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역대상 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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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사탄의 격동(역대상 21:1-6)

우리는 백성들의 수를 헤아리는 것이 나쁜 일이라고 생각지 않을 것이다. 왜 목동이 양의 수를 몰라야 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이 보는 것과는 다르게 보고 계신다. 분명 다윗의 이 일은 그릇된 것이었으며,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마음에 교만을 품고 그 일을 행했기 때문이다. 교만한 것보다 하나님을 더욱 불쾌하게 하는 죄는 없다. 다윗의 죄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홀로 이에 대한 책망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Ⅰ. 이 일에 있어서 유혹자의 역할은 매우 적극적인 것이었다(1절).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그 일을 하게 했다. 사무엘하 24장 1절에는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다윗을 감동시키사" 그 일을 하게 하셨다고 적혀져 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은 인간의 죄악과 불의함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또 거기서도 인정되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죄악의 창시자가 아니라는 것, 즉 그는 "어느 인간도 유혹하지 않는다" 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다윗을 감동하사 그 일을 하게 하셨다는 것은, 여기에 암시된 대로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마귀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셨다는 뜻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악한 일이 어디에서 흘러들어 왔는가를 추적해 보기로 하자. 하나님과 모든 선함의 적인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였다" 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가 목표한 것은 힘을 약하게 하고, 수를 감소시키며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영광을 어둡게 하는 것이었으며,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그는 "사탄" 곧 철천지 "원수" 였다. 그러나 하나님을 열심히 따르던 다윗이 사탄의 영광을 받아 그릇된 일을 행하였다는 것은 잘 이해되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다윗과 같은 자들은 사악한 자들이 건드릴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성자들일지라도 하늘나라에 가기 전까지는 결코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이제 사탄이 이스라엘을 해하고자 했을 때, 어떤 방법을 택하였는가를 보자. 그는 "하나님을 격동하여(욥기 2장 3절에서와 같이) 그(다윗)를 치게 하지" 않았으나, 백성들의 가장 훌륭한 친구인 다윗을 격동시켜, 그들을 계수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여 그들을 대적하게 하였다. 다음을 명심하자.

1. 마귀는 하나님 앞에 우리를 고발하기보다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여 죄악을 짓도록 유혹함으로써 우리를 더 큰 불행에 빠뜨린다. 그는 아무도 멸하지 않으나 그들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를 멸하도록 만든다.

2. 사탄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행할 수 있는 가장 큰 악은 교회의 우두머리 된 자들로 하여금 교만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모든 사람 가운데 특히 교회를 다스리는 자들 가운데 이 죄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리라고는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라" (눅 22:26).

Ⅱ. 계수의 일을 맡은 자들은 그 일에서 매우 수동적이었다. 다윗이 이 일에 고용한 요압은 매우 적극적으로 공적인 일을 행한 자였으나, 이 일에 있어서는 완전히 강요당하였고 마지못해 행하였다.

1. 그는 이 일을 행하기 전에 항의를 하였다. 왕의 영예나 나라의 번영을 위해서는 그보다 더 용감히 나설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만은 변명을 하려했다. 왜냐하면

(1)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번성케 해주실 것을 약속하셨으므로, 그것이 과연 이행될 것인가는 의심할 필요조차 없었다. 또 백성들은 모두 다윗의 종이었고, 그에 대한 그들의 충성과 사랑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그들의 수효도 다윗이 바랄 수 있는 믿음직한 힘이 되고 있었다.

(2) 그것은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 일을 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죄에 물들지도 모르며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요압은 이것을 깨달았으나 다윗 자신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율법에 매우 밝은 자들이라고 해서, 언제나 그 율법들을 적용시키는 데 가장 빠른 통찰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2. 요압은 그 일을 다 마치기도 전에 싫증이 나버렸다. 왜냐하면 "요압이 왕의 명령을 밉게 여겼기" 때문이다(6절). 다윗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모든 백성이 다 기뻐하였었다" (삼하 3:36). 그러나 이제 이 명령들은 일반적으로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요압도 이 일을 좋게 여기지 않음을 분명히 나타내었다. 그래서 백성들의 수효는 사실상 매우 컸지만, 그는 그 일을 완전히 해두려는 마음도 없었기 때문에 중요한 두 지파인 레위 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계수하지 않았다(5, 6절). 그리고 그는 그 일을 하는 것을 달갑게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 다른 지파를 계수하는 것도 정확히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계수한 것과 사무엘하 24장 9절에서 계수한 수효가 다른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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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조사에 대한 징벌(역대상 21:7-17)

다윗은 이제 백성들을 계수한 일 때문에 징벌받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마음의 어리석음, 곧 교만의 어리석음을 바로 잡기 위한 징벌이었다. 그러면 이에 대해 간단히 살펴 보기로 하자.

