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해설(느헤미야 8:1-8)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고 교회를 교화시키기 위해, 거룩한 종교적 모임을 열어 선한 일을 행한 사건에 대해 읽을 수 있다.
Ⅰ. 이것을 행한 때는 "제7월 1일" 이었다(2절). 그 날은 "안식일" 이라고 불리우는 "나팔절" 이었으며, "성회" 가 열리는 날이었다(레 23:24; 민 24:1).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것은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후에 제단을 세우고 번제를 드리기 시작한 날로서, 그 당시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감사히 기억하는 뜻에서 다른 절기보다도 더욱 성대하게 이 날을 지켰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새로이 하나님의 은총이 기억나면-우리는 직접 그러한 은총의 증인들이다-우리는 새삼스레 큰 감동을 받게 된다.
Ⅱ. 그것은 "수문 앞 광장에서" 행해졌다. 그곳은 넓은 공터로서, 성전 뜰에서는 모일 수 없을 만한 많은 무리들을 유치시킬 수 있는 곳이었다. 그때 지은 성전은 솔로몬 시대의 성전과 같이 그렇게 대규모의 성전이 아니었던 것같기 때문이다. 제물은 성전 문에서만 드리도록 되어 있었지만 기도와 찬미와 말씀 선포 등의 종교적 행사는 다른 곳에서도 행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Ⅲ. 그곳에 모인 자들은 백성 전체였다. 그들은 그곳에 오도록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일제히 동의하여 자발적으로 그곳에 모인 것이다. 그리하여 남자들 뿐만 아니라 말을 알아 들을 수 있는 자들이면 여자고 어린아이고 모두 모인 것이다. 집안의 가장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공적인 예배에 가족들을 데리고 가야 한다. 여자와 아이들도 구원받아야 할 자들이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친숙해지고 하나님의 지식과 은혜를 받는 방편이 되는 일에 참예하도록 하는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어린아이들은 지적인 훈련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의 훈련도 받아야 한다.
Ⅳ. 이 모임의 우두머리는 제사장 에스라였다. 즉 그가 이 의식을 주관했다. 하나님의 율법에 박식한 자보다도 더 설교하여 해설하는 데에 적합한 자는 없다.
1. 그 의식에 대한 그의 소명은 매우 확실했다. 왜냐하면 그가 제사장의 직책을 맡고 있었고 율법학자의 자격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백성이 그에게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였고", 그것을 그들에 읽어 주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1절).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셨고, 백성들은 그에게 기회를 주어 청탁을 했다. 지식은 그것을 필요로 하고 또 그것을 요청하는 모든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영적인 자선금이다.2. 그의 자리는 매우 편했다. 그는 "말씀을 위해 만들어 놓은" (원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무강단 또는 대에 서서 "말씀을 가르쳤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높은 자리에 선 것은 그가 말한 것이 좀더 잘 들려 은혜롭게 전달되도록 하고, 듣는 자들이 모두 그를 주목하여 누가복음 4장 20절에서와 같이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3. 그에게는 여러 명의 보조자가 있었다. 이들 중에 6명은 그의 오른편에, 그리고 7명은 그의 왼편에 서 있었다(4절). 이 강단은 특별석처럼 한 줄에 모두 그들이 자리잡도록 만들어졌거나[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거의 대(탑)라고는 부르기가 힘들다] 또는 한 단계 낮은 곳에 그들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해놓았을 것이다. 그가 지쳤을 때는 이들에게 읽도록 명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무튼 이들을 보조자로 택하여 백성들 앞에 영예롭게 한 것은 적어도 다른 때 그들도 이와 똑같은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 또 7절에 언급되어 있는 다른 사람들은, 에스라의 가르침을 들으러 올 수 없었던 자들을 위해 그 근처에 있는 처소에 가서 율법을 읽어주고 해설해 주는 일을 동시에 맡았다. 이들 중에는 또한 입술에 지식을 지켜야 할(말 2:7) 제사장이 13명이 있었다. 이처럼 가르치기에 적합한 사역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은혜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보조자들을 지닌 에스라는 행복했고, 또 에스라와 같은 인도자를 지닌 그 백성도 행복했다.
