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에 대한 느헤미야의 요청(느헤미야 2:1-8)
느헤미야가 그의 백성들에게 위로를 줍시사고 간구했을 때 아마도-다윗의 말을("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시 51:18) 빌어 간구했을 것이다-그는 가만히 앉아서 "이제 나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하시도록 하자" 하고 말하지 않고 그 자신이 직접 그것을 위해 어떠한 일을 할 수 있는가를 찾아 보았다. 우리의 기도에는 우리의 진지한 노력이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 되고 만다.
기슬르월(月)부터 니산월(月)까지(11월부터 3월까지) 4달이 지난 후에야, 느헤미야는 자기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왕에게 청원할 수 있었다. 그것은 겨울이 여행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때여서 여행할 수 있을 때까지 그런 제의를 하지 않은 때문이었거나, 혹은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는 왕 앞에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에 4:11) 그 때를 기다리느라고 이렇게 시일이 오래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가 왕의 시중을 들 기회가 왔을 때, 그는 왕이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 주기를 바랬다. 우리에게는 이처럼 왕 중의 왕께 말씀드리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그에게 나아갈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기에 알맞지 아니한 시기란 없다.
Ⅰ. 이제 느헤미야는 자기의 안색에 나타난 근심과 슬픔에 대해 왕이 자기에게 물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이처럼 높은 분에게 말하는 자는, 당돌하게 자기의 문제를 꺼내지 말고 간접적인 방법으로 제시해야 한다. 느헤미야는 왕에게 감히 그의 문제를 말하기 전에, 왕이 기분 좋은 상태에 있는가를 알아보려 했다. 그는 이러한 방법으로 그를 시험해 보았다. 그는 왕의 요청을 받았을 때, 왕이 그의 안색을 살펴주기를 기대하면서, 술을 따라 주었다. 그는 평시 왕의 앞에서 슬픈 내색을 보이지 않고 슬픈 일을 당한 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한(에 4:2) 왕궁의 법도대로(조신들은 이것을 지켜야 한다) 따라 행했다. 비록 그는 타국인으로서 사로잡혀 온 자였지만, 편하고 유쾌하게 지낼 수 있었다. 선한 사람들은 믿음의 생활이 즐겁다는 것을 세상에 확신시키며 믿는 자는 우울한 사람들이라는 비난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 자기들의 일을 즐겁게 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다(전 3:4). 이제 느헤미야는 자기가 슬퍼해야 할 일을 알았고, 그것을 나타내었다. 예루살렘의 비참함은 그가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그의 슬픈 안색은 왕에게 그 이유를 물을 기회를 주었다. 그가 슬픔을 가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정말 요셉의 환란에 대해 슬퍼한 것이지 "자기들의 얼굴을 손상시키는" 위선자들과 같지 않았다. 그러나 필요할 때는 그의 슬픔을 감출 수 있었다(그 마음은 은밀한 비통을 알고 있으며, 또 웃음 가운데는 때로 슬픔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슬픔을 표하는 것이 그의 목적에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비록 그는 왕 앞에서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고, 또 아마도 술관원이라는 직책에 의해 그가 왕에게 술을 주기 전에 마실 수는 있었지만,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환란 속에 있는 한 "그의 마음이 즐거울" 수가 없었다.
Ⅱ. 왕은 느헤미야의 슬픔을 친절히 살피고 그 연유를 물었다(2절).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하자.
1.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원리에 입각하여 다른 사람의, 심지어 우리 손아래 사람의 슬픔과 애통에 대해 살피고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고 말하지 말고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주인은 종들의 슬픔을 경멸하지 말고 그들을 즐겨 위로해야 한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낙담과 불안에 빠져있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시며, 그들이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즐겁게 그들의 빵을 먹기를" 원하신다.2. 병든 사람이 고통과 두려움 때문에 슬픈 안색을 하고 있다면 별로 이상할 게 없다. 병은 매우 쾌활하고 유쾌한 자들을 우울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선한 자는 병중에서라도, 만일 그의 죄가 사하여졌다는 것을 안다면 즐거운 기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 병 없이 지냄은 매우 큰 은혜이므로, 우리가 병에서 해방되어 있는 한 외적인 짐에 눌려 지나치게 낙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죄와 다른 사람의 죄,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의 재앙에 대한 슬픔은, 우리가 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의 안색을 우울하게 만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Ⅲ. 느헤미야는 겸손한 마음과 두려움을 품고 그가 슬퍼하는 이유를 왕에게 이야기 했다.
