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발에 대한 욥의 대답(4)(욥기 13:1-12)
욥은 여기에서 그의 친구들의 불친절에 대한 분노를 과격하게 표현해 놓고 있다.
Ⅰ. 욥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논쟁이 된 문제를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들에 의해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는 자로서 그들에게 도전하고 있다(1, 2절). 그들은 고린도 사람들이 바울에게 했던 것처럼, 그가 자기 칭찬이 아닌 자기 정당화의 방법으로 그 자신과 그 자신의 지식을 추천하도록 강요했었다. 그가 이전에 말한 모든 사실들은 그의 눈으로 본 것으로, 여러 예문에 의해 확증되었고, 또한 그의 귀로 들은 것으로서, 여러 관계자들에 의해 지지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화로우심 그리고 통치권을 보고 들을 뿐만 아니라, 깨닫는 자들은 행복하다. 그가 생각했던 이것은 그가 전에 말했던 것을(12:3) 정당화 시켜 줄 수 있으니 이것을 그는 여기에서 반복하고 있다(2절).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그리하여 내가 너희에게 배우러 갈 필요가 없나니, 지혜에 있어서 너희만 못한 내가 아니니라." 논쟁에 빠져드는 자들은 필요 이상으로 그들 스스로를 높이고, 그 형제들을 비방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만해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기도 해야 한다.
Ⅱ. 욥은 그들을 떠나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다(3절).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노라." 그는 마치 이렇게 이야기하였던 것 같다. "나는 너희와 이야기하여 더 이상 만족을 얻을 수 없다. 내가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그는 너희처럼 내게 이렇게 가혹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방백은 그 신하들보다도 더 온화하고 참을성 있게 그리고 겸양의 태도로써 불쌍한 자들의 청원을 들을 것이다. 욥은 그의 친구들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과 변론하고자 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자.
1. 스스로를 사곡한 자라고 자책할 이유가 없는 자들은 얼마나 담대한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향하는가! 그들은 겸손한 용기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가 호소할 수 있다.2. 이웃들로부터 부당한 비방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큰 위로를 얻는가! 비록 그들이 정당한 판결을 얻으리라는 소망을 그 이웃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을지라도, 그들은 전능자에게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쉽게 접근하며, 그가 받아 주심을 발견할 것이다.
Ⅲ. 욥은 그들이 그를 부당하고 무자비하게 다룬데 대해 그들을 정죄하고 있다(4절).
1. 그들은 그릇되게 그를 고소했으며, 그것은 부당했다.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그릇된 가설을 조작했고, 마치 이 세상에서 악한 자들 이외에는 그 누구도 결코 현저한 고통을 당하지 않는 것처럼 그것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가설에서 욥이 분명 사곡한 자라는 그릇된 판단을 이끌어 냈다. 이처럼 이론과 적용이 모두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들로서 고발하려 하고 있다. 비록 간접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나쁜 일이며, 계획적으로 거짓말을 지어내는 것은 더욱 나쁜 일이다. 그러나 무죄함이나 탁월함이 이 잘못된 것을 막아 주지는 못할 것이다.2. 그들은 욥을 야비하게 속였고, 그것은 불친절한 일이었다. 그들은 그의 치료를 맡았고, 그의 의사가 되어 주는 척 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 "쓸데없는 의원이었다." 다시 말해서 "허수아비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을 행할 수 없는 허수아비 의사였다." 그들은 그의 증세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에게 처방을 내릴 줄도 모르는 쓸데없는 의원, 즉 큰 도움을 주는 듯하지만 실상은 그에게 어떠한 유익도 주지 못하는 돌팔이 의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말해 준 것들로 인해 결코 지혜로와지지 않았다. 이처럼 상한 심령과 상처 난 양심을 지닌 모든 피조물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이외에는 그 모두가 쓸데없는 의원이므로, 어떤 사람이 그 의원들에게 모든 비용을 들이더라도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해진다(막 5:26).
Ⅳ. 몸은 그들이 잠잠해지고 그의 이야기를 끈기있게 들어 줄 것을 간청하고 있다(5, 6절).
