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열왕기하 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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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유다 왕 아마샤(열왕기 하 14:1-7)

아마샤는 요아스의 아들이요, 그의 뒤를 이은 왕이다. 여기서는 그에 관한 기록을 살피게 된다.

Ⅰ. 성전에 관해서 살펴보자. 그는 거기서 다소 잘 행동했다. 물론 다윗과 같이 잘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요아스와 같이 행했다(3절). 시작은 잘했는데, 끝가지 밀고 나가지 못했다.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 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참여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다윗과 같이 그렇게 잘 하지는 못했다. 우리의 선배들이 비록 경건하다고 하여, 우리가 그들의 실행을 그대로 본받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오직 그들의 신앙과 헌신과 신실성과 결단력에서 우러나왔던 바로 그 원리와 정신에 따라서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전과 같이 "산당은 제거되지 아니하였다" (4절)는 사실이 여기에 지적되고 있다. 오랫동안 인정을 받아오고 좋게 여겨져 오던 부패상을 일시에 완전히 일소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Ⅱ. 의자에 앉아 있는 아마샤를 살펴보자. 거기에서는 그가 자기 아버지를 죽인 반역자들에게 정의를 행사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 일을 행하지는 않았다. 다소의 소란이라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나라가 자기의 손에서 굳게 서게 될" 때까지 그 일을 미루어 두는 현명함을 발휘했다(5절).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파당은 점차적으로 약화시켜 나가는 것이 때로는 가장 효과적인 파멸책이 된다. 정의란 서서히 발휘되나 필경 발휘되고야 만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시행되지 아니하는 것이 오히려 가장 슬기로운 정의의 실현이 되기도 한다. 그와 같은 일에는 지혜의 통제를 받는 좋다.

아마샤는 이렇게 처신했다.

1. 법, 곧 "피를 흘린 자는 피를 흘릴지로다" 라고 하는 저 옛부터 있어 오던 율법에 따라서 행했다. 반역자들이나 살인자들이 남들과 똑같은 꼴로 무덤까지 갈 수 있다는 생각은 아예 말아야 한다.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함정으로 달려갈 것이니, 그들을 막지 말라" (잠 28:17).

2. 율법의 한계 내에서 행동했다. "살인자의 자녀들은 죽이지 말라" 는 법에 따른 것이다. 모세의 율법에는 "아비로 인하여 자녀를 죽이지 말지니라" 고 하는 규정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었다(6절). 아마샤 주위에 있던 자들이, 복수에 있어서나(살인, 특히 왕을 살해했다는 죄는 특히 중한 죄이므로) 정책적으로(그들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복수를 다시 계획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토록까지 잔인할 필요는 없다고 충고해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암시에도 불구하고 그 명백한 하나님의 율법에 반대했다(신 24:16). 그는 마땅히 그 율법에 따라 재판을 해야 했었다. 그는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여 그 결말을 맡겼어야 했다.

하나님은 아비들의 죄악을 자식들에게 갚는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할 죄책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비들의 죄 때문에 자녀들의 생명을 요구하신다 해도, 그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며, 죄인은 이미 자기 자신의 죄 때문에라도 목숨을 잃고 말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의 제왕들에게는 그런 권리를 허용치 않으셨다. 자녀들은 왕 앞에서는 무흠하며, 따라서 그러한 가혹한 처벌을 받을 수는 없는 법이다.

Ⅲ. 전장에 나가 있는 아마샤를 살펴보자. 거기서는 그가 에돔인들을 쳐 이긴 것을 보게 된다(7절). 에돔인들은 요람의 시대에 "유다의 수하에서 벗어난" 반역자들이었다(8:22). 그러나 이제 아마샤는 그들과 전쟁을 일으켜 다시금 그들을 굴복시킨다. 1만 명을 죽였고, 반석같이 튼튼한 아라비아의 수도(셀라라 불리웠는데 반석이란 뜻이다)를 탈취하여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이 원정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역대하(25:5 이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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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스에게 패한 아마샤(열왕기 하 14:8-14)

왕국이 분열된 이후 여러 왕들의 재위 기간 동안 유다는 이스라엘의 증오를 많이 받아왔다. 또 아사 왕 시대 후로는 여러 왕대 동안 이스라엘의 우의를 크게 받아왔다. 그들과 서로 혈족으로나 정치적으로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그들 사이에 적대감이 발동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전 여러 시대 동안 결코 본 적이 없는 그런 큰 적대감이었다.

