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헤립의 침입(역대하 32:1-8)
Ⅰ. 산헤립은 히스기야의 왕국을 치려는 거대한 야욕을 품고 침입해 왔다. 이 산헤립은 그 후의 느브갓네살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 그 이웃나라에 매우 두려운 압제자로서 그들을 괴롭혀 왔다. 그는 그 이웃나라를 모두 파멸시켜 그 스스로 거대한 군주가 되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의 조상 살만에셀도 근래에 이스라엘 왕국의 주인이 되어 열 지파를 포로로 사로잡아 간 일이 있었다. 산헤립도 이와 같이 스스로 유다를 얻고자 했다. 교만하고 야망에 찬 자들은 온 세계를 손아귀에 넣으려 한다. 이 후에 "땅 위에 있는 왕들을" 지배하게 된 로마가 바로 이 시대에 로물루스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은 기억해둘 만한 일이다. 산헤립이 유다를 침입해 온 것은 유다가 믿음을 바로 잡아 모든 종교적인 제도를 재정비한 직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모든 충성된 일 후에 그가 유다로 들어왔다" (1절).
1. 유다가 개혁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침입해 들어와 그것을 이루지 못하게 교란시키지 않도록 해 준 것은 그 거룩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었다.2. 아마도 산헤립은 그 자신이 섬기는 우상을 파괴한 히스기야를 징벌하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히스기야가 행한 일을 불경스러운 것으로 보고 이제 그가 거룩한 보호를 벗어난 것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그는 히스기야를 쉽게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먹이로 여겼던 것이다.
3. 하나님은 그 자신이 마음을 바로 잡은 이 백성들을 위하여 강한 힘이 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이 때에 이러한 일을 명하셨을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이 영예를 얻고 또한 그들을 영예롭게 구원해 주시고자 그들에게 이러한 괴로움을 주셨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충성된 일 후에" 는, 아마도 이들이 완전한 평화를 누리며 아무도 이 거룩한 은총을 입은 백성들을 감히 괴롭히려 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그 후에 접한 소식은 적군이 엄청난 힘으로 침입해 와 그 나라를 온통 황폐하게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행하고 있는 동안에도 환난과 위험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에게 확신을 갖고 있는가를 시험하시고 그가 우리를 보살피고 계신다는 것을 증거하시기 위해 그러한 것들을 명하신다. 산헤립은 유다로 들어갔을 때 별 저항을 받지 않자, 이 모든 것이 그의 것이 되리라고 상상하게 되었다. 그는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취하리라" 생각하고는(1절) "예루살렘을 치고자" 했다(2절)(왕하 18:7, 13 참조).
Ⅱ. 히스기야는 그를 위협하는 이 폭풍우를 대처해 나가기 위해 신중한 준비를 해 두었다. 그는 어떻게 행해야 하며 어떤 방법을 택해야 하는가를 "방백들과 더불어 의논하였다" (3절). 그리고서 그는 다음과 같은 그들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즉
1. 그는 산헤립으로 하여금 그의 나라에서 물을 찾지 못하게 하거나(그렇게 되면 그의 군사들은 갈증으로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물이 모자라 군사들이 기운이 쇠하여져 싸우지 못하도록 그들에게 불리 환경을 만들어 놓도록 했다. 아무리 강한 군대라도 며칠간만 물이 부족하게 되면 건초 더미와도 같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즉시 "물의 근원" 과 "땅으로 흘러가는 시내를 막았다." 아마도 그들은 이 물줄기를 지하관으로 연결하여 성읍으로 돌렸을 것이다. 이것은 침입한 군사들을 멸하기 위해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전술이다.2. 성읍은 산헤립에게 뜨거운 환영을 보내기로 했다. 이것을 위해 그는 성을 중수하고 망대를 높이 쌓았으며 "병기" (난외에 있는 것과 같이 "칼" 이나 "창" 이었을 것이다)와 "방패" 를 많이 만들었고(5절) 또한 장관들을 정했다(6절). 이와 같이 그들의 안전을 위해서 알맞는 방법을 강구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하고는 그에게 의탁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은 준비를 갖추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도 또한 준비해야 한다.
