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역대하 13장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13:1

유다 왕 아비야의 즉위(역대하 13:1-12)

아비야의 어머니는 마아가라고 하는 압살롬의 딸이었다(대하 11:20).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엘의 딸, 미가야라고 한다. 그 여자는 아마 압살롬의 딸 다말에게서 난 그의 손녀이며, 그녀의 직계 아버지는 여기서 말하는 대로 우리엘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삼하 14:27). 그러나 이런 문제보다 우리는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과의 전투장으로 나가는 아비야에게 주의를 기울여 보자.

Ⅰ. 하나님은 르호보암에게 허락치 않으셨으나(대하 11:4) 아비야에게는 여로보암과 개전하도록 승낙하셨다.

1. 이때는 아마 여로보암은 침략자였을 것이고, 아비야가 행한 것은 부득이한 자기 방어였을 것이다. 르호보암보다 오래 살았던 여로보암은 유다의 왕관은 잔존자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권리 주장을 하면서 이제 막 위에 오른 이 어린 왕에게서 적어도 왕권이나마 빼앗으려고 했을 것이다. 이 뻔뻔스런 주장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고 일어난 것은 아비야의 용맹이었고, 또 하나님도 그의 편이 되어주셨다.

2. 르호보암이 자기의 열 지파를 회복하고자 시도하였을 때에는 여로보암의 행동이 정당했고, 따라서 르호보암에게는 다소 어려운 점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러나 이제는 여로보암의 인간된 모습, 곧 그가 송아지 우상을 세우고 제사장들을 축출한 것을 본 이상, 아비야에게 여로보암을 징벌할 수 있도록 허락이 내린 것이다. 또 아비야의 행동에는 그 이상의 의도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반하여 르호보암은 열 지파의 완전한 환원과 다름없는 일을 겨냥하였으니, 이 일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전쟁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Ⅱ. 여로보암의 군대는 아비야의 군대보다 수적으로 두 배였다(3절). 여로보암은 군대를 징벌할 지파가 열이었던 반면, 아비야에게는 두 지파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쌍방의 군대에 대해서는 이르기를, 저희는 "강대한 자요, 택함받는 자들이며 용맹한 자들" 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로보암의 군대가 80만명에 이른 반면 유다 군대는 단지 40만 명이었다. 그러나 수적으로 열세인 쪽이 승리자로 판명되었다. 전투란 꼭 강한 자에게 승리가 돌아가는 것도 아니며 다수가 항상 옳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Ⅲ. 아비야는 저들과 싸우기 전에, 비록 그들이 다윗 가문으로 귀속하지는 않더라도(이 문제는 하나님의 결정으로 해결된 것이었기에 그는 묵인하였다) 다윗 집안을 대적하여 전쟁하는 것만은 단념하라고 조리있게 따지며 설득하였다. 그는 저희가 "다윗 자손의 손으로 다스리는 여호와의 나라를 대적하지" 말고 최소한 저희가 그 가진 것에 만족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폭력을 사용하기 전에 이성(理性)을 사용해 보는 것은 좋은 일이다. 만약 의논으로 효과를 거둘 수 있다면 무력에 의해서 성사하는 것보다 더 낫다. 설득의 기술을 총동원하여 부닥쳐 보았으나 무위로 끝날 때까지는 폭력의 수단에 의존해서는 결코 안 된다. 전쟁은 ultima ratio regum-왕들의 최후 수단이 되어야 한다. 공명정대한 논리는 아주 많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동시에 많은 위해를 예방할 수 있다. 바른 말씀은 얼마나 위력이 있는지!

아비야는 군대를 이끌고 그들 나라의 한 가운데로 들어갔다. 왜냐하면 그는 이 연설을 에브라임 산중의 한 언덕 위에서 행했기 때문이다. 그 언덕 위에서 말을 하면 여로보암과 그 주요 장교들에도 아비야의 말이 들릴 수 있었고, 그들이 그 말에 동의한다면 조약을 맺기를 바랐을 것이다. 위대한 장수들은 그 부하의 사기를 높이기 위하여 병사들에게 연설을 하는 게 상례인데, 아비야의 이 연설은 그런 의도도 다소 띄고 있었지만, 주로 여로보암과 모든 이스라엘을 생각하여 한 말이었다. 아비야가 자기 부하들을 만족케 하고 그 대적들을 참회시키기 위하여 두 가지 사실을 밝히고자 했다.

