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열왕기하 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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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요시야의 경건한 통치(열왕기 하 22:1-10)

요시야에 관하여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사실들을 듣고 알게 된다.

Ⅰ. 그는 불과 8세의 어린 나이에 통치사기 시작했다(1절).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다. "네게 화로다! 어린 아이가 네 왕인 땅이여!" 영국에도 한 때 그런 어린아이였던 왕 에드워드 6세가 있었다. 어린아이였던 요시야는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서 아무런 나쁜 영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일찍부터 그들의 과오를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은총을 베푸사 그들로 하여금 경고를 삼도록 하셨다(겔 18:14 이하 참조).

Ⅱ.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 (2절). 하나님의 은총의 절대성을 보라-아버지는 죄 속에 살다가 멸망받았으나, 그 아들은 선택된 그릇이 되었다. 은총의 승리를 보라-요시야는 악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났고 좋은 교육도 좋은 모범도 받지 않았으며, 그의 주위에 많은 사람이 그에게 아버지의(악한) 발자취를 밟을 것을 조언했고, 거의 아무도 그에게 좋은 의견을 제시해 주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은총이 그를 뛰어난 성도로 만드셨다. 즉 "그를 돌감람나무에서 베어내어 참감람나무에다가 접붙였도다" (롬 9:24)고 하겠다. 그 같은 은총이 할 수 없이 어려운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그는 정직한 길로 행했다. 그리고(처음에는 잘 했으나 그렇지 못했던 그의 선조들 중 어떤 왕들같이)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았다. 양편에 모두 과오가 놓여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셨다. 즉 그는 미신이나 불경건에 빠지지 않았다.

Ⅲ. 그는 성전의 수리를 위하여 애썼다. 이 일은 그가 재위 18년에 했다(3절. 대하 34:8 과 비교하라). 역대하 34장 3절에 나타난 대로, 그는 훨씬 전부터 "여호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개혁사업이 서서히 진행되거나 많은 반대에 부딪칠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가 완전히 실권을 장악하기까지는, 자기가 계획하고 원하는 사업을 실행할 수 없었다. 어렸을 적에 우리가 불가피하게 잃어버린 시간을 생각하면, 우리가 나이 먹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사업을 훨씬 더 열성적으로 행해야겠다는 자극을 받게 된다. 우리가 늦게 시작했다면, 열심히 일할 필요가 있다.

그는 내무장관 사반을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보내어, 이 용도를 위하여 문지기가 수집한 돈을 계산하게 했다(4절). 그들은, 요아스가 취했던 방법(12:9)을 택하여 돈을 많이 지출했던 것 같다. 백성들은 한 번에 조금씩 헌금하여, 그 짐을 느낄 수 없을 만큼 가벼웠다. 그리고 그 기부는 자발적이었으므로, 아무런 불평을 사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모금된 돈은 성전 수리를 위하여 쓰라고 명령했다(5, 6절). 그러나 그 때 공인(工人)들이(요아스의 시대처럼) 자기들의 임무를 아주 성실히 다하였으므로, 그들에게 맡겨진 돈은 "계산해 보지 않았다" (7절). 그리고 분명 이 말은 공인들을 칭찬하는 구절일 것이다. 이렇듯 그들은 정직하다는 명성을 얻었는데, 그들을 고용한 자들은 무슨 칭찬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자기 아버지에게서 돈을 받고도 세어 보아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므로 "공인들에게 맡긴 돈을 계산" 해 보았더라도 그것이 잘못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야 남들도 그 공인들의 정직함을 수긍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Ⅳ. 다행히도 성전을 수리하는 중에 율법책이 발견되어 그것을 왕에게 가져갔다(8, 10절). 어떤 사람은, 이 책이 모세가 친히 가지고 있던 모세 오경의 원본이든가 아니면 친필 사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단지 퍽 오래되고 신빙성 있는 사본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책은 모세의 명령에 의하여 지성소에 보관되었던 것일 공산이 크다(신 31:24 이하).