1. 두려움을 품었다. 느헤미야는 "자기가 크게 두려워했다" 는 것을(비록 다음 이야기에서 그가 용감한 자로 나타나긴 하지만) 여기에서 인정하고 있는데, 그가 두려움을 품었던 것은 왕의 노함이나(동방의 왕들은 사람을 살리고 죽일 수 있는 절대적인 권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 2:12, 13; 5:19) 혹은 말을 실수하여 그의 요청을 그르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느헤미야는 지혜로운 자이긴 했지만 경솔한 말을 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했다. 우리도 이처럼 행해야 할 것이다. 훌륭한 확신은 반드시 훌륭한 성과를 이루나, 자기를 겸손하게 하는 것은 결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2. 겸손한 마음을 품었다. 그는 누구도 비난함이 없이 존경과 경외와 선한 의지를 지니고, 그 왕을 자기의 주인으로 대우하면서, "왕은 만세수 하옵소서. 왕은 지혜롭고 선하시며 이 세상에서 다스리기에 합당한 분입니다" 하고 말했다. 또한 그는 정중히 물었다. "나의 열조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왕은 그가 뜻하는 성읍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 황무한 이 때에(비록 나 자신은 편하게 잘 지내지만) 어찌 내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이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하고 슬퍼하나, 그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 이유를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자들은 자신들을 꾸짖어야 하며, 부당하고 무모한 그들의 슬픔과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가 왜 수색을 띠고 있었는가를 왕에게 호소할 수 있는 훌륭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다음 내용을 주목하라.
(1) 그는 예루살렘을 "자기 열조의 묘실이 있는 곳", 즉 자기 조상이 장사된 곳이라 칭하고 있다. 우리가 때로 우리 조상의 묘소를 생각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는 조상들을 생각할 때 그들의 영예나 직함, 집이나 재산 등을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들의 묘소를 생각하고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에 있던 사람은 우리보다 앞서 이 세상을 떠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그들의 유품은 우리에게 추억을 남긴다. 우리도 우리 조상들이 남긴 유품에 대해서는 큰 존경심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손상되는 것을 매우 언짢게 여긴다. 모든 나라 사람들은, 심지어 죽은 육신의 부활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조상의 묘실을 어느 정도 성서스럽게 여기며 그것을 더럽히지 않으려 한다.
(2) 그는 자기의 슬픔에 대한 이유를 변명했다. "내가 슬퍼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어찌 내가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경건하고 축복을 누리는 사람들이라도 슬픔을 당하게 되고, 또 그 슬픔을 표해야 할 때가 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들이라도 모든 슬픈 생각들을 쫓아 버리면 천국을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통과하는 곳은 눈물의 계곡이며, 우리는 환경에 복종해야 한다.
(3) 우리는 예루살렘의 파멸이 자기가 슬퍼하는 진정한 이유라고 했다. 교회가 당한 비탄스러운 모든 일들, 특히 교회의 황폐는 모든 선한 백성들,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두고 있는 모든 자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의 살아있는 지체가 되는 모든 자들과 공공의 복리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슬퍼하고 애통해 하는 일이 되며, 또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들은 시온의 티끌까지도 아낀다(시 102:14).