1. 자기 편에도 정당한 권리, 즉(jus divinum) 신성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께서 나라를 다윗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주셨다(15절)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며 또 알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라들을 배정하실 때에 행하시는 통상적 방법인 일반 섭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소금 언약 곧 영원한 언약에 의해서 주셨던 것이며, 그 위에 소금을 뿌린 희생물의 언약에 의해 주신 것이다(패트릭 감독은 그렇게 주석한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내신 왕이요 하나님은 그의 가문에 왕권을 상속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초에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의 왕관을 취한 행위는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할 짓이었다. 그러나 아비야가 그것을 주안점으로 하여 지적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여로보암도 그 열 지파에 대하여는 하나님께로부터 허락 받았음을 아비야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유다 왕의 평화와 소유물을 교란시키려는 여로보암의 시도는 결코 변명할 여지가 없는 짓이었으니, 열 지파가 자기에게 허락되었을 때도 두 지파는 다윗의 집을 위해 남겨 두셨던 까닭이다.

아비야는 다음 사실을 지적했다.



(1) 여로보암이 처음 궐기하였을 때 그에게 많은 부정직과 사곡됨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로보암은 자기를 귀히 여겨 주던(왕상 11:28) "자기의 주(主)를 배반했다" (6절). 그리고 르호보암이 위기에 처해 있었을 때 야비하게도 그의 약점을 이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마땅히 자기 옛 주인께 감사하고 자기의 직위에 공정히 하는 의미에서, 르호보암을 대적하는 무리들의 두령이 되어 그를 먹이로서 삼키려 들기보다는 오히려 르호보암의 편에 서서 백성들이 그에게 충성을 바치게끔 조력했어야 마땅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일은 부당한 일이요 그런 행위로는 자기의 번영을 구할 수가 없었던 일이다.

여로보암을 지지하던 자들을 여기서는 "비류" 라고 했다(아마 이 말은 사사기 11장 3절에서 차용했을 것이다). 이들은 항구여일한 원칙을 가지고 행동하는 자들이 아니라 수시로 변하는 자들이었으며 벨리알의 자손들이었다. 그런 자들은 통치자가 멍에를 떨어버리고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행해줄 자들을 통치자로 삼고 싶어하는 자들이다.



(2) 여로보암이 현재 기도하고 있는 이 침략에는 많은 불경스런 점이 있음을 지적했다. 다윗 집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여호와의 나라를 대적하여" 싸우는 셈이기 때문이었다. 의인을 대적하는 자는 공의의 심판석에 앉아서 의로운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공할 가망이 전혀 없는 법이다. 정의가 한 때에는 최악의 길을 걷게 된다고 하더라도 최후에는 승리할 것이다.

2. 두 번째로 아비야가 밝히고자 한 일은, 하나님은 자기 편에서 계시다는 점이다. 아비야는 이것을 지극히 강조하였다. 곧 여로보암과 그의 군대가 믿는 종교는 거짓된 것이며 우상 숭배의 종교였으나, 자기와 그 백성들 즉 유다 사람들은 자기들 속에 살아 계시는 참 하나님을 순수하게 예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열왕기 15장 3절에 의하면) 아비야의 성격으로 보아 그 자신은 참된 신앙인이었던 것 같지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본문에서는 이 전쟁에서 아비야는 주로 자기 나라 종교 때문에 용기를 얻어 이 전쟁을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어쨌든 그는 우상 숭배자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혹은 그가 설사 산당과 우상을 묵과했다고 하더라도(대하 14:3, 5), 꾸준히 성전 예배를 유지했었다.

