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기야의 기도(열왕기 하 20:1-11)
열왕기를 쓴 역사가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산헤립이 삶의 기대에 부풀어 있다가 파멸되는 사건을 보여 주었는데, 여기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가운데서 기도한 히스기야가 구원받은 사건을 보여 준다. 산헤립의 생애는 단축되었고, 히스기야 생애는 연장되었다.
Ⅰ. 히스기야에게 병이 들었다. "그 날에" 즉 앗수르 왕이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바로 그 해에 있었던 일이다. 왜냐하면 히스기야는 모두 29년을 재위했는데, 15년은 더 살았으므로, 이 해는 그의 재위 14년째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18:13). 어떤 이는, 앗수르 군대가 그 성읍을 포위하고 있거나 혹은 포위를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던 바로 그 때였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6절) "내가 그 성읍을 보호하리라" 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약속은 후에 반복되었다. 즉 위험이 극도로 임박하게 되었을 때 그 약속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19:34). 다른 이들은 생각하기를, 산헤립의 패망 직후의 일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평안은 불확실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원수의 군대를 이기고 한창 승리하는 중에 히스기야가 병이 들었고, 죽음의 굴레 아래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떨리는 마음으로 기뻐하여야 한다.
종기 혹은 역병에 대하여 읽을 수 있기 때문에(7절), 히스기야는 역병에 걸렸던 것 같다. 앗수르 사람들을 죽이던 바로 그 질병이 그에게 침입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서 역병을 취하셔서 그의 원수들에게 주셨다. 위대함이나 선함도 쓰리고 치명적인 질병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줄 수는 없다. 어느 누구보다 하늘의 은혜를 입은 히스기야도 병들어 죽게 된다. 그것도 40세 이하의 한창 때에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까지도 그만한 나이 또는 2, 3년 어렸을 적에 죽었기 때문에, 이 병이 자기에게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히스기야는 더욱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삶 한가운데에 죽임이 있도다."
Ⅱ. 그에게는 자기의 죽음에 대하여 준비하라는 경고가 주어졌다. 그 경고는 이사야를 통해 전달되었다. 앞 장에서는 이사야가 두 번씩이나 히스기야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로 언급되었다. 우리는 예언자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 외에 다른 것을 전해 주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만족하든 혹은 불만족하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예언자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그의 병은 죽을 병이다. 그리고 그가 자비의 기적으로 회복되지 않는다면 분명히 죽게 될 것이다. 그래서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라고 말했다.2. 그러므로 그는 아주 신속히 죽음을 맞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너는 짐을 처리하라" 라고 말씀했다. 이런 일은 우리가 건강할 때에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겠지만, 우리가 병들었을 때에 재촉을 받는다. 참회하는 새로운 행위와 신앙과 또 하나님께 대한 신뢰로써 마음을 안정시키라. 그리고 이 세상과 즐거이 작별하고 다른 세상을 맞이하라. 그리고 만일 미리 해놓지 못했다면(이것이 최선의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너의 집을 정리하라. 너의 뜻을 정하라. 너의 재산을 정리하라.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로 너의 일들을 정리하라. 이는 너희 뒤에 올 자들의 편안함을 위해서이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그의 왕국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다만 그의 집에 대해서만 말한다. 다윗도, 예언자의 자격을 가지고, 자기를 이어 다스릴 자를 지명할 권위를 가졌지만, 다른 왕들은 자기 왕관을 그들의 소유물이나 재산처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었다.
Ⅲ. 이때 그는 기도하였다. "그는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고 했다(2절). 병든 자가 있는가? 기도하게 하라. 그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또 그 자신도 그것을 위해 기도하게 하라. 히스기야는 앞 장에서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지 않으며 신앙의 기도는 평안의 응답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살아 있는 한, 하나님을 찾을" 것이다. 기도가 응답되는 행복한 경험을 하면, 기도를 계속할 수 있는 약속과 용기를 얻게 된다. 그는 마음 속으로 죽음의 선고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운명이 역전될 수 있다면, 그것은 기도로써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려고 하시면, 그는 "이 일을 위해서, 간구하게 할 것이다" (겔 36:37). 우리가 만일 구하지 않거나 혹은 잘못 구한다면 얻지 못할 것이다. 만일 그 선고가 역전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기도는 역시 죽음에 대한 최선의 준비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로써 하나님의 은총과 힘을 얻어 우리의 생을 잘 마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음의 사실들을 관찰할 수 있다.
