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열왕기하 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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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히스기야의 선정(善政)(열왕기 하 18:1-8)

우리는 여기에서 히스기야의 통치에 대한 일반적인 기록을 보게 된다. 그의 아버지의 나이와 그의 나이를 비교해 보면, 그의 아버지가 11살 내지 12살에 그를 낳았던 것 같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그가 나이가 차게 되어 직무를 감당하기에 적합하게 된 때는, 이미 그의 아버지의 죄악은 한도에 다다르게 되었다.

Ⅰ. 그의 위대한 경건심. 이것은 그의 아버지가 열왕 중의 가장 악한 왕의 하나였고, 매우 악하고 타락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빛나게 되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가장 선한 임금 중의 하나였다. 이것은 우리에게 다음 사실을 말해 준다. 즉 사람에게 있는 선한 것은 타고난 것이 아니고 은총, 절대 은총, 최상의 은총에 속한 것이요, 그 은총은 천성과는 달리 천성적으로 악한 감람나무를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는 일을 한다는 것(롬 11:24), 그리고 또 그 은총은 아무리 큰 곤란이나 약점도 극복한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의 아버지 아하스 왕은 자식에게 나쁜 모범은 물론 나쁜 교육을 시켰을 것이다. 그의 제사장 우리야가 아마 그를 교육시켰을 것이다. 생각건대, 그의 시종자들과 친구들은 우상 숭배를 고수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뛰어나게 훌륭한 인물이 되었다. 하나님의 은총이 역사하면, 그 무엇이 방해할 수 있으랴!

1. 그는 참으로 다윗의 아들이었다. 다윗에게는 타락한 자식들이 매우 많이 있었다(13절). "히스기야는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 하나님은 바로 다윗과 계약을 맺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에게는 그 계약의 은혜를 입을 권리가 있었다. 우리는, 옳은 일을 행하기는 했지만, "다윗과 같지는 않았던" 자들이 있었음을 알고 있다(14:3). 그들은, 다윗이 행했던 바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사랑하지 않았고, 그것들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제2의 다윗으로서, 다윗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고, 하나님의 집을 사랑했다. 세월과 사람이 악할수록 덕은 더욱 필요하지만 오히려 계속하여 더욱 덕이 없어지는 것을 보더라도 놀라지 말자. 히스기야는 많은 악한 왕들을 따르지 않았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다윗과 같은 왕을 세우셨기 때문이다.

2. 그는 열렬한 왕국 개혁자였고,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대하 29:3) 그는 알맞은 시기에 그 개혁을 시작했다. 즉 그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착수했다. 조금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그의 나라가 매우 부패해 있고 그 백성이 만사에 지나치게 미신적임을 알아 냈다. 그들은 언제나 그러했었다. 그러나 지난 왕대(王代)에 있어서는 이전보다 더욱 심했다. 히스기야의 악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우상 숭배가 그 땅을 대홍수와 같이 뒤덮었다. 그의 마음은 이 우상 숭배로 인하여 분기되었다. 그것은 아덴에서의 바울의 분개와 같았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 그리하여 그가 실권을 잡게 되자마자 그는 곧 우상을 훼파하는 일을 시작했다(4절). 물론 그 백성이 우상 숭배와 긴밀히 결합되어 있는 것을 생각할 때, 그 일에 반대가 있으리라는 것은 각오했을 것이다.

(1) 주상들과 아세라 목상들은 완전히 우상 숭배적이고 이교도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는 그것을 부수고 파괴했다. 비록 그의 아버지는 그것들을 세우고 그것들에 대하여 애착을 표시했지만, 그는 그 우상들을 보호하지 않았다. 우리는 결코 육친의 부모들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해서는 안 된다.

(2) 산당들은 특별한 절기 때에는 예언자들에 의해서 사용되어 왔고, 선한 왕들도 묵인해 왔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성전에 대한 모욕이며, 다만 성전에서만 예배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율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사장들의 감독하에 있으므로 산당들은 우상 숭배적인 예배법을 끌어들이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선배들의 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법으로 삼은 히스기야는 산당을 제거했다. 산당을 제거하는 법을 제정하고 거기에 세워진 예배당과 장막과 제단들을 파괴하는 법을 만들었고, 그러한 것들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 법은 엄격히 지켜졌다. 그리고 아마도 이스라엘 왕국이 그들의 우상 숭배 때문에 받아야 했던 그 무서운 심판들을 보고, 히스기야는 더욱 열렬한 개혁자가 되었고, 그 백성들도 더욱 자진해서 그와 합심하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 이웃의 해를 보고 경고를 삼는 일은 좋은 일이다.

