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욥기 0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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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욥의 대답(1)(욥기 9:1-13)

빌닷은 욥이 매우 많은 말을 한 것에 대해 그를 책망하는 데서부터 시작했었다(8:2). 그러나 욥은 그것에 대해 충분히 항의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대답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욥은 빌닷이 제시한 이론, 즉 하나님은 결코 심판을 굽게 하시지 않는다는 이론에 동의하고 있다.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럴 줄 아노라"(2절). 우리는 우리와 더불어 논쟁을 하고 있는 자들의 의견이라도 우리가 그것에 동의할 때는 솔직히 시인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비록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의 입에서 나온 것으로서, 우리에게 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고집을 내세워 진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 적용돼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빛 속에서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해야 한다. "사악이 인간에게 파멸을 초래하고, 믿음이 깊은 자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를 얻으리라는 것은 진실로 그러하다. 이러한 진리에 나는 동의한다. 그러나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선할 수 있겠는가?"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다"(시 143:2).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하나님의 엄격하심과 냉엄하심, 즉, 아무도 겨룰 자 없는 하나님께 대한 격렬한 원망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장에서 이와 같이 매우 격렬한 감정을 나타낸 것처럼 보이는 표현들이 몇 곳에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오히려 인간의 사악함에 대한, 특히 그 자신의 죄악됨에 대한 경건한 자백으로 보고 싶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범죄한 대가대로 우리를 다루신다면 우리는 어김없이 멸망할 것이다.

Ⅰ. 욥은 인간이 논쟁하거나 싸우는 일에 있어서 그의 조물주와 비교가 안 되는 상대자라는 진리를 제시하고 있다.

1. 논쟁에 있어서 비교가 안 된다(3절). 사람이 하나님과 율법이나 이론으로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1) 하나님은 그와 더불어 쟁변하고, 그의 처사를 규탄하는 자들이 대답할 수 없는 천 개의 어려운 질문을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셨을 때 큰 질문들을 많이 내놓았으나("네가 이것을 아느냐?" "네가 그것을 알 수 있느냐?"), 욥은 하나도 대답할 수 없었다(38, 39장). 하나님은 매우 지혜로운 체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명백히 밝히실 수 있다.

(2) 하나님은 우리가 책망 당할 천 가지의 잘못을 제시할 수 있으며, 우리를 규탄할 천 가지의 항목을 열거하실 수 있다. 그때 우리는 그 잘못을 다른 것에 전가시키는 말을 그에게 할 수 없고, 단지 침묵으로써 그것들이 모두 사실임을 승인해야만 한다. 우리는 한 가지라도 이것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며, 또 저것은 하찮은 것이며, 또 저것은 그릇된 것이라고 밀어 놓을 수 없다.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사실을 부인하고, 범죄하지 않았음을 항의할 수 없으며, 또 다른 것에 대해서도 잘못을 부인하고 정당할 수 없다. 아니, 우리는 그에게 대답할 수 없다. 단지 욥처럼 "우리 손으로 우리 입을 가리며"(40:4, 5)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외쳐야 한다.

2. 싸움에 있어서 비교가 안 된다(4절). "그를 거역하고 형통한 자가 누구이랴?" 그 대답은 매우 쉽다. 우리는 태초부터 오늘날까지, 하나님을 거역한 대담한 죄인이 계속 그를 대적하여 패역한 일을 계속하고서도, 하나님의 심한 형벌을 받지 않았다든가, 그의 어리석음의 대가를 뼈저리게 당하지 않았다는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범죄자들은 형통하거나 평안을 믿지 못했다. 그들은 그들의 길에서 위로를 얻지 못했고, 성공하지도 못했다. 인간이 온갖 재주나 권세를 써서 그의 창조주와 겨루어 무엇을 얻었는가? 하나님에 대한 모든 반항은 피어오르는 불 앞에 찔레와 가시덤불을 던지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시도는 매우 어리석으며, 무익하며, 멸망을 초래하는 것이다(사 27:4; 겔 28:24; 고전 10:22). 배신한 천사들은 하나님을 거역하였으나, 형통하지 못했다(벧후 2:4). 용이 싸우나 쫓김을 당한다(계 12:9). 사악한 자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의 지혜를 논박하고, 그의 율법에 불순종한다. 그리고 그들의 죄악을 옹호하며 환난 가운데서도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 그들은 그의 은총 받기를 거부하며, 그의 영과의 싸움을 계속 고집한다. 그들은 그의 협박을 무시하고 이 세상에서의 그의 권세를 대적하는 데 앞장 선다. 그러나 그들이 형통하였는가? 아니다. 그들은 "진노의 날에 임할 진노를 그들 스스로에게 쌓는" 것 뿐이다. 이 돌을 굴리는 자들은 그것이 그들에게로 돌아옴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Ⅱ. 욥은 우리와 관련을 맺고 계시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보여 줌으로써,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원리에 대답할 수 없다. 그는 "힘이 강하시니" 우리는 그와 끝까지 싸울 수가 없다. 무한한 지혜와 능력의 소유자이신 하나님,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 지혜나 능력에 있어서 당할 자가 없으신 하나님과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지친 짓이다. 마귀는 욥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하나님을 저주하고 욕할 것이라고 스스로 장담했다. 그러나 욥은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그를 찬미했다. 그가 많은 고통을 당하고 그 자신이 매우 비참하게 되었을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대해 언급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는 원망하는 것을 잊었고, 기쁨과 함께 거했으며, 매우 유창하게 고귀하고 유용한 주제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증거하기 위해 다음의 몇 가지를 인용하였다.

