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대답(5)(욥기 10:1-7)
Ⅰ. 욥의 원망 속에는 강한 결심을 주장하는 태도가 나타나 있다(1절). 그의 사정을 하나님께 탄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위압되어 있었기 때문에, 욥은 그의 분노를 폭발시킴으로써 그 자신의 긴장을 풀고자 결심하고 있다. 그는 격렬한 언어로 시작하고 있다.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다. 내 영혼이 이 육체를 싫어하고 그것을 저버리기를 원하고, 생명에게서 떠나기를 원하는구나. 그것을 싫어하고 혐오하면서 죽음을 갈망하는구나." 은혜의 부족함으로 인해 그는 자연 그 자체의 명령을 거역하였다. 우리는 인간답게 행해야 하며 거룩한 자답게 행해야 한다. 믿음과 인내는 우리로 하여금 살기에 곤비함을 느끼지 않도록(그리고 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그것을 학대하지" 않도록) 막아줄 것이고, 심지어 섭리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매우 혐오하도록 만들 때에도 그렇게 해 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징계를 혐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욥은 살기에 곤비했고, 또 어떠한 방법으로도 편안함을 얻을 수 없었으므로, 원망의 말을 터트리기로 결심하고 있다. 그는 격렬한 손에 의해 그의 영혼을 토로하려 하지 않고, 격렬한 말에 의해 그의 영혼의 비통함을 토로하려 했다. 손해를 입은 자들은 그들이 말할 허락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난폭한 감정은 제어되지 않은 욕구와 같이 그들의 탈선을 그들도 어쩌는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변명으로서 그것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말에 굴레를 씌우듯이 지혜와 은총으로 우리의 입을 막지 않는다면 그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욥의 타락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으나 은총이 그 말 속에 있다.
1. 그는 원망할 것이나 그것은 "그의 원통함을 발설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비방하려 하지 않았고, 또한 불의하거나 불친절하다고 해서 하나님을 책망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와 더불어 논쟁하시고 그를 대적하여 행하시는 근거를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는 대체로 그 까닭이 그 자신 안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그 모든 수욕을 기꺼이 참으려 했을 것이다.2. 그는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표현하려는 것은 그의 정해진 심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의 괴로움에 대한 것일 것이다. 만일 내가 잘못 말한다면 그렇게 말한 것은 "내가 아니고 내 안에 거하는 죄"이며 나의 마음이 아니고 그 비통함이다.
Ⅱ. 그는 하나님께 겸손히 탄원하고 있다. 그는 말할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말은 기원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하나의 훌륭한 기도로 받아들이고 싶다(2절).
1. 그 기도는 환난의 고통에서 그를 구원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죄되는 일이었다.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나를 당신에게서 언제나 멀리하지 마옵소서. 비록 내가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나로 하여금 저주 아래 있게 하지 마옵소서. 비록 내가 아버지의 막대기로 징벌을 당할지라도, 심판자의 칼로 나를 끊지 마소서. 당신은 나를 징계하십니다. 나는 참을 수 있는 한 그것을 견뎌내겠습니다. 그러나 나를 정죄하지는 마옵소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비록 환난 가운데 있더라도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큰 위로가 된다(롬 8:1). 그들은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 주께 징계를 받는다"(고전 11:32). 그러므로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그 무엇보다도 이것을 면제되기를 바라야 한다. "비록 주께서 나를 다루시기를 즐거워한다 하실지라도 나를 정죄하지는 마옵소서. 나의 친구들은 나를 정죄하나 주께서는 그리하지 마옵소서."2. 그의 환난 당하는 참된 이유를 알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그것도 역시 죄되는 일이었다. 주여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괴롭히실 때 그는 우리로 더불어 쟁변하시는 것이며, 그가 우리와 쟁변하실 때 거기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다. 우리도 그러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아무 이유 없이 화내시지는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 회개하고 가슴 아프게 느끼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로 더불어 쟁변하도록 만든 그 죄를 버리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 이유를 찾아내려 할 때는 선한 양심을 사용하여 창세기 42장 21절에 있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성실하게 살펴보는 것이 마땅하다.