Ⅳ. 왕은 느헤미야가 자기의 마음을 말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이에 따라 자기의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간구했다(4절). 왕은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우울한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유대인의 믿음에 대해서도 호의를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왕은 이전에 성직자였던 에스라를 임명할 때에도 그러한 믿음을 발견했고, 이제 또 정치가인 느헤미야에게 권력을 위임하면서도 믿음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왕은 자기가 어떻게 예루살렘을 도울 수 있는가 하는 방법만을 알기 원하여서, 그 수심에 잠겨 있는 친구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있을 것이니 그것이 무엇이냐?" 느헤미야는 말하기를 두려워했었으나(2절), 왕의 이러한 물음에 용기를 얻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시어 기도하게 하시고 우리를 축복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은, 우리로 하여금 이보다 더욱 담대히 은총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느헤미야는 즉시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는 왕에게 자기의 요구에 응하여 들어주도록 잘 말할 수 있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한 것이다. 왕들의 총애를 구하려는 자들은, 왕들의 왕이신 하나님의 은총을 먼저 받아야 한다. 그는 이 막강한 군주보다도 무한히 높으신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것은 장엄한 기도가 아니라(그는 그렇게 할 여유가 없었다), 비밀스럽고 갑작스런 절규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마음 속에 있는 말들을 이해하시는 하나님께 그 마음을 아뢰었다. "여호와여, 제게 지혜로운 입을 주소서. 그리하여 여호와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경건한 절규를 하나님께 올리는 것은 좋은 일이며, 특히 특별한 경우를 당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하늘을 향해 열려있는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늘을 향한 길은 어떤 일도 방해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것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일로도 그것을 훼방하지 말고 돕도록 하자. 느헤미야는 바로 이 때를 염두에 두고 아주 엄숙한 기도를 드렸었다(1:11). 그러나 이제 그 때가 다가오자 그는 다시 기도했다. (무형식적인) 절규와 엄숙한 (형식을 갖춘) 기도는 서로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되어야 한다.
Ⅴ. 그는 왕에게 겸손히 청을 올렸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자, 왕의 지혜에 매우 겸손히 복종하는 태도를 가지고 간청을 올렸으나(5절), 그의 태도는 매우 솔직했다. 그는 장관으로서 유다 땅에 가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기 위해 얼마 동안을, 즉-우리가 짐작할 수 있듯이-아주 여러 달 동안을 허락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리고 나서 그가 다시 왕의 명을 얻었는지 아니면 왕에게 왔다가 다시 돌아갔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최소한 그곳에서 12년 이상을 다스렸다(5:14). 또한 느헤미야는 다른 총독들에게 왕이 명을 내려 자기를 호위하게 해 줄 것(7절)과 그들의 영토를 통과하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의도한 일을 위해 레바논 삼림 감독으로 하여금 그에게 재목을 주도록 명을 내려 달라고 요청했다.
Ⅵ. 왕은 그에게 큰 은혜를 베풀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고" 물었다(6절). 왕은 느헤미야를 잃고 싶지 않으며 오랫동안 그가 없이 지내고 싶지 않다는 심정을 시사했지만, 역시 왕은 승낙했다. 그리고 그의 백성들에게도 실질적인 친절을 베풀었다. 또한 그 위임장에 삽입해 넣을 사항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8절). 이것은 그의 기도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이었다. 야곱의 씨앗이 야곱의 하나님을 구하는 일은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의 청원이 성공한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시하고 있다.
1. 왕후도 그 자리에 있었다. 왕후가 왕 곁에 앉는 것은 바사 궁에서는 통상적인 일이 아니라고 한다(에 1:11). 그 왕후가 느헤미야의 적이어서 방해하였기 때문에, 그녀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느헤미야가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과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를 찬미하기 위해서 이 사실을 언급해 놓은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그의 진실한 친구였기 때문에 그녀가 그 자리에 참석함으로써 돕게 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를 찬미해 놓은 것이지, 그것은 확실치 않다.2. 하나님은 권능과 은혜를 베푸셨다. 그가 목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왕에 대한 그의 공적이나 세력, 혹은 그의 훌륭한 처사 때문이 아니라, "그의 하나님의 선한 손이 그를 도왔기 때문" 이었다. 은총을 입은 영혼을 지닌 자들은 그들에게 베풀어지는 모든 은혜로운 일 속에서 하나님의 손, 곧 그의 선하신 손을 깨닫는다. "이것은 여호와의 행하심" 이므로, 배나 더욱 기쁨을 느끼게 된다.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여행(느헤미야 2:9-20)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읽을 수 있다.
Ⅰ. 느헤미야가 어떠한 모습으로 왕궁을 나왔는가? 왕은 "군대장관" 과 "마병" 을 보내어, "그와 함께" 가도록 명했다(9절). 그리하여 이들로 하여금 그를 호위하고, 그는 왕이 즐겨 경의를 표하는 자라는 것을 보임으로써, 왕의 모든 종들도 그를 존경해 주도록 하였다. 왕 중의 왕께서도 이처럼 당신이 보내는 자들을 보호하실 것이며, 천사의 무리를 그들에게 옹위시켜 그에게 존귀를 부여하실 것이다.