(2) 놋뱀은 원래 하나님의 명령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상 숭배로 악용됨으로 인하여서, 그는 놋뱀을 부수어 버렸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으로 들어올 때 그 놋뱀을 가지고 들어왔던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어디에다가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광야에서의 그들 조상에게 베풀어졌던 하나님의 선하심의 기념과 그 이야기의 사실을 전통적으로 입증하는 증거물로써 조심스럽게 보존되었었다(민 21:9). 이것은 환자에게는 하나님께 그 치유를 의뢰하게 해 주고,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하나님께 자비를 구할 수 있는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들이 창조주보다도 더 피조물을 숭배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 이웃의 어떤 민족들이 행했던 바와 같은 이교도의 주상들을 숭배하기를 싫어하던 자들은 놋뱀에게 분향하도록 하는 사탄의 유혹을 받았다. 놋뱀은 하나님의 직접 명령에 따라 만들어졌고, 그들에게는 자비의 도구가 되어 왔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경건한 열심을 지닌 히스기야는, 그 백성들에게 그것을 예배하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악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놋뱀이 "느후스단" 곧 "한 조각의 놋" 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므로 그것에 분향하는 것은 어리석고 악한 일이라는 것을 그 백성들에게 알리려 한 것이다. 패트릭(Patrick) 주교가 설명하는 바와 같이, 그때 그는 놋뱀을 파괴하여 가루로 갈아서 공중에 흩어 버렸고, 조각조차도 남지 않게 했다. 이리하여 놋뱀의 정당한 영예가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그 영예가 다시금 훌륭하게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즉 요한복음 3장 14절에서, 우리의 구주께서는 놋뱀을 자신의 모형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도 그것이 우상화될 때에는 보존되기보다는 차라리 없어지는 것이 더 낫다.

3. 이 점에 있어서 그는 누구라도 비길 수 없는 사람이다.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와 같은 자가 없었다" 고 했다(5절). 그의 개혁에 있어서 뛰어난 점은 두 가지이다.

(1) 용기와 하나님을 믿은 신앙이다. 그가 우상을 제거하는 것은, 신하들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므로 그들로 반역하도록 자극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다." 즉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을 하나님이 도와 주실 것이며 자기를 해 받지 않게 구원하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우리를 보호하시고 상 주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확고하게 믿는 일은, 우리의 의무를 행할 때에 히스기야와 같이, 우리를 담대하게, 신실하게, 활기 넘치게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왕국의 원수들에 둘러 쌓인 것을 발견했지만, 그는 그의 아버지가 했던 바와 같이 외국에 지원을 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보호자이심을 믿었다.



(2) 의무 수행에 있어서의 참을성과 견실성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그와 같은 자가 없었다. 즉 그는 확고한 결의로써 여호와 하나님을 굳게 의지했다. 그리고 "그를 좇는 데서 결코 떠나지 않았다" (6절). 처음에는 잘 시작했던 그의 선조들 중의 어떤 이는, 중도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그는 갈렙과 같이 여호와를 전적으로 따랐다. 그는 모든 우상 숭배적인 관례를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고, 또한 모든 일에서 자기의 의무를 의식했다.

Ⅱ. 그의 개혁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7,8절). 그는 하나님과 함께 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였다.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가 그와 함께 했을 때, "그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하였고" (7절), 그리고 그의 모든 사업에서 즉 전쟁, 건축, 그리고 특히 개혁에 있어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왜냐하면, 그 선한 사업은 그가 예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쉽게 수행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힘을 믿고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은, 그것에서 성공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진리는 위대하고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는 자기의 성공을 보고 나서,