Ⅲ. 욥은 그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태도에 대해 역정스런 충고를 하고 있다. 지금 그는 정말 그의 영혼이 원통한 가운데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기에 그의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비난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1. 욥은 그가 참을 수 있는 이상의 고통을 주실 정도로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을 가혹하게 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의 품성의 긍휼하심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3절). "주께서 학대하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아니다, 분명 그렇지 않다. 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애 3:34-36) 그가 친히 하시기를 기뻐하시지 않는다. "주께서는 나를 다루시는 일에서 주의 종을 학대하고 주께서 만드신 것을 멸시하시고 주의 대적에게 호의를 베푸시는 것처럼 보이나이다. 그러니 주여, 이제 어찌된 연고입니까? 이러한 일이 주의 성품을 기쁘게 할리 없고, 그것이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나를 이처럼 대하시는 것은 웬일입니까? 내 피 속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으리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해하셨다는 생각은 결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선한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 그는 하나님의 공의로써 그의 섭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몰라 매우 당황하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밝혀 줄 날까지 기다려야 했다. 우리도 하나님에 대한 가혹한 생각을 잠시라도 가지지 말자. 왜냐하면 우리는 그때에 가혹하게 여길 만한 이유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2. 그는 그의 포로를 이처럼 고문대 위에 올려 놓고 자백을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지식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4-6절).
(1) 그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어떤 것들을 발견해 내시지도 않으며, 그것들을 판단하시지도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는 "육신의 눈"을 가지고 있지 않다(4절). 왜냐하면 그는 영이시기 때문이다. 육신의 눈은 암흑 속을 볼 수 없으나, 암흑은 하나님에게서 감추어지지 못한다. 육신의 눈은 한 때에 어느 한 곳 밖에는 보지 못하고 조금밖에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여호와의 눈은 각처에 있어 온 땅을 두루 살피신다." 많은 일들이 매우 호기심과 통찰력이 강한 육신의 눈으로부터 감추어져 있다. 심지어 "독수리의 눈으로도 보지 못한 길이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눈으로부터 감추어진 것은 없고, 또 있을 수도 없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것들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육신의 눈은 외부에 나타난 것만을 볼 수 있고, 또 "의식의 환상"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의 실상을 보신다. 그의 시각은 속임을 당할 리 없다. 왜냐하면 그는 마음을 감찰하시며 그 생각과 뜻을 증거하시기 때문이다. 육신의 눈은 점차로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한 가지 물건을 볼 때 다른 것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번에 모든 것을 보신다. 육신의 눈은 쉽게 피곤해지며 쉬기 위해 매일 밤 닫혀져야 한다. 그리고 노쇠해짐에 따라 곧 어두워지고 죽음에 의해 감겨질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않으시며 시력이 나빠지는 일도 없다. "하나님은 사람의 보는 것처럼 보시지 않는다." 즉, 사람은 사람들은 사실 그대로 보다는 겉으로 드러난 것대로, "진술되고 입증된 것에 따라," 그리고 흔히 감정과 격정, 편견과 타산에 치우쳐 판단하나, 하나님은 그렇게 판단하시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사실대로," 그가 사실을 알고 계시는 대로, 즉, 보고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감찰에 의해 "행해진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사람들은 탐구하여 비밀을 캐어낸다. 그리고 증인을 심문하고 공범들의 자백을 강요하거나, 감언이설로 속이면서 증거를 비교하고, 그것을 추정함으로써 비밀을 알고자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을 써서 알아내실 필요가 없다. "그는 사람의 보는 것처럼 보시지 않는다."
