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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이사야를 찾아간 히스기야(열왕기 하 19:1-7)

랍사게의 말의 내용이 히스기야에게 전해지자, 그가 다음과 같이 했으리라고 기대할 것이다(랍사게도 그랬을 것이다). 즉 히스기야가 전쟁 자문회를 소집하고, 조건부 항복을 하는 것이 최선의 일인지 아닌지를 논의했을 것이라고. 성이 포위되기 전에 그가 "방백들과 용사들로 더불어 의논하였다" (대하 32:3).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의 최대의 위로는, 자기가 그 앞에 나아갈 수 있는 하나님이 있다는 점이다. 이 때에 히스기야와 그의 하나님 사이에 일어난 일의 기록이 있다.

Ⅰ. 히스기야는 랍사게의 모독적인 언사가 하나님께 가한 치욕을 깊이 우려했다. 그가 그 말을 들었을 때-간접적으로 전해들었지만-"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었다" 고 했다(1절). 훌륭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에 어떤 불명예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으면, 역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위대한 하나님의 명예에 침해되는 일에 동조하더라도 그것이 자기들에게는 아무런 비방거리도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왕의 옷이 너무 훌륭해서 찢어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욕을 당하고 자기의 예루살렘 성이 존폐의 위기에 당했을 때에라도, 왕의 육체는 너무 훌륭해서 굴욕적인 굵은 베 옷을 입을 수 없는 정도는 아니다.

하나님은 지금 바로 그런 것을 요구하셨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의 감동을 받지 않은 자들을 기뻐하지 않으셨다(사 22:12-14).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소를 잡고 양을 죽였다." 그러나 그 때는 "이상(異像)의 골짜기에 분요와 환난이 있던 날이었다" (사 22:5). 이 말씀은 바로 이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왕은 굵은 베옷을 입었지만, 많은 그의 신하들은 부드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Ⅱ. 그는 "여호와의 전에 올라갔다." 그것은 시편 기자의 본을 따른 것이다. 시편 기자는 그가 악한 자의 번성과 높아짐으로 탄식할 때,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고," 그리고 거기서 "그들의 마지막을 보았다" (시 73:17).

그도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명상하고 기도하였다. 그래서 그 동요는 지나가고 그의 정신의 안정은 돌아왔다. 그는 무슨 답변을 랍사게에게 할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단지 하나님에게 그 사실을 아뢰었을 뿐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대신하여 대답하소서." -허버트(Herbert). 여호와의 전에서 그는 휴식처와 피난처를 찾았다. 또 보물창고, 화약고, 회의실, 그리고 그가 필요한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었다. 교회의 원수들이 매우 대담하고 위협적일 때, 교회의 친구들은 하나님께 의지하고 호소하며 그들의 주장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요 또 의무이다.

Ⅲ. 그는 예언자 이사야에게 품위 있는 사절을 보냈었다. 그것은 그가 이사야에게 커다란 존중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그의 기도를 요구했다(2-4절). 엘리아킴과 셉나는 랍사게의 말을 들었던 자들 중의 두 사람으로써, 누구보다도 이사야에게 사건을 더 잘 알리고 감동시킬 수 있었다. 제사장들 중 연로한 자들은 환난의 때에 그 백성들을 위하여 스스로 기도해야 한다(욜 2:17). 그러나 그들은 이사야의 기도를 받으러 가야 했다. 왜냐하면 이사야는 그 누구보다 더 잘 기도할 수 있었고, 하늘과 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절들은 굵은 베옷을 입고 갔다. 그것은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은 왕을 대표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1. 그들이 이사야에게 간 목적은,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소서" 하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4절). 즉 유다를 위하여서였다. 유다는 10지파(이스라엘)가 멸망된 지금 야곱의 유일한 자손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위해서였다. 예루살렘은 성벽이 있는 유다의 모든 성읍이 빼앗긴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잔존 도성이었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우리가 환난을 당하고 있을 때에는, 우리의 친구들의 기도를 받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것은 또한 마땅히 바라야 한다. 기도를 받기 원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며, 기도를 영광되게 하고, 우리의 형제들을 영광되게 하는 것이다.

