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합 집안의 종말(열왕기 하 10:1-14)
예후는 요람과 이사벨을 죽이고 이스르엘을 소유했다. 이제 그의 더 많은 활동을 살펴보자. 예후는 아합의 모든 족속이 멸절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이 피의 숙청 작업을 진행시켰다. 그는 이 일을 거짓으로 하거나 중도에서 그치지 않았다(렘 48:10).
Ⅰ. 예후는 사마리아의 호위병 자신들에 의해 죽임당한 아합의 모든 아들들의 머리를 취했다. 아합의 칠십 아들들의 수는 기드온 아들의 수와 같다(삿 8:30). 그가 수많은 아들을 낳은 것으로 볼 때는, 그의 집안이 오래 갈 것 같았으나 단번에 멸절되고 말았다. 이렇게 화살로 가득 찬 전통(箭筒)도 하나님의 복수로부터 그의 가족을 보호할 수 없었다. 수가 많은 집안들, 특히 악한 집안은 오랫동안 번성하리라고 기대하면 안 된다.
아합의 아들들은 당시에 사마리아에 있었다. 그들은, 아람과의 전쟁이 있을 경우에도 사마리아는 강한 도성이요, 예후의 반란이 있을 경우에라도 안전의 도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스르엘의 방백들이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아합의 아들들을 보호하고 국사에 대해서 조언해 주기 위해서 사마리아에 가 있는 조정의 대신들이었다. 그들 중의 몇 사람은 급료를 받고 있는 아합 아들의 개인 교사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교육을 위임받았으며, 아합 아들들의 출생과 지위에 대해서 좋게 생각했다. 그러나 두렵게도 그들은 아버지 아합 집안의 우상을 섬기도록 그 아들들에게 가르쳤으며, 그들을 바알의 숭배자로 만들었다.
예후는 그들을 없애기 위해서 자기 군대를 사마리아로 보내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했다. 오히려 그들의 후견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살해자가 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현저히 드러날 것이다.
1. 예후는 아합의 아들들을 지키는 그들의 친구들에게 도전장을 보냈다(2, 3절). "아합의 집에 대해서 열심으로 충성하고, 전적으로 그를 위해 있는 너희들은, 이제는 태도를 분명히 할 때다. 사마리아는 강한 도성이고, 너희들의 소유이다. 너희들은 군대를 장악하고 있다. 너희들은 왕의 모든 가족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을 택하여 너희들을 처형하게 하는 게 좋으리라. 너희 주인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어질고 정직한 자를 택하지 않으면, 너희는 그들 중 가장 연로한 자에게도 구애받지 않게 됨을 알라. 너희는 너희들이 어떤 정신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이라. 그 아들들 중의 한 사람을 뽑아서 그의 아버지의 왕관을 씌우고, 너희의 생명과 재산으로 그를 지키라."예후는 그들이 이런 일을 하기를 원치도 아니했고, 그들이 하리라고 기대도 아니했다. 단지 그렇게 함으로써 겁에 질려서 하나님의 계획에 감히 대항할 수 없는 그들을 조롱해 준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리라는 것이다. 신앙을 버린 사람들은 종종 그것과 함께 자기들의 지각과 용기도 잃게 되며, 그 때문에 책망 받아도 당연하게 된다.
