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무상함과 연약함(욥기 14:1-6)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Ⅰ. 인간 생명의 근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진실로 생명의 큰 근원이시다. 왜냐하면 그가 "생기를 인간의 코에 불어 넣으셨고," 그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호흡을 시작하고 그때부터 생명의 덧없음과 더러움에 부딪쳐야 한다.
1. 생명의 덧없음!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다"(1절). 이것은 하와라고 불리우는 첫 번째 여인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녀는 모든 살아 있는 자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유혹에 속아서 최초로 범죄한 이 여인에게서 우리 모두가 태어났다. 따라서 우리의 날들을 짧게 하고, 슬프게 하는 죄와 타락이 그녀로부터 유래되었다. 또는 그것은 제각기의 사람들에게 직접 관련된 어머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여자는 약한 그릇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가 어머니를 닮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강한 남자는 그의 힘이나 그의 아버지의 힘에 영광을 돌리지 말고, 그가 여인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용사도 여인같이 된다는"(렘 51:30)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2. 그것의 더러움(4절).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만일 사람이 죄인인 여인에게서 태어났다면, 그는 죄인 이외에 달리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25장 4절을 보라.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깨끗한 시냇물이 더러운 물 줄기에서 나오거나 가시나무에서 포도가 나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결한 자손이 부정한 부모에게서 나올 수 없다. 우리의 습관적인 타락은 우리 부모로부터 받은 우리의 성품에서 유래된 것이므로, 그것은 우리의 뼈 속에서 자라고 있다. 우리의 피는 합법적인 범죄로써 획득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전병으로 더럽혀져 있다. 우리를 위해 죄인이 되신 우리 주 예수는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갈 4:4)고 기록되어 있다.
Ⅱ. 인간 생명의 본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꽃이며 그림자이다"(2절). 꽃은 시든다. 그것의 모든 아름다움은 곧 시들어 사라져 버린다. 그림자는 빨리 지나간다. 그리고 그 존재는 곧 사라지고 밤의 장막 속에 묻혀버릴 것이다. 그 어느 것도 우리는 헤아릴 수 없으며, 그 어느 것도 신뢰할 수 없다.
Ⅲ. 인간 생명의 짧음과 불확실함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사람은 "사는 날이 적다." 여기에서 생명은 달이나 년 수로 측정되지 않고, 날 수로 측정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느 날에 우리의 마지막이 올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날 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적으며, 처음 조상들의 날수와 비교해 볼 때, 매우 적다. 그것을 영원과 비교할 때는 더욱 적다. 또한 우리는 "사람의 나이"라고 부르는 것을 제대로 다 못 살고 간 사람에게는 그것이 더욱 적다. 사람은 때로 나오자마자 "쇠하여지고," 모태에서 나오자마자 요람에서 죽으며 이 세상에 와서 그 일을 하자마자, 즉, 그의 손에 쟁기를 잡게 되자마자 곧 사라지기도 한다. 즉시 쇠하여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림자 같이 신속하여서" 잠시만이라도 어떠한 모양으로든 머물지 아니하고, 그 형적이 곧 사라진다. 이 세상과 그 속에 있는 우리의 생명은 이와 같다(고전 17:31).
Ⅳ. 인간의 불행한 상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사람은 짧은 생을 누릴 뿐 아니라, 슬픈 생도 누린다. 사람이 여기에서 지내는 날 수가 얼마 안 된다 할지라도, 그 적은 날 수를 즐겁게 지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짧고 기쁜 인생을 어떤 사람들은 자랑한다). 그러나 그렇지도 않다. 이 짧은 날들 동안에 "괴로움이 가득하다." 즉, 수고하거나 투덜거리면서, 슬퍼하거나 두려워하면서 괴로워할 뿐만 아니라, 괴로움이 가득하다. 분노나 초조, 그리고 당황스러움 등을 맛보지 않고 지내는 날은 하루도 없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러한 것을 많이 느낄 것이다. 사람은 "동요가 가득하다." 그의 날이 적다는 사실은 그것이 끝나게 되리라는 예상 속에서 그에게 번민과 불안을 가져다 주며, 그는 항상 그의 생명에 대한 의혹에 매달려 있게 된다. 그러나 사람의 날 수가 이처럼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 날 수가 적다는 것, 영혼이 육체 속에 갇혀 주님으로부터 추방당하는 기간이 영원하지도 또한 길지도 않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 우리의 날 수는 많을 것이며, 괴로움에서 완전히 떠나고 또한 믿음과 소망과 사람이 이 현재의 슬픔을 보상해 줄 것이다.