1. 욥은 자연계를 실례로 들고 있다. 자연의 하나님은 제어할 수 없는 능력으로 행하시며, 그가 원하시는 일을 하신다. 왜냐하면 자연의 모든 질서와 능력은 그로부터 나왔고, 그에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1) 그가 원하실 때 그는 자연의 방향을 변화시키고, 그 흐름을 역행시키신다(5-7절). 자연의 일반법칙에 의해 산이 정해졌으므로 "영원한 산"이라 일컬어진다.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않으며(시 93:1), 거기에 박혀있는 기둥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해는 제때에 떠오르고, 별들은 이 아래 세상에 그 빛을 발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 그는 일반적인 궤도에서 그것을 내어쫓으실 수 있을 뿐 아니라 질서를 역행하고 자연의 법칙을 변화시키실 수 있다.

[1] 산보다 더 견고한 것은 없다. 산을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산의 자리를 옮겨 놓으실 수 있다. "그가 산을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그것이 원하든, 원하지 아니하든 그는 그것을 옮기신다. 그는 산들의 머리를 낮게 하실 수 있다. 그는 그것들을 평평하게 하실 수 있으며, 진노하심으로 그것을 무너뜨리실 수 있다. 그는 그 산들이 아무리 높더라도 또 아무리 넓고 돌이 많더라도 농부가 흙더미를 파헤치듯 그 산들을 쉽게 헤쳐 놓으실 수 있다. 사람은 산들을 넘기 위해 많은 힘을 기울이나, 하나님은 원하실 때 그것들을 없애버리실 수 있다. 그는 시내산을 진동하게 하셨다(시 68:8). "작은 산들은 뛰었다"(시 114:4). "영원한 산이 무너졌다"(합 3:6).

[2] 땅보다 더 견고한 굴대 위에 세워진 것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원하실 때 "땅을 움직여 그 자리에서 밀어내시며," 심지어 "그 기둥이 흔들리게" 하실 수도 있다.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흔드실 때는 그 자체가 도움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참으시는 은혜를 얼마나 많이 입고 있는가를 보라. 하나님은 죄의 고통 아래에서 신음하는 모든 죄지은 인간들을 받쳐 주고 있는 땅을 진동시키시고, "악인을 그 가운데서 구축하시기에"(욥 38:13),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그러나 그는 계속 땅을 견고케 하시고, 그 위에 인간을 세우셨으며, 한꺼번에 그것이 그 반역자들을 삼키도록 만들지는 않으신다.

[3] 떠오르는 해보다 더욱 견실한 것은 없다. 그것은 정해진 때를 결코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원하실 때 그것을 정지시키실 수 있다. 태초에 해에게 떠오르라고 명하신 분은 그 명령을 취소하실 수 있다. 한때 해는 서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또 어떤 때는 물러가라는 명을 받고 있는데, 이것은 해가 그 위대하신 창조주의 견제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은 위대하시다. 그리고 악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에게 햇빛을 비추지 않으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까지도 비추게 하시는 그의 선하심은 얼마나 크신가! 별들도 만드신 그가 만일 원한다면 그것들을 밀폐하여 그것들을 우리의 눈으로부터 감추실 수 있다. 지진과 지하 열에 의해 산들은 때로 옮겨지고 땅은 진동한다. 매우 어둡고 흐린 낮과 밤에는 마치 태양은 떠오르지 못하게 되어 있고 별들은 봉인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행 27:20).

욥이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실 수 있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실재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사실을 가르킨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이 모든 구절들은 노아의 홍수에 적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에 땅 위에 있는 산들은 진동했고 해와 별은 어두워졌었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 있는 이 세상에 대해서도 그 불은 예비되어 있으며, 그 뜨거운 열이 산과 땅을 불사를 것이고, 해를 암흑으로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고 있다.



(2) 그가 원하시는 한 그는 자연의 정해진 방향과 질서를 보존하신다. 그리고 이것은 계속되는 창조이다. 하나님은 홀로 그 자신의 능력에 의해 그리고 다른 것의 도움없이 다음과 같은 일을 하신다.

[1] "하늘을 펴신다"(8절). 그가 하늘을 처음으로 펼치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계속(즉, 언제나) 펴고 계신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양피지 두루마리처럼 그것 자체가 한데 두루 감져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는 바다 물결을 밟으신다." 즉, 그는 그것이 땅을 덮지 못하도록(시 104:9), 그것을 제압하시고 지키시는데,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고 그를 경외해야 하는 이유로서 주어져 있다(렘 5:22). 그는 기고만장한 파도보다 더 강하시다(시 93:4; 65:7).

