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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그의 날을 저주하는 욥(욥기 3:1-10)

욥의 마음의 열기는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동안 불은 더욱 타올라 그의 마음은 답답하고 질식할 것 같았다. 드디어 그는 입을 열었으나 오랜 침묵 후 입을 열었던 다윗처럼 훌륭한 말을 하지 못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을 나로 알게 하소서"(시 39:3, 4)라고 다윗은 말했다. 칠일 동안 선지자 에스겔은 사로잡힌 자들을 보고 놀라서 앉아 있었으나 그후(아마도 안식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다"(겔 3:15, 16). 매우 오랫동안 욥과 그의 친구들은 생각하며 앉아있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욥을 번민하게 하지 않기 위해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말하기를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감히 그의 생각을 토로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를 위로하러 왔으나, 그의 환난이 매우 특수한 것임을 보고, 그가 사곡한 자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으면서 그에게 위로를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말할 허락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욥은 제일 먼저 그의 생각을 토로하였다.

만일 그의 생각이 선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그 자신만 간직하고 있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그의 날, 그의 생일을 저주했고, 그가 전혀 태어나지 않았기를 원했다. 그리고 후회와 번뇌 없이 그 자신의 출생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흔히 해마다 돌아오는 자기의 생일을 기쁘게 맞이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그해의 가장 불행한 날로 여겼다. 왜냐하면 그날이 그의 모든 재앙을 불러 들이게 된,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불행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Ⅰ. 이것은 정말 나빴다. 그의 극심한 환난과 그의 마음의 불안정은 그러한 그의 생각을 부분적으로 변명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결코 그것을 합리화할 수는 없었다. 이제 그는 그가 태어난 복을 잊고 있었고, 여윈 암소가 살찐 암소를 삼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는 오직 재앙에 대한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가 결코 태어나지 않았기를 바라고 있다. 선지자 예레미아 자신도 그의 재앙의 고통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과 별로 다른 것이 없다.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모친이여, 내 모친이 나를 낳으셨도다"(렘 15:10).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다면……"(렘 20:14 이하). 우리는 욥이 형통하던 때에는 그의 생일에 대해 여러 번 하나님을 찬미하고 그것을 행복한 날로 여겼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가능한 모든 치욕의 표적이라고 그날을 낙인 찍고 있다.

우리가 잉태되어 태어나게 된 일 속에 들어 있는 죄악을 깊이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정말 우리가 태어난 날을 슬프고 부끄럽게 여기며 우리가 "죽는 날"이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게" 되는 날로서(롬 6:7), 출생하는 날보다 훨씬 "낫다"(전 7:1)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의 재앙을 맛보게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출생한 날을 저주하는 것은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과 싸우는 것이며, 우리 존재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고, 우리가 평정을 되찾아 온전히 생각해 볼 때 우리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그러한 감정에 빠지는 것이다. 분명히 이 세상에서는 인간이 자기의 모든 조건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으나, 그는 그 속에서(만일 그것이 그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고, 그의 구원의 역사를 위해 일하고 또한 그 스스로 더 나은 세상에서의 행복을 확신할 수 있으므로, 그는 결코 그가 태어나지 않았기를 원할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며, 오히려 그가 태어난 것이 좋은 일이었다고 이야기할 만한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또 다른 인생이 없고, 그것을 바라보도록 장려하는 거룩한 위안이 우리에게 없다면 이 세상의 슬픔과 환난이 매우 크므로 우리는 때로 인생이 "허무하게 창조"되었다고(시 89:47) 말하며, 우리가 결코 출생하지 않았기를 원하도록 유혹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여야 한다. 지옥에는 유다처럼 태어나지 말았기를(마 26:24) 원하기에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욥이 그의 날을 저주한 것은 어리석고 약한 짓이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이것이 그의 약점이었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선한 자들도 때로는 그들의 훌륭한 자질을 실천에 옮기지 못할 때가 있다. 우리는 그들이 "순전한" 자라고 할 때, 그것은 그들이 죄없다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그의 말이 자연적인 생명 보다 영적인 생명을 높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출생한 날을 저주했을지라도, 결코 그들의 거듭난 날을 저주하는 자는 없었으며, 은혜의 성령이 그들에게 준 은혜를 받지 않았으면 좋았겠다고 말한 자들은 없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Ⅱ. 그러나 그것은 사탄 스스로가 장담했던 것처럼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욥은 그의 날은 저주했지만 하나님의 날을 저주한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의 생명을 혐오하여 기꺼이 그것을 떠나게 한 것이었지, 그의 믿음을 혐오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단히 그것에 매달렸고 결코 그것을 떠나려하지 않았다.