Ⅴ. 인간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인생의 죄악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깨끗한 행실을 더러운 원칙 가운데서-"낼 수 있으리이까"(4절)라는 이 물음을 이러한 견해에서 보는 사람들도 있다. 행동적인 범죄는 천성적인 타락의 자연적 소산물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원죄"라 불리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모든 죄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해 거룩한 욥은 성별케 된 모든 사람들이 하는 것같이, 그 물줄기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시 51:5), 여기에서 탄식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긍휼을 간청하려는 의도를 그 속에서 시사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주여, 인간의 연약함과 결점으로 인한 나의 죄를 극단적으로 눈여겨 보지 마옵소서. 주께서 나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육체라는 것을 기억하소서." 갈대아 판에는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목할 만한 풀이를 하고 있다. "죄로 더럽혀진 인간을 누가 깨끗케 할 수 있으리요? 누가 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이외에 누가 인간을 용서하리요?" 하나님은 그의 전능하신 은혜로써, 이디오피아 사람의 살갗, 욥의 살갗이 벌레로 옷을 입었더라도 그것을 바꾸 수 있다.
Ⅵ. 인간 생명에 한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5절).
1.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 세 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1)우리의 생명은 끝날 것이다. 땅 위에서 우리의 날 수는 무수한 것이거나, 끝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효를 셀 수 있는 날들로서 곧 끝날 것이다(단 5:26).
(2) 우리가 얼마동안 살고 언제 죽을 것인가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 속에 결정되어 있다. 우리 달의 수효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으로서, 결코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그의 권능의 뜻과 결코 속일 수 없는 그의 전지하신 시야 아래 놓여 있다.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 생명의 종결을 명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의 수명은 그의 손 안에 있다. 자연의 권능은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으며, 그 아래서 움직인다. 그 속에서 우리는 살고 행동한다. 병은 그의 종들이다. 따라서 그는 살리기도 하시며, 소생시키기도 하신다. 우연히 왔다가 지나가는 것은 없으며, 함부로 쏘아진 화살에 의해 행해지는 처형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지가 그것을 전에 결정해 놓았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드러난 것은 모두 그의 솜씨이다." 무엇을 행하시든지 그는 어느 정도 자연의 고정된 법칙(그 목적과 수단은 함께 정해진다)과 고정된 도덕 관념을 침작하시어 이 인생에 있어서 악을 처벌하고 선을 상 주는 일을 정하신다. 우리는 더 이상 금욕주의적인 눈 먼 운명이나, 쾌락주의 적인 눈 먼 행운에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
(3)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한계를 우리는 뛰어 넘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뜻은 변경될 수 없고, 그의 선견지명은 오류가 없기 때문이다.
2. 이와 같은 생각으로 욥은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주장하고 있다.
(1)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실수와 잘못을 이처럼 엄격하게 살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주장하고 있다(3절). "내 안에 이와 같이 타락의 본성이 들어 있고, 외적으로는 끊임없이 유혹을 당하게 되는 이러한 큰 고통 속에 내가 놓여 있거늘 특히 내가 잘못한 것을 지적하시기 위해(13:27)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을 들어 나를 주목하시고 살피시나이까? 그리고 주께서 이처럼 보잘 것 없는 벌레인 나를 잠깐 사이에도 가장 적은 실수를 발견해 내실 정도로 빠른 눈을 가지고 계시며, 그것을 미워하실 정도로 거룩하시고, 그것을 정죄하실 정도로 의로우시며, 그것을 벌하실 정도로 강대하신 주의 앞으로 이끌어서 심문하시나이까?"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싸울 능력이 없는 것과 우리 자신의 사악함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주여, 주의 종을 심문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이처럼 그를 냉혹하게 다루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주장하고 있다. "주여, 내가 살 시간은 불과 얼마되지 않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분명 그리고 곧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보내야 하는 그 적은 날들은 괴로움이 가득합니다. 