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욥기 0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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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엘리바스의 연설(1)(욥기 4:1-6)

Ⅰ. 엘리바스는 그의 말 때문에 이제 욥에게 주게 될 고통을 먼저 사과하였다(2절). "우리가 너에게 비난이나 충고의 말을 던지면, 네가 염증을 내어 그것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우리는 네가 그러리라는 것을 염려하고 있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다.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1. 엘리바스는 그 자신과 그의 시도에 대해 매우 겸손하게 말했다. 그는 그 문제를 혼자서 처리하지 않고 매우 겸손하게 그의 친구들을 그의 이야기에 끌어들였다. "우리가 네게 말하리라." 하나님의 뜻을 변호하는 자들은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연약함으로 인해 난관에 부딪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는 많은 것을 약속하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그는 말을 해보고자 허락을 구하고 있으며, 욥의 경우에 알맞는 어떤 것만을 제안할 수 있으면 해보려고 하고 있다.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는 그것을 더 이상 아는 척 하지 말고 단지 우리가 말하거나 행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합당하다. 훌륭한 많은 이야기들이 "수필"이라는 겸손한 이름 아래 쓰여지고 있다.

2. 엘리바스는 욥에 대해 그리고 그의 현재 고통스러운 상황에 대해 매우 부드럽게 이야기하였다. "만일 우리가 너에게 우리의 마음을 말한다면 네가 염증이 나겠느냐? 네가 그것을 나쁘게 생각하겠느냐? 네가 그것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이겠느냐? 혹은 그것을 우리의 잘못으로 책망하겠느냐? 우리가 네게 솔직하고 진실되게 대한다면 너는 우리를 불친절하고 가혹한 자로 여기겠느냐? 우리는 그렇지 않기를 원하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에 만일 선한 의도가 나쁘게 받아들여진다면 서운하게 여길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에게, 특히 이미 근심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리하여 다윗의 적들처럼(시 69:26) 환난 당하고 있는 자들에게 환난을 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상심케 할 가능성이 있는 말은 비록 그것이 매우 필요한 것일지라도 우리 스스로가 말하기를 주저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인생들에게 괴로움을 주시는 것이 정당한 것일 때에도 그렇게 하시는 것을 기쁘게 여기시지 않으신다(애 3:33).

3. 엘리바스는 이제 이야기 하려고 하는 말이 진실되고 적합한 것임을 매우 자신있게 말했다.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그가 이 이야기를 할 필요성을 느끼도록 한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영예에 대한 경건한 성의와 욥의 영혼의 행복을 위하는 마음이었다. "네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네가 비난하는 소리를 우리가 듣고, 네가 위험스럽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보는 데도,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영예를 위하여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친구가 비록 환난 중에 있다고 하여도, 그 친구가 잘못 말을 했거나, 잘못된 행동을 하였다는 것을 보고도, 단지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봐 두려워서 아무 책망의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동정심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좋게 받아들이든, 나쁘게 받아들이든, 우리는 지혜와 온유함을 가지고 우리의 의무를 행해야 하며, 선한 양심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

Ⅱ. 엘리바스는 욥에 대해 두 가지로 그를 책망하였다.

1. 이 환난 가운데서 욥이 취한 그의 태도에 대해 그를 책망하였다. 그는 욥의 연약함과 소심한 태도에 대해 책망하고 있는데, 그것은 확실한 근거에서 나온 조목들이었다(3-5절).

(1) 엘리바스는 욥이 이전에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봉사하였던 것에 주목하였다. 그는 욥이 그의 자식들이나 종들뿐만 아니라, 그의 이웃과 친구들과 같은 많은 사람들 다시 말해서 그의 손이 닿는 범위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교훈한 사실을 시인하였다. 그는 가르치는 직책을 맡은 사람들을 격려하고 장려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이 교육을 받도록 비용을 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친히 많은 사람들을 교훈했다. 비록 훌륭한 사람이긴 했지만 그는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 그를 천하게 만든다고 생각지 않았다(솔로몬 왕도 전도자였다). 그리고 비록 바쁜 사람이었지만 그는 그의 이웃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의 영혼에 대해 말하고, 그들에게 훌륭한 조언을 들려 줄 수 있는 시간을 애써 마련했다.

