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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엘리바스의 연설(4)(욥기 5:1-5)

욥과 그의 친구들 간에 매우 열띤 논쟁이 시작되자, 엘리바스는 여기에서 여러 증인과 인용들을 예거하였다. 모든 논쟁에 있어서 논쟁자들이 그들 사이에서 그것을 해결지을 수 없다면 여러 인용들을 빨리 들이댈수록 좋을 것이다. 엘리바스는 그의 주장이 선하다는 것을 매우 확신했기 때문에, 욥이 중재자를 택하도록 종용하고 있다(1절). "부르짖어 보아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1. "너와 같이 고통당하는 자가 있겠느냐? 현재의 너와 같이 이러한 극한 상황에 처한 거룩한 자가 정말 있었다는 예를 하나 들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를 결코 너처럼 대하시지는 않으신다. 그러므로 분명 너는 그런 거룩한 자가 아니다."

2.. "너와 같이 말하는 자가 있겠느냐? 선한 자가 그의 날을 너처럼 저주한 일이 있었느냐?" 또는 어떤 성인이 이렇게 열에 들떠 흥분하고 있는 너를 정당화 해 주거나,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표시라고 말하겠느냐? 그 어느 거룩한 자도 너를 옹호하거나, 나를 반박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는 알게 될 것이다. "거룩한 자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네가 원하는 자에게로 향해 보라. 너는 그들이 모두 나의 마음과 같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충실한 자들"이 모두 내 의견에 "일치"했다. 그들은 이제 내가 말하려는 것에 모두 동의해 주었다.

(1) 선한 백성들은 구약 성서에서도 거룩한 자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보통 말할 때(만일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처럼 말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면) 신약 성서에 나오는 인물에 대해 성 마태, 성 마가 라는 호칭을 사용하듯, 왜 성 아브라함이나 성 모세라고 부르지 않는 지, 또 영국의 주교는 성 다윗이라고 부르면서 왜 시편 기자는 성 다윗이라고 부르지 않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아론은 특별히 "여호와의 거룩한 자"로 일컬어지고 있다.

(2) 거룩한 자들은 역시 거룩한 자들에게로 향할 것이며, 그들을 친구로 삼아 교제하고 그들을 그들의 판단자로 삼아 그들과 상의할 것이다(참조, 시 119:79).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이다(고전 6:1, 2). "선한 자의 길로"(잠 2:20) "성도들이 지나간 옛길로 행하라." 모든 사람마다 각자가 살펴서 그에게 호의를 베풀 사람들을 선택하며, 그들의 의견이 그에게 영예로운 것과 영예롭지 못한 것을 판가름 해 주는 기준이 된다. 이제 모든 참된 성도들은 그들과 같은 자들을 의뢰하며 그들의 의견을 지지하고자 한다.

(3) 어떤 진리들은 매우 명백하며, 또 매우 보편적으로 알려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믿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 성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대담하게 호소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서로가 일치하기까지에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진리들도 있다. 그것들은 죄의 악함과 세상의 허탄함 그리고 영혼의 가치와 거룩한 생명의 필요성 등에 관한 것들이다. 비록 이러한 진리에 대한 믿음에 따라 행해야 할 때 모두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것에 대해 증언할 준비를 모두 갖추고 있다. 그는 모든 성자들이 그와 의견이 일치하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있다.

Ⅰ. 죄인들의 죄는 직접적으로 그들 자신의 멸망을 초래한다(2절). 그 자신의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인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분노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분노는 그의 뼈와 피 속에 있는 불이다. 그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하다. "시기"가 그 뼈를 썩게 한다. 그러므로 시기를 가지고 스스로 불평하는 "어리석은 자는 망한다." "너희 경우도 마찬가지다." 엘리바스는 말하고 있다. "네가 하나님과 더불어 논쟁하는 한 너는 큰 재앙을 네 자신에게 끼치게 된다. 네 자신의 환난에 대해 분노하고, 우리의 형통에 대해 시기하는 것은 단지 너의 고통과 비참을 가중시킨다. 거룩한 자들에게로 향하여 보라. 너는 그들이 그들의 주장을 더 잘 이해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욥은 그의 아내에게 그녀가 어리석은 여자처럼 말했다고 이야기했다. 이제 엘리바스는 그에게 그가 미련한 자, 어리석은 자처럼 행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또는 그것을 이렇게 풀이할 수도 있다. "만일 사람들이 멸망하고 파멸한다면 그들을 멸망시키고 파멸시키는 것은 언제나 그들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그들은 일종의 정욕으로 인해 그들 자신을 죽인다. 그러므로 욥, 너도 틀림 없이 어떠한 어리석은 일을 행했고, 그것으로 인해 너는 이처럼 불행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분노와 시기로 해석하고 있다. 욥은 악인의 형통에 대해 불안해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세상의 미소는 결코 하나님의 찡그림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는 피난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분노는 그것이 임한 자에게 영원한 죽음이 될 것이다. 다른 것이 혼합되어 있지 않고 끝도 없는 하나님의 분노가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Ⅱ. 그들의 형통함은 짧고 그들의 멸망은 분명하다(3-5절). 엘리바스는 여기에서 욥의 경우와 악인의 일반적인 경우를 병행시키고 있는 것 같다.

