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대답(1)(욥기 6:1-7)
엘리바스가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는 욥에 대해 매우 날카로왔었다. 그러나 욥은 그의 이야기를 중단시키지 않고, 그가 말해야 할 것을 다 이야기할 때까지 참을성 있게 들어 주었던 것 같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에 대해 편견없는 판단을 하려는 자는 참을성 있게 그것을 끝까지 들어야 한다. 그러나 엘리바스가 이야기를 끝내었을 때 욥은 답변을 하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매우 실감나게 말하고 있다.
Ⅰ. 그는 일반적으로 그의 재앙이 그가 표현하거나 그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욱 심한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2, 3절). 그는 그것을 충분히 묘사할 수 없었다. 그들이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려 하지 않거나 또는 적어도 그들이 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공평한 손으로 그의 슬픔과 재앙을 달아 봄으로써 공정한 판단을 내리는 제 삼자에게 그것을 기꺼이 호소하려 하였다. 그는 그들이 그의 슬픔과 그것에 대한 모든 표현을 한 저울에 달고 그의 재앙과 그 모든 세부적인 것들을 다른 편 저울에 달아 주기를 원했다. 그리하여(비록 그가 슬픔 속에 있는 그 자신을 모두 합리화 시키려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23장 2절에서 말한 것과 같이)"재앙이 탄식보다 중하다"는 것을 그들이 알아주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그의 슬픔이 하여간에 그의 재앙은 "바다 모래보다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복잡하고도 심한 것이었으며, 슬픔 하나 하나가 모두 무거웠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 합하면 바닷가의 모래처럼 무수했다.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라고 그는 말했다). 다시 말해서 "그러므로 너희는 내 표현이 지리멸렬하고 비통함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 내 연설이 유창한 웅변가의 것처럼 훌륭하고 정중하지 못하거나, 슬픔에 잠긴 철학자의 것처럼 묵중하고 질서정연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아니,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는 그 중의 누구처럼 꾸밀 수가 없다. 내 말은 현재의 나처럼 아주 경솔하다."
1. 욥은 여기에서 그의 친구들이 그의 경우를 완전히 파악하고 그 최악의 사태를 알기도 전에 그에게 영적인 약을 처방해 주려고 하는 일을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원망하고 있다. 편안한 상태에 있는 자들이 환난을 당하는 자들의 고통을 올바로 평가하는 일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 짐이 무거운 것을 느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짐이 무겁다는 것을 느끼는 자들은 거의 없다.2. 욥은 그가 그의 날을 저주했을 때 사용한 과격한 표현에 대해 변명하고 있다. 비록 그 자신이 한 모든 말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지만, 그는 그의 친구들이 이처럼 과격하게 그것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분명히 그 경우는 특별한 것이었기 때문이며, 그리고 자기는 지금 일반적인 슬픔이라고 간주될 수 없는 그러한 슬픔에 처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를 묵인해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3. 욥은 그의 친구들이 그에게 자비롭고 사랑에 찬 동정을 보여 주기를 부탁하고 있으며, 그의 재앙이 극심함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이 그를 좀 더 온유하게 대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한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동정은 어느 정도 위로가 된다.
Ⅱ. 욥은 그의 재앙의 가장 아픈 부분으로서 그가 겪고 있는 마음의 고통과 두려움을 원망하고 있다(4절). 이 점에서 욥은 고통 가운데에서 그의 영혼의 고통을 원망하던 그리스도의 원형이 되고 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나이다"(요 12:27).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게 되었도다"(마 26:38).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여기에서 불쌍한 욥이 슬프게 원망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욥은 그가 느끼고 있는 것, 곧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힌" 것에 대해서 원망했다. 그가 이러한 혼돈과 궁핍, 치욕, 그리고 육신의 고통 속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그리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도려내어 그를 깊은 번민 속으로 빠지게 한 것은 그가 사랑하고 섬기던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그에게 가져다 주시고 그가 불쾌히 여기는 이 흔적들을 그에게 남겨 놓으셨다는 사실이었다.마음의 고통이 가장 아픈 고통이다. "누가 상한 심령을 참을 수 있으리요!" 우리는 몸이나 재산에 하나님께서 어떠한 환난의 고통을 기꺼이 내리시든지 간에 그가 계속 우리의 이성을 사용하시고 우리 양심을 화평케 하시는 한 우리는 그것에 복종할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것들 중 어느 한 가지 경우를 당하게 된다면, 그것은 정말 슬프고도 매우 불쌍한 일이다. 하나님의 맹렬한 고통의 화살을 막는 방법은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사탄의 맹렬한 유혹의 화살을 막는 것이다. 욥은 그것을 "전능자의 살"이라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이 쏜 화살과는 달리 그의 화살은 인간의 영혼에까지 미칠 수 있는 하나님은 능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영혼을 만드신 하나님은 그의 칼이 그 영혼에 미치도록 하실 수 있으시다. 이 화살의 독과 열은 그의 영혼을 마셔버릴 수 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이성을 혼란시키며 그의 결심을 흔들고 그의 기력을 쇠하게 하며 그의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감정이 격한 표현들이 비록 정당화될 수는 없다할지라도 그것들은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2. 그가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 원망했다. 그는 전투 대형을 취한 군대들에 대해 포위된 것처럼 그 자신이 "하나님의 두려움"에 의해 책망당하고 있음을 보았다. 하나님은 그를 두렵게 함으로써 그와 대적하여 싸우셨다. 욥이 그 자신의 내면으로 움츠러 들었을 때 아무런 위로도 얻지 못했던 것과 같이 그가 하늘을 향해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역시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하나님의 위로로써 격려받던 자들은 그것을 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두려움에 대해 놀라기도 한다.Ⅲ. 그는 그의 친구들이 그의 원망을 가혹하게 책망하고, 그의 경우를 미숙하게 다룬 것에 대해 원망하고 있다.
