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욥기 0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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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욥의 대답(5)(욥기 7:1-6)

욥은 여기에서 그가 정당화할 수 없었던 것을, 심지어 죽음에 대한 그의 지나친 열망까지도 변명하고 있다. 그의 비참함을 종결시켜 줄 생명의 종결을 왜 그가 원하지 않겠는가? 이 이론을 강력히 밀고 나가기 위해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열거하고 있다.

Ⅰ. 땅 위에 있는 인간의 일반적인 상태를 우선 들어서 말했다(1절). "그의 날 수가 적으며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모든 사람들은 곧 죽어야 하며, 모든 사람들은 곧 죽기를 원하는 마음을(다소간에) 가지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내가 곧 죽기를 원하는 것을 그처럼 극악한 죄로 여기느냐?" 또는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제발 내가 죽음을 바라는 것을 마치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를 앞지를 수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오해하지 말라. 오히려 나는 그것이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러한 말을 통해 나는 다만 나의 현재의 불안한 심정을 마음대로 표현하고 싶은 것뿐이다.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에 있지 아니하냐? 그리고 이곳에서 그 날이 품군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

1. 인간이 현재 있는 곳을 살펴보라. 인간은 땅에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땅은 인생에게 주셨기" 때문이다(시 115:16). 이것은 인간의 비천함과 열등함을 나타내고 있다. 저 세상에서는 높이 들리워지며, 훌륭한 지역에서 거주하게 될 인간이 사는 현재의 위치는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 그것 또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땅 밑이 아니라, 땅 위에 있다. 다시 말해서 지옥이 아니라 지상에 있다. 이 세상의 넓이가 한정되어 있는 것과 같이 이 땅에서의 우리의 시간도 한정되었고, 그 기간이 짧다. 그러나 하늘은 측량될 수 없으며 하늘의 날들은 헤아려 질 수도 없다.

2. 그곳에서 인간이 생명을 누리는 기간에 대해 살펴보자. 인간이 이곳에 거하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는가? 그렇다. 분명히 정해져 있다. 우리를 만드시고 여기에 놓으신 분께서 그 기간을 정해 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언제나 있도록 되어 있거나 오래 있도록 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그 손에 쥐고 계신 분에 의해 정해지고 한정된 기간 동안 이곳에 있도록 되어있다. 우리는 우리가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눈먼 운명의 여신에 의해 또는 에피큐리안 철학자들이 말하는 눈먼 행운의 신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지혜롭고 거룩한 통치 계획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3. 살아 있는 동안의 인간의 상태에 대해서 살펴보자. 인간의 삶은 "전쟁"이며, "품군의 날과 같다." 우리는 각각 이 세상에 있는 우리들 자신을 이렇게 간주해야 한다.

(1) 대적들 가운데서 곤고를 당하는 군병으로 간주해야 한다. 우리는 섬겨야 하고, 명령 받아야 한다. 그리고 싸움이 끝났을 때 제대하되,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 행한 바에 따라 수치스럽게 또는 영예롭게 물러가야 한다.

(2) 날품팔이로 간주해야 한다. 우리는 낮에는 매일 일을 하고 밤에는 그 수고의 값을 계산한다.

Ⅱ. 현재의 욥 자신의 상태를 들어서 말했다. 그는 일에 지쳐서 품삯을 지불받고 휴식하러 갈 저녁 황혼을 기다리는 초라한 종이나 품군처럼, 죽음을 원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했다(2절). 밤의 어두움은 파수군의 아침 햇빛처럼(시 130:6), 노동자에게는 매우 반가운 것이다. 자연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일하는 자들에게 휴식을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노동자는 잠을 달게 잔다"(전 5:12). 노동자의 휴식은 호화로운 자의 즐거움 보다 더욱 감사한 것이며, 더욱 힘을 돋우워 주는 것이다. 그리고 하루의 품삯을 받을 때의 품군처럼 그처럼 흐뭇하게 소작료를 받는 부자는 없다. 이 비유는 명백한 것이며 그 적용은 간결하다. 그런데 약간 모호한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한 두 단어를 보충한다면 그 뜻을 좀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욥과 같은 상태에 있는 자에게 언어의 정확성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듯이 역시 나도 그같은 이유로 죽음을 심히 기다린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그의 불평을 들어보자.