Ⅱ. 그가 간 나라에서 그는 어떠한 대우를 받았는가?
1.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과 그들의 친구들의 태도를 보자.(1) 그가 그의 임무를 감추고 있는 동안, 그들은 그를 거의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가 "예루살렘에 삼일" 이나 머물렀으나(11절), 그 성읍의 높은 자들이 그의 도착을 환영하면서 그를 모시고 가지도 않았고, 그는 알려지지 않은 채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그 왕은 그에게 마병을 함께 보내주었으나, 유대인은 아무도 그를 맞이하러 나오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가 타고 온 짐승 외에는 아무 짐승도 없었다(12절). 지혜로운 자와 두 배의 영예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자는, 남의 주목을 받기 위해 시위를 하거나 소란 피우지 않는다. 자기들이 아무리 큰 축복을 가지고 왔을지라도 역시 그렇다. 세상은 머지 않아 "아침이 올 때 권세" 를 잡을 자들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숨기워져 있다(요일 3:1).
(2) 그들은 그에게 대해 별 관심이 없겠지만, 그는 그들과 그들의 형편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는 밤중에 일어나 허물어진 성벽을 살펴 보았다(13절). 아마도 그는 옛날 세워진 초석이 다시 사용되어질 수 있는가 또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가를 달빛에 의해 살펴보면서, 그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하고 또 무슨 방법으로 그 성을 쌓아야 하는가를 관찰했을 것이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선한 사업도, 먼저 심사숙고되었을 때에야 잘 이루어질 수 있는 법이다.
[2] 공무에 종사하고 있는 자들은 될 수 있는 한 "그들 자신의 눈으로 직접 살피고" 다른 사람들의 보고나 소문만 믿고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아무런 소란도 피우지 말고 될 수 있는 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직접 관찰하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이다.
[3] 교회의 벽을 중건하려는 자는 먼저 허물어진 벽부터 살펴야 한다. 복구시키는 방법을 알고자 하는 자는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 어떠한 개혁이 필요한가 그리고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는 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3) 그가 그곳을 다스리는 자들과 백성들에게 그의 의도를 밝혔을 때, 그들은 기꺼이 협력해 주었다. 그는 처음에 그가 무슨 일로 왔는지를 그들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16절). 그것은 그가 그것을 행하는 것을 겉치레를 위한 것으로 하지 않았고, 또 만일 그 일이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이 발견될 때 그가 영예롭게 물러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정직하고 겸손한 사람들은 자선이나 그 밖의 선한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먼저 나팔을 불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사태를 살피고 심사숙고한 후에-아마도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협조할 의향을 안 후에-그는 "하나님이 자기의 마음을 감화하사" (12절)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게" (17절) 했다는 말을 그들에게 들려 주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관찰하자.
[1] 그는 그들에게 대단히 정당하게 제의했다.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 바라. 우리가 얼마나 우리 주위에 있는 적들의 위협을 받고 있는가, 그들이 우리는 어리석고 보잘 것 없는 자로 비난하는 것이 얼마나 당연한 일인가, 그리고 그들이 원할 때마다 얼마나 쉽게 우리를 먹이로 삼는가를 너희도 잘 알 것이다. 자 그러므로 성을 중건하자" 고 했다. 그는 그들 없이는 그 일에 착수하려 하지 않았고(그것은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비록 그가 왕의 임명을 띠고 왔지만, 그들을 문책하거나 거만하게 명령하지 않았다. 단지 친구요, 형제로서 권면하여, 이 일을 함께 하자고 종용했다. 그는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의도를 말했다.