2. 이렇게 해서 예후는 그들로부터 복종을 받았다. 그들은 신중히 생각해 보았다. "보라 두 왕이 그 앞에 서지 못하고 희생되었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를 당할 수 있는가?" (4절) 그래서 그들은 예후에게 복종을 통고했다. "우리는 당신의 종이라. 당신의 신하라. 무릇 명하는 것을 우리가 행하고, 아무 사람이든지 왕으로 세우지 아니하리니, 당신의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십시오." 그들은 예후에게 대항하는 것이 소용없는 짓임을 알았다. 따라서 복종하는 것이 자기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알았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설복시켜야 할 이유는 실로 많이 있다. 수많은 왕들과 위대한 사람들도 그들의 악함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하심 앞에 꺼꾸러졌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설 수 있겠는가? "우리가 호기심으로 여호와를 진노케 하겠는가? 우리가 그보다 강한가?" 아니다. 우리는 그에게 굴복하든가 죽든가 해야 한다.3. 이러한 사실은, 그들을 교육시키던 자들이 바로 그들의 사형자가 됨으로써 잘 입증되었다. "만일 너희가 내 편이면, 너희 주인의 아들된 사람들의 머리를 취하여 내일 이 맘 때에 가져오라" (6절). 예후는 이 일이 이루어져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자기가 그 일을 하기는 꺼려했다. 누가 감히 그들이 그렇게 하리라고 기대나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과연 신용을 그렇게 배반할 수 있을까? 그들이 주인의 아들들에 대해서 그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아합의 아들들은 평시처럼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경배하기 위해 허리를 구부렸고, 그 때에 그들은 70명 왕자들의 목을 자르고, 광주리에 담아 예후에게 보냈다(7절). 여기서 친구를 신뢰하지 말 것과, 양심의 통제를 받지 않는 지도자를 신뢰하지 말 것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께 대해서 거짓된 자가 그의 왕에게 신실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불의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보라. 이 이스르엘의 장로들은 나봇을 죽이기 위해서 이사벨의 명령에 악질적으로 추종했었다(왕상 21:11). 이사벨은 그들을 지배하던 자기의 권력을(아마) 자랑했다. 그러나 지금은 바로 그 동일한 비열한 정신이 그들로 하여금 예후에게 순종케 했으며, 또한 아합의 아들들을 살해하라는 그의 명령에 쉽게 복종케 했다. 자기들이 굴리던 돌이 언젠가는 자기들에게 되돌아오게 되길 바라지 않거든 누구든 전재적인 권력을 탐하지 말자. 자기 백성들을 종으로 만들었던 임금들은, 그들이 반역하기에 가장 쉬운 길을 만들어 놓은 셈이다. 또한 이사벨이 했던 것처럼 인간의 양심을 강압하는 것은, 그들은 지배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왕자들의 머리가 예후 앞에 왔을 때, 그는 그 살해자들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인정했다.
(1) 예후는 이 복수의 집행자들이었던 그들을 비난한 것으로 보인다. 그 머리들은 본래 재판을 하던 장소인 그 문에 두 무더기로 쌓여졌다. 거기서 예후는 하나님과 세상 앞에서 그 집행자들을 놓아 주었다(" 너희는 의롭다." 9절). 그리고 사마리아 치리자들이 지금 했던 그 일을 가지고 그는 자신을 변호했다. "나는 한 사람을 죽였지만, 그들은 이 모든 사람들을 죽였도다. 나는 이 일을 음모하고 계획했으나, 그들은 단순한 아첨과 묵종으로 이 일을 행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아합 집의 친구 중 어느 누구도 내가 한 일에 대해서 비난하지 말라. 바로 그들의 장로들과 그 고아들의 보호자들 자신이 이 일을 했도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나쁜 일을 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비난을 경감시키려는 것은 비열한 일을 하는 자들에게서 흔히 있는 일이다.
(2) 그러나 예후는 이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으로 해결한다. "여호와께서 그 종 엘리야로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도다" (10절).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죄를 짓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들이 나쁜 의도에서 한 죄악을 가지고도 하나님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시며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지라도 그러하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들이 불의함 그 속에서도 의로우시다. 앗수르인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 와 정의의 도구가 되었을 때, "그(하나님)의 뜻은 이와 같지 아니하며 그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였다" (사 10:7).
Ⅱ. 예후는 아합의 집에 남아 있는 모든 자들을 계속 죽였다. 즉 그들은 아합의 자손들, 그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 그의 궁내 대신들, 장관들, "존귀한 자들" (11절), 악한 일에 그와 같이 협력했던 모든 친척과 친지들, 그의 우상 숭배를 위해 고용되었고 악한 길에서 돌아서지 않았던 제사장들을 모두 죽였다.
예후는 이스르엘에서 한 일과 같은 일을 사마리아에서도 했다. 즉 그가 "사마리아에 남아 있는 아합에게 속한 자들을 모두 죽여 진멸하니라" (7절). 이것은 피의 숙청 작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경우에도 그처럼 해서는 안 된다. 죄인은 고통당해야 되나 죄 없는 자는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전율적인 파괴는 모든 불신앙적인 것들에 대한 최종적인 파괴의 한 모형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하늘에 칼을 가지고 계신다. 그 칼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사람에게 내려 올 것이며, 마침내 "피로 가득 찰" 것이다(사 34:5, 6). 그 때에 "그의 눈은 용서치 않을 것이며, 동정도 베풀지 않을 것이다."