(2) 우리가 타인에게 기도를 바라는 동안은 우리 자신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히스기야는 이사야에게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사람을 보내고 나서, 그 자신도 기도하려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 갔다."

(3)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주는 자에게,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말씀드려 달라고 특별히 부탁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예언자이라.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다" (창 20:7). 위대한 예언자는 위대한 중재자이다.

(4)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는" 자, 즉 마음을 다 바쳐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을 이길 것이다.

(5) 하나님의 교회의 세력이 낮아져서, 소수의 친구들과 악한 자들만이 남았을 때는, "그 남은 자들을 위하여 우리가 기도를 드려야" 할 때이다.

2. 이사야는 두 가지를 기도해 달라고 부탁받았다.

(1) 그들이 원수를 두려워한다는 것이다(3절). "그는 거만하고 건방지다. 지금은 책망과 능욕을 받는 날이다. 우리는 멸시를 받고 있다. 하나님도 수치를 당하고 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지금은 환난의 날이다. 우리는 결코 그러한 왕과 왕국의 지배와 압제를 받은 적이 없다. 우리의 마음은 오만한 자의 경멸로 차고 넘친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비난하는 것을 듣는 것은 우리의 뼈 속의 칼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고 말한다. 또 설상가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구제할 방도와 이 치욕에서 벗어날 방도를 전혀 모르고 있다. 우리의 명분은 훌륭하다. 그리고 우리의 백성들은 신실하다. 그러나 우리는 수적으로 적에게 압도된다. 어린 아기가 출생하고 있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구원되어야 할 그 결정적인 시기이다. 원수에게 성공적으로 일격이 가해진다면, 우리의 소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도다. 해산할 힘이 없다. 여인이 진통으로 완전히 힘을 소비하면 해산할 기력을 잃어버리듯이, 우리의 처지가 바로 그런 슬픈 지경이다. 신속한 도움이 필요하도다(이것과 호세아 18장 13절을 비교해 보라). 우리는 멸망 직전에 있다. 만일 너희가 어떤 일이든 할 수 없다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우리를 도우라."

(2) 그들은 하나님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를 의지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나타나 주시기를 기다린다. 하나님께서 한 마디만 말씀하시면, 전세를 역전시킬 것이고 쓰러져 가는 남은 자를 구원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랍사게의 말을 꾸짖어만 준다면(즉 그들을 반증하기만 한다면, 4절)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 모독자가 죄를 깨닫도록 해 주시고 그를 당혹케 하신다면 만사는 잘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이 일을 하시리라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랍사게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난했으며," 하나님을 귀먹고 벙어리인 우상들과 같은 수준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문제가 잘 해결될 것이라고 능히 생각할 수 있었다. 그 까닭은, 이 문제가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오, 하나님이여! 일어나서 주의 원통을 푸소서" (시 74:22).

그들은 이사야에게 말한다. "그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다. 그는 너의 것이다. 너는 그의 영광에 관여되어 있다. 그리고 너는 그의 은총에 관계되어 있다. 그는 랍사게의 망령된 말을 듣고 아신다. 그러므로 그 말을 듣고 꾸짖을 것이다. 우리는 그가 그렇게 하길 바란다. 그의 앞에 그 사정을 아뢰는 너의 기도로 우리를 도우라.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만족할 것이다.

Ⅳ.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히스기야에게 전했다. 하나님은 앗수르를 멸망시켜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신다고 하는 점을 알리려는 것이다. 히스기야는, 많은 사람들이 하듯이(" 내가 회복된 것인가?" 등등) 그 사건에 관하여 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무를 다하려는 일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려고 사람을 이사야에게 보냈다. 그가 바랐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의무를 행하려는 그의 뜻에 보상하여 그 사건의 결과도 그에게 알려 주셨다(6, 7절).

1. 하나님 자신이 그 사건과 관련되어 있었다. "너희는 나를 망령되게 하였다."

2. 하나님은 대단히 낙심한 히스기야를 격려했다. "너희가 들은 말들로 인하여 두려워 말라." 그 말들은 단순히 말에 지나지 않는다(비록 과장되고 신랄한 말들이긴 하지만). 그리고 그 말들은 바람에 불과하다.

