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아하스의 통치(열왕기 하 13:1-9)
여호아하스의 통치와 17년이라는 그의 통치 기간 중의 이스라엘 상황에 대한 이 일반적인 설명은 비록 짧지만 매우 감동적이며 교훈적인 두 가지 일들을 깨닫도록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Ⅰ. 이스라엘의 영광은 잿더미로 드러났으며 매몰되고 상실되어, 마침내는 수치로 변했다. 이스라엘이 되어져야 했던 것과 실제로 되었던 것은 여기서 얼마나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가! 그 왕권은 얼마나 불경했으며, 그 명예는 얼마나 땅에 떨어졌던가!
1. 그들이 영이시며 영원한 정신이신 살아 있는 참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하나님 자신이 직접 주신 그를 예배하는 율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명예였다. 그러나 "불변하시는 하나님이 영광을 소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놓음" 으로써, 그들은 이 명예를 상실했고, 자기 손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예배하는 열방들의 수준으로 전락했다. 우리는 여기서 그 왕이 "여로보암의 죄악을 이어 받았다는 것" 과(2절) 사람들이 그 "죄악으로부터 떠나지 않고 그 안에서 행하고 있었다는 것" 을(6절) 발견하게 된다. 이 두 우상화된 송아지들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배웠고 살아 있는 신탁(예언자)이 위임되었던 백성들에게 있었다는 것보다 더 큰 치욕은 있을 수 없었다. 열 지파(이스라엘)에 대한 모든 역사 가운데서도, 우리는 그 우상 숭배에 대한 아무런 공격을 발견할 수 없다. 누가 왕이 되었든 여전히 송아지가 그들의 신이었고, 그들은 그 수치에 자신들을 바쳤다.2. 그들은 하늘의 특별한 보호 아래 있다는 것과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방벽이요 그들의 도움의 피난처요, 그들의 뛰어나신 검이라고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명예였다. 이로 인하여 "아, 이스라엘아, 너는 복이 있도다." 그러나 전에도 자주 그러했듯이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이 영광을 빼앗겼으며, 온갖 비난거리가 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의 죄악에 의해 그들은 하나님을 분노에로 자극시켰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하사엘과 벤하닷의 손에 붙이셨다" (3절). "하사엘은 이스라엘을 압박했다" (22절). 확실히 이스라엘처럼 그렇게 자주 그 이웃 나라들에 의해 뜯기고 약탈당했던 나라는 없었다. 이것은 죄로 인해 그들 자신에게 초래된 것이었다. 그들이 그들의 울타리를 허물도록 하나님을 자극했을 때, 그들의 좋은 땅은 이웃 나라들에게 그 땅을 삼키도록 하는 유혹을 초래했던 것이다. 여호아하스 시대에, 아람으로 인한 많은 약탈에 의해 이스라엘의 힘은 몰락하게 되었으므로, 그 왕국이 민병과 전투에 임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은 불과 "마병 오십과 병거 십승과 보병 일만으로" 형편 없이 줄었다(7절). 수많은 이스라엘 군이 이처럼 되었는가? "어떻게 황금이 빛을 잃게 되었는고!" 한 민족의 타락은 확실히 그 민족을 비천하게 만들 것이다.