Ⅲ. 예후가 사마리아로 내려가다가 아하시야의 형제를 만나자 그들도 모두 죽였다(12-14절). 아하시야의 형제들은 아랍 사람들에 의해 죽었다(대하 22:1). 그러나 이들은 그의 형제들의 아들들이었다. 이들은 유다의 방백들이었고, 아하시야를 섬기는 자들이었다(대하 22:8). 여러 가지 일들로 그들은 예후가 지금 시행하고 있는 그 복수에 대해서 불쾌하게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1. 그들은 아달리야 자손인 아합 집안의 일가였다. 그러므로 예후의 위임에 해당되었다.2. 그들은 아합 집안의 죄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3. 그들은 지금 요람 왕의 "아들들(왕자들)과 태후" 이세벨의 "아들들에게 문안하기 위해서" 아합 집안의 왕자들이 있는 왕궁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아합의 친척일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애착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42명의 왕자들은 희생제물이 될 양으로 지정되었으므로, "털깎는 집의 웅덩이 곁에서" 엄숙하게 죽임을 당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알게 하시려고 이 심판을 행했음이니라." (시 9:16).
바알 숭배자들의 종말(열왕기 하 10:15-28)
예후의 계속적인 활동을 여기서 볼 수 있다.
Ⅰ.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 이라는 한 선한 사람과 우의를 맺는다(15, 16절). 이 여호나답은 이 세상에 대해서는 자제하며 세상 일에 대해서 무관심했던 자이다(이런 사실은 포도주도 먹지 말고 성읍에 살지도 말라고 한 레갑의 후손에 대한 부분에서 볼 수 있다. 그의 후손은 300년 동안 이 분부를 지켰다. 렘 35:6 이하).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부탁하신 일을 하는 예후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서 이번엔 그를 만나러 갔다.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은, 만일 현명하다면, 선한 사람들의 협조를 귀히 여길 것이요, 그들의 말을 들을 것이다. 다윗은 기도했다. "주를 경외하는 자로 내게 돌아오게 하소서" (시 119:79). 이 여호나답은 예언자도 제사장도 레위인도 왕자도 치리자도 아니었지만, 매우 신중하고 경건했으며, 자기 부정의 생활과 그가 이제까지 살아온 대로 헌신의 생활로 인하여 널리 존경받던 자라고 볼 수 있다. 예후는 군인이지만 그를 알았고, 존경했다. 예후는 사실 그를 부르러 사람을 보내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예후가 그를 만났을 때(비록 예후는 지금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일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그에게 말을 하기 위해 멈추어 섰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살펴보자.
1. 예후는 그에게 인사했다. 어원대로 하면 "그에게 축복했다" 즉 그에게 존경을 표시했고, 신실한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표현으로 호의를 베풀었던 것이다.2. 여호나답은 자기도 그의 뜻대로 하고 그가 하는 일에 진심으로 찬동한다고 확인해 주었다. 예후는 "자기의 마음이 그에게 대해서 진실하다" 고 고백했다. 즉 그는 여호나답의 사람됨에 참된 애착을 느끼며, 그가 나실인의 영광을 가진 것을 존중했다. 그리고는 그도 자기와 똑 같은 진실을 가졌으며, 하나님이 자기에게 씌워준 고귀한 왕관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했다. "너의 마음이 진실하냐?" 우리도 계속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 "나는 제법 그럴 듯하게 신앙 고백을 한다. 그리고 사람들한테서 명성을 얻고 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진실한가?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신실하며 열심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여호나답은 그러하다고 말했으며, 그에게 복종하고(손을 내미는 것으로 표현된다. 대하 30:8), 그와 협력하는 마음의 표시로 그의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예후가 실시하고 있는 복수와 개혁의 일을 하는데 그와 하나가 되게 되었다.
3. 예후는 그를 병거에 태우고 사마리아로 갔다. 예후는 지금 그를 자기 병거에 태움으로써 존경을 표시했다(여호나답은 왕이 아니었기에, 병거를 타는 데 익숙지 못했다). 그러나 예후는 그로부터 더 많은 존경을 받았고, 자기의 현재 일에 대한 좋은 협조를 받았다. 생각이 깊은 사람들이 여호나답이 예후의 병거에 같이 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면, 예후를 더 좋게 생각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의 경건이 다른 사람들의 정치에 봉사하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일을 꾸미는 사람들은 선한 사람들을 자기들의 일에 동참시킴으로 자신들을 강하게 만든다. 여호나답은 인간적인 지혜의 기술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말엔 "단순성과 신앙적인 진실성" 이 있었다. 그러므로 예후가 하나님의 종이었고 바알의 적대자였으면, 그는 예후의 신실한 동료가 되었을 것이다. (예후가 말하기를) "오라. 그리고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 그러면 너는 나의 하는 일을 지지할 이유를 발견케 될 것이다."