Ⅲ. 히스기야는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이 환난 중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격려했다. 그는 그들을 광장으로 불러 모으고 "말로 위로하였다" (6절). 그는 이 침입이 잘 해결되리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죄의식으로 가득 차 믿음의 위로도 받지 못한 자였다. 나라 안에 위험이 닥쳤을 때 "그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과 같이 흔들렸었다" 고 하니 "그 백성들의 마음도 그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사 7:2).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의 아버지와는 달랐다. 그는 백성들과 특히 장관들에게 용기를 북돋우는 말을 들려주었으며, "말로 그들의 마음" 을 위로하였다.
1. 그는 그들의 두려움을 진정시키도록 노력했다.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라. 이 성읍이 포위되거나 항복하게 된다고 생각지 말고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이것을 견고히 지키도록 결심하라. 이 성읍을 잃게 되거나 적의 수중으로 함락되리라고 생각지 말라. 결코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군사들로 하여금 담대하고 용감하게 그들의 자리를 지키고, 그들의 무기를 잘 지니며, 용사답게 싸우도록 하라. 백성들도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격려케 하라. 앗수르 왕으로 인하여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하나님의 선지자도 위로했다. "앗수르 사람을 두려워 말라" 고 그들을 위로했다(사 10:24). 이 왕이 바로 그 선지자가 말한 자였던 것이다. 이제 "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나" (사 33:14), 의로운 자는 "높은 곳에 거하면서" (사 33:15, 16) 그들을 "두렵게 하여" 정복할 수 있는 방법을 "묵상하였다." (사 33:18 참조)2. 히스기야는 그들에게 믿음을 불어 넣어 그 두려움을 진정하고 극복시키고자 노력했다. "산헤립은 그를 좇는 온 무리를 가지고 있으나 우리와 함께 하는 자가 저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거늘 우리의 힘이 얼마나 더 하겠느냐? 우리의 적이 의지하는 것은 육신의 팔이지만 우리와 함께 하는 자는 여호와시다. 우리 하나님의 권능은 대적할 수 없으며, 그의 약속은 변함이 없다. 우리와 언약을 맺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실 것이다. 즉 그는 그들과 싸우는 우리를 도우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기꺼이 그들과 싸워 주실 것이다." 이 말은 그대로 행해졌다. 하나님 안에서 믿음의 확신을 지닌 자들은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학대자의 분노를 두려워 하는 자는 그의 창조주를 잊은 것이다" (사 51:12, 13). 아마도 히스기야는 이 의미를 좀더 상세히 말해 주었을 것이며 이에 백성들은 안심하게 되었을 것이다. 즉 그의 말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을 구원하실 권능을 베푸실 것을 확신하게 됨으로써 마음을 놓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종들과 병정들은 그의 말씀 가운데 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시거늘 어느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 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앗수르인의 멸망(역대하 32:9-23)
산헤립의 분노와 불경스러움, 히스기야의 기도, 그리고 예루살렘을 멸하려는 앗수르 군대로부터 구원된 이 이야기는 열왕기 하 18장과 19장에 이보다 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기록된 내용은 축약된 것이지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일을 보여 주고 있다.
Ⅰ. 교회의 적들은 불경하고 사악했다. 산헤립은 라기스를 포위한 많은 군사를 갖고 있었다(9절). 그러나 그는 히스기야가 예루살렘을 방비하고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을 견고히 지키도록 격려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을 공격하러 오기 전에 먼저 그의 신복과 편지를 보내어 히스기야와 그 백성들이 있는 성읍을 포위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1. 그는 유다 왕에 대한 큰 악의를 품고서 그의 신하들로 하여금 그에 대한 충성을 버리도록 종용했다. 그는 히스기야를 영예로운 일을 행한 자로 대우해 주지도 않았으며, 또한 그와의 원만한 관계를 제의하지도 않았다. 단지 그는 왕관을 쓴 자로서는 어울리지 않게 천하고 야비한 수단으로 백성들을 위협하고 그들이 히스기야를 버리도록 권했던 것이다. 그는 히스기야가 그의 신하를 속여 파멸시키고 그들을 배반하여 "굶주림과 목마름" 으로 죽게 할 자(11절)라고 묘사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히스기야가 산당과 단을 제하여 버림으로써(12절) 이미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게 한 큰 잘못을 범하였고, 백성들의 이익보다도 그들은 멸망케 할 권리에 손을 뻗치는 자라고 하였다(15절).2.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크게 모독했다.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예루살렘의 하나님" 이라 불리우고 있는데(19절),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장소를 택하시어 그의 이름을 놓으셨고 그 적들이 이곳을 위협하였으므로 이제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로 특별히 그들을 돌보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교만한 모독자는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신 위대한 여호와를 인간의 손으로 만든 열방 나라의 쓰레기 신들과 비교해 놓았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구원은 그들 자신의 숭배자를 구하는 힘에 지나지 않으며(19절), 이것은 마치 무한하고 영원한 성령이 한 개의 돌이나 나무조각과 같은 지혜와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는 열방의 신들이 그들의 백성을 돕지 못하고(13-15절) 그 자신이 열방의 신들을 이긴 것에 대해 자랑했다. 그는 "너희 하나님이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14절) 하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 신들보다 더 열등하여 그들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것처럼 "하물며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내겠느냐?" 고까지 말했다. 이처럼 그는 글로써(심사숙고 끝에 쓰여진 것이니 만큼 이 편지는 더욱 나쁜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의 이름이 마치 다른 열방의 신처럼 보잘 것 없고 공허한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이 비방했다(17절). 이러한 산헤립의 비방은 매우 지나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비방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로부터 무례함을 배운 그의 심복들은 그가 한 것보다 더욱 "여호와 하나님과 그 종 히스기야" 를 비방하였다(16절).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종을 비방하는 것에 대해서도 매우 진노하신다.