Ⅴ. 이 집회에서 행해진 종교 행사는 의식상의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요, 기도와 설교였다. 이 집회의 사회자인 에스라는
1. 하나님께 대해서는 백성들의 입이었고, 그들은 마음을 다하여 그에게 협력했다(6절). 그는 여호와를 광대하신 하나님이라고 송축했으며, 그의 완전하심을 찬미하고 그의 은총을 간구함으로써 그를 영예롭게 했다. 또한 백성들은 그 간구와 찬미에 그와 한 마음이라는 것을 표하기 위해, "아멘, 아멘" 하고 말했으며, "손을 들어"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소망과 모든 기대를 표했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댐" 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경의와 복종심을 나타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시고 선하심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들으려 할 때는 우리도 이들처럼 하나님을 사모하고 우리 자신을 그에게 말씀드려야 한다.2.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대변인이 되었으며, 그들은 열심히 에스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것이야 말로 그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1) "에스라는 율법 책을 가지고 회중 앞에 이르렀다" (2절). 그는 가장 훌륭하고 가장 정확한 율법 사본을 가지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는 훌륭한 관리인처럼, 그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 모아 두었던 것을 이제 교회의 유익을 위해 놓았던 것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율법 책은 율법 학자들의 연구를 위해서만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회중 앞에 들고 나와서 그들의 말로 읽어 주도록 되어 있는 책이다.
[2] 목회자들은 강단에 올라갈 때 성경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에스라가 바로 그러했다. 그리고 그 성경책으로부터 그들의 지식을 찾아내고 그 규례대로 말하며 그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역대하 17장 9절을 보라.
(2) 그는 "모든 백성의 목전에서" 매우 경건하고 엄숙하게 그 책을 폈다(5절). 그는 그 책을 그들에게 알릴 때 그는 그 책을 자기들에게 준 하나님의 위대한 자비를 생각하면서 읽었다. 그는 그 책을 읽도록 허락해 준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하면서 그 책을 폈다. 그 책은 막힌 샘물이나 밀폐된 분수대가 아니었다. 우리는 "책을 가지고 그 인봉을 뗄 때" 기쁨과 찬미로 가득 찬 축복을 발견한다(계 5:9). 우리는 엄숙한 휴식기간을 가진 후에 믿음의 일을 시작하기를 배워 성급히 행하지 않도록 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책을 손에 들고 그것을 펼칠 때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고 또 우리의 무릎을 꿇어 기도할 때에도 그렇게 하도록 하자. 즉,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을 신중히 행하도록 하자(전 5:1).
(2) 그와 다른 사람들은 율법 책을 "새벽부터 오정까지" 읽어 주었고(3절) 또 그것을 "똑똑히" (한글 개혁에는 없음) 낭독했다(8절). 종교적 집회에서 성서를 읽는 것은 하나님의 규례요, 그것으로써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며 그의 교회는 교화된다. 그리고 특별한 때를 맞이하여 우리는 기꺼이 많은 시간동안 함께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것을 해석하는 일에 거의 참여해야 한다. 여기에서 이들은 이처럼 여섯 시간 동안 이 집회에 참여했다. 말씀을 읽고 설교하는 자들은 그들이 말한 것을 깨닫고 그것으로 감동을 얻은 자들로써 그 말씀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을 배워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들에게 말씀을 깨닫고 기억하게 하며 또한 감동을 얻게 하도록 하자. "거룩한 것을 삼키는 것은 사람에게 하나의 덫이 된다."
(4) 그들은 읽은 것을 해석해 주었으며 그 뜻과 의미를 알려 주었고 그것이 어떤 유익함이 있는지를 알려 주었다. 즉 그들은 다른 말로 그 의미를 알려 주어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했다" (7, 8절).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말씀을 읽는 자들이 그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공허한 말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마 24:15).
[2] 그러므로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자들은 말씀을 해석하고 그 의미를 깨닫게 해 주여야 한다. "너희는 읽는 것을 알겠는가?" 그리고 "너희는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는가?" 하는 질문은 듣는 자들에게 해야 할 좋은 말이다.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가르치는 자들에게 적합한 질문이다(행 8:30, 31). 읽는 것은 좋은 것이며, 가르치는 것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해석하는 것은 읽는 것과 가르치는 것을 병합하며, 이것은 읽는 것을 더욱 이해하기 쉽게 하고 가르치는 것은 더욱 확신을 얻게 한다.