1. 욥은 그들이 이미 지나치게 많은 말들을 하긴 했지만, 앞으로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그들에게 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너희가 잠잠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너희의 말 속에 드러난 너희의 무지와 그릇된 성품은 감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이상 말하는 것을 참을 수 없음을 진술했었다(4:2; 11:2, 3). 그러나 그는 만일 그들이 스스로 침묵을 지켰다면 좀더 나은 그들의 명성을 지닐 수 있었음을 그들에게 말하고 있다. 아무 유익이 없는 말을 하거나, 하나님을 영예롭지 못하게 하고 우리 형제들은 상심케 하는 말을 하는 것보다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낫다.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모순되는 점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로 여기운다"(잠 17:28). 그리고 침묵이 지혜의 증거인 것과 같이 그것은 그 수단이 되며, 생각하고 들을 여유를 준다.2. 욥은 그가 말해야 할 것을 들어 주는 것이 그에게 공의로운 일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어보라." 아마도, 그들이 그의 이야기를 중단시키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들은 주의를 집중시키지 않고, 그가 말한 것을 매우 경홀히 여겼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에게 들을 뿐만 아니라 청종해 줄 것을 간청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우리가 가혹하게 대할 우려가 있는 자들이 그들 스스로 말해야 하는 것은 아주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청종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서 단지 그들의 의견이 잘 청종되기만 한다면, 그들을 전복시키려는 마음을 지닌 자들까지도 그들을 무죄로 인정해 줄 것이다.
Ⅴ. 욥은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탄원하는 척하나, 실상은 하나님의 영예를 해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납득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7, 8절).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말하고 그를 지지했으며, 욥에 대한 그의 처사를 의롭게 하고자 했던 것을 자랑하였다. 그리고(그들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주권을 위한 묘사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법정에 귀를 기울이고 마지막 판결을 기대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편에 유리한 판결을 기대했다. 그러나 욥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1. 하나님과 그리고 그의 경우에는 이러한 대변자가 필요치 않았다. "마치 하나님의 공의가 맑지 못하여 닦여질 필요가 있는 것처럼, 또는 마치 그가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하고 있으므로 너희가 그를 위해 말해 주기를 원하시는 것처럼 너희가 그를 위하여 쟁론하려고 생각하느냐? 이처럼 연약하고 감정적인 너희가 하나님의 주장을 진술하는 영예를 얻을 수 있겠느냐?" 선한 일은 악한 손에 주어져서는 안 된다.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쫓으려느냐?" 그들 편에 설 권리가 없는 자들이 그들의 주장을 내세운다면, 그것은 그들 편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판단하는 편견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장은 매우 의로우므로 그것을 지지하는 이러한 방편이 필요치 않다. 그는 하나님이시므로 스스로 쟁론 하실 수 있다(삿 6:31). 그리고 만일 우리가 계속 침묵하고 있는다면 하늘이 의로우심을 선포할 것이다.2. 하나님의 주장은 이러한 처사에 의해 오히려 방해를 받는다. 하나님을 의롭게 한다는 구실 아래 욥을 괴롭히면서 그들은 위풍당당하게 그를 사곡한 자이며, 악한 자로서 정죄하고 있다. 욥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것은 불의를 말하는 것이다"(왜냐하면 무자비한 비판은 큰 불의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 형제를 해치는 것은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궤휼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너희 자신의 양심으로도 또한 무죄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자를 정죄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 이론은 거짓되며, 너희 주장은 허위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너희가 용서 받을 수 있겠느냐?" 아니다. 선한 계획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며, 나쁜 말이나 행동은 더욱 성별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의 거짓말이 필요치 않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주장은 우리의 사악한 계략이나, 우리의 사악한 감정이 필요치 않다. 인간의 분노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돕지 못하며, 우리는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할" 수도 없을 것이다(롬 3:7, 8). 경건한 속임수는(그들이 그렇게 부르듯이) 불경스런 사기이다. 그리고 헌신적인 박해는 하나님의 "형제를 미워하면서 쫓아내고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하는 자들과 같이(사 66:5; 요 16:2)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더럽히는 것이다.