1. 아버지가 굴종했던 앗수르 왕의 멍에를 벗어 버렸다. 이 사건은 "그를 반역한" 것이라고 말하여진다. 앗수르 왕이 그 사건을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히스기야가 자기의 왕위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었으나, 아하스의 힘으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었다. 이 대담한 투쟁을 즉각적으로 시작한 것이 신중하지 못한 일일지도 모르나-어떤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부정하지는 않다. 그가 열방의 우상 숭배를 떨쳐 버리고 났다면, 곧 그들의 억압의 멍에도 벗어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자유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2. 그는 블레셋 사람들을 맹렬히 공격했고, 그들은 가사에 이르기까지 그 촌락들과 성곽이 둘린 성읍들을 쳤다. 그러므로 그가 친 것은 "망대와 견고한 성" 이었다. 그것은 자기 아버지 시대에 그들이 쳐들어와 스스로 주인이 되어 버렸던 곳들이나(대하 28:18) 그는 그것을 탈환했다. 그의 아버지 시대에 아버지가 끌어들여 왔던 부패를 그가 일소하고 났을 때 그 아버지가 잃었던 소유물들을 그가 회복했다는 것은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블레셋에 대한 히스기야의 승리에 대해서는 이사야가 예언했었다(사 14:28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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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헤립의 유다 침입(열왕기 하 18:9-16)

우리는 앗수르의 마지막 왕대의 일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현재로서는 앗수르 왕국는 이제 상당히 성장했다. 민족과 가정문제에 있어서도 그러한 변화들이 있다. 즉 열등했었던 자들은 방대하게 되고, 반대로 소란을 떨고 두각을 나타냈던 자들은 영락(零落)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 다음에 관한 기록을 보게 된다.

Ⅰ.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이스라엘 침입에 성공하여, 사마리아를 포위하고(9절), 탈취하고(10절), 그 백성을 포로로 데려가는 기사이다(11절). 또 하나님이 그들에게 왜 이러한 심판을 가져왔는지 그 이유가 나타나 있다. 즉 "그들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준행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 했다(12절). 이것은 앞 장에서 보다 자세하게 언급되었지만, 여기서 반복되어진다.

1. 그것은 그것을 보고 히스기야와 그의 백성들이 각성하여 큰 열심으로 우상 숭배를 일소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유다 백성들은 우상 숭배가 이스라엘 왕국에 가져온 멸망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자기들의 이웃 집에 불이 나서 자기들의 집도 위태한 가운데 있을 때는, 저주받은 일을 떨쳐 버릴 때이다.

2. 히스기야는 크게 탄식했지만, 방어할 힘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의 왕대에도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열 지파가 비록 다윗의 집을 반역하고, 자주 자기들을 괴롭혔지만, 히스기야는 이스라엘 왕국의 재난을 기뻐할 수 없었다.

3. 그 사건은 히스기야와 그의 왕국을 앗수르 왕에게 개방시켰고, 앗수르 왕이 그 땅을 침입하는 것을 더욱 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듣지" 않고 "행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은 여기에는 열 지파에 관한 것으로 말하여진다(12절).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만 만족한다(겔 28:31). 그러나 이들은 자기들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Ⅱ. 앗수르의 대를 이은 왕, 산헤립의 유다 침입의 시도에 대한 기사가 있다. 산헤립은 그의 선조들이 이스라엘 침입에 성공한 전례에서 힘을 얻어 이 일을 벌였다. 그는 그들의 영예와 다투어 이기기를 원했고, 그들의 승리를 능가하고자 했다. 그가 유다에게 가한 습격은 유다 왕국에는 큰 재난이었다. 그것으로써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신앙을 시험하셨고, "위선의 민족" (사 10:6)이라고 불리우는 그 백성을 징벌하고자 하셨다. 왜냐하면 비록 산당은 제거되었지만, 그들은 히스기야의 개혁에 응하지 않았고 우상을 기꺼이 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마음 속에 혹은 집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개혁을 반대하는 자들이 있어서, 개혁의 시기는 곤경의 시기가 되었고, 또 개혁자들이 재난을 받기까지 했다. 이 재난은 히스기야에게 매우 중대하게 나타났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1. 그는 나라의 상당한 지역을 잃었다(13절). 앗수르 왕은 요새화되어 있는 거의 모든 성읍, 곧 변경 지역과 주둔지를 점령했다. 그러자 나머지 모든 성읍들도 그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 침입으로 인하여 그 나라가 당한 혼란 상태는 예언자 이사야에 의해서 묘사되어 있다(사 10:28-32).

2. 그는 평화를 위하여 너무나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다. 그는 사마리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예루살렘 자체가 원수의 손에 떨어질 위험에 처해 있음을 보자, 예루살렘의 안전을 얻고자 대가를 치르기에 서슴치 않았다.