첫째, 그는 그것의 발단이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그는 그것이 자기 자신의 선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자기가 칭찬 받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감화하셨다" 는 사실을 시인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이 모두 이 일에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하나님의 일은 무엇이든지 장려되어야 한다) 그 일이 잘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게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맡기신 일을 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써 그 맡은 자들을 인정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는 특별하신 하나님의 섭리로 이 일이 진행되리라는 것을 알렸다. 그는 그 왕의 명령을 고하고, 얼마나 빨리 그 왕의 허락을 얻을 수 있었으며, 왕의 호의가 그의 의도를 얼마나 빨리 진척시켰는가를 그들에게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선한 "손이 그를 도우셨다" 는 것을 알렸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와 그들은 용기를 얻어 그 일에 착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느헤미야는 그것을 그들에게 제안했다.
[2] 그리고 그들은 곧 결심을 하고 모두 힘을 합하여 그를 도왔다. "일어나 건축하자" 그들은 이렇게 시급한 일을 시도해 보지도 않고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리하여 이제 그들의 나태함으로부터 깨어나, 스스로 분발하고 또 서로를 권면하기로 결심했다. "일어나자" 는 것은 "이 일을 완수해야 할 자로서, 열심히, 부지런히, 그리고 결단력 있게 일하자" 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했다." 그것은 다음 사실을 뜻한다.
첫째, 선한 일을 행하려는 훌륭한 지도자가 한 사람만 있다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일손들은 곧 구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모두 황무한 예루살렘을 목도했으나, 아무도 그것을 증건하자고 제안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그것을 제안했을 때, 그들은 모두 응했다. 선한 목적이, 그 일을 밀고 나아가는 모험을 강행할 단 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둘째, 우리가 분기하여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을 촉구하여 선한 일을 하게 함으로써, 그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힘을 감화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무를 게을리 하게 되는 큰 이유는, 우리가 그 일에 냉담하고 무관심하며 우유부단함에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이제 유대인들에게 악을 행하고자 하던 자들은 느헤미야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살펴보자. 하나님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이 축복한 자들은 그들을 저주했다.(1) 느헤미야가 얼굴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그들은 화가 났다(10절). 두 명의 사마리아 사람, 즉 모압 태생인 산발랏과 도비야는 이스라엘에 봉사하기 위해 왕의 위임을 받고 무장하고 오는 사람을 보았을 때 "심히 근심하였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누르고 있는 자기들의 보잘 것 없는 모든 술책이 이스라엘을 강화하려는 훌륭하고 고상하고 관대한 계획에 의해 좌절되고 낭패되지 않을까를 염려한 것이다. 선한 사람들을, 폭동적이고 파벌을 일삼으며 살려 둘 가치가 없는 자들이라고 군주에게 보고하던 자들이, 자기들이 거짓 보고를 한 바로 그들이 올바른 지도자를 만나게 되고 그들에 대한 비난이 사라지고 그들의 결백함이 드러나게 되고, 그들은 살려 둘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믿을 만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본다면, 그것보다 더욱 선한 자들의 원수들에게 괴로운 일은 없다. 그들은 그러한 자가 와서 공공연히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 하려 한다" 는 것을 알았을 때, 마음이 초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악한 자는 그것을 보고 근심할 것이다."
(2) 느헤미야가 일을 행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방해하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19, 20절).
[1] 그 적들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이유를 들어 그를 낙담시키려 했는가 보라. 그들은 이 일이 어리석은 짓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우리를" 어리석은 건축자라고 "업신여기고 비웃으면서," 시작한 일을 완성하지 못할 자라고 말했었다. 그들은 또한 그 일이 사악한 것으로서 반역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 이 말은 예전부터 남의 비위를 거슬리는 책망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므로, 비록 왕의 명령을 얻고 왕의 보호 아래 이 일을 하는 자들에게도 반역자라고 부르고 있었다.
[2] 또한 유대인들은 얼마나 선한 이유를 들어 이 좌절의 계획을 무시해 버렸는가를 보라. 그들은 그들 자신이 오직 참되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 곧 "하늘의 하나님의 종" 이며, 그들이 지금 행하는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을 위한 일이므로, 비록 열방이 분노하더라도(시 2:1)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축복하시리라는 생각으로, 그들 자신을 지지하였다. 그들은 또한 이 적들이 이처럼 자기들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 이유는, 적들은 예루살렘에 대해 아무런 이권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예루살렘을 소유하고 있는 그들을 시기하는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교회의 친구들은 교회의 적들의 무기력한 위협을 쉽게 묵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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