Ⅵ. 욥은 그들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써 사로잡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좀더 온화한 마음을 지니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들로 하여금 그들과 같은 인간에게 하듯 하나님을 속이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자. 또한 그와 그의 영예를 위해 열의를 품은 것처럼 가장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한 행실을 장려하시리라는 기대를 가지지 않게 하자. "사람들이 아첨으로써 서로를 속이는 것처럼, 너희는 그를 희롱하고 속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느냐?" 분명, 하나님을 속이고자 하는 자들은 그들 자신이 속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당하지 않느니라." 그들이 이처럼 하나님을 희롱하고 그를 모욕하려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욥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들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도록 만들려고 했다. 그리하면 그들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판단할 능력이 없음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1.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이처럼 몰두하여 섬기고 있으나 실상은 해를 입히고 있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생각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들이 행한 것에 대해 그에게 좋게 말할 수 있는지를 묻도록 하라. 다음을 생각해 보자.(1)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문과 조사는 엄격하다(19절).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책망 속에서 굳게 신봉했던 그 원리가 심문당하고 그 문제의 밑바닥이 드러나는 것을 참겠느냐?" 우리에게 이롭든지 해롭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마음을 감찰하신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깊이 명심해야 한다. 정직하게 행한 올바른 자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그를 감찰하신다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을 간구하고 있다. "하나님이시여, 나를 감찰하시고 내 마음을 아시옵소서."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그의 성실함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리 저리를 두리번거리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그를 감찰하는 것이 이롭지 못할 것이며, 그것은 그를 매우 당황하게 만들 것이다.
(2)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과 불쾌함은 매우 심각하다(10절). "만일 너희가 가만히 낯을 좇을진대, 비록 은밀히 마음에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그 위엄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겠느냐? 너희가 하나님을 지지하는 척 하더라도 그는 나에 대한 너희의 책망을 기뻐하시기는커녕 방백이나 위대한 사람들이 그들의 이름을 찬성하고 그의 세력을 증진시킨다는 구실 아래 행해진 야비한 행동을 목격했을 때처럼, 그들에 대해 크게 진노하실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은밀하게 잘못을 행할지라도, 우리는 언젠가는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분명히 책망받을 것이다.
(3) 하나님의 존귀는 두렵다. 만일 그들이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잘 지니고 있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분노를 살 만한 일을 행하지 않았을 것이다(11절). "그 존귀가 너희를 두렵게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에 대해 큰 지식을 지니고 있고 또 믿음과 그에 대한 고백을 한 너희가 어찌 감히 이렇게 말을 할 수 있으며, 또 방종하게 말을 하느냐? 너희가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야기하고 행할 것이 아니냐?(느 5:9) 그 위엄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너희 감정을 저지시킬 것이 아니냐?" 여기에서 욥은 그 자신이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알고 있는 자로서, 그리고 그의 친구들이 반대되는 암시를 하더라도 그를 경외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자로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1] 하나님 안에는 두려운 존귀가 있다. 그는 가장 존쥐한 존재로서 모든 존귀를 그 자신 안에 지니고 있으며, 그 각 존귀는 그 어느 피조물을 능가한다. 그러나 인간이 본성으로는 하나님과 거리가 멀며, 죄로 인해 부족하고 타락한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감해볼 때, 그의 존귀는 두려운 것이다. 그의 안력, 거룩함, 공의, 그리고 그의 선하심은 역시 두려운 존귀들이다. 그들은 주님과 그의 선하심을 두려워할 것이다.
[2] 이 두려운 존귀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이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를 두렵게 해야 한다. 이것은 회개할 줄 모르는 죄인들을 일깨워 그들을 회개케 할 것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 그를 즐겁게 해드리도록 노력하고, 그를 불쾌히 만드는 것은 두려워하게 할 것이다.
2. 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이 위대하신 하나님과 비교되기에는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하라(12절). "너희 격언은(너희가 죽었을 때 기억되기를 바라는 너희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보잘 것 없고 연약한, 그리고 쉽게 짓밟히고 바람에 불려 없어지는 재같은 속담이요, 너희의 방어하는 것은 썩어 없어지는 토성이니라. 너희에 대한 추억은 너희 몸보다는 오래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애석하게도 그것은 너희의 티끌과 함께 삽질 될 재와도 같구나." 우리 자신의 비천함과 죽어야 하는 운명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을 거스르기를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우리가 우리 형제들을 경멸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되는 그 좋은 이유를 깨닫게 될 것이다. 패트릭 주교는 이 구절에 대해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하나님 편에 서서 하는 너희의 간언은 티끌보다 낫지 못하며, 너희가 쌓아둔 이론은 쓰레기 더미에 불과하다.