욥의 이 행실을 우리의 높은 사람들도 본받아야 한다. 그가 막 죄 가운데 빠지려하거나, 고통 속으로 가라앉게 된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그는 그의 말로 그들을 붙들어 주었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유혹을 물리칠 수 있도록 힘을 더하여 주고, 그들의 짐을 덜어 주며, 괴로움을 당하는 양심을 위로하는데 놀라운 재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유식한 말을 사용했으며 지친 자들에게 들려 줄 적당한 말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선한 사업에 전신을 매우 몰두시켰다. 적합한 조언과 위로의 말을 가지고 그는 "손이 늘어진 자면 강하게 하여" 일과 봉사와 영적인 행복을 얻게 하였고, 무릎이 약한 자면 강하게 하여 그 짐을 지고 그의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하여 주었다. 우리들이 적극적으로 서둘러 "피곤한 우리의 손을 일으켜 세우는 것만이 우리의 의무가 아니다"(히 12:12).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고 말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약한 손도 역시 강하게 해야 하며, 우리가 그들의 연약한 무릎을 굳게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해야 한다(사 35:3, 4). 여기에 나오는 구절은 그 부분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영적인 재물이 풍부한 자들은 영적인 자비를 풍부하게 베풀어야 한다. 훌륭하고 지혜로운 한 마디의 선한 말은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바스는 여기에서 왜 이러한 말을 언급하고 있을까?



[1] 그것은 욥이 행한 선행에 대해 이처럼 그를 칭찬함으로써 그가 의도한 책망이 욥에게 더 잘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정당한 칭찬은 정당한 책망에 대한 훌륭한 서론이 되며, 그것은 편견을 제거하는 일을 도울 것이고, 또한 그 책망이 그릇된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줄 것이다. 마음은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기에 앞서 먼저 그들을 칭찬했다(고전 11:2).

[2] 그는 욥이 위로받기를 기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욥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위로했는가를 회고하였다. 그런데 만일 위로를 주기 위해 단죄가 필요한 것이라면 그들이 열심히 다른 사람들을 위로했다면 먼저 그들을 용서해 줄 필요가 있다. "책망은 보혜사가 하실 것이다"(요 16:8).

[3] 그는 아마도 욥의 고통이 극심하기 때문에 그가 이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던 위로를 그 자신에게 줄 수 없다는 것을 통탄하면서, 이를 불쌍하게 여기면서 이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훌륭한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그것을 주는 편이 더 쉬우며, 온유함과 인내를 실행하기 보다 그것들을 가르치는 것이 더 쉽다. Facile omnes, cum valemus, rectum consilium aegrotis damus Terent-즉 "건강할 때 병든 자들에게 훌륭한 충고를 주기란 쉽다."-테렌트.

[4]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그의 지식을 가지고 욥의 현재의 불만을 공격하기 위해 그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욥이 다른 사람에게 선한 일을 베푼 것에 대해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친 네가 어찌하여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지금 네 자신이 먹기를 싫어하는 그 약을 다른 사람들에게 처방해 줌으로 모순을 범하고 또한 네 자신이 알고 있는 원칙을 거스려 행하는 이것은 너의 사곡함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 기절하지 않도록 알려 주는 네가 기절하느냐?(롬 2:21). 의사여, 네 자신부터 고칠지어다" 다른 사람들을 꾸짖었던 자들이 만일 남의 책망을 받을 만한 일을 했다면 그건 책망을 그들이 듣기로 각오하고 있어야 한다.

(2) 그는 욥이 현재 풀이 죽어 있는 것을 책망하였다(5절). "이제 이 일이 네게 임하며, 이제 네가 고통당할 차례가 오고, 돌아가던 쓴 잔이 네 손에 들려지게 되며, 이제 이 일이 네게 당하매 네가 답답하여 하고 네가 놀라는구나."

[1] 엘리바스는 욥의 고통을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다. "이 일이 네게 당하였구나." 사탄 자신도 바로 이 말을 했었다(1:11; 2:5). 만일 엘리바스가 욥의 고통을 반만이라도 알았다면 그는 아마도 "그 일이 나를 쳐서 상하게 하는구나"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욥의 환난에 대해 말하는 그는 그것을 단지 하나의 사소한 일로만 여겼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 일이 네게 당하매 네가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는구나. Nolime tangere-즉 나를 건드리지 말라."

[2] 그는 욥의 분노를 지나치게 과장해 놓고 그것을 공격하였다. "네가 답답해 하거나 정신이 나갔구나. 네가 미친 사람처럼 지껄여 대고서는 네가 한 말을 모르고 있구나." 깊은 고통 속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얼마만큼 여유를 주어야 하며, 그들이 말한 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여주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한 마디 한 마디를 나쁘게만 해석한다면 우리는 남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원하는 것처럼 우리가 남에게 해 줄 수가 없다.