(2) 유다 왕국의 부패상이 어떠했든 간에, 저들의 종교상은 지금 저들이 싸우고 있는 이스라엘 왕국의 종교상보다는 더 나았다는 점이다.

(3) 경건의 힘을 부인하는 자들도 흔히 경건의 허세만을 자랑하기가 일쑤이다.

(4) 그가 변호하고 있었던 것은 자기 나라의 정당한 명분이었다. 비록 그 자신은 마땅히 해야 될 만치 선하지 못했으나, 유다에 있는 선한 사람들과 선한 일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 주실 것을 바랐기 때문이었다. 본인들은 경건한 종교심을 소유 못하면서도 타인이 가진 경건심을 소중하게 여기는 지각과 은혜를 받은 자도 많다. 아비야가 어떻게 다음 사실을 묘사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1]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 배신.

"너희는 아주 중다한 무리이다. 숫적으로 우리보다 아주 우세하다. 그러나 우리는 너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니, 너희는 너희 중에 스스로를 망치게 하기에 족한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너희는 송아지를 "너희의 신들로 삼고 있는데(8절), 그것은 너희를 보호하지도 도우지도 못하는 것이며, 그것으로 인해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 너희를 대적케 되리라. 그것들은 너희 진영의 괴로움이 되며 아간(수 7:23)이 되리라."

둘째로, 너희는 비천한 자들을 너희 제사장으로 삼고 있다(9절). 너희는 레위 지파를 쫓아 내고, 하나님께서 거룩한 일에 종사하라고 명하신 아론 자손을 추방하고, 우상을 섬기는 열방의 관습에 맞춰서 제사장 직분에 맞는 심정을 소유하고 성별된 일을 책임져야 할 제사장의 자리를 아무에게라도 내어 주며, "제사장직에 큰 먹칠을 할 만한 자를 제사장으로 삼고 있지 아니하냐?" 고 아비야는 말한다. 그러나 그런 자들이 제사장들이 되기에는 너무나 부적합한 자들이지만, 바로 "그들의" 제사장들이 되기에는 가장 적임자들이었다. 신이 아닌 신에게 제사장 아닌 제사장들보다 더 어울리는 것이 있으랴! 유유상종이다. 둘다 가짜요 사칭자들이다.



[2] 하나님께 대한 유다의 집착성. "그러나 우리에 대하여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았도다. 여호와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보호하실 능력이 있으신 분이며, 우리에게 성공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나니 이는 우리가 그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고 했다.

첫째, "안으로는 그 하나님의 성전에서,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있도다(10, 11절). 우리는 어떤 우상도 경배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이 명하신 제사장 외에는 제사장을 세우지 아니하였고, 그가 규정하신 것 외에는 어떤 예배 의식을 가지지 아니 하고 있다. 성전 예배와 성전 기구들은 모두 그가 명하신 대로이며, 우리는 그의 명을 지켜 더하지도 가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로 위안을 받으며 이러한 것을 지키기 위하여 이제 궐기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일반 세상의 이유로서도 더 나은 명분을 가지고 있다.

둘째, "여기 이 싸움터의 진영 안에서도, 그 하나님은 우리의 총수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확신할 수 있으니, 이는 우리가 그와 함께 하기 때문이로다" (12절).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표적으로서, 우리에게는 그의 제사장들이 함께 하고 있도다. 제사장들은 너희를 대적하는 증거로 율법에 따라 나팔을 불며, 전쟁의 날에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기억되어 우리 대적들에게서 구함을 얻으리라는 것을 우리께 보증하여 너희를 치는 나팔을 불린다. 이 거룩한 신호는 그런 목적을 위한 것이라고 민수기 10장 5절에서도 설명되고 있다. 사람들을 담대케 하여 사기를 불어 넣어 주는 데에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위해 하나님이 친히 싸워 주신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 그는 자기 대적들에게 "너희 열조의 하나님과 대적하여 싸우지 말라. 전능의 권세를 가진 하나님과 싸우려 드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며 네 열조의 하나님을 대적해 싸운다는 것은 반역인 동시에 비열한 배은망덕의 짓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번영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도다" 라고 바른 경고를 내렸다.