1. 욥은 한 때 형통했었다. 그의 형통함은 확고한 것 같았고 그의 형통함 속에서 그는 안전하게 보였다. 그리고 어리석은 악인의 경우도 대부분 그렇다. "내가 미련한 자의 뿌리 박는 것" 즉 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그것이 계속 지탱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내가 보았다(참조, 렘 12:2; 시 37:35, 36). 우리는 세상적인 사람들이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을 본다. 세상적인 것 위에 그들은 그들의 소망을 세우며 그것으로부터 그들은 위안의 즙을 끌어 올린다. 외적인 상황은 번창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땅에 뿌리 박고 있는 영혼은 형통할 수 없다.

2. 이제 욥의 형통함은 끝났다. 그리고 다른 악인들의 형통함도 빨리 끝나버린다.

(1) 엘리바스는 믿음의 눈으로 그들의 멸망을 내다 보았다. 현재의 일만을 보는 사람들은 그들의 거주지를 축복한다. 그리고 그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면서 이것이 오래 가기를 축복하고 또 그들 자신도 그 악인들과 같은 상황에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엘리바스는 그들이 뿌리박기 시작하는 것을 보자마자 당장에 그것을 저주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명확하게 그들의 멸망을 내다보고 예언했다. 그가 그것을 기도했던 것이 아니다("나는 재앙의 날을 원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예측한 것 뿐이다.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거기서 그는 "저희의 결국을 깨달았으며" 그들의 파멸을 들었는데(시 73:17, 18), 그것은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리라"는 것이었다(잠 1:32).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들은 악인의 집이 아무리 훌륭하고 견고하게 지어졌더라도 온갖 훌륭한 물건들이 아무리 풍성하더라도 "악인의 집에 여호와의 저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잠 3:33). 그리고 그들은 그 저주가 얼마 안 가서 반드시 그 집을 그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르리라는 것을 내다볼 수 있다(슥 5:4).

(2) 그는 마침내 그가 예견했었던 것을 보았다. 악인에 관한 그의 예견은 그에게 실망을 주지 않았다. 일이 그대로 응했다. 즉 그의 가족들은 파멸했고, 재산은 몰락했다. 이 상세한 내용에서 그는 분명히 그리고 매우 불쾌하게 욥의 재앙을 반영하고 있다.

[1] 그의 자식들은 눌림을 당하였다(4절). 그들은 맏형의 집에서 그들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했으나, "평안한 데서 멀리 떠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문에서 눌리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 집의 문이나 대문은 높이 세워져 있었고, 그것이 그들 위에 무겁게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구하는 자가 없었다." 이처럼 악인들 위에 벌이 내려 그들이 나쁜 방법으로 탈취한 것을 빼앗기게 되는 것은 악인의 가족들에게 임하는 멸망이라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그들의 후손에게 남겨 준다. 그러나 그렇게 상속한다고 해서 그것에 대해 정당한 소유권을 가진 자가 그것을 못 얻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소유자들은 그들의 자식들을 누를 것이고 법의 합당한 절차를 밟아(그러나 그들을 도울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는 학대함으로써 그들을 몰아낼 것이다(시 109:9 이하).

[2] 그의 재산은 약탈당하였다(5절). 욥의 경우도 역시 그러했다. 굶주린 도적들, 스바 사람과 갈대아 사람들이 그것을 빼앗아 달아나고 그것을 삼켜 버렸다. 엘리바스는 이러한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흔히 목격해 왔다고 말하고 있다. 약탈과 노략으로 탈취한 것은 그와 같은 방법으로 잃어버린다. 조심성 있는 주인은 그것을 가시나무로 에워싼 후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울타리는 탐욕스런 약탈자에 대해(굶주림은 돌벽을 부수거늘 하물며 가시나무 울타리쯤이랴), 그리고 하나님의 저주에 대해 아무 소용이 없음을 증명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시와 덤불을 뚫고 들어와 "그것을 모아 불사"를 것이기 때문이다(사 27:4).

 

5:2 없음.

 

5:3 없음.

 

5:4 없음.

 

5:5 없음.