2. 엘리바스는 이 환난이 있기 이전부터 있었던 욥의 일반적인 성품에 대해서 그를 책망했다. 그는 욥이 사악하고 그릇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책망했는데 이 책망은 전혀 근거가 없고 부당한 것이었다. 그는 욥이 이전에 한 신앙 고백이 지금은 마치 모두 소용이 없게 되었고 거짓임이 드러나기라도 한 것처럼 욥을 매우 무정하게 조롱하였으며 또 책망하였다(6절). "네 의뢰가 경외함에 있지 아니하냐, 네 소망이 네 행위를 완전히 함에 있지 아니하냐? 그것이 이제는 모두 허위임이 드러나지 않았느냐? 만일 네가 진심으로 그것을 했다면 하나님은 이처럼 너를 괴롭히지 않으셨을 것이며, 너는 이 환난 속에서 이렇게 처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이것이 바로 욥의 사곡함을 증명하고, 하나님이 욥에 대해 말씀하신 바를 반증하려는 사탄이 노리던 것이었다. 그 자신이 이것을 하나님께 행할 수 없었고 하나님이 계속 "욥은 순전하고 정직한 자"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탄은 그의 친구들로 하여금 욥을 충동하여 욥 자신이 자기가 사곡한 자임을 고백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만일 사탄이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면 그는 개가를 올렸을 것이다. Habes comfitentem reum-즉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내가 너를 정죄하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으로 욥은 그의 결백함을 굳게 지킬 수 있었고, 그 자신을 거슬러 그릇된 증거를 하지 않을 수 있었다. 형제들에게 경솔하고 잔인한 책망을 퍼붓고, 그들을 사곡한 자라고 정죄하는 자들은 사탄의 일을 하며, 그들이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사탄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

나는 공용되는 영어 성경의 여러 판에서 이 구절이 왜 서로 다르게 기록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즉 히브리어 원본과 모든 고대 번역 판에는 "네 행위를 완전히 함" 앞에 "네 소망"이라는 말을 집어 넣고 있다. 제네바판과 대부분의 최근 번역판에도 역시 이렇게 적혀 있다. 그러나 나는 1612년에 제일 처음 나온 번역 판에 "이것이 네 경외, 네 의회, 네 행위를 완전히 함. 그리고 네 소망이 아니냐?"라고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총회 주석"과 풀 씨(Mr. Pool)의 주석에도 모두 이렇게 적혀 있다. 1660년에 나온 번역판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이것이 네가 의뢰하는 네 경외가 아니며, 그리고 네가 소망하는 네 행위의 완전함이 아니냐? 네가 몰두하고 이야기하던 모든 믿음은 단지 네가 그것으로 인해 더 부자가 되고자 하는 소망과 그 의뢰함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이제 드러나지 않았느냐? 그것은 모두 재물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느냐?" 사탄도 바로 이점을 암시했던 것이다. 브로톤 씨(Mr. Broughton)는 이렇게 풀이하였다. "이것이 네가 소망하는 네 믿음이 아니며, 네가 의뢰하는 네 방법이 아니냐?" 또 이러한 견해도 있다. "그것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냐? 만일 그것이 진실된 것이었다면 그것이 너를 이처럼 실망하도록 만들었겠느냐?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 네 은혜가 미약함을 보임이니라(잠 24:10)라는 말씀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전혀 은혜와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말은 아니다." 사람의 성품을 한 가지 행위만으로 추론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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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의 연설(2)(욥기 4:7-11)

엘리바스는 여기에서 욥을 사곡한 자라고 증명하기 위해 또 다른 논쟁을 전개시키고 있다. 그리고 욥이 그의 환난을 참지 못하는 것 뿐만 아니라 환난 그 자체가 매우 크고 놀라와 그가 결코 그 속에서 구원될 전망이 없는 것까지도 욥에게 불리한 증거로 삼으려 하고 있다. 그의 논쟁을 강화하기 위해 엘리바스는 여기에서 두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매우 그럴 듯하게 보인다.