3. 하나님은 랍사게가 히스기야를 놀라게 한 것보다 더 앗수르 왕을 놀라게 하리라고 약속했다. "나는 그에게 한줄기 바람을 보내었다(그것은 앗수르의 군사를 살해할 역병을 내는 바람이다). 그리고 공포가 그를 사로잡아 그를 자기 나라로 몰아 갈 것이며, 거기에서 죽음이 그를 맞을 것이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이 짤막한 위협은 실행될 것이며, 그 때에는 랍사게의 입에서 나온 무력한 모든 협박들이 허공으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19:2 없음.

 

19:3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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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없음.

 

19:8

산헤립의 2차 사절단(열왕기 하 19:8-19)

랍사게는 메시지를 보내고, 아무 답변을 받지 못했다(그가 이 침묵을 승인으로 간주했는지 혹은 무시해 버리는 것으로 생각했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 앞에 있는 그의 군대들을 다른 장군들의 지휘에 맡기고 자신은 또 다른 명령을 받고자 그의 임군을 만나러 갔다. 그는 앗수르 왕이 립나를 포위하고 있는 사실을 알았다. 립나는 유다를 배반한 성읍이었다(8:22). 그가 라기스를 탈취했는지 않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어떤 이는, 그가 라기스를 취하는 일이 실행 불가능함을 알고 떠나갔다고 생각한다(8절). 그러나 그도 아랍 사람들과 변경을 접하고 있는 구스 왕이 대군을 이끌고 그를 대항하여 나오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놀랐다(9절). 이리하여 그는 아주 신속히 예루살렘을 얻고자 애썼다. 무력으로 예루살렘을 탈취하는 데는 필요 이상의 시간과 인원을 많이 희생하게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히스기야에게 순순히 예루살렘을 포기하라고 새로이 종용했다. 산헤립은 이전에 히스기야가 "당신이 내게 지우는 것을 내가 감당하리이다" 고 말했을 때에는 그를 퍽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18:14). 그래서 그는 다시 히스기야가 놀라 항복하기를 바랐으나 헛 일이었다.

Ⅰ. 산헤립은 히스기야로 예루살렘을 포기하도록 권고하기 위하여, 그를 조롱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불경스런 편지를 보냈다. 그로서는 그들이 끝까지 버티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편지는 랍사게의 말과 동일한 취지였다. 그 안에는 새로운 것이 전혀 제시되어 있지 않았다. 랍사게는 백성들에게 말했다.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18:29). 산헤립은 히스기야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너희는 네 하나님에게 속지 말라" (10절). 그들의 도움을 구할 야곱의 하나님을 모신 사람들과 그의 희망이 여호와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에게 속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자신들의 신에게 속을까 두려워한다.

산헤립은 히스기야를 놀라게 하며, 그의 닻에서 그를 몰아내기 위하여, 자신과 자신의 공적을 과장한다. 그가 무엇을 거만하게 뽐내는지 살펴보자.

1. 그는 땅을 정복했다고 했다(11절). "온 땅이" 완전히 파괴되었도다라고 했다. 그가 정복한 작은 언덕들이 큰 산에 이르기까지 부풀었도다. 당시의 그는 구스의 온 땅도 정복하지 못했고, 구스의 왕 디르하가를 두려워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우리는 오만한 사람들이 자찬하는 가운데서는 으레 엄청난 과장법을 보게 된다.

2. 그는 신들을 정복했다고 했다. "정복된 각 민족에게는 저마다 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 신들은 결코 그들을 구원할 수 없었다. 그 신들은 그들과 함께 넘어졌다. 그런데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하겠느냐?"

3. 그는 왕들을 정복했다고 했다(13절). 곧 "하맛 왕과 아르밧 왕" 을 정복했다. 그가 군왕에 대해서 말하든 우상에 대해서 말하든 그는 자기가 그 어느 것보다도 더 위대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는 가공할 만한 인물이란 것이다. 그리고 "산 자들의 땅에 있는 용사들의 두려움" 이었다는 것이다.