 

5:6

엘리바스의 연설(5)(욥기 5:6-16)

엘리바스는 죄에 대한 당연한 심판으로서 욥의 자식들이 죽고 그의 재산을 잃었다는 것을 언급함으로써 욥의 치명적인 약점을 찌른 후 욥으로 하여금 절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제 여기에서 그를 격려하기 시작하고 있으며, 그를 안심시키려 하고 있다. 이제 그는 음성을 변하여(갈 4:20) 마치 그가 욥에게 던진 심한 말에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이 친절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Ⅰ. 엘리바스는 우연히 임하는 재앙은 없으며 또한 그것이 부차적인 원인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도 아님을 욥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그것은 "티끌에서 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풀처럼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6절). 그것은 자연의 산물처럼 어떤 일정한 계절마다 차례로 오는 것이 아니다. 형통함과 곤경함의 비율은 낮과 밤, 여름과 겨울처럼 섭리에 의해 정확하게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 그가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때와 방법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내용을 이렇게 보고 있다. 즉 "죄는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불의는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사람들이 약하다면 그들은 흙이나 기후나 별에게 그 죄과를 돌리지 말고 그들 자신에게 돌려야 한다. "네가 멸시하였다면 너 혼자 그것을 견뎌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재앙을 운수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죄를 운명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고난에 처하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보내셨으며 우리가 그것을 우리 자신에게 초래했음을 시인해야 한다. 전자는 우리가 매우 참을성을 지켜야 할 이유이며, 후자는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철저하게 회개해야 하는 이유이다.

Ⅱ. 엘리바스는 재앙과 고난은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서 예상해야할 것이라는 사실을 욥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다"(7절). 그것은 인간으로서가 아니다(만일 그가 그의 무죄함을 지켰더라면 그는 태어나 즐겁게 살 것이다). 그것은 사악한 사람 "여인에게서 태어나서"(14:1) 죄를 범한 사람으로서였다. 사람은 죄 속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사람은 고난을 위하여 태어난다. 영예와 재산과 함께 태어나는 자들까지도 육신의 고통을 지니고 태어난다. 우리의 타락한 상태 속에서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 당연한 결과는 고난이다(롬 5:12).

우리가 태어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정말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죄와 고통밖에 없다. 이것은 모두 불티가 위로 날음과 같다. 행동적인 범죄는 원죄의 용광로에서 날라오는 불티이다. "모태에서부터 패역한 자"라 칭함을 받은 우리가 "궤휼하게" 행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사 48:8). 우리의 육신은 이처럼 매우 연약하고 우리의 기쁨은 이처럼 모두 허탄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고난도 또한 "불티가 위로 날음 같이" 자연히 그 속에서 생긴다. 즉 고난이 많으니 만큼 그것도 매우 두껍고 탄탄하게 연이어 따라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우리가 태어날 때 지니고 있었던 것에 불과한 그 재앙을 이상한 것으로서 받아들여 놀라거나 그것을 가혹한 것으로 여기며 시비해야 하는가? 사람은 "수고하기" 위해 태어나며(난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음식을 먹기 위해 얼굴에 땀을 흘려야 하는 벌을 받고 있다. 이것은 사람을 단련시켜 그의 고난을 좀 더 잘 참도록 만든다.

Ⅲ. 엘리바스는 욥에게 이 재앙 속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알려 주고 있다(18절). "나 같으면 하나님께 구하리라. 반드시 그리하리라"(원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 다툰 것을 넌지시 책망하고 있다. "욥 내가 너와 같은 경우였다면 나는 그렇게 역정을 내고 흥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을 것이다." 우리가 만일 어떤 사람의 경우라면 하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 시련이 자신에게 임할 때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말한 것처럼 행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 엘리바스가 자기 자신을 비유한 것은 그에게 매우 훌륭하고 알맞는 충고가 된다. "내게 있어서 만일 내가 너와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내가 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친구들에게 만일 우리가 그들의 경우라면, 우리의 고통을 덜기 위해 거기서 유익을 얻고 그 좋은 결과를 보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하겠다는 것 이외의 다른 충고를 주어서는 안 된다.

(1) 우리는 기도로써 하나님으로부터 긍휼과 은혜를 얻어야 하며, 그를 아버지와 친구로서 구해야 하고, 비록 그가 우리와 더불어 다투실지라도 우리를 도와주고 구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으로서 그를 찾아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우리는 그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모든 선함과 모든 위로의 근원이시며 아버지이신 그에게 우리 자신을 아뢰어야 한다. "괴로움을 당하는 자가 있는가? 그에게 기도하도록 하자." 그것은 모든 상처를 치료해 주고 마음을 편안케 해 준다.

(2) 우리는 인내로써 하나님께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사정을 맡겨야 한다.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그것을 하나님 앞에 펼쳐놓고 나는 그것을 그에게 맡기겠다. 그것을 그의 발 앞에 두고 나는 그것을 그의 손에 위임하겠다. "내가 여기에 있나이다. 주님 당신이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옵소서." 우리의 뜻이 정말 선하다면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 의탁하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의로우시며 친절하시기 때문이다. 형통하기를 구하는 자들은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Ⅳ. 엘리바스는 욥으로 하여금 이처럼 하나님을 구하고 그의 일을 맡기도록 격려하고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에게 효과적인 도움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1. 엘리바스는 욥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통치의 권세를 생각해 보도록 권하고 있다. 그는 "큰 일을 행하신다"(9절). 그것은 정말 큰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일도 행하실 수 있으며, 모든 것을 행하시고 그 자신의 뜻에 의한 계획대로 모두 행하신다.