1. 그들의 비난은 근거없는 것이었다. 그가 이 환난에 빠진 것을 원망할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형통할 때는 결코 불만에 가득 찬 불안정한 영혼을 지닌 자들처럼 불평한 일이 없었다. 다시 말해서 "풀이 있으면 울지 않았으며, 꼴이 있으면 울지 않았다."(5절). 그러나 이게 그가 모든 즐거움을 완전히 빼앗기고서도 그의 슬픔을 전혀 토로하지 않는다면, 그는 들나귀나 소만도 못한 무감정의 소유자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맛없는 음식을 억지로 먹어야 했다. 그리고 너무 가난해서 음식의 맛을 더하거나 삶은 달걀에 간을 낼 만한 약간의 소금도 없었다. 이러한 것들은 이제 그의 식탁에 오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요리였던 것이다(6절). 그가 한 때는 만지기조차 싫어 했으며 "못된 식물"같이 여겼던 것들까지도 이제는 그가 즐겨 먹는 식물이 되었다.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우리들 자신이나 우리 자식들이 까다롭지 않게 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언제 우리가 그들이 가난하게 될는지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현재 업신여기고 있는 것들이 필요한 경우가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2. 그 위로는 시들고 무미건조한 것이었다고 보는 견해들도 있다(6, 7절). 그는 그에게 적합한 위로가 주어지지 않았으며, 그의 마음을 소생시키고 기력을 회복시킬 강장제가 주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원망하고 있다. 그들이 준 것은 달걀 흰자위처럼 그 자체가 무미한 것이었고, 가장 못된 식물같이 맛없고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엘리바스가 매우 훌륭하게 말한 것과 같이(5:8 ~) 욥도 그처럼 말하지 못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이 흥분되어 있는 자들은 이처럼 그들을 위로하는 자들을 모욕하기 쉽다.
욥의 대답(2)(욥기 6:8-13)
통제되지 않은 감정은 그것이 책망과 저지를 당할 때 흔히 더욱 격렬하게 된다. 일렁이는 파도가 바위에 부딪칠 때 매우 맹위를 떨친다. 욥은 그의 비참함을 행복하게 끝내 줄 죽음을 간청하였었다(3장). 이에 대해 엘리바스는 그를 엄숙하게 타일렀다. 그러나 욥은 엘리바스가 말했던 것을 접어두지 않고 여기에서 다시 전보다 더욱 격렬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잘못된 점들을 지적할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본받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Ⅰ. 그는 마치 이 세상에서 다시 좋은 날들을 보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또는 은혜와 믿음의 일을 통해서도 이 환난의 날들을 좋은 날로 만드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여전히 죽기를 강렬하게 원하고 있다. 그는 죽는 것 이외에는 그의 고통이 끝나는 것을 볼 수 없었으며 또 그것이 끝나기로 정해있는 때를 참을성 있게 기다릴 수 없었다.
그는 한 가지 요청이 있었다. 즉 그가 바라는 것이 있었다(8절). 그러면 그것이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기쁨으로 구원하시고, 다시 나를 형통케 해 주시는"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이었다(9절). "한 때 그가 그의 손을 늦추시사 나를 초라하게 하시며 나를 병들게 하신 것과 같이, 그가 또 한 번 손을 늦추시어 내 생명을 끊으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내게 치명타를 가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것은 프랑스말로 내게 은총의 일격(coup de grace)이 될 것이다." 그것은 바퀴에 치인 자를 빨리 죽이는 마지막 강타와도 같은 것이었다. 욥이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 한"때가 있었으나(31:23), 이제 그는 육신의 멸망을 간청하면서 주 예수의 날에 그 영이 구원 받기를 바라고 있다.
