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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유다 사람들의 부패상(에스라 9:1-4)

예루살렘에 왔을 때 그곳에 있는 그의 형제들에게 내려졌던 "하나님의 은혜를 본" 바나바와 같이, 에스라도 물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고 권하였을 것이 분명하다(행 11:23). 그는 잘못된 것을 목격하지 못하였다(많은 타락들이 감시하는 자들의 눈을 피해 숨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기쁨은 찬서리를 맞게 되었다. 즉 많은 사람들과 그 지도자들이 이방 족속에서 아내를 취하고, 이방 사람과 친밀히 지내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이다. 다음을 관찰하자.

Ⅰ. 그들이 범한 죄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이방 족속과 서로 섞여" (2절) 교역을 하고 교제를 나눔으로써 그들과 친밀히 지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딸을 취하여" 자기들의 아들에게 줌으로써, 그들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은 일이었다. 그들이 우상을 섬기지는 않았을 것이며, 그들이 사로잡혔던 경험이 우상 숭배를 범하는 것을 고쳐주었을 것이라고 바랄 수도 있다. 여기에는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하였다" 고 적혀있다. 그러나(패트릭 주교는 말하기를) 그 뜻은 단지 이방 나라 사람들이 다른 민족과 난잡하게 결혼하는 일을 본뜬 것만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일은 점차로 그들을 우상 숭배로 인도하게 되었을 것이다.

1. 여기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명백히 밝혀진 명령, 즉 이방 사람들을 가까이하지 말며 특히 그들과 결혼하지 말라는 명령(신 7:3)에 복종하지 않았다.

2. 그들은 유별성이라는 자기들의 면류관을 더럽혔으며, 이전에는 물론 최근에도 하나님께서 그의 은총을 표하는 유일한 표적으로 존귀케 해준 그들 자신들을 이방 사람들과 같은 수준에 놓고 있었다.

3. 그들은 그들을 보호하고 발전케 해주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믿지 않고 정욕이 이끄는 대로 따랐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렇게 이방 사람과 동행함으로써 그들 스스로를 강하게 하고 그 이웃들간의 세력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우리가 자신들을 구제해 보려는 비열한 방법 근저에는 하나님의 풍성하심에 대한 실질적인 불신이 깔려 있다.

4. 그들은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손들까지도 우상 숭배라는 바로 그 죄의 위험성 가운데 몰아넣고 있었고, 그들의 교회와 민족을 이미 파멸하게 했던 바로 그 길을 다시 좇고 있었다.

Ⅱ. 이러한 죄를 범한 자들은 누구였는가? 별로 학식이 없는 이스라엘의 몰지각한 몇몇 사람들뿐만 아니라, 율법을 가르치는 직책을 맡고 있었으며 다른 사람에게 이 율법을 전해야 하는 많은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 도 이 죄를 범했다. 그들은 일반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었으므로 이들의 죄는 더 중했다. 다른 지파 사람들과 결혼하는 것은 그 지파 자손들의 수를 감축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거의 왕족 지파와도 결합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 그리고 잘 알려지지도 않은 이방 사람들과 결혼했다는 것은, 자신들을 욕되게 하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의무감을 느끼지 못했다 하더라도 영예심을 지니고 있었다면, 결코 그런 죄를 범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도 아니었다. 이와 같은 비행을 막고 개혁 해야할 권한을 지니고 있는 "방백들과 두목들이 이 죄에서 더욱 으뜸이 되었다." 방백들이 범죄하면, 그들은 그 죄의 주동자로 책망 받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악한 행실을 따를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을 타락시키고 잘못을 범하게 만드는 지도자들을 지닌 백성들의 처지는 비참하다.

Ⅲ. 에스라에게 이 소식을 전한 자들은 누구였는가? 그것은 그러한 호소를 하기에 가장 합당한 사람들에 의해 보고되었다. 즉 자기들의 정직과 품위를 보존하고 있던 방백들 가운데 몇 명이 그것을 고했다. 자기들에게 비난받을 일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는 아무도 다른 사람들을 고소할 수 없다. 또 그 소식은, 그 문제를 바로잡을 능력이 있는 자, 또 왕의 대사로서 그들을 징계할 수 있는 그런 사람에게 보고되었다. 이 방백들은 이 비탄스러운 일을 바로잡으려고 여러 번 시도했었으나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에스라에게 고하면서, 그의 지혜와 권위와 세력이 그것을 능히 해낼 수 있기를 바랬다. 자신의 힘으로는 사회적인 악습을 개혁할 수 없는 자들도 그것을 할 수 있는 자들에게 고함으로써 훌륭한 봉사를 할 수 있다.