(1) 비열한 굴복을 했다. 즉 "평소의 조공을 거부했으므로, 나는 범죄하였나이다. 이제 나는 요구되는 바를 기꺼이 배상하겠나이다" (14절)라고 했다. 히스기야의 용기는 어디로 갔는가? 하나님을 신뢰하던 그의 신앙은 어디로 갔는가? 그는 이 굴욕적인 메시지를 보내기 전에, 왜 이사야와 의논하지 않았는가?

(2) 막대한 액수의 금액을 치렀다. 이것은 은 300달란트와 금 30달란트(20만 파운드 이상이다)였다. 그것도 연차로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의 배상금이었다. 이 금액을 조달하기 위하여, 그는 할 수 없이 국고를 비웠을 뿐만 아니라(15절), 성전 문과 그 기둥에서 금 조각을 벗기지 않을 수 없었다(16절). 그가 바친 "금은 성전이 성별시켰" 지만, 필요성이 절박해지자 자기도 다윗처럼 용기를 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다윗의 본을 땄는데, 바로 그의 조상 다윗은 진설병을 먹은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체의 보존을 위해서 부분을 내어 주는 것은 불경하지도 않고 경솔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의 아버지 아하스는 성전을 경멸하여 성전의 물품을 약탈하였다(대하 28:24). 그러나 그는 그의 아버지가 취했던 물품의 이자까지 반환했었다. 그리고 이제 아주 당당하게, 그는 긴급한 일을 당했고 또 보다 큰 이익을 위하여 성전의 물품을 다시 빌려만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능력이 생기면 곧 그것을 완전히 갚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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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 없음.

 

18:17

랍사게의 모독적인 발언(열왕기 하 18:17-37)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Ⅰ. 산헤립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다(17절). 그는 예루살렘을 치려고 그의 세 장군에게 대군(大軍)을 주어 보냈다. 이것이 앗수르의 대왕인가? 아니다. 결코 그를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그는 천하고, 거짓되고, 불충한 자이였고, 모든 세대에 악명을 떨쳐야 할 자이었다. 이와 같이 불명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그를 명예롭게 명명되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그는 히스기야의 돈을 취했는데, 그것은 그의 군대를 철수할 조건으로 받은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협약대로 유다 나라를 포기하는 대신에 수도를 쳐들어갔고, 돈도 다시 돌려 보내지 않았다. 앗수르 군대야말로 정말로 악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전과 같이 위대하게 되면, 우리는 그들을 그렇게 부를 것이다. 그들은 약속을 지킬 줄 모르며, 오직 자기들의 이익을 알 뿐이다. 이제 히스기야는 산헤립과의 조약을 후회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조약은 히스기야를 더욱 가난한 자로 만들었지 결코 더욱 안전한 자로 만들지는 않았다.

Ⅱ. 히스기야와 그의 왕족들, 그리고 백성들이 랍사게의 조롱을 받았다. 랍사게는 세 장군들 중의 수석 대변자이며 빈정대는 재질을 가장 많이 가진 자이었다. 그는 히스기야와 새로운 다툼을 일으키라는 산헤립의 지시를 받았음이 틀림없다. 랍사게는 히스기야의 돈을 받고 자기 군대를 철수시키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므로 부끄러워서도 즉시 예루살렘에 강한 공격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산헤립은 랍사게를 보내어서 히스기야더러 예루살렘을 포기할 것을 권고했다. 그리고 만일 거절한다면, 그 거절은(매우 빈약한 이유이지만) 그에게 예루살렘을 포위할 핑계를 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예루살렘을 끝까지 고집하면, 그때는 그것을 강습하여 빼앗을 구실이 되는 것이다. 랍사게는 너무나 뻔뻔하여 성벽도 없는 윗 연못의 도랑에서 왕을 직접 접견하겠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신중했으므로 그 개인적인 조약을 거절했다. 그리고 세 사람의 사절들(국가의 수뇌들)을 보내어, 그가 말하는 것을 듣게 했다. 그러나 "그의 어리석음에 따라" (36절) 어리석은 대답을 하지 말라고 명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랍사게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그를 화나게 하려 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히스기야는 그의 조상 다윗이 자기는 "귀먹은 자가 듣지 않음같이" (시 38:13-15) 듣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들으신다는 것을 믿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랍사게의 말을 도중에 방해했는데, 그것은 단지 그가 아람 방언으로 말해 주기를 바랐던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말한 것을 생각해 보고 왕에게 보고하고자 했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랍사게에게 만족한 대답을 주지 않았을 때에는, 다시 "유대 방언으로" 성들에게 직접 호소하라고 간청했다(26절). 이것은 타당한 요구이다. 또 전권 대사들은 어떤 일이 공개되기 전에 그들 사이에서 사건들을 결정해야만 하는 협정의 관례에 일치하는 것이었다. 힐기야는 자기가 아주 부조리한 사람과 대담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이런 요구를 하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요청은 다만 랍사게를 격분케 했고, 그를 더욱 거칠고 난폭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27절). 모든 예의범절과 정중한 태도로 그 사절들과 협약하는 대신에, 그는 그 군인들을 위협하여 탈주하거나 반란을 일으키라고 권하였다. 즉 만일 그들이 끝까지 저항하면, 극단의 기아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다고 위협했다. 그리고 그는 계속 자기의 주장을 폈다. 그가 말하는 요지는, 히스기야와 그의 왕족들, 그리고 백성들에게 투항을 종용하는 것이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살펴보자.