소발에 대한 욥의 대답(5)(욥기 13:13-22)
욥은 여기에서 그의 결백함을 놓지 않기로 결심했을 뿐만 아니라, 결코 그것을 떼어놓지 않으려 하는 자로서 새롭고도 견고하게 그것을 붙잡고 있다.
Ⅰ. 욥은 그의 친구들과 모든 동료들에게 그를 혼자 내버려 두도록, 그리고 그가 말하려는 것을 막지 말고(13절), 그것에 열심히 귀를 기울여 주도록 간청하고 있다(17절). 욥은 그 자신의 이의를 명확히 표명하려 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그 자신 이외에는 그 누구도 그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잠잠하라. 더 이상 내게 너희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말고 내가 말하는 것을 열심히 들어달라. 그리고 확증하는 나의 맹서로써 이 논쟁을 끝내자."
Ⅱ. 욥은 그의 결백함에 대한 그 자신의 양심의 증거를 고수하고자 결심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그의 친구들이 그러한 그를 완고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의 지조를 흔들 수 없었다. "나는 내 자신을 옹호하는 말을 하겠다. 무슨 일이 임하든지 내가 당하리라(13절). 나의 친구들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든,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나를 더 나쁘게 생각하든, 나는 상관하지 않으리라. 나는 하나님이 너희처럼 방어해 주는 척하다가 공격하시지 않기를 원하노라. 그는 나를 의롭다 하실 것이고(18절), 그 때에는 내게 해로운 일이 없을 것이다." 올바른 자들, 그리고 그들의 정직함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기쁘게 모든 일들을 맞아 들일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들은 그것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다."
욥은 "그 행위를 변백할" 것을 결심하고 있다(15절). 그는 정직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서 얻는 만족을 결코 떠나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말한 모든 말들을 정당화시킬 수 없었을지라도 대체로 그의 행위는 선했고 또 그는 그의 의로움을 변백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가 왜 변백하지 않겠는가?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라고 말하는 히스기야처럼 그것은 그의 현재의 상태를 지속하게 하는 큰 힘이 되었다. 아니, 그는 그 자신의 주장을 배반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진실됨을 공개적으로 언명하려 했다. "내가 잠잠하고, 내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나의 침묵은 이제 영원히 나를 잠잠케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분명 기운이 끊어질 것이기 때문이다"(19절). "만일 내가 결백을 인정받을 수 없다면 나로 하여금(엘리후처럼, 32:19, 20) 말을 발하고 시원함을 얻게 하라."
Ⅲ. 욥은 그의 고통과 비참함이 극심한 것을 원망하고 있다(14절).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겠느냐?"
1. "왜 내가 이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느냐?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악하지 않다는 것을 아시고서도 내게 이러한 고통을 주시는 것을 의아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욥은 그의 극심한 환난으로 인해 그의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살을 물어 뜯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자신이 곧 죽게 되었음과 그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은 어떤 극악한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를 책망할 수가 없었고, 그 자신도 자기의 어떤 죄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 때에 그가 이처럼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2. "왜 내가 나의 무죄함에 대한 주장을 누르고 꺾겠는가?" 사람은 자기가 말하려는 것을 계속하기가 매우 어려울 때는 입술을 깨문다. "이제" 그는 말하고 있다. "내가 거듭 말함으로써 나를 번민케 하고, 나의 고통을 가중시키며, 내 생명을 위협한다고 해서 어찌 말할 자유마저 얻지 못하겠는가?" 모든 것을 잃고 난 후 온 힘을 다하여 참고 있는 자에게 있어서, 선한 양심과 훌륭한 명예에서 오는 위안을 거부당하는 것은 그를 몹시 노하게 만들 것이다.
Ⅳ. 욥은 하나님 안에서 그 자신을 위로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확신을 여전히 지키고 있다.