이 모든 것은 그 백성들을 두렵게 하여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소망을 버리게 하려는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즉 다윗의 적들도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시 3:2; 71:11)고 말하며 다윗에게서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없애려 했었다(시 6:1; 42:10). 그 성읍을 지키는 자들을 좌절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빼앗으려 했다. 사탄은 우리를 유혹할 때 하나님의 충만 가운데 있는 우리의 믿음을 파괴시키려고 한다. 그가 그것을 성공하기만 하면 그의 목표를 이루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는(눅 22:32) 한 우리는 견고히 설 수 있다.
Ⅱ. 교회의 친구들의 권익뿐만 아니라 의무가 나와 있으니, 그것으로 바로 환난의 날에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어 기도하는 것이다. 히스기야와 선지자 아사야는 그렇게 행했다(20절). 왕과 그 선지자가 이처럼 기도에 동참하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어떤 환난이 있는가? 위협당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기도하라.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를 입을 수 있고 그로부터 위안을 얻게 된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여기에서는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는 것" 이라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 속에서 하늘에 계신 그곳에서 인간의 자손들에게 눈을 돌리시고 그의 보좌를 마련하신 우리 아버지를 구하기 때문이다.
Ⅲ. 교회의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선하셨다. 그는 그의 적들이 아무리 세더라도 그들을 지배하실 수 있으며, 그의 친구들이 아무리 보잘 것 없더라도 그들을 구할 수 있다.
1. 하나님은 불경스러운 하나님의 적들을 치시는 것과(신 32:27) 마찬가지로 기도하는 그의 백성들의 편이 되어 주신다. 여기에서도 역시 그러했다.(1) 앗수르 군대가 한 천사의 칼에 의해 살해되었다. 특히 어느 누구의 칼로도 대항할 수 없었던 큰 용사와 대장과 장관들이 살해되었다. 하나님은 교만하게 방심하고 있는 자들을 수치스럽게 만드시는 것을 즐기신다. 탈굼의 해석에 의하면 주님의 말씀(즉 영생의 말씀)이 이 일을 위하여 가브리엘을 보내시어 유월절 밤에 벼락으로써 이 일을 행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애굽의 장사들이 죽음을 당한 것은 그 밤과 같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2) 이러한 모욕을 받은 앗수르 왕이 그 아들들의 칼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 몸에서 난 자들이 그를 칼로 죽였다" (21절). 그는 이처럼 굴욕당하고 난 후 살해당했다. 즉 먼저 수치를 겪고 그 다음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악은 죄인들을 좇는다. 그리고 그들이 한 가지 재앙을 모면했을 때 예측할 수 없는 또 다른 재앙을 가져다 준다.
2. 이 놀라운 일을 통하여
(1)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보호하신 자로서 영광받았다. 이처럼 그는 산헤립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모든 적국의 손에서" (22절) 예루살렘을 구하셨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구원은 그의 풍성한 자비로부터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그들을 보호하셨다." 즉 사면에서 지켜 주셨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인도하심으로써 지켜주시며, 그들이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를 알려 주신다. 그리하여 적이 그들에 대하여 계획하거나 행하는 것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신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보호해 주시는 이 놀라우신 능력을 보고서 "여러 사람이 예물을 가지고 여호와께 드렸다." 이것으로써 이방인들은 그의 은총을 탄원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적들은 그의 분노를 면하려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그들의 관심과 소망을 표하는 증거로서 그의 성전에 예물을 가지고 왔다.