비록 욥이 지독히 죽음을 갈망하고 그것이 지연되는 것에 대해 매우 노하고 있을지라도, 그는 그 자신을 멸하기를 요청하지 않았으며, 그 자신이 그의 생명을 버리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단지 그는 "하나님이 그를 멸하기를 기뻐 하시기를" 간청했다. 세네카(Seneca)의 윤리는 감당할 수 없는 번민을 합법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으로 자살을 추천했지만, 그것은 그 당시에 알려지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율법과 자연법을 조금이라고 존중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이 방법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혼이 아무리 불편하게 육체 속에 감금되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감옥을 부수어서는 안되며 정당하게 해방될 때를 기다려야 한다.
Ⅱ. 그는 이 청을 하나님께 들어 주시기를 원하고 그를 위해 이 일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행해 주셨으면 하는 이 소망을 위해 기도했다. 그가 이처럼 빨리 죽기를 열렬하게 원하고, 더 나은 소망을 하나님께 올리지 못한 것은 그가 죄를 범한 것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옳지 않은 그의 소망이 그의 기도로 말미암아 더 나쁘게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구할 수 있는 것 이외에는 그 어느 것도 하나님께 구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 이외에는 믿음으로 그 어느 것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감정에 치우쳐 기도하는 사람들은 가장 그릇된 격렬한 표현을 쓰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노함이 없는 정결한 손을 들어 올려야" 한다.
Ⅲ. 욥은 죽음에 의해 그의 모든 근심을 제거할 수 있고 또 효과적인 위로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 자신에게 약속하고 있다(10절).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으리라. 지금 나는 위로받지 못하고 있으며 그때까지는 결코 위로받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1. 인간 생명의 허탄함을 보라. 생명의 유익함은 매우 불확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그것을 매우 고통스럽게 느끼며, 그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는 언제나 은혜 중에 기꺼이 그것을 떠나게 하자.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부르시기 전에 우리의 감정은 우리가 생명을 버리기를 원하도록 만들기가 쉽기 때문이다.2. 의로운 자가 죽음에 대해 가지는 소망을 보자. 만일 욥이 선한 양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부자와 나사로의 상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 죽음 저편에 있는 소망에 대해 이처럼 확고하게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제 그가 위로 받고 네가 고통당하리라."
Ⅳ. 그는 죽음에 대해 도전하여, 최악의 사태를 맞으려하고 있다. 그가 심한 고통과 번민 그리고 심한 경련과 같은 무서운 전조 없이는 죽을 수 없는 것을 알며, 그가 처형당하기 전에 고문을 받아야 한다고 해도, 마지막엔 결국 죽으리라는 그 기대로 인해 그는 죽어가는 고통을 괴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내가 무정한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리라. 내가 내 가슴을 열어 죽음의 화살을 받아들이겠고, 그것을 피하여 움츠리지 않으리라. 나를 살려두지 말라. 나는 내 모든 고통을 행복하게 끝내 줄 그 고통이 완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죽지 않느니 보다는 차라리 내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나를 죽게 하라."
이것은 매우 격렬한 말이다. 따라서 말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우리는 슬픔을 당할 때 온유하게 되어 그 선한 감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안색의 슬픔으로 인해 부드럽게 된 우리의 마음은 더 선해져야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스스로를 고집스럽게 만든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격노케 하여, 계속 그와 논쟁을 일으키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심판하실 때 이기실 것이기" 때문이다. 전능자에 대해 감히 "나를 살려두지 말라"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무례한 일이다.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인가?"(고전 10:22) 우리는 관대한 긍휼의 은혜를 많이 입고 있다. 우리가 그것에 싫증을 낸다는 것은 정말 나쁜 일이다. 오히려 우리는 다윗처럼 "나를 살려 주옵소서"라고 말해야 한다.
Ⅴ. 그는 그의 신앙 고백이 진실되고 확고한 것이라는 사실과 그의 세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어느 정도 유익하고 봉사적인 역할을 해 왔다는 사실에 대한 그 양심의 증거 위에 그의 위로를 두고 있었다.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 욥은 그에게 맡겨진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당시 거룩한 계시로써 축복 받았다.2. 그가 그 말씀들을 거역지 아니하였고,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에게 위로가 되었다.