1. 그는 자기의 주인인 앗수르 왕을 과대평가한다. 몇 번이고 그는 그를 "그 위대한 왕 앗수르의 왕" (19, 28절)이라고 부른다. 그는 피조물인 군왕을 정말 하나의 우상으로 삼았다! 하나님은 위대한 왕이시지만 산헤립의 눈에는 하나의 작은 신에 불과했다. 그리고 랍사게는 산헤립에 대하여 그들도 자기와 같은 존경을 표하게 하고 싶었고, 그들을 협박하여 자기 왕에게 굴복하게 하고자 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왕 중의 왕이신 분의 권세와 영광을 보는 자들에게는 앗수르의 왕도 천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인다. 아무리 위대한 자라도 그들이 하나님과 비교될 때 혹은 하나님이 그들과 경쟁하게 된다면, 도대체 그들의 꼴이 어떻게 될 것인가?(시 82:6, 7)

2. 그는 항복하는 것이 유다의 이익에 좋을 것이라는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고 애쓴다. 만일 그들이 끝까지 버틴다면 그들은 자신의 대변을 막는 것 이외는 다른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했다. 그것은 식량 공급이 중단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는 자들이 식량 공급을 완전히 단절시킬 것이기 때문에 오는 현상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조건부 항복을 하고, 선물을 바치면서 앗수르 왕의 호의를 구하고, 그의 처분에 자신을 맡긴다면, 그는 그들을 매우 선대할 것이라고 했다(31절). 히스기야가 그 커다란 선물을 주고 맺은 협약(14절)도 그의 임군은 최근에 여지없이 깨뜨려 버렸는데, 랍사게는 무슨 얼굴로 다시 선물을 가지고 협약을 맺으려고 운운하는지 의아스럽다. 그렇게도 철저히 배반을 잘하는 자들에게서 무슨 신의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오직 Ad populum phaleras-쇠사슬을 금으로 도금하라, 그러면 민중은 너희들에게 자기들의 결박을 허락할 것이다. 랍사게는 만일 그들이 신중히 생각하여 투항하면-비록 그들이 죄수들과 포로들이 된다고 예상해야 되겠지만-그들에게 실제로 행복되리라는 것을 약속함으로써 모든 것을 무마시키려고 했다. 이러한 야비한 제안이 성사 되리라고 이전에 한 번이라도 그가 생각해 보았는지 의문스럽다. 그러나 마귀는 이렇게 죄인들에게 매일 매일 그러한 제안을 하라고 유혹한다. 랍사게는 다음과 같이 설득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1) 즉 그들이 감금되더라도 오히려 유익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각자 자기 소유의 포도를 먹을 것" 이기 때문이다(31절). 즉 피정복자의 재산은 정복자에게 귀속되겠지만, 여전히 유다 사람들에게는 자기들의 재산을 자유로이 누리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 그가 원하는 바는 그들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복자가 얼마 동안이든 자기 마음대로 포로된 자들을 처분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2) 그들이 포로가 되면 그들의 보다 큰 이익이 된다고. "내가 너희 본토와 꼭 같은 지방으로 너희를 옮기겠다" 고 했다(32절). 그렇다면 그들이 그들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데 그 땅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3) 그가 특히 목적하는 것은, 그들이 끝까지 버티는 것은 아주 헛되다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키려는 것이다. 즉 "너의 의뢰하는 이 의뢰가 무엇이냐?" 그래서 그는 히스기야를 모욕한다(19절). 그 백성들에게 그는 말한다(29절). "히스기야로 너희를 속여 너희를 멸망케 하지 말라. 그는 너희를 건져내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굴복하거나 멸망해야 한다." 죄인들이 이 주장의 힘에 굴복하는 것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이라면 다행스런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대결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굴복하는 것이 우리의 지혜다. 그에게 대항하여 끝까지 버티는 자들이 의뢰하는 것은 무슨 확신인가? "우리가 그(하나님)보다 더 강한가?" 혹은 우리는 삼키는 불 앞에 찔레와 가시넝쿨을 둠으로써 무엇을 얻을 것인가? 그러나 랍사게가 말하고 있는 대로 히스기야가 그렇게 절망적이고 무방비 상태로 있지 않았다. 그는 히스기야가 그렇게 절망적이고 무방비 상태에 있지 않았다. 그는 히스기야가 의뢰하는 바를 세 가지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것들이 아무 효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쓴다.