1. 이 율법책을 분실한 후 찾아내지 못했었던 것 같다. 아마 그 책의 진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마치 어떤 사람이 성경을 집어 던지듯이) 부주의로 구석진 곳에다가 놓아 둔 후 그 사실을 잊게 되어, 결국 그곳에 그대로 있게 되었던 것 같다. 혹은 악의를 지닌 우상 숭배적 왕이나 그의 대리인에 의해서 고의적으로 숨겨졌을 것이다. 그들은 그 책을 불사르거나 파괴하고 싶어도 하나님의 섭리나 양심의 가책 때문에 못하고, 다시는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면서 묻어버렸을 것이다. 혹은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그 책을 아끼는 어떤 사람이 조심스럽게 그것을 보관하여, 원수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책을 보존하는 데 누가 도구로 쓰였든지,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이것이 그 당시에 존재했던 것 중 인증된 유일한 오경 사본이었고, 그 생명이(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너무나 어려운 고비를 넘겼으나 파멸 직전에 있었다면, 엘리의 법궤 때처럼 모든 선한 백성들의 마음은 그 성스런 보물로 인하여 두려워 떨었을 것 같다. 그리고 분명히 우리는 무릎을 꿇고 이 자비로운 섭리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힐기야 "그는 구하지 않았으나" (사 45:1), 그 자비로운 섭리가 그를 통하여 이 책을 찾아내셨기 때문이다. 만일 성경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에까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그만큼 관심을 두고 계신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 주는 것이다.

2. 이것이 당시에 유일한 인증된 사본이든 그렇지 않든, 그 속에 들어 있는 내용들은 왕 자신에게나 대제사장에게나 새로운 것이었던 것 같다. 왕이 그것을 읽고서 자기 옷을 찢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왕에게 율법의 사본을 쓰라고 했던 명령이나 매 7년마다 그 율법을 백성에게 읽어 주라고 했던 명령(신 17:18; 31:10, 11)은 오랫동안 준수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앙을 보존하는 제도적 방편이 무시되면, 신앙 자체까지도 곧 부패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반면에, 만일 율법책이 분실되었다면,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행함에 있어서 기준을 삼아야 될 법칙을 결정하는 일과, 그리고 제사장과 백성들이 그들의 종교 의식을 준수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일은 힘들었을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백성들은 모두 오늘날 우리들의 법전 요약집과 같은 율법 발췌문을 만들었던 것 같다. 제사장들이 율법책을 자세히 읽고 쓰려는 자들의 곤란을 덜기 위하여 그러한 발췌문을 만들어 그들에게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발췌문은 그들의 종교적 의식을 지도해 주는 일종의 의식법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제사장들이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생락했으며, 특히 하나님의 약속이나 경고는(레 26장; 신 28장 등) 그 발췌문에는 생략된 것 같다. 왜냐하면 바로 그러한 내용들이 요시야에게 너무나 큰 감동을 준 율법의 한 부분들이었고, 그러한 것이 그에게 새로운 내용이었다는 것을 주목할 수 있기 때문이다(13절). 성서에서 뽑은 어떠한 요약문, 발췌문, 혹은 선집물(물론 그런 것도 사용될 수는 있다)도 하나님의 지식과 뜻을 성서 자체만큼 실제로 그렇게 충실하게 전하고 보존할 수는 없다.

율법책이 백성들에게 그렇게 희귀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그렇게 타락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는 비전이 있는 백성은 망하지 않았다. 그들을 타락시키려고 애쓰던 자들은 필경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써서 그들의 손에서 그 책을 빼앗아 내려고 했을 것이다. 로마 교회도 성경 사용을 금지시키는 방법 외에는 우상의 사용을 지속시킬 도리가 없었다.