 

13:2 없음.

 

13:3 없음.

 

13:4 없음.

 

13:5 없음.

 

13:6 없음.

 

13:7 없음.

 

13:8 없음.

 

13:9 없음.

 

13:10 없음.

 

13:11 없음.

 

13:12 없음.

 

13:13

르호보암의 참패(역대하 13:13-22)

우리는 여로보암이 아비야의 연설에 대해 일언반구라도 대답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 아비야의 담화는 정당한 것이었으나, 여로보암은 그의 말에 주의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못들은 체했다. 그는 전쟁하러 온 것이지 논쟁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가장 긴 칼이 문제를 결정지을 일이지 더 나은 명분이 전쟁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정의와 신앙이 승리하였는지 못하였는지 그 결과를 살펴보자.

Ⅰ. 자기 전술에 의지하였던 여로보암은 참패하였다. 그는 사리를 온당하게 따질 줄은 도무지 몰랐으므로 결국 온당한 전투에 대처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여로보암이 아비야의 열변에 대해 혹독한 경멸감을 품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그는 "하나의 전략이 그 따위 연설 스무 개의 가치는 있다. 우리는 이제 곧 그의 모든 변론에 대한 답을 해 주겠다. 아비야는 곧 무수한 군대에게 압도당한 자신을 보게 될 것이며, 죽음의 기계가 사면 팔방으로 자기를 포위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도 자기 종교와 자기 왕위에 대한 권리를 자랑해 보라지" 하고 생각했다.

협상이 타결되고 있었으나(아마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 여로보암은 야비하여 그 기회를 이용하였다. 그는 협상하는 일면 모든 전쟁 관례에 어긋나게도 "유다의 배후에 복병을 매복시켰던 것" 이다. "종이 통치를 한다고 해서" 무슨 영예를 기대할 수 있겠으랴? 아비야는 "말로 화평을" 원했으나, "그들은 싸움을 원했다" (시 120:7).

Ⅱ. 아비야와 그 백성들은 저희 하나님을 신뢰하였으므로, 저희의 힘과 수의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정복자가 되었다.

1. 저들은 지독한 궁지에 몰리게 되어 큰 놀람을 당하였으니, "전투가 전면과 후면에 다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저희가 놀랄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승리하도록 지정된 자라도 잠깐 동안은 당혹과 고통에 휩쓸릴 수가 있다. 다윗의 경우가 그러했다. "저희가 나를 벌떼처럼 에워쌌나이다" (시 118:10-12).

2. 위험이 사면에 깔린 곤고한 때에 저희가 윗쪽이 아니면 어느 쪽을 향해 구원을 바라겠는가? 어떠한 원수라도(가장 강력한 자나 모사꾼도) 또 어떤 전략이나 매복도 우리에게서 하늘과 교통하는 것을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하늘로 향한 우리의 길은 항상 열려 있다.

(1) "그들은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14절). 우리는 저들이 이 전쟁에 임하기 전에도 그렇게 부르짖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저들이 당한 환란은 기도를 새로이 불러 일으켰고 하나님께 갈급히 구하도록 재촉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궁지로 몰기도 하신다. 그것은 저들로 하여금 "주께 부르짖는 것" 을 가르치고자 하심이다. 간절한 기도는 부르짖음이다.

(2) 그들은 "저희 열조의 하나님께 의지하였고", 자기들을 도와주실 그의 권능에 의존하여서 스스로를 하나님께 의탁하였다(18절). 믿음의 기도는 응답되는 기도이며, 우리로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 이다(요일 5:4).

(3)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계심을 보증함으로써 저희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나팔 소리는 전쟁의 신호를 알리는 소리였을 뿐만 아니라, 거룩한 소리이기도 하였다. 그 소리는 저희 믿음 속에 생명을 불어 넣었던 것이다.

(4) 그들은 승리를 자신하고 고함을 질렀다. "이 날은 우리의 승리의 날이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 기도의 부르짖음에다 저희는 믿음의 고함을 보태어 질렀으므로 정복자 이상 가는 자들이 되었던 것이다.