내게 잠시의 휴식을 주십시오!(6절) 이처럼 불쌍한 피조물에서 고통을 거두시고, 그로 잠시 쉬게 하소서. 그로 잠시 숨 쉴 여유를 주사, 품군 같이 그날을 마치게 하옵소서. 나는 한 번 죽도록 정해졌습니다. 나의 죽음은 그 하루로서 족하오니, 이처럼 끊임없이 죽어 가도록, 일천 번의 죽음을 죽게 하지 마옵소서. 나의 인생은 수고와 노동의 날로서 고작해야 품군의 날과 같다는 것으로서 족합니다. 나는 그것을 마치는 것을 만족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인생의 일반적인 곤고함, 그날의 고통과 격노를 최선으로 활용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로 이 특수한 고통을 느끼게 하지 마시고, 나의 인생을 악인의 날과 같이 모두 처형의 날같이 되게 마옵소서." 우리는 이처럼 우리의 체질을 알고 계시며, 그것을 참작하시고, 그러한 체질로 인한 우리의 본성을 참작하실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우리 자신을 맡김으로써, 큰 고통 아래서도 어떤 위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예상(욥기 14:7-15)
우리는 인생에 관한 욥의 의견을 알았다. 이제 우리는 죽음에 관한 욥의 의견을 보기로 하자. 그는 지금 병마와 아픔으로 시달리고 있으므로, 죽음에 관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건강할 때에도 우리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은 부적절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죽음이 사자에게 체포되었을 때에, 죽음을 먼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욥은 그 죽음이 올 것이라는 것과, 그 시간이 이미 정해졌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Ⅰ. 이제 여기에서 욥은 죽음이 우리를 이 세상에서 영원히 떠나게 해 준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을 그는 전에도 말했으며(7:9, 10), 여기서도 다시 언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비록 증명될 필요가 없는 진리라 할지라도, 그것을 잘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충분히 심사숙고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1. 죽음에 의해 쓰러진 사람은 잘리워진 나무처럼 다시 소생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무가 지니고 있는 소망에 대해 욥은 매우 유창하게 묘사하고 있다(7-9절). 만일 나무의 몸체가 잘리워지고 오직 줄기나 뿌리만 땅에 남아 있게 된다면, 비록 그것이 시들어 죽은 것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마치 새로 심어진 나무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다시 어린 가지를 내게 할 것이다. 나무 뿌리는 땅의 습기와 하늘의 비를 알아채고 좇으며, 그것들은 그 나무를 소생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러나 인간의 죽은 육신은 그것들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조금도 그것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느부갓네살의 꿈에서 그가 그의 이성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일은 나무를 베는 것으로 상징되었고, 그가 다시 이성을 되찾는 것은 나무 뿌리의 그루터기를 철과 놋줄로 동여 땅에 남겨두고,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는" 것으로 상징되었다(단 4:15). 그러나 사람은 다시 생명을 얻게 되리라는 전망을 가지지 못한다. 식물의 생명은 하찮은 것으로 다루기 쉽다. 그것은 물을 얻으면 다시 소생할 것이다.동물의 생명은 어떤 곤충과 새들에게 있어서는 역시 그러하다. 태양열이 그것을 재생시킬 것이다. 그러나 분별력을 지닌 영혼은 매우 위대하고 고귀해서 일단 세상을 떠났을 때는 어떤 자연의 힘으로도 그것을 소생시킬 수 없다. 그것은 해나 비가 미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며 전능자의 직접적인 작용 이외에는 그 어느 것도 그것을 복귀시킬 수 없다.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 그 기운이 끊어진 즉 그가 어디 있느뇨?"(10절) 여기에서 사람에 대해 두 가지 단어가 사용된다. "강한 자, 게겔"은 비록 강할지라도 죽는다. "흙으로 지어진 자, 아담"은 흙과 같기 때문에 그 기운이 끊어진다. 사람은 죽어가는 생물이다. 여기에서 사람은 다음과 같은 상태로써 묘사되고 있다.
(1) 죽기 전 상태, 그는 "소멸된다." 그는 서서히 소멸되고, 생명의 저장물을 빨리 소모시키면서, 날마다 죽어간다. 병과 노쇠는 몸과 힘과 아름다움을 소멸시킨다.
(2) 죽는 상태. "사람은 그 기운이 끊어진다." 영혼은 육신을 남기며, 그것을 주신 하나님, 영들의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3) 죽은 후의 상태. "그가 어디 있느뇨?" 그는 전에 있었던 곳에 없다. 그의 처소는 더 이상 그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아무 데도 없느뇨?(어떤 사람은 그것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아니다. 그는 어디엔가 있다. 그리고 기운이 끊어진 자가 어디에 있으며, 우리의 기운이 끊어질 때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다. 그것은 영들의 세계로 영원 속으로 사라지며, 더 이상 이 세상에 돌아오지 못한다.