1. 그의 날은 무익했고, 그것은 매우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는 일거리를 모두 빼앗겼고, 이제는 일하기에도 합당치 않은 존재가 되었다. 하루하루가 그에게는 고통스러웠다. 왜냐하면 그는 선을 행하거나 어떤 목적을 위해 그것을 쓸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Et vitae partem non attigit ullam-즉 그는 보람있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다. 이것을 욥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라고 표현하고 있다(3절). 선한 자에게 있어서는 그의 병과 연로함이 그를 무익한 자로 만들어 버린다는 사실이, 병과 연로함으로 인해 생긴 그들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킨다. 욥은 그 날들이 그가 선을 행할 수 없는 날들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강하게 그가 즐거움을 누릴 수 없는 날들이었으며, 그래서 헛된 나날들이었다고는 강조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없을 때에 단지 그를 위해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며, 우리는 용납될 것이다.

2. 그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3, 4절). 밤은 노동자에게 뿐만 아니라,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낮의 노고와 피곤을 씻어 준다. 만일 병자가 밤에 잠시 동안이라도 잠을 자기만 한다면, 그것은 고통을 덜어 주고 그가 좀더 나으리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게 해 준다(요 11:12). 어떤 괴로움이 있든지 간에 잠은 우리를 괴롭히는 근심과 고통과 슬픔을 정지시켜 준다. 그것은 우리 슬픔의 휴식 기간이다. 그러나 불쌍한 욥은 이러한 위안도 얻을 수가 없었다.

(1) 욥에게 있어서 밤은 지겨운 것이었다. 그리고 휴식을 취하기는커녕, 오히려 아침까지 이리저리 딩굴면서 더욱 괴로워해야만 했다. 육신의 고통이나 마음의 번민으로 인해 매우 불안한 가운데 있는 자들은 안정을 얻기 위해 이리저리 방향과 위치를 바꾸어 가면서 생각한다. 그러나 내면에 그러한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항상 뒤척이나 결코 편안함을 얻지 못하는 점은 초조와 불만에 가득 찬 심령에 있어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것이 밤을 원하는 종 만큼이나 지극히 밤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자기에 누울 때마다 욥은 "언제나 밤이 갈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이 "수고로운 밤이 그에게 작정되었다." 작정된 시간을 미리 결정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러한 밤들을 할당하셨다. 우리가 언제 슬픔을 당하든지 간에 그것은 이미 작정되어 있기 때문에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거룩한 목적을 위해 계획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그 사건에 순응하는 것이 좋다. 우리가 편안함 밤을 맞을 때면 우리는 또한 그것이 우리에게 작정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수고로운 밤보다는 편안한 밤을 많이 가지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다.

3. 그의 몸은 악취를 풍겼다(5절). 그의 상처는 구더기가 파먹었고, 딱지가 흙 무더기처럼 몸에 달라붙었으며, 그의 살갗은 헤어져 터졌다. 우리는 얼마나 비천한 몸을 가지고 있는가 보라. 그리고 우리가 우리 몸의 욕망을 한껏 채우거나, 그것을 자랑할 만한 이유가 얼마나 빈약한가를 보라. 그것은 그 속에 그것 자체가 부패하는 원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지금 그것을 사랑하는 것만큼 또 그것을 증오하고 그것이 제거되기를 갈망하는 때가 올 것이다.

4. 나의 생명은 종말을 행해 달려가고 있었다(6절). 그는 오랜 생명을 기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이 급속히 쇠퇴해 가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6절).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다." 즉 "나의 날은 이제 얼마 안 남았구나. 그리고 내 잔에 남아 있는 모래는 몇 알 남지 않았으며, 그것마저도 곧 사라질 것이다." 자연의 운동은 중심에 가까울수록 더욱 빨라진다. 욥은 그의 여행이 곧 끝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날이 빨리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의 날들이 이미 지나간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전의 형통함이 다시 복귀되리라는 소망을 가질 수 없었다.