Ⅱ. 이스라엘의 옛 명예에 대한 어떤 흔적이 이 잿더미 속에서도 나타나 있다. 이러한 모든 곤경에도 불구하고, 이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며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아직 잊혀지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1. 그들이 기도하는 민족이라는 것이 이스라엘의 옛 명예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그 명예가 다소 남아 있음을 발견한다. 그들의 왕인 여호아하스는 그의 재난 가운데에서도 "여호와를 찾았고" (4절) 송아지들에게가 아니라(그것들이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여호와께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왕들은 하나님의 문전에서 구걸자가 되었으며 인간들 중의 가장 위대한 자가 그의 왕좌의 발판에서 초라한 탄원자가 되었다. 곤경이 그들을 그런 상황으로 몰아 넣었다.2.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까이 계셨다" (신 4:7)는 것이 이스라엘의 옛 명예였으며 또한 하나님은 지금도 그러했다. 비록 그 기도를 가증한 것으로 여겨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여호와께서는 여호아하스의 말을 들으셨다." 여호아하스 자신과 그의 민족을 위한 기도에 대하여(4절) "그는 구원자를 이스라엘에 보냈으니" (5절) 그 구원자는 여호아하스 자신이 아니라-여호아하스의 통치 기간 중에는 언제나 하사엘이 이스라엘을 핍박했다(22절)-그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하나님께서 그가 아람을 이기게 해 주셨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이 그의 선조 때로부터 가지고 있었던 그 도시들을 회복했다(25절). 여호아하스의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주었던 이 은혜로운 응답은, 그를 인한 것도 무가치한 그 백성들을 인한 것도 아니며 다만 아브라함과 더불어 했던 계약을 회상했기 때문이었다(23절). 즉 이러한 긴박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그 약속이 있는 이래로 줄곧 그 계약을 기억하고 있었다(레 26:42). 하나님은 자비를 보여 주시는 데는 얼마나 신속하며, 기도를 듣는 데는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리고 은혜를 베풀 이유를 찾으려고 얼마나 애쓰는가를 보라! 그렇지 않다면 그는 이스라엘이 그렇게 자주 깨뜨렸고 그 모든 특혜를 상실했던 저 옛 계약을 되돌아 보시기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보고 영원히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으로 우리를 주관하도록 하자. 그를 저버렸던 사람들도 돌아와 회개하도록 용기를 주라. 왜냐하면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시 130:4).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통치(열왕기 하 13:10-19)
여기에는 예후의 손자이며 여호아하스의 아들인 여호아스 혹은 요아스의 이스라엘 통치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들이 그 왕권에 대한 그 계승자에게 그 때 유다의 왕이었던 그와 똑같은 이름을 부여한 것은 아마도 예후의 가문이 다윗의 가문을 다소 존경하려 했던 때문일 것이다.
Ⅰ. 그와 통치에 대해 여기에서 주어진 일반적인 설명은 우리가 이미 보아왔던 것과 매우 유사한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별로 주목할 만한 것이 못 된다(10-13절). 그는 최악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여로보암 가문의 고래의 정책적인 우상 숭배를 그대로 지켜 왔기 때문에,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 라고 했다. 그 하나의 죄악만으로도 그의 이름에 악명의 오점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악으로 볼지 모르지만, 그것은 "여호와 보시기에 매우 사악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에 따른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영감을 받은 기자들이 그의 행위와 그래서 그가 싸웠던 그의 힘이 얼마나 가볍게 취급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래서 그 기자는 그것을 일반 역사가들이 기록하도록 남겨 놓는 한편, 그가 엘리사에게 보였던 관심만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의 책에서는 하나의 선한 행위가 스무 가지의 거창한 행위들보다 더 선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성경 기자는 왕과 그의 군대를 정복한 자보다는 한 예언자를 존경한 자에게 더 큰 명예를 돌리고 있다.
Ⅱ. 그와 엘리사 사이에 지녔던 것에 대한 특별한 설명은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일들을 내포하고 있다.
1. 엘리사가 병이 들었다(14절).(1) 그는 오래 살았다. 왜냐하면 그가 처음 예언자로 부름 받은 지 지금 약 육십 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커다란 축복이었고 특별히 예언자들의 생도들에게 그러했으니, 그것은 그가 오랫동안 찬란히 빛났기 때문이다. 엘리야는 엘리사의 4분의 1의 기간으로 자기의 증언을 마쳤다.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그들의 날을, 길든지 짧든지, 무한한 지혜자가 적합하다고 보는 만큼만 누리게 된다.
(2) 예후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것으로부터 시작한 엘리사의 활동 기간의 후반부 전체에 대해서는-요아스가 그의 통치를 시작하기 전 45년간-우리는 그에 대해서나 그가 한 일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비로소 그가 임종에 임박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는 말년까지 활동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전에 해 왔던 일들만큼 그렇게 유명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의 전성기는 그의 생애에 비하면 대단히 짧은 것이었다. 옛 사람들의 모호함을 나무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꺼이 받아들이게 하자.
(3) 엘리야의 영이 엘리사에게 머물렀다. 그러나 그는 엘리야처럼 불병거로 하늘에 오르도록 보내지지는 않았으며 세상의 일반적인 길로 세상을 떠났다. "모든 사람들의 방문을 받았다." 만일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보다 어떤 자를 더 뛰어나게 영예롭게 한다면 은사나 은총에 있어서 누가 그들보다 뛰어날 수 있으며, 누가 잘못을 찾을 수 있으랴. "하나님은 그 자신의 뜻대로 행할 수 없겠는가?"