욥에 관한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있었던 논쟁은 욥이 결점들을 가지고 있느냐라든가, 또는 그가 우리처럼(부여받은) 격정과 같은 것에 굴복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은밀히 미워하는 사곡한 자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였다. 그가 만일 사곡한 자였다면 그가 충동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미움을 나타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험한 결과 그가 그러한 자가 아님이 입증되었다. 아니, 이 모든 것은 그가 인내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이처럼 그의 입술로 경솔하게 말하긴 했을지라도, 그는 그 이전과 이후에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크게 복종하고 따르려는 그의 뜻을 표명했었고, 그의 참을성 없었음을 후회했기 때문이었다. 욥이 이 일에 대해 스스로를 정죄했으므로 하나님은 그를 정죄하지 않으셨고, 우리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다만 이와 비슷한 죄악을 범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를 더욱 철저하게 경계해야 한다.

1. 그의 날을 저주하는 데 사용한 욥의 상세한 표현들은 시적인 상상력, 격정 그리고 환희로 가득 차 있으며, 이것은 신학상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비평가들에게도 큰 어려움을 던져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매우 상세하게 살펴볼 필요는 없다. 그가 태어나지 않았기를 원하는 강렬한 표현에서 그는 그날과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나타내었다.

(1) 세상이 그날을 잊었기를 바라고 있다. "그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3절), 해의 날 수 가운데 기쁨이 되지 말았었더라면"(6절) 좋았겠다고 하였다. "그 날이 왕의 탄생일을 표기할 때에 그러하듯이 붉은 글자로 달력 안에 그날이 표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욥은 왕이었다-29:25), "그날이 지워져 없어졌었더라면, 나처럼 이렇게 비참한 몰골이 된 자가 태어나고 살았다는 것을 세상이 알지 못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2) 하늘이 그날에 대해 얼굴을 찌푸려 주었기를 원하고 있다. "그날을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4절), "모든 것은 정말 하나님 곁에 있는 그대로이다." 그는 그날을 영예롭게 하셨고, 한 주일의 이레째 되는 날에 베푸셨던 것과 같이 그날을 그의 은총과 축복으로 뛰어나게 하셨고 영화롭게 하셨다. 그러나 내 생각은 결코 그처럼 영예롭지 못하다. 그 때가 지정되기 전에 결정하신 하나님께서 그날을 재앙의 날로 검은 숯으로 점찍어(nigro carbone notandus) 놓으셨었더라면, 빛의 아버지이시며 근원이신 분이 큰 광명으로 낮을 다스리게 하셨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그러나 그날에는 그것들이 모두 저 빛을 말하지 못했으면,

[1]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4절). 만일 낮의 광명이 흑암이 된다면 "그 흑암은 얼마나 짙겠는가!" 얼마나 끔찍스러운 일인가! 그때 우리는 빛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낮에 해가 떨어진 그날의 어두움은 욥의 상태를 제시하고 있다.

[2] 그날 밤에도 역시 달과 별이 없어 "그 밤이 심한 어두움에," 다시 말해서 그 고요함으로 인해 밤의 휴식을 제공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두려움으로 동요하도록 만드는 짙은 어두움에 "잡혔었더라면."

(3) 모든 즐거움이 그날을 버렸었기를 원하고 있다. "그것이 노래하고 춤추는 즐거운 밤이 아니고 우울하고 고독한 밤이었었더라면. 그 가운데 즐거운 소리가 일어나지 말았었더라면(7절). 그것이 긴 밤이 되어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동틈을 보지 못하였었더라면(9절)".