1. 이 기도자의 주위 형편을 살펴 보자.(1) 그는 침상에 누워서 "벽으로 얼굴을 향했다." 아마 은밀히 기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늘 하던 대로 자기 골방으로 물러갈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하여 그의 주위에 있는 무리들을 최대한으로 피했다. 우리는 우리가 은밀히 기도하거나 경의와 엄숙한 형식을 갖추어 예배하고 싶은데도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그렇다고 기도나 예배를 빠뜨릴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서 기도와 예배를 드려야 하는 법이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그는 얼굴을 성전으로 향하여 돌렸고, 그것은 그가 기도를 하려고 성전에 올라가기를 얼마나 원하였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다(19:1, 14). 그는 할 수 있다면 성전 안에서나 그곳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는가를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성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언제나 그를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리고 어떤 예배도 "그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2) 그는 "심히 울었다." 이 사실을 어떤 이는 그가 죽기 싫어한 것이라고 추단한다. 영과 육의 분리를 다소간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나 신약 성서의 성도들과는 달리, 구약 성서의 성도들은 그들에게는 저 세상이 음울하게만 보였다. 그러므로 이 세상 떠나기를 원치 않았다 할지라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경우에는 독특한 사정이 있었다. 즉 그는 한창 활동하고 있었고, 훌륭한 개혁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죽는다면 그 사업이 실패로 끝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또 어떤 이의 생각과 같이, 만일 이 사건이 앗수르 군의 격퇴에 앞서 있었다면, 그는 죽기를 싫어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의 왕국이 멸망 받을 위험의 직전에 있었고, 그 때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대를 이은 므낫세는 그 후 3년이 지나서 태어났다. 만일 그가 자식 없이 죽었다면 그의 왕국의 평화와 다윗과의 약속은 위태롭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 그것은 그의 안타까움을 표하는 눈물이며 그의 기도 속에 나타난 간절한 애착의 표현에 불과했던 것 같다. 야곱도 눈물로 간구했다. 우리의 복되신 구주께서도 기꺼이 죽으려 하긴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그리스도)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눈물로 크게 부르짖었다(히 5:7).
히스기야의 기도로 그의 눈물을 해석하자. "그" 기도 속에는, 속박이나 고통을 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란 일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2. 기도의 내용을 생각해 보자. "여호와여! 내가 진실로 주 앞에 행한 것을 기억하소서. 그리하여 나의 생명을 보존하여 나로 그 사업을 계속하게 하시든가, 혹은 나의 일이 마치면 주께서 이와 같이 행한 자들을 위하여 예비한 그 영광스런 곳으로 나를 영접하소서." 여기에서는 다음 사실들을 살펴 볼 수 있다.(1) 히스기야의 경건이 표현되어 있다. 그는 세상에서 정직한 의도를 가지고 "나는 주 앞에서, 마치 주의 눈 아래에서, 그리고 언제나 주를 바라보고 행하였다." 그리고 올바른 원리에 입각하여(" 진실로 그리고 진심으로"), 그리고 의로운 법칙으로-" 나는 주 보시기에 선한 것을 행하였나이다." -생활했던 것이다.
(2) 그 사실을 생각하면서 위안을 가졌다. 그 사실이 그의 병상을 편케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가 성실하게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사실이 우리의 양심을 증거해 준다면, 그것은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용기와 기쁨을 줄 것이다(고후 1:12).