이것은 인간의 생명에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우리의 날들은 베틀의 북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이쪽에서 저쪽으로 왔다 갔다하다가, 마침내 그 실이 다 소모되어 버린다. 그때에 우리는 "우리 생명을 말기를 직공이 베를 걷어 말음같이" 한다(사 38:12). 시간은 속히 지나간다. 시간의 흐름은 정지될 수 없으며 이미 지나간 것은 되돌이킬 수 없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심은 것처럼(갈 6:8), 또한 거둔다. 모든 날들은 베틀의 북처럼 한 오라기의 실을 그 뒤에 남겨 놓는다. 말은 사람들은 끊어지게 될 거미줄을 짠다(8:14).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거룩한 의복과 의의 옷을 짜서 입힌다면, 우리의 일이 조사 받을 때 우리는 그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심은 것을 거둘 것이며, 자기가 짠 것을 입을 것이다.

 

7:2 없음.

 

7:3 없음.

 

7:4 없음.

 

7:5 없음.

 

7:6 없음.

 

7:7

욥의 대답(6)(욥기 7:7-16)

욥은 그의 친구들이 비록 그의 이야기를 방해하고 있지는 않지만, 점점 싫증을 내기 시작하고, 그가 말한 것에 대해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관찰하고는 여기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서 그에게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우리 말을 들으려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들으실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도울 수 없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도와주실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팔은 짧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그의 귀에 병이 들지도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 말하는 법을 욥에게 배워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고백 속에는 분노와 타락이 많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의 실언을 극히 중하게 여기시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또한 여기에 최선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욥은 여기에서 하나님께 그를 편케 해 주시거나 그의 생명을 끊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Ⅰ. 죽어가는 자, 분명코 빨리 죽을 자로서 진술하고 있다. 우리가 병들었을 때 죽음을 생각해 보고,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이 유익하다. 왜냐하면 병은 죽음에 대한 생각을 우리 마음 속에 넣어 주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에게 보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것에 대해 우리 스스로 유념한다면 여기에서의 욥처럼 그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7절). "내 생명이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욥은 그 자신이 매우 연약한 피조물이며, 그가 이 세상에 거할 날은 짧고도 불확실하며 그가 이 세상에서 곧 제거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그가 이 세상에 다시 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서 결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서-그의 생명은 모든 인간의 생명처럼, 시끄럽고 소란스러우나 곧 사라져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허무하고 공허한 바람과도 같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대상으로서 그 자신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저희는 육체 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시고," 긍휼을 베푸셨다(시 78:38, 39).

1. 욥은 그 자신의 생명과 죽음에 대해 경건하게 생각하고 있다. 생명의 짧음과 허탄함, 그리고 죽음의 불가피성과 돌이킬 수 없음에 관한 것과 같이, 이처럼 분명한 진리들은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그것들을 적용시키는 "그때에" 우리에게 유익함을 준다. 그러면 이제 다음과 같은 점들을 생각해 보자.

(1) 우리는 눈에 보이는 그리고 세속적인 모든 것들로부터 곧 떠나야 한다. 육신의 눈은 닫혀져야 하고 그 눈은 선한 것들 즉, 모든 사람이 집착을 가지는 그 선한 것들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군가(시 4:6)"라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에 우리의 행복을 둘 만큼 어리석은 자라면 그것들이 우리의 눈에서 영원히 감추어져 더 이상 좋은 것을 볼 수 없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며 증거인 믿음에 의해 살도록 하자.

(2) 그리고 나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가야 한다. 여기서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거기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은 상태"(a[dhj)이다(8절). 죽음은 우리의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흑암으로 데려 간다(시 88:18). 그리고 곧 우리를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떠나 없어질 때"에 우리는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시 39:13).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게 될 것이다.

(3) 하나님은 쉽사리, 그리고 순식간에 우리의 생명을 끝나게 하시어, 다른 세계로 우리를 보내실 수 있다(8절).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주께서 원하실 때는 나를 영원 속에서 찾으실 수 있으시며, 음부에 있는 내게 얼굴을 찌푸리실 수 있나이다."

주께서 불쾌히 여기사 내게 얼굴을 찡그리신다면,

나는 마치 불벼락을 맞은 것처럼 거꾸러져 죽으리이다.

블랙모아경

그가 우리의 호흡을 취하시면 우리는 죽는다. 뿐만 아니라, 그가 "땅을 보시기"만 해도 땅이 "진동한다"(시 104:29, 32).