(1) 그의 능력의 효과는 "측량할 수 없다." 그러한 일은 결코 깊이를 잴 수 없으며, "그 시종을" 그 누구도 발견할 수 없다(전 3:11). 자연의 일들은 신비스럽다. 아무리 열심히 탐구하여도 충분히 그것들을 찾아내기에는 매우 부족하며, 가장 슬기로운 철학자들도 그들 자신이 혼돈하게 됨을 긍정한다. 섭리의 계획은 매우 깊어서 측량할 수 없다(롬 11:33).

(2) 그의 능력의 효과는 "셀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결코 헤아려질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셀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신다. 그의 능력은 결코 다함이 없으며, 또한 그의 목적은 종말까지 모두 이루어질 것이다.

(3) 그것들은 "기이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아무리 경탄하여도 결코 충분하지가 않다. 영원자체만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리 경탄을 받아도 충분치 않다.

[1] 이제 엘리바스는 욥으로 하여금 이것을 깊이 생각해보도록 함으로써 그에게 하나님과 다투는 그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려 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대한 심판을 내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측량할 수 없고 우리가 탐구할 수 없는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와 다투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분명히 어떤 때는 우리를 매우 가혹하게 대하실 것이며 또 우리를 단숨에 누르실 수 있기 때문이다.

[2] 욥에게 하나님을 구하고 그의 일을 하나님께 맡기도록 격려하고 있다. 그가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다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욱 위로가 되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매우 의기소침해 있을 때 우리의 위안을 위해 크고 기이한 일을 행하실 수 있다.

2.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에 대한 몇 가지 예를 들고 있다.

(1) 하나님은 자연계 속에서 큰 일을 행하신다. "그는 비를 땅에 내리시고"(10절), 일반 섭리의 모든 선물을 위해 여기에 "결실기를 주시어 음식과 기쁨으로 우리 마음에 만족케 하신다"(행 14:17). 엘리바스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 일을 보이고자 했을 때 그가 비를 내리시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일반적인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사소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내려지며, 그것에 의해 어떠한 결과가 이루어지는 가를 우리가 신중히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그것이 능력과 선하심에서 나온 큰 일임을 알게 될 것이다.

(2)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는 일 속에서 큰 일을 행하신다. 하나님은 그가 보내시는 비로써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시고, 궁핍한 자를 위로하실 뿐만 아니라(10절), 비천한 자를 높이 들어올리시기 위해 그는 "궤휼한 자의 계교를 파하신다." 11절과 12절은 연결되어 있다. 누가복음 1장 51절부터 53절의 내용과 비교해 보라. 그는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으며" 그렇게 하여 "비천한 자를 높이시고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

[1] 하나님은 교만하고 간교한 자의 뜻을 좌절시키신다(12-14절). 그들 스스로를 자유롭고 절대적인 자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최고의 권능이 있으며 그것은 그들의 계교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을 달성한다. 다음을 주목하라.

첫째, 하나님과 그의 나라의 유익함을 거슬려 행하는 사특한 자들은 흔히 매우 간교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간교함으로 유명한 그 옛 뱀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슬기롭다고 생각하나 결국엔 미련한 자들이 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의 간교한 적들은 그것을 대적하기 위해, 그리고 그것의 충성스런 신하들을 대적하기 위해 계획과 방법을 고안해 내고 일을 전개해 나간다. 그들은 끊임없이 지치지 않고 계획하며, 철저히 협의한다. 그리고 소망을 높이 두며 치밀한 계략을 짜고 단단히 동맹을 맺는다(시 2:1, 2).

셋째, 하나님은 그와 그의 백성들을 거스리는 대적들의 모든 계획을 쉽게 파하시고 좌절시키실 수 있으며,(그의 영광을 위한 한) 분명 그렇게 하실 것이다. 어떻게 아하도벨과 산발랏과 하만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는가! 유다를 대적한 아람과 에브라임의 공모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대적한 게발, 암몬, 그리고 아말렉의 모의,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를 대적하려는 땅의 왕들과 방백들의 계략이 어떻게 깨져버렸는가! 손을 뻗쳐 하나님과 그의 교회를 치려는 자들은 그들의 일을 이루지도 못하며, 시온을 치기 위해 무기를 만드는 자들은 결코 형통하지 못한다.

넷째, 교회를 멸망시키기 위한 대적들의 계획은 흔히 그들 자신의 멸망으로 전환된다(13절). "그는 간교한 자로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며," 그리고 "제가 만든 함정에 빠지게 하신다."(시 7:5, 16; 9:15, 16). 바울 사도는 이방의 지식인들이 어떻게 하여 그들 자신의 헛된 철학에 의해 우롱 당하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 이 말을 인용하고 있다(고전 3:19).

다섯째,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때 그들은 당황한다. 그리고 매우 명백하고 쉽게 보이는 일에서까지도 혼돈을 일으킨다(14절). "그들은 낮에도 캄캄함을 만난다." 아니, 그들의 계획이 급격하고 다급함으로 인하여 난외에 있는 것처럼 "그들은 캄캄함 속으로 스스로 뛰어든다"(참조, 12:20, 24, 25).