Ⅰ. 아마샤는 싸워야 할 별다른 이유가 발생하지 않았는데도 요아스를 전장으로 끌어 들였다. "오라. 우리가 서로 대면하자. 우리의 힘을 전장에서 겨루어 보자" (8절). 아마샤가 요아스에게 개인적인 결투를 신청한 것이라면, 잘못은 그 자신에게만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양편이 모두 자기들의 군병을 이끌고 나가야 했었다. 양편에서 각각 수천 명들의 목숨이 그의 변덕스런 기분에 제물이 되어야 했다. 이로써 아마샤는 자기의 교만과 허세와 방탕성을 입증한 것이다. 어떤 자들은 생각하기를, 얼마 전 그 기분 나쁜 이스라엘인들이 전장에 나가지 못하게 해고 되자 돌아가면서 범한 피해(대하 25:13)에 아마샤가 복수를 꾀한 것이었으며, 이스라엘을 전복시켜 다시 유다 왕국의 통일을 꿈꾸는 망상을 한 것이라고 본다.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잠 8:6). 그러한 도전은, 마치 물구멍이 생기는 것처럼, 장차 큰 싸움이 될 다툼의 전초전으로 번질 수 있다. 싸우기를 즐기거나 법정에 나가기를 즐기는 자들은 싸움을 만나게 될 것이요, 후회도 먼저 하게 될 것이다.

Ⅱ. 요아스는 그들의 도전에 대해 돌아가라고 충고를 함과 동시에 신랄하게 책망을 했다(10절).

1. 요아스는 아마샤의 교만에 심히 분개했다. 위풍당당한 나무인 백향목이 자기라면, 아마샤는 초라한 잡초에 불과한 가시나무라고 했다. 아마샤가 자기를 두렵게 하기는커녕, 자기가 그를 경멸한다고 말했으며, 도대체 자기가 그와 어떤 결연을 맺고 관계를 한다는 것은 백향목이 자기 딸을 가시나무에게 시집보내는 격이라는 식으로 조소했다. 그는 아마샤를 예후의 집안(비록 벼락부자처럼 일어났지만)처럼 그 유서 깊은 다윗의 집 이름으로 명명할 가치도 없는 자라고 본 것이다. 이 두 교만하고 건방진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을 헐뜯는 말을 겸손한 자들이 들었다면, 그들은 얼마나 미소를 지었을 것인가?

2. 아마샤의 운명을 예고해 주었다. 즉 "들짐승이 그 가시나무를 짓밟았느니라" 고 했다. 그래서 결국 백향목과 가시나무의 관계는 종말을 고하리라는 것이다. 요아스는 자기 군병들이 아주 쉽게 아마샤 군을 무찌를 것으로 생각했듯이, 아마샤는 아마 아무런 저항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3. 요아스는 아마샤의 도전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했다. "너는 과연 연약하고, 힘도 없으며, 훈련도 잘못된 병사들, 에돔을 쳐서 파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너는 네 앞에 있는 모든 나라를 능히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스라엘의 정규군조차도 그렇게 쉽사리 멸하리라고 감히 생각하는도다. 네 마음이 교만해졌느니라."

모든 죄의 뿌리가 어디에 깃들어 있는지를 보라. 죄의 뿌리는 마음 속에 있으며, 거기서 자라나나니, 마음이 비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인간을 교만하게 하거나 방심케 하거나 불만을 품게 되는 것 따위는 섭리자나 어떤 사건 자체나 어떤 기회 자체가 아니라, 단지 그러한 짓을 하는 그 마음 때문이다. "네가 에돔을 물리쳤다고 하여, 마치 온 인류가 두려워하고 있는 양, 그것을 자랑하는도다." 자기들의 공적을 자랑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비참하게 속이는 것이요, 약간의 성공과 명성을 얻었다 하여 자기들은 무슨 일에나 적합하며 무슨 일이든 자신 있다고 결론 짓는 자들이야말로, 비참한 자기 기만자들이다.