(2) 히스기야는 하늘의 총애와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는 자로서 존대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히스기야에 대해 존경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로 "그에게 보물을 드렸다" (22, 23절).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적들은 잃게 되나 친구들은 얻게 된다.
히스기야의 죽음(역대하 32:24-33)
여기에서 히스기야에 대한 세 가지 일에 대해 언급하고 그의 이야기를 끝맺기로 하겠다.
Ⅰ. 그는 병을 얻으나 회복되었다(24절). 그의 병에 관한 이야기가 여기에는 간단히 언급되어 있으나 열왕기 하 20장에는 좀 더 자세히 설명되어져 있다. 그의 병은 치명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극한 상황에서 기도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그가 나을 것이라는 표징으로 해가 십도 물러가는 것을 보여 주셨다.
Ⅱ. 그는 죄를 지었으나 곧 그것을 뉘우쳤다. 이 내용에 관해서는 열왕기 하 20장 12절 이하에 더 상세히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열왕기에서 찾아 볼 수 없었던 그의 죄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여기에서 관찰할 수 있다.
1. 이 때에 바벨론 왕은 그에게 영예로운 사자를 보내어 그가 병에서 회복된 것을 축하했다. 그리고 "그 땅에서 나타난 이적" (31절), 즉 앗수르 군대를 멸한 것이나 해의 그림자가 십도 물러가도록 한 일에 대해 묻게 하였다. 그들의 적인 앗수르 사람들은 그들이 이길 수 있었을 그 싸움에서 어떻게 하여 패하게 되었는지를 물으러 온 것이었다. 또한 태양은 앗수르인의 신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태양이 히스기야에게 보여준 은총에 관하여 묻고 그들의 신인 태양이 영예롭게 한 히스기야에게 영광을 돌리고자 했다(31절). 이러한 이적들은 어리석고 경솔한 세상 사람들을 깨워 놀라게 했으며, 그들로 하여금 귀먹고 절뚝거리는 우상을 떠나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게 하였다. 이들은 그 이적들에 의해 매우 놀라긴 했으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 땅에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마 2:1, 2).2. 하나님은 히스기야를 시험하시기 위해 그를 두고 떠나셨다(31절). 하나님은 그의 전능하신 은혜의 힘으로 그 죄를 막으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슬기롭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 그의 연약함을 시험하셨다.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그의 마음 속에 있는 것, 즉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은혜 가운데 있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을(일반적인 히브리 사상대로) 알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그가 그의 거룩함을 자랑치 않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그의 부귀를 자랑하도록 내버려 두셨다. 우리는 스스로를 알고 우리의 연약함과 죄악을 깨달아, 자만이나 자신을 갖지 않고 스스로를 낮게 여겨 거룩한 은총에 의지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타락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그냥 버려두실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른다. "주여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3. 히스기야의 죄는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졌다" 는 것이었다(25절). 그는 하나님께서 여러 면으로 그를 영예롭게 해 주시고, 그의 이웃나라들이 그에게 선물함으로써 그를 영예롭게 한 것을 교만하게 받아들였다. 더욱이 이제 바벨론 왕까지도 사자를 보내어 그에게 아첨하고 그의 환심을 사려 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를 더욱 교만하게 만들었다. 히스기야가 우상들을 파괴했을 때 그는 그 자신을 우상화하기 시작했다. 훌륭한 자나 선한 자 그리고 유능한 자들은 그들 자신의 약점과 어리석음, 그리고 그들이 입고 있는 은총에 대한 의무를 좀 더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 스스로 높게 생각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교만을 없애시고 항상 겸손한 자가 되게 해 달라고 성실하게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4. 그의 죄를 더욱 가중시킨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좋은 보답을 못하고 그 은총마저도 그의 교만의 연료와 먹이로 만들었다는 점이었다(25절). "그는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으로부터 자비를 얻은 자들은 마땅히 그들이 받은 자비에 대하여 합당한 대가를 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은 분명 문책받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받은 만큼 보답할 수 없고 은혜를 갚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은총에 대한 시인으로 그것을 보답해야 한다. 내가 그렇게 받은 것을 "무엇으로 보답할꼬?" (시 116:12)
5. 히스기야는 이 죄로 해서 거룩한 진노를 입게 되었다. 비록 이것은 마음의 죄였고 그 겉으로 드러난 행동은 결백할 뿐만 아니라 정중하게까지 보였지만(그의 보물을 친구한테 보일 때에) 진노가 그와 그의 나라에 임하게 되었다(25절).교만은 다른 죄악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매우 미워하시는 죄이며 특히 그의 백성들의 교만을 더욱 미워하셨다. 그 자신을 드러내는 자는 낮게 여김을 받게 되며 교만을 꺾이우게 되는 섭리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6. 그는 이 죄에 대해 회개했다. "그는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쳤다."(1) 비록 하나님은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 그의 백성들을 죄악 속에 빠져 고통을 당하게 하실지라도, 그 속에 오랫동안 머물러 고통당하게 하시지는 않는다. 그들은 "완전히 쓰러지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2) 마음의 죄악은 그것이 비록 더 계속되지 않는다 해도 회개되어야 한다.