Ⅰ. 선한 자들은 결코 이렇게 파멸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엘리바스는 욥 자신의 관찰력에 호소하고 있다(7절). "생각하여 보라. 네가 보고 듣고 읽은 것을 모두 회상해 보라. 그리고서 무죄하고 의로운 자가 너처럼 멸망하고 너처럼 죽임을 당한 예가 있으면 하나만이라도 내게 제시해 보라." 만일 우리가 그것을 최종적이며 영원한 멸망이라고 해석한다면, 엘리바스가 제시한 원리는 사실이다. 무죄하고 의로운 자는 그 누구도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 "멸망의 아들"은 오직 "불법의 사람" 뿐이다(살후 2:3). 그렇다면 그것은 욥에게 잘못 적용된 것이다. 그는 이처럼 멸망하지도, 죽임을 당하지도 않았다. 사람은 그가 지옥에 들어가기 전에는 결코 파멸한 자가 아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것을 일시적인 재앙으로 해석한다면 그의 원리는 사실이 아니다. "의인이 망할지라도"(사 57:1), "의인과 악인의 결국이 일반이니"(전 9:2) 그들은 모두 살다가 죽는다. 분명하고도 큰 차이는 죽음 후에 있다. 욥의 시대 전에도(이처럼 오랜 옛날에도) 이 원리를 논박하기에 충분한 예들이 있었다. 의로운 아벨은 "무죄한 자로서 망하지" 아니하였으며,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였는가? 의로운 롯의 집이 불타버려 그는 음침한 동굴로 피신할 수밖에 없지 않았는가? 의로운 야곱도 "유리하는 아람 사람"이 아니었는가?(26:5) 기록되지 않았지만 이러한 예들이 또 많이 있었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Ⅱ. 악인은 흔히 이처럼 망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엘리바스는 자신의 관찰을 단언하고 있다. "내가 여러 차례 보건대 악을 밭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8절), 다 하나님의 입기운에 멸망한다(9절). 우리는 매일 이러한 일들을 본다. 그러므로 네가 이처럼 멸망하고 사라지는 것을 볼 때, 네가 어떠한 신앙 고백을 하든지 간에 우리는 네가 악을 밭갈고 독을 뿌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본 바와 같이 네 안에서도 그것을 본다.

1. 엘리바스는 일반적인 죄인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들은 악을 밭가는 자들로서 교활하고 부지런한 죄인들이며 죄를 위해 수고한다. 그리고 그들은 죄로써 이득을 취할 것을 기대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독을 뿌렸기 때문이다. 밭가는 자들은 소망 속에서 밭을 간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한가? "그들은 그대로 거둔다." 그들은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그리고 파멸을 걷게 된다(갈 6:7, 8). 또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 농작물이 없어질 것이다"(사 17:11). 그는 그대로 거둘 것이다. 즉, 그 씨의 산물을 거둘 것이다. 죄인은 "장래의 몸을 뿌리지 않으나" 하나님께서 "그 마지막"에 거기에 몸 곧 사망의 몸을 주실 것이다(롬 6:21). 어떤 사람들은 불법과 악에 의해 다른 사람들에게 행한 잘못과 해로움을 깨닫는다. 그것을 밭갈고 뿌린 자들은 그대로 거둘 것이다. 즉 그들 자신의 대가를 지불받을 것이다. 환난 받게 하는 자들은 환난을 당할 것이다(살후 1:6; 수 7:25). "학대하는 자들은 학대를 당할 것이며"(사 33:1),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다(계 13:10).

엘리바스는 그들의 멸망을 더 묘사하고 있다(9절). "다 하나님의 입기운에 멸망하리라." 그들이 그처럼 많은 노력을 기울인 계획이 좌절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 밭가는 자들의 줄을 끊으신다(시 129:3, 4), 그들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데 그것은 그들의 불법에 대한 당연한 심판이다. 그들은 "멸망한다." 즉 그들은 전멸당한다. 그들은 "사라진다." 즉 그들은 서서히 멸망당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입기운과 콧김에 의해 일어난다.



(1)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일어난다. 그의 진노는 죄인들을 멸망시킨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노의 그릇"이라 일컬어지고 있으며, 그의 호흡이 "도벳을 사른다"고 기록되어 있다(사 30:33).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리이까?"(시 90:11)

(2)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일어난다. 그가 말씀하시면 쉽고도 효과적으로 행해진다. 하나님의 영이 말씀으로 죄인들을 불사른다. 즉 그것으로써 하나님이 그들을 죽인다(호 6:5). 하나님께 있어서 말씀과 행위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죄인은 "그리스도의 입의 기운"으로 죽임을 당한다고 적혀 있다(살후 2:8). 이사야 11장 4절 요한계시록 19장 21절과 비교해 보라. 죄인이 하나님의 입기운과 "그 콧김"에 의해 멸망을 당한다는 이 말 속에서 엘리바스는 바람이 욥의 자손들 위로 그 집을 무너뜨린 사실을 언급하고 있으며 마치 그 자손들이 "이 같이 해를 받음으로써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것" 같이 보고(눅 13:2) 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2. 엘리바스는 사자의 비유를 들어 포학자와 잔인한 압제자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10, 11절).

(1) 그가 그들의 잔인함과 포학함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히브리어에는 사자에 대해 다섯 가지 이름이 붙어 있는데, 그것이 여기에 모두 사용되어, 교만한 압제자들의 갈갈이 찢는 무서운 능력과 맹렬함과 잔인함을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은 으르렁거리고 물어 뜯으며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움켜쥔다. 그리고 그들의 새끼 사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키운다(겔 10:3). 마귀는 으르렁 거리는 사자이다. 그리고 그들은 마귀의 성품을 지니고 있으며, 그의 탐욕을 행한다. 그들은 사자처럼 강하고 민첩하다(시 10:9; 17:12). 그리고 그들에게 유리한 한 그들은 필사의 노력을 다한다.