[3] 그는 성좌를 만드신다. 그 모든 것들 중에서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 그리고 전반적인 "남방의 밀실"이 열거되어 있다(9절). 이러한 무리를 이루게 되는 별들을 제일 처음 만드신 다음 하나님은 그것들을 그 순서대로 정렬해 놓으셨다. 그리고 그는 계속 그것들을 만드시고, 존재하도록 보존하실 것이며, 그들의 운동을 인도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들이 인간에게 유용한 것들이 되도록 만드시며,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그것들을 살펴보도록 하신다. 짐승들은 그것들을 살펴볼 능력이 없다. 우리가 보고 이름을 지은 그 별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결코 우리의 눈으로 보지 못하며, 남극 주위에 있기에 여기에서 "남방의 밀실"이라 일컬어지고 있는 다른 천체의 별들도 하나님의 인도와 주권 아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얼마나 지혜로우며 전능하신가!

2. 섭리의 왕국을 실례로 들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일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특별한 섭리이다. 이 세상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시는가를 잘 생각해 보라.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다"고 말할 것이다.

(1) 그는 큰 일을 많이 행하시며, 많은 기이한 일들을 행하신다(10절). 욥은 여기에서 엘리바스가 말한 것과(5:9)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그의 적대자이긴 하지만 그가 말한 것을 그대로 좇아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은 위대하신 하나님, 기이한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시며, "큰 일을 행하신다." 그의 기이한 일은 너무 많아서, 우리는 그것들을 셀 수 없으며, 너무 신비로와서 우리가 발견해 낼 수가 없다. 그의 뜻은 매우 깊도다.

(2) 하나님은 보이지 않게, 그리고 깨닫지 못하게 행하신다(11절). "그가" 그의 일 속에서 "내 앞을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내가 깨닫지 못하니라. 주의 길이 바다에 있도다"(시 77:19). 인간의 활동은 대개 명백하게 느껴지나, 하나님이 우리 주위에서 행하시는 그 모든 일에서는 "우리가 그를 보지 못한다"(행 17:23). 우리의 유한한 이해력으로는 그의 뜻을 잴 수 없으며, 그의 활동을 이해하거나 그가 택하신 방법을 측정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행하시는 것이나, 계획하시는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행사를 판단하기에는 너무 무능하다. "통치의 비밀"(arcana imperii)은 우리 위에 있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설명하려고 하거나 논평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3) 하나님은 논의될 여지가 없는 주권을 가지고 행하신다(12절). 그는 원하실 때, 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의 육체적 쾌락과 신뢰를 빼앗으시며, 건강과 재산, 친척과, 친구 그리고 생명 자체까지도 빼앗으신다. 어떠한 일이 있든, 그것을 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누구의 손에 의해서 그것이 제거되든지, 그 속에서 그의 손이 인정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는가? 누가 그를 쫓아낼 수 있는가?"(난외, 누가 그를 소생시킬 수 있는가?) 누가 그를 말리거나, 그의 뜻을 바꿀 수 있는가? 누가 그를 거역하거나 그의 움직임을 대적할 수 있는가? 누가 그를 제어하거나 그의 해명을 요구할 수 있는가? 어떤 행위로 그를 대적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하시나이까라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 또는 왜 그것을 행하시나이까라고 물을 수 있겠는가?"(단 4:35) 하나님은 그가 행하시는 것에 대한 이유를 우리에게 밝힐 의무가 없으시다. 그의 행사의 의미를 지금은 우리가 모르고 있으나, 현재 특권으로 행해진 것처럼 보인 것이 장차 무한한 지혜 속에서 가장 훌륭히 행해지게 될 때 우리는 충분히 알게 될 것이다.

(4) 하나님은 어느 피조물도 항거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능력으로 행하신다(13절).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면"(이것은 그가 원하실 때 행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진노의 여호와"이시므로 그것을 퍼부으시거나 그의 뜻에 따라 그것을 명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아래 굴복한다." 즉, 그는 그를 대적하는 자를 교만하게 서로 돕는 자들을 분명히 타도하시며 멸하신다. 교만한 자는 그 스스로를 하나님과 그의 행사에 대적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대적 행위 속에서 그들은 손과 손을 맞잡는다. 땅의 왕들이 모이고 그의 멍에를 벗어던지기 위해, 그의 진리를 짓밟기 위해, 그리고 그의 백성들을 박해하기 위해, "이 땅의 왕들이 모이고 다스리는 자들이 서로 의논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행 21:28; 시 83:8). 만일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한 사람이 그의 심판을 받는다면, 그 나머지 사람들이 그것을 도우려고 교만하게 오며 그의 손에서 그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일이다. 하나님께서 기꺼이 그의 진노를 거두시지 않는 한(그는 때때로 그렇게 행하신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참으시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 교만한 조력자들은 그 아래 거꾸러지며, 그들이 돕고자 계획한 자들과 함께 쓰러진다. "누가 하나님의 진노의 능력을 알리요?" 다른 사람들을 도울 만한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그것을 대적하는 일을 도울 수 없게 될 것이다.