(4) 우리가 일단 저 세상으로 가면 우리는 결코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끊임없는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vestiga nulla retrorsum-즉 되돌아 오는 법은 없다. "주여 내가 이 세상에 있을 때에 그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나는 다시금 이 세상에서 주의 친절을 받도록 돌아오지 못하리이다." 또는 이렇게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주여, 죽음으로 나를 편케하는 친절을 베푸소서. 그것이 영원한 평안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는 더 이상 이 생명에 재앙을 당하지 않게 되리이다." 우리가 죽을 때, 우리는 영원히 사라지매 더 이상 돌아오지 못한다.

[1] 우리는 땅 속에 있는 우리 집으로부터 돌아오지 못한다(9절). "음부로 내려가는 자는" 전체적인 부활이 있을 때까지 "다시 올라 오지 못할 것이며," 다시 이 세상에 있는 그의 처소에 올라오지 못할 것이다. 죽는 것은 단 한 번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잘 끝마칠 필요가 있다. 잘못은 결코 만회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구름이 가리워지거나 흩어지는 것으로써 설명된다. 구름은 증발되어 사라지며, 공기 속에 녹아 버리고, 결코 다시 뭉치지 못한다. 다른 구름이 일어나지만 이미 이전의 그 구름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세대의 자손들이 일어나나 전 세대는 완전히 사멸되고 만다. 태양을 어둡게 하고 땅을 물에 온통 적실 것 같이 보이던 큰 구름이 갑자기 흩어져 사라지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러한 것이 인간의 생명이다. 그것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구름이다."

[2] 우리는 땅 위에 있는 우리의 집으로 결코 다시 돌아올 수 없다(10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리이다." 따라서 그것을 소유하는 기쁨을 다시 맛보거나 일을 하는 즐거움을 다시 얻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소유하나, 그들 역시 다른 세대에게 그것을 물려 줄 때까지만 그것을 보관한다. 음부에 있는 부자는 그 자신이 돌아갈 허락을 얻고자 요청하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사로를 그의 집으로 보낼 것을 원했다. 영광을 입은 성도들은 그들의 집 때문에 다시는 근심과 괴로움과 슬픔을 가지게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저주받은 죄인들은 유쾌하고 즐거움을 얻기 위해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처소도 다시 그들을 알지 못할 것이며, 그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다시 그들과 친분을 맺거나 그들의 영향력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죽을 때 더 나은 처소를 얻도록 우리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곳은 다시 우리를 인정해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욥은 성급한 추론을 끌어 내고 있다. 이러한 전례로부터 그는 이 보다 좀더 나은 결론을 끌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11절). "그런 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말하며 원망하리이다." 거룩한 다윗은 인간 생명의 연약함에 대해 묵상했을 때, 오히려 침묵을 지켰다("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나이다."-시 39:9). 그러나 욥은 그 자신이 숨을 거둘 때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마치 그가 마지막 유언과 증거를 하려는 듯이, 또는 그의 감정을 토로하기 전에는 평안히 죽을 수 없는 듯이, 급히 서둘러 원망을 터트리고 있다. 우리의 숨결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우리는 그 숨결들을 죄와 타락의 해로운 숨결로 만들지 말고, 거룩하고 은혜로운 믿음과 기도의 숨결로 만들어야 한다. 불평과 싸움 속에서 죽을 것 보다, 기도와 찬송 속에 죽는 것이 훨씬 좋은 죽음이다.

Ⅱ. 욥은 자기 자신을 병든 자, 곧 심신이 모두 쓰라리고 비통스럽게 병든 자로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이 진술에서 마치 하나님이 그를 가혹하게 대하시고, 필요 이상의 고통을 그에게 부과하신 것처럼 매우 역정을 내고 다. "내가 바다니이까? 용이니이까?(12절) 경계선 안에 갇혀서 그 교만한 파도를 저지해야 하는 거센 바다이니이까? 또는 바다의 모든 고기를 잡아 먹지 못하도록 잡아두어야 하는 다루기 힘든 고래이니이까? 나를 잡기에 그처럼 떠들썩할 정도로 내가 강한 자니이까? 이 강한 고통의 멍에로도 나를 길들이지 못하고 나를 포위할 수 없을 정도로 내가 사나운 존재이니이까?"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우리는 마치 하나님께서 필요 이상의 멍에를 우리에게 씌우신 것처럼, 하나님과 그의 섭리를 원망하기가 매우 쉽다. 그러나 우리는 필요한 때 이외에는 환난을 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필요 이상의 요구를 당하지도 않는다.