(2) 하나님은 인간처럼 근시안적인 눈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짧은 생명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5절). "주의 날이 어찌 몇 날 안 되며, 악에 가득 찬 인생의 날과 같으리이까? 주의 날이 인생의 날처럼 계승되거나 변화될 리 있으리이까? 아닙니다.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경험에 의해 그리고 매일의 관찰로 알게 된 것에 의해 점점 슬기로와 진다. 그들에게 있어서 진리는 시간의 딸이므로 그들은 탐구하는 데 시간을 소비해야 한다. 그리고 한 가지 추구가 실패하면 다른 시험을 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그에게는 과거나 미래가 없으며, 모든 것은 현재이다. 인생을 측량하는 날은 하나님의 생을 싸고 있는 영원한 햇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3)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이처럼 그를 고문하는 날들을 연장시키시고 계속 이 환난 속에 감금시키시며,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허물을 찾으시기" 위해 시간을 들이고 "그의 죄를 사실하시기" 위해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 것처럼, 그를 심문하시지도 않고 또한 석방해 주시지도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다(6절). 욥을 불리하게 만들 이유를 찾기 위해 하나님이 이처럼 고문하고 있는 것이라고 욥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처사는 하나님께 명예롭지 못한 형세를 초래했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가혹한 주인으로 여기도록 유인하는 미끼가 되었을 것이다. "이제 주께서 나의 위로를 고려하지 않으시려 한다면 주의 명예를 고려해 보십시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어떤 일을 행하옵소서. 그리고 주의 영광의 위를 욕되게 마옵소서"(렘 14:21).
3. 그는 하나님께서 무죄하다는 것을 아는 한 불쌍한 포로를, 그의 손에서 그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자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감금해 두는 것은 그의 전지를 욕되게 하는 것으로 보였다고 생각하고 있다(7절).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그는 그 자신이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서 유죄함을 이미 시인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는 그가 사악하지 않았으며, 죄에 전념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대적이 되지도 않았으며, 그의 믿음의 위선자가 아니었다는 사실, "악하게 그의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는(시 18:21) 사실을 고집하고 있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 그러므로 구제할 길이 없습니다. 나는 당신의 통치하시는 뜻에 굴복하고서, 당신의 때를 기다리고, 내 자신을 당신의 긍휼하심에 맡겨 버리고, 거기에 누워 만족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1)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즉, 전지한 자와 쟁변하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을 때, 어떻게 우리를 진정시켜야 하는가?
(2) 만일 우리가 여기에서의 욥처럼 하나님께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나는 내가 부족하지 않다거나 연약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인하여 내가 악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무엇이 우리를 풍성하게 위로할 것인가?
욥의 대답(6)(욥기 10:8-13)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관찰할 수 있다.
Ⅰ. 욥은 그의 창조자이며 보존자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주목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를 존재하게 만드시는 그의 존재를 지지하는 자이신 그에게 그 자신이 종속되어 있음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이것이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알며, 생각해 볼 첫 번째 과제이다.
1. 우리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고, 우리의 부모가 아니다. 부모들은 단지 그의 능력과 섭리에 의해 우리를 출생시킨 도구에 불과하다. "그가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 스스로가 만든 것은 아니다. 주의 손으로 우리의 이 몸과 각 부분을 만드셨고"(8절), 그것은 "두렵고도 기묘하게 만들어" 졌다. 몸에 활기를 주는 영혼도 또한 그의 선물이다. 욥은 여기에서 이 두 가지를 주목하고 있다.(1) 주께서 그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다(9절). 토기장이의 재주와 뜻에 따라 흙이 그릇의 모양으로 만들어지듯, 몸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우리는 근원이 천한 흙 그릇으로서, 곧 깨어질 "흙을 뭉치듯"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을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고 말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그리 불명예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 재료는 흙에서 나왔고, 그 틀과 형태는 하나님의 지혜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태내에서 인간의 몸이 형성되는 것이 여기에서 훌륭한 비유가 되었다(10절,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셨나이다"). 그리고 약간의 구체적인 사실들을 유도함으로써(11절), 묘사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맨 몸으로 세상에 왔을지라도 몸 자체는 옷을 입히우고, 무장되었다. 가죽과 살은 그 옷이다. 뼈와 힘줄은 공격이 아니라, 방어를 위한 갑옷이다. 극히 중대한 부분, 심장과 폐는 이처럼 보이지 않도록 옷을 입고 있으며, 상처받지 않도록 울타리가 쳐져 있다. 인간 몸의 놀라운 조직은 창조주의 지혜와 능력과 선함을 입증하는 일례이다. 성령의 전이 될 수 있는 이 몸이 불의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2) 영혼은 생명이며, 영혼이 곧 인간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주께서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게 생명의 입김을 불어 넣으셨다. 그것이 없었다면 몸은 가치없는 시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들의 아버지이시다. 즉 그가 우리를 살아있는 영혼으로 만드셨으며, 우리에게 이성의 능력을 부여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생명과 은혜"를 주셨고, 생명은 은혜-음심이나 의복보다 더 큰 은혜-다른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 독특한 은혜이다. 이제 욥은 그가 생명을 짐으로 여겨, 불평하고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하고 말했을 때보다 더 나은 마음 상태에 있었다. 또는 생명과 은혜는 그의 이전의 형통함을 언급한 인생의 모든 즐거움과 그 인생을 의미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 가운데 행하였고, 다윗처럼 그 은혜로 말미암아 그의 산이 강하게 서리라고 생각했었다.