[2] 하나님은 가난하고 낮은 자의 사정을 돌아보시며 그것을 지지하신다.

첫째, 그는 낮은 자를 높이 드신다(11절). 교만한 자들이 누르고자 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그들의 발 밑에서 일으키시며, 안전지대에 두신다(시 12:5). 마음이 낮은 자들과 애통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높이시고 위로하시며, "견고한 바위가" 있는 "높은 곳에 거하도록" 만드신다(사 33:15). 시몬의 애곡하는 자들은 안전 표시로 이마에 표를 받은 자들이다(겔 9:4).

둘째, 그는 곤비한 자를 구하신다(15절). 간교한 계획은 가난한 자를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다. 혀와 손, 칼 그리고 모든 것은 이러한 일을 위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하여 그들 스스로를 도울 수가 없어서,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의탁하며, 그를 열심히 찬미하는 그의 가난한 자들을 그의 특별하신 보호 아래 두신다.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 험한 말을 퍼붓는 입으로부터, 그리고 험한 일을 행하는 손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원하신다면 혀를 묶고 손을 힘없게 만드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16절),

1. 약하고 소심한 성도들이 위로 받는다. 그리하여 절망하기 시작한 "가난한 자가 소망이 생긴다." 어떤 사람들의 경험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최악의 사태에서도 최상의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격려한다. 도와 줄 자 없는 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소망없는 자들에게 소망을 보내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2. 대담하게 위협을 주던 죄인들은 당황하게 된다. "불의가" 그 이상한 구원에 놀라 "스스로 입을 막는다." 그리고 그들이 대적한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임이 밝혀졌을 때, 그들 스스로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며, 굴욕 속에서 실망을 느낀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관을 마지못해 인정하면서 그것에 대해 반대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가난한 자를 지배하고 그들을 놀라게 하며 위협하고 또한 그들을 그릇되게 정죄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옹호하심이 드러났을 때, 그들을 대적하여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참조, 시 76:8, 9; 사 26:11; 미 7:16).

 

5:7 없음.

 

5:8 없음.

 

5:9 없음.

 

5:10 없음.

 

5:11 없음.

 

5:12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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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의 연설(6)(욥기 5:17-27)

엘리바스는 그의 연설을 매듭짓는 가운데, 여기에서 만일 욥이 그의 환난을 인내로써 순응하기만 한다면 그의 환난의 결과에 대해 밝은 전망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그 자신도 어떻게 그것을 얻어야 하는지 모르면서) 욥에게 알려 주고 있다.

Ⅰ. 엘리바스는 그에게 적절한 경고와 권유의 말을 하고 있다(17절). "너는 권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 나오고 자녀들의 유익함을 위한 정책이라고 부르라. 그것은 전능자의 경책이라 부르라. 그 전능자와 다투는 것은 미친 짓이며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의무인 동시에 지혜로운 일이다. 그리고 그 전능자는(그 단어가 의미하는 것과 같이) 그를 의뢰하는 모든 자들에게 모든 것을 풍족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그것을 업신여기지 말라."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은 그 의미가 풍부한 단어이다.

1. "그것을 대적하지 말라. 은총으로 하여금 본성적인 적대감을 지배하게 하고,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에 네 자신을 복종시키라." 우리는 징계가 필요하며, 마땅히 그것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징벌을 느낄지라도 그것을 이상하게 또는 가혹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2. "그것을 나쁘게 생각지 말라. 현재의 상태가 기쁘지 않고 슬프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필요가 없거나 별 유익함이 없이 해로운 것이거나 적어도 유용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 멀리하지 말라." 우리는 하나님께 굽히기를 싫어해서는 안 되며, 그의 교훈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를 천하게 만든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그 반대로 하나님께서 이처럼 "그에게 권징하시며 시험하시는" 것이(7:17, 18) 정말 사람을 존대케 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3. "그것을 소홀히 여기고 무시하지 말라. 마치 그것이 단지 우연인 것처럼 그리고 인간의 산물인 것처럼 여기지 말고,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과 하늘로부터 온 사신으로 여겨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 구절은 표현된 것보다 더 많은 내용을 암시하고 있다. "여호와의 징계를 경외하라. 하나님의 훈계하시는 손에 대해 겸손한 두려움을 품고 사자가 으르렁거릴 때는 떨도록 하라(암 3:8). 징계에 복종하며, 그 부르심에 대해 그 목적에 응하도록 노력하라. 그러면 너는 그것에 대해 경외감을 품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어떠한 효과를 위해 우리에게 환난이 임하게 하셨을 때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서명함으로써, 그리고 그가 그것을 요구하셨을 때 그의 것을 돌려드림으로써 그의 증서를 존경해야 한다.

Ⅱ. 엘리바스는 이처럼 자기 자신을 욥의 상황에 적용시키고, (그 스스로가 그것을 표현했듯이) 하나님의 손에 있는 재앙을 받아들이며 그것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선물이라고 업신여기지 않음으로써 욥에게 힘을 주는 위로의 말을 전하고 있다.