(4) 온갖 저주가 그날에 있었기를 바라고 있다(8절). "아무도 그날을 보기를 원하거나 그날이 오기를 청하기 말고 오히려 날을 저주하는 자가 그것을 저주하였었더라면, 어떤 날이든 저주하고 싶어하는 자들이 있었다면, 특히 장례식에서 장송곡으로 애곡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던 자들이 있었다면 그들로 하여금 동시에 내 출생한 날에 한 번 저주를 퍼붓게 했었더라면, 다른 사람의 사망한 날을 저주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같은 입으로 나의 출생의 날을 저주했었더라면," 또는 리워야단(Leviathan-여기에서는 그 단어가 사용되어 있다)을 끌어올릴 만큼, 즉, 고래나 악어를 치려는 힘세고 용감한 자들이 그들의 주문으로써 그것을 약하게 하여 정복하리라는 기대를 가지면서 그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온갖 혹독한 저주로 그날을 저주하였었더라면, 아마도 거룩한 시인들이 시사하고 있는 이러한 풍습이 사용되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큰 재앙을 슬퍼하거나 가장 무서운 괴물을 본 때처럼 그날이 끔찍스러웠었더라면." 패트릭(Patrick) 주교처럼 나도 여기에서 리워야단은 마귀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요술쟁이나 주술가들이 마귀를 일으킬 때 또는 그들이 넘어뜨릴 수 없는 마귀를 일으켜 놓았을 때 사용하는 저주로 이해하고 있다.

2. 그러나 욥이 그가 출생한 낮이나 밤과 더불어 싸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것들이 "그의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다(10절). 매우 불만에 차 있는 자들의 어리석음과 광기를 보라. 그러한 자들은 고삐가 그 목에 채워졌건마는 매우 어리석고 지나치게 말하고 있다. 이 사람이 그처럼 그의 지혜 때문에 존경 받았으며, "무리가 그의 말을 들으며 잠잠히 기다리다가 그가 말한 후에 그들이 말을 내지 못하도록"(29:21, 22) 만들었던 그 욥이냐?

그는 지혜를 잃었는데 그것은



(1) 그가 결코 태어나지 않았었기를 바라는 그의 소망을 표현하려고 매우 힘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그의 바램은 기껏해야 헛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있었던 것을 없었던 것으로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 그가, 그를 해치지 못하였거나 그에게 저주가 될 만한 일을 행하지 못한 낮과 밤을 마음대로 저주하였을 때였다.

(3) 그의 어머니가 만삭이 되었을 때 그를 낳지 않았기를 바랄 정도로 매우 야비한(왜냐하면, 그것은 그녀를 분명 비참하게 죽도록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것을 원했을 때였다.

(4) 그가 그를 존재케 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멸시하고(그러한 존재는 매우 귀하고 훌륭한 생명이며 그러한 생명은 이 낮은 세상에 있는 다른 피조물들의 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단지 "그것이 환난의 무거운 조건이 되었다"(transit cum onere)고 하여 그것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선물로서 과소평가했을 때였다. 그가 그 선물의 기쁨을 수 년동안 즐기고 난 후 이제 그 환난이 드디어 그에게 닥쳐왔다. 그가 저쪽 너머에 있는 기쁨을 볼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슬픔을 보지 않기 위하여 그의 눈이 결코 빛을 보지 못하기를 원한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욥이 그가 "후에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19:26)는 것을 바라고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현재 육체 안에 슬픔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러한 축복의 능력을 결코 가지지 않았었기를 원해도 좋단 말인가? 하나님은 인내하지 못하는 이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대항하도록 그의 은혜로써 우리를 무장시키신다.

 

3:2 없음.

 

3:3 없음.

 

3:4 없음.

 

3:5 없음.

 

3:6 없음.

 

3:7 없음.

 

3:8 없음.

 

3:9 없음.

 

3:10 없음.