Ⅱ. 히스기야는 그 편지를 다른 한 편지 곧 기도와 신앙의 편지 속에다 동봉했다. 그리고 그것을 왕 중의 왕에게 보냈다. 그는 곧 신들의 심판자이시다. 히스기야는 비록 그 편지의 수신인 성명이 자기에게 합당한 칭호를 붙이지 않았을 것이 뻔하지만, 그 편지를 거절할 정도로 오만하지는 않았다. 또 그가 그 편지 받았을 때는, 그것을 읽지 않을 만큼 부주의하지도 않았다. 그가 그것을 읽고 났을 때는 똑같은 자극적인 말로 답장을 쓸 만큼 열정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곧 성전에 올라가서 "여호와 앞에 그 편지를 폈다" (14절). 그 편지를 하나님께 나타내 보이는 것이 필요해서가 아니라(하나님은 히스기야가 편지를 보이기 전에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아신다), 그로써 그가 매사에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원수가 입힌 상처를 악화시키기를 원치 않았고, 그것을 보다 더 치명적인 것으로 나타내고 싶어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오직 그러한 피해가 참 빛 안에 드러나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 그의 의로운 심판에 의뢰했다. 또한 그리하여 그는 성전에 가 기도에 전념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의무로 우리를 자극해 줄 온갖 도움이 필요하다.

히스기야가 이 편지에 대해서 했던 기도에 관하여 다음의 사실들을 생각할 수 있다.

1. 히스기야는 산헤립이 망령되이 했던(15절) 그 하나님을 경모하고, 그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그의 선택한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를 "그룹들 위에 계신 하나님" 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지상에 그의 영광이 거하는 선택된 장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헤립이 생각했던 것처럼, "이스라엘만의 하나님", 그리고 성전에 유폐된 하나님이 아니라, "온 땅의 하나님" 이라고 그에게 영광을 돌린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게 하소서. 주는 절대이신 여호와니다. 땅의 모든 나라의 보편적 주시요, 공의로운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는 하늘과 땅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의 창조자이시니, 주는 만물의 절대적 소유주요, 지배자이십니다."

2. 그는 산헤립의 오만과 불경성에 관하여 하나님께 호소한다(16절). "여호와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보소서. 여기에 그의 편지가 있나이다." 히스기야는 자기만 욕을 먹었다면, 그것을 간과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체면이 손상된 분은 바로 살아 계시고 질투하기는 하나님 자신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큰 이름을 위하여 무엇을 하시렵니까?"

3. 그는 산헤립이 이교도의 신들을 이긴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런 신들과 이스라엘 하나님을 구분한다(17, 18절). 산헤립은 과연 "그 신들을 불에 던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신들은 그들 자신과 그 예배자들을 도울 수 없었다. 그러므로 산헤립이 그것들을 파괴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산헤립 자신은 몰랐지만 그가 그들을 파괴한 것은, 사실상 이스라엘 하나님의 공의와 질투심에 봉사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방의 모든 신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 신들이 너무 강하여 하나님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속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이 손으로 만든 어떠한 신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친히 만물을 지으셨다(시 115:3, 4).

4.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산헤립을 격파하고, 그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도한다(19절). "그러므로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 만일 우리가 정복당하면, 다른 나라와 같이, 그들은 주를 정복당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주께서 스스로 구별되듯이, 우리를 구별하소서. 그리하여 주께서 여호와 하나님이시요, 자존하시고 지고의 하나님이시요, 그리고 주만이 유일하신 분임을 온 세상이 알게 하시고, 고백하게 하소서. 그리고 신을 가장하는 모든 것은 헛되고 거짓됨을 알게 하소서." 기도 중의 최고의 탄원 제목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드리는 탄원임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로 시작해서 "주께 영광이 깃드소서" 라고 끝맺는다.