 

9:2 없음.

 

9:3 없음.

 

9:4 없음.

 

9:5 없음.

 

9:6 없음.

 

9:7 없음.

 

9:8 없음.

 

9:9 없음.

 

9:10 없음.

 

9:11 없음.

 

9:12 없음.

 

9:13 없음.

 

9:14

욥의 대답(2)(욥기 9:14-21)

욥은 인간에게 하나님과 계속 싸울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에 대해 말했었는데, 그는 여기에서 그것을 그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사실상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얻는 일에 실망하고 있는데, 이것은(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그가 하나님은 그를 대적했고, 옳든 그르든 그에 대해 너무 가혹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하나님에 대해 지나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히려 그것이 그 자신의 의로움을 불완전하게 느끼고 있었고, 현재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시지 않으신다는, 어둡고 암담한 그의 우려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보고 싶다.

Ⅰ. 욥은 감히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지 않았다(14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아래 굴복하겠거든 하물며 내가(내 자신이 매우 무기력하므로 돕는 자가 되기엔 까마득히 불쌍하고 약한 피조물이) 감히 대답하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대적하여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만일 내가 그와 더불어 변론하려 한다면 그는 분명 나를 매우 엄하게 다스릴 것이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천한 그릇을 만들거나, 그가 만든 그릇을 산산이 부수어 버린다고 해서, 진흙이나 그 깨어진 그릇이 그와 더불어 변론하겠느냐? 하나님을 대적하여 대답하거나, 그에게 어떤 일을 철저히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들은 매우 어리석은 인간이다. 오히려 모든 육체는 그 앞에서 침묵을 지켜야 한다.

Ⅱ. 욥은 감히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려 하지 않았다. 비록 그의 친구들에게는 그 자신의 고결함을 주장했고, 그들이 암시한 것처럼 그가 사곡한 자이며 악한 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결코 항복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는 결코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의로움으로서 내세우려고 하지는 않았다. "나는 감히 내가 무죄하다고 단언할 수 없나이다. 그리고 또 그것 때문에 내가 성공한다고 생각지도 아니하나이다." 욥은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의를 주장할 수가 없었다.

1. 욥은 하나님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으므로 감히 하나님을 시험하려 하지 않았다(15-19절). 그는 그의 친구들에게 그 자신의 경우를 옹호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 자신이 그들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경우가 사실보다 더 선하다 할지라도 그것에 대해 하나님과 변론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 하나님은 욥이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 그를 더 잘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했다(15절). "가령 내가 내 생각에 의로울지라도, 그리고 내 마음이 나를 정죄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나의 마음보다 더 크시며 내가 알지 못하며 알 수도 없는 나의 은밀한 잘못과 실수들을 알고 계시기에 그것으로 나를 책망하실 수도 있으시다. 그러므로 내가 감히 대답하지 못한다." 사도 바울도 이와 똑같은 내용의 말을 했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사악함이 내 안에 거하는 것을 내 자신이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노라"(고전 4:4). "하나님께서 내가 내 안에서 발견하지 못한 것에 대해 나를 책망하시지 않는다면 나도 감히 그 문제로 자책하지 않겠다." 그러므로 욥은 그 탄원을 철회하고 "그를 심판하실 하나님께 간구했다." 즉, 그 자신을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맡기고, 그 자신의 공적에 의해 성공을 꾀하려고 생각지 않았다.

(2) 그는 그의 기도 속에서 하나님께 용납되거나 화평의 응답을 얻을 만한 점이 있었다고 생각할 근거가 없었다. 아니, 그것의 성공으로 돌릴 만한 가치가 그 기도 속에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덕으로 돌려야만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가 부르기 전에 대답하시며, 우리의 기도가 훌륭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도에 은혜롭게 응답하시기 때문이다(16절).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가 그에게 청한 것을 주셨다 할지라도, 나의 최선의 기도마저 매우 연약하고 결점투성이이기 때문에 그가 거기에서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믿지 아니하리라. 나는 그가 나에게 응답하사 오른 손으로 구원하셨다고는(시 60:5) 감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순전히 그 자신의 이름을 위해 그것을 행하셨다." 패트릭(Patrick) 주교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내가 간구한 후 그가 나의 소망을 허락하셨다 할지라도 나는 내 기도가 그 일을 이루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네가 이를 아는 것은 너의 연고가 아니니라."

