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욥기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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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소발에 대한 욥의 대답(1)(욥기 12:1-5)

여기에서 욥이 그들의 친구들에게 향한 비난은 그것이 옳든 그르든, 매우 날카로운데, 그것은 교만하고 비웃기 잘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책망과, 그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공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Ⅰ. 욥은 그들 스스로에 대한 그들의 자만을 비난하고 있으며,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혜가 그의 지혜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들의 견해에 대해 그것은 연약하고 어울리지 않으며, 비웃을 만한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여기에 제시하고 있다.

1. 욥은 그들에 대해 그들은 지혜를 독점하려 하는 자들이라고 묘사하고 있다(2절). 그는 빈정거리며 말한다.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 너희는 너희들 스스로를 모든 인류에게 지시하고 법도를 전하기에 합당한 자들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너희들 이외에는 그 누구도 진실과 거짓, 악과 선을 구별할 능력이 없으며 따라서 너희의 판단이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평가하고 심리해야 하는 표준으로서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의 돛은 너희보다 낮아야 하며, 옳든 그르든, 우리는 너희가 말하는 대로만 말해야 하고 너희 세 사람만 다수이고 결정권을 가까이 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그들 자신이 다른 모든 인간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거나, 마치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대담하고 거만하게 이야기하고 행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죄악스런 일이다.

그는 말을 계속하고 있다. "너희는 현재에도 너희처럼 지혜로운 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고, 너희가 떠나면 이 세상은 모두 미련한 자만 남게 되고, 너희 해가 지면 암흑이 오리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우리들이 없어지면 말할 수 없이 큰 손실이 있을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잘못된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령이 남아있게 하시며, 그의 일을 행하기에 우리보다 더욱 합당한 다른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실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자들과 선한 자들이 죽을 때 지혜와 선함이 그들과 함께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로가 된다. 어떤 사람은 소발이(자기 생각대로) 욥과 다른 사람들을 들나귀 새끼에 비교한 것을(11:12) 여기에서 비난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나귀이며, 너희들만이 사람이구나."

2. 욥은 지혜의 선물을 나누어 가졌으므로 재판관의 자격을 요구할 수 있는 자로서 그 자신을 제시하고 있다(3절). "나도 너희 같이 총명(마음)이 있다. 뿐만 아니라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다. 나도 너희와 같이 거룩한 섭리의 방법과 의미를 판단할 수 있으며, 그 어려운 부문을 해석할 수 있다." 그는 그 자신을 높이기 위해 이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나도 너희같이 총명이 있다"고 말한 것은, 자기 자신을 크게 칭찬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나도 너희와 같이 이 문제를 이해하고 있다"라는 말도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능력의 소유자라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것에 대해 그와 그들이 어찌 자만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너희가 사실이라고 말했던 것들은 너무도 자명한 일들이고 일반적인 논제이므로, 너희나 나처럼 훌륭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교만을 꺾기 위해 그리고 그들 자신의 강단의 학자로 평가하고 있는 것을 저지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우리처럼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 가를 그리고 아마도 우리보다 더욱 많은 것을 더 선한 목적을 위해 알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당연히 우리의 지식을 자랑할 수 없을 것이다.

(2)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혹독하게 비난하고 그들과 다투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 우리는 그들도 우리와 같은 총명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 스스로 판단한 능력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오히려 그들이 우리 보다 못하기는커녕 더 우월할지도 모르며, 그들이 옳고 우리가 그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판단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되며(롬 14:3), 또한 선생인척 해서도 안 된다(약 3:1). 한편, "우리는 다 형제이다"(마 23:8).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또 그들과 더불어 논쟁을 벌이도록 하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우리와 같이 이성이 있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Ⅱ. 욥은 그들이 자기를 매우 업신여기고 있는 것을 원망하고 있다. 거만하고 그들 스스로를 과대 평가하는 자들은 보통 그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멸시하며 그들을 유린하기가 쉽다. 욥은 그것을 발견했고, 적어도 그가 그러한 일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4절). "내가 웃음 받는 자가 되었구나." 나는 이렇게 책망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말할 수가 없다. 우리는 욥의 친구들이 그를 모욕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거나, 그를 납득시키는 것 이외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생각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올바른 방법으로 그를 위로하려 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내가 웃음 받는 자가 되었다"고 외치고 있다.