(3) 그는 그 사실을 하나님께 겸손히 아뢰었다. "여호와여! 이제 그것을 기억하소서." 그러나 하나님께도 우리가 뭔가를 생각나게 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그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며, 만물을 알고 계신다). 혹은 거기에 대한 보상을 해 줄 책임이 하나님께 있어서,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요구할 수 있다는 듯이 말한 것도 아니다(자비와 은총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서만 바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맺은 계약의 조건으로서의 성실을 내세울 수 있다. 즉 "그것은 주의 손으로 친히 하신 역사이옵니다. 여호와여! 그것을 인정하소서" 라고. 히스기야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지 않았다. "여호와여! 나를 용서하소서. 혹은 여호와여! 나를 취하소서. 그리하여 주의 뜻을 이루소서." 오히려 그는 "여호와여! 나를 기억하소서. 내가 살든지, 죽든지 나를 주의 것이 되게 하소서." 라고 기도했다.
Ⅳ.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이 기도에 즉시 응답하셨다. 그 예언자가 궁정 가운데에도 이르기 전에, 히스기야에게 또 다른 메시지를 가지고 가라는 전갈을 받았다(4, 5절). 즉 그가 회복될 것을 알릴 메시지였다. 하나님께는 "예" 해 놓고 "아니오" 하는 것이 없다. 즉 그가 말한 것을 다시 취소하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해서는-그 기도는 하나님이 예지했던 바요 하나님 자신의 영이 그로 하여금 그럴 마음을 주셨던 기도이다-하나님께서 다른 때에는 하려하지 않으셨을 일을 히스기야를 위하여 하셨다. 하나님은 여기서 히스기야를 "내 백성의 주권자" 라고 부르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원하여 그의 생명을 잠시 동안 연장시킨다는 사실을 뜻한다. 왜냐하면, 전시에는 백성들이 그러한 주권자를 살려 둘 능력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 라고 부르셨다. 이것은, 그가 다윗과 맺은 계약 관계 때문에, 그리고 그가 항상 다윗을 위하여 한 등불을 명하겠다고 한 약속 때문에 그를 살리고자 하셨다는 것을 뜻한다.
이 응답에서 다음의 사실들을 생각할 수 있다.
1.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주시하셨고, 그 메시지에다가 그 기도를 언급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영광스럽게 하신 것이다. 그는 메시지에서 "내가 너의 기도를 들었고, 내가 너의 눈물을 보았도다" 라고 하셨다. 기도 생활을 많이 하고 기도를 특별히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특별히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다.2. 하나님은 그가 기도한 것 이상을 들어 주셨다. 그는 다만 하나님이 자기의 성실을 기억해 주시기를 빌었지만, 하나님은 다음의 것들을 약속하셨다.
(1) 그를 병에서 일으키시겠다는 약속이다. "내가 너를 낫게 하겠다" 고 말씀하셨다. 질병도 하나님이 부리는 종이다. 그들은 그가 보내는 곳으로 가며, 또 그가 송환할 때 온다(마 8:8, 9 절). "너를 치료한 자는 나 여호와니라" (출 15:26).
(2) 그가 감사 기도를 드리기 위해 "3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 갈" 만큼 급속히 건강을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마음을 아시되, 그가 얼마나 열렬히 하나님의 전에 거하기를 사모하며, 하나님의 영예가 머물렀던 그 곳을 얼마나 간절히 사모하는지를 아신다. 그리고 그가 회복되면, 즉시 공적 규례에 참여하러 가기 원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병들었을 때는 자기 얼굴을 성전 쪽으로 돌렸고, 그가 회복되었을 때는 성전으로 발걸음을 향하기 위했던 것이다. 다른 아무 것도 그를 보다 더 즐겁게 해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 영혼을 소생케 하소서. 그러면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리이다" 라고 하나님께 약속한다. 그리스도께서 고쳐 주신 그 사람도 그 후 곧 "성전에서 발견" 되었던 것이다(요 5:14).