2. 하나님은 우리를 보존하신다. 생명의 등불을 켜신 후, 그 자체가 타들어 가도록 내버려두시지 않고, 끊임없이 신선한 기름을 공급하신다. "주께서 내게 권고하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그리하여 삶의 역경, 즉 우리가 끊임없이 위협을 당하고 있는 죽음으로부터 나를 보호하시어 살게 하셨나이다. 그리고 생활의 모든 필수품으로써 또 그것이 원하고 갈구하는 물질을 매일 공급해 주심으로써 나를 축복하셨나이다."
Ⅱ. 어떻게 욥은 이것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으며, 또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가를 보자. 그는 하나님께 그것을 상기시키고 있다(9절).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을 지으셨나이다."
1. "주께서 나를 만드셨으므로 나를 완전히 아시나이다(시 139:1-13). 따라서 징벌로써 나를 심문하실 필요도 없으며, 내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시기 위해 나를 고문대 위에 올려 놓으실 필요도 없습니다."2. "주께서 통치의 행위에 의해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습니다. 그것과 똑 같은 통치의 행위에 의해 나를 다시 부수어 버리시겠나이까? 만일 그러하시다면 나는 복종해야 합니다."
3. "주의 손으로 만드신 작품을 멸하시려 하시나이까?" 성도들은 흔히 기도 속에서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 이시옵니다"(사 64:8)라는 탄원을 한다.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나이다"(시 119:73). 여기에서도 역시 그렇게 말하고 있다. "주께서 나를 지으셨거늘" 이제 나를 멸하시고(8절) "나를 티끌로 돌려 보내시려 하시나이까?"(9절) "주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렵니까? 주께서 나를 아끼시고 도우시며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시 138:8), 지켜 주시지 않겠나이까? 주께서 나를 만드셨고, 나를 아시옵니다. 그런데도 주께서 내게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고통을 주시어 나를 괴롭히시나이까? 나는 비참한 존재가 되도록 지어진 것입니까? 오직 이 재앙을 위해 내가 살아 남은 것이옵니까?" 만일 우리가 의무를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서 이것을 우리 스스로에게 진술한다면, "하나님은 나를 지으셨고 나를 지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를 섬기고 그에게 복종하겠습니다"라고, 우리는 그것을 긍휼에 대한 요지로서 하나님께 진술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주께서 나를 지으셨습니다. 갓 만드셨습니다. 이제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욥은 하나님이 예전에 베풀어 주신 은혜와 그의 현재의 불쾌감을 어떻게 조정할 수 있는가를 알고 있었으나,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13절).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모든 것은 주의 뜻에 의한 계획에 달려 있으므로 그것이 어떻게 보이든, 서로 모순된 점이 없다는 것은 틀림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이상하게 그의 방법을 바꾸실 때, 비록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의 마음 속에 선한 이유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며, 그것은 곧 밝혀질 것이다. 그 뜻을 정하는 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며, 우리가 미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뜻이 주께 있은 줄을 내가 아나이다." 하나님께 알려진 것은 모두 그가 지으신 것이다.
욥의 대답(7)(욥기 10:14-22)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Ⅰ. 욥은 격렬하게 원망하고 있다. 그는 이 혹독하고 불쾌한 이야기를 되풀이 하고 있다. 여기에서 비록 그는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용서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는 투덜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아무런 이유 없이 원망한 것이 아니라, 원망할 만한 까닭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우리가 그의 마음가짐이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경고로 삼아 우리의 마음을 좀 더 선하게 지니도록 하자.