Ⅳ. 이것이 에스라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는가?(3절) "그는 옷을 찢고 털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았다." 그가 이처럼 깊은 슬픔을 표한 것은

1. 이것이 하나님을 영예스럽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백성이 이처럼 비열하게 그의 율법을 거역하여 그의 징계가 유명무실하게 되었으며, 그의 은혜에 대해 이처럼 악한 보답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 에스라를 매우 상심케 했다.

2. 백성들이 그들 스스로에게 재앙을 불렀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곧 임할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기억하자.

(1)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죄악을 슬퍼해야 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영예와 인간의 영혼을 침해한 것을 가슴 아파할 줄 알아야 한다.

(2) 죄에 대해서는 지극히 애통해야 한다. "외아들 또는 장자로 인하여" 슬퍼하듯, 에스라는 슬퍼했다.

(3) 수치스러운 죄악이 고해질 때,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반박하고 욕하며 피해를 가하고 황폐케 하는 자들을 볼 때, 놀라서 멍하니 서 있게 될 것이다. 인간들이 이처럼 경솔하고 변덕스럽게 행한다는 것은 이상스러운 일이다. 의로운 자들은 이런 것을 보면 놀라게 된다.

Ⅴ. 이 일에 대한 에스라의 슬픔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우리는 그가 "여호와의 전으로" 올라가 겸비한 자세를 취했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았었고, 성전은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기에 합당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곧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가까이에 있었던 경건하고 믿음이 깊은 백성들은 모두 그에게로 모였다. 그런데 그들에게 그곳으로 오라는 명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그들이 자진하여 왔던 것 같다(4절).

다음 사실을 유의해 두자.

1.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것은 선한 사람들의 특성이다. 그들은 그 계율의 권능과 엄격함과 진노의 의로우심을 두려워 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들을 "권고하실 것이다" (사 66:2).

2.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은 "사람의 죄로 인하여" 떨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율법이 파괴되고 그의 진노와 저주가 임하게 되기 때문이다.

3. 경건과 열심을 품고 죄를 대적하는 자들은 이와 비슷한 경우에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자기들과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킬 것이다(고후 9:2). 자기들이 직접 선한 일을 인도할 만한 신중성과 재능과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한 많은 자들은 그러한 자극을 받아 따라 나설 것이다.

4. 모든 선한 백성들은, 악과 불경함을 대적하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어나 행하는 자들을 지원해 주고 그들의 편이 되며, 그들의 손을 강하게 해줄 수 있는 일을 행해야 한다.

 

9:2 없음.

 

9:3 없음.

 

9:4 없음.

 

9:5

엄숙한 참회(에스라 9:5-15)

에스라가 이처럼 한 동안 기가 막혀 앉아 있을 동안 그가 마음 속으로 어떠한 묵상을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그가 드디어 "그 혀로 말했을" 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의해서 추론하는 짐작이다. 그리고 그는 이 때를 당하여 매우 열정적인 탄원을 하늘에 드리고 있음을 본다.

Ⅰ. 그가 이러한 탄원을 한 시간은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였다(5절). 그 때는 믿음이 깊은 사람들이 성전 뜰에 와서 제사를 드리고 그것과 동시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시간이었다. 에스라의 이런 고백을 들은 그들은, 그 백성들의 죄를 능히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 죄를 여태껏 별로 주시하지 않거나 또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기도가 말씀을 전파할 수도 있다. 제물, 특히 저녁 제사에 드리는 제물은(그리스도) 대 속죄 제물의 한 모형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어린이양은 이 세상의 저녁 때 친히 제물이 되시어 속죄하셨기" 때문이다. 에스라도 이러한 참회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께 말씀을 고했을 것이다. 그는 자기의 손으로 참회했다. 말하자면, 저 위대한 희생 제물의 머리에 의지하여 참회한 것이다. "우리도" 그 제물을 통해 "속함을 얻는다." 분명 에스라는 몇 년 전 저녁 제사 때에 다니엘에게 나타나 천사 가브리엘이 전했던 소식을 모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 소식은 메시야 왕에 대한 설명이었던 것이다(단 9:21, 24). 그리고 그가 이 시간을 택한 것은 그 사건을 마음에 두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Ⅱ. 이 청원을 위한 그의 준비를 보자.