2. 무덤 속에 누운 사람은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11, 12절). 매일 밤 우리는 자기 위해 누우며, 매일 아침에 우리는 깨어 다시 일어난다. 그러나 죽었을 때 우리는 무덤 속에 누워 있어야 하고, 깨어 나거나, 다시 일어나, 지금과 같이 이러한 세계, 이러한 상태로 돌아올 수 없다. 시간을 충실하게 재는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따라서 시간 자체가 끝나 영원 속에 흡수될 때까지, 결코 깨어나거나 일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은 홍수에 비교하기에 적합할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멀리 퍼져 장관을 이루나, 물의 깊이는 얕으며, 그것이 물이 범람하여 홍수를 일으키게 했던 바다나 강으로부터 분리되면, 그것은 곧 줄어들고 마르게 되며, 그 처소는 그것을 더 이상 알지 못한다. 몸은 이러한 물의 일부분처럼 땅 속에 가라앉아 잠겨들며, 그곳에 묻힌다. 영혼은 나머지 물과 같이 위로 끌어 올려져 창공에 있는 물들과 섞인다. 박식한 리차드 블랙모아(Richard Blackmore) 경은 이것의 서로 다른 면을 포착하고 있다. 물이 여름에 줄어들고 증발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겨울에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은 그렇지 않다. 그가 이것을 그 자신의 말을 가지고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보자.
흐르는 강이나 고요한 호수는
그 마른 강 언덕과 드러난 해변을 저버릴지도 모른다.
그 물들은 증발되어 위로 올라가고,
그 물 줄기는 위에 있는 구름 속에 스며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돌아오는 겨울은 여름에
잃었던 것을 회수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여! 너의 생명의 물줄기가
그 자색 혈관을 저버리고 심장을 속인다면
새로운 원기로써 그것은 결코 보충되지 못할 것이며
다시 생명의 맥박이 뛰는 것을 느끼지도 못할 것이다.
Ⅱ. 그러나 마지막에 "하늘이 없어질" 때, 사람은 저 세상에서 다시 생명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때 "사람은 다시 일어나며, 잠을 깰 것이다." 죽은 자의 부활은 19장 26절에 나타난 것과 같이 욥의 신조의 한 조항임이 틀림 없다. 그는 여기에서 다시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데, 우리는 그러한 마음 속에서 다음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1. 음부에 감추어 달라는 겸손한 탄원을 알 수 있다(13절). 욥이 죽기를 바라는 것은 그가 이 인생을 매우 혐오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일어나리라는 더 나은 인생에 대한 경건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는 나를 음부에 감추시옵소서!" 음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휴식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숨는 곳이다. 하나님은 음부의 열쇠를 쥐고 계시사, 지금 그것으로 들여 보내실 수 있고, 또 부활 때에 나오게 하실 수도 있다. 우리가 우리의 보물을 은밀히 안전한 곳에 감추듯이 하나님은 "사람을 음부에 감추신다." 그리고 감추신 자를 찾아내실 것이며, 그 어느 것도 잃어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주께서 이 인생의 폭풍과 괴로움을 막아 주실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인생의 축복과 영광을 위해 나를 감추시옵소서. 나로 음부에 눕게 하시고, 불멸을 위해 보호하시며, 이 세상의 모든 눈들로부터 은밀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주로부터 내가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를 보시던 그 눈으로부터는 멀리하지 마옵소서(시 139:15, 16)."(1) 그곳에서 나로 하여금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눕게 하소서. 성도들의 몸이 음부에 누워 있는 한, 본래부터 있었던 인간에 대한 진노가 어느 정도 남아있으며, 그것은 일종의 죄의 영향 아래 놓여 있다. 그러나 몸이 일으켜질 때 그것은 모두 사라진다. 즉, 마지막 대적인 죽음은 그때 완전히 소멸될 것이다.