3. 이렇게 하여 저희는 완승을 거두었다. "유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기뻐 "소리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 과 그 군대를 너무나 큰 공포와 경악으로 "치셨으므로", 그들은 공격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모두 황급히 도망치고 말았다. 정복자들은 사정없이 공격하여 이스라엘의 정예병 50만 명을 칼로 베었으니(17절), 역사에서 우리가 여태껏 읽은 것 가운데 단일 전투 전사자로는 이에 능가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여호와의 전쟁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이같이 징벌하시면서 다윗의 집을 인정하시려 하셨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분열의 비참한 결과를 생각해 보라. 이스라엘인들이 물같이 흐르게 한 그 피는 같은 이스라엘인들의 피였고, 그러는 동안 저희 인근의 이방 민족들은 과거에 이스라엘의 이름만 들어도 공포를 느꼈던 자들인지라 "아하! 우리가 그렇게 하고자 원했었는데" 하고 부르짖었던 것이다.

4. 이 결과 이스라엘 자손은 비록 다윗가에 귀속되지는 않았다고 하나(하나님의 결정된 뜻이 만약 별다르지 않았더라면 그토록 격심한 타격으로 말미암아 저들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다윗가에 수복되고 말았을 터이었다) 그 당시로는 "굴복하였다" (18절).

많은 성읍들이 함락되었다. 특히 벧엘처럼 그 성들은 유다 왕들의 소유지로 남게 되었다(19절). 벧엘이 유다 왕의 부중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 있던 황금 송아지는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에게 언급이 없다. 그러나 아마 그것은 더 안전한 어떤 곳으로 옮겨졌다가 나중에는 사마리아로 갖다 놓았을 것이다(호 8:5). 그러나 예후 시대에는 벧엘에 금송아지가 있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왕하 10:29). 아마도 아비야는 그 금송아지를 파괴하는 권한이 있었을 때에도 그것을 없애지 않고 남겨 두었을 것 같다. 그 이유는 "그의 마음이" 하나님께 "온전하지 못하였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얻은 것을 하나님 영광을 위해 활용하지 않았던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상실하고 말았다.

끝으로, 정복자나 피정복자가 모두 오래지 아니하여 죽었다.

1. 여로보암은 패전 후 2, 3년 더 생존해 있었다고는 하나, 결코 회복되지 못하였다. 그는 "다시는 힘을" 회복할 수가 없었다(20절). 여호와께서는 그를 치시되, 그의 몸이 쇠약해지도록 하는 어떤 신체적 질병으로 치셨거나 아니면 우울증과 심적 고통으로 치셨을 것이다. 그의 마음은 좌절되었고, 자기의 패배에 대해 몹시 괴로와하면서, 아마 백발이 되었을 그는 슬픔을 안고 무덤으로 갔을 것이다. 그가 아비야의 칼날은 피했지만, 하나님이 그를 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칼은 피할 도리가 없다.

2. 아비야는 더욱 강성해졌다. 그가 이전에 가졌던 아내와 자녀의 수는 나타나지 않으나, 이제 그에겐 그 아내들을 모두 합쳐 열넷으로 늘었고, 그들에게서 38 자녀를 얻었다(21절). 전통에 화살을 가득 채운 자는 복이 있도다. 그는 자기 특유의 방식과 금언을 가졌으며 그것들은 그의 행복과 함께 그 당시의 역사에 기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22절). 그러나 그의 인생은 중도에 끊어지고 말았으니 승전 후 얼마 되지 아니하여 사망이 그 정복자를 정복해 버렸던 탓이다. 아마 그는 그의 승리로 인해 너무 자신만만해 있었던 고로 하나님께서 그 모든 존귀를 오래 누릴 만큼 오래 살려 두지는 않으려 하셨던 것이다.

 

13:14 없음.

 

13:15 없음.

 

13:16 없음.

 

13:17 없음.

 

13:18 없음.

 

13:19 없음.

 

13:20 없음.

 

13:21 없음.

 

13:22 없음.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