살고, 극히 비참하게 패망한다. 엘리바스는 이러한 사실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무례하게 대적하려는 자들까지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으며, 결국 그것이 임하게 되는 것을 느끼리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그가 "악인"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은 (어떤 사람의 견해처럼) 니므롯이나 그들라오멜 또는 이들과 같이 여호와 앞에서 막강한 힘으로 대항한 자들을 의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22장 9, 10절에서 포학하고 비겁한 자로 특별히 책망하고 있는 것은 욥 자신을 가리키는 것인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여기에서 엘리바스는 그의 설명이 이해하기 쉬우므로 욥이 이야기에서 거울 속을 보는 것처럼 그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1) 이처럼 비참하게 산 죄인들을 엘리바스가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를 살펴 보기로 하자. 그는 이것을 서두로 꺼내지 않고, 욥이 파멸하게 된 이유로서 제시했다(25-28절). 그것은 보통 죄인이 아니라, 제일 악한 죄인 곧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도 않고, 인간을 귀하게 여기지도 않는 강포 자(20절)와 불경스러운 자와 학대자"였다.

[1] 이러한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며, 그의 권세와 권능에 도전한다(25절). 그러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율법과 그 의무를 알려주어야 한다. 그는 약속을 깨뜨리며 그를 만드신 자의 제제나 다스림을 받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거룩한 진노와 그 두려움을 알려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전능자를 무시하고, 그의 의지대로 그의 방법대로 행하려 하여, 율법이나 양심 혹은 다가올 심판을 개의치 않아 결국 최악의 경우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는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과 그의 진노의 능력에 도전하였다. 그의 손은 실상 하나님께로 다달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만일 그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는 것 같이 그의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했다. 이것은 정말로 "하나님을 미워하는"(롬 8:6) 무례하고 사악한 죄인들에게 적용된다. 이들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적일 뿐 아니라 그와 원수가 되는 것이다(롬 8:7). 그러나 애석하게도 죄인의 사악함은 무례할 뿐 아니라 무력하다. 그러한 죄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는 힘을 내어(즉, 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용감하게 되어) 전능자를 대적한다." 그는 그의 엄청나고 포학한 힘으로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하며(단 7:25),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고서 약탈과 잘못을 행할 수 있도록 양심의 호소마저 제거하려 한다.

교만한 죄인들이 전능하신 하나님과 겨루려하는 것은 말할 수 없이 미친 행위이다. "창조주와 겨루는 자에게 화가 있다." 죄인의 무례함에 대한 설명이 좀더 묘사되고 있다(26절). "그는 하나님을 치려고 달려간다." 마치 필사적인 전투병처럼 "목을 굳게 하고" 감히 하나님께, 그리고 그의 계명과 섭리에 직접 대항하려 한다. 마침내 그 적수가 자기와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얼굴을 숙이고 도망가는 그는 동시에 자기 칼 끝에 또는 방패의 날카로운 끝에 찔리고 만다. 대체로 죄인들은 하나님에게서 도망한다. 그러나 교만한 죄인은 횡포한 죄를 범하고서도 하나님께로 달려가, 그와 싸우고자 하여 그에게 도전한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는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다.



[2] 그는 그 스스로를 방심과 정욕으로 감싼다(27절). "그 얼굴에는 살이 찐다." 이것은 매일 기름진 음식으로 그의 육신의 정욕을 채우고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대적하여 그의 마음을 잔인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육체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마음껏 먹고 잔치를 벌리는 것은 흔히 영혼의 해로움을 초래한다. 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소홀히 여겨 탐욕의 우상이 만들어지고 관능적인 즐거움을 누리려 하는가? 포도주와 독주에 만취한 자들은 중대한 일들을 던져 버리고는 "내일도 오늘 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사 56:12)는 헛된 기대로 스스로를 속인다. "이처럼 시온에서 안일한 자에게 화 있을진저"(암 6:1, 3, 눅 12:19). 얼굴에 찐 살은 그를 대담하고 교만하게 보이게 한다. 그리고 허리에 찐 살은 그가 편하고 안이하게 눕도록 해 주며, 무감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의 화살이 날아갈 때에는 이것이 극히 보잘 것 없는 은신처임이 드러날 것이다.