Ⅰ. 어떻게 그가 징계를 받았는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들이 잘못을 행하였다면, 그들은 마땅히 그에 대한 벌을 받으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1. 그는 하나님께서 괘씸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다윗 같은 선한 사람에게는 이처럼 괴로운 일이 또 없었다(7절).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죄를 범하는 것을 살피시고는 언짢게 생각하셨다. 인간의 교만보다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죄악은 없으며, 하나님의 불쾌하심을 보는 것보다 은혜로운 영혼을 초라하게 하고 슬프게 하며 괴롭게 하는 것은 없다.

2. 그는 그가 싸움에 의해서 징계받을 것인지, 기근에 의해서 인지 혹은 온역에 의해서인지를 선택해야 했다. 즉 그는 이 세 가지 중 한 가지 방법으로 징계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윗을 좀더 겸손케 하기 위해서 이러한 커다란 곤경에 빠지게 하였으며,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를 신중히 생각하는 동안, 이 심판들은 그의 마음을 매우 두렵게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3. 그는 삽시간에 그의 백성 7만명이 온역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14절). 그는 그의 백성들의 수효가 증가하였다는 것을 듣고 교만했었지만, 이제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의 수효를 적게 만들었다. 우리들이 교만했을 때, 그 힘을 빼앗기고 약화되고 우리에게 재앙이 더하게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윗은 백성들의 수효를 부득이 알고자 했다. "그 수효를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이와는 다른 방법 즉 "그들을 칼에 붙여" 계수하려 하셨다(사 65:12). 다윗은 백성들의 또 다른 수효, 즉 죽은 자의 수효를 알게 되었으며, 이 계수는 그를 만족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매우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죽은 자를 계수한 암담한 명부였으며, 이제 이 수효는 그의 계수 명부에서 제하여져야 했다.

4. 그는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들고 예루살렘을 치려는 것을 보았다(16절). 그것은 하나님의 분노를 나타내며 다윗이 사랑하는 성읍을 멸해 버리겠다고 위협하는 표징이었으므로, 그는 매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온역으로 인해서 백성들이 가장 많이 거하던 곳은 아주 황폐해 버렸다. 하나님의 사자는 비록 평온하게 그리고 고마운 임무를 가지고 왔다 하더라도, 그를 보는 힘센 자들까지도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생명의 나무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그룹들의 칼처럼 번쩍이는 칼날을 손에 든 사자를 본다는 것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이었을까!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샀을 때, 우리가 다윗처럼 그 사자들을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사자들이 무장을 하고 우리를 치려할 것이다.

Ⅱ. 그는 이 징계를 어떻게 견디었는가.

1. 그는 그의 죄를 매우 회개하여 고백하였으며, 그것을 용서해 주시기를 열심히 간구했다(8절). 이제 그는 그 자신이 매우 큰 죄를 지었음을 그리고 매우 어리석은 일을 행하였음을 자백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이 그에 대한 징계를 받더라도 그 죄악을 거두어 주실 것을 간청하였다.

2. 그는 그의 죄악에 대한 형벌을 받아들였다. "당신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17절). 나는 그 징계에 복종하겠나이다. 죄를 지은 자는 나이니 오직 내게만 고통을 주소서. 내가 바로 그 죄악을 저지른 우두머리니 내게 그 칼날을 돌리소서."

3. 그는 그 자신을 하나님의 긍휼에 맡기었으며(비록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진노하고 계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조금도 그에 대한 불평을 갖지 않았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 어찌되든 간에 "그의 손에 빠지자" (13절). 선한 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얼굴을 찌푸리시더라도 그를 좋게 생각한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믿겠노라."