(5) 책을 펴고 말씀이 읽혀질 때 그들은 다음과 같은 훌륭한 태도를 취했다.
[1] 매우 정중했다. 에스라가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섰고" (5절)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에스라와 그가 읽으려는 말씀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주인이 말할 때 종들은 일어서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주인에 대한 존경을 나타낼 수 있고 또 그들이 명령받는 것을 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2] 그들은 매우 침착하고 확고한 태도를 취했다. 그들은 "다 그 처소에 섰다" (7절). 즉 여러 명의 사역자들이 서로 어느 정도 떨어져 읽고 해석했으며, 백성들은 각자 자기 위치를 지켜 이리 저리로 들으러 다니면서 그들의 말을 논평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은 각자의 처소에 서서 남에게 방해를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방해를 받지 않도록 했다.
[3] 그들은 큰 관심을 가지고 전념했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으며" (3절) 거기에 온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들은 쾌히 듣고 모든 말씀을 염두에 두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집중을 명하며 또 그렇게 할 만하다. 만일 부주의로 해서 우리가 듣는 것을 많이 놓쳐버리게 되면 듣고 난 후에 그것을 모두 잊어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기쁨(1)(느헤미야 8:9-12)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살펴 볼 수 있다.
Ⅰ. 백성들은 그들에게 읽혀진 율법의 말씀으로 어떻게 충격을 받았는가? 율법은 죽음을 초래하며 무서운 말을 하고 그들의 죄를 보여준다. 또한 죄로 인한 그들의 비참함과 위험을 알려주고 각자의 의무를 계속 행하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것을 들었을 때 그들은 다 울었다(9절).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율법의 말씀을 들었을 때의 요시야처럼 온화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좋은 표준이었다. 그들은 얼마나 하나님을 거역하고 율법을 범하면서 스스로 반항하였는가를 생각하고는 울었다. 즉 몇 사람이 울기 시작하자 모두 울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Ⅱ. 그들은 그들에게 전해진 화평의 말씀으로 어떻게 고침을 받고 위로받았는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매우 영향을 받고 감동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특히 이러한 때에 부당하게 슬픔에 빠져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그날은 하나님의 성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그것은 엄숙한 잔치날이었으므로 그들의 의무는 기뻐하는 것이었다. 죄에 대한 슬픔까지도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기쁨을 방해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우리를 기쁨으로 인도하고 그것을 위한 준비를 하도록 해야 한다.
1. 이 집회의 지도자들은 그들을 평정시키고 격려해 주려고 애썼다. 이제 느헤미야가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본 장에서는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는 백성들이 우는 것을 목격했다. 에스라는 백성들이 그 말씀에 깊이 감동된 것을 보고 좋아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 날에는 그렇게 슬퍼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자기의 뜻을 에스라에게 전했으며, 에스라도 느헤미야의 생각에 수긍했다. 이 날은 성일이었으므로(그것을 "안식일" 이라 부른다. 레 23:24), 기쁨과 찬미로 송축하여야 하며, "그들의 영혼이 고통 당하는 날" 처럼 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1) 그들은 백성들에게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고 명했다" (9절). "근심하지 말라" (10절). "종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11절). 만사는 때가 있는 법이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슬픔으로 부르실 때 우리가 기뻐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뻐할 때를 주셨을 때 두려워하거나 괴로워해서는 안 된다. 죄를 슬퍼할 때라도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기쁨이나 그의 일을 행하는 즐거움을 방해할 정도로 지나쳐서는 안 된다.
(2) 그들은 백성들에게 기쁨을 나타내고 "마음을 괴롭게 하는 대신 찬미하는 옷" 을 입도록 명했다. 그들은 백성들의 기쁨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스스로 잔치를 베풀어 다른 날보다 더 좋은 것을 보고 마시도록 하기 위해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도록" 허용해 주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1] 가난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명했다.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그리하여 너희의 풍족함으로 그들의 부족함을 충당하게 하고 그들도 너희와 함께 즐거워하며 너희를 축복할 수 있도록 하라." 그리스도는 잔치를 열 때 가난한 이웃들을 청할 것을 권하셨다(눅 14:13). "주린 자에게 심정을 동하는 것은" (사 58:7, 10) 종교적인 금식 때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잔치의 특별한 의무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관대하게 써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실지라도 가난한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나누어 주지 않으며 또 부스러기도 주려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들은 부유한 자에 대한 비유에 나오는(눅 16:19 이하) 그들의 심판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왜 그들에게 물질을 주셨는지 알지도 못하고 살피려 하지도 않는 자들이다. 우리는 손을 내미는 자들에게도 보내야 한다. "너그러운 자는 후히 대하기를 힘쓰며", 자선할 일들을 구한다.