[3] 그는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약탈하여 스스로를 부요케 한다(28절). 그는 성읍 거민들을 쫓아내어 황폐케 된 성읍 가운데서 홀로 거한다(사 5:8). 교만하고 잔인한 자들은 그들 자신이 무너뜨린 성읍 속에서(시 9:6), 개가를 부르며 이상한 기쁨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성읍들을 "돌무더기가 되게" 하고, 그곳 거민들을 놀라게 하여 쫓아내지 않고서는 그것들을 차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계를 독점하고 한꺼번에 소유하려는 자들은 그 모든 평안을 잃으며, 그 가운데서 가장 비참하게 된다. 어떻게 폭군이 그의 뜻을 이루겠으며 옛 사람의 표시가 모두 찍힌 성읍들의 주인이 되겠는가? 우리는 그가 악하고 그릇된 마음을 품고 행한다는 것을 알았다(35절). 즉 "그들은 악한 생각을 배고" 그 다음 마음에 "궤휼을 예비하고서도," 그들이 쓰러뜨리고자 하는 자들을 보호하는 척하고, 평화의 동맹을 맺음으로써 더 효과적인 싸움을 조작하려는 그 두 가지-처음부터 계획한 사기와 살인-가 그 사악함의 주요 요소가 되고 있다. 이처럼 사악한 자들로부터 하나님은 모든 선한 자들을 구원하신다.

(2) 우리는 이제 이 사악한 자들이 영적인 심판과 현실적인 심판 속에서 어떠한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가를 살펴보자.

[1] 그의 내적인 평안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다. 그는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는 평온해 보인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를 부러워하고, 그와 같은 상태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사람들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시는 분은 사악한 자의 마음 속에는 거의 평안과 만족감이 없기 때문에 그를 부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동정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첫째, 그 자신의 양심이 그를 고소하며, 그것으로 인한 진통 때문에 "그 일평생에 고통을 당한다"(20절). 그는 범죄로 인한 잔인한 생각과 그의 손에 물들은 피로 인하여 잠시도 편할 때가 없다. 그의 죄는 매 시각마다 그의 얼굴을 노려 본다. "죄를 느끼고 있는 자는 놀라며 당황한다."

둘째, 그는 자신의 재물과 힘이 일정하지 않은데 대해 초조감을 느낀다. "강포한 자의 햇수는 작정되었다." 그는 자신이 아무리 가장할지라도, 그것이 언제나 지속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이 또한 오래 지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므로, 초조하게 여긴다.

셋째, 그는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맹렬한 불" 아래 있게 된다(히 10:27). 그는 끊임없는 두려움과 놀라움 속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그는 가인과 함께 놋(유리함) 땅에 거하며(창 4:16), "바스훌이 마골밋사빔으로 된 것과 같이 사방으로 두려움을 느낀다"(렘 20:3, 4). 그리고 "그 귀에는 놀라운 소리가 들린다"(21절). 그는 하늘과 땅이 그에 대하여 격노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대적하시며 온 세상이 그를 미워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를 만나는 자가 모두 그를 죽이리라"고 생각한다(창 4:14).

또 그는 빚에 쫓기는 자와 같이 모든 사람이 그를 잡으려는 자로 생각한다. 죄로 인하여 제일 먼저 두려움이 들어왔고(창 3:10),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다. 그는 흥할 때조차도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임할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 보내신 멸망시키는 천사가 그와의 싸움을 보복하거나, 그가 해친 자들이 직접 그 보복을 하리라는 것을 느낀다. "생존 세상에서 두렵게 하는 자들은 대개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내려가"(겔 32:25), 그들 스스로가 두려움을 당하게 된다. 이것은 더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22절). "그는 칼날의 기다림이 되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그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라"(계 13:10)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죄의 자각은 죄인에게 "두루 도는 화염검"이 되므로(창 3:20), 그는 이것을 결코 피할 수가 없다. 이러한 내용은 또 언급되어 있다(23절). "그는 흑암의 날(또는 어두운 밤 흑암의 밤)이 가까운 줄을 스스로 안다." 즉 그날이 그에게 특별히 배당되어 있으므로, 그것은 확정적이고 결코 취소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흑암의 날은 죽음 이상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여호와의 날"이므로, 모든 사악한 백성들이 완전히 패망하는, 빛이 없는 흑암이 될 것이다.