4. 요아스는 아마샤가 이미 얻은 그의 명예로 만족하고 새로운 모험을 하지 않는 게 좋으리라고 충고했다. 새로운 모험이란 그의 손이 닿을 수 없는, 한계 밖의 일이라고 했다. "어찌하여" 미련한 자들처럼(잠 20:23) "화를 자초하느냐?"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은 이미 충분한 명예를 차지하고 있는데도,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더 많은 부귀영화를 가지고 싶어한다. 그렇게 하면, 아마샤 자신에게 뿐만이 아니라 그가 마땅히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그 나라에게까지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고 일러주었다.

Ⅲ. 아마샤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 결국 사태는 악화되었다. 요아스가 아마샤에게 모욕을 준 것과 같이, 차라리 집에나 앉아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흔히 도전자가 지고 마는 수가 많다.

1. 아마샤의 군대는 패하여 도망을 쳤다(12절). 조세푸스(Josephus)는 말하기를 그들이 전장에 나가자, 그 공격이 너무 극심하여 결국 저들은 한 사람도 칼을 휘두르지도 못한 채 모두 도망갔다는 것이다.

2. 아마샤 자신은 이스라엘 왕에게 포로로 잡혀갔다. 그리하여 그는 "그(요아스)를 면전에서" 흡족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아마샤의 계보(" 아하시야의 손자 요아스의 아들")가 갑자기 튀어나와 있다. 아마 그도 자기 선조들의 존엄성을 영광스럽게 자랑해 왔거나, 이제는 자기의 죄악 때문에 징계를 받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3. 정복자 요아스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아마 예루살렘은 순순히 문을 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성벽을 헐어버렸다(그리고 조세푸스의 말에 의하면, 그 폐허 속으로 자기의 수레를 타고 달렸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을 모독하는 처사였다. 또한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그 왕성까지 소유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4. 그는 예루살렘을 약탈했다. 값나가는 모든 것을 탈취하여 가지고 사마리아로 돌아갔다(14절).

요아스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행한 자라고 했고, 아마샤는 "정직한" 일을 행한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요아스가 아마샤를 승리했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마샤의 운명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교만한 자를 물리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 하심이요, 남들이야 어떻든 요아스는 근래에 하나님의 예언자 한 사람을 존중한 일이 있으나(13:14), 아마샤는 예언자 한 사람을 학대한 적이 있었다(대하 25:16). 따라서 하나님은 당신의 예언자들을 존경한 자에게 영예 주시기를 기뻐하시나, 그들을 멸시한 자들은 역시 멸시받게 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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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왕 아마샤의 종말(열왕기 하 14:15-22)

이 짧은 구절 속에서 세 사람의 왕이 무덤으로 가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1.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죽음(15, 16절). 그의 장례식 얘기는 이미 나왔었다(13:12, 13). 그러나 요아스의 생애와 활동을 더 자세히 언급해야 될 경우가 생겼기 때문에, 성경 기사는 그의 죽음과 장례를 다시 한 번 언급한 것이다.

2. 유다 왕 아마샤의 죽음. 그는 자기를 정복한 왕보다도 15년이나 더 살았다(17절). 어떤 사람들은 치욕을 겪으면서도 완전히 죽지 않고 오래 살게 되는데, 그것은 그들로 굴욕을 당하게 하기 위해서이다(아마샤도 필경 그런 부류였다). 그의 행적이 그의 역대지략에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18절). 그러나 그것이 그의 존귀성을 드러낸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가 에돔을 정복했을 때 발휘한 잔인성과, 이스라엘 왕에게 무모한 도전을 벌인 그의 무례함을 위해서였다.

그는 그의 정치를 증오하던 자기의 신복에 의해서 살해되었다(19절). 예루살렘은 그에게 반역했다. 그가 어리석었고 허세를 부렸던 연고로 수치스런 폐허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라기스로 도망갔다. 그가 얼마나 오래 숨어 살 수 있으랴! 그는 마침내 라기스에서 살해되었다(19절).

그 반역도들의 분노는 더 이상 연장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시체를 수레에 태워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왕실 묘소에 장례 지냈기 때문이다.