우리는 책망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으며, 우리가 충고나 경고를 받기만 하면, 우리들 자신이 웃음 받는 자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러한 역정은 어리석은 것이며, 우리들 자신과 우리 친구들에게 매우 그릇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책망에는 가식적인 면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그들은 그를 위로하러 왔으나 그를 노하게 했고, 그에게 권고와 격려로 들려 주기 위해 왔으나,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효력을 거둘 만한 훌륭한 견해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므로 욥은 그들이 자기를 조롱했다고 생각했고, 이것은 그의 슬픔을 더해 주었다. 지극히 형통했다가 깊은 역경 속에 빠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몰락했을 때 짓밟힘을 당하고 모욕 당하는 것보다 더욱 비통한 일은 없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면으로 치우쳐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다음을 관찰하자.

1. 욥을 더욱 비통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이었다.

(1) 그들은 그의 "이웃"이었고(그 말이 의미하듯이) 그의 친구들, 동료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의 조롱은 흔히 매우 경멸스러운 것이고, 그것을 받는 자들은 언제나 매우 노하게 된다. "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그러나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시 55:12, 13).

(2) 그들은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자로서 신앙 고백을 한 자들이었다(역주. 한글 성경에는 신앙 고백을 한 사람이 욥인 것으로 번역되으나, 영어 성경에는 그 이웃이 신앙 고백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그 사람들이 조롱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하늘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고, 또 하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기도를 기뻐했고 감사하게 여겼으며 그들의 선한 의견을 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비방은 나를 더욱 슬프게 하고 있다." 하나님께 불러 아뢰는 자들이 그들의 형제를 조롱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약 3:9, 10). 그리고 어떤 선한 사람이 자기가 좋게 여기고 있는 자들에게서 나쁜 평을 받는 일은 그에게 매우 상심되는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이것은 결코 새로운 일은 아니다.

2. 그런 가운데 있는 욥을 지탱해 주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1) 욥은 가서 호소할 수 있는 하나님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아뢰어 부르심을 들은" 자를 조롱을 당한 자, 곧 욥으로 보고 있으며, (역주, 한글 성경과 같이) 이러한 풀이는 16장 20절과 일치하고 있다.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노라." 우리 친구들이 우리의 호소에 귀를 막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하시다. 그들이 우리를 정죄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결백함을 아신다. 그들의 우리를 악용한다 하더라도, 그는 우리를 선용하실 것이다. 그들이 우리를 거슬리는 대답을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친절한 대답을 주실 것이다.

(2) 그의 경우는 독특한 것이 아니라 매우 흔하다는 생각이었다. "의롭고 순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의로움과 순전함, 인간에 대한 그의 정직함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그의 경건함 마저도 비웃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의로움과 순전함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매우 영예가 되는 면은 잘 생각해 보지도 않고서, 그에게 약간의 연약함이나 부족함이 있는 것을 비웃는다. 경멸당하고 조소당하는 것은 정직하고 선한 자들이 옛날부터 당하는 운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벧전 4:12). 뿐만 아니라 만일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 된다하더라도 그것을 가혹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 "선지자들" 뿐만 아니라 교부 시대의 성도들도 "이같이 핍박하였다"(마 5:12). 그런데 우리가 그들보다 더 나은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3. 욥은 그것의 참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했는가?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부유하고 편하다고 생각했으므로, 궁핍 속에 빠진 그를 멸시했다. 그것이 세상의 방식이다. 우리는 그러한 예들을 매일 볼 수 있다. 형통하는 자들은 칭찬을 받으나, 몰락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을 타도하라"는 말이 퍼부어진다. "실족하는 자" 그리고 환난을 당하는 자는 비록 그가 이전에 등불처럼 빛났을지라도 그 때에는 꺼져가는 등불처럼, 우리가 땅에 던져 버리고 짓밟는 다 탄 양초의 심지처럼 여김을 받는다. 따라서 "평안한 자의 마음은 그를 멸시한다"(5절). 자기 세대에서 타오르면서 빛을 내는 등불과 같이 의롭고 순전한 자도 유혹에 빠지거나(시 73:2), 구셉 속에 가리우면 멸시 당한다.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자.