[2] 믿음과 경건을 가지고 행하도록 명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그것이 세속적이고 관능적인 기쁨이 아니라 거룩하고 영적인 "여호와의 기쁨" 이 되도록 하라. 즉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그의 선하심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얻은 우리의 유익함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 되게 하고 또한 그의 은총에 대한 표시가 되게 하라. 이 기쁨은 너희 힘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장려하라. 그것은
첫째, "잔치에 대한 다른 의무들을 이행하게 하는 너희의 힘이 될 것이다." 우리가 믿음의 일에 열심일수록 그에 대한 더 풍성한 일들을 가지게 된다.
둘째, "그것은 너희에게 읽어준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행해야 하는 모든 일들을 위한 너희 힘이 될 것이다." 거룩한 기쁨은 순종이라는 차를 굴리는 기름이 될 것이다.
셋째, "그것은 너희를 중상 모략하는 적들을 이기는 데 힘이 되어줄 것이다." 여호와의 기쁨은 우리 영혼의 적들을 물리칠 수 있도록 우리를 무장시켜 줄 것이며 유혹하는 자들이 우리를 잡기 위해 미끼로 던져주는 달콤한 먹이를 입에 대지 않게 할 것이다.
2. 회중은 그들에게 내려진 이 명령에 응했다. 울던 그들은 "정숙케" 되었고(11절) 또 "크게 즐거워하였다" (12절). 우리는 어떻게 해서 감정이 폭발했든지 간에 그것이 이치에 맞지 않고 때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항상 모든 감정을 거두어 들일 수 있어야 한다.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용사보다 낫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1) 그들은 슬퍼한 후에 즐거워하였다. 거룩한 슬픔 후에는 거룩한 즐거움이 뒤따른다. "눈물로 씨뿌린 자들은 기쁨으로 거둘 것이다." 말씀을 깨닫고 두려워하는 자들은 말씀이 주는 확신 속에서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2) 그들이 기뻐한 이유는 매우 타당했다. 그들이 즐거워한 것은 그들이 살찐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며 많은 좋은 친구들과 한 자리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읽혀진 말을 밝히 안 때문이었다."
[1] 우리가 거룩한 성경을 가지게 되고 또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은 매우 큰 자비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매우 즐거워 해야 한다. 성경과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기쁨이다.
[2]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을수록 우리는 그 속에서 더 많은 위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고통이라는 어두움은 무지와 실수라는 어두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말씀이 처음 그들에게 읽혀졌을 때 그들은 울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회개하고 다시 돌아온 자들에게 준 귀한 언약이 있으므로 이스라엘에 소망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즐거워했다.
백성들의 기쁨(2)(느헤미야 8:13-18)
Ⅰ. 백성들은 다시 말씀에 집중했다. 그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기도하고 말씀을 들으며 보냈으나, 그들은 그 날이 지나고 다음날 안식일이 될 때까지도 결코 지루하게 여기지 않았다. 비록 절기는 아니었지만 백성들의 족장은 다시 에스라의 해석을 듣기 위해 모였는데(13절) 그것은 그들이 어떤 세속적인 즐거움이나 이런 것들 보다 말씀에서 더 많은 즐거움과 유익함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더 많은 교제를 가질수록 우리가 그것을 옳게 깨닫고 감명을 받는다면 우리는 더욱 열심히 그 교제를 갈망할 것이며 "주의 말씀은 내 입에 얼마나 단지요!" 하고 말하면서 그 시간을 갖는 것을 더욱 늘여갈 것이다. 성경을 잘 깨닫는 자는 계속 더 잘 깨닫기를 바라게 될 것이다. 이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뭇 백성의 족장들" 과 함께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혹은 난외에 있듯이 "율법의 말씀을 가르칠 수 있게 하기 위해" 해석자의 대가인 "에스라에게" 왔다. 즉 그들은 와서 그들 스스로 배운 후 남을 가르칠 능력을 얻고자 했다.