(1) 그는 말씀을 저버리지 않고, 충분히 그것들로 하여금 그를 조종하게 했고, 모든 일에 있어서 그것들의 인내와 다스림을 받았다. 그는 그의 신념을 질식시키지 않았고, "불의 속에 진리를 가두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영적인 음식이 소화되는 것을 방해하거나, 영적인 약의 효과를 저해하는 일은 그 어느 것도 행하지 않았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말고, 빛 가운데서 항상 그것을 받아들인다.
(2) 그는 말씀을 막지 않았고, 모든 경우에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그가 알고 있는 지식과 의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범도로 삼는 것을 부끄러워 하거나 두려워 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전하는 일을 결코 게을리하지 않았다. 살아 있을 동안에 선한 자들 그리고 선을 행하는 자들 만이 죽음 속에서의 위로를 그들 스스로에게 약속할 수 있을 것이다.
Ⅵ. 욥은 현재의 이 비참한 상태에서 극도의 죽음을 바라고 있는 그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다(11, 12절). 엘리바스는 그의 이야기를 끝내면서, 욥이 아직도 그의 고통의 훌륭한 결실을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그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나 불쌍한 욥은 이러한 활력소들을 던져 버리고는 위로받기를 거절하고서 스스로를 절망에 내어 맡기고 있다. 그리고 매우 지혜롭게 그러나 고집스럽게 그에게 주어진 격려에 대해 논쟁하고 있다. 서글픈 영혼들은 그것들을 거슬러 이상하게 추론할 것이다. 엘리바스가 그에게 즐거운 기대를 가지도록 말해 준 것에 대해 답하면서, 욥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암시하고 있다.
1. 욥은 그러한 것들을 기대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내가 무슨 기력이 있관대 기다리겠느냐?" 너는 내가 얼마나 연약하게 되고 위축되었는지를 알며, 내가 얼마나 내 불안을 제어할 수 없는 가를 알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더 오래 살아 좋은 날들을 보리라는 기대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내 힘줄이 놋쇠로 되었고, 근육이 강철로 되었더냐? 그렇지 않다. 따라서 나는 언제까지나 이 고통과 비참함을 참을 수가 없고, 그 짐을 벗어버려야 할 필요가 있다. 내가 내 병과 맞잡고 싸울 만한 기력이 있다면, 나는 그러한 것을 보리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그러한 기력이 없다. "저가 내 힘을 중도에서 쇠약케 하시는" 것은 분명히 "내 날을 단촉케 하시는" 것이 될 것이다(시 102:23).모든 것들을 숙고해 볼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생명이 오래 지속되리라고 추측할 수가 없다. "우리가 무슨 기력에 있겠는가?" 그것은 기력에 달려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상의 기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우리가 그의 안에서 살고, 또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 기력은 점차 쇠약해진다. 우리는 매일 저장된 것을 쓰고 있으며, 그것은 점차로 다 소비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닥칠 싸움에 쓰기에 합당치 않다. 우리가 이 삼일간 앓고 나서 물처럼 약해졌다면 어디에서 우리의 기력이 생기겠는가? 긴 생명을 기대하기 보다, 우리가 여태껏 살아온 것을 고맙게 여기고, 우리가 조속히 사라지리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 타당하다.
2. 욥은 이러한 것들을 원할 이유가 없었다.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관대 오히려 참겠느냐? 죽음에서 내 자신에게 약속한 위로와 맞먹은 위로를 내가 어떻게 생명 속에서 약속할 수 있겠느냐?" 은혜로 말미암아 다른 세상에 갈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은 이 세상에 머무르기를 청하는 것이나, 그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좋아하도록 만드는 것들을 흔히 볼 수 없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더 섬기고, 하늘을 위해 더 합당하고 더 익은 열매를 취하려는 것이 생명의 연장을 바라는 목적이 되며, 그것은 우리의 주요한 목적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어떠한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더 오래 묵기를 원하겠는가? 생명이 길수록 그 괴로움은 더할 것이며(전 12:1), 생명이 길수록 그 기쁨은 줄어든다(삼하 19:34, 35).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상태를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최악의 상태를 보았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Ⅶ. 그는 그가 미쳤다는 의혹을 물리치고 있다(13절).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즉 내가 판단력을 사용하지 않았느냐?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너희가 나를 돕지 않더라도, 나는 나 자신을 도울 수 있다. 너희는 지혜가 내게서 완전히 떠나, 내가 미쳐버렸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매우 고상한 엘리바스여, 나는 미치지 않고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고 있다." 은혜를 받은 자들은 그것의 증거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실행하는 자들은 그들 속에 지혜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최악의 사태에서 그들을 도울 것이다. Sat lucis intus-즉 "그들은 그들 안에 빛을 가지고 있다."