1. "그가 하나님께 의지한 것은 의롭다함과 구원에 대한 것이었다. 이 두 가지 큰 일을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대할 수 있다.(1) 의롭다함(18절).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전체적으로 내가 스스로 의로운 줄을 아노라." 그는 그의 구속자가 살아계신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19:25), 이러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 육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면서, 하나님과 더불어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는 그들에 대한 정죄함이 없으며, 누가 그들을 비난하든지 간에 그들은 의롭다함을 얻으리라는 사실을 확신해도 좋다. 즉 그들은 그들이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 구원(16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그가 의미하는 그것은 현세적인 구원이 아니었다(그는 그것을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영원한 구원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의 구주가 되시어, 그를 행복하게 만드실 뿐만 아니라, 그가 행복하게 되리라는 꿈과 결실에 있어서 그의 구원이 되시기도 한다는 사실을 매우 확신했다. 그리고 그가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의지하는 이유는 "사곡한 자는 그의 앞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는 그 자신이 사곡한 자가 아니라는 것과, 하나님은 사곡한 자 이외에는 거절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거절당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단언하였다. 성실은 복음주의의 완성이다. 성실이 부족한 것 이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우리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2. 그는 꾸준히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다(15절). "그가 나를 죽이시더라도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역주, 우리말 성경과 영어 성경의 본문이 다르다). 이것은 믿음에 대한 고도의 표현으로서, 비록 그가 우리를 죽이실지라도 우리는 모든 짐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즉, 그가 대적으로서 우리를 치시는 것 같이 보일 때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친구로서 기뻐해야 한다(23:8-10). 모든 것이 우리를 대적하는 것처럼 보일 때라도, 우리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게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렘 24:5). 우리는 의무를 행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귀중한 모든 것, 심지어 생명 자체까지도 바쳐야 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히 11:35). 우리는 약속을 이루기 위한 모든 방법이 다 완성될 때까지, 그것을 믿어야 한다(롬 4:18). 우리는 즐거워할 것이 없을 때,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해야 하며, 비록 우리가 현재 그로부터의 위로를 발견할 수 없다하더라도, 그에게 매달려야 한다. 죽어가는 순간에 우리는 살아있는 위로를 그로부터 얻어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그가 우리를 죽이실지라도 그를 의지하는 것이다.
Ⅴ. 욥은 만일 하나님께서 그 협의에 대한 예비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허락만 하신다면 심지어 하나님과도 그 주장을 논의하기를 원하고 있다(20-22절). "욥은 하나님과 변론하기"를 원했었고(3절), 지금도 여전히 그것을 원하고 있다. 그는 "숨지 아니할" 것이다. 즉 그는 그 공판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며, 그 결과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이나, 여기에는 두 가지 단서가 필요하다.
1. 그의 몸이 이처럼 극심한 고통으로 괴롭힘을 당해서는 안 된다.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소서. 왜냐하면 내가 이러한 극한 상황에 있는 동안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친구들과 더불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수 있으나, 주께 나 자신이 말씀드릴 수 있는 방법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때 평정을 지닐 필요가 있고, 될 수 있는 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모든 것에서 떠나야 한다.2. 무서운 하나님의 위엄으로 그의 마음을 두렵게 해서는 안 된다.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마시옵소서. 주님의 임재를 온화하게 나타내시거나 또는 나로 하여금 어떠한 혼란이나 혼돈을 겪지 않고 그것을 참을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모세도 하나님 앞에서 떨었고, 이사야와 하박국도 역시 그러했다. "오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당신의 성전 안에 계실 때에도 두려운 분이시옵니다." "주여" 욥은 말하고 있다. "이 육체적 고통과 함께 나의 마음을 이러한 놀라움 속으로 몰지 마옵소서. 왜냐하면 그렇게 될 때 내가 분명 소송할 사유를 잃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병들었거나 임종을 눈 앞에 두고 있을 때, 회개와 개종을 연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보라. 선한 사람들과 그리고 특히 악한 사람들은 그들이 고통의 그물에 걸려 죽음에 체포될 두려움 속에 있을 때,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 그와 변론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때에 할 일이 많이 쌓여 있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욥처럼 모든 일을 완수해 놓고 숨이 끊어질 순간을 기다리는 자는 매우 마음이 편할 것이다.