(3) 그의 생명을 15년을 더 연장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렇다고 그가 노인이 되기까지 살리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14년 혹은 15년이 연장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살려고 기대했던 것 그 이상이었다. 그의 차용기간이 갱신되었다. 그는 그 기간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가 얼마나 오래 살리라는 것을 미리 예고 받는 사람은 일찍이 아무도 없었다. 틀림없이 이 선한 사람은 그 예고를 잘 선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혜롭게도 우리에게 우리의 생애 기간을 모르게 하셨으니 그것은 우리로 언제나 준비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4) 예루살렘을 앗수르 왕에게서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신다(6절). 히스기야의 마음은 자신의 건강 회복에만 집중되었으므로, 그 약속이 여기서 반복되어진다. 만일 이 사건이 포위 공격이 중지된 후에 있었던 일이라면, 산헤랍의 재규합을 두려워하는 공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려워말라. 내가 이 성을 보호하겠다" 고 말씀하신다.
Ⅴ. 그의 회복을 위하여 사용되었던 처방을 보자(7절). 이사야는 그의 의사였다. 그는 외과적 처방을 지시했다. 매우 값싸고 쉬운 일을 시켰다. 즉 "그 종처에 무화과 반죽을 놓으라. 그리하면 그 종처가 곪아 머리까지 퍼졌다가, 그 길로 사라지게 되리라" 고 했다. 이것은 그 치료에 무엇인가를 기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질병이 절정에 달했다가 갑작스레 멈추어졌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 치료는 하나의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여기서 다음 사실들을 주의하자.
1. 우리가 병들었을 때, 우리 몸의 건강을 회복시킬 수 있는 어떤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시험하는 것이 된다.2. 평범하고 일상적인 치료약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시어, 은혜롭게도 그러한 많은 것들이 인간에게 유용하도록 만드셨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약속은 축복이 되며 또 효력이 있다.
Ⅵ. 그의 신앙을 격려하는 표적이 주어졌다.
1. 히스기야는 한 표적을 요구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에 대한 어떤 불신에서거나 반신반의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약속된 내용이 지극히 위대한 일이므로 어떤 확인이 필요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며, 또한 표적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고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일은 하나님께 늘 있어 왔던 일상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아버지가 하나님께 표적 구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얼마나 노했었던가를 기억하고 있었다(사 8:10-12). 히스기야는, 그가 심판의 보좌에나 성문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게 될 그 표적이 무엇이니까?" 하고 물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그는 "시온의 딸의 문들에서" 자기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건강이 회복되기를 원했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 이외의 다른 목적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다.2. 해가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혹은 뒤로 물러갈 것인가 하는 것은 그가 선택해야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보여 주는 표적이었다. 그가 그 두 가지 중에서 더 힘든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선택했다 할지라도, 역시 그 표적은 그의 신앙을 더욱 확고히 해 주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예언자의 말은 아마 이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 또 내 아들들의 일과 내 손으로 한 일에 대하여 내게 부탁하라" (사 45:11). 태양의 변경 각도는 10도였고 그 제안이 있었던 때는 정오였다. 그리고 그 질문은, "해가 아침 7시에 그 자리에서 뒤로 물러 가게 할 것인가 아니면 저녁 5시에 그 자리에서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인가?" 였다.