3. 아사랴가 아마샤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죽은 지 12년이 지나서야 그렇게 되었다(23절과 2절을 비교해 보면). 아마샤는 여로보암 15년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사랴는 여로보암 27년(15:1)이 되어서야 비로소 통치권을 잡았던 것이다. 아사랴는 그의 아버지가 죽을 때에 겨우 4살이었다. 따라서 12년 간, 즉 그가 16세가 되기까지는 정권이 그의 보호자들의 손에 있었던 때문이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다스렸다(15:2). 그러나 그의 치세에 대한 이야기는 껑충 뛰어서 생략되어 버렸다. 단지 "아마샤가 그 열조와 함께 잔 후에, 그는 엘닷을 세웠다" (이 성은 에돔에 속해 있었으나, 아마 그의 아버지가 탈환했을 것이다. 7절)고 말했다(22절). 마치 아사랴의 치적 중에는 그 사건이 언급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사실이란 얘기다. 그는 아버지가 죽자 곧 엘닷 성읍을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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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열왕기 하 14:23-29)

본문은 여로보암 2세의 치세 이야기다. 이스라엘인들이 왕위 계승자의 이름을 여로보암이라고 명명한 것은,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1세)" 의 죄악에 대해 예후의 가문이 애착과 집념을 가졌다는 표시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사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책에서는 악명이 높고 오명으로 낙인 찍힌 이름이었는데, 그들은 그 이름을 명예롭게 생각했을까?

Ⅰ. 그의 통치 기간은 길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을 제위했다. "그는 41년간 위(位)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동시대인인 유다 왕 아사랴는 그보다 더 오랜 기간, 52년 간을 다스렸다. 이 여로보암 왕은 아사 왕과 꼭 같은 기간을 다스렸다(왕상 15:10). 그러나 한 왕은 선정을 했는데, 다른 한 왕은 악정을 했다. 우리는 인간의 수명이나 외형적 번영으로 그 사람의 성품을 판단할 수 없다. "의인과 악인의 당하는 일이 일반이니라" (전 9:2).

Ⅱ. 그의 성품은 다른 왕들의 성품과 같았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 (24절). 그것은 "그가 여로보암의 악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송아지 예배를 계속했다. 그게 아무런 피해가 되지 않는다 생각하며 버리지 않은 것이다. 그 이유는, 송아지 예배는 모든 자기 선조들과 선왕들이 지켜오던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모든 죄악 중에서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장 큰 죄악이었다. 오히려 옛부터 관습이 되어 온 죄이기 때문이다. 악이 관습으로 되고 말았다는 하찮은 변명은 조금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Ⅲ. 그러나 다른 모든 왕들보다는 영화를 누렸다. 그 한가지 점에 있어서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행했지만, 다른 면에서는 그에게도 어떤 선한 요소가 있었을 것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은 예언으로 인정해 주셨다. 하나님은 갈릴리 사람, 아밋대의 아들 요나(그러므로 "갈릴리에서는 예언자가 나오지 않았다" 는 말은 큰 오해다. 요 7:52)를 일으키사,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당신의 은총을 베푸시겠다는 뜻을 알리셨다. 그들은 하나님을 분노케 했지만, 하나님은 여로보암과 그의 나라를 강화시키어서, 잃어버렸던 옛 땅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싸움을 일으킬 것이며(이것은 조금도 그들의 성공의 탓이 아니다), 그들이 반드시 승리하리라고 확신케 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신실한 사역자들을 끊임없이 세우신다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이 아직 그 백성을 저버리시지 않으셨다는 표적이다. 즉 엘리사가 요아스의 손을 강화시켜 주다가 사라지니, 다시금 요나를 보내어 그의 아들을 강화시켜 주시는 것은 은총의 증거이다. 왕이 계속하여 자리를 이어가듯이, 예언자들이 계속하여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토록 들려지는 그런 나라는 실로 행복한 나라이다.

이 요나에 관해서는 그의 이름이 제목으로 붙은 책(요나서)에서 자세히 읽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시는 그러한 원정은 요나가 젊었을 때였고, 또 그것이 합당할 것 같다. 또 그가 도망을 가고 불안해 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환상을 깊이 체험하지 못했었던 그런 때의 일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렇다면 그가 나중에 이스라엘의 자비를 전하는 사자로 일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의 실수와 어리석음을 용서하셨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하나님의 위임 명령은 용서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자기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자기에게서 발견한 자는 남들에게도 비록 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용서하신다는 자비의 희망으로 그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더 큰 용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어떤 자들은 자기들이 어리석었고 화가 나서 처음에는 잘못해 버린 일들이, 나중에 가보면 그들이 도리어 잘된 일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수가 있다. 아무리 잘못이 있더라도 인간을 완전히 포기해서는 안 된다.