2. 요아스 왕은 엘리사가 병들어 있을 때에 그를 방문하여 그를 위하여 울었다(14절). 신실한 예언자를 존중하고 사랑했다는 것은 그의 마음 속에 다소 선한 요소가 있다는 증거이다. 그는 그 예언자를 이스라엘의 문제거리로 증오하거나 박해하지 않았으며 그를 사랑했고 그 왕국의 가장 위대한 축복으로 존경했고, 따라서 그의 죽음에 대해서 애통해 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한 사역자들은 저들의 양심에도 아주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자들을 존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관찰하자.
(1) 그 왕이 엘리사의 병든 소식을 들었을 때, 왕은 그를 방문하여 임종 유언과 축복을 받았다. 그 일은 그에 대한 경멸이 아니었으며, 그가 비록 왕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영예롭게 한 자를 그렇게 존경한 것은 결코 그에게 수치거리가 되지 않는다. 훌륭한 사역자들이나 다른 훌륭한 사람들의 병상이나 임종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의 커다란 영적 이익이 되는 것이니, 우리는 죽는 법을 배울 수 있으며 그들이 죽는 순간에도 신앙으로부터 힘있는 위로를 받는 것을 봄으로써 더욱 신앙을 굳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비록 오랫동안 활동해 왔었지만 이제 자연 과정에 따라서 더 이상 오래 살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러나 왕은 그가 병들어 죽어가는 것을 보았을 때 그를 위하여 울었던 것이다. 늙은 사람들은 많은 경험을 했으며 따라서 조금도 멸시해서는 안 된다. 많은 경우에 한 늙은 증인은 열의 젊은 증인들보다 나은 것이다.
(3) 그는 엘리야가 떠나갈 때 엘리사 자신이 슬퍼했던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라는 그런 말로서 엘리사를 슬퍼했다. 그는 아마 그 유명한 이야기를 들었거나 읽었을 것이다. 자기들을 앞선 세대에게 정당한 명예를 돌리는 자들은 흔히 그 다음 세대로부터 똑같은 명예로 보상 받게 된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 11:25).
(4) 그런데 이 왕은 이기적이었다. 그는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병거요 마병이었기 때문에 그의 상실을 슬퍼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처럼(7절) 이스라엘이 병거나 기수에 있어서 그토록 약체였었던 때에 그를 그렇게 아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때에는 불과 마병 오십과 병거 십승밖에 없었던 때이다. 선한 사람들이 나라를 보호하는 데에 얼마나 크게 공헌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유보시키는가를 아는 지도자들은, 그들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슬퍼하는 이유를 알 것이다.
3. 엘리사는 그 왕에게, 이스라엘의 현재의 압제자인 아람을 물리치게 되리라는 큰 확신을 갖게 해 주었고 그들을 대항하여 용감히 싸우라고 격려했다. 그러므로 엘리사는 그 왕이 자기를 작별하기 싫어하는 이유가 그가 저 끊임없는 적국을 막아 줄 수 있는 그 나라의 위대한 보호자는 엘리사 자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요, 그들을 물리치려는 계획에 있어서도 엘리사 자신의 축복과 기도를 크게 의지하고자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엘리사는 이렇게 말했다. "자, 그것이 당신의 슬픔의 원인이라면 염려하지 마시오, 왜냐하면 내가 무덤 속에 있을 때 당신은 아람에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틀림없이 당신과 함께 할 것이오. 그는 다시금 성령을 통해서, 당신을 위하여 기도할 다른 예언자들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한 손에만 매여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의 사역자를 데려가시지만 그의 과업을 계승시키실 수 있는 것이다.
아람을 치도록 그 왕을 고무시키기 위하여 엘리사는 왕에게 하나의 표적을 주어 그에게 "활과 화살을 집으라고" (15절) 명령한다. 그리고 아람으로부터 그의 왕국을 구원하기 위하여 왕은 직접 작전에 나서서 전쟁의 위험과 피곤을 감당할 결심을 해야 된다는 것을 그에게 주지시킨다. 하나님이 주인공이 되실 것이며 그는 도구가 될 뿐이다. 나아가서 왕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표적을 보여주기 위하여 엘리사는 다음과 같이 그에게 증표를 지시했다.