1. 만일 그가 그의 환난을 이처럼 견디어 낸다면 다음과 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1) 그것의 성질의 특징이 달라졌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사람에게 비참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실재로 그의 축복이 될 것이다. 만일 그것을 잘 받아들여 올바로 고침을 받는다면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다." 선한 자는 환난 당하더라도 행복하다. 그가 무엇을 잃었든 지간에 그는 하나님에 대한 기쁨뿐만 아니라 하늘에서의 그의 영예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고통을 당하기 때문에 행복하다. 징계는 그가 아들 됨을 증거하는 것이며 그를 성별케 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의 타락을 제거하고, 그의 마음을 이 세상에서 떼어놓는다. 그리고 그를 하나님께로 좀 더 가까이 이끌고 그를 그의 성서로 하나님의 무릎으로 이끌어 그에게 역사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매우 훌륭하고 영원한 영광을 얻도록 해 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다"(약 1:12).

(2) 그것의 결과는 매우 좋을 것이다(18절).

[1] 하나님은 심한 상처로 몸을, 슬픈 생각으로 마음을 "아프게 하시다가" 필요한 경우에 수술칼로 낸 상처를 붕대로 싸매 주는 익숙하고 자상한 외과 의사처럼 동시에 그것을 "싸매신다." 하나님은 그의 섭리에 의한 경책으로 아프게 하셨을 때, 그의 영의 위로로써 그것을 싸매시는 데, 고통이 심할수록 흔히 그 위로도 많이 보내시기 때문에 그것을 보상하게 된다. 따라서 그 아픔을 참을성 있게 견딘 자에게 그것은 말할 수 없는 만족을 안겨다 준다.

[2] "그는 상하게 하시다가" 적당한 때에 "그 손으로 고치신다." 그가 그의 백성들을 돕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시는 한편, 합당한 때에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들이 피할 길을 마련해 주신다. 모든 것은 다시 잘 복귀된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환난당한 기한대로" 그들을 위로하신다. 하나님께서 흔히 쓰시는 방법은 먼저 상하게 하신 후 치료하시고, 먼저 깨닫게 하고 나서 위로하시며, 먼저 낮추신 후에 높이시는 것이다. 그리고 카라일(Mr. Caryl) 관찰대로 하나님은 결코 그가 치료하실 수 없을 만큼 매우 크거나 깊은 상처는 입히시지 않는다. Una eademque manus rulmus opemgue tulit-즉 상하게 하시는 손이 치료하신다. 하나님은 악한 자들을 탈취하여 가신다. 그리고 그들이 할 수 있으면 치료하도록 해보라(호 5:14)라고 하신다. 그러나 겸손하게 회개하는 자들은 "그가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다"(호 6:1)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경우이다.

2. 그러나 다음 구절에서 엘리바스는 욥에게 직접 말하면서, 만일 그가 하나님의 손 아래에서 그 자신을 낮추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크고도 친절한 일들을 많이 행하시리라는 귀한 약속들을 욥에게 주고 있다. 비록 그 당시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성경이 없었지만, 엘리바스는 욥에게 이러한 단언을 줄 만큼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뜻을 베푸시는 일반적인 사실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욥의 친구들이 말한 모든 것들이 전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지시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그들은 하나님과 욥에 대해 옳지 않은 것들을 말한 것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제시한 일반적인 이론은 족장시대의 경건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정경에 실린 글에서 13절을 인용했던 것과 같이, 그리고 또한 17절의 명령이 의심할 바 없이 우리에게 구속력을 갖는 것과 같이, 여기에 있는 이 약속들은 거룩한 언약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적용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성서에 나타난 인내와 위로로 인하여 소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약속에 열심히 관심을 기울이고, 그 세부적인 것들을 주목하여 그것들로부터 위안을 얻도록 하자.

(1) 환난과 고통이 아무리 빈번히 일어날지라도 도움과 구원이 은혜롭게 거듭 임하게 되리라는 사실이 여기에 약속되어 있다.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실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렇게 하시리라"(19절).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한 비가 온 후에 구름이 다시 낄 것이며, 고난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예상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여섯 가지 환난 후에 일곱 번째 환난이 올지도 모른다. 많은 것 후에 더 많은 것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 가운데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된 자들을 모두 건지실 것이다(딤후 3:11; 시 34:19). 사람들과 같이 이전에 구해 주었다고 해서 앞으로 더 이상 구해 주지 않는 것이 아니다. 더 열심히 구해 주신다(잠 17:17).

(2) 선한 사람들이 어떤 환난에 처하든지, 하나님은 "그 재앙이 그들에게 미치지 않게 하신다." 그것이 그들에게 정말 해를 입히지 않을 것이다. 그 해로움과 아픔이 제거될 것이다. 그것이 그들을 야유할는지 모르나 그들에게 화를 미칠 수는 없다(시 91:10). "악한 자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만지지도 못한다"(요일 5:18).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 주시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환난의 재앙으로부터 보호받는다.