3. 그는 태양이 10도 뒤로 물러 가기를 겸손히 원했다. 왜냐하면 어느 것이든 큰 기적일지라도 태양이 앞으로 나가는 것은 자연스런 방향이고, 뒤로 물러나는 것은 더 기이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히스기야의 "젊음의 날들의 되돌아 옴" 에 대하여 (욥 33:25), 그리고 그의 생명의 날의 연장에 대하여 그것이 더욱 의미 있기 때문이었다. 그 표적은 이사야의 기도에 따라서 이루어졌다(11절). 이사야는 하나님의 특별한 허락과 명령을 받아 "여호와께 간구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태양을 10도 물러가게 하셨다. 그리고 그 사건은 아하스의 일영표 위의 그림자가 뒤로 물러감으로써 히스기야에게도(그 표적이 그를 위하여 의도되었으므로) 보였다. 아마 침실 창문으로 그가 이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똑같은 현상이 다른 모든 일영표 위에서도, 심지어 바벨론에서도(대하 32:31) 관찰되었다. 이 태양의 역행 운동이 점진적으로 있었는지 혹은 급작스레 일어났는지, 또 앞으로 나아갈 때와 똑같은 속도로 뒤로 물러가서 하루를 평소보다 열 시간이나 더 길게 했는지, 혹은 그것이 갑자기 뒤로 물러갔다가 잠깐 동안 계속 된 뒤에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게 되어서 천체의 상태에는 전혀 변경이 없었는지(박식한 학자 패트릭 주교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것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 경이로운 사건은 하나님의 능력을 땅에서는 물론 하늘에서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도에 대하여 가지는 관심과, 자기의 선택받은 백성들에 대하여 품고 있는 큰 사랑을 나타낸 것이다. 이교도들의 가장 그럴 듯한 우상은 태양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로써 그것은 가장 터무니 없는 허위요 모순이라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왜냐하면 이로써 그들의 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제약을 받고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도수의 노래" (Songs of degrees: KJV에는 이렇게 표제가 붙어 있다-역주) 열 다섯편은(시 120편 이하) 태양이 뒤로 물러 갈 때의 일영표 위에 변경된 도수와 히스기야의 생명이 15년 간 연장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수금(竪琴)으로(사 38:20) 노래하도록 히스기야가 선정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라이트푸트는 이들 시편들 중의 많은 부분이 이스라엘의 고통과 구원, 그리고 히스기야의 질병과 회복을 의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히스기야의 경건과 죽음(열왕기 하 20:12-21)
여기에서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Ⅰ. 바벨론 왕의 한 신이 히스기야에게 와서 그의 회복을 축하했다(12절). 이때까지 바벨론의 왕들은 앗수르 왕들의 부속국의 대리자들에 불과했고, 니느웨가 그 왕성이었다. 우리는 바벨론이 앗수르 왕에게 예속된 사실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17:24). 그러나 바벨론 왕은 자립하기 시작했고, 점점 사태가 바뀌면서 앗수르가 바벨론 왕에게 예속되게까지 되었다. 이 바벨론 왕이 히스기야를 칭송하고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사신을 보냈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첫째는 종교적인 이유라고 볼 수 있다. 바벨론 사람들은 태양을 섬겼다. 그리고 그들의 신이 히스기야를 위하여 뒤로 물러가줌으로써 히스기야에게 어떤 명예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그들도 또한 그를 명예롭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늘의 총애를 입은 자들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2. 둘째는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만일 바벨론 왕이 앗수르 왕에 대한 반란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히스기야를 자기 편으로 끌어 넣는 것이 정책상 유리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하늘은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여, 그리고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앗수르 왕에게 그 치명상을 가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앗수르 군대가 약화된 것은, 히스기야와 그의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과 그렇게 특별한 관계를 가진 자보다 더 유력하고 가치 있는 동맹자를 만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그는 사신과 편지와 예물을 가지고 최대의 존경을 표하여 히스기야를 알현했다.
Ⅱ. 히스기야는 그 사절단을 친절히 환대했다(13절). 그들에게 정중하고 또 사절들에게 마땅한 경의로써 영접하는 것은 히스기야가 해야 할 의무였다. 그러나 그는 도에 지나쳤고, 너무 정중하여 실수를 범했다.