(1) 히스기야가 거느리고 있는 군사적 준비 태세. "네가 싸울 만한 계교(計巧)와 용력(勇力)이 있다고 말하도다" (20절). 그리고 우리는 그가 실제로 그러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대하 22:3). 그러나 랍사게는 이 사실을 일소에 붙인다. 즉 "그 말들은 다만 공허할 뿐이로다. 너희는 우리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 (20절). 말할 수 없이 큰 거만과 멸시의 태도를 가지고서, 그는 말을 다룰 줄 아는 2000명의 장정이 있으면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만일 히스기야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자기는 2000마리의 말을 주겠다고 도전했다. 그러나 그는, 히스기야에게는 전혀 장정들이 없으며, 있더라도 군사가 되기에는 적합치 않다는 것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23절). 그래서 그는 확신과 도전으로 히스기야를 넘어뜨리려고 생각하며, 자기 왕의 가장 작은 부하 장수도 히스기야와 그의 온 군사를 좌절시킬 수 있다는 어떤 내기를 걸려는 것이다.

(2) 히스기야가 애굽과의 맺은 동맹의 헛됨을 말했다. 그는 히스기야가 애굽의 병거가 마명을 의뢰한다고 생각했다(24절). 왜냐하면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 그렇게 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확신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것은 부러진 갈대다(21절). 그것은 자기를 의지하고 그 무게를 지탱하리라고 기대하는 자를 실패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그의 손을 찔러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찢을 것이로다" 라고 했다. 이는 예언자가 이 비유를 애굽에 적용하여 더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은 말이다(겔 29:6, 7). 그가 말한 대로 애굽 왕은 그렇다. 그리고 실제로 앗수르 왕을 의뢰했던 아하스 왕에게 대해서 앗수르 왕도 그러했었다. 나아가 그는 "그를 괴롭혔고, 그를 강하게 하지 못했다" (대하 28:20). 육신의 팔(인생)을 의뢰하는 자들은 그것이 부러진 갈대만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

(3) 하나님과의 관계도 헛되다고 했다. 이것이 정말로 히스기야가 의뢰했던 확신이었다(22절).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의지함으로써 스스로 버티었다. 즉 이 약속으로 그는 스스로 용기를 내었고, 그의 백성을 격려했다(30절). "여호와가 우리를 건지시리라" 는 약속이다(32절). 랍사게는 이것이 그들의 커다란 지주였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을 동요시키려고 온갖 수단을 다 강구했다. 마치 다윗의 원수들이 하나님께 대한 다윗의 신뢰를 좌절시키려고 모든 술책을 다 썼던 것(시 3:2; 11:1)과, 또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았다(마 27:43). 랍사게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신뢰를 낙담케 하려고 제시한 세 가지 사실들은 모두가 거짓되었다.

[1] 히스기야가 "산당들과 제단들을 파괴했으므로" 하나님의 보호를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했다(22절). 여기에서 그는 수 많은 제단과 성전을 기뻐하던 이방의 우상 신들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평가한다. 그리고 히스기야가 하나의 제단에만 예배하게 제한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일찍이 히스기야 생의 최선의 행위들 중의 하나가, 이스라엘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며 또 알기를 원치 않는 자에 의해서 불경스럽고 속된 것으로 오해되어진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훌륭한 일이, 무지하고 악의에 찬 자들에 의해서 악한 짓이요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짓이라고 표현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일 이것이 그런 오해가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히스기야는 그렇게 되는 것을 감수했을 것이다.