비록 사악한 백성들이 안전하게 보일지라도,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이미 죽음, 영원한 죽음이 포위를 받고 있으며, 지옥이 그들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볼 것이다. "환난과 고통이"(로마서 2장 8, 9절에 언급된 내적인 고통과 영혼의 시련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그 양심에 하나님의 "노와 분"을 초래한다) 앞으로 다가올 파멸에 대해 "그를 두렵게 한다." 만일 이것이 그의 안에 자리잡고 있는 지옥이 된다면, 그의 앞에 있는 지옥은 어떤 것이겠는가? 비록 그가 두려움을 떨쳐 버리기 위해 애를 쓰고, 술과 농담으로 그것을 제거하려 할지라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환난과 고통이 그를 쳐서 이길 것이며, 싸움을 준비한 왕처럼" 강한 힘으로 그를 지배하여 항거할 수 없게 할 것이다. 평안을 누리려는 자는 선한 양심을 지키도록 하라.

넷째, 환난을 당할 때는 그곳을 빠져나올 엄두를 내지 못한다(22절). "그가 어두운데서 나오기를 바라지 못하고," 스스로 자포자기하여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선한 자들은 "저녁에 빛"을 바라며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이기"를 기대한다. 죄의 흑암으로부터 벗어 나려 하지 않고, "그 중에 왕래하려는" 자들이 어떻게 환난의 흑암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시 82:5). 그들 스스로 깊은 흑암에서 나갈 수 없으며, 그들이 빠져 있는 심연에서 나올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저주받은 죄인들에게 비참한 일이다.

다섯째, 그는 끊임없는 근심으로 당황하며, 하나님의 섭리가 그를 조금만이라도 징계할 때는 더욱 당황한다(23절). 그는 빈곤함을 매우 두려워하고, 그의 재산이 없어지는 것을 매우 예민하게 느끼므로, 그 자신의 환상 속에서 "유리하며 식물을 구하여 이르기를 어디 있느냐" 한다. 부유한 자는 풍족한 중에서도 "내가 어찌할꼬"라고 말한다(눅 12:17). 아마도 그는 그의 탐욕을 변명하기 위해 부족함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결국엔 궁지에 몰리게 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았다"(삼상 2:5)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죄인은 그렇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는 너무 살이 쪄서(27절) 땅을 팔 수가 없다. 그러나 구걸하는 것도 수치스럽게 느낄 것이다(시 109:10, 참조). 다윗은 의인이 버림을 당하여 걸식함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진실로 그들은 구걸하지 않고서도 자비를 베푸는 자에 의해 양식을 얻기 때문이다(시 37:3, 25). 그러나 악인은 궁핍하게 되었을지라도 양식이 그들에게 주어지도록 예비되어 있다고는 기대할 수 없다. 자비를 베푼 적이 없는 자가 어떻게 자비를 얻을 수 있겠는가?



[2] 그의 외적인 흥함은 곧 끝장이 날 것이며, 그의 자만과 모든 즐거움도 그것과 함께 끝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치시려고 달려가시는데 어찌 그가 흥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26절을 이처럼 풀이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치시려고" 달려가는 자는 분명 "넘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심판하실 때 이기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 세상에 물든 악인의 근심과 욕망과 계획을 어떻게 방해하여 완전히 비참하게 되도록 만드는가를 보라.

첫째, 그는 소유하고자 하나 "부요하지 못하다"(23절). 그의 탐욕스런 마음은 그가 진정 부요하게 되는 것을 방해한다. 그는 충분히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궁핍함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면 족하다고 느끼는 바로 그 만족감이 많은 것을 소유하게 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어떤 사람들이 부요하게 되는 것을 현저히 막고 있으며, 그들의 사업을 실패하게 만들고, 그들의 계획을 좌절시켜, 언제나 궁핍하게 한다. 거짓과 불의로 많은 것을 탈취한 사람들은 대부분 부요케 되지 못한다. 그것을 얻은 것과 같이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즉, 한 죄악에 의해 얻은 것은 다른 죄악에 의해 소모된다.

둘째, 그는 그가 얻은 것을 지키려고 애쓰나, 그것은 헛된 일이다. "그 재산이 항상 있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감소되어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하나님이 그것을 말리시어 "밤에 싹튼 것은 밤에 시들게 하신다. 허망하게 얻은 재물은 반드시 줄어들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압제함으로 인하여 재물을 모은 자들이 멸망하는 것을 살아 있는 동안 목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과는 좀 경우가 다르지만 이 재산을 상속한 자에게는 그 저주가 함께 임한다. "옳지 못하게 얻은 재산은 거의 삼대까지도 계승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와 그 상속자를 위해 영원히" 재산을 모으려 한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는 그 산업이 이 땅에서 증식하지 못할 것이다." 즉 그는 그 재산에 대한 신뢰와 즐거움을 계속 지닐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잃었을 때, 어디에서 그것의 완전함을 찾을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이 덧없는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진정으로 어느 것이 증식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으며, 또한 곧 모든 것의 완성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겠는가?