1. 그는 그들에게 지나친 호의를 보였다. 그는 "그들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우상 숭배자들이었지만, 그는 그들과 친밀하게 되었고, 그들의 주인인 왕과 동맹을 맺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을 모두 들어 주었다. 그는 정도 이상으로 개방적이고 후대했다. 조금도 경계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계약을 맺고 있는 그가 이방의 군주와 동맹을 맺으려, 혹은 그의 호평을 받으려고 그렇게 열성이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그렇게 고귀한 은혜를 베풀어 주었고, 본인은 그것으로 그렇게 즐거워했었는데, 이 사절이 무슨 영예를 그에게 더 해 주겠는가?2. 그는 지나치게 호의를 보여 그들에게 자기 궁전과 국고와 무기고를 보여 주었다. 그들은 그것을 보고서 그들의 임군에게 보고했을 것이다. 즉 그는 실제로 얼마나 위대한 왕이며 그들의 임군이 그에게 어떤 명예를 보내야 하는지를 보고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그들에게 성전과 율법책과 예배의식을 보여 주었다는 말은 전하여지지 않는다. 그렇게 했더라면 그는 그들을 참 종교로 개종시켰을지도 모르며, 그때야말로 그가 그런 행위를 할 가장 적절한 기회였었다. 그는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들을 모욕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저택의 값진 가구와 귀중품이 든 곳간과 앗수르 왕이 금고를 비운 이래로 그가 축적한 부, 곧 그의 "금은과 향료" 를 보여 주었다. 그는 직접 관리들을 시켜서 자기가 가진 모든 값나가는 것들을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것이야 무슨 해가 있겠는가? 한 나라의 부와 보물들을 손님에게 보여 주는 것, 즉 우리의 친구에게 우리의 짐과 가구와 정원과 마굿간과 그리고 도서관들을 보여 주는 것보다 더 후하고 솔직하게 행동하여지는 것이 있는가? 그러나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박수갈채를 받기 위해서 하거나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우리들 마음의 교만으로 그런 짓을 한다면, 그것은 히스기야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죄가 된다.
Ⅲ. 이 문제로 히스기야는 문책을 받게된다(14, 15절). 종종 위안자였던 이사야가 지금은 그의 견책자가 되었다. 복되신 성령께서도 두 가지 일을 하신다(요 16:7, 8). 경우에 따라서는 사역자들에게도 양면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사야는 말했다. 그러므로 그가 권위를 가진 자로 여겨 줄 것을 히스기야에게 요구했다. 그는 "이들은 누군가? 그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들의 직업은 무엇인가? 그들은 무엇을 보았는가?" 라고 물었다. 히스기야는(왜 당신이 관여하여 이 일에 대하여 내게 묻는가 라고 말하지 않고) 그 심문에 응했을 뿐만 아니라, 솔직한 고백을 했다. "나의 내패고(內 庫)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나이다" (16절)라고 대답했다. 왜 그는 그때 그들을 이사야에게 데려오지 않았는가? 왜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가장 귀중한 보물인 이사야를 그들에게 보여 주지 않았는가? 바로 그의 기도와 예언으로 그 모든 경이가 일어났으니, 그 사절단은 그러한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느냐고 묻게 되었을 것이 아닌가? 아마 히스기야는 자기가 곤경에 처해 있었을 때와 똑같은 가치를 지금도 이사야에게 돌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일 먼저 이들 사절들을 이사야에게 데려 옴으로써, 자기가 이사야를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더라면, 잘못된 처사를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Ⅳ. 그의 교만과 허영, 그리고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하여 그가 지나치게 관심을 가졌던 사실 때문에 그에게는 선고가 내려졌다. 그것도 그가 거룩한 일을 깊이 체험한지 불과 얼마 안 되는 때에 속된 일에 빠졌던 것이다. 그 선고는 다음과 같다(17, 18절).
1. 즉 그가 그렇게 자랑한 보물은 앞으로 약탈물이 될 것이며, 그의 가정도 모두 약탈당하고 말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믿고, 우리의 자랑거리로 삼는 것을 앗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처사이다.2. 그가 동맹을 맺고자 그토록 호의를 보였던 그 바벨론 왕이 그들을 포로로 잡아가는 원수가 되리라고 했다. 히스기야가 이러한 심판을 초래하게 된 것은 이 죄 때문만은 아니다. 므낫세의 죄, 그의 우상 숭배, 그리고 살인이 이 재앙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에서야 히스기야에게 예언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교만과 그가 바벨론 왕에 대하여 가졌던 가치는 어리석다는 것을 알려주고, 또 그러한 자기를 부끄러워하게 만든 것이다. 히스기야는 바벨론 왕의 왕성을 도와 앗수르 왕의 엄청난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에 기꺼이 협력코자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가슴에 품고 있는 뱀이 머지 않아 자기의 가슴을 쏠 것이며, 그의 왕의 후손들이 바벨론 왕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그 예언은 성취되었다. 단 1:1 이하).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히스기야에게 가장 큰 굴욕을 느끼게 만들었던 것이다. 바벨론을 좋아하는 자들은 바로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에게서 떠나오는" 자들이 지혜롭고 행복되다(계 8:4).