1. 그는 하나님의 심판인 엄격함, 그리고 그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가혹한 처사를 원망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가혹함으로 울타리를 두른 공의"라고 부르려 하고 있다.(1) 그는 모든 유리한 점들을 배제하고 있다. "내가 범죄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시나이다(14절). 만일 내가 한 발자국만 잘못 가거나, 한 마디를 잘못하거나, 한눈을 팔면, 나는 분명 그러한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주의 대리자인 양심은 분명 그것 때문에 나를 책망할 것이며, 이 속박, 이 고통의 아픔은 그에게 대한 처벌이라고 내게 말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처럼 불의를 중히 여기신다면 우리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비록 우리가 죄를 범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극단적으로 취급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2) 그는 이 유리한 점들을 극단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주께서 내 죄악을 사유치 아니하시나이다." 그의 고통이 지속되는 한 그는 사유의 위로를 얻을 수 없었으며, 즐거움과 기쁨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이 찡그려지는 것과 그의 손에 막대기가 들려진 것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 속에서 사랑을 보기가 힘들다.
(3) 그의 성품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의 현재의 형편은 매우 불편했다(15절).
[1] 만일 그가 사악하다면 그는 저 세상에서 분명 파멸할 것이다.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옵니다." 죄악의 상태는 비참한 상태이다. 이것을 우리들 각자는 여기에서의 욥처럼 우리들 자신에게 적용시킴으로써 믿어야 한다. "내가 악하면, 비록 형통한 가운데 즐겁게 산다하더라도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 어떤 자들이 만일 악하다면 특히 그들은 이중의 화를 두려워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간절한 신앙 고백을 하고 또 흔히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 훌륭한 약속을 많이 했었던 내가 이처럼 훌륭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는 축복을 누리고,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면서 풍성한 은혜를 오래 누리던 내가 악하면, 화가 수 천 가지의 화가 있을 것이옵니다."
[2] 만일 "그가 의로울지라도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고," 전처럼(9:15) 담대히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의 고통에 너무 억눌리고 압도되어 있었으므로, 즐거움이나 자신감을 가지고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외부에는 투쟁이 있었고, 내부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 사이에서 그는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즉 그가 지금 당하고 있는 치욕과 그의 친구들의 책망으로 인해 당황한 표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속으로도 혼돈을 겪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황망하게 되고 그는 거의 미쳐 버릴 것 같았다(시 88:15).
2. 그는 그 처형이 냉혹함을 원망하고 있다. 하나님은(그는 생각하기를) 실수할 때마다 그를 벌하셨을 뿐만 아니라, 매우 심하게 벌하셨다(16, 17절). 그의 환난은 다음과 같았다.
(1) 몹시 비판스러웠고, 지극히 기이했다. 하나님은 먹이를 찾아 달려 내려가는 "사자처럼 그를 사냥하셨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상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희귀한 환난을 주어 그를 많은 사람들 가운데 굉장한 인물, 이상한 존재로 만드심으로써 "그에게 주의 기이한 능력을 보이셨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큰 고통을 주시고, 또 욥이 그 많은 것을 참아내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의 고통을 매우 무겁게 만든 것은 그가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느낀 점이었다. 그것이 그 고통을 더욱 쓰고 무겁게 느끼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를 대적하는 "하나님의 증거"였고, 하나님의 불쾌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의 몸의 종기를 그의 영혼 속에 있는 상처로 만들었다.
(2) 그것은 여전히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조류가 바뀌고, 썰물이 시작되기를 그가 기대했을 때에도, 그것은 여전히 계속 높아지고 있었다. 그의 고통은 불어났고,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진노도 더욱 커졌다. 그는 그 자신이 더 나아질 방법이 없음을 알았다. 이 증거하는 자들은 다시 그를 쳤고, 만일 한 가지 증거가 그를 설득시키지 못한다면 또 다른 증거가 올는지도 몰랐다. "군대가 갈마들어" 그를 치는 것 같았다. 만일 그에게 변화가 일어났다면, 그것은 결코 호전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싸우는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우리는 비가 온 후에 구름이 낄 것을 예상해야 한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쓰라리고 날카로운 시련이 마지막을 위해 예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그와 싸우셨고 그것은 큰 변화였다. 그는 이전에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그 고통을 더욱 격하게 했고, 그것을 정말 기이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은 보통 그의 백성들에게 그 자신이 친절하심을 보이신다. 만일 어떤 때 그렇지 않은 태도를 보이신다면 그것은 "그의 기이한 역사이며 기이한 행위"이시다. 그리고 그는 그 속에서 그 자신이 기이함을 보이신다.