셋째, 그는 그가 얻은 것을 그의 자손에게 물려 주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계획은 방해를 받는다. 그 집의 가지가 마르게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가지들이 살아서 번성하고 그들이 모두 위대한 자가 될 수 있는 명성을 얻기를 기대한다. "그 가지가 푸르르지 못할 것이며"(32절), "불꽃이 그 가지를 말릴 것이라"(30절). 하나님은 그들을 열매 맺지 못한 꽃처럼, 또는 "익지 않은 포도"처럼(33절). 떨치실 것이다. 그들은 때가 되기 전에 죽어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그의 가족이 멸망 당한다.

넷째, 그는 스스로 그것을 오랫동안 즐기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는 그 일에서도 방해를 받는다. ① 그는 아마도 그것에서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30절). "하나님의 입김에 그가 떠나리라." 그리고 그의 재산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것이다. 즉 그것은 "유황 개천과 같은"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사 30:33), 또는 그의 말씀에 의해 그것을 "불사를" 것이다. 그가 말씀하신 것은 즉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밤 너는 네 영혼을 청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악인은 그의 사악한 길로 몰리어" 속된 마음 속에 있는 속물로 빠져들 것이다. ② 그것은 아마도 그에게서 떠나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갈 것이다(32절). "그의 날이 이르기 전에 그 일이 이룰 것이다"(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즉 그는 흥할 것이나, 또한 망하게 되는 것도 보게 된다.

다섯째, 그는 환난을 당할 때 그곳에서 벗어나려고 애쓸 것이다(그 환난 속에서 어떠한 유익함을 깨달을 것인가는 생각지 않고). 그러나 이 일도 역시 그는 방해받는다(30절). "그는 흑암한 데를 떠나지 못하리라." 그가 하만처럼 허락하기 시작할 때, 모든 사람들은 "그를 멸하라"고 외친다. "그는 어두운데서 나오기를 바라지 못한다"(22절)고 적혀 있다. 그는 영원한 재난에 대해 두려워하며 떨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도 또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것처럼(민 14:28), "유혹을 그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에게 임하게 하신다"(사 66:4). 하나님은 그의 불신과 절망에 대해 "아멘"(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하고 말씀하신다.

여섯째, 그는 그의 동료들을 안전케 하려고 노력하며, 그들과의 유대 관계를 강화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 역시 헛된 일이다(34, 35절). 그들의 "무리," 모든 공모자, 그들과 그들의 장막은"결실이 없고" 불탈 것이다. 여기에서 사곡한 자와 뇌물받는 자를 책망하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기만을 행하는 자들이다. 즉 종교를 사칭하여 하나님을 모욕하고, 의를 미끼로 삼아 인간을 해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일들이 좋은 결실을 맺게 되는 일은 불가능하다. 불의를 행하기 위해 "손과 손을 맞잡을지라도, 악인이 처벌받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3) 이와 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오만한 죄인들의 흥함은 이처럼 비참하게 끝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스스로 속아 허망한 것을 믿지 말게 하라"(31절).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을 보고 우리 스스로 주의하도록 하고 흔들리는 갈대 위에서 우리는 머물지 않도록 하자. 그것은 언제나 의지하려는 사람을 쓰러뜨린다.

[1] 재물을 획득하기 위한 사악한 방법을 믿는 자들은 "허망한 것을 믿는" 것이며, "허망한 것이 그들의 보응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라던 것을 얻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간계는 그들을 속일 것이며, 아마도 그들을 이 세상에서 멸망 시킬 것이다.

[2] 그들이 얻은 재물, 특히 옳지 못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을 얻는 자들은 허망한 것을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을 그들에게 만족을 가져다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붙어 있는 죄악이 그 기쁨을 멸해 버린다. 그들은 바람을 뿌리고 회오리 바람을 추수하여 마침내 소유하게 되나, 마침내는 당황하게 되고, "속은 심령이 헛물을 켜고," 그리고 "그들의 오른손에 있는 거짓으로" 스스로를 속였노라고 그들은 고백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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