(1) 형통한 가운데서 살고 있는 자들의 일반적인 잘못은 무엇인가? 풍족하고 안이의 상태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자들은 빈곤과 고통과 슬픔에 처한 자들을 경멸한다. 즉, 그들은 없는 자들을 소홀히 여기며,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들을 잊고자 노력한다(123:4 참조). 술맡은 관원장은 잔에 있는 포도주를 마셨지만 요셉의 고통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은혜가 없는 부귀는 흔히 사람들을 이처럼 거만하게 만들며 그들의 가난한 이웃에게 이처럼 무관심하게 만든다.

(2) 역경에 처한 자들의 일반적인 운명은 어떠한가? 빈궁은 그들의 광채를 흐리게 하는 것을 돕는다. 비록 그들이 등불이지만 만일 은촛대를 잃게 되면, 그리고 기드온의 것처럼 흙으로 만든 항아리 속에 들어가게 되면, 아무도 그들을 이전처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평안한 자들은 그들을 업신여긴다.

 

12:2 없음.

 

12:3 없음.

 

12:4 없음.

 

12:5 없음.

 

12:6

소발에 대한 욥의 대답(2)(욥기 12:6-11)

욥의 친구들은 모두, 악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오래 형통할 수 없으며, 어떠한 현저한 심판이 곧 그들에게 임하리라는 원리에 따라 행하였다. 소발도 "악한 자는 눈이 어두워지리라"(11:20)는 말로 결론을 내렸다. 여기에서 욥은 이 원리에 맞서고 있다. 그리고 사람의 외적인 사태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미래의 상태를 위해 상과 벌에 대한 정확한 분배를 예비해 두시는 주권자로서 행하신다는 의견을 주장하고 있다.

Ⅰ. 욥은 악한 자들이 이 세상에서 오래 형통할 수도 있고, 또 흔히 그러하다는 것을 틀림없는 진리로서 단언하고 있다(6절). 심지어 큰 죄인들까지도 매우 형통함을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을 관찰하자.

1. 욥은 죄인들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그들은 "강도"이며,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가장 나쁜 종류의 죄인들이고, 불경스러운 자이며, 학대하는 자이다. 아마도 욥은 전에 그를 약탈한 적이 있었고, 언제나 노략과 약탈로써 살아갈지라도 형통하는 스바 사람과 갈대아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든 세상을 보았으나 상식을 거슬린 논쟁은 없다. 사실 위에 세워진 한 가지의 통찰력이 가정에 의해 조작된 스무 가지 개념 만큼의 가치가 있다. 또는 더욱 일반적으로 모든 교만한 압제자들은 도적이고 약탈자이다. 사람들을 해하는 일은 모든 인류의 권리를 옹호하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격노케 한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의의 약정을 깨뜨리는 자들이 모든 믿음에 대한 의무를 부수고 하나님 자신에게까지도 도전하며, 그를 격노케 하면서도 무사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2. 욥이 그들의 형통함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그들의 형통은 매우 컸다.

(1) 심지어 "그들의 장막도 형통한다." 즉 그들과 함께 살고 그들을 따르고 그들을 계승하는 자들도 형통한다. 마치 축복이 그들의 집안에 부여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속임수에 의해 얻는 것이 때로는 보전되어 그 자손들에게 상속되기도 한다.

(2) 그들은 "평안하다." 그리고 어떠한 해로움도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즉, 그들은 위협을 가하는 섭리나, 각성시키는 양심으로부터 어떠한 위험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들은 그들이 평안하다고 해서 안전한 것은 결코 아니다.

(3) "하나님이 그 손에 후히 주신다."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시 73:7), 단지 필요한 것 뿐만이 아니라 즐거움을 위한 것도-그들 자신만을 위한 것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도-현재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장차를 위한 것도 얻는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섭리의 손으로부터 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풍성히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깊은 믿음을 그들의 풍족함으로 판단할 수 없으며,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그들의 손에 가진 것으로써 판단 할 수 없다.