1. 그는 침상에서 휴식을 취할 수 없었음을 원망하고 있다(13, 14절). 우리가 노동이나 수고나 여행으로 지쳤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얼마 만큼의 휴식을 약속한다. "내 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수면은 잠시 내게 휴식을 줄 것이다." 그것은 흔히 그렇다. 그것은 그럴 목적을 위해 그렇게 정해졌다. 흔히 그것은 우리를 편하게 해 주며, 우리는 원기를 회복하고 상쾌하게 일어난다. 그럴 때 우리는 크게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불쌍한 욥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그의 자리는 그를 위로해 주기는커녕 그를 두렵게 했다. 그리고 그의 침상은 그의 원망을 덜어 주기는커녕, 그것을 가중시켰다. 왜냐하면 그가 잠들었을 때 무서운 꿈들이 그를 괴롭혔고, 그가 깨어있을 때에도 여전히 무서운 유령이 그를 따라 다녔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밤을 반갑지 않고, 지겨운 것으로 여기게 만든 요인이었다(4절). "내가 언제나 일어날꼬"

하나님은 그가 원하실 때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편안함과 안식을 약속한 곳에서까지 우리를 두렵게 하실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거룩하지 못한 공상 속을 배회함으로써 흔히 죄악과 결탁할 때, 그는 또한 우리 자신의 상상력을 이용하여 우리에게 큰 번민을 부과하실 수 있다. 그리하여 그렇게 하심으로써 흔히 우리의 죄가 되어 왔던 것을 심판하신다.

욥의 꿈이 부분적으로는 그의 병으로 인해 생긴 것일는지도 모르지만(열이나 천연두로 인해 온 몸에 종기가 났을 때는 잠을 잘 이룰 수 없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는 사탄이 그의 꿈에 손을 뻗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탄은 그가 파멸시킬 능력이 없는 자들을 두렵게 하는 것을 기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은 이러한 일을 하도록 사탄에게 허락을 내리신(주께서 나를 놀래시도다) 하나님을 우러러 보았고, 사탄의 주장을 "하나님의 두려움이 그를 엄습하여 치는" 것으로 오해했다. 우리는 우리의 꿈이 우리를 더럽히거나 교란시키지 않도록, 우리를 죄로 유혹하거나 두려움으로 괴롭히지 않도록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께, 그리고 우리가 쉬거나 잠잘 때에도 쉬거나 주무시지 않고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마귀가 유혹하는 뱀처럼 또는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우리를 해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또 우리가 누웠을 때 단잠을 잘 수 있고, 이처럼 놀라지 않고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 욥은 이리저리 뒤적거리지도 않게 되도록 무덤 속에서 안식하기를 열렬히 바라고 있다(15, 16절).

(1) 욥은 생명을 혐오했고, 그것에 대한 생각을 증오했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이는 내가 살만큼 살았음이라. 나는 항상 이러한 상태, 곧 고통과 비참 속에서 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가장 편하고 형통한 생활만을 누리지도 않고, 끊임없이 이처럼 몰락할 위험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그리고 기껏해야 참된 위로가 없는 공허한 것으로서 지극한 슬픔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처럼 언제나 불확실한 것에 집착할 수가 없나이다." 선한 자는(만일 할 수 있다하더라도) 언제까지나 이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것이 그에게 미소를 던져 주리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악과 유혹의 세상이며 그는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2) 그는 죽음을 좋아했고 그것에 대한 생각을 스스로 즐겼다. 그는 "마음에"(그는 그것을 냉정한 판단이리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실상 그의 감정이었다) "숨이 막히기를 원했으며, 살기보다도 죽는 것을 원했다." 즉 이처럼 사는 것보다는 오히려 죽기를 원했다. 물론 이것이 욥의 결점이었다. 비록 선한 자는 언제까지나 이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으며, 순교자처럼 죄보다는 오히려 숨막혀 죽는 것을 택하겠지만,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원하실 때까지는 만족하게 살기를 원하며, 살기보다는 죽기를 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명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늘 나라로 갈 준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부여하기 때문이다.

 

7:8 없음.

 

7:9 없음.

 

7:10 없음.

 

7:11 없음.

 

7:12 없음.

 

7:13 없음.

