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시야의 살해(역대하 22:1-9)
우리는 여기에서 아하시야가 1년 남짓 통치를 한 사실에 대해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통치도 이전보다 조금도 더 개선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기간도 아주 긴 것이었다. 21장 17절에서는 여호아하스라 부르고 있으나, 여기에는 아하시야라 적혀 있다. 이것은 같은 이름으로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글자의 자리를 바꾸어 놓은 것뿐이다.
여기에 그가 다스리기 시작한 때의 나이가 42세였다고(2절) 기록되어 있다. 여호람이 죽은 나이는 단지 40세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아하시야는 그의 직계 후손이 될 수 없다. 또한 열왕기 하 8장 26절에는 "그가 왕위에 나아갈" 때의 나이가 22세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원문에는 "그는 42세의 아들이었다" 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혹자는 그의 어머니 아달랴의 나이가 42세였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녀 마음대로 그를 조종했고, 그는 그녀의 말대로 했으므로, 그러한 아하시야를 비난하기 위해서 그 어머니의 나이를 대신 집어 넣었다면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사실상 나라는 그녀가 다스렸으며, 아들은 왕이라는 명목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해설가들은 원본을 옮겨 적는 자들이 22세를 42세로 적어 놓고는 그것을 교정하지 않고 넘어가 이런 문제가 생겼을 것이라는 생각에 의견을 모으고 있다. 고대의 여러 번역판들이 이것을 22세로 해석하고 있다. 현재는 "정오표" 가 없이 인쇄되는 책이 거의 없다. 그러나 저자들도 그 책을 자기의 책이 아니라고 부인하지 않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인쇄된 책의 잘못을 저자의 책임으로 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공평한 독자들은 상식으로 혹은 그 이야기가 언급된 다른 부분과 서로 비교해 봄으로써 그것을 쉽게 교정하여 읽을 수 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될 것이다.
아하시야가 다스린 이야기는 간단히 두 구절(3, 4절)로 요약되어 있다. 그의 어머니와 그녀의 친족들이 그로 하여금 악한 일을 하도록 권고했고, 그것으로써 그는 파멸하게 되었다.
Ⅰ. 그는 악한 일을 행하였다. 그의 모든 형제들이 살해당할 때 그는 제일 어린 자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해 살아남아 왕위를 물려받긴 했지만-그의 아버지가 수치스럽게 장사될 때, "예루살렘 거민들은" 그에게 이것을 경고삼아 아버지의 길을 밟지 말고 그 자신과 나라를 위해 훌륭한 일을 행하기를 바라면서 그를 왕으로 삼았지만-그는 하나님과 사람들의 호의를 아랑곳하지 않고, "아합의 길로 행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3, 4절). 즉 그는 그들이 섬기는 그릇된 신들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다. 그것은 그가-박학한 패트릭(Patrick) 주교의 말대로-이 악마들의 중재로 최고의 수호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이 신들은 "가까이" 있고 "그렇게 높은 위엄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불멸의 하나님과 가멸의 인간의 "중간적 위치" 에 있는 신들이므로 "언제나 모든 것을 구할 수 있다" 고 생각했기 때문이니라. 즉 그들은 신성화된 영웅들이었다. 마치 도마의 교회가 성자와 천사를 숭배한 것처럼 이들도 그 신들을 섬겼다. 그것은 대단히 나쁜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를 바란다. 그들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를 바알 신들과 같은 신으로 간주했으며, 이 바알 신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큼 위대하고 선하신 신이라고 간주했다는 사실, 또 적어도 이스라엘 하나님이 엄히 금하셨던 일 곧 음탕하고 관능적인 태도로 숭배하는 단 한 가지 일에서만큼은 하나님보다 더욱 훌륭하게 예배자들을 격려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Ⅱ. 그의 어머니와 그녀의 친족들이 그렇게 행하도록 그를 유혹했기 때문이었다. "그 모친이 그를 꾀었고", 또 "그 아버지가 죽은 후에" 그렇게 하였다(4절).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 바로 아버지가 아하시야에게 우상 숭배를 시켰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었을 때, 아합의 집안은 그 아버지의 비참한 최후가 아들을 우상 숭배에서 떠나게 할까 걱정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애써서 그가 우상과 가까이 지내게 만들었고, 결국 그를 "그들 자신보다 일곱 배나" 더욱 "마귀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렸다. 젊은이들이 이 세상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 악한 조언을 해주는 것은 그들을 파멸시키는 것이다. 만일 아하시야가 자기의 훌륭한 할아버지 시대로부터 하나님의 지식을 가르치는 일로 유명했던 제사장이나 레위인, 혹은 방백들이나 재판자들의 말을 기뻐했었더라면 더 좋은 충고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합의 집이 그를 꾀었으므로, "그는 그들의 교도(敎導)를 좇고" 전적으로 그들에게 자신을 내어 맡김으로써 그들이 원하는 대로 행하였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지 않는 자들은 이처럼 스스로 타락하고 파멸한다.