 

19:9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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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된 산헤립의 몰락(열왕기 하 19:20-34)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여 준 은혜롭고 풍부한 답변이 나와 있다. 히스기야가 보냈던 바로 그 사람의 손으로(6, 7절) 다시 전달돼 온 메시지는 그의 기도에 충분한 응답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큰 위안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의 불변하는 사실로 그가 격려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은 거짓말 하실 수 없으시다" 는 사실 때문이다(히 6:18).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산헤립에 대(對)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음을 그에게 확인하셨다(20절).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고소하는 기도의 대상자들은 비참한 것이다 왜냐하면 압박당하는 자들이 압제자를 향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이기 때문이다(출 22:23). 하나님은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그 오른 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들으신다(시 20:6).

이 메시지는 두 가지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Ⅰ. 산헤립과 그의 군사는 혼란과 수치를 당한다. 그가 낮아지고 꺾여지리라고 예언되었다. 이사야 예언자는 산헤립의 말씨처럼 그에게 고상하게 말한다(사 10:5). "오, 앗수르인이여, 나의 진노의 막대기로다!" 이 메시지는 산헤립에게 보내진 것이 아니다. 그 사건의 결과로 인하여 그가 이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섭리자 하나님은 증인과 더불어 그에게 그것을 말하셨다. 아마 산헤립 자신의 마음이 이 사실을 자신에게 속삭여 주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당신의 분노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달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노를 발하며 진노하시기도" 하신다(시 2:5).

산헤립은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자로 표현되어 있다.

1. 예루살렘이 그를 경멸한다(21절). 그는 자기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처녀인 시온의 딸들의 두려움이라고 자부하고 있었고, 위협으로 그녀를 강제로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버지 집에 있어서 그의 보호를 받는 처녀는 너를 대항하고, 너를 멸시하고, 너를 비웃어 경멸한다. 너의 무력한 협박은 조소거리에 지니지 않는다. 하늘에 앉으신 그가 너를 비웃으신다. 그러므로 그의 그늘에 거하는 자도 그같이 하느니라."

하나님은 이 말로써 히스기야와 백성의 두려움을 진정시키려고 하였다. 육의 눈에는 원수가 방대하게 보였지만, 신앙의 눈에는 그들이 보잘 것 없이 보였다.

2. 하나님의 원수라고 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가 비참하게 될 충분한 조건이 된다. 히스기야는 이 점을 역설했다. "여호와여! 그가 주를 비방하였나이다" (16절).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그는 실로 그리했니라. 나도 그것을 내 자신에 항거하는 것으로 생각했다(22절). 저희가 누구를 비방했는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 아니냐? 그의 명예는 그에게 귀중한 것이요, 누가 그의 명예를 변호할 힘을 가지지 않았는가? 이교도의 신들은 그럴 능력이 없느니라." Nemo me impune lacesset-나를 노하게 하는 자는 반드시 벌을 받으리라!

3. 거만하고 자만심 강한 바보라고 표현되었다. 그는 크게 과장된 공허한 말을 지껄이고, 위협과 허세로써 여호와를 비방하며, 거짓 재능을 과시했다.

(1) 그는 자기의 공적을 분수 이상으로, 실제 이상으로 과장했다(23, 24절). "너는 이런 저런 것을 말했다." 이 사실은 그가 쓴 편지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친히 거기에 쓰여진 내용을 알고 계시며, 다른 곳에서, 아마 그의 회의나 군사들에게 행한 연설에서 말한 것도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히스기야에게 알려 주셨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의 자랑을 주목하시고, 그것들을 언젠가는 헤아리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발견하여 낮출 것이다" (욥 40:11). 산헤립은 자기가 얼마나 위대한 장수라고 생각했던가! 그는 가장 높은 산 꼭대기에 전차를 몰아 가고, 숲과 강을 뚫고 달리며, 모든 난관을 돌파하고, 자기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것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 것도 그의 앞에서 견딜 수 없으며, 물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언덕도 높아서 오르지 못할리 없겠고, 어떠한 나무도 그가 쓰러뜨릴 수 없을 만큼 강하지 않을 것이고, 어떤 강물도 말릴 수 없을 만큼 깊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마치 하나의 신적인 권능을 가진 자처럼 행동했다.