3. 욥은 그의 생명을 원망하고 있으며, 그가 태어나 이 모든 고통과 환난에 처하게 된 것을 원망하고 있다(18, 17절). "만일 이것이 내 몫으로 정해진 것이라면, 내가 태에서 나오게 됨은 어찜이니이까? 내가 거기에서 질식되거나, 태어나면서 죽지 않은 것은 웬일이옵니까?" 이것은 감정적인 언어로서, 그가 전에 빠졌던 것과 똑같은 죄에 다시 빠지는 일이었다. 그는 방금 생명을 "은혜"라고 불렀건만(12절), 이제는 그것을 "짐"이라 부르면서, 그것을 주신 것에 대해, 또는 그것을 그에게 부과한 것에 대해 하나님과 다투고 있다. 카라일(Caryle)씨는 이에 대해 욥에게 호의적인 견해를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욥을 괴롭힌 것은(욥이 상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의 생활 상태가 그의 인생의 주요한 목적.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고 너그럽게 상상할 수 있다. 그의 수금은 버드나무에 걸려 있었고, 그는 하나님을 찬미하는 곡조를 전혀 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그의 환난이 하나님을 영화롭지 못하게 하고 그의 적에게 모독할 기회를 줄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기운이 끊어졌으면 하고 기원하고 있다. 믿음이 깊은 자는 만일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을 찬미하고 영화롭게 하지 못한다면 살 목적이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가 풀이한 뜻이 그렇다면 그것은 잘못된 근거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 속에서도 주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생명을 지나치게 사랑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왜냐하면 지혜롭고 선한 자들도 때로는 이러한 경우에 처하게 되어 그것을 원망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운이 끊어지고 아무도 우리를 보지 않기를 원하는 때가 올지도 모르는데, 왜 우리가 기운이 끊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사람들의 눈에 띄이기를 갈구하겠는가? 왜 우리가 우리 자녀들이 어린 아기일 때 죽어 "있어도 없던 것 같이 되어서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겨진" 것을 슬퍼하면서, 때로 그것이 우리 자신의 몫이었기를 바라는가?
Ⅱ. 욥은 겸손히 간청하고 있다.
1.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환난을 목도하시고"(15절), 그의 사정을 인지하시어, 그것을 불쌍히 생각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다윗도 이와 같이(시 25:18),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이처럼 우리는 곤고 속에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의탁해야 한다. 그리고 그가 역경 속에 있는 우리의 영혼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로 우리 스스로를 위로 할 수 있을 것이다.2. 하나님께서 그의 고통을 덜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만일 그의 고통이 제거될 수 없다할지라도 그는 약간의 휴식 기간을 가질 수 없겠는가? "주여 나를 언제나 고문대 위에 두지 마시고, 언제나 궁지 속에 넣지 마옵소서. 나를 버려두사, 저으기 평안하게 하옵소서"(20절). "내게 잠시 동안의 휴식을 잠시 숨을 쉴 시간을, 그리고 내 스스로 약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하소서." 그는 이것을 큰 은혜로 간주하고 있다. 항상 편안한 상태에 대해 충분히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은 그들이 끊임없는 환난 가운데 있게 된다면 한 시간의 편안함이 얼마나 귀한가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진술하고 있다.
(1) 생명과 그 빛은 매우 짧다.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20절). 분명히 그것은 매우 적습니다. 모든 날들이 비참하도록, 극도로 비참하도록 만들지 마옵소서. 내가 살 시간은 극히 적습니다. 생명이 지속되는 동안 나로 하여금 생명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소서." 이 기도는 하나님의 본성이 선하다는 사실에 곧 환난을 당하고 있는 영에게 매우 큰 위로가 되는 사실에 그 근거를 굳게 두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하나님께 긍휼을 간구하는 것으로서 받아들인다면("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는 그것을 우리로 하여금 부지런히 의무를 행하도록 하는 우리들 자신의 간구로서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렇다면 내 힘껏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많은 날들이 있을 영원의 날을 위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나는 시간을 보상하고 기회를 선용해야 할 것입니다."