(3) 하나님께서 욥의 결백함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이 현재의 재난을 가져다 준 것은 그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케 해주었다. 즉 그것은 이 세상에서의 사람의 외적인 상황을 분배하시고 명하시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통치권에 의해 행하시며 미래의 상태를 위해 상과 벌을 충분히 그리고 정확하게 분배하실 수 있도록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에, 비록 그가 어떤 사람에게 그릇된 일은 행하시지 않는다고 해도 이 생애에도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한 보응을 내리시는 것만은 아니라(즉, 가장 선한 자가 언제나 가장 선한 대가를 받거나 가장 악한 자가 가장 나쁜 대가를 받는 것은 아니다)는 사실이었다. 욥은 그의 특별한 범죄를 깨닫지 못했지만 특별한 환난을 당하게 되었다(17, 18절).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바람이 자기에게 불어닥쳐 당황하도록 만들리라는 것을 예상해야 한다. 욥은 "폭풍으로 꺾이웠다."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찔레와 가시덤불 속에서 긁힘을 당할 것을 예상해야 한다. 욥은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는 점점 커졌다. 모든 사람들은 매일 고난을 당하게 되며, 때로는 쓴 잔을 마시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해야 한다. 불쌍한 욥의 고통은 그에게 너무 무거웠으므로 그는 숨을 쉴 여유도 없었으며, 괴로움이 그를 가득 채웠다. 그는 대담하게 이 모든 것을 까닭 없이, 큰 진노를 입을 만한 이유 없이 생겼다고 말하고 있다.

많은 훌륭한 해설자들의 판단과는 반대로 우리는 여태까지 욥이 말한 것을 선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의심할 바 없이 "그는 그의 입술로 경솔하게 말했다." 그는 하나님이 그로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신다(그러나 그는 이처럼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연설을 훌륭히 이용할 수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심을 비방했고, 그것이 "까닭 없이" 왔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공의를 비방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인간성의 연약함에서 오는 것보다 더 많은 죄를 짓고서도 인생들에게 주어진 일반적인 재난에서 오는 슬픔밖에는 느끼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인생들에게 주어진 재난에 의한 것보다 더 많은 슬픔을 느끼나 인간의 공통적인 연약함 이외의 잘못은 그들 스스로에게서 느끼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4) 그는 하나님과 겨루어 볼 만한 능력이 전혀 없었다(19절).

[1] 무기의 힘으로도 겨룰 수 없었다. "나는 감히 전능자와 함께 시합장에 들어갈 수 없다. 힘으로 말하면, 그리고 그것에 의한 승부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나보다 더욱 강하시어 분명 나를 능가하실 것이다." 군병을 지휘하는 그와 더불어 싸울 자가 없다(고 한 사람이 가이사에게 말한 일이 있었다). 더욱이 천군들을 지휘하시는 분과 더불어 싸울 자가 없다. "내가 네게 보응하는 날에 네 마음이(네 마음의 용기와 태도가) 견디겠느냐? 네 손이 네 자신을 방어할 만한 힘이 있겠느냐?"(겔 22:14)

[2] 논쟁의 힘으로도 할 수 없다. "나는 감히 그 사건의 시비곡직을 따라 재판할 수 없다. 심판으로 말하면 그리고 나의 권리를 주장할 것 같으면 누가 나를 호출하겠느냐? 내가 호소할 만큼 더 높은 능력을 가진 자가 없으며, 그 공소를 들어 주도록 정해진 더 높은 재판관이 없다. 왜냐하면 그가 가장 높으시고, 그로부터 모든 인간의 심판이 나오며, 인간은 그것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2.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므로 감히 재판에 서려하지 않았다(20, 21절).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그리고 나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할지라도, 나의 변호는 내게 불리할 것이며 심지어 그것이 나를 무죄로 선언할 때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라." 그 자신의 마음의 기만을 알며 경건한 경계심으로 그것을 막아내고 오랫동안 드러나지 않던 부분에서 잘못된 점을 때때로 깨닫는 선한 자들은 자기가 실재로 의식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죄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 스스로를 의심해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죄를 짓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고 단정지은 성서를 거짓말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순전하며, 내게 내 죄가 없으며, 하나님이 나를 책망하실 것이 없노라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나의 패괴함을 교만하고 무지하며 건방짐을 증거하리라. 오히려 내가 순전하다마는,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선언하셨지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에 이 모든 고통의 짐이 지워져 있는 동안 내 생명이 연장되기를 원하지 않노라고 하여야 한다." 또는 "비록 내가 잡다한 죄에서 떠났다하더라도, 비록 내 양심이 극악한 죄로써 자책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내 결백함을 주장할 정도로 내 마음을 믿지 않으며, 또한 내 생명이 하나님과 더불어 다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과 다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그에게 복종하고 우리 스스로를 그의 발 밑에 내던지는 것은 우리의 의무인 동시에 지혜이다.

 

9:15 없음.

 

9:16 없음.

 

9:17 없음.

 

9:18 없음.

 

9:19 없음.

 

9:20 없음.

 

9:21 없음.

 

9:22

욥의 대답(3)(욥기 9:22-24)

여기에서 욥은 그와 그의 친구들 간에 논쟁이 되어 왔던 요점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욥의 친구들은, 의롭고 선한 자들은 이 세상에서 언제나 형통하며, 비참하고 환난 속에 있는 자들은 단지 악인들 뿐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욥은 반대로,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크게 환난을 당하는 것은 흔한 일이라고 단언했다. 이것이 그와 그의 친구들 간에 의견이 달랐던 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주장을 증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욥은 그의 주장을 지키고 있다. "나는 모든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이라는 사실을 말했었고 여기에서 다시 이야기하고 있다."