(2) 그가 그들의 멸망 곧 그들의 권력과 그들 스스로가 모두 멸망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저지당하여 더 많은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며, 그들이 행한 손상에 대해 보복당할 것이다.

[1] 효과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저지하므로 그들은 더 이상 위협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우는 소리는 중단될 것이다.

[2] 그들은 물어 뜯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무기를 빼앗아 남을 해하는 능력을 없애버리실 것이다. "젊은 사자의 이가 부러지느니라"(참조 시 3:7). 이처럼 진노를 입을 자들이 저지당할 것이다.

[3] 그들은 이웃 사람들을 약탈함으로써 그들 자신을 부요케 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늙은 사자는 굶주리고 움킨 것이 없어 죽는다." 약탈물과 노략물로 포식한 자들은 마지막에 굶어 죽게 될 정도로 궁핍하게 될지도 모른다.

[4] 그들은 그들 자신에게 약속한 것처럼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져" 늙은 사자들이 그들에게 물어다 주던 먹이를 그들 자신이 찾을 것이다(나 2:12). "그 사자가 그 새끼를 위하여 식물을 충분히 찢었으나" 이제 그들은 스스로가 그것을 해야 한다. 아마도 여기에서 엘리바스는 마치 욥이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로서 노략질하여 재물을 탈취하고 그의 이웃을 학대하는데 그의 권력을 썼으나 이제 그의 권력과 재물은 사라졌고, 그의 가족은 흩어져 사는 것처럼 그를 책망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엘리바스가 정말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칭찬한 자가 이처럼 능욕당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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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의 연설(3)(욥기 4:12-21)

엘리바스는 욥에게 그가 만족하지 못하고 참지 못하는 것이 곧 죄가 되고 어리석은 노릇임을 납득시키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여기에서는 그가 늘 자주 보는 환상에 대해 말함으로써 욥으로 하여금 그가 죄가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려고 하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오는 것에 대해 모든 사람들은 특별한 경의를 표한다. 욥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엘리바스가 이러한 환상을 본 것은 그가 욥에게 와서 그의 입으로 욥과 더불어 이에 대해 논쟁을 벌린 이후 즉 "최근"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만일 그가 이 환상의 취지를 잘 지켰다면 좋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욥을 사곡한 자로서 정죄하려 하지 않고 욥이 불평한 것에 대해 책망하려 하였다면 그의 환상은 그 근거를 확고히 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가 그 환상을 "이전"에 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초기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법으로 흔히 사람들에게 자기의 마음을 나타내셨기 때문이다(33:15). 아마도 그가 마음의 평정을 잃고 불만 가운데 있었을 때에 하나님은 그를 진정시키고 평정을 얻도록 하기 위해 엘리바스에게 이 사자를 보내어 소식을 전해 주셨을 것이다. 우리가 위로 받은 것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고후 1:4), 우리는 우리를 강력하게 납득시켰던 것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키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인용할 수 있도록 기록된 말씀이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로 계시의 특별한 방법으로써 그들에게 일반적인 진리까지 통지하셨다. 성경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그 속에서(하나님께 감사할지어다) 환상이나 음성보다도 더욱 의지할 수 있는 확실한 말씀을 얻을 수 있다(벧후 1:19).

Ⅰ. 이 소식이 엘리바스에게 전달된 방법과 그것이 전해진 상황에 대해 알아보자.

1. 그것은 "그에게 가만히" 또는 몰래 "임하였다." 은혜로운 영혼이 하나님과 더불어 나누는 달콤한 교제들 가운데 어떠한 것은 은밀한 것이며,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 이외에는 그 누구도 그것을 보지 못한다. 하나님은 공적인 사역자들에 의한 것처럼 매우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은밀한 속삭임을 통해 세상에 들키지 않고 그의 백성들에게 확신과 조언과 위로를 전하는 방법을 가지고 계신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그들에게 있다"(시 25:14). 악의 영이 흔히 마음에 뿌려진 좋은 말씀을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로(마 13:19), 선한 영이 때로 좋은 말씀을 몰래 또는 우리가 알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에 넣어 주신다.