(2) 그곳에서 나로 하여금 방주에 있는 노아를 기억하심과 같이(창 8:1), 나의 존재를 기억하시기 위해 "기한을 정하시던" 때가 올 때까지 눕게 하소서. 하나님은 옛 세상의 멸망으로부터 노아를 숨겨주셨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보상하시기 위해 그를 남겨 놓으셨다. 성도들의 몸은 음부 속에서 잊혀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을 살피시기 위해 기한을 정하셨다. 우리는 현재의 고통의 어두움을 통해 보게 되리라는 것과 이 세상에서 그 후에 좋은 날들을 보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음부에 잘 있기만 한다면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여기에서의 욥처럼 그 흑암을 뚫고 볼 수 있을 것이며, 그 재편에 더 나은 세상에 더 나은 날들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2. 죽음과 부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끈기있게 따르려는 거룩한 결의를 알 수 있다(14절).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싸우는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 기다리겠나이다." 욥은 친구들이 형편없는 위로자임이 드러났을 때, 그 스스로를 그 자신의 위로자로 삼았다. 그의 상황은 지금 불행했지만, 그는 상황이 바뀌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 자신을 즐겁게 하고 있다. 나는 그것이 이 세상에서 그가 다시 형통하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의 친구들은 사실상 그것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그에게 속살거렸으나, 그 자신은 계속 그것에 대해 낙담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불확실한 것에 근거한 위로는 애매모호한 위로임에 틀림 없다. 그러므로 그가 여기에서 스스로 인내하면서 기대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위로 이상의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그가 기다리는 변화는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1) 부활의 변화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때에 우리의 낮은 몸은 변할 것이고(빌 3:21), 그것은 훌륭하고 영광스러운 변화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라는 질문은 경탄하는 의미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놀랍도다. 이 마른 뼈가 살아날 것이라니! 만일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기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내 분리된 영혼은 변화가 올 때까지, 즉 그것이 다시 육체에 연합되고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할 때까지(시 16:9) 기다리리라."
(2) 또는 죽음에서의 변화로 간주되어야 한다.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사람은 지금과 같은 그러한 인생은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재앙을 종결시켜 줄 그 변화가 올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릴 것이며, 내가 그러했던 것과 같이, 조바심을 하면서 그것을 기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하자.
[1] 죽는다는 것은 매우 엄숙한 일이다. 그것은 그것 자체로서 하나의 완전한 일이다. 그것은 변화이다. 몸 속에 현저한 변화가 일어나며, 그 외형이 변하고, 그 동작을 멈춘다. 그러나 육체를 떠나 영들의 세계로 떠나는 영혼의 큰 변화는 그것의 감금 상태를 끝내고 심판의 상태를 맞이한다. 이 변화는 올 것이며, 그것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성분의 변형과는 다른 최종적인 변화가 될 것이다. 아니, 우리는 이처럼 다시 살지 못하고, 죽어야 한다. 죽는 것은 한 번 뿐이다. 그리고 한 번 뿐인 것은 잘 행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하나의 잘못은 치명적이고 결정적인 것으로서 다시 시정될 수 없다.
[2] 그러므로 그 변화를 기다리는 것과 우리에게 정해진 날들을 기다리기를 계속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의무이다. 생명의 시간은 한정된 시간이다. 그 시간은 날 수로 계산된다. 그리고 이날들은 우리의 변화를 기다리는 데 쓰여지도록 되어 있다.
첫째, 우리는 그것이 오리라는 것을 예상해야 하며, 그것에 대해 하는 자로서 많이 생각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를 열망하고 그것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때가 가장 좋은 때라는 것을 믿는 자로서 그것이 올 때까지 기꺼이 머물러 있어야 한다.
넷째, 우리는 그것이 올 때를 대비하여 열심히 준비함으로써,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된 변화가 되도록 해야 한다.
3. 이 속에서 축복과 만족에 대한 즐거운 기대에 대해 알 수 있다(15절). 그때 "주께서는 나를 부르셨겠고 나는 대답하였겠나이다." 그가 이러한 암담한 상황 속에 있었으므로, 그는 대답할 수도 없었고, 감히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9:15, 35; 13:22).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그는 대답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다.(1) 그것은 부활하는 날이었다. "주께서 천사장의 음성으로써, 나를 음부에서 불러내실 것이며 나는 그 부르심에 대답하고 나올 것입니다." 몸은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며, 그는 그것을 위한 영광을 준비해 놓으시고 그것을 원하실 것이다.