 

3:11

생명을 원망하는 욥(욥기 3:11-19)

욥은, 아마도, 그가 결코 태어나지 않았었기를 바라는 그의 어리석음을 곰곰히 생각해 본 후에 그러한 어리석음을 그가 태어나자 마자 곧 죽었더라면 하는 조금 나은 바램으로써, 고치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 구절에서 이런 생각을 전개시켰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도 이 세상의 매우 큰 재앙의 상태를 제시하시고자 하셨을 때, 이렇게 말하는 것을 허용하신 것 같다.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눅 23:29). 그러나 수태 못하는 배를 축복하는 것과 수태한 배를 저주하는 것은 서로 별개의 것이다. 환난을 좋게 이용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은혜를 악하게 이용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우리는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는 교훈을 받았다. 생명은 흔히 유익한 것으로 간주되며, 사망은 재앙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욥은 여기에서 매우 어리석게도 생명을 원망하고 있으며 그것을 그에 대한 저주와 재난으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사망과 음부를 가장 훌륭하고 가장 바람직한 축복으로 여기고 있다.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는 격언을 욥에게 적용시켰을 때 사탄은 사실 스스로 속아 넘어갔다. 왜냐하면 욥처럼 생명을 천하게 여긴 자도 또 없었기 때문이다.

Ⅰ. 그는 배은망덕하게 생명을 불평하고 있으며 그것이 그에게 부여된 즉시 그로부터 떠나지 않은 것에 대해 분노하였다(11, 12절).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1. 사람이 이 세상에 나올 때는 얼마나 약하고 무력한 피조물이며 생명의 줄은 제일 처음 나올 때 얼마나 갸냘픈가! 우리는 태에서 죽어 나올 수도 있으며, 우리가 처음 숨쉬기 시작하자마자 마지막 숨을 거둘 수도 있다. 우리는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우리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무릎이 우리를 받지 않는다면 음부로 떨어질 것이다. 우리가 빨아야 하는 유방이 우리에게 신선한 영양분을 공급해 주지 않는다면, 생명의 등불은 처음 켜졌을 때 스스로 꺼질 것이다.

2. 우리가 이 세상에 들어왔을 때 거룩한 하나님의 섭리는 얼마나 우리를 자비롭고 자상하게 돌보는가! 우리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않고, 우리 어미가 낳을 때 우리가 숨기지 아니하였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어찌하여 우리가 태어나자 마자 죽임을 당하지 않았는가? 우리에게 그럴듯한 이유가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러한 잡초들은 나타나자마자 당연히 뽑힘을 당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도마뱀들은 알이었을 때 짓밟혔을 수도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와 우리의 안전을 돌아보았거나 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람처럼 무기력한 상태로 이 세상에 오는 피조물은 없다. 우리가 이러한 일을 당하지 않은 것은 우리의 권력이나 우리 손의 힘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한 생명을 부축하는 하나님의 권능과 섭리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박탈당해야할 생명을 남겨두도록 하는 것은 그의 동정과 인내이다. 무릎이 우리를 받았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혈연의 정은 만물의 하나님의 손에 의해 부모의 마음 속에 들어온다. 그러므로 태에서 나온 자들에게 유방의 축복이 부여된다.

3. 얼마나 많은 허탄과 번민이 일생을 찾아오는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섬길 하나님을 가지지 못했고, 우리에게 부여된 능력과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고난을 깊이 생각하면서 저 세상에 대한 더 낳은 소망을 가지지 못했다면 우리는 큰 죄와 환난을 겪지 않기 위해 "태에서 죽어 나왔기"를 원하고 싶은 강한 유혹을 받을 것이다.

오늘 태어난 자가 내일 죽으면

몇 시간의 기쁨을 잃어버리지만

몇 달간의 슬픔을 면할 수 있다.