2. "가는 소리가 그의 귀에 들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자들의 귀에 들려진 하늘의 지식도 실은 극히 적은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에 비해 그리고 우리가 하늘에 갔을 때 우리가 알게 될 것에 비해 극히 적은 분량에 불과하다. "하나님에 대하여 들은 것은 심히 세미한 소리 뿐이니라"(26:14). "우리는 부분적으로만 안다"(고전 13:12). 그의 겸손함과 정중함을 보라. 그는 그것을 전부 이해하는 체 하지 않았으며, 그 중에 어떤 것만 깨달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3. 그것은 "밤의 이상" 속에서 그에게 임하였다(13절). 그때 그는 세상과 그 소란함에서 떠났고 그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은 조용하고 평정한 상태에 있었다. 우리가 이 세상이나 그 속에 있는 것들로부터 멀리 멀어질수록, 우리는 하나님과 더욱 쉽게 교제할 수 있다. 우리가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 때(시 4:4), 그때가 바로 성령이 우리와 함께 교제하기에 알맞는 시간이다. 다른 사람들이 잠들었을 때 엘리바스는 하늘로부터의 이러한 방문을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다윗처럼 그는 "잠못 이루는 밤에 하나님께 대해 묵상하였을" 것이며, 이런 선한 생각을 하는 가운데 이러한 일이 그에게 임하였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밤에 양심의 가책으로 놀란다(33:14, 15).

4. 그것은 두려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렀다"(14절). 그가 어떤 것을 보거나 듣기 전에 떨림이 그에게 이르러 그의 골절이 흔들리고 아마도 그 밑에 있는 침상도 흔들렸던 것 같다. 하나님과 그의 위엄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과 경외감이 그의 영 위에 임하였으므로 그는 여기에서 거룩한 방문을 위한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화롭게 만들고자 하는 자를 먼저 겸손케 하시고 낮추신다. 그리고서 그는 우리 모두로 하여금 거룩한 두려움으로써 그를 섬기고 떨면서 기뻐하도록 만드실 것이다.

Ⅱ. 그 소식을 전달한 사자에 대해서 알아보자. 그것은 "영"이었다. 즉 선한 천사들 가운데 하나로서 하나님의 섭리를 위해 일하는 일꾼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의 말씀의 일꾼이기도 한 천사였다. 엘리바스가 본 환상에 대해서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읽을 수 있다(15, 16절).

1. 그것은 실제적인 것이었고 꿈이나 환상이 아니었다. "한 형상"이 그의 눈 앞에 있었다. 그는 그것을 분명히 보았다. 처음에 그것은 그의 눈 앞을 좌우로 왔다 갔다 했으며 또 아래 위로 오르락 내리락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의 눈 앞에 "우뚝 서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만일 어떤 못된 사람이 장난을 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 환상을 보게 했고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만큼 어리석었다면 거기에는 선하고 악한 영의 환영이 나타나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2. 그것은 분명하지 않았고, 약간 혼돈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그의 마음 속에 그것에 대한 정확한 느낌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그 형상을 분별치 못했고," 더욱이 그것을 묘사할 수도 없었다. 그의 양심은 놀라서 눈을 뜨게 되었고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호기심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우리는 영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영들에 대해 많이 알 만한 능력이 없으며 또 우리가 그렇게 되는 것도 합당치 않다. 모든 것은 때가 이르러서야 밝혀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곧 영들의 세계로 가야만 하며 그때 우리는 그들에 대해 좀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3. 그것은 그를 매우 놀라게 했으므로 그의 털이 쭈뼜하였다. 사람이 죄를 진 이래로 줄곧 하늘로부터의 소식을 받는다는 것은 그를 두렵게 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곳으로부터 좋은 소식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영은 그것이 선한 영들의 것일지라도 선한 자들에게까지 언제나 깊은 공포감을 안겨 주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소식을 영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시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사람의 두려움은 우리를 무섭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참조, 단 7:28; 10:8, 9).

Ⅲ. 전달된 소식에 대해 알아보자. 그것이 전달되기 전에 그곳에는 "조용한," 깊은 침묵이 있었다(16절).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거나 그에게 말씀을 드리려고 할 때, 우리는 먼저 엄숙한 휴식 기간을 가짐으로 하나님께서 내려오실 산 근처에 경계를 세운 후 우리 자신을 그 일에 전념하도록 하는 것이 좋으며, 급하게 어떤 일을 발언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 소식을 전달하는 음성은 여전히 가늘었고 그것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했다(17절).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불멸의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어찌 그렇게 생각하거나 가장할 수 있겠느냐? 그러한 생각은 제하여 버리라!"