2. 섭리로 인정해 주셨다. 그 사건은 "여호와의 말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군대는 이길 수 없다. 그는 "이스라엘의 해변을 회복했다." 그는 북쪽 하맛에서부터 남쪽의 평원의 호수(소돔 호수)-이 모든 땅은 아람이 점령하고 있었다(25절)-에 있는 변방 지역을 회복한 것이다.

왜 그들이 승리하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는지, 거기에 대한 두 가지 이유가 나와 있다.



(1) 그들의 곤경이 대단히 심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동정심을 자아내게 되었다(26절). 그들에게는 아무런 후회와 개심의 빛이 보이지 않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극심한 고난을 보셨다" 고 했다. 원수의 지배를 받고 있는 지역의 사람들은 처참한 억압을 받고 노예 생활을 하면서, 자기들의 것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머지의 땅도 그 원수들이 침입하여 약탈을 해 갔기 때문에 형편없이 황폐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도회지나 시골이 모두 황폐해지고 온갖 재물을 잃게 되었고, 아무런 조력자도 나타나지 않게 되자 마침내 그 땅에는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게 되었다." 여로보암이 통치를 시작할 무렵, 나라의 상황은 이토록 극한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은 단지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부르짖는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여기에는 저들이 고통을 인해 기도했다는 말이 전혀 없다), 여로보암의 손을 빌어 그들에게 해방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이다. 가엾은 처지에 놓인 자들은 하나님의 동정심을 바라자. 우리는 하나님께는 자비의 그릇이 있다는 점을 읽을 수 있으며(사 63:15; 렘 31:20), 그는 동정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시 86:15).

(2) 아직 그들의 완전 파멸을 선고하는 포고령은 공포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하나님은 "내가 이스라엘의 이름을 지워버리리라" (27절)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또한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겠다고도 말씀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이 말의 뜻이 열 지파(이스라엘 왕국)의 분산을 뜻한다면, 하나님은 이미 그런 말씀을 하셨고, 그 때는 멀지 않았던 것이다(유예는 용서가 아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완전 근절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은 결코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토록 하지 않으시리라. 왜냐하면 지금까지도 "복음의 이스라엘" 에서는 그 이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로서는 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므로-이 마지막 영예를 누리는 것이다-하나님은 그 이름이 지녀오던 옛적부터의 영예를 생각하사(13:23) 이러한 은총을 보이신 것이다.

Ⅳ. 여로보암 치세의 종결이 나와 있다. 우리는 그의 힘과 전쟁에 대해서 읽었다(28절). 그러나 이제 그는 "그의 열조와 더불어 잤다" (29절)는 것을 읽게 되었다. 아무리 권력을 지닌 자들이라도 죽음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하며, 그 싸움에는 면제 받을 자가 없기 때문이다.

각 시대를 걸쳐 이스라엘에는 많은 예언자들이 계속 있어 왔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글로써 자기들의 예언을 남긴 적은 없으며, 이 때에 비로소 문서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예언이 성경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호세아" (아주 오랜 기간을 예언자로 활동했다)가 예언 활동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여로보암 왕의 재위 중이었다. 그는 자기의 예언을 문서로 남긴 첫 예언자이다. 그러므로 그를 통해서 여호와의 말씀이 "여호와의 말씀의 시작" 이라고 불리우게 된 것이다(호 1:2). 그 때부터 "여호와의 말씀의 부분들이 기록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대에 "아모스" 도 예언하고 저작을 했고, 그 직후가 "미가", 그 다음이 "이사야" 인데, 그는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증인들이 이 땅에 끊어지게 하신 적이 없으시다. 교회가 가장 어둡고 부패했던 시대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몇몇 증인들을 일으키시사,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말씀 선포와 삶을 통해서 그 시대의 교회에 등불을 켜고 비추는 사명을 계속케 하셨으며, 그들 중 어떤 자들은 그것들을 기록으로 남겨 세상 끝날에 있는 우리들에게까지 그것을 전해 주게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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