(2) 죽음과 그 흑암은 매우 가까우며, 또한 매우 깊을 것이다(21, 22절). "주여 내가 죽기 전에 나를 저으기 평안하게 하소서." 즉 "고통 속에서 죽지 않게 하소서." 다윗도 이처럼 간구하고 있다.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나이다(시 13:3). 그렇게 되면 내가 위안을 기대하기는 이미 늦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사를 보이시겠나이까?"(시 88:10) "내가 죽기 전에 잠시 위로를 얻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가 이 세상을 조용히 떠날 수 있게 하시며, 지금과 같이 이러한 혼돈 가운데 있게 하지 마소서." 이처럼 우리는 신실하게 은혜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처럼 신실하게 "주여, 내 속 사람을 새롭게 하소서. 주여 내가 죽기 전에 나를 성별케 하옵소서.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간구해야 한다. 그가 여기에서 죽은 자의 상태를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1] 그것은 결박된 상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것과 같은 이러한 인생을 살기 위해 다시 돌아오지는 못할 것이다(7:10). 죽을 때 우리는 이 세상에 마지막 종말을 고해야 한다. 그 때에 몸은 그것이 오래 눕게 될 곳에 놓여져야 하며, 영혼은 그것이 영원히 처하게 될 상태를 판결받는다. 오직 한 번만 행해져야 하며, 또 영원을 위해 행해져야 하는 것은 훌륭히 행해질 필요가 있다.
[2] 그것은 매우 암울한 상태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보인다. 거룩한 영혼은 죽을 때 광명의 땅으로 옮겨지는데, 그곳에는 죽음이 없다. 그러나 그 몸이 남아있는 "이 땅은 어두워서 흑암같고 죽음의 그늘이 진" 곳이다. 욥은 다른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 그 자신도 죽음과 무덤에 대해 매우 두려운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로 하여금 그것을 원하도록 만든 것은 그가 지금 당하고 있는 극심한 비참함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같은 내용을 지닌 표현들을 여기에서 잔뜩 전개시키고 있다. 가서 무덤 속을 잠시 들여다 보자.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발견할 것이다.
첫째, 그곳에는 순서가 없다. 그곳은 "아무 구별이 없고," 영원한 밤이 계속되며 낮이 연속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동등하게 누워있고, 왕이나 농부나 모두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종이 상전에게서 놓인다"(3:19). 사람들이 무덤으로 들어가는 데에 있어서는 순서가 없다.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나 가장 부유한 자가 제일 먼저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가장 가난한 자가 먼저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단지 생명의 하나님께 정해 주신 각자의 순서대로 들어간다.
둘째, 그곳에는 광명이 없다. 무덤 속에는 짙은 흑암이 있으며, 그것은 실재로 느낄 수는 없으나, 생명의 빛을 즐기는 자들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흑암이다. 무덤 속에는 지식이 없고, 위로나 기쁨도 없으며, 하나님을 찬미함도 없고 또 우리 구원의 역사도 없다. 그러므로 광명도 없다. 욥은 매우 수치를 느끼고 있었으므로, 다른 사람들도 그의 상처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이 그것을 보기도 두려워하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감추어 주고 덮어 줄 무덤의 흑암이 그에게는 반갑게 느껴졌을 것이다. 어둠이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그러므로 우리가 빛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행하고 일하는 것이 마땅하다. 무덤은 흑암의 땅이기 때문에 우리가 눈이 감져진 채 그곳으로 옮겨지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그 때는 모든 자가 일반이 될 것이다. 무덤은 인간에게 흑암의 땅이다. 따라서 그곳으로 간 우리의 친구들을 우리는 흑암에 둔 자로 간주한다(시 88:18). 그러나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거룩한 자들의 몸이 티끌이 되어 없어지고, 다른 티끌과 섞였더라도, 그 어느 몸도 상실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눈은 그 모든 티끌 위에 계시며, 그 몸은 위대한 날에 분리되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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