1.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엘리바스가 욥의 큰 환난은 그가 사악한 자임을 분명히 증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죽을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이 어떤 큰 죄를 범하지도 않은 종이나 신하를 이처럼 징계하고 벌을 준다면, 그는 의롭지 못하고 매우 불결한 자로 간주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너를 이처럼 벌할 만한 어떤 큰 죄가 없다면,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의로울 것이나 그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2. 나는 오히려 그것은 단지 욥이 투덜거리고 만족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책망이었다고 보고 싶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더 의롭고 성결한 척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하나님보다 공평의 원리와 율법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엄밀히 관찰하는 체 할 수 있겠는가?" 죽어야 하는 비참한 인간 에노스(창 4:26)가 어떻게 오만할 수 있으며, 가장 강하고 뛰어난 자로서 매우 훌륭한 지위를 누렸던 게벨(왕상 4:19)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하나님과 겨루거나 그와 경쟁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 스스로를 하나님보다 더 의롭고 성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불경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거룩한 율법의 인도하심이나 거룩한 은총의 분배나 거룩한 섭리의 방법과 겨루는 잘못을 범하는 자들은 그들 스스로를 하나님보다 더 의롭고 성결하도록 생각한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을 비방하는" 자들은 "그 보응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얼마나 인간은 죄에 물들어 있으며(만일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죽어야 하는 운명을 얻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나 근시안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는가! 인간이 그의 창조주이시며, 그의 주님이시며 주인이신 하나님보다 더 의롭고 성결한 채 할 수 있겠는가? 진흙이 옹기장이와 다투겠는가? 인간 속에 있는 의로움과 성결함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이 더 의롭고 성결하다(참조, 시 94:9, 10).

Ⅳ. 이에 대해 엘리바스의 해설에 대해 알아보자. 그것은 일종의 해설과도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다음의 구절들을 모두 환상 속에서 언급된 말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마찬가지다.

1. 그는 천사들이 하나님에 비해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는 보여주고 있다(18절). 천사들은 하나님의 종들이다. 그들은 대기하고 있는 종이며 일하는 종이다. 그들은 그의 사역자들이다(시 104:4). 그들은 눈부시며 축복받은 존재들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필요치 않으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 의해 유익함을 얻지도 않으신다. 하나님 자신은 그들보다 무한히 높으시다.

(1)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의지하지도 않으며 또한 신임하지도 않으신다. 그가 그들을 사용하시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만일 그가 원하신다면 그는 그들이 없이도 일을 잘 행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그들을 친한 친구나 그의 각료로 삼지 않으신다(마 24:36). 그는 그의 일을 그들에게 모두 맡기시지 않고 "그의 눈으로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신다"(역하 16:9). 39장 11절에 있는 구절을 보라.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천사들의 성품마저도 매우 변덕스럽기 때문에 하나님은 천사들 자신의 내실성을 믿으려 하지 않으신다. 만일 그가 그들을 신뢰하셨다면 그들은 일부가 한 것처럼 그들의 첫 번째 소산을 남겨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확증할 영적인 은총을 그들에게 내릴 필요가 있음을 보셨다."

(2) 그는 하나님 자신과 비교하여 그들의 어리석음과 허탄함, 연약함, 우유부단함, 불완전함을 책망하고 있다. 만일 세상을 천사들이 다스리게 하고, 모든 일들을 주관할 독점권이 그들에게 맡겨진다면, 그들은 허탄한 길로 행할 것이고, 모든 것은 지금처럼 이렇게 가장 훌륭한 상태에 놓여있지 못할 것이다. 천사들은 총명하나 유한한 존재이다. 비록 불의함으로 책망 당하진 않더라도 그들은 오만함으로 인해 책망 당한다. 이 마지막 구절에 대해서 평론가들의 해석이 다양하다. 나는 이 구절을 거듭 부정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러한 견해는 매우 공통적인 것이다. "그는 성도들을 의뢰하지 않으실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천사들을 기뻐하시거나 마치 그들의 찬미나 봉사가 그에게 도움을 준 것처럼 그들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도 않으실 것이다." 그들이 없어도 무한히 행복하신 것이 그의 영광이시기 때문이다.

2. 여기에서 그는 얼마나 인간이 보잘 것 없는가, 신뢰받고 영광 받기에는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를 추론하고 있다. 하나님과 천사들 간에도 이러한 거리가 있거늘 하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랴! 인간이 얼마나 비천하게 제시되어 있는가, 여기에서 보라.

(1) 인간의 생명을 살펴볼 때 그는 매우 비천하다(19절). 인간의 가장 훌륭한 상태를 들어보자. 비록 인간이 짐승들에 비해 존귀하다 할지라도 그 거룩한 천사들과 비교해 본다면 매우 천한 피조물이다. 천사들은 영들이며 인간의 영혼도 영임에는 틀림 없다.