4. 초조와 불평과 불만이 얼마나 악한가! 이러한 마음을 가진 자들은 부조리하고 어리석게 되며, 불경건하고 배은망덕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에 빠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무시하고 과소평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든지간에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리가 태에서 죽어 버리지 않은 것은 주님의 긍휼 때문이었도다." 생명을 미워하는 것은 인류의 일반 상식과 감정에 그리고 때로는 그 자신의 것에 위배된다. 불만에 차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생명에 대해 매우 항의할지라도 정작 죽을 때가 오면 그들은 생명을 떠나기를 싫어한다. 어떤 우화에 무거운 짐 때문에 지쳐버린 한 노인이 있었다. 그는 불만스럽게 그것을 내던지고 죽음을 청했다. 그러나 죽음이 그에게 와서 무슨 일로 불렀냐고 물었을 때 그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단지, 내 짐을 도와 주십시오" 라고 대답했다.

Ⅱ. 그는 열정적으로 사망과 음부에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는데, 그가 그것들을 매우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위해,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해 그리고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 입기" 위해 죽기를 원하는 것은 은혜의 결과이며 그 증거이다. 그러나 단지 우리가 음부에서 편히 쉬고 이 인생의 고통에서 떠나기 위해 죽기를 원하는 것은 썩은 냄새를 풍기는 것이다. 여기에 나타난 욥의 이러한 생각들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이 왔을 때 그것에 잘 적응할 수 있게 하고 그것이 우리를 둘러쌀 때에도 편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데 도움이 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이용하여 생명이 지속되는 동안 우리가 생명에 대해 불평하거나, 그 고통 속에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구실로 삼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음으로써"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 되도록(롬 14:8) 생명을 최선으로 이용하는 것이 우리의 지혜이며 의무이다.

1. 욥은 여기서 그가 태어나자 마자 죽어 버리고 태에서 음부로 옮겨지기만 했다면 그의 상황은 가장 좋았을 것이라고 원망하고 있다. 나는 "세상 임금들과 의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14절). 그들의 화려함과 권세와 책략은 그들을 사망에서 건져내지 못하며 음부에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또한 음부 속에서 그들의 몸이 모든 티끌로부터 구별되게 할 수도 없다. 많은 금을 가졌던 임금들까지도 죽음의 사자가 명령을 받고 왔을 때 그에게 뇌물을 주어 그들을 빼놓도록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집이 은으로 가득 차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모든 것을 남겨두고 떠나지 않을 수 없었고, 더욱이 다시 돌아올 수도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왕들과 의사들이 "자기를 위하여 거친 터를 수축했다"는 이 구절에 의해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판" 셉나처럼(사 22:16) 그들이 생전에 그들 자신을 위해 묘실이나 기념비를 마련해 놓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왕들이 가졌던 금과 그들의 집을 가득 채웠던 은은 위대한 사람들의 무덤 속에 넣어두던 보물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한 기술은 혹시나 죽음 저편에서도 그들의 권위를 보존시키고 그들을 낮은 부류의 사람들과 구별시킬 수 있을까하여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죽음은 만민에게 평등하게 임한다. Mors sceptra ligonibu aeguat-즉 죽음은 임금의 홀과 농군의 가래를 섞어 놓는다. 무덤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만난다." 그리고 그곳에는 "부지중에 낙태한 아이"(16절) 즉, 결코 빛을 보지 못하였거나 단지 눈을 떠서 이 세상을 잠깐 보고는 다시 감아버리고 급히 그곳을 떠난 아이가 금을 가졌던 왕이나 의사나 방백들과 마찬가지로 편하고 안온하게 누워 있으며 높고 안전하게 누워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세상의 잿더미에 누워있기 보다는 차라리 그곳에 있는 티끌 속에 누워 있겠다"고 욥은 말했다.

2. 욥은 그의 상황이 지금 보다는 훨씬 나았을 것이라고 말했다(13절).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렇게 할 수 없고, 또 그렇게 될 수 없으며, 여전히 시달리면서 불안해하고 있다. 지금은 내 눈에서 잠이 떠났으나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내가 자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내가 쉬지 못하나 그렇지 아니 하였던들 내가 쉬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보다 훨씬 더 생명과 불멸에 대한 신념을 복음에 의해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죽음에 대해 보다 확실한 것을 얻게 되었다. "그때 나는 주님과 함께 있을 것도, 나는 더 이상 희미한 거물을 통하지 않고 직접 대면하여 그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불쌍한 욥이 꿈꾸던 전부는 재앙의 공포와 상처의 아픔에서 벗어나 무덤에서 조용하게 쉬는 것이었다.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내가 평안하였을 것이다." 만일 그가 마음의 평정을 지켰다면, 앞의 두 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은 편한 마음을 유지하면서 완전히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맡기고 그것에 순응했다면, 그는 지금도 평안하였을 것이다. 적어도 그의 영혼은 그의 육신이 고통 속에 누워있을 때까지도, 평안히 거했을 것이다(시 25:13).