(1) 아람을 향해 화살을 쏘라(16, 17절). 의심할 것도 없이 그 왕은 그 예언자보다 활 쏘는 법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쏘아지는 그 화살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쏘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마치 처음으로 활쏘기를 배우는 자처럼 그 예언의 명령을 따랐던 것이다. "왕의 손으로 활을 잡으소서-창을 여소서-쏘소서." 그 보다도 그가 전에는 활을 쏘아 보지 못했던 자처럼, 엘리사는 "자기 손을 왕의 손에 안찰했다(얹어 놓았다)" 고 했으니, 그것은 아람에 대한 원정 중에서도 항상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시와 힘을 얻어야 하며, 그 자신의 힘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해야 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으면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느니라" (시 18:34; 146:1). 하나님의 능력의 협력과 전달로 인하여, 죽어가는 예언자의 그 떨리는 손은 전력을 다한 왕의 손보다 더 큰 힘을 이 화살에다가 주었던 것이다. 아람은 요단 동쪽에 놓여 있는 이스라엘 땅을 저들 마음대로 차지해 버렸었다(10:33). 그러므로 그 화살은 그 쪽으로 향했다. 비록 그 화살은 한 방향으로 아무렇게나 나갔지만, 그 화살을 쏘게 하는 그 예언자가 내린 해석은 다음과 같다.
[1] 그것은 아람의 힘과 점령 상태에도 불구하고 왕은 아람을 공격하라는 명령이었다.
[2] 성공에 대한 약속이었다. "그것은 여호와의 구원의 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살" 이로다. 구원을 명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그것을 성취시키시려 한다면, 누가 방해할 수 있을 것인가? 구원의 화살은 그의 것이다. 그가 그의 살을 쏘시면, 그 일은 이루어진다(시 18:14). "당신은 아벡에서 아람을 치리이다. 그곳은 그들이 지금 주둔해 있는 곳이거나, 아마 그들의 병력의 집결지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진열하리다. 즉 당신과 당신의 나라를 괴롭히고 압제하던 자들을."
(2) "화살로 치라" (18, 19절). 그 예언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왕이 아람에게 승리할 것을 확신시켜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왕을 시험해 보고 싶었고, 그가 어떻게 승리를 거둘는지 알고 싶었다. 즉 벤하닷이 아합의 수중에 들어왔을 때 아합이 했던 것보다 더욱 큰 증오로 그들을 압도할 것인지 아닌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험을 위하여, 그는 왕에게 "화살로 땅을 칠 것을" 부탁했다. 곧 "그들이 여호와의 구원의 살에 의해서 땅에 엎드러져, 당신의 발 앞에 놓여질 것을 믿으시오. 왕이여, 당신이 그들을 굴복시킨 다음에 어떻게 할는지 내게 보이소서.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의 목을 당신에게 주시면, 그들을 바람 앞의 티끌과 같이 작게 부수어 버리겠나이까?" (시 18:40, 42) 그 왕은 그런 경우라면 당연히 보여야 할 그러한 열심과 열정을 보이지 않았으며, 겨우 세 번 이상도 치지 않았다. 아람인들에 대한 어리석은 동정심에서, 마치 그는 그들을 해치는 것을, 적어도 그들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양 땅을 세 번만 쳤으며, 자기와 자기 백성들에게는 긍휼을 보인 적이 결코 없었고 또 그렇게 하려고도 하지도 않았던 그들에게 그는 자비를 보여 주려고 하고 있다. 또는 아마도 그가 화살로 치는 일이 어리석은 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거나, 왕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유치하게 보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냉담하게도 세 번만 쳤는지도 모른다. 치는 것이 단순히 그 예언자를 만족시키기 위하여서라면 3번만으로도 충분한 장난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표정을 얕봄으로써, 그 표징이 의미하는 내실까지 놓쳐버렸다. 그래서 결국 그 죽어가는 예언자를 크게 슬프게 만들었다. 그는 왕에게 화를 내면서, 적어도 대여섯 번을 쳤어야 했을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이 줄어들었는가? 왜 그는 자기 자신의 기대와 노력에만 의지해야 했는가? 자신이 잘 되기를 바라는 자들이 자기들의 빛에 서서 자기들에게 주어진 자비를 잃어버리고, 영적 적을 물리칠 수 있는 자기 자신들의 유리한 조건을 잃게 되며, 오히려 적을 유리하게 하는 그런 사태를, 선한 사람들이 보아야 한다면 그것은 선한 사람들에게는 괴로움이 아닐 수 없다.
엘리사의 최후(열왕기 하 13:20-25)
Ⅰ. 우리는 여기에서 엘리사의 무덤에 참예하게 한다. 그는 매우 나이 많아서 죽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장사지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오는 일은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 준다.