4. 그는 그의 백성들에게 대한 매우 큰 염려를 나타내었다. 자기 죄로 인해서 그들이 온역을 당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겼다. "이 양들이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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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난의 타작 마당(역대상 21:18-30)

우리는 여기에서 다윗이 회개함으로 하나님과의 화평을 얻게 되고 다툼이 끝나는 것을 보게 된다. "비록 나로 더불어 쟁론하더라도 그 진노를 거두어 주옵소서."

1. 징계가 멎게 되었다(15절). 다윗이 회개했을 때 하나님도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시어 멸하는 사자에게 "그의 손을 거두고 칼을 집에 꽂도록" 명하셨다(27절).

2.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제단을 세우라는 말씀이 다윗에게 내려졌다(18절). 그 사자는 선지자 갓으로 하여금 이 말씀을 다윗에게 전하도록 명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움을 행하려 했던 바로 그 사자가 이제 화해의 협정을 맺으려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자들은 재앙의 날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 사자가 직접 다윗에게 이 명을 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선지자의 직책을 영예롭게 하기 위하여, 갓을 택해 그 일을 하도록 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사자를 통해 요한에게 전달되었으며, 요한이 이것을 교회에 전하였다.

다윗에게 제단을 쌓으라고 명한 것은, 화해를 뜻하는 축복된 표징이었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이 그를 죽이기를 원하셨다면, 다윗의 손으로 바치는 제물을 용납치 않으실 것이므로, 그러한 명령도 하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3. 다윗은 즉시로 타작 마당을 매입하기 위해 오르난과 흥정하였다. 그것은 그가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면서 하나님을 섬기려 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오르난은 관대하게 그것을 무상으로 제공하려 하였는데, 그것은 오르난이 왕에게 공손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천사를 본" 때문이었다(20절). 그와 그의 아들들은 그 천사를 보고 그 찬란한 영광의 빛을 감히 쳐다볼 수 없었고, 또 그가 빼어든 칼을 매우 두려워하여 그들의 몸을 숨겼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깨닫고 그는 사죄를 위해 어떤 일이라도 기꺼이 할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충분히 깨달은 자들은, 믿음을 더하기 위해 그들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려 할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돌리기 위해 화해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할 것이다.

4. 하나님은 이 제단에서 드린 다윗의 제물을 받으셨다는 것을 입증해 주셨다. 즉 그는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응답하셨다" (26절). 하나님의 진노를 다윗에게서 거두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의당히 살랐어야 할 불이 제물 위에 내려 제물을 태웠다. 그로 해서 멸망의 칼은 다시 그 칼집에 꽂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와 저주를 짊어지시고 기꺼이 고난을 당하셨으며,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형벌의 불이 되시지 않고 화해하는 아버지가 되어 주셨다.

5. 그는 이 제단에 제물을 그 후에도 계속하여 드렸다. 모세가 만든 놋제단이 기브온에 있어(29절), 이스라엘의 모든 제물을 거기에 바쳐왔으나, 다윗은 사자의 칼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 갈 수가 없었다" (30절).

온역이 시작되었을 때, 이 일을 급히 서둘러야 했다. 아론도 염병이 시작되었을 때 빨리 가서, 아니 "뛰어가서" 속죄해야 했었다(민 16:46, 47). 그런데 다윗의 경우는 이 일이 너무도 긴급한 것이었으므로, 미처 기브온에 갈 시간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돌아오기도 전에 이 치명적인 타격이 가해질 것이 두려워 그는 예루살렘을 향해 칼을 빼어든 사자의 곁을 감히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너그럽게도 현재의 이 재난을 참작하시어 한 제단만 고수하라는 그 자신의 율법을 제하여 주시었고, 새로운 제단에다 제물을 바치는 것을 허락하시었다. 단일성은 단일성 그 자체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그 현재의 재난이 끝났을 때에도(분명 그랬을 것이다) 다윗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 기브온에도 제단이 계속 보존되어 있긴 했지만, 그가 쌓은 제단에 제물을 드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여기에 바쳐진 제물을 받으심으로써 그것들을 용납하신다는 것을 입증해 주셨기 때문이다(28절).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으로 그가 실재 우리의 일과 함께 하신다는 표징을 경험하였을 때는, 우리는 그 일을 계속하는 것이 좋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나를 은혜롭게 만나 주셨다. 그러므로 나는 계속 그와 만날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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