Ⅱ. 욥은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보잘 것 없는 피조물 즉, 짐승과 새와 나무와 심지어 땅에게까지 호소하고 있다. 이것들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너희에게 말하리라(7, 8절).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훌륭한 것들을 많이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

1.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강도의 장막을 형통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1) 짐승들 중에서도 더 큰 것은 더 작은 것을 삼키며, 더 강한 것은 더 약한 것을 노린다. 그리고 사람도 바다의 어족과 같다(합 1:14). 만일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피조물들 사이에 이러한 혼란은 없었을 것이며, 늑대와 양이 함께 누울 것이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2) 이 생물들은 악한 인간들에게 유용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형통함을 선포한다. 가축의 무리에게 그들을 소유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가를 물어 보라. 그들은 너희에게 이러한 강도, 이러한 포학자가 그들의 주인이라고 말할 것이다. 물고기와 새들은 자기네들이 교만한 죄인들의 식탁을 유익하게 해 주고, 그들의 쾌락을 만족시켜 주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땅은 그들에게 자기의 소산을 주며(9:24), 모든 피조물은 포학자들이 괴롭히는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다(롬 8:22). 사악한 자들이 그들의 욕정을 위한 음식과 연료로 만듦으로써 혹사당한 모든 피조물들이 언젠가는 그들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이다(약 5:3, 4).

2.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을 배울 수 있을 것이며, 명확하고 자명한 사실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한 이 모든 어려운 섭리들이 해결되리라는 것을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소발은 그것을 매우 오묘한 것으로 보고 있다(11:7). 욥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한 문제에 관해서 우리가 받고자 하는 것은 보잘 것 없는 피조물로부터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알지 못하랴?(9절) 누구든지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피조물의 책에서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가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판단할 자격도 없는 규율로써 이 모든 것들을 인도하고 다스리는 지혜로운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추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등의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최고의 통치권으로부터 우리는 비록 우리의 생각과는 반대가 될지라도 인간의 모든 일들을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Ⅲ. 욥은 모든 피조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타당함에 모든 것을 귀착시키고 있다(10절). "생물들의 혼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모든 생물 특히 인간들은 그들의 존재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고 있으며, 그들의 존재에 대해 그의 은혜를 입고 있으며, 생명을 지속시키기 위해 그에게 의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긍휼을 입고 있으며, 그의 지시와 지배 하에 놓여 있고, 전적으로 그의 시여에 달려 있다. 또한 그들의 생명은 그의 소환에 복종해야 한다. 모든 영은 그의 것이다. 따라서 그가 그 자신의 것으로써 그가 하고자 하시는 일을 할 수 없겠는가? "여호와"라는 이름이 여기에 사용되어 있다(9절). 그리고 욥과 그의 친구들 간의 대화에서 우리가 이 단어를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여기에서 뿐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하나님은 전능자(Shaldai)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기 때문이다.

Ⅳ. 이 구절. 즉, "입이 식물의 낮을 변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지 아니하느냐?" 라 는 말을 앞의 대화의 결론으로서, 또는 다음 오는 말의 서두로서 간주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은 정확히 말해서, 달고 쓴 것을 구별하는 구개와 같이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훌륭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욥은 그들이 말한 것에 대해 그 스스로 판단할 자유를 그들에게 요구하고 있으며, 그가 말한 것을 또한 그들도 판단할 자유를 가지기를 원하고 있다. 아니, 그는 누구든지 이 논쟁을 공정하게 판단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귀가 양쪽 편의 말을 분별하도록 하자. 그러면 그가 옳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말을 듣고 동의하기 전에 우리의 귀는 그것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가 맛으로써 어느 음식이 몸에 유익하고 유익하지 않은가를 판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별하는 영으로써 우리는 어느 이론이 건전하고 신선하며 유익한지, 그리고 어느 것이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해야 한다(고전 10:15; 11:13).

 

12:7 없음.

 

12:8 없음.

 

12:9 없음.

 

12:10 없음.

 

12:11 없음.

 

12:12

소발에 대한 욥의 대답(3)(욥기 12:12-25)

이것은 아무도 반박하거나 항거할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이 뜻하신 계획에 따라, 인간의 자손들의 모든 일들을 명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권세에 대한 욥의 고귀한 이야기이다. 욥과 그의 친구들이 그처럼 격렬하게 몰두했던 그 논쟁에서 벗어난다면 그들은 모두 놀라우리만치 훌륭한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는 때로 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를 거의 모르게 된다. 만일 사소한 일에 대해 견해가 서로 다른 지혜롭고 선한 자들이 그들이 일치하고 있는 큰 문제에 대해 깊이 유의하는 것은 그들의 영예이며 즐거움이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이 문제에 대해 욥은 그 자신답게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 어떠한 격렬한 원망이나 격분스런 비난은 없고, 모든 것은 용감하고 훌륭하게 언급되어 있다.