Ⅲ. 그들의 충고는 그를 파멸시키는 것이었다. 결과가 그렇게 되었다. 우리에게 사악하게 행하도록 충고하는 자들은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우정을 가장하고서 우리의 비위를 맞추고 아첨하는 자들은, 진정 우리의 가장 나쁜 적이다. 청년을 타락시키는 자들은 결국 그들을 파멸로 이끈다. 그들이 아하시야를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는 이스라엘 왕 요람과 동행하도록 하여, 그를 아람 사람들의 칼로 인도한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 요람은 이 싸움에서 상처를 입게 되었다. 이 싸움은 그를 영예롭게 하지 못했다. 믿음의 일에 있어서 우리에게 그릇된 충고를 하는 자들은(우리가 그들을 소중히 여긴다면) 우리의 일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어리석은 조언자로 만드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들은 그를 이스라엘 왕 요람과 가까이 지나게 하여, 아합의 집이 파멸할 때 그도 그 파멸에 끌어 넣었다. 그는, 예후가 우상 숭배하는 가정에 하나님의 심판을 접하고 있던 바로 그 때에 요람을 방문하였으므로(6절), 그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7-9절).
1. 나쁜 친구. 곧 죄인들과 합세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를 보고 두려워하라. 도덕적으로 나쁜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파멸당할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바벨론에서", 곧 그 멸망의 집에서 "나오라" (계 18:4).2.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보고 인정하라. 그의 섭리는 아하시야로 하여금 바로 이 치명적인 때에 요람을 보러 오게 하여, 마치 올무에 걸린 자처럼 그와 함께 파멸당하게 하였다. 이것에 대해서는 열왕기 하 9장 27, 28절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또한 그가(여호람의 시체처럼 나봇의 포도밭에 내던져지지 않고 열하 9:26) 정중히 장사되었다는 것이 부가되어 있다. 그것은 그가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던" 선한 여호사밧의 아들(즉 손자)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이처럼 다윗, 그는 죽은 후에도 오래도록 영예롭게 기억되어졌으며, 그의 덕분에 이렇게 타락하고 보잘 것 없는 후손들까지도 존경을 받았다. "의로운 자는 길이 남아 축복받을 것이요, 사악한 자의 이름은 썩어 없어질 것이다."
왕위에 앉은 아달랴(역대하 22:10-12)
여기에 나온 내용은 전에 열왕기 하 11반 1절 이하에서 살펴본 것과 같다.
1. 사악한 한 여인이 다윗의 집을 멸하고 그 위에 자신의 보좌를 세우려 했다. 아달랴는 유다 집의 씨를 잔인하게 진멸하였다(10절). 아마 그녀는 자기 친족 중의 누구에게 왕위를 계승케 할 속셈이었을 것이다. 자기 집 식구들은 이스라엘에 갔다가 예후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그녀의 친족은 유다에 남아 있는 자가 있었을 것이다.2. 선한 한 여인으로 해서 그 집안이 근절되는 위기를 용하게 면할 수 있었다. 아하시아의 아들 가운데 한 살 된 아들이 죽음에서 구조되어, 여호야다 아내의 보살핌으로 살아 남았다(11, 12절). 그것은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를 위해 등불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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