 

7:14 없음.

 

7:15 없음.

 

7:16 없음.

 

7:17

욥의 대답(7)(욥기 7:17-21)

욥은 여기에서 하나님께 따지고 들었다.

Ⅰ.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다루시는 것에 대해 따졌다(17, 18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시나이까?" 이것은 다음 두 가지 방향으로 생각될 수 있다.

1. 거룩한 공의의 처사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것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 그리하여 마치 위대하신 하나님이 인간과 더불어 싸우실 때 위축되시고 멸시 당했던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위대한 자들은 그들의 어리석음과 추잡한 행동을 책망하고 시정해야할 정도로 그들보다 매우 열등한 자들을 인지하는 것은 자신들을 격하시키는 일로 생각한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크게 여기사 그를 찾으시고, 시련을 주시며 그에 대해 이처럼 큰 관심을 가지시는가? 왜 하나님은 그와 상대가 되지 않는 인간에게 이처럼 온 힘을 쏟으시는가? 왜 그는 환난으로 인간을 권징하시며 아침 햇살처럼 일정하게 계속해서 잦은 모열과 같은 고통을 주시며, 그것을 인간이 견딜 수 있는가를 분초마다 시험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아주 보잘 것 없는 그 피조물을 보살피시는 것이 그를 격하시키는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한 것이며, 그의 섭리의 본질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2. 또는 시편 기자처럼(시 8:4; 144:3) 거룩한 은총의 겸양성에 대해 경건하게 감탄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는 그 자신의 특수한 고난을 원망하는 중에서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전반적인 은총을 시인하고 있다. "비참하고, 불쌍하고, 연약한 피조물인 인간이 무엇이관대, 위대하고 영광스러우신 주께서 인간을 이처럼 대하나이까?"

(1) "인간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그를 이처럼 존중하시고, 그로 하여금 주와 더불어 언약을 맺고 교제를 나누게 하심으로써 크게 여기시나이까?"

(2) "인간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그에게 대해 매우 큰 관심을 가지시며, 그에게 마음을 두시며, 사랑하시고 친절을 베푸시나이까?"

(3) "인간이 무엇이관대 우리가 날마다 우리의 가까운 친구를 찾아가듯, 또는 의사가 그의 환자들을 돕기 위해 아침마다 그들을 찾아가듯, 주께서 아침마다 연민을 가지시고 그를 권징하시나이까?"

(4) "인간이 무엇이관대 사람을 돌보시고 지키시는 자로서 주께서 분초마다 시험하시며 그의 맥박을 느끼고 그의 안색을 살피시나이까?" 흙의 구더기 같은 인간이 하늘의 귀염둥이이며 총아라는 사실은 우리가 언제나 감탄해야 할 이유이다.

Ⅱ. 욥은 하나님께서 그를 특별히 다루시는 면에 대해 따졌다.

1. 그는 여기에서 그의 환난을 격렬하게 원망하고 있는데(우리도 모두 이러한 경향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의 최악의 상태를 우리는 다음 세 가지 표현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그는 하나님의 살이 꽂히는 과녁이라고 하였다. "주께서 나로 과녁을 삼으셨나이다"(20절). "나의 경우는 특이한 것으로서 아무도 나와 같은 일을 당하지 않았나이다."

(2) 그는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어 그 자신의 생명의 짐 밑에 막 가라 앉으려 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우리 자신 속에서 아무리 많은 기쁨을 맛보더라도 하나님은 그가 원하실 때 우리 스스로를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되도록 만드실 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대적이 되시사, 우리를 치시려하고, 우리가 그로부터 위안을 얻을 수 없다면, 우리 자신 속에서 우리가 어떤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겠는가?

(3) 그의 근심은 결코 끊일 날이 없었다고 하였다(19절). "주께서 주의 막대기를 들어 내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심지어 내가 침 삼킬 동안도 주지 않고 가혹하게 징벌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욥의 병이 그의 목에까지 미쳐 그를 질식케 했으므로, 그는 침을 삼킬 수도 없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그것이 "옷깃처럼 그의 몸에 붙었다고" 불평하고 있다(30:18). "주여 내게 숨을 쉴 시간을 주시겠나이까?"라고 그는 말했다(9:18).