(1) 욥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그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듣고 거기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주는 나를 부르시옵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2) 또 기도로써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그 대답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로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22절). 이것을 9장 34절과 비교해 보라. 거기에서도 욥은 이와 똑같은 취지의 말을 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현재 그의 상황이 매우 불리하였으므로 그는 그것을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위축되고 있었다. 한편, 그는 그의 경우가 선하다는 것을 매우 확신하고 있었고, 결국 현재의 고난이 걷힌 후에, 그 기쁨을 누릴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처럼 거룩한 담대함을 가지고 정직한 자는 은혜의 보좌로 나오면서, 그곳에서 자비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소발에 대한 욥의 대답(6)(욥기 13:23-28)
Ⅰ. 욥은 그의 죄를 조사하면서 그것들이 드러나기를 간청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우러러보면서 범죄한 수효가 얼마나 되며("나의 불법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그 세부적인 항목이 어떠한 것인가를 묻고 있다. "나의 허물을 내게 알게 하옵소서"(23절). 그의 친구들은 그의 죄가 얼마나 많으며 얼마나 극악한가를 이미 그에게 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22:5). "그러나 주여" 그는 말하고 있다. "내게 그것을 알려 주옵소서. 주의 심판은 진리대로이오나, 그들의 것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옵니다." 이것은 여러 면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1. 가혹한 대우에 대한 격렬한 원망으로서, 즉, 하나님께서 그의 허물로 인해 그를 벌하시거나 그의 허물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지 않는 것을 원망하는 것으로서 볼 수 있다.2. 또는 책망하는 그의 친구들을 떠나 하나님께로 향해 신중히 호소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그의 모든 죄악이 드러날 수 있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그의 죄악은 그의 친구들이 혐의를 잡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많지도 또한 극악하지도 않다는 사실이 밝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 또는 엘리후가 그에게 지시한 것과(24:32) 같은 취지를 지닌 경건한 요청으로 볼 수 있다. "나의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진실로 회개한 자는 그 자신의 가장 나쁜 면을 알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우리의 허물들이 무엇인가 알기를 원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것들을 자백하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앞으로 그것들을 경계하도록 해야 한다.
Ⅱ. 욥은 하나님께서 그로부터 물러 서신 것을 비통하게 원망하고 있다(24절).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나이까?" 이것은 그의 외적인 고통 이외의 것을 의미하는 것임에 틀림 없다. 재산과 자손과 건강의 손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질 수도 있었다. 그러한 것들만이 손실의 전부였을 때,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축복했었다. 그러나 "그의 영혼 또한 심히 곤고케" 되었고, 이것이 바로 그가 여기에서 탄식하고 있는 이유였다.
1. 전능자의 은총을 의심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외인을 대하시듯 얼굴을 가리우셨고, 그를 기뻐하시지 않으셨으며, 그를 부끄럽게 여기고 경홀히 여기셨다.2. 전능자의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고,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하나님은 그를 대적으로 여기시어, 그를 향해 화살을 쏘셨고(6:4), 그를 과녁으로 삼으셨다(17:20).
성령은 때로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며, 그의 두려움이 이 세상에 있는 그의 성도들과 종들에게 가장 훌륭하고 진귀한 것임을 발견한다. 하늘에 대한 증거는 가리워져 있으며, 좀더 쉽게 깨달을 수 있는 교제는 방해를 받고 있고, 거룩한 진노에 대한 두려움이 큰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현재 위로의 보답은 단절되어 있다(시 77:17-9; 88:7, 15, 16). 이러한 것들이 은혜로운 영혼들에게는 매우 큰 고통이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잠 18:14).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욥은 여기에서 "주께서 어찌 얼굴을 가리우시나이까?"라고 물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시는 느낌이 들 때는 언제나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즉 그가 우리를 징계하시는 죄가 무엇이며, 그가 우리에게 의도하신 유익이 무엇인가를 조사하는 데 관심을 기울려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욥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유형이었는데, 사람들 뿐만 아니라(사 53:3), 하나님도 그 얼굴을 가리웠고, 그가 십자가에 달려,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의 하나님이시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외치셨을 때는 어둠만이 그를 둘러 싸고 있었다. 만일 이 일이 이 무성한 나무들에게 행해졌다면, 시돈 나무들에겐 어떠한 일이 행해질 것인가? 그들은 영원히 버림 받을 것이다.
Ⅲ. 욥은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기엔 아주 무능력함을 하나님께 겸손히 탄원하고 있다(25절).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래시며 마른 검불을 따르시나이까? 주여 이미 쓰러진 자를 짓밟거나, 주를 대항할 힘을 가지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장하지도 않는 자를 억누르는 것이 주를 영예롭게 하는 것이 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리라는(마 23:20) 사실을 믿을 정도로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깨달아야 한다.