욥이 얼마나 훌륭하게 무덤의 휴식을 묘사하고 있는가를 보라. 그의 말은 우리로 하여금 무덤에 대해 승리하도록 크게 도와 줄 것이다(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쉬게 하여 줄 것이다).



(1)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는 자들은 그곳에서 고난을 벗어날 것이다고 하였다(17절). "거기에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칠 것이라." 박해자들이 죽으면 그들은 더 이상 박해를 할 수 없다. 그 때에는 그들의 "미움과 시기도 사라질 것이다." 해롯은 교회를 괴롭혔었으나 그가 구더기의 밥이 되었을 때 그는 더 이상 교회를 괴롭힐 수가 없었다. 핍박당하는 자들이 죽을 때 그들은 더 이상 괴롬당할 염려가 없게 된다. 욥이 그의 무덤에서 쉬고 있었다면 그는 스바 사람이나 갈대아 사람들의 침입을 받지 않았을 것이고 그의 모든 적들은 그에게 어떤 괴로움도 주지 못했을 것이다.

(2) 지금 수고하는 자들은 거기에서 그들의 수고가 끝나는 것을 보게 된다. "거기서는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는다." 천국은 성도들의 영혼에 대해 휴식 이상의 것을 주나, 무덤은 그들의 육신에 대해 휴식을 준다. 그들의 순례는 매우 곤비한 순례이다. 그들은 죄와 세상 때문에 시달림을 받았으며, 그들의 봉사와 고난과 기대 때문에 시달림을 받았다. 그러나 무덤에서 그들은 "수고를 그치고 쉰다"(계 14:13; 사 57:2). 그들은 그곳에서 편히 쉬며 불평을 하지 않는다. 거기에서 믿는 자들은 예수 안에 잠잔다.

(3) 여기에서 사로잡힌 자들은 거기에서 놓임을 받는다. 죽음은 갇힌 자들을 놓아 주며 압제당하던 자를 구출해 주고 종을 해방시켜 준다(18절). "거기서는 갇힌 자"가 비록 전체적으로 행동하진 않을 지라도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옥에서처럼 맷돌을 돌리는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이며, 위협당하거나 놀라운 일을 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은 감독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한다." 여기에서 영원한 노예가 되는 운명을 지녔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몸을 스스로 어떻게 다스릴 수가 없었던 자들도, 거기에서는 더 이상 명령받거나 제제받지 않는다. "거기서는 종이 상전에게서 놓임을 받는다." 권세를 지닌 자들이 그것을 겸손하게 사용해야 하고, 지배받고 있는 자들이 잠시동안이긴 하지만 그것을 끈기있게 참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4) 서로 매우 거리가 멀던 자들이 거기에서는 평등하게 된다(19절). "거기서는 큰 자나 작은 자가 일반으로 있다." 거기서는 모두 하나같이 같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모두 일반으로 자유롭다. 거기서는 큰 자들에게 있었던 지루한 의식이 없어진다. 그리고 가난하고 천한 상태에 있었던 사람들의 불편 역시 모두 극복된다. 즉 사망과 음부는 차별을 모른다.

죽음에 의해, 정복자와 노예,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비겁한 자와

용감한 자가 모두 평등하게 되고,

무덤 속에서 한데 엉겨 분간할 수 없게 된다.

R. 블랙모아경

 

3:12 없음.

 

3:13 없음.

 

3:14 없음.

 

3:15 없음.

 

3:16 없음.

 

3:17 없음.