2. 그는 그의 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가장 선한 자들도 한탄할 만한 죄를 가지고 있으며, 선할수록 더욱 그것을 한탄하게 될 것이다.

(1) 그는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음을 솔직히 시인하고 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하나님은 욥에 대해 "순전하고 정직한 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에 대해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죄가 있다하더라도 정직할 수는 있다. 그리고 중재자를 통해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들은 복음적으로 완전한 자로서 받아들여진다. 욥은 그의 친구들을 대적하여 그가 사곡한 자가 아니며, 악한 자도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하나님께 자기가 범죄하였음을 시인하였다. 만일 우리가 무죄하다는 결론이 따르지는 않는다. 가장 선한 자들도 그들이 범죄하였음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해야 한다. 그가 하나님은 사람을 "관찰하시는 자" 또는 "감찰하시는 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그의 죄를 한결 무겁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의 눈으로 나를 살피시고, 나를 선히 여기신다하더라도 나는 그를 대적하여 범죄하였노라." 우리가 환난 가운데 있을 때, 우리의 환난을 치료하는 방법으로서 죄를 자백하는 것이 마땅하다. 참회로써 자백하는 자들은 격렬한 원망을 하지 않을 것이다.

(2) 그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묻고 있다. "이처럼 주께 대적한 내가 어찌해야 하겠나이까?" 우리가 범죄하였음을 우리는 깨달아 인정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 치명적인 결과를 막기 위해 어떤 일을 행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그 일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말고 잘못 행해 것을 원상태로 만들기 위해 어떠한 방법을 택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빠져 들어가는 위험을 정말 느낀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용서 받기 위해, 어떠한 일이든 기꺼이 하고자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나아갈까?"(미 6:6, 7)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행할까를 "물어야 한다." 그것은 그의 의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그것은 오직 중재자,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복음적인 언약의 취지대로 우리들에게 그의 은총을 얻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물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인간의 파괴자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구세주 혹은 감찰하시는 자로 여기며, 그에게로 눈을 돌리는 것이 좋다. 회개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들을 멸하시기를 기뻐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그들이 다시 돌아와 살기를 원하시는 분으로 여기면서, 하나님에 대해 선한 생각을 지녀야 한다. "주는 인간의 구세주이십니다. 내가 주님의 긍휼함을 입었사오니 내 구주가 되시옵소서."



(3) 그는 그의 죄에 대한 용서를 진심으로 구하고 있다(21절). 한편으로 그의 마음의 흥분은 그의 원망을 더욱 비통하게 만든 것과 같이,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그의 기도를 더욱 생생하고 애절하게 만들었다.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주는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무한한 긍휼의 하나님이 아니시나이까? 주께서 나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역사하지 않으셨나이까? 그러면 어찌하여 내 죄를 사하여 주시지 않으시고, 나로 그 기쁨과 즐거움의 음성을 듣게 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가 단순히 그의 외적인 고통만을 제하여 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가 하나님 의 은혜가 부족함을 원망하여(6:4) 그것을 진심으로 구하고 있음이 여기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주여 내 죄를 사하여 주시고 내게 용서의 위로를 주옵소서. 그리하면 내가 쉽게 내 고통을 참으리이다"(마 9:2; 사 33:24).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가 범한 잘못을 용서해 주실 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안에 있는 죄악을 제하여 버린다. 하나님이 범죄함을 제하시는 곳마다 그는 죄의 능력을 깨뜨리신다.

(4) 용서를 구하는 그의 기도를 강력히 주장하기 위해 그는 그가 곧 죽으리라는 예상을 피력하고 있다.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이다." 죽음은 아마도 잠시 후에 우리를 흙에 누이고 잠들게 만들 것이다. 욥은 잠 못 이루어 시달리는 밤을 원망했었다(3, 4, 13, 14절). 그러나 침상에 누워 잘 수 없는 자들은 곧 흙에 누워 잠들 것이며, 꿈 때문에 놀라거나 이리저리 뒤척이지도 않을 것이다. "주께서" 내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그때는 이미 늦게 될 것입니다. 만일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내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면 나는 영원히 멸망할 것입니다." 우리가 곧 죽어야 한다는 생각과 그리고 아마도 우리가 갑자기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우리 모두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사함받고 우리의 죄악을 제하여 버릴 것을 간절히 열망하도록 만든다.

 

7:18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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