(3) 자기 겸비는 회개하는 일에 필요한 부분이다.
(4) 우리 스스로를 높이는 마음의 교만은 우리가 특별한 방법으로 스스로를 낮추어야 할 죄악이다.
(5) 백성들은 그들을 지배하는 죄악에 대해 슬퍼해야만 한다. 예루살렘 거민들도 히스기야와 함께 그들 스스로를 겸비케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그와 같이 범죄했음을 인정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들이 그 징벌을 함께 나누게 되리라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다윗이 그의 교만함으로 인하여 백성들을 계수하였을 때 그들 모두가 그의 죄로 인해서 징벌당하게 되었다.
7. 그들은 징벌을 모면했다. 즉 진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임하지 않았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나라가 화평했으며 진리가 보급되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회개가 하나님의 진노의 표징을 면케 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것을 연기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Ⅲ. 여기에서 우리는 히스기야에게 베풀어진 영예를 읽을 수 있다.
1. 히스기야는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영예를 얻었다. 그는 "부와 영광이 극하여" (27절) 그의 국고를 채웠고 풍부한 식량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그의 성읍을 요새화 했으며, 그가 바라는 것을 모두 이룰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저에게 재산을 심히 많이 주셨기" 때문이었다(29절). 그의 훌륭한 업적 중에서 그가 기혼의 물줄기를 돌린 것이 언급되어 있는데(30절), 이것은 산헤립이 침입했을 때에(3, 4절) 행해진 일이었다. 그 물줄기는 "옛물" (사 22:11)과 "윗못" (사 7:3)이라 부르는 곳으로 흐르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성읍의 큰 편의를 위해서 "아래못" (사 22:9)이라 불리우는 새 장소로 그 물을 모았다.또한 그가 대체로 "모든 일에 형통하였던" 것은 그의 일들이 선한 사업이기 때문이다.
2. 그는 죽었을 때 그의 업적에 대한 존경을 얻음으로써 영예롭게 되었다.(1) 선지자 이사야가 그의 생애와 통치에 대해 기록했고(23절), 그의 행적과 선한 일 혹은 경건한 믿음에 대해 기록했다. 이처럼 그의 행적이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기 위하여 기록되어 남겨 진다는 것은 영예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2) 백성들은 "그의 죽음에 존경함을 표했다" (33절). 그를 묘실 중 높은 곳에 장사했고, 아사 왕이 죽었을 때처럼 많이 분향했고-이 사실은 더욱 영예로운 일이다-요시야 왕이 죽었을 때처럼 크게 애도했다. 경건한 믿음이 인간의 양심 속에서 얼마나 영예롭게 드러나는가를 보라. 대부분의 백성들이 믿음을 올바로 잡는 왕들에게 진심으로 동조하지 않은 것이 염려스러웠지만, 그들은 그 왕들이 개혁한 업적을 찬미할 수밖에 없었고, 이 왕들에 대한 기억은 백성들 사이에서 칭송되었다. 살아 있는 동안 훌륭했던 자들이 죽어 그들에 대한 모든 아첨이 떠나고 대화가 끊어지게 되었을 때, 우리가 그들에게 갚아야 할 빚은 그들의 죽음을 영예롭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빚에 대한 응당한 보답은 다른 사람들로 이처럼 행하도록 격려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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