Ⅰ. 욥은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항거할 수 없는 능력을 단언하고 있다. 사람들에게도 "지혜와 명철"이 있다는 사실이 인정되어 있다(12절). 그러나 그것은 단 지 극소수의 사람들 즉 "늙은 사람들에게와" 장수하는 축복을 누린 사람들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다. 그들은 오랜 경험과 끊임없는 경험에 의해 그것을 얻는다. 그러나 그들이 그 지혜를 가지게 될 때, 그들의 기운은 쇠하여 그들의 지혜의 결실을 거두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지혜와 권능이," 가장 선한 것을 계획하는 지혜와 계획된 것을 이행하는 권능이 "하나님께 있다." 그는 우리처럼 관찰에 의해 모략이나 명철을 얻을 필요가 없으시며 그 자신 안에 그것을 본질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가지고 계시다. 옛 시대의 지혜에 비해 보면 옛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지혜란 어떤 것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적은 것에 불과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보다 더 적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일을 행하실 수 있으며, 그 무엇으로도 "그의 생각을 그치게 할 수는 없다." 이러한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삼은 자들은 행복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을 위해 예비된 무한한 지혜와 권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어리석고 무익한 것이다(14절). "그가 헐으신 즉 다시 세울 수 없다." 거룩한 섭리와 더불어 다투거나 섭리의 법도를 어길 수 있는 것은 없다. 욥이 앞에서,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랴"(9:22)라고 말한 것 같이, 그는 다시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반박될 수 없으며, 또한 그가 행하시는 것이 파괴될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 헐으시려는 것은 다시 세울 수 없다. 그 증거로, 건축자가 더 계속하여 쌓아올릴 수 없었던 바벨탑과 결코 복귀될 수 없었던 소돔과 고모라의 황폐함을 들 수 있다(사 25:2; 겔 26:14; 겔 18:21 참조).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영원히 감금된 자는 풀려날 수가 없다. "그가" 병으로써 사람을 "가두신 즉," 그를 곤궁에 처하게 하시고 그의 일 속에서 그를 당황케 하신 즉, "놓이지 못한다." 그가 무덤 속에 사람을 가두시면 아무도 그 밀폐된 문, 즉 지옥, 흑암의 굴레 속에 잠겨진 문을 부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그 깊은 심연을 지날 수 없다.

Ⅱ. 욥은 자연 속에서 이 이론을 증거하는 일례를 들고 있다(15절). 하나님은 물을 명하시며, "물을 옷에 싸신다"(잠 30:4). 그리고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리신다(사 40:12). 또한 하나님은 물을 모자라게 하거나 지나치게 하심으로써 인간의 자손들을 벌하실 수 있다. 덕이 중용 안에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쪽이 모자라거나 지나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덕의 법도를 깨뜨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극단적인 것들로써 그들을 징계하시며 중용 속에 있는 자비를 그들에게 부여 하시기를 거부하신다.

1. 큰 가뭄은 때로 큰 징벌이 된다. "그가 물을 그치게 하신 즉 곧 마르느니라." 만일 하늘이 놋쇠와 같다면 땅은 쇠와 같다. 만일 비가 오지 않으면, 수원은 마르고 그 하천은 고갈된다. 그리고 밭은 메말라 풍성한 열매를 거두지 못하게 된다(암 4:7).

2. 큰 홍수는 때로 큰 징벌이 된다. 하나님은 물을 일으키시며 "땅을 뒤집어" 그 소산과 건물을 파괴하신다. 폭우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한다"고 한다(잠 28:3).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방법으로 사악한 백성들과 싸우시며, 그들로부터 자비를 박탈하심으로써 그들을 혹독하게 대하시는가를 보라. 그리고 우리는 그와 싸울 만한 능력이 얼마나 부족한 가를 보라. 만일 우리가 그 순서를 바꾸어도 된다면 이 구절은 하나님의 능력을 언제나 기념하게 하는 일례인 노아의 홍수를 적절히 언급해 놓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 때에 하나님은 진노하시어 비를 퍼부으셨고, 그것은 땅을 뒤집었다. 그러나 자비로써 하나님은 그것을 그치게 하셨고, 하늘의 창문과 크고 깊은 물줄기를 막으셨으므로 잠시 후에 마르게 하셨다.