 

3:18 없음.

 

3:19 없음.

 

3:20

생명의 지속을 원망하는 욥(욥기 3:20-26)

욥은 그가 태어나지 않았거나 태어나자마자 곧 죽었었기를 원하는 것이 아무 소용 없음을 발견하고, 이제 그의 생명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는 것을 여기에서 원망하고 있다.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해 아무리 논쟁을 벌여도 그것은 끝이 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타락한 마음은 익살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가 출생한 날을 저주하고 난 후 욥은 여기에서 그가 죽을 날을 간청하고 있다. 이 다툼과 조급함의 시작은 물이 새는 것과 같다.

Ⅰ. 욥은 전반적인 면에서 비참한 생명이 연장되는 것은 가혹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20-22절). "어찌하여 마음이 번뇌한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영적인 번뇌로 인해 마음이 곤고한 자들은 생명 자체를 곤고하게 만든다. "어찌하여 그가 빛을 주셨는고?"(히브리어 성경에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그"는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다. 비록 마귀가 "그가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하고 말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생명의 즐거움을 빼앗긴 자에게 생명이 계속되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부당하고 불친절한 것이라고 넌지시 암시하였다.

생명은 빛이라 일컬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걸어가고 일하는 데 있어서 즐겁고 유용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촛불이다. 그리하여 오래탈수록 그것은 점점 짧아지고 초꽂이에 가까워진다. 이 빛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만일 그것이 신선한 선물에 의해 날마다 새롭게 되지 않는다면 조만간에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참한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는 그것은 "선물 아닌 선물"(dwron a;dwron) 곧 그 빛이 오직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비참함을 보도록 도와주는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나은 선물이었다고 욥은 생각하였다. 인간의 생명은 이처럼 허탄한 것이므로 그것은 때로 그 심령을 괴롭히는 것이 된다. 또한 죽음을 소유하려는 욕구는 비록 죽음이 인간 본성에 두려움을 주는 것일지라도, 이처럼 변할 수 있으므로 본성 그 자체까지도 열망하는 대상이 된다.

1. 그가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자들은 죽음을 바라는 자들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즐거움과 유용함이 사라진 후에도 살아남게 되고, 나이와 노쇠, 고통과 병, 가난과 치욕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도 죽음이 오지 않으면 그들은 죽기를 바란다. 반면에 죽음을 두려워하여 멀리 피하려는 많은 자들에게도 죽음이 동시에 찾아온다. 생명의 지속과 끝남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지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살는지 그리고 언제 죽을 것인지를 논의하는 것은 우리에게 합당치 않다. 우리의 세월은 우리보다도 더 훌륭한 분의 수중에 들어있다.

2. 욥은 죽음을 "구하기를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는 것같이 하는" 자들에 대해 언급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깨끗이 퇴장당하기 위해 어떤 것이라고 바치려는 자들이었다. 그 당시도 자기가 자기의 목숨을 끊는 일은 그리 좋은 일로 간주되지는 못했었다고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죽음을 바라는 자들은 많은 번민을 할 필요가 없이(세네카가 그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들이 원할 때 즉시 죽을 수 있었을 것이다.

3. 죽음을 환영하고, 무덤을 발견한 뒤에 그곳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그들 자신을 보았을 때 매우 기뻐한 자들에 대해 언급했다. 만일 이 인생의 비참이 극심하기 때문에 우리의 본성을 거슬러가면서 죽음 그 자체를 열망하게 된다면, 더 나은 생명에 대한 소망과 기대가 우리를 그곳으로 가는 길인 죽음을 열망하도록 만들지 않겠으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죽음의 공포를 초월하도록 만들지 않겠는가? 죽음을 바라는 것은 죄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하늘 나라를 바라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확신한다.