3. 그 율법책이 그렇게 시기 적절한 때에 나타나서, 요시야가 시작한 축복된 개혁 사업을 지도해 주고, 촉진시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또 요시야와 그의 백성들에게 좋은 것을 약속해 주는 징조이기도 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이 찬미 받고 존경받게 하고, 그들이 성경 지식을 많이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해서 자리를 쌓아 두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하나의 징표이다. 민중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했다는 사실은 로마 교회에서 떠나온 저 종교개혁의 영광이요, 장점이요, 기쁨이었다.

그들이 율법책을 발견한 것은, 그들이 성전을 수리하고 선한 사업을 하려고 했을 때였다는 사실을 주목할 수 있다. 자기들의 지식에 따라서 의무를 이행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지식도 증가될 것이다. 자진 자는 더욱 가지게 될 것이다. 율법책은 성전 수리에 대한 그들의 모든 수고와 내용에 해당하는 풍성한 보상이었다.

4. 제사장 힐기야는 그것을 발견하고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그는 사반에게 "오! 나와 기뻐하자. 내가 율법책을 찾았음이로다. e[urhka e[urhka-내가 찾았도다. 내가 찾았도다. 헤아릴 수 없을 값어치의 보물을!"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왕에게로 가져갔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왕관이 지닐 수 있는 가장 값진 보석이다. 왕 앞에서 율법서를 읽으라. 그러면, 그는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행하리라. 그리고 만일 그 왕이 다윗과 같다면, 그는 그 율법책을 사랑하고 그리고 환영할 것이다. 그것이 그의 기쁨이요 조언자가 될 것이다.

 

22:2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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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없음.

 

22:10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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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멸망 예언(열왕기 하 22:11-20)

여기에는 성전을 수리하는 것에 대한 기록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선한 사업은 계속 잘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 곳에서 발견된 율법책이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고 있으니, 그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것은 왕의 금고 속에 보관되어 있는 한 권의 고서처럼 그 희귀성 때문에 예찬되지 않고, 왕 앞에서 읽혀졌다. 성경을 연구하고 매일 성경과 대화하고, 성경의 빵을 먹고 성경의 빛에 의지해서 행하는 자가 진실로 성경을 영광되게 하는 자이다. 명예를 지니고 있는 사람과 사업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 최선의 명예요 사업이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

Ⅰ. 율법을 읽고 요시야가 받은 인상을 살펴 보자. 그는 자기 백성의 죄를 부끄러워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여 자기 옷을 찢었다. 그는 자기 나라의 형편이 약하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품어 왔다. 그것은 자기 나라 안에서 불경스러운 일과 우상 숭배를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율법을 읽고 났을 때까지는 그렇게 사정이 악한 것인 줄은 미처 몰랐다. 그가 옷을 찢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치욕을 돌린 사실 때문에 자기 마음을 찢는 것을 의미하며, 그가 자기 백성에게 닥칠 멸망을 알았다는 뜻이다.

Ⅱ. 이에 대하여 그가 하나님께 어떻게 했는가를 보자. "가서 여호와께 나를 위하여(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라" (13절)고 했다.

1. 그가 알기 원했던 것을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을 물어보라."

(1) "즉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가 우리의 죄로 받아야 할 심판을 막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면 어떤 길을 취해야 할지를." 죄와 하나님의 진노를 깨달으면, 우리는 이 물음을 묻게 된다. 즉 "우리가 어찌해야 구원을 받을 것인가? 무엇을 가지고 우리가 여호와 앞에 나아갈 것인가?" 만일 당신도 그렇게 물어야 한다면, 속히 물어보라. 너무 늦기 전에!