1. 욥이 여기에서 뜻하고 있는 것 속에는 매우 많은 진리가 있다는 것이 인정되어야 한다. 즉, 일시적인 심판이 내려질 때 그것은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모두 내려지며, 멸망하는 천사는(비록 그가 한번 구별하긴 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과 애굽 사람들의 집을 거의 구분하지 않았다. 사실상 소돔의 심판에 있어서도 "영원한 형벌의 불"이라 일컬어지는(유 7) 불을 가지고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써는 불가하시다는 말씀을 들으시면서도 의인을 악인과 함께,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심판하셨다"(창 18:25). 그러나 단지 현세적인 심판에 있어서 의인들은 그들의 몫을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칼은 이 사람과 함께 저 사람도," 아합과 함께 요시야도 "삼켜버린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순전한 자나 악한 자나" 그들은 모두 같은 공동 파멸 속에 묶어 "멸망시킨다."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 바벨론으로 끌려갔었다(렘 24:5, 9). "홀연히 재앙이 내려 도륙될 때에," 그리고 그 앞에서 모두를 쓸어 버릴 때에, 하나님은 악인의 파멸이 되는 그 재앙이 무죄한 자와 그들의 믿음을 어떻게 연단시키는가를 보시며 기뻐하실 것이고,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다"(벧전 1:4; 시 66:10).

전능자의 화살이 의인을 향해 날아가나니,

하나님께서 결백한 자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의 변함없고 존엄한 마음을 원하시기 때문이니,

멸망시킴이 아니라, 연단을 위함이라.

R. 블랙모아경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의 고통을 달게 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 고통은 그들을 영예롭게 하고 유익하게 하기 위해 계획된 시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일을 기뻐하신다면 그들이 불쾌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만일 그가 그 결과가 얼마나 영화로운 것인가를 아시고 "무죄한 자의 고난을 비웃으신다"면, 그들도 또한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5:22), 그것들을 향해 개가를 부르면서, "죽음이여, 네 바늘이 어디 있는가?"라고 말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한편, 악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표징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이 그들의 손에"(그들은 큰 소유물과 큰 권한을 즐기며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가지고, 원하는 것을 행한다), "악인의 손에"(원문에는 이 단어가 단수로 되어 있다) "붙이웠다." 마귀 곧, 악인은 "이 세상의 신"이라 일컬어지고 있는데, 모든 자랑거리가 그의 손에 넘겨졌다(눅 4:6). 또는 "악인의 손에"라는 단어는(패트릭 주교와 총회 주석의 판독대로) 그 당시 매우 사악하면서도 크게 형통했던 유명한 포학자로서, 욥과 그의 친구들에게 잘 알려진 자로 볼 수도 있다.

악인은 세상을 얻으나, 의인은 하늘을 얻는다. 세상없는 하늘과 하늘 없는 세상 중에 어느 것이 더 낫겠는가? 하나님은 섭리 속에서 악인이 출세하게 하시는 반면, 지혜롭고 선하며 다스릴 수 있는 자격이 있어, "재판관"이 되기에 합당한 자들의 "얼굴을 가리우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묻혀 살게 하신다. 그리고 악한 일을 범하는 자들의 손에 이 세상이 주어지는 반면, 지혜롭고 선한 자들는 파멸당하고 정죄당하며, 그들의 얼굴을 가리우게 하는 고통이 주어진다. 우리는 이러한 일이 행해지는 것을 매일 목격한다. 그것을 행하시는 자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것을 행하는 "자는 어디에 있으며, 누구인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단 4:32)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에게 그것을 돌릴 수 있겠는가?

2. 그러나 욥이 여기에서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의 어조는 매우 역정적이다. 하나님께서 괴로움을 주신 사실을 나타내려 할 때, 그는 "하나님이 순전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 "멸망시킨다"고 말해서는 안 되었다.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를 시험하시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려 했을 때 욥은 "그가 비웃으시리라"고 말해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괴롭히시기를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다. 논쟁이나 불만으로 마음이 흥분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 입술의 문 앞에 파수꾼을 세워, 거룩한 일을 말할 때, 합당한 예의를 지키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9:23 없음.

 

9:24 없음.