1. 에스라가 겸손했으므로 첫날에는 그들이 그와 함께 가르치는 자로서 "그의 우편과 좌편에" 자리를 잡았지만(4, 7절), 이제 그들이 부족함과 그의 뛰어남을 깨달았으므로 둘째 날에는 그들은 배우는 자들로서의 겸손함을 가지고 에스라의 발 아래 자리를 잡았다.2.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는 자들은 그들 자신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먼저 배운 후에 가르쳐야 한다.
Ⅱ. 백성들은 그 책에 적힌 그들의 의무를 깨닫자 또 특별한 한가지 일에서 그 말씀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이 칠월 이일에 율법의 가르침을 받고자 에스라에게 왔을 때 그는 "그의 손에 있는 그의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스 7:25) 그들에게는 그 달의 절기에 관한 율법을 읽어 주었을 것이며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초막절에 관해 알려주었을 것이다(레 23:34; 신 16:13). 사역자들은 진실되고 선한 것뿐만이 아니라 "그 때의 그 날의 일을" 지시하여 때에 알맞는 일들을 가르쳐야 한다.
1. 초막절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이 재음미(14, 15절) 되었다. 즉 "그들은 초막절에 대한 명령을 율법책에서 보았다." 성서를 열심히 보는 자들은 그들이 잊고 있거나 중히 여기지 않았던 것들이 씌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초막절은 광야에서 초막에 거했던 것을 기념하는 것이며, 이 세상에 있는 초막에 우리가 머물러 있는 상태를 표하는 것으로써 복음의 교회가 지니는 거룩한 기쁨의 한 모형이다. 열국에 속한 자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일이 초막절의 비유로 예고되었다(슥 14:16). 즉 그들은, 이 세상에서는 영원한 도성이 없으므로 "초막절을 지키러" 나오는 것이다.이 절기는 그들의 모든 성읍에 선포되었다. 백성들은 자진하여 나뭇가지를 가져와(예루살렘에 있는 백성들은 감람나무 산에서 그것을 찍어 왔다) 그들이 거하고(기후가 허락하는 한), 절기 동안 즐거워할 수 있도록 초막 혹은 정자를 지었다.
2. 이 명령은 종교적으로 거룩하게 준행되었다(16, 17절). 우리가 기록된 대로 행할 때 그리고 오랫동안 소홀히 여겨왔었으나 우리의 의무라는 것을 깨달아 그것을 복귀시킬 때 우리는 말씀을 기꺼이 그리고 유익하게 읽고 들은 것이 된다.(1) 그들은 의식을 준수했다. 그들은 초막 안에 거했다. 그런데 이것은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성전 뜰 안에 세워 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그들 소유의 집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지붕 위에나 뜰 안에 초막을 지었으며 그렇지 못한 자들은 거리에 초막을 지었다. 이 절기는 보통 지켜져 왔으나(역하 5:3; 스 3:4) 여호수아 시대 이후로 이때처럼 엄숙히 거행된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나안 땅에 처음으로 정착했듯이 이제 그들이 다시 정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규례나 섭리에 순응하여, 잠시라도 자기의 집을 떠나려는 엄두를 내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 집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이다.
(2) 그들은 내용에 관심을 기울였다. 의식이 아무리 성대하더라도 내용이 없으면 그것은 별 의미가 없는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1] 모든 절기가 그러했지만 특히 이 초막절은 기쁨으로 즐겨야 했다. 그 기쁨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그 의식에 참여하는 자들을 격려하는 것이었다.
[2] 그들은 이 절기 동안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고 해석했다(18절). 그들은 그들의 여가를 이렇게 훌륭한 일로 선용했다. 시간을 절약하는 것은 성경을 연구하고 그 말씀과 교제하면서 보내는 것보다 더 나을 수가 없다. 이 초막절에, 하나님은 7년마다 한 번씩 율법을 읽으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이 때가 그 의식을 행해야 하는 면제년이었는지는(신 31:10, 11)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절기의 모든 날들을 선한 일을 위해 보냈고 제 팔일에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성회를 열었다. 그리고 이들은 그 달 이십이일에 의식이 끝났으나 곧 헤어지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 절기 이십사일에는 금식과 기도를 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건한 슬픔이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기쁨을 배척하도록 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룩한 기쁨이 경건한 슬픔을 배제하도록 만들어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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