욥의 대답(3)(욥기 6:14-21)
엘리바스는 욥을 매우 가혹하게 책망했다. 그리고 그의 동료들도, 아직까지 비록 말을 하지 않았지만, 엘리바스와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했다. 그들의 불친절에 대해 욥은 여기에서 원망하고 있는데, 그들의 태도는 그의 재앙을 더욱 악화시켰고, 그가 더욱 더 죽기를 원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를 위로해야 할 자들이 이처럼 그를 괴롭히고 있음이 증명되었는데, 그가 어떠한 만족을 이 세상에서 기대할 수 있겠는가?
Ⅰ. 욥은 왜 그들로부터의 친절을 기대했었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그의 기대는 인간성의 기본 원칙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14절). "피곤한 자, 그리고 환난에 눌려 다 죽어가는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겨야 한다."
1. 동정은 환난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베풀어야 할 의무이다. 편안한 상태에 있는 자들이 고통과 번민 가운데 있는 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은 그들을 동정하는 것,-그들에 대한 부드러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그들의 신실성을 표시하고 그들과 공감하는 것,-그들의 경우를 인지하고 그들의 걱정을 물으며 그들의 호소를 들으며 그들과 마음을 같이 하여 눈물을 흘리는 것,-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도우며 구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이다. 그들이 언제 그러한 일을 당할는지 모르더라도, 그들의 동료의 슬픔을 함께 느끼는 것이 똑같은 육신을 지닌 자가 취해야 할 합당한 태도이다.2. 비인간적인 것은 불경건과 불신앙이다. "그의 친구를 동정하지 않는 자는 전능자에 대한 두려움을 버린 것이다." 갈대아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요일 3:17). 하나님의 징벌을 당하는 자를 동정하지 않는 자들은 분명 하나님의 채찍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다(참조, 약 1:27).
3. 환난은 우정을 시험한다. 환난을 당하는 자들은 진정한 그의 친구가 누구이며, 단지 가면적인 친구가 누구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형제는 위급할 때까지 위하여 났기" 때문이다(잠 17:17; 18:24).
Ⅱ. 그는 그들에 대해 그가 얼마나 비참하게 실망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15절). "나를 도와야 할 내 형제는 내게 성실치 아니함이 시냇물의 마름 같다." 그들은 그와 더불어 슬퍼하고 그를 위로하기 위해 큰 예식을 갖추고 약속대로 왔다(2:11). 그리고 이처럼 훌륭하고 이처럼 선한 자들 이처럼 현명하고, 박학하며, 유명한 자들, 그리고 욥의 특별한 친구들로부터 어떤 특별한 일이 기대되었었다. 그들이 이야기하려는 요지는 욥에게 그의 이전의 경건함을 회상시켜 줌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을 그에게 확신시켜 주고, 그 영광스런 결과를 예고함으로써 그를 위로하려 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는커녕, 그들은 매우 야비하게 그를 책망하고 비방했으며, 그를 사곡한 자로 정죄하고, 그의 재앙을 모욕했다. 그리고 그의 상처에 기름대신 초를 퍼부었다. 이처럼 그들은 그에게 불성실하게 대했다.
우리 친구들에게 과격한 일을 행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 대한 그들의 정당한 기대를, 특히 우리가 불러 일으킨 기대를 좌절시키는 것은 기만적이며 불성실한 일이다. 더욱이 사람들에게 기대를 가지지 않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우리는 피조물로부터 거의 기대를 안할 수가 없으며 또한 창조주로부터 너무 많은 기대를 가질 수도 없다. 형제들까지도 "속이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렘 9:4, 5; 미 7:5). 그러므로 우리는 부러진 갈대 위가 아니라, 만세 반석 위에, 곧 새는 물통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에 우리의 확신을 두도록 하자. 하나님은 우리들이 미치지 못하는, 우리들의 소망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욥은 그가 당한 실망을 여기에서 여름에 시냇물이 마르는 것과 같다고 묘사하고 있다.
1. 그 비유는 매우 훌륭하다(15-20절).(1) 그들의 거짓된 태도는 얼음과 눈이 녹을 때는 홍수가 일어나, 시냇물이 검어지거나 탁하게 되어 버리는 거창한 광경으로 적절하게 비유되었다(16절).