(2) 그는 그 위대한 일을 한 영광을 스스로에게 돌렸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여호와께서 하신 일" 이다(25, 26절). 산헤립은, 그의 편지에서, 히스기야도 그 사실을 들었다는 점을 역설했다(11절). "너희가 앗수르 왕이 행한 일을 들었도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회신은 하나님이 옛날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 즉 홍해를 말리고,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시고, 가나안에 정착시킨 일을 그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이것을 위하여 너희가 행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냐? 그리고 너희가 땅, 특히 유다 땅을 황량하게 한 일에 대하여는 너희가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 즉 단순한 연장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것을 이룬 자는 바로 나다. 내가 너희에게 힘을 주었고, 너희에게 성공을 주었고, 현재의 너희가 되게 하였고, 너희를 일으켜 견고한 성읍을 황폐케 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악을 벌하였고 "그로 인하여 그 거민은 약세에 몰렸도다." 그가 행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과 섭리 아래 된 일인데, 그가 자신을 하나님보다 높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과 대적하다니,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오만한 일인가! 산헤립의 허풍은 이사야 10장 13, 14절에 상세히 설명되었다. "나의 손의 힘으로 내가 그것을 행했다. 그리고 나의 지혜로……"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느냐?" 하는 것이 그들에 대한 대답이다. 수레바퀴 위의 파리가, "내가 먼지를 피우는구나!" 하고 말하는 것과 손에 들린 칼이 "내가 하는 것을 보라!" 하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불합당한 말이다. 되어지는 모든 일의 중심 동인(動因)이 하나님이시라면, 자랑이란 일체 부당한 것이다.

4. 그가 망령되게 말했던 바로 그 하나님의 견재와 견책을 받고 있다.

(1) 그의 모든 동작은 하나님의 인지(認知) 아래 있다(27절). "나는 너의 주거(住居)를 안다. 너가 비밀히 계획하고 도모하는 것, 들어오고 나가는 것, 전진과 후퇴, 나와 나의 백성에게 대한 너의 분노, 너의 열정의 동요, 네가 일으키는 잡음과 소요, 이 모든 것을 내가 안다" 는 것이다. 그것은 적의 동태를 알기 원했던 히스기야가 알고 있는 사항 이상의 것이다. 하나님의 눈이 그를 끊임없이 감찰하신다면, 이것에 대하여 무슨 부족이 있을까?(대하 16:9)

(2) 그의 모든 동작은 하나님의 관할 아래 있다(28절). "거대한 바다 짐승 같은 너의 코에다 내가 갈고리를 꿰고 거대한 악어 같은 너희 입에다 자갈을 먹이겠다. 나는 너를 제어하고, 너를 다스리고, 내가 원하는 길로 돌이키고, 너를 바보와 같은 인간으로 돌아가게 하겠고 re infecta-너의 목적을 좌절시키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원수들의 코에다 갈고리를 꿰고, 그 입에 자갈을 먹이고, 그들의 노(怒)를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되게 하고 봉사가 되게 하시며 그것을 기억치 못하게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은, 교회를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이리하여 그 도도한 물결은 조용해질 것이다."

Ⅱ. 히스기야와 그의 백성에게 구원과 기쁨이 있을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의 표시가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과 화해하셨다는 표시이다. 또 그의 노(怒)가 사라졌다는 표시이다(사 12:1). 그것은 그들의 눈에 놀라움(표적이란 때로 이것을 의미한다)이요, 선의 표지이며,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간직하셨던 보다 큰 자비의 보증이며, 모든 면에서 그들의 고통이 좋을 결말을 가져오리라는 증거였다.

1. 식량은 귀해지고 비쌌다. 그리고 식량 조달을 위해 그들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땅의 소산은 앗수르 군대가 다 먹어 버렸다(사 32:9, 10 이하). 이유는 그들이 그 땅에 거하며, 실제로 "양식을 공급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신다면, 그들을 굶어 죽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기근으로 죽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에 그들은 칼을 피할 것이다. "너희는 이 해에 절로 자란 것을 먹으라. 그러면 너희는 그것을 풍족히 얻을 것이다. 앗수르 사람들이 너희가 뿌린 것을 수확했느냐? 너희는 뿌리지 않은 것을 수확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해는 안식년이었다. 그때는 그 땅이 쉼을 얻는다. 그래서 경작을 할 수 없다. 그러면 그들은 그 해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러나 "여호와 이래" -여호와께서 공급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씨와 노동을 절약할 것이며, 그 해에는 또 땅이 절로 내는 소출이 그들을 부양하며, 기경하는 사람이 있기 전 땅이 소출을 내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해 줄 것이다(창 1:11).