[2] 그래서 하나님이 예루살렘의 파괴를 명령하셨다는 것이다(25절). "여호와의 뜻이 아니고서야 내가 올라 왔겠느냐?" 이것은 모두 희롱이요 도전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위임을 받았다(그가 누구의 위임을 받았겠는가?)고 생각지 않았지만, "성 위에 있는 사람들" 을 즐겁게 하고 두렵게 하기 위해 이런 구실을 붙인 것이다. 만일 그의 말한 것에 조그마한 구실이라도 있었다면, 그것은 예언자들의 글에서 열 지파의 파멸은 하나님의 파멸에 의한 것임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마리아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을 점령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체해 왔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앗수르 왕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일을 맡았지만, 그는 그렇게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모독적 언사로 자기 말을 끝맺었다(33-35). 즉 그는 자기가 정복했던 민족들의 신들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비교하고, 그를 그들과 같은 수준에 놓았다. 그리고 그 이방 신들이 자기들의 예배자들을 보호하고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하나님도 자기의 예배자들을 보호하고 구원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첫째로, 이것은 그의 교만이다. 그가 한 성읍을 정복하면, 그 성읍의 신들을 정복했다고 생각했고, 자기가 그 신들보다 강하다고 자부했다. 우상들에 대한 그의 높은 평가는 그로 하여금 우상들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높은 자가 바로 자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둘째로, 그의 불경성이다. 이스라엘 하나님은 지역에 국한되는 신이 아니다. 그는 온 땅의 하나님, 유일하시고 살아계신 참 하나님, 상제(上帝)이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모든 신들 위에 있음을 스스로 증거하셨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 하나님을 아르밧과 하맛의 가상적인 신들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부당하게도(당시에는 어떤 제사장들도 이렇게 말했다) 모든 종교의 신들은 동일하고, 그들 모두 위에 자기 자신이 있다고 주장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랍사게는 배교한 유대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유대 언어로 그렇게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스라엘 하나님에 대한 그의 무지는 더 이상 변명할 수 없으며, 그의 적의는 더 이상 이상할게 없다. 왜냐하면 배교자들은 일반적으로 가장 잔악하고 적의에 찬 원수들이기 때문이다.

랍사게의 이 말 속에는 많은 가책과 술책도 있으나, 거기에는 많은 자존심과 악의, 거짓, 신성 모독도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실한 한 알곡은 이 모든 기지와 웅변에 상당하는 값어치가 있다.

마지막으로, 히스기야 편의 사절이 말한 것을 들어 보자.

1. 그들은 침묵을 지켰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히스기야를 위해서 말한 것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쉽사리 랍사게의 임군의 반역과 불신을 들어 그를 비난하고 그에게 다음과 같이 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즉 너희로 하여금 그러한 행위가 성공하리라고 기대하게 하는 종교는 무엇이냐고. 적어도 그들은, 벤하닷의 거만한 요구에 대해서 아합 왕이 답변했던 저 불운한 운명을 그에게도 암시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즉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벗는 자같이 자랑치 못할 것이다" 고(왕상 20:11). 그러나 히스기야 왕은 그들에게 명령하기를, 그에게 대답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지시를 따랐다. 말할 때가 있는 것과 같이 침묵을 지켜야 할 때도 있다. 신앙적이거나 혹은 이성적(理性的)인 어떤 것을 제공하는 일이,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는 격이 되고 마는 사람들도 있다. 미친 자에게 무슨 말이 들리겠는가? 그들의 침묵이 랍사게로 하여금 더욱 거만하고 방심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더욱 높아지고 결국 그의 파멸에 이르게까지 완악해져 갔다.

2. 그들은 그의 불경스런 언사를 증오하면서, 그리고 멸시받고 상처받은 예루살렘의 가엾은 상태에 비통한 나머지 자기들의 옷을 찢었다. 그러한 치욕은 그들에게는 무거운 짐이었다.

3. 그들은 신실하게 그 사실을 왕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랍사게의 말들을 그에게 전한다." 그래서 왕은 무슨 일이 행해졌으며, 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지, 그리고 그들은 랍사게의 요청에 대해 무슨 대답을 할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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