(2)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대비해야만 하는가?" 물어보라. 그는 "우리의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않았도다. 만일 이것이 의로운 법이라면 분명히 우리의 열조는 잘못됨이 많았으리라" 고 인정했다. 이리하여 "계명은 죄를 드러나게 하고" 밝혀 준다. 율법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그는 자기 백성의 죄가 이전에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더 많고 더 흉악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여기서 생각하기를, "우리에게 대하여 타오르는 진토가 크도다. 만일 의심할 여지 없이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분명히 그러한 것 같다-그는 그의 말씀에 진실하실 것이다-분명하시리다-그러면 우리는 모두 멸망받게 된다. 내가 그들을 본대로 나는 이제껏 율법의 경고가 이렇게 엄혹하고, 그 계약의 저주가 이토록 무서운 것인 줄은 몰랐노라. 이것들이 지금 우리를 고발하고 있다면, 지금은 우리를 돌보아야 할 때로다" 라고 했다. 하나님의 진노의 중(重)함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자들은, 그의 은혜를 얻으려고 안타까와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고 애쓰지 않을 수 없다. 치리자들은 자기 백성들의 안부를 물어야 하며 그들이 내다보고 있는 그 절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요시야가 이 질문을 사람을 시켜서 보냈다.

(1) 12절에서 이름이 기록되고, 14절에서 다시 나오는 그의 신하들 중 몇몇 요인들을 시켜서 보냈다. 그 신탁에 참예하는 데에 제일급의 신하들을 시킴으로써 그는 신탁에 대한 존중을 표했다.

(2) 여예언자 훌다에게 보내졌다(14절). 예언의 영-이것은 물론 그보다 "더 약한" 질그릇(여자) 속에 담겨지니, 이것은 "헤아릴 수 없는 그 능력이 하나님의 것임" (고후 4:7)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미리암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는 일을 도왔고(미 6:4) 드보라는 그들을 재판하였다. 그리고 여기의 훌다는 하나님의 영으로 그들을 훈육했고, 그녀가 부인이라는 점이 그녀의 여예언자직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모든 사람에게 결혼은 귀한 것이다" (히 13:4). 성경책이 희귀했던 때에, 그들에게 예언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예루살렘에 임한 자비였다. 그리고 그 후 예언이 멈추어졌을 때에는, 더욱 많은 성경책이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변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 세상을 증인이 없이 버려두신 적이 없다. 예레미야와 스바냐도 이 당시의 예언자였으나, 왕의 사자들은 훌다에게서 신탁을 받고자 했다. 아마도 그녀의 남편이 왕궁에 일자리를 가졌으므로(그는 의상 보관자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어떤 사람에 대해서보다도 더 그녀와 오래 전부터의 깊은 안면이 있었을 것이고, 그리고 그녀의 소명에 보다 큰 확신을 가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다른 사건의 경우에도 그녀에게 의견을 들었었고,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이미 경험했었을 것이다. 또 그녀는 예루살렘에 거했기 때문에 그들 가까이에 있었다. 그녀는 미스네라고 불리우는 곳에 있었고, 그것은 왕궁 다음가는 제2급 건물이었다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그녀는 부인네들, 곧 왕궁의 부인들 가운데서 예언했고-그녀 자신도 그들의 일원이었다고 한다. 아마 그 여인네들은 그 곳에서 방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왕실 구내에 여예언자가 있었고 그들이 그녀를 존경했다는 사실은, 그 궁정의 행복이다.

Ⅲ. 그 질문에 대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응답을 보자. 훌다는 아첨하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즉 "나의 미천한 섬김을 전하에게 전해 주시오. 이것이 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서 왕을 위하여 받은 메시지라는 것을 전해 주시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여예언자의 말투 그대로, 왕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한 위치에 있다는 식으로 말한다. 즉 "네게 나를 보낸 그 사람에게 말하라" 고 했다(15절). 비록 제왕들이 우리에게는 신적인 존재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에게는 인간에 불과하다. 또 그렇게 취급되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1. 그녀는 그로 하여금 하나님이 유다와 예루살렘을 위하여 준비한 심판이 무엇인지를 알려 준다(16, 17절). "나의 진노가 이 곳을 향하여 발하여질 것이다" 고 했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이 죄인들을 향하여 타오르고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다음 사실들을 살펴 볼 수 있다.



(1) 그 심판이 정도와 존속 기간. 그 불길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이미 선고가 공포되었다. 그것을 막으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예루살렘의 불의는 희생 제물이나 예물로도 일소되지 않을 것이다. 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이다.