1. 그는 "근심 중에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근심의 짐을 떨어 버리기 위해 하나님께 그의 마음을 들어 바치고자 했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아직도 고통 속에서 어지러운 영을 진정시켜 하나님과 교제할 준비를 갖추었다.

2. 그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하여 그는 겸손히 참회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리고 또한 그는 이제 백성들을 위한 중재자로서 긍휼을 구하는 청원자가 되었다.

3.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려는 자의 모습처럼, 그는 말하려는 것에 감동된 자로서 "손을 폈다." 그 손을 하나님께로 향하면서 은혜로운 답을 듣기를 매우 원하여 기다리는 자세를 취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하나님을 여호와로서, 그의 하나님으로서, 전능의 하나님으로서, 그리고 은혜의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다.

Ⅲ. 그가 고한 말의 내용을 보자. 그것은 기도라고 부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간구하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의 범위를 아주 넓혀 본다면, 기도는 경건함과 깊은 믿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납이다. 에스라도 매우 경건하고 헌신적인 마음가짐을 표명했다. 그가 여기에 진술해 놓은 내용은 그 자신의 죄에 대한(즉 그의 죄로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의 위험스러운 상황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의 죄에 대한 참회로서, 하나님의 영예와 이스라엘의 안녕을 위한 깊은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여기에 진정한 회개를 말해주는 생생한 그림이 있다. 이 탄원 속에서 그것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보자.

1. 그는 그 죄를 자백했고, 그 죄로 인한 괴로움을 말했다. 그것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의 마음에도 슬픔과 수치와 두려움을 주었다고 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그들은 깊이 사죄했다. 또한 비록 에스라 자신은 그 죄에서 완전히 결백했지만, 그 자신도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죄인들 속에(" 우리 죄," "우리 죄악") 집어 넣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아마도 그는 자기가 동포들을 따라 바벨론에 매우 오랫동안 머물렀던 일, 그리고 그 땅의 사람들로부터 떠날 수 있었을 때 즉시 떠나지 않았던 일을 이제 자기의 잘못으로 회상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악한 자의 사악함을 탄식할 때 우리 스스로에 대해 잘 반성해 보고 우리 마음을 정확하게 살펴본다면, 우리가 비록 그들과 같은 정도는 아니라 해도 역시 범죄할 수 있는 성품이 우리 안에도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두가 일반적으로 범했던 잘못을 여기에서 말하고 있다.

(1) 그는 그들의 죄가 매우 큰 것이었음을 시인했다. "우리의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나이다" (6절). "우리는 깊은 못과 같은 그 죄악에 빠져 멸망하려 하나이다." 죄악은 매우 널리 퍼지며 그 힘은 매우 강하고, 그 치명적인 결과는 무서운 것이다. "죄악이 우리 가운데 점점 높이 쌓여 하늘까지 닿았습니다. 그것은 감히 하늘에 닿을 정도로 뻔뻔스러웠고, 소돔의 죄악처럼 하늘에 복수를 청할 정도로 지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가 하늘에 미칠지라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으므로(시 36:5), 진심으로 참회하는 자는 위로를 받으리라.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풍성하도다."

(2) 그들의 죄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7절). "우리의 열조 때로부터 우리 죄가 심하였도다." 그는 그 선조들의 잘못된 본보기가 그들의 잘못을 변명해주기는커녕 더욱 가중시킨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똑같은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했어야 했도다. 타락은 더욱 심해져 그 뿌리가 깊이 박혔으므로, 그에 대한 처방을 탄원하기 시작 했도다. 그러나 이로써 우리의 죄악의 그릇은 이제 거의 다 차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나이다."

(3) 그들의 죄에 대해 내리시는 하나님의 크고 엄하신 심판이 그들을 매우 괴롭혔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우리가 칼에 죽으며 사로잡혔었나이다(7절).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돌아서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절구 속에서 짓이김을 당했을지라도 여전히 그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하고(잠 27:22)-그대로 행했나이다."

(4) 하나님께서 얼마 전에 그들에게 베푸셨던 그 자비가 그들의 죄악성을 가중시킨다. 에스라는 이 사실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8, 9절). 다음을 살펴보자.

[1] 긍휼을 베푼 시기-그것은 "이제 잠깐" 이었다. 즉 "그것은 우리가 자유롭게 된 지극히 잠시 후였고, 또 그 자유는 오래 지속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그들의 죄를 더욱 중한 죄가 되게 했다. 즉 그들이 아주 최근에 환난을 겪었고, 언제 다시 그런데 처할는지 알 수 없었던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방심할 수 있겠는가?