2. 그 나라는 황폐되었고, 가정은 붕괴되고, 산산이 흩어졌고, 그리고 모든 것은 혼란되었다. 그러한 군대의 침략이 전국에 밀어 닥쳤을 때는 달리 또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에 대하여, "유다의 집을 피한 남은 자는" 다시 자기의 집에 즉 본토에서 정착되어, 뿌리를 내리고, 번성하고, 번영하리라는 약속을 받는다(30절).

그들의 번성함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보라. 그것은 뿌리를 내리고 과실을 맺고, 정주하여, 자신을 위하여 양식을 공급하며, 그리고 손님을 대접한다고 했다. 영혼의 번성함도 그렇다. 그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의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다.

3. 성읍이 폐쇄되고, 아무도 나오거나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 시온과 이스라엘에는 남은 자들이 자유로이 나다닐 것이며 그들을 막거나 위협할 자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31절). 도시나 시골 어디에나 큰 파괴가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나 도피한 남은 자들이 있어서,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받은 남은 자를 대표했다(로마서 9:27, 28 과 바로 이 사건을 말하는 이사야 10:22, 23 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스런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고 했다.

4. 앗수르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진격하고 있었고, 예루살렘은 잠깐 사이에 포위되어 그들의 수중에 떨어질 초미지급(焦眉之急)의 위험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워했던 그 포위에서 보호되리라고 약속되었다. 적군이 그 성읍 앞에 진을 쳤다 할지라도 결코 그 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며, 그 곳에 화살 하나도 쏘지 못할 것이다(32, 33절). 원수들은 수치를 당하고 물러가서, 수없이 자기 일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 자신이 그 성을 보호하는 일을 맡으셨다(34절). 그러니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는 그 사람들과 장소가 안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5. 하나님의 명예와 진리가 이 모든 일을 행하는 데 개입된다. 이것은 과연 위대한 일들이지만, 어떻게 실행될 것인가? 그러나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것을 할 것이다" (31절). 만군의 여호와이신 그는 모든 피조물을 그의 손짓으로 좌우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을 하실 수 있다. 그는 "예루살렘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신다" 고 했다(슥 1:14). 정숙한 처녀와 결혼한 남편이, 그 여자가 학대받는 것을 보면 참고 견디겠는가?(21절) "너희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런 큰 일들을 너희를 위하여 할만큼 가치가 없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의 열심이 그것을 행하실 것이다."

(1) 그의 열심은 자기 명예를 위한 것이다(34절). "내가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할터인데, 이는 내 이름을 영원히 빛내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는 그 이유들은 그 자신 안에서 나온다.

(2) 그의 열심은 자기의 진리를 위해서이다. "나는 내 종 다윗을 위하여 그 일을 행한다." 이것은 그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그와 맺은 약속과 그와 맺은 계약 즉 다윗에게 보장한 자비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구원은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 때문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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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수르 군대의 파멸(열왕기 하 19:35-37)

때때로 예언이 성취되고 약속이 실행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말이 나오자마자 곧 시행되어졌다.