(2) 그것은 다음과 관련이 있다.

[1] 그들의 죄와 관련이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고의적으로 죄를 범했다. 그리고 고의로 나의 노를 격발시켰다. 그 심판은 그들 자신이 일으킨 불이다. 그들은 나를 격발시키려고 했고, 그래서 마침내 나는 분노케 되었다."

[2] 하나님의 경고에 관련되어 있다. "내가 내릴 그 재앙은 유다의 왕이 읽은 그 책의 말씀에 따른 것이다. 그 성경 말씀이 그 재앙을 통해서 성취되어진다. 그 교훈에 구속(拘束)받기 원치 않는 자들은 그 법칙에 의해서 구속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듯이, 하나님 자신도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에게는 무서운 분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2. 그녀는 하나님께서 요시야를 위하여 어떤 자비를 예비하여 두었는지를 그에게 알려 준다.

(1)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나라를 위하여 그 왕이 지극히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었다. "네 마음이 연(軟)하다" 고 말했다(19절). 스스로 남과 구별되는 자들은 하나님까지도 구별하신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완악하게 되고,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졌다. 또한 그의 선임자들인 사악한 왕들도 그러했었다. 그러나 요시야의 마음은 부드러웠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감동을 받았고, 그것을 듣고 떨었고, 그리고 거기에 복종했다. 그는 그의 열조들과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린 치욕을 생각하고 심히 슬퍼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알았고, 그것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 심판을 면하려고 애썼다. 이것은 그의 마음이 부드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여호와 앞에서 겸비했다." 그가 옷을 찢었고(아마 그의 골방에서) 하나님 앞에서 울었다는 것은 이 경건한 마음의 발로이다. 그러나 은밀한 것을 보시는 하나님은 그 사건이 "그(하나님)의 앞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들었고, 뜨거운 마음으로 흘리는 그의 눈물을 모두 기억해 두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아주 두려워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그러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그 땅을 황폐케 하리라" 고 한 저 말씀들이 요시야에게 깊은 영향을 준 것 같다. 왜냐하면, 그가 "황폐와 저주에" 대한 말씀을 들었을 때, 즉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실 것이며 그들을 "악에게 내어 줄"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이렇게 되기까지는 아직 황폐되거나 저주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옷을 찢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경고를 마음에 깊이 새겼다.

(2) 그가 죽기까지는 재앙이 내리지 않으리라는 유예가 허락되었다(20절).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로 모이게 하겠다" 고 하셨다. 당시에도 성도들은 분명히 죽음 저 편의 행복에 대한 기대를 가졌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열조에게 모아진다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렇게 종종 약속의 내용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시야가 그 심판 자체를 막아 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약속하시기를, 그가 살아서는 그 심판을 보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리고(그가 40세가 되기 전에, 곧 한창 때에 죽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만일 그에게 풍성한 보상을 받을 다른 세계가 없었다면, 그런 사실은 그의 뛰어난 경건심에 대한 보잘 것 없는 보상에 불과했을 것이다(히 11:16). 의로운 자가 "장차 올 악에서 데려감을" 당하는 것은 그를 "평화로(저 세상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다(사 57:1, 2). 여기서 요시야에 약속된 것은 이것이다.

즉 "너는 평안히 네 무덤으로 갈 것이다." 이것은 그가 죽을 때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그는 전장에서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의 시기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가 죽은 것은 바벨론 포로 생활이 시작되기 얼마 전이었다. 포로 생활은 지극히 큰 어려움이었다. 이것과 비교할 때, 다른 모든 어려움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가 살아서 그 고생을 겪지 않았다는 것은 진실로 그가 평안히 죽은 것을 말해준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죽었다. 이 사랑과 은총은 죽음이란 사건이 없는 그런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그를 전장에서 죽지 않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의 성질을 변경시킬 수 있으며 또 그의 죽음 위에 함께 임하는 것이다.

 

22:12 없음.

 

22:13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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