Ⅲ. 욥은 인간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능력있게 다스리시는 일 속에서, 즉 그들의 목적을 방해하고 그것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목적을 돕도록 하며, 그들의 모든 모사를 지배하고 그들의 모든 시도를 압도하며 그들의 모든 반항을 극복하는 일 속에서 그것에 대한 많은 예들을 들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얼마나 변하게 하시는가! 그는 얼마나 쉽고 얼마나 놀라웁게 그들을 변화시키시는가!

1. 일반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16절). "능력과 도리가"(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그에게 있고," 능력과 일관성이 그에게 있다. 원문에 있는대로 보면 그것은 매우 멋이 있는 단어이다. 그에게는 바로 그 지혜의 정수와 정제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능력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에게 있다." 그는 스스로 있는 자이며, 그에 의해 그리고 그 안에 모든 것이 생존한다. 이 능력과 지혜를 가지셨으므로 그는 기꺼이 그를 섬기려는 뜻을 지니고 있는 지혜롭고 선한 자들 뿐만 아니라, 그의 섭리의 계획을 돕는 데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고 어리석고 악한 자들까지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계신다.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다." 속임을 당하는 가장 천한 자들이라고 해서 그가 소홀히 여기시는 것은 아니며, 속이는 가장 교활한 자들도 그들의 온갖 기교를 써서도 그의 감시를 벗어날 수 없다. 이 세상은 속임수로 가득 차 있다. 인류의 절반이 다른 사람들을 속이며, 하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을 묵인해 주시나, 이 두 가지는 모두 결국 그에게 영광을 가져다 줄 것이다. 속이는 자들은 속는 자들을 이용한다. 그러나 위대하신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이용하시며, 그들을 이용하여 역사하시는데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다. 그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어리석은 자들과 악한 자들을 조종할 만한 지혜와 힘을 가지고 계시며, 전자는 약하고, 후자는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이용하여 그 자신의 목적을 돕도록 하는 방법을 알고 계신다. 야곱이 속임수로 축복을 얻었을 때, 하나님의 은총의 계획이 섬김을 받았다. 아합이 거짓 예언에 의해 출정하여 자신의 파멸을 초래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계획을 도왔다. 그리고 하나님은 "속은 자와 속이는 자를" 임의로 다스리실 수 있다(겔 14:9, 참조). 만일 하나님이 이 양자를 구속하고 그들로부터 그 자신이 영광을 입도록 하는 방법을 모르셨다면 하나님은 속이는 자의 죄악이나 속는 자의 비참함을 결코 허용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찬송할지어다. 전지하신 주 하나님"은 이처럼 다스리신다. 그리고 그가 다스리시는 것은 퍽 다행스런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에는 지혜와 정직함이 거의 없을 것이므로, 세상은 오래 전에 혼돈과 멸망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2. 욥은 다음에 나라와 왕국의 변혁되는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대한 특별한 예들을 들고 있다. 욥은 개인과 그 가족에 대한 섭리의 작용 속에서보다는, 여기에서 그의 증거를 꺼내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 더욱 높고 넓게 진술되어 있을수록 그들에게 내려진 변화는 더 두드러지게 보이며, 따라서 더욱 혁혁하게 그 속에서 섭리가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땅의 큰 자를(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사 22:18) 광막한 지경의 공같이 던지 신다면, 적은 자는 더욱 그러하시리라는 사실은 쉽게 입증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나라와 왕국이 복종해야 하는 하나님과 더불어 우리가 다툰다는 것은 매우 미친 짓이다.