Ⅴ. 이 선고에 대한 히스기야의 겸손하고 참을성 있는 복종을 보자(19절). 그가 어떻게 이 선고에 스스로 복종하는지를 살펴 보라.
1. 그는 이러한 진리를 말하면서 그것을 수긍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은 선하시다. 심지어 이 위협적인 말조차 선하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말씀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씀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그는 선한 사람들에게 아무 피해도 의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하다. 즉 그는 그것에서 선을 가져오며, 그것을 미리 말씀해 주심으로써 나에게 선을 베풀었다." 우리는 모든 섭리에 대하여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다. 즉 모든 섭리는 선하고, 선을 이룰 것이라는 확신이다.2. 그는 그 말씀 속에 선한 것이 있음을 알았다. 즉 그가 그러한 재앙이 올 때까지 살아서 거기에 참여하게 되지 않을뿐더러, 그 재앙을 목격할 때까지 살지도 않으리라는 점이었다. 그는 악을 가장 선용한 자이다. 즉 "그것은 선하지 않은가? 그렇다. 그것은 분명히 선하다. 그리고 내가 받기에는 분에 넘치도다" 라고 말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의 사실들을 주의하자.
(1)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질책을 받을 때, 그 질책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선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들의 불의의 그 징계를 인정한다. 히스기야가 그랬다. 그리고 이것으로써 "그가 진정으로 자기 마음의 교만에 대하여 겸손하게" 되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2) 우리가 불행한 섭리 아래 있거나 혹은 공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어두운 전망을 예상하고 있을 때에도 언제든지, 우리는 우리에게 "불리한" 것은 물론 "유리한" 것도 식별해낼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써 하나님을 영예롭게 할 수 있을 것이고, 인내로서 우리의 평온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3) 공적인 일에 대해서도, "우리의 시대에 진리와 평화가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요, 또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1] 즉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만일 우리에게 평화와 진리가 있다면, 즉 우리가 참된 신앙을 고백하고 있고, 그 신앙을 간직하고 있고, 또 우리에게 성경과 사역자들이 있고, 또 그들을 평화로이 향유할 수 있고, 전쟁이나 핍박의 경보가 우리를 괴롭히고 있지만 않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2] 우리가 죽은 다음 어떤 곤경이 닥치더라도, 우리 시대에라도 만사가 잘 된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물론 그것은 후손들에 대하여 우리가 무관심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즉 재앙을 예견한다는 것은 하나의 고통이다. 그러나 심판의 연기는 일반적으로 큰 은혜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가 평안히 죽을 때까지 심판이 연기되는 것은 우리에게 특별한 은혜다. 왜냐하면 자비는 집안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그 심판을 견딜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심판이 오기 전에 안전히 하늘로 갈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좋게 생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히스기야의 생애와 그에 대한 이야기의 결말이 나와 있다(20, 21절). 역대하 29-32장에서는 열왕기 하에서 보다 히스기야의 개혁 사업에 대하여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일반 연대기에는, 그의 세력과 그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행한 훌륭한 공적들, 특히 그가 파이프를 통하여 그 도시에 물을 끌어들인 사업에 대한 많은 기록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물이 풍부하여 물을 얻으려고 싸우지 않으며 물을 길을 때에 궁술가들의 소란으로 위협을 받지 않으며, 우리 주변에서 편안히 물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총으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물의 부족은 큰 재난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 역사가(성경기자)는 그를 "그의 열조와 함께 잠들게" 하고, 아주 고약한 아들을 그의 왕좌에 대신 들어서게 한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은총을 물려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악한 아하스는 경건한 아비의 아들이고, 경건한 아들의 아비였다. 선한 통치자-분명 그랬다-가 있는 동안에도 개혁되지 않던 그 나라는 마침내 황폐하여지고, 악한 통치자에 의하여 멸망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선한 통치자가 개혁을 시도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멸절되는 것을 대단히 싫어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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