(2) 욥을 위로하기 위해 엄숙히 찾아온 그들에 대한 그의 기대는 지치고 갈증에 허덕이는 나그네들이 예전에 흔히 발견해 왔던 가득 고인 생물을 찾아 여름날에 헤매는 것으로 비유되었다(19절). "데마와 스바의 떼들." 아라비아 사막으로 통하는 그 지방 상인들의 행렬들이 먹을 물을 위해 그 시냇물들을 찾아 헤매었다. "여기에도 없구나"라고 한 사람이 말했다. "조금 더 가보자." 다른 사람이 말했다. "내가 지난 번 이 길을 지날 때는 가득 고인 물이 있었거든 우리는 곧 그 물로 다시 힘을 낼 수 있을꺼야." 우리는 도움이나 위로를 얻었던 곳에서 다시 그것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채워지지 못할 것이다.
(3) 그의 기대에 대한 실망은 불쌍한 나그네들이 넘치는 물이 있으리라고 기대한 곳에서 모래 무더기를 발견하고는 매우 당황하는 것으로 비유되었다. 그들이 갈증을 느끼지 않은 겨울에는 많은 물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풍족하고 번영하는 자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우러러 볼 것이다. 그러나 여름의 더위 속에서 그들이 물을 찾을 때 그것은 그들을 실망시킬 것이다. 그것은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거나(17절), 옆으로 빗나가 버렸다(18절).
부유하고 높은 지위에 있던 자들이 몰락하여 망하게 되어서 위로를 구할 처지가 되었을 때, 예전에 그들을 칭찬하던 자들은 앞장서서 그들을 비방한다. 이처럼 피조물에 대한 큰 기대를 걸었던 자들은 그들이 도움을 받아야 할 때 그것이 그들을 실망시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은 "때를 따라" 도움을 얻게 된다(히 4:16). 황금에 소망을 둔 자들은 그리고, 그것을 신뢰하는 자들은 조만간에 그것을 부끄러워할 것이다(겔 7:19). 그리고 그 신뢰가 클수록 그 수치도 또한 더욱 커질 것이다. "바라던 것을 낙심하느니라"(20절).
우리는 헛된 소망으로 인해 우리 스스로를 낙심케 한다. 사람들이 기댈 때 갈대는 부러지기 마련이다. 우리가 모래 위에 집을 세운다면 우리는 분명 낙심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폭풍우가 불면 쓰러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그것이 서 있으리라는 기대를 할 만큼 바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는 한 우리는 속임을 당하지 않는다.
2. 그것은 매우 가깝게 적용되고 있다(21절). "너희도 허망한 자라." 그들은 무엇인가 하는 듯이 보였지만 그들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 없었다(갈 2:6 에 암시되어 있다). 그들이 욥을 방문해 준 것으로 인해 그가 더 지혜로와지지도 않았고, 또 그가 더 좋아지지도 않았다. 우리가 피조물 속에서 어떠한 만족을 취하거나, 어떠한 신뢰를 부여하든지 간에 아무리 그것이 우리에게 위대해 보이고 귀해 보이든지 간에, 우리는 언젠가는 "너희도 허망한 자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욥이 형통할 때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고 그는 그들과 그들의 교제 속에서 기쁨을 얻었다. 그러나 "너희도 이제 허망한 자라. 이제 나는 하나님 밖에서는 위로를 발견할 수가 없다." 피조물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기에는 부족하며 허망한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 언제나 확신을 가지는 것이 좋다. 그것은 우리가 때로 느끼고 있는 사실이거나, 우리가 병상에서 혹은 임종시에 또는 마음이 괴로운 때에 느끼게 될 사실이기 때문이다. "너희도 허망한 자라. 너희는 여태까지 그랬으며, 또 앞으로 그렇게 되어야 할 자들이 아니며, 너희가 되고자 했으며 그리고 너희가 그러할 것이라고 내가 생각해 왔던 그러한 존재들이 아니다.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다. 내가 출세 했을 때 너희는 내 비위를 맞추었다. 그러나 이제 내가 몰락하는 것을 보자, 너희는 나를 부끄럽게 여기며 내게 친절 베풀기를 두려워하는구나.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너희에게 무엇을 청하거나 빌릴 용기가 나지 않게 만드는구나"(22절과 비교해 보라). "너희가 나를 인정한다면 나를 보호할 책임을 지게 될까봐 두려워하는구나." 아마도 그들은 그의 병에 전염되거나, 그 불쾌한 냄새가 나는 곳으로 오기를 두려워했을 것이다. 환난 속에 있는 자들은 부끄럽게 여겨 그들 가까이 오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며, 그것은 우리의 재물이나 육신을 사랑하는 교만 또는 까다로운 마음에서 나오는 태도이다. 그들의 경우가 곧 우리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
욥의 대답(4)(욥기 6:22-30)
불쌍한 욥은 그의 친구들이 불친절하고 가혹하게 대한 것에 대해 여기에서 그들을 책망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그 자신을 정당화 하고, 그들을 정죄하게 되는 몇 가지 일에 관해 그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만일 그들이 공명정당하게 생각하고, 그들이 생각한대로 말하기만 한다면, 그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Ⅰ. 비록 그가 궁핍하더라도 그는 구걸하지 않을 것이며 그의 친구들에게 부담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환난을 당했을 때 구걸하는 자들은 대개 침묵을 지키는 불쌍한 자들보다도 덜 동정받는다. 욥은 친구들 보기를 좋아했지만 그는 "나를 공급하라"(22절). 