 

9:25

욥의 대답(4)(욥기 9:25-35)

욥은 여기에서 더욱 불평이 많아지고 있다. 그리하여 이 장을 그가 시작했을 때처럼, 하나님의 지혜와 공의에 대한 경건한 표현으로서 끝맺지 못하고 있다. 불평스런 기분에 빠진 사람들은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얼마나 무례하게, 아니, 얼마나 불경스럽게 되도록 재촉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하나님과 더불어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과 같은 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시편 기자가 흔히 그러하듯이, 하나님을 원망하도록 허락을 받았지만, 여기에서의 욥처럼 결코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Ⅰ. 그의 형통한 날들이 지나간 것을 그가 여기에서 원망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25, 26절). "나의 날이(즉 나의 모든 좋은 날들이) 내가 깨닫기도 전에 갑자기 가버리고는 돌아오지 않는다. 좋은 소식을 가지고(구시와 아히마아스처럼) 지급으로 달려온 그 어느 우체부도 모든 위로가 나에게서 떠나간 것처럼 그렇게 빠르지 못했다. 이처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재빨리 그 항구로 떠난 배는 결코 없으며, 그처럼 빨리 먹이를 잡기 위해 날아가는 독수리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자취와,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처럼(잠 30:19), 내가 형통하던 자취도 남아 있지 않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 수 있다.

1. 시간의 흐름은 매우 빠르다. 그것은 항상 날개 위에 있으며, 그 종말을 서두르고 있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우리에게 있어서 소일거리란 얼마나 불필요한 것인가? 그리고 세월이 가듯이 오고 있는 영원을 향해서 시간이 매우 빨리 흘러가고 또 계속 흐르고 있는 이 때에 시간을 보상하는 것은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

2. 세월의 향락은 매우 허탄한 것이다. 시간이 아직 계속되는 동안에,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빼앗길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형통이라는 햇빛보다도, 우리의 날이 더 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사라질 때는 마치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었던 것처럼 된다. 우리의 의무를 행한 것을 회상할 때, 그것은 후에 우리에게 즐거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세속적인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다가, 그것이 모두 손실되고 없어질 때, 그것을 추억하는 것이 기쁨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나의 날이 달려가므로 도로 부를 수 없고, 복을 부를 수 없으며, 그 뒤에는 아무 것이 남은 것도 없구나."

Ⅱ. 현재의 괴로운 상태에 대한 그의 원망은 용서받을 수 있다(27, 28절).

1. 그의 친구들이 충고했던 대로 그가 그 자신을 진정시키고 평정시키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가 그렇게 하려한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는 "그 원통함을 잊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얼굴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여," 하나님이나 사람들과 더불어 합당한 교제를 나누고자 했었다.

2.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음을 발견했다. "오히려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노라. 내가 내 고통을 대항하여 분투하더라도, 그것이 대부분 나를 이기며 내게 너무 가혹한 것임을 증거한다." 그러한 경우에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를 실천하기 보다, 아는 것이 더 쉬우며,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 가를 아는 것이 그러한 마음을 갖고 지키는 것보다 쉽다. 고통 중에 있는 자들에게 인내를 설교하고 그들에게 그들의 원통함을 잊고 스스로를 위로하라고 말해 주기는 쉽다. 그러나 그것은 말한 것처럼 쉽게 행해지지는 않는다. 두려움과 슬픔은 믿음과 올바른 이치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들은 포학한 것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에 쉽게 복종하도록 만들지 못한다.

Ⅲ. 하나님께 대한 그의 원망은 무자비하고 냉혹한 것으로서 결코 용서될 수 없었다. 그것은 그의 타락한 언어였다. 그는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마음 속을 쪼개고 들어와 그로 하여금 격렬한 원망을 터트리도록 만든 하나님께 대한 이 가혹한 생각들이 한 때는 그의 주위에 얼씬도 못했었다. 선한 자들이라고 해서 언제나 선한 말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구조와 유혹에 대한 그들의 힘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그들이 실수한 것을 회개로써 후에 취소할 수 있는 기회로 허락하시며, 그것으로 그들을 책망하시지 않게 될 것이다.

1. 욥은 여기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1) 마치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위로를 얻거나 그의 비통함을 구조받기에 실망한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그의 결백함에 대해 언제나 선한 증거를 보여 주어야 했다. "주께서 나를 무죄히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내 환난이 매우 오래 계속되고 매우 급속히 불어나고 있으므로, 나는 주께서 나를 그 속에서 구원하시고 형통한 상태를 내게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나의 무죄함을 확증해 주시리라고는 결코 바랄 수가 없습니다. 옳든 그르든, 나는 악인으로서 취급받아야 합니다. 나의 친구들은 나에 대해 계속 그렇게 생각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내게 계속 환난을 주실 것입니다. "내 자신을 분명히 밝혀 나의 결백함을 주장하기 위해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29절)

이미 치우쳐 있는 상태에서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가장 무죄한 자가 그들 스스로를 밝히기 위해 사람들에게 가는 일은 흔히 수포로 돌아간다. 증거가 명백하다 할지라도 그들은 유죄 판결을 받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일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학대받는 무죄한 자의 옹호자이시므로 그에게 의로운 사정을 맡기는 것은 결코 헛된 수고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욥은 위로 얻는 일을 실패로 여길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결백을 밝히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더욱 불쾌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30, 31절).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내 결백함을 증거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소용없을 것이다. 심판은 내게 분명 불리하게 내려진다. 주께서 나를 개천(멸망의 구덩이 또는 더러운 도랑이나 하수구)에 빠지게 하시리라. 그리하여 그것이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코를 불쾌하게 하므로,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할 것이며, 나마저도 나 자신을 만지기 싫어할 것이다."