1. 그의 목숨 속에는 심판을 면하게 하는 어떤 권능이 작용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죽자마자, 모압인 일당이 그 땅을 침범했기 때문이다-그런데 그들은 전장에서 이스라엘을 치는 큰 군대가 아니라, 불시에 살인을 하고 약탈을 하는 방랑의 무리들이었다. 하나님은 죄악 된 백성을 징벌하는 많은 방법들을 가지고 계신다. 그 왕은 아람인으로부터의 위험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보라. 모압인들이 침입했다. 곤경은 가끔 우리가 거의 두려워하지 않던 곳으로부터 온다. 엘리사의 죽음에 이어 즉각 이것을 말하고 있는 사실은, 하나님이 신실한 예언자를 데려가는 것은 심판이 임박했다는 전조임을 의미한다. 대사가 소환될 때는, 전령도 있게 마련이다.2. 그의 시체에는 무슨 힘이 있었던가? 그것은 또 하나의 다른 체에다가 생명을 주입했다(21절). 비록 매우 간단히 언급되어 있지만, 이 커다란 기적은 엘리사의 사명을 말해 주는 결정적인 증거이며, 그의 모든 예언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현생 이후의 또 다른 삶에 대한 명백한 암시였다. 엘리사가 죽었어도, 그것이 그에게는 끝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끝이라면, 그가 이런 일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용하는 활동에서 실체를 추론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여호와는 아직도 엘리사의 하나님임을 보여 주었다. 따라서 엘리사는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그리스도의 사건과도 관련되는 것 같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에 의하여, 무덤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는 생명에로 이행해 가는 안전하고 행복한 통행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비록 엘리사는 죽었지만, 그에 의해 주어졌던 약속에 따라서, 이스라엘의 운수가 아주 침체되고 상실된 것 같아 보인다 하더라도 소생하여 다시금 번성할 때가 오리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 이웃들이 어떤 사람의 시체를 무덤으로 운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시체가 매장되어야 했던 곳 가까운 거리에서 보아왔던 모압인들의 손에 그 시체가 넘어갈 것을 두려워 하여, 그 시체를 그 다음으로 편리한 곳에다 놓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곳은 엘리사의 무덤이었다. 그리하여 시체가 엘리사의 유골에 닿자마자, 회생했다. 그래서 아마 그는 친구들과 더불어 다시 집으로 갔을 것이다. 조세푸스는 그 이야기를 다르게 해석한다. 곧 어떤 도둑들이 한 정직한 행인을 죽이고 강탈한 후에, 그의 시체를 엘리사의 무덤에 던졌는데, 그것이 즉시 회생했다는 것이다. 엘리야는 그가 떠나갈 때에 영광을 받았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그가 원하시는 대로 영예를 나눠 주신다. 그러나 어떻든 모든 성도들은 영광을 받을 것이다(사 11:10). 성도들을 가까이 하며, 생사간에 우리의 운명을 그들과 더불어 함께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Ⅱ.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칼에 주목해 보자. 우리는 그 칼이 아람을 무찌르는 데 성공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게 된다.
1. 그의 성공의 이유는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긍휼히 여기시며 권고하셨다" 고 했다(23절). 여기에 표현된 몇 가지 동일한 의미는, 우리로 하여금 그와 같이 거역하는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데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선하심의 승리를 보고 경탄케 한다. 그들이 진멸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여호와의 긍휼 때문이다. 곧 여호와께서 아직까지는 그들을 멸하시려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결국에는 스스로를 파멸시켜 버릴 것을 예견하셨으나, 아직까지는 그들에게 유예 기간을 주시어 회개의 여지를 남겨 두려고 하신 것이다.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지연되는 것은 그의 자비하심의 영광에 기인하는 것인지, 하나님의 정의가 모호하기 때문은 아니다.2. 그의 성공의 결과로 이스라엘에는 번영이 왔다. 요아스는 아람이 차지하고 있던, 이스라엘의 잃어버렸던 성읍을 벤하닷의 손에서 다시 회복시켰다(25절). 이 사건은 압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 그 성읍들 자체에도 커다란 자비였고, 그 성읍들이 회복됨으로써 그 세력이 훨씬 강화된 이스라엘 왕국 전체에 대하여도 커다란 자비였다. 화살을 가지고 땅을 세 번 쳤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아람을 꼭 세 번 쳤다. 그리고 나서는 그의 승리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때 늦은 후에 자기들이 불신했던 것과 욕망이 옹졸했던 것을 후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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