또는 "나를 구원하라"(23절)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비용을 축내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일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1. 그를 위해 모금하여, 이 세상에서 그를 다시 세워 주기를 부탁하지 않았다. 비록 그는 그의 재앙이 그 자신의 어리석음이나 과오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손에 의해 왔다는 것을 변론할 수도 있었지만-그가 완전히 몰락하여 황폐케 되었음을-그가 잘 살았을 때에 환난에 처한 자들을 동정했고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음을-그의 친구들이 부유하여 그를 도울 수 있었음을 변론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나를 위하여 재물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훌륭한 자들은 스스로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친구들을 괴롭힐까 두려워한다.2. 또는 그를 위해 땅을 주고, 스바 사람과 갈대아 사람들의 손에서 그의 가축을 되찾도록 도와 달라거나, 그들에게 보복하자는 부탁을 하지 않았다. "내가 언제 대적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고 너희에게 부탁했느냐? 아니다. 나는 너희가 어떤 위험을 당하거나 내 일 때문에 부담을 가지기를 결코 원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친구들에게 폐를 끼치기보다는 차라리 고통 가운데 기쁘게 앉아서 내 최선을 다하겠다."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그의 손으로 일했다. 욥이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도움이 필요하고, 그들의 손으로 그를 도울 능력이 있었을 때에 그것을 제공하지 않아도 좋다는 구실은 될 수 없다. 그러나 욥이 그들에게 선한 표정과 선한 말 이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을 때에도, 욥은 그것을 얻을 수 없었고, 그들은 더욱 냉정하게 그를 대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조금밖에 기대하지 않았을 때에도 우리는 거의 아무 것도 얻을 수 없게 되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 그러나 하나님께 우리가 많은 것을 기대할 때라도 더욱 더 많이 얻게 된다(엡 3:20).
Ⅱ. 비록 그는 그들과 의견이 달랐을지라도 고집을 내세우지 않고, 신념을 굽힐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잘못되었음이 밝혀지는 대로 곧 진리를 향해 돛을 달 준비가 되어 있었다(24, 25절). "만일 불쾌한 비방과 무자비한 암시 대신, 충분한 증거가 있는 명확한 교훈을 내게 주거나, 근거있는 논쟁을 벌린다면, 나는 내 잘못을 인정하고 내 과오를 자백할 용의가 있다.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왜냐하면 나는 때때로 기쁘고도 놀랍게, 옳은 많은 어찌 그리 유력한 지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가 택한 방법으로는 결코 개심하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너희의 가설은 그릇되었고, 너희의 추측은 터무니 없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 처사는 보잘 것 없으며, 너희가 적용한 것들은 심술궂고 무자비하다."
1. 정당한 논리는 명령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런 말에 정복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야유적이고 더러운 말은 무능력하고 미련하다. 따라서 그 말에 대해 사람들이 성을 내고 완고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2. 자기 자신의 잘못을 시정하고 어느 점이 잘못되었는가를 깨닫게 되도록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틀림없는 성품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예전의 생각과는 반대로 그 자신이 잘못되었음이 드러났을 때는 그 옳은 말들이 유력하며 훌륭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Ⅲ. 비록 욥이 정말 잘못을 범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에게 그처럼 가혹한 대우를 해서는 안 되었다(26, 27절). "너희가 말을 책망하려느냐? 또는 (그 단어가 의미하듯) 마치 그 말이 불경하고 무신론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 비참한 상태에 있는 나의 이 격렬한 표현들을 크게 책잡겠느냐? 너희가 조금만이라도 솔직하고 너그럽다면 그것을 용서해 줄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을 좀 더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영적인 상태가 지극한 고통으로 인해 어찌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어떤 경솔하고 성급한 말들에 의해 판단되어야 하겠느냐? 그러한 상태를 평가하는 것이 정당하고 친절하며 의로운 일이냐? 너희가 이러한 취급을 받아도 좋겠느냐?" 그들로 하여금 그를 냉혹하게 대하도록 촉구한 두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그들은 그가 처해 있는 연약하고 무력한 상태를 이용했다.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을 자로구나." 이것은 매우 야비하고 비인간적인 것을 지적하는 속담의 표현이다. "고아들은 그들 스스로 모욕을 방어할 힘이 없다. 