어떤 사람들은 욥이 여기에서 강력한 나라들, 즉(창 14:5, 6; 신 2:10, 20 에 언급된) 르바, 수스, 엠, 그리고 호리 족속들이 근절된 사실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아마도 그 족속들이 매우 이상하게 얼이 빠지고 연약하게 된 사실이 그 속에서 특별히 지적되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나라에서 언제 그와 같은 일이 있든지 간에 그것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들 스스로를 매우 강력하고 민첩하고 절대적인 자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미치는 그의 통치권을 주시해야 한다. 이것을 엘리바스의 발언(5:12 이하)과 비교해 보라. 여기에 열거된 세부적인 변화를 모아 보자. 하나님은 어떤 족속들을 멸하시고 그 자리에 다른 족속들을 세우시거나, 또는 어떠한 특별한 정부나 사역자들을 축출하시고 그 자리에 다른 자를 택하시어 그 나라에 축복이 될 수도 있는 일들을 행하심으로써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신다. 20년 전에 우리의 땅에서 있었던 그 영광스런 혁명을 보라. 그 속에서 우리는 욥의 이 이야기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행복한 사실을 볼 수 있다.



(1) 지혜로운 자들은 때로 이상하게 당황하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손이 인정되어야 한다(17절). 그가 모사를 그들에게 승리하여 거둔 전리품처럼 "벌거벗겨 끌어가신다." 그들이 계략으로써 탈취한 모든 영예와 재물을 끌어가신다. 아니, 그들이 축하를 받은 지혜 자체와 그들의 계획 속에서 그들 자신에게 약속했던 그 성공을 빼앗아 가신다. 그들의 모든 계략이 무효화되고 그들의 의도가 실패로 돌아갈 때까지도 하나님의 계획은 물러서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혜에 대한 만족과 명성을 모두 빼앗겨 버린다.

"그가 재판장으로 어리석은 자가 되게 하신다." 그들의 마음 위에 역사하시사 하나님은 그들로부터 일에 대한 자격을 박탈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상 어리석은 자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들의 일을 주관하심으로써 하나님은 그들의 계획의 목적과 결과를 그들이 뜻했던 것과는 아주 반대가 되도록 만드신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을 어리석은 자처럼 만드신다. 성서의 이 말씀이 놀랍게 이루어진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아히도벨의 모사도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했고, 그는 그의 이름처럼 "어리석은 자의 형제"가 되었다(사 19:13, 참조). "소안의 방백들은 어리석었도다. 그들은 애굽 지파들의 모퉁이 돌이어늘 애굽으로 그릇가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들은 그들의 지혜를 자랑하지 않도록 하며, 유능한 모사와 재판장들은 그들의 지위를 자랑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의 유능함을 지속시키기 위해 겸손히 하나님께 의지하도록 하자. 법도에 의해 그들의 지혜를 견고히 지니는 듯이 보이는 노인들도, 그리고 그들 자신의 근면으로 인해 그것을 얻었으므로 그것에 대한 영예를 결코 빼앗기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노인들까지도, 그들을 두 번째의 아이들로 만드는 노쇠함으로 인해 그것을 빼앗길지도 모르며, 또 흔히 빼앗긴다. "그가 늙은 자의 지식을 빼앗으신다"(20절). 충고해 줄 것을 많이 요청 받는 늙은 자들은 그들을 의지하는 자들을 실망시킨다. 우리는 늙었으나 둔한 왕에 대해 읽을 수 있다(전 4:13).



(2) 높은 지위에서 권세를 지닌 자들은 이상하게 몰락하고 황폐케 되며 노예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그들의 교만을 꺾으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다(18절). 하나님을 "열왕의 맨 것을 풀어" 그들의 하인들을 다스리고, 다분히 그들을 종으로 만들어 혹독하게 부려먹던 그들의 능력을 빼앗으신다. 그는 그들의 영예와 권세를 나타내는 모든 기와 그들의 포악함을 도와 주는 모든 것들을 빼앗으시며, 그들의 끈을 푸신다. 그리하여 칼은 그들의 팔에서 떨어진다. 만일 끈을 풀어 종속되었다는 표시로 "그들의 허리를 동인" 후 곧 그들의 머리에서 왕관이 갑자기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종들은 그들의 허리를 동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제사장들을 벌거벗겨 끌고 가시고" 그들의 모든 권력과 재물 그리고 그들이 즐거워 하고 자랑하던 모든 것들을 빼앗으신다(19절).

왕들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관할권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신이나,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인간이며, 그들은 일반적인 인간의 생활에서보다도 더 많은 변화를 겪는다.