Ⅱ. 욥은 다른 방법으로 자기의 고통이나 비참을 안락하게 할 수 없었다면, 죽음으로도 이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 이처럼 우리가 당하는 고통으로 인해 우리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는 것은 생명 그 자체에 대해 온당치 못한 일일 뿐만 아니라, 생명을 주신 분에 대해서도 배은망덕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자신의 감정을 사악한 것에 빠지게 하고, 우리의 미래의 상태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죄를 범하게 한다. 우리는 다른 세상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이를 위해 꾸준히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합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가시도록 하나님께 그 일을 맡기도록 하자. "주여, 당신이 기뻐하시는 때에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행하소서."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맡기신다면, 우리가 그것을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은총은 생명의 큰 즐거움 속에서도 기꺼이 죽고, 또 큰 환난 속에서도 기꺼이 사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욥은 죽기를 원하는 이 간절한 소망을 지닌 그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그의 일생은 거의 아무런 위안과 만족을 얻지 못한 인생이었다는 사실을 탄원하였다.

1. 그의 현재의 환난에서 고통이 끊임없이 느껴졌고 또 그렇게 될 것만 같다고 하였다. 그는 그의 생명을 혐오할 만한 이유를 충분히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1) 왜냐하면 그는 그의 삶에서 어떤 위안도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나는 먹기 전에 탄식이 난다"(24절). 서글픈 삶은 생명에 대한 애착심을 방해하고 파멸시킨다. 뿐만 아니라 음식에 대한 식욕마저도 빼앗아 간다. 그의 근심은 식사처럼 규칙적으로 그에게 엄습했고 고통은 그의 매일의 양식이 되었다. 더욱이 그의 고통과 번민은 매우 극심했기 때문에, 그는 한숨만 지을 뿐 아니라, 앓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의 앓는 소리는 냇가의 가득 찬 물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우리 주님도 슬픔을 많이 맛보셨다. 우리도 역시 그렇게 될 것을 예상해야 한다.

(2) 그는 그의 형편이 나아지리라는 전망을 가지지 못했다. 그는 "길이 아득하였고" 하나님께서 그를 "둘러싸셨다"(23절). 그는 구원을 위한 어떤 길이 열려있음을 보지 못하였고, 또한 어떤 방법을 택해야 할는지 알지 못했다. 그의 길은 "가시로 둘러 쌓였기" 때문에 그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참조, 23:8; 애 3:7).

2. 그가 이전에 형통하던 상태에서까지도 고난은 끊임없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때에도" 욥은 결코 편안하지 못했다(25, 26절). 그는 이 세상의 허탄함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그가 태어난 데 따르는 고난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때에 그는 "평강도 없고 안식도 없었다." 이제 그의 근심을 더 극심하게 하는 것은 이러한 징벌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리셔야 할만큼 하나님을 격노케 하도록 그가 형통하던 날에 매우 나태했거나 너무 방심했던 사실을 그 자신이 깨달을 수 없는 점이었다.

(1) 그는 그의 일들을 게을리 하거나 소홀히 여긴 적이 없었다. 그는 이처럼 고난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필요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자식들이 잔치를 베풀 때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염려했고(1:5), 그의 종들이 그 이웃들을 불쾌하게 했을까 염려했다. 그는 자신의 건강에 대해 그가 할 수 있는 온갖 관심을 다 기울였으며 온갖 경계로써 그 자신과 그의 일을 관리했다. 그러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2) 그는 방심하지 않았고, 스스로 안이와 편안함 속에 빠지지도 않았으며, 그의 재물을 신뢰하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연락이 영원하리라는 소망 가운데서 그 자신을 기쁘게 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국하고 고난이 임하였고, 그가 편히 살 때에도 잊지 않았던 이 세상의 허탄함을 그에게 다시 알려 주고, 그것을 완전히 수긍하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그의 길은 아득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왜 그와 다투시는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러한 생각은 그의 근심을 더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완화시킬 수도 있었다. 우리가 형통하던 날에 어느 정도 우리의 의무를 행했다는 우리 양심의 증거보다도 우리의 고통을 덜어 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고난이 임할 것을 예상한다면 고난이 임했을 때 그것을 좀 더 가볍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놀라움이 적을수록 두려움도 적다.

 

3:21 없음.

 

3:22 없음.

 

3:23 없음.

 

3:24 없음.

 

3:25 없음.

 

3:26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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