이러한 약점을 이용하여 비열하고 야비한 정신의 소유자는 그들을 모욕하고 짓밟는다. 너희도 나에게 그렇게 행하는구나." 욥은 자식이 없는 아비였기 때문에 그 자신이 아비없는 자식처럼 많은 수치를 당했다고 생각했다(시 127:5). 그러므로 그는 고아들을 짓밟은 자들을 불쾌하게 여길 수밖 에 없었다. 어떤 면으로든지 고아로 간주될 수 있는 자들을 억압하고 학대하는 자들은 그들의 행위가 인간에 대한 동정심을 벗어 버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대적하여 싸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이며 도울 자 없는 자들을 도우시는 자이며 또 그렇게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2. 그들은 친절을 가장했다. "너희는 너희 벗을 매매할 자로구나. 너희는 친구인 나에게 불친절할 뿐만 아니라, 우정을 가장하여 나를 함정에 빠뜨리는구나." 그들이 욥을 방문하여 그와 자리를 함께 했을 때, 욥은 그들에게 그의 마음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을 것이며, 그의 원망이 더 비통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 그를 위로하고자 노력하리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그로 하여금 평시 보다 더 허심탄회한 마음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다윗은 악인들이 그 앞에 있었을 때 분노로 해서 숨막힐 지경이었지만 만일 그들이 그의 친구들이기만 했다면 아마도 그가 그들에게 분노를 터트렸을지도 모른다(시 39:1). 그러나 그들이 욥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여 그로 하여금 허심탄회하게 말할 여유를 주었지만, 이 발언의 자유는 오히려 그들의 비방을 받게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를 위해 함정을 판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처럼 우리가 분노에 들떠서 잘못 행한 것이 마치 고의적으로 행한 것처럼 오해받게 된다.
Ⅳ. 비록 욥이 과격한 말을 했었을지라도 그 골자에 있어서는 옳았다. 그리고 그의 환난이 매우 특수한 것이었을지라도 그것이 그가 사곡한 자이거나 사악한 자임을 입증하는 것은 못되었다. 그는 그의 의로움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으며 결코 그것을 놓치려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이기 위해 그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1. 그들이 그에게서 본 것에 대해 호소하고 있다(28절). "이제 너희가 나를 향하여 보기를 원하노라. 너희가 나를 미친 자나 사악한 자라고 말할 만한 것을 내게서 보았느냐? 차라리 내 얼굴을 보라. 그러면 너희는 거기에서 이 모든 것을 참고 복종하는 마음이 나타나 있는 것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내가 나의 날들을 저주했을지언정 나의 하나님을 저주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나의 표정이 증거할 것이다." 또는 오히려 이런 뜻이기도 할 것이다. "내 병과 염증을 일으킨 종기를 잘 살펴보더라도 그것은 내가 거짓말 하지 않았다는 것을 너희에게 증거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런 뜻이다. "내가 이유없이 원망하지 않았음을 그것이 증거할 것이다. 너희 눈으로 직접 내 상황이 몹시 비참하다는 것과 실재보다 더 나쁘게 과장함으로써 하나님과 분쟁하는 일은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라."2. 그들이 욥에게서 들은 것에 대해 호소하고 있다(30절). "너희는 내가 해야할 이야기를 들었다.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며, 너희가 나를 책망할 만한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가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부인했느냐? 나의 현재의 주장이 옳지 아니하냐? 너희는 내가 사악한 것을 분별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내 말에 의해 알 수 있지 않느냐? 나는 너희의 오류와 과오를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내 자신이 잘못했다면 나는 그것도 깨달을 수 있다. 너희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나는 내가 말하는 것을 알고 있다."
3. 그들 자신이 거듭 신중하게 생각해 볼 것을 호소하고 있다(29절). "너희는 돌이켜 공평하게, 그리고 편견없이 그것을 거듭 고려해 보라. 그리하여 불의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게 하고 의롭지 못한 판결이 나오지 않게 하라. 그리하여 불의한 것이 없게 하기를 원하노라." 다시 말해서 그것은 이런 뜻이다. "나는 이 문제에서 옳다. 그리고 내가 분노를 참아야 할 때, 그렇게 하지 못할지라도, 나는 나의 결백함을 지켰으며, 내 자신이 정직한 자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것 이외에는 그 어느 말도 하지 않았고,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으며,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정당한 이유를 가진 자는 정당한 것을 들어 주는 것 이외에는 그리고 필요할 때에 다시 들어주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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