[2] 긍휼의 근원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는 사실이다. 바사 왕들은 그들에게 자유를 주는 도구 노릇을 했다. 그러나 에스라는 그것을 그들의 공적으로 생각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그의 너그러운 은혜로 돌렸다.

[3] 긍휼의 방향-그 긍휼로 인해 "그들의 굴레가 벗겨진" 것이 아니라, 바벨론에서도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표징을 그들이 얻게 되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간 남겨져 있었고, 바사왕의 호의로 그들이 겨우 원수의 후환을 피하게 되었다. 그리고 특히 그들에게는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 이 있었다. 즉(8절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전을" 세웠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를 정돈해 놓았고 성전 예배를 한결같은 방향으로 드리게 되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섬길 좋은 기회가 오면 그것은 우리에게 큰 즐거움이요, 은혜라고 생각해야 한다. 성전에서 떠나지 않은 안나처럼, "하나님의 전에 거하는 자들은 축복받을지어다." 은혜가 충만했던 그 안나는 "이것(성전)은 영원한 내 안식처로다" 라고 말했다.

[4] 이 모든 것의 결과. 그것은 그들의 눈을 뜨게 했고, 그들의 마음을 소생시켰다. 그것은 그들에게 큰 위안을 주었고, 아직도 속박을 당하고 있었으므로 더욱 분명하게 의식되었다. 그것은 죽은 자에게 삶을 넣어 주는 것과 같았다. 비록 단지 "조금 소성하게" 되었지만, 그들은 그 어느 것도 받을 자격이 없으며, 또 극히 작은 일이라도 앞으로 볼 큰 일의 전조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은 큰 은혜의 사건이었다. "이처럼 우리에게 친절을 베푸신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우리는 얼마나 배은망덕한가!" 라고 에스라는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놀라우신 은혜로 구원해 주시어 떠나게 했던 그 이방 민족들과 다시 어울려 죄를 짓는다는 것은 얼마나 마음이 더러운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사 은혜를 다시 베푸셨으므로 우리는 그 은혜가 계속되게 하기 위해서는 선을 행해야 한다. 그런데 바로 이런 때에 우리가 하나님을 분노케 해드리다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5) 분명히 밝혀져 있는 명령을 거역한다는 것은 더욱 큰 죄였다. "우리가 주의 계명을 배반하였나이다" (10절). 할례받지 않은 족속과 결합하지 않는 것이 야곱의 집안의 오랜 율법이었던 것 같다(창 34:14). 그러나 그것 외에도 하나님은 그런 결혼을 엄격히 금하셨다. 에스라는 그 계명을 다시 낭독하고 있다(11, 12절). 죄로 인해 죄가 드러나며, 죄와 그 죄가 범한 율법을 비교해 보면, 죄는 더욱 크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욱 분명한 명령이란 있을 수 없다. "너희 여자들은 저희 아들에게 주지 말고, 저희 딸들을 너희 아들을 위하여 데려오지 말라." 그 이유는 만일 그들이 이방 민족들과 섞이면, 그들 자신도 더렵혀지기 때문이었다. 이방은 더러운 땅이요, 그들은 거룩한 백성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이방 민족들과 스스로 구별되면, 그들은 영예롭고 안전케 될 수 있었다. 또 그들은 영원히 번창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 이처럼 이유가 분명한 명령을 어기며, 그들의 기본적인 율법을 역행한 것은, 하늘의 하나님을 매우 격노케 하는 일이었다.

(6) 그들의 죄로 인해 받은 징계는, "그들의 죄악보다 가벼운 형벌" 이었다. 그러므로 에스라는 그들이 아직도 옛날의 빚을 진 것으로 간주하였다. "오! 우리가 다시금 빚을 진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바로 고치시고 그처럼 온유하게 우리를 다루셨거늘, 이제 우리가 그의 은혜를 무시하고서 그의 은총을 방자함으로 갚는다는 말인가?" 하나님은 은혜롭고 인자하게 시온의 포로들에 대해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사 40:2)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에스라는 그들의 죄 속에 있는 매우 사악함을 참회하는 가운데, 비록 그 형벌이 매우 컸지만, 그들이 행한 악에 비하면 경하다는 사실을 시인하였다.

2. 그가 이러한 자백을 하고 있을 때, 그의 마음에는 깊은 믿음이 역사하고 있었다.