(2) 또는 죽는 날이었다. "주께서 내 몸은 무덤으로 그리고 내 영혼은 주께로" 부르실 것입니다. 그 때 나는 "주여 준비되었나이다. 갈 준비가 되었나이다. 이제 내가 여기 있사옵니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은혜로운 영혼은 죽음의 부름에 기꺼이 대답할 수 있으며 그 소환 명령에 응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영을(누가복음 12장 20절과 같이) 억지로 내놓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양도한다. 그리고 흙으로 된 장막은 그 영들을 폭력으로 끌어내도록 만들지 않고, 그것들을 자발적으로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확인을 지닌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아껴보셨나이다. 주는 나를 위해 긍휼을 예비하고 계시나이다. 그것은 주의 섭리에 의해 이미 만들어진 것일 뿐만 아니라, 주의 은총에 의해 새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을 지으신 주가 그들을 아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영혼 속에 있는 은총은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세상에 있는 그것을 버리시지 않고(시 138:3), 그것을 아끼실 것입니다. 그리고 저 세상에서 그것을 온전케 하시고, 끝없는 영광의 화관을 그것 위에 씌우기를 원하실 것이다.
욥의 불평들(욥기 14:16-22)
욥은 여기에서 다시 불평을 하고 있다. 그가 미래의 축복에 대해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는 현재의 이 불우한 상태를 극복한다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있다.
Ⅰ. 욥은 특별한 역경을 불평하고 있는데,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엄격한 의로부터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16, 17절). "그러므로" 그는 이곳을 떠나 하나님의 진노가 끝날 저 세상으로 가기를 갈망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회초리의 엄격한 규율 밑에서 어서 어른이 되는 것을 바라는 어린 아이같이 하나님의 진노의 끊임없는 표징 아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언제 변화가 올 것입니까? 그러하온데 이제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고 나의 죄를 살피시며, 죄인에 대한 증거로 삼기 위해 고소장을 잘 보관하는 것같이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는 것처럼 생각됩니다"(신 32:34, 참조). "주께서 나를 치실 모든 구실을 들추어 내십니다. 옛날 허물을 들추시고, 모든 결점을 비난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한 발자국만 잘못 내딛어도 나를 때리십니다."
1. 욥은 하나님께서 그의 죄의 허물로 인해 그를 징벌하셨다는 것과 그가 그런 징벌을 받을 만한 충분한 일을 행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있어서, 거룩한 공의에 대한 견해는 옳았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걸음에는 죄가 있었고, 만일 그가 엄격한 심문을 받는다면 그에게 이 모든 파멸을 초래할 만한 허물을 그는 범했기 때문이다. 그는 무죄하였기 때문에 멸망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2.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가 잘못했던 것을 극단적으로 지적하셨고, 모든 것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셨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어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그의 견해는 옳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취지의 말을 했었다(13:27). 그것은 경솔한 말이었으므로, 우리는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도록 하자. 하나님은 실지로 우리의 모든 죄를 보신다. 그는 그 자신의 백성들 속에 있는 죄를 보신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가혹하게 여기시지 않으시며, 율법을 우리에게 불리하게 적용시키지도 않으신다. 우리는 우리의 불의가 받을 만한 것보다 더 적은 벌을 받는다. 하나님은 정말 진노의 날에 대비하여 회개치 아니하는 자의 범죄를 봉하시고 간직하시나, 그의 백성들의 죄는 구름처럼 지우신다.
Ⅱ. 욥은 인간의 쇠퇴해가는 일반적인 상태를 불평하고 있다. 우리는 죽어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를 소멸하고 놀라게 하며, 우리의 모든 날이 지나가는 하나님의 분노의 능력을 누가 알리요?"(시 90:7-9, 11, 참조) 그리고 누가 그의 견책에 대항할 수 있겠는가?(시 30:11)
1. 우리는 땅 자체가 소모되는 것을 본다.(1) 그것의 가장 강한 부분도 소모된다(18절). 항상 지속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산들마저도 무너져 내려 없어지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나뭇잎처럼 쇠퇴되어 떨어진다. 바위들은 끊임없이 바닷물에 부딪침으로 닳아 없어진다. 물은 끊임없는 물방울로써, "돌을 닳게 한다." 그런데 "그것이 부딪치는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꾸준함에 의해서 닳는다."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은 닳아 없어진다. "시간은 모든 것을 삼켜 버린다." 그러나 신령한 육체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2) 땅의 자연적 소산물도 소모된다. 흙에서 자라나고 그 속에 견고한 뿌리를 박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때로 큰 비에 의해 씻겨나간다(19절). 어떤 사람은 욥이 위로를 위해 이것을 탄원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주여, 나의 인내는 계속 버텨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바위와 산들도 결국은 쓰러집니다. 그리하오니 이 논쟁을 그치소서."