Ⅰ. 앗수르의 군대는 완전히 패주하였다. 히스기야에게 이 메시지를 보낸 다음날 밤에, 적들은 곧 그 성읍 앞에 진을 치고, 참호를 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밤에 적군의 주력 부대가 그 장소에서 천사에 의해서 살육되었다(35절). 히스기야는 그들을 역습하고 그들의 진영을 공격할 만한 병력을 유지하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칼과 활로 그들을 살육하지 않으셨다. 그는 그의 천사 곧 파멸시키는 천사를, 한밤중에 보내어 그들을 강습케 했다. 그리고 그 파수병들은 그 천사를 볼 수도 저항 할 수도 없었다. 앗수르의 군대가 엎어진 것은 "용사의 칼이나 어떤 평범한 인간의 칼에 의해서" 가 아니었다. 즉 전혀 어떤 인간의 칼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애굽의 처음 난 자들을 살해했던 그러한 천사의 칼에 의해서였다(사 31:8). 조세푸스(Josephus)는 그것이 역병으로 인하여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다. 그 역병은 그들을 즉사케 했다. 살해된 숫자는 엄청나서 18만 5천 명이었다. 아마도 랍사게는 잔존자들 중에 끼였던 것 같다. 포위되었던 자들이 아침 새벽에 "일어났을 때는, 그들이 모두 죽은 시체들이 되었다." 그들 중에 생존자는 거의 한 사람도 없었다. 어떤 이는 시편 76편이 이 때에 씌어졌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보면, "마음이 강한 자는 탈취(奪取)를 당하여, 자기의 잠" 즉 마지막이고 긴 잠을 "잤도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시 75:5).

거룩한 천사들의 힘과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보라. 한 천사가 하룻 밤에 그렇게 큰 살육을 할 수가 있었다. 인간들 중에서는 최대로 강한 자라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연약한가를 보라. 그 누구가 하나님에게 대항하여 완악하게 행하고도 성공하였는가?

왕의 교만과 망령됨은 그의 군대의 파멸로 징벌된다. 이 모든 생명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시온의 안전을 위하여 희생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큰 집결이 이루어지기를 즉 "그들이 곡식단과 같이 타작 마당에 모아지기" 를 기다리셨다고 미가 예언자는 말한다(미 4:12, 13).

Ⅱ. 앗수르 왕은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그가 아무리 교만스럽게 자랑했지만, 그 후에는 자신을 대하기가 부끄럽게 되었고, 전쟁에 패하였고, 정복을 추구할 수도 없게 되었고, 자기의 병력(아마 이 때가 최강성기였을 것이다)도 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계속하여 자신이 그러한 타격을 받을까봐 두려워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하니라" 고 했다(36절). 즉 이 표현 방식은 그의 마음이 혼란에 빠져 심란해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산헤립)의 두 친아들" 의 손을 통하여 그를 살해하게 한 것은 그후 얼마되지 않은 때의 일이었다.

1. 마땅히 보호할 의무가 있는 아들들이 자기들의 친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은 매우 악한 짓이다. 얼마나 극악한 무리들인가!

2.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우셨다. 아버지가 자기를 지은 하나님께 거역할 때, 그 자식들이 또한 그 아버지를 거역하도록 허용되는 것은 정당한 귀결이다. 자기 자녀들이 불효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당신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는 것과, 그러므로 당신은 마땅히 예배되어야 할 분이심을 산헤립에게 충분히 보여 주셨다. 그러나 그는 우상 섬기는 일을 계속 고집했다. 그리고 불가항력적인 하나님께 대항하여 자기의 거짓 우상에게서 보호받기를 구했다. 그는 우상 숭배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주는 명백하고 값비싼 대가를 치른 증거를 보고도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정당하게도 그의 피가 희생 제물의 피에 혼합된 것이다. 그를 살해한 아들들은 도피했고 아무도 그들을 추적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그의 신하들도 그러한 오만한 자의 통치에 싫증을 느끼고, 그들 자신도 그를 제거하려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그리고 패트릭(Patrick) 주교가 제의하는 바와 같이, 산헤립 왕이 자기 신에게 그 아들들을 산 제물로 바칠 것을 맹세했었음이 사실이라면, 그의 자식들의 행위는 그래도 변명의 여지가 있다. 그들이 아버지를 희생시킨 것은 그들 자신의 보존을 위해서였다.

산헤립의 계승자는 다른 한 아들 에살하돈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아버지와 같이 자기의 정복지를 확장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정복지들을 잘 활용할 생각을 가졌다. 앞에서도 언급되었지만(17:24), 그가 제일 처음 한 일은, 앗수르의 식민들을 사마리에 이주하도록 한 것이었다. 에스라 4장 2절에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기들을 그리로 데려온 자는 에살하돈이다" 라고 말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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