(1) 죄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그 자신을 매우 부끄러운 자로 여겼다. 그는 이처럼 말을 꺼냈다(6절).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겠나이다."

다음 사실을 유의하자.



[1] 죄는 부끄러운 것이다. 우리의 처음 조상도 금지된 과일을 먹은 이후 즉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2] 거룩한 슬픔과 마찬가지로 거룩한 부끄러움도 진실되고 순수한 회개에 있어서 필요한 요소이다.

[3]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죄악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리고 얼굴을 붉히지 않는 자들을 위해 우리 자신이 얼굴을 붉혀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매우 배은망덕하고 미련한 자들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깨끗케 하는" 것이다(고후 7:11).

[4] 회개하는 죄인들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려 올릴" 때처럼 그렇게 부끄럽고 낯이 뜨뜻한 적은 다시 없을 것이다. 우리 자신의 영예를 우리 스스로가 손상시켜 놓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인간 본연의 감정은, 우리가 잘못을 행했을 때 사람들의 낯을 대하는 것을 부끄럽게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예에 대한 아름다운 관심은 우리가 그의 얼굴을 대하는 것을 더욱 부끄럽게 만들 것이다. 어떤 세리는 기도하러 성전에 나아갈 때는 평시보다 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부끄러운 자로 여겼다(눅 18:13).

[5]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자세는 우리가 회개를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에스라는 "나의 하나님이여" 라는 말로 시작했으며, 잠시 후 다시 "나의 하나님" 이라 부르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보다 겸허해질 수 있고, 죄로 인하여 통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그의 계율과 그와 맺은 우리의 약속을 모두 범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회개하면 용서받으리라는 소망이 우리를 또한 격려해 준다. "이처럼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다." 계약의 조건을 우리는 불이행했지만, 그것 때문에 계약의 권리로 쫓겨나지 않는다는 믿음이다.



(2) 에스라는 매우 당황하여 말하고 있다(10절). "우리가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나로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나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멸망할 수밖에 없나이다." 죄책이 생기면 당혹도 생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수록 죄는 더욱 나쁘게 보인다. 또 죄를 지은 자의 상황은 난처하기 때문에 또한 당혹해진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바로 잡을 수 있는가?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방법을 택해야 하는가?

[1] 진실로 참회하는 자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게 된다. 우리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 거나 "하나님은 죄를 문책하지 않으실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와 우리 안에 있는 진리를 속이는 일이다." 또 우리는 참아주십시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갚겠나이다. 곧 "수천 마리의 수양" 이나 "장자를 우리의 대속물로" 드리겠나이다 하고 말하겠는가? 하나님은 이처럼 조롱당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가 지불 능력이 없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 소망도 없으니 될대로 되라" 하고 말하겠는가? 그것은 더욱 나쁜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2] 진실로 참회하는 자들은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서 에스라처럼, 그것을 가르쳐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이와 같이 말하라.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어리석게 행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죄인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호 14:2 참조).

(3) 그는 큰 두려움에서 말하고 있다(13, 14절).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돌이키도록 하시기 위해 형벌을 내리시고 우리를 구원하시어 하나님과 의무에 열중하도록 만드셨는데도,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일을 행하는 족속들과 연혼하고, 그들의 풍습을 배운다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우리를 모두 멸하시어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하시지 아니하니이까?" 큰 형벌을 받고 다시 큰 구원을 입고 난 후에도 죄에 빠지는 것, 그것도 다시 똑같은 죄에 빠지는 것보다 그 백성의 멸망을 알리는 더 확실하고 슬픈 전조는 없다. 어떠한 징계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려는 자들은, 버림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발견한 자가 헛되이 녹였도다" 라고 했던, 그 은처럼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되는 것이다.

(4) 그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매우 확신하면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진리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이 문제를 맡기기로 결심하고 있다(15절). "주는 의롭소이다. 그리고 지혜로우시며 공평하시고 선하시옵니다. 주는 우리에게 그릇 행하지도 않으실 것이며, 가혹하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 앞에서, 주의 발 아래 엎드려 우리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옵소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면서 우리를 도와달라거나 구해달라는 청을 하지도 않고서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범죄하였으며 주 앞에 엎드려 우리를 주의 긍휼에 맡기나이다. 주의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옵소서(삿 10:15).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으며 무슨 행동을 하겠습니까? 오직 우리를 심판하실 주께 간구할 뿐입니다" (욥 9:5). 이처럼 이 선한 자는 그의 근심을 하나님께 아뢰고 맡겼다.

 

9:6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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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5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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