(3) 비참한 심판이 퍼져나갈 때에도 그들은 특별히 보호받게 될 것이다(20절). 그들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일용한 양식이 없어 죽어가는가? 그때에도 그들은 양식을 얻을 것이다. "기근 때에도 그가 죽음에서 너를 구속하실 것이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든지 너는 살게 하실 것이다(시 33:19). 너는 심지어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리라(시 37:3, 19). 전쟁 때에 좌우로 수 천 명의 사람들이 쓰러질 것이나 그가 너를 칼 권세에서 구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그것이 네게 미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너를 상하게 하고 너를 죽이더라도 그것이 너를 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이 너를 죽인다해도, 육신 밖에는 죽일 수 없다. 그것도 그 능력이 위로부터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너를 해할 수 없다.

(4) 아무리 악의를 품은 말이 그들에게 퍼부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을 해할 만한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21절). "네가 전쟁의 칼로부터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받을 뿐만 아니라, 비록 치명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채찍처럼 아리고 고통스러운 혀의 채찍이 네게 부어질 때에도 너는 그 해로부터 가리워질 것이다." 가장 선하고 매우 악의 없는 사람들이 아무리 무죄하다 하더라도 비방과 비난과 그릇된 혐의에서 스스로 피할 수가 없다. 이것들로부터 사람은 그 자신을 숨길 수가 없지만 하나님은 그를 숨겨 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가장 악의에 가득 찬 비방도 그의 평안을 교란시키지 못할 정도로 그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할 것이며, 그의 평관을 더럽히지 못할 정도로 거의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진노를 견디어 낸 자들을 속박하실 수 있으시며 또 속박하신다. 왜냐하면 혀의 채찍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있는 선한 자들의 모든 위안이 전멸되지 않는 것은 악인의 양심을 하나님께서 지배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5) 그들은 최악의 사태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소망과 확신에서 생기는 마음의 평정과 거룩한 안심을 얻을 수 있다. 매우 긴박한 위험이 닥쳤을 때에도 그들은 그들 자신이 안전하리라는 것을 믿고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위험이 닥쳐 오는 것을 보고서도 그들은 "멸망을 두려워 아니할 것이며"(21), "들짐승"이 그들을 공격할 때나, 짐승처럼 잔인한 자들이 공격할 때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네가 멸망과 기근을 비웃을 것이다"(22절). 그것은 하나님의 채찍을 멸시하거나 그의 심관을 희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그의 능력과 선함 속에서 개가를 부르며, 그 속에서 이 세상과 그 모든 슬픔들을 이기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환난 가운데서 안심할 뿐만 아니라, 즐거워하고, 기뻐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축복받은 바울은 "사망이여,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하고 말했을 때,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려는" 이 현재의 모든 재앙을 모든 성도의 이름으로 도전했을 때, "이 모든 일에 우리가 넉넉히 이기리라"고 단정지으면서 멸망을 비웃었다(롬 8:35 이하; 참조, 사 37:22).

(6) 하나님과 화평할 때, 그들과 모든 피조물 사이에 우정의 언약이 이루어질 것이다(23절). "네가 너의 땅을 걸을 때 너는 넘어질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밭에 돌이 너와 언약을 맺어, 그것들이 결코 네 발에 부딪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너는 들짐승으로부터 위험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이와 더불어 화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리라"는 말씀(호 2:18)과 비교하여 보라. 이것은 사람이 그의 창조주와 대립되어 있는 한 열등한 피조물들도 그들과 투쟁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tranquillus Deus tanquilllat omnia-즉 화해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들을 화해시키신다. 우리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모든 피조물과 맺은 것으로서, 그것들이 우리를 해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를 위해 봉사하고 선을 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언약이다.

(7) 그들의 집과 가족들이 그들을 평안하게 할 것이다(24절). 그 집안에 있는 평안과 경건이 그렇게 만들 것이다.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평안하리라는 것을 알고 또 확신하게 될 것이다. 너는 그것의 현재와 미래의 형통함을 확신해도 좋다." (단어 그대로의 뜻으로 보면) "그 평안함이 네 장막이다." 즉 평안함은 하나님 안에 거하고 그 안에서 안식하는 자들이 거하는 집이다. "네가 네 우리를 살펴도(즉, 집안 일들을 살펴봐도) 그리고 그것들을 돌이켜 보아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다."

[1]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위해 비록 초라하고 이동하는 초막, 장막일지라도 견고하고 안온하게 거할 수 있는 거주지를 마련해 주실 것이다. "너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또는 "떠돌아 다니지" 않을 것이다. 즉 어떤 사람들의 풀이대로 "너는 도망자나 방랑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이것은 가인에게 내린 저주이다). "너는 그 땅에 거할 것이다. 그리고 방랑자처럼 정처없는 생활을 하지 않고 배불리 먹게 될 것이다."