욥은 그의 환난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을 보았다. 그의 친구들의 눈에 그를 더럽게 비치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그의 환난을 원망하였고, 그의 위로뿐만 아니라, 그의 명성도 파멸시킬 정도로 그것이 계속되는 것을 원망하였다. 그러나 이 말들을 선의로 해석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우리 자신을 의롭게 하기에 그리고 그들의 신뢰를 확보하기에 급급하다 할지라도, 세상적인 눈 아래 깔려 있는 잡다한 죄의 더러움에서 우리의 손을 깨끗이 지키려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은 정결하고 무죄함을 가장하는 우리의 모든 위선을 떨쳐 버릴 수 있도록 은밀한 많은 죄로 우리를 책망하실 수 있으며, 거룩한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 자신이 추악하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실 수 있다. 바울이 바리새인이었을 때, 그는 그의 손을 매우 깨끗하게 지켰다. 그러나 계명이 와서 그 마음의 죄를 드러나게 했을 때 그는 "그를 개천에 빠지게" 한 정욕을 알게 되었다.



(2) 그는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한 말씀을 듣기에 실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가혹했다.

[1] 그는 그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은 것을 원망하고 있다(32절).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시다. 나는 나같은 사람과 대담하게 논쟁할 수 있었다(질그릇 조각은 흙으로 된 질그릇과 더불어 다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나보다 무한히 높으시므로, 나는 감히 그와 함께 시합장에 들어갈 수 없다. 만일 내가 그와 대결한다면 분명 나는 내동댕이 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시다. 가장 위대한 왕들에 대해 우리는 "그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생각과 방법은 우리의 것보다 무한히 높으시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 의해 그를 측량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어리석고 약하며 연하고 변덕스러우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의지하면서 죽어가는 피조물이다. 그러나 그는 독립적이며 불멸하는 창조주이시다.

둘째, 이러한 사실을 숙고해 볼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매우 겸손하게 되고 잠잠케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지 말고 그를 우리보다 무한히 높으신 자로 언제나 바라보도록 하자.



[2]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차이점을 조정해 주고 논쟁을 해결해 줄 중재자나 판결자가 없음을 원망하고 있다(33절).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없는 것을 원망하는 것은 실상 있기를 바라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70인역에도 이것을 그렇게 풀이하고 있다. "양척 사이에 중재자가 있다면!" 욥은 기꺼이 그 문제를 언급하고 있으나, 중재인이 될 만한 능력이 있는 피조물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도 역시 하나님께 맡겨야 하며, 그의 심판에 따르도록 결심해야 했다. 우리 주 예수는 축복 받은 판결자이시다. 그는 하늘과 땅 사이를 중재하시며 양쪽에 손을 얹고 계시다. 그에게 아버지께서 모든 심판을 의탁했고,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현재 복음에 의해 밝혀져 이처럼 원망할 여지를 남겨놓지 않고 있으나, 그 당시에는 이처럼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3] 그는 하나님의 위협을 원망하고 있다. 하나님의 두려움은 그 화살을 그를 향했고 그를 매우 혼돈케 했다. 그러므로 그가 이전에 가졌던 그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34, 35절). "그의 무한하신 초월성에 의해 내가 느끼게 되는 거리감 이외에도, 그가 현재 나를 대하시는 일이 나를 매우 낙담시키고 있다. 주께서 그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는 외적인 환난을, 하나님의 진노를 그의 영이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그 괴로움만큼 크게 여기지 않고 있다. "그를 두렵게 한 것은 그 위엄"이었다. "그것이 물러가도록 해 주시고, 나로 하여금 그의 긍휼을 다시 보게 하고 그의 두려움만을 보게 하여 나를 당황하지 않게 하시길 원하노라. 그리하시면 내가 말하리라. 그리고 그 앞에서 내 사정을 아뢰리라. 나는 본래 그런 자가 아니니라. 구름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여전히 내게 임하고 언제나 내 영을 침식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다."

2. 이 모든 사실에서 우리는 이런 것들을 배우자.

(1)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진노의 능력을 두려워하도록 하자. 만일 선한 사람들이 그것에 의해 이처럼 놀라게 된다면 "부정한 자와 죄인이 어디에 나타나겠는가?"

(2) 심령이 상해 있는 자들을 동정하고 그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도록 하자. 그들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그들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에 대한 선한 생각을 항상 지니도록 주의하자. 그들이 가혹하게 생각하는 것은 많은 재앙을 초래하게 되는 발단이 되기 때문이다.

(4) 우리가 여기에서의 불쌍한 욥처럼 서글픈 상황에 있지 않고, 주님의 빛 가운데 행하도록 해 주신 하나님을 찬미하자. 우리는 그 속에서 즐거워하고 "떨면서 기뻐하자."

 

9:26 없음.

 

9:27 없음.

 

9:28 없음.

 

9:29 없음.

 

9:30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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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4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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