[1] 그러나 천사들은 정결한 영이고 인간의 영혼은 "흙집에서 산다." 인간의 몸이란 그런 것이다. 천사들은 자유롭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갇혀 있으며, 몸이 영혼에 붙어 있다. 즉 몸이 영혼의 감옥이다. 그것은 진흙으로 된 천하고 썩게 되는 집이다. 흙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토기장이의 뜻에 따라 그것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처럼 곧 허물어질 그릇이다. 그것은 삼나무나 상아로 된 집이 아니라, 흙으로 되어 있기에 계속 수리하지 않으면 곧 허물어지고 말 오두막 집이다.

[2] 천사들은 견고하다. 그러나 인간이 거하는 집은 "티끌로 터를 삼고" 있다. 흙으로 만든 집이 만일 반석 위에 세워졌다면 오래 지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티끌로 그 터를 삼았다면 그 터의 불안전함이 그 집을 쉽사리 기울어지게 할 것이며, 마침내 그것은 그 무게 때문에 쓰러질 것이다.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진 것과 같이 그는 땅에서 나온 소산물에 의해 생명을 유지하며 도움을 얻는다. 그것들을 없애버리면 인간의 몸은 흙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단지 티끌 위에 서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높은 티끌더미 위에 서 있으나, 그들을 받쳐 주는 것 역시 여전히 흙이며, 그것은 곧 우리 모두를 삼켜버릴 것이다.

[3] 천사들은 불멸의 존재이나, 인간은 곧 으스러진다. "흙으로 된 그 장막은 부수어진다." 그는 손가락 사이에서 "죽어 없어지며," 손가락 사이에서 죽는 "하루살이처럼" 쉽게 그리고 빨리 "눌려 죽는다." 보잘 것 없는 것이 그의 생명을 파멸시킬 것이다. 그는 여기 기록된 것처럼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것이다. 만일 좀벌레처럼 파먹어 들어가는 어떤 오래된 병이 그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는 급작스런 병을 막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도 더 이상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참조, 호 5:12-14). 이러한 피조물이 신뢰를 받을 수 있겠는가? 또는 천사들에게도 신임을 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인간으로부터 어떤 봉사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2) 인간의 죽음을 살펴 본다면 인간은 더욱 보잘 것 없으며 신뢰하기에 합당치 않은 존재이다. 인간은 죽어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20, 21절).

[1] 죽음 속에서 그들은 "멸한바 되며" 이 세상에서 "영원히 망한다." 이것이 그들의 생명의 종국이며, 여기에서 그들이 누린 모든 즐거움과 고통도 끝난다. 그리고 그들이 거하던 곳도 더 이상 그들을 알지 못하게 된다.

[2] 그들은 날마다 죽어가며 끊임없이 소모된다. "조석 사이에 멸한 바 된다." 죽음은 한줌한줌 우리의 무덤을 파내는 두더지처럼 우리 안에서 항상 일하고 있으며, 우리는 하루 종일 죽임을 당하는 위협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

[3] 그들의 생명은 짧으며, 잠시 후에 그들은 죽임을 당한다. 아마도 생명은 아침부터 저녁까지만 지속될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하루에 불과하다라고(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 그들의 출생과 죽음은 하루의 해가 솟았다가 지는 것과 같다.

[4] 죽음과 함께 그들의 모든 장점도 사라진다. 아름다움과 힘과 학식은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해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죽어야 한다. 또한 그들의 화려함과 재물 또는 권력도 물려 줄 수 없다.

[5] 그들의 지혜는 그들을 죽음에서 구해 줄 수 없다. "그들이 죽나니 지혜가 없느니라." 그들은 지혜가 부족하여 그들 자신의 이를 가지고 그들의 무덤을 파면서 그들 자신을 어리석게 다스렸기 때문에 죽는다.

[6] 그 누구도 죽음에 대해 주의하지 않으며, 그것에 대해 주목하지 않는다. "그들이 영원히 망하되 생각하는 자, 또는 마음에 두는 자가 없으리라." 다른 사람들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화제가 되나 그들은 거의 신중히 생각해 보지 않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죄인들의 일시적인 죽음 뿐만 아니라 영원한 저주도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들은 조석 사이에 죽음에 의해 멸한바 되거나 마디마다 꺾임을 당한다. 그리고 그들이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영원히 망한다"(20절). 그들은 하나님과 그들의 의무를 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에 멸망한다. 즉 그들은 "결국을 생각지 아니한다"(애 1:9). 그들은 죽음이 빼앗아 간 것 이외에는 아무런 장점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그들은 그들에게 영생을 가져다 줄 만한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두 번째의 죽음을 죽는다. 이처럼 비천하고 약하며 어리석고 죄 많으며, 이렇게 죽어가는 피조물이 어떻게 "하나님보다 의로우며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한체" 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그의 환난과 다투는 대신 그가 지옥에 있지 않은 것을 감사하는 것이 마땅하다.

 

4:13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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