Ⅳ. 욥은 하나님께서 그를 냉혹하게 다루신 것을 슬피 원망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와 더불어 다투시는 것은 그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있으나, 그의 죄를 수긍하기는 어려웠다.
1. 그가 오래 전에 범했던 죄악이 이제 다시 회고되어, 옛날의 허물로 인해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은 가혹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26절).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나이다." 고통은 괴로운 것이다. 그것을 기록한다는 것은 처형하라는 명령서로서 쓰여진 심의와 판결을 시사한다. 그것은 그의 고난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기록된 것은 그 고난을 위해 남겨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주께서 나로 나의 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받게 하시나이다." 즉, "주께서 그것으로 인해 나를 벌하시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로 그것을 기억하여 다시 회개하도록 만들려 하시나이다."(1) 하나님은 때로 그의 가장 훌륭하고 귀한 성도들과 종들을 대적하시어, 매우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사, 외적 환난과 내적 불안, 그리고 몸의 고통과 심령의 고통을 주신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을 겸손케 하시고 그들에게 후에 올 결과가 선하다는 것을 증거하시며 또한 그렇게 행하신다.
(2) 어렸을 때에 지은 죄는 내적인 슬픔과(렘 31:18, 19), 외적인 고난에(20:11) 있어서 나이 들었을 때의 징벌이 되는 수가 많다. 시간은 범죄를 도발하여 주지 않는다.
(3)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실 때 거기에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받고 잊혀진 죄를 상기하여 그것을 회개함으로써 우리가 그것을 떠날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하는 그의 의도가 들어있다. "이것이 우리의 죄를 없이하여 주는 모든 열매이다."
2. 욥은 그의 현재의 실수와 과실을 이처럼 엄격하게 지적하며 이처럼 혹독하게 비난하는 일은 가혹하다고 생각하고 있다(27절). "주께서 내 발을 착고에 채우시나이다. 그리하여 나를 괴롭히시고 수치스럽게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나로 주의 분노의 치심을 피하게 하지 못하도록 만드시며, 또 내 모든 동작을 신랄하게 비평하시고, 내 모든 길을 세심히 살피시사 잘못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아니, 잠깐 한눈을 팔거나 실언을 하기만 해도 나를 징계하시나이다. 아니, 주께서 내 발자취를 한정하시고, 내가 실수한 모든 것을 계산하시어 기록하시나이다. 또는 내가 잘못 걸음을 내딛는 즉시, 비록 그것이 약간만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나를 징벌하시나이다. 징벌은 죄인의 발꿈치를 추적하옵니다. 그러므로 늙었을 때와 장성하던 때의 죄는 나의 재앙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이처럼 그를 대적할 만한 이점을 추구하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실수한 것을 주목하실 만큼 과격하시지 않다. 만일 그가 이처럼 과격하시다면 우리가 거할 곳은 없다(시 130:3). 그는 그러하시기보다는 오히려 공적에 따라 우리를 대하시지 않으며, 또한 "은밀히 조사하여 드러난" 것이 아닌, 명백한 죄로써 우리를 대하지도 아니하신다(렘 2:34). 그러므로 이것은 욥의 우울증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의 온건한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이처럼 가혹한 주인으로 표현한 적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2) 그러나 우리는 과거의 죄를 발견해내고, 앞으로는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처럼 엄격하고 세심한 경계를 우리들 자신과 우리의 발걸음에 기울여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이처럼 "우리 발길을 재는" 것은 좋은 일이다.
Ⅴ. 욥은 하나님의 무거운 손 밑에서 그 자신이 후패되어 감을 발견하고 있다(28절). "그는(즉 인간은) 썩는 물건" 즉, 자체 내의 요인으로 썩어들어가는 "물건의 후패함 같으며," 끊임없이 점점 닳아 없어지는 "좀먹은 의복 같았다." 또는 "그는 (즉 하나님은) 썩이는 것 같이 그리고 좀같이 나를 후패케 했다." 이것을 호세아 5장 12절,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라는 내용과 비교해 보라. 그리고 시편 39편 11절을 보라.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빨리 노쇠한다. 하나님의 책망 아래 있을 때는 특히 더 빨리 쇠퇴한다. 영혼이 건전치 못할 때는 육신도 강건치 못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시 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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