2. 우리가 땅에서 사람이 소멸하는 것을 본다 하더라도 놀랄 것은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흙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욥은 그의 경우가 유일한 것은 아니므로, 스스로 인간의 공동 운명에 타협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여러 예들 속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깨달을 수 있다.
(1) 인생의 즐거움에 대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은 매우 허망한 일이다. "주께서는 사람의 소망을 끊으시나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만들어 놓은 모든 계획과 스스로 기쁘게 여겼던 모든 기대를 끊으시나이다." 죽음은 세상적인 확신 위에 세워지고, 세상적인 위로만을 주는 모든 소망들을 끊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과 천국에 둔 소망을 죽음은 완성시킬 것이며, 끊지는 못한 것이다.
(2) 죽음의 공격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것은 매우 무모하다(20절). "주께서 사람을 영영히 이기시나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대등할 만한 적수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와 다투는 자들을 분명 이기실 것이며, 언제나 이기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코 다시는 저항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더욱이 죽음의 격타는 불가항력적이다. 그것의 호출에 불응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쳐서 이기시며, 그는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된다. 죽어가는 자를 생각해 보라.
[1] 어떻게 그의 안색이 변하는가 보라. "주께서 그의 얼굴빛을 변하게 하시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몸의 병으로 인해 변한다. 사람이 몇 일간 앓고 났을 때 그 얼굴빛은 얼마나 변하는가! 몇 분간 가사 상태에 있은 후에는 그보다 얼마나 더한가! 위엄과 근엄을 지녔던 표정은 비천하고 보잘 것 없이 되고, 사랑스럽고 귀여운 얼굴은 유령같고 무섭게 된다. "내 시체를 내가 보지 못하게 묻어라." 그러면 그 존경을 받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죽음은 얼굴빛을 변하게 한 후 우리를 이 세상에서 내보내며, 이곳에서 한 번 추방함으로써 결코 돌아오지 못하게 한다.
둘째, 마음의 평정을 잃게 될 때 변한다. 죽음이 엄습해 올 때, 가장 강하고 가장 용감한 사람들도 그 얼굴빛을 변할 것이다. 그것은 가장 명랑하게 미소를 머금었던 표정을 슬프고 어둡게 만들 것이며, 가장 대담한 표정을 창백하고 겁많게 만들 것이다.
[2] 그가 한때 매우 소중히 여겼던 그의 식구들의 일에 대해 그가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는가 보라. 그가 죽음의 전조의 손아귀 속에 있을 때, 중풍에 걸리거나 졸도하거나 고열로 헛소리를 하고 있을 때, 또는 죽음과 싸우고 있을 때, 그의 자손에 관해 가장 기쁜 또는 가장 가슴 아픈 소식을 들려 준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두 마찬가지로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이었고, 또 깨달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21절). 그는 여기에서 그 주위에 있으면서 그에게 영향을 주던 모든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들이 있는 저 세상으로 갈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 자녀와 가족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바꾸게 하여 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라졌을 때, 그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고 계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그들을 맡기고, 그에게 그들을 남겨 두자. 그리하여 그들에 대한 쓸데 없는 걱정으로 우리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자.
[3] 죽음에 대한 번민은 얼마나 무서운가 보자(22절). "자기의 살이 그에게 있는 동안"(그것을 그렇게 풀이해도 된다) 다시 말해서 그가 그처럼 눕히기를 싫어하는 그 몸이 그에게 있는 동안, "그것은 아플 것이며, 자기의 마음이 그 속에 있는 동안," 즉 그가 내놓기를 그처럼 싫어하는 영이 그 속에 있는 동안 마음은 슬플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죽는 고통은 일반적으로 쓰린 고통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임종시에 회개하기를 연기하는 것과, 실상 아무 것도 하기에는 부적절한 때에 필요한 어떤 일을 하려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하고 선한 양심을 지킴으로써, 죽어가는 순간의 고통과 슬픔을 대적하여 우리를 위로하고 도울 위로를 쌓아두는 것은 진실로 지혜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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