[2] 그들의 가족들은 거룩한 섭리의 특별한 보호 아래 있을 것이며, 그들의 선함이 계속되는 한 형통할 것이다.

[3] 그들은 평안함을 확신할 것이며 그 평안함이 끊임없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확신할 것이다. "너는 지극히 만족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평안함이 너와 네 가족들에게 확실히 있으리라는 것을 알 것이다." 섭리는 변할는지 모르나 그 약속은 변할 수 없다.

[4] 그들은 그들의 가족들을 올바로 다스리고, 그들의 일을 사려깊게 명령하며 그들의 가사를 잘 돌볼 수 있는 지혜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여기에서는 "그들의 우리를 살피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장들은 가정에 무관심하지 말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그들의 종들이 행하는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5] 그들은 거룩한 일을 보살핀 후에 그들의 가족들에 관한 일들을 다스리고 그들을 다스리는 데서 죄를 짓지 않게 되는 은혜를 얻을 것이다. 그들은 분노나 교만, 탐심, 또는 속된 마음 등이 없이 그들의 종들을 불러서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은 현재의 상태를 불만스럽게 여기지 않고, 또한 미래에 대해서도 불안스럽게 여기지 않고 그들의 일을 살필 것이다. 가정의 경건은 그 가정에 평안과 형통을 부여해 준다. 가장 큰 축복이 우리의 일과 즐거움 속에서 우리가 죄를 짓지 않도록 보호해 준다. 우리가 집을 떠나 있을 때 우리의 장막이 평안하다는 것을 듣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의 거주지를 살펴보고는 우리가 우리 집안 일에서 실패하지 않고 성공한 것을 만족하게 여길 수 있고, 또 하나님을 거스르지 않고 선한 야심을 지킬 수 있었다는 사실은 즐거운 일이다.

(8) 그들의 형통함은 무수할 것이며 순조로울 것이다. 욥은 모든 자손들을 잃었다. "그러나" 엘리바스는 말하고 있다. "네가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그가 네 가문을 세워 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너의 씨는 많게 될 것이며 전처럼 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네 후손이 땅의 풀같이(23절), 번성하고 증대하리라는 것을 네가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충성된 자들의 후손을 위해 축복을 보관해 두셨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그들 자신의 빛 속에 서지 않으며, 그들의 어리석음에 의해 축복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 자녀들의 행복 특히 영적인 행복을 보는 것이 부모에게는 즐거움이 된다. 만일 그들이 진실로 선하다면 그들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인물이라 할지라도 진실로 위대한 자들이다.

(9) 그들의 죽음은 적절한 시기에 올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기쁘고 영예롭게 그들의 과정을 끝마칠 것이다(26절).

[1] 우리의 인생이 중간에서 잘리우지 않고 충분하게 사는 것은 은혜로운 일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오랜 생명을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배당된 세월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만족하게 살기만 한다면, 우리는 충분하게 살았다는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2] 기쁘게 죽이려 하고, 기꺼이 무덤 속으로 들어가고 억지로 끌려가지 않는 것은 은혜로운 일이다.

[3] 곡식이 무르익으면 베어져 창고에 쌓여지는 것과 같이 적당한 때에 죽는 것은 은혜로운 일이다. 그때에는 목숨이 끊어지지 않아 하루 더 고통을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때는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 그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수중에 있는 자들이 가장 알맞는 때에 죽도록 보살피시기 때문이다. 그들의 죽음이 우리에게는 불시에 찾아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부당한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3. 마지막 구절에서 엘리바스는 욥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고 있다.

(1) 그것은 충실한 말로서 그가 그 사실을 믿어도 좋다는 것이었다. "볼지어다 우리의 연구한 바가 이와 같다.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로부터 실상 이러한 사실들을 들었지만 그것들을 신뢰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것들을 주의 깊게 살피고, 영적인 것들을 서로 비교하며, 부지런히 연구하였다. 그리고서 우리 자신의 관찰과 경험에 의해 그것들을 확실히 믿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그렇다는 사실에 모두 한마음으로 동의한다." 진리는 땅을 파고 물 속을 헤쳐서라도 찾아낼 만한 가치가 있는 보물이다. 우리가 그것을 찾기 위해 수고했을 때, 그것을 귀하게 여길 줄 알게 될 것이며,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2) 그것은 모두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그가 큰 유익을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너는 듣고 네게 유익될 줄 알지니라." 사실을 듣고 아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개선해 나가야하며, 그것에 의해 좀 더 슬기로와지고 선해져야 한다. 또한 그 감명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명하는 권능에 복종해야 한다. 그것을 네 자신에게 그리고 네 자신의 경우에 적용시킴으로써 "네 스스로 그것을 알지니라"(라는 말이다). "이것이 사실이다"라는 것 뿐만 아니라. "이것이 나에 관해서도 사실이다"라고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우리 스스로 듣고 안 것을 우리 스스로가 소화한 고기로부터 영양 공급을 받는 것처럼, 우리가 듣고 우리에게 유익된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정말로 좋은 설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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