(3) 강한 자들은 이상하게 약해진다. 그러나 그들을 약화시키고(21절), "권력이 있는 자를 넘어뜨리시는"(19절) 분은 하나님이시다. 강한 몸은 늙고 병들어 약해지고, 강한 군대들은 무위도식하게 되어 아무 쓸모 없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힘은 치명적인 격타를 막아 내지 못할 것이다. 전능자 앞에서는 그 어떤 힘으로도, 골리앗의 힘으로도 대항 할 수 없다.

(4) 웅변으로 명성을 날리고 공적인 사업을 맡은 자들은 이상하게 잠잠해져 할 말이 없어진다(20절). 하나님은 "충성된 자의 말을 없이 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의도했던 바대로 그리고 그렇게 했던 바대로 자유롭고 명백하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무뎌져 더듬거리고 아무런 유익을 거두지 못하게 된다. 또는 그들은 그들이 의도했던 것을 말할 수 없고 오히려 발람처럼 저주하려 했던 자들을 축복한다. 그러므로 웅변가는 그의 수사학을 자랑하지 않도록 하자. 그리고 사람의 입을 만드신 하나님이 그것을 빼앗으시지 않도록 나쁜 목적에 그것을 사용하지 않도록 하자.

(5) 영광과 존경을 받은 자들은 이상하게 치욕을 당한다(21절). 하나님은 "방백들에게 멸시를 쏟으신다." 그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 스스로에게 천한 일을 행하도록 만드시거나, 그들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를 바꾸도록 만드신다. 만일 방백들 스스로가 하나님을 영예롭지 못하게 하고 그를 멸시한다면,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욕하고 짓밟는다면, 그들은 경홀히 여김을 당할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멸시를 쏟으실 것이다(시 107:40, 참조). 대체로 권력을 쥐고 있을 때 매우 오만하고 무례했던 자들이 몰락했을 때에 그들처럼 멸시당하는 자들은 없으며, 다른 사람들에 의해 모욕 당하는 자들은 없다.

(6) 은밀히 감추어졌던 것들이 이상하게 드러나며 공개된다(22절). "하나님은 어두운 가운데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신다." 치밀히 짜여진 계획도 발각되어 격파될 것이다. 치밀하게 행해지고 교묘하게 숨겨진 사악함은 발각이 되며, 그 범죄는 응당한 심판, 즉, 은밀한 반역(전 14:20)과, 은밀한 살인, 은밀한 음행을 초래한다. 방백들의 각의도 하나님의 눈 앞에 있다(열하 6:11).

(7) 나라에도 흥망과 성쇠가 있으며,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23절). 하나님은 때로 "그 수효를 커지게도 하시고" 그 영토를 넓히시기도 한다. 그리하여 어떤 나라는 만국 가운데 거국이 되어 막강해 진다. 그러나 얼마 후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해서 그들은 멸망당하고, 곤경에 처하며, 수효가 줄어들고, 가난해지며, 감소되며,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이웃 가운데에서 멸시받는 존재가 되며, 열방 중 머리되었던 자들이 꼬리가 된다(시 107:38, 39 참조).

(8) 대담하고 용감한 자들, 그리고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던 자들은 이상하게 위축되고 겁쟁이가 된다(24절). 하나님은 "만민의" 지도자였고, 지휘자였던 그리고 무사다운 열정과 큰 업적으로 이름이 나 있는 "두목들의 총명을 빼앗으신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무책임했고,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에도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다(시 76:5).

(9) 전 속력을 내어 그들의 계획을 추진하던 자들은 이상하게 어리둥절 해지고 당황한다. 그들은 어디를 가야할 지, 무엇을 행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의 모사는 일정하지 않으며 그들의 동기는 불분명하여, 그들은 거친 들로 유리하는 사람들처럼(24절), 어둠 속을 더듬으며,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면서(25절), 이리 저리로 방황한다(사 59:10). 하나님은 곧 치밀한 모략군들을 난처하게 만드시고, 그들의 매우 훌륭한 기지를 종식시키실 수 있다. 그리하여 그들이 교만하게 행하던 그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들보다 높으심을 보이신다.

이처럼 나라의 혁명은 압도하는 섭리에 의해 기묘하게 이루어진다. 천지가 진동하더라도 주님은 영원히 왕의 보좌를 지키시며 그와 더불어 우리는 "견고한 나라"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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