이것은 흔히 예후가 진심으로 말한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으며, 오히려 그가 하는 일에서 본다면,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다고 추정할 수도 있는 근거를 제시했다고 본다. 또한 여호와에 대한 그의 가장된 열심은 사실 자신과 자기의 출세를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로
(1) 예후는 그것을 자랑했으며, 마치 하나님과 인간이 그것 때문에 그에게 은혜를 많이 입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2) 예후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행동했던 바리새인처럼, 그가 하는 일이 보여지고 알려지길 원했다. 정직한 심령은 하나님께 자신을 증거하며 하나님의 허락하신 것 외에는 탐내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찬양을 목적하고 그들의 칭찬을 우리의 최종 목적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거짓된 기초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후가 어느 정도로 그렇게 보였는지 판단할 수 없으나, 여호나답은 그와 함께 갔다. 그리고 아마 사마리아에 남아 있는 아합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도록 그를 격려해 주고 도와줬을 것이다(17절). 인간은 잔악성을 미워하고, 정의를 사랑한다. 또한 피에 대한 갈망보다는 "악인의 피에서 그의 발을 씻으려고" 한다(시 58:10).
Ⅱ. 예후는 모든 바알 숭배자의 살해를 계획한다. 바알 숭배는 아합 집안의(복수를 원하여) 부르짖는 죄였다. 이 우상 숭배의 뿌리는 근절되었으나, 그것에 영향받은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위험성이 있었다. 하나님의 율법은 분명했다. 즉 그런 자들은 처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수가 너무 많았으며, 전국에 흩어져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예후의 재위 초기에는 위협적인 요소였을 것이다. 그들을 모두 찾아내는 일은 어려운 일이며, 그들을 잡아서 한 사람씩 처형하는 일도 어려운 일이었다. 예후의 계획은 한꺼번에 모두 그들을 처형하려고 했다.
1. 거짓과 음모로, 그는 그들을 바알의 신전에 모두 모이게 했다. 그는 자기도 아합이 했던 것보다 더 열심히 바알을 숭배하는 척했다(18절). 아마도 예후는 이것을 비꼬아서 말했거나, 그 백성 전체가 이와 같은 계획에 반대하는지 그리고 그의 선조의 우상 숭배를 강화시키는 일을 원망하는지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선조의 폭정을 강화시키겠다는 르호보암의 위협을 원망했던 것처럼, 그들이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예후와 상관이 없고 님시 자손에게도 유업이 없도다" 고 말하며 분개했을 지를 시험해 보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바알 숭배자를 의도적으로 속이기 위해서 말해졌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말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진리는 어떤 인간의 거짓을 필요치 않는다. 예후는 자기와 함께 바알에게 제사 드리는 일에, 예언자들, 제사장들만이 아니라 전국에 있는 바알을 숭배하는 모든 사람들이 참석할 것을 요구하는 선포를 내렸다. 이들은 엘리야 시대만큼 많지는 않았다. 생각컨대 예후의 동료들은 그의 계획을 알았으나 반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고집 않고 멍청스런 바알 숭배자들은 매우 행복하다고 생각했고, 다시금 황금시대를 보리라고 생각했다. "요람은 바알의 주상을 제하였었다." (3:2). 그런데 예후가 그것을 회복시키려 한다면, 그들은 소원을 이루는 것이요, 장엄한 의식을 축하하기 위해서 기쁨으로 사마리아로 갔을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로 가득 찬 바알 신전과(21절) 예복을 입은 제사장들(22절)을 보는 것이 즐거웠으리라. 그리고 거기엔 모든 숭배자를 위한 예복이 있었기에 그들 자신도 배지나 바알과의 관계를 표시하는 어떤 부착물을 달았을 것이다.2. 예후는 여호와의 종은 한 사람도 그들 가운데 있지 않도록 주의를 시켰다(23절). 그들은, 이것이 바알 숭배가 이방인들에 의해서 더렵혀지는 것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 여겼다. 그러나 그들이 이로써 계획된 덫과 음모 속에 자신들이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그러나(모든 우상 숭배자들이 그들의 우상에 의해서 속임 당하듯이) 바알에 속아서 고통당한 그들이 예후한테 속아 죽게 되었다면, 기인한 일은 아니다.
3. 예후는 그들 모두를 죽이라고 명령했고, 여호나답이 그 일에 그와 협력했다(23절). 여호와의 종들이 친분 관계로나 호기심으로 그들과 함께 있지 않도록, 즉 어떤 밀도 가라지와 섞이지 않도록 엄밀한 조사를 했다. 또한 그들은 한 사람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80인을 바알 신전에 이르는 모든 길목에 세워두었다(24절). 그 다음에 호위병들이 정당한 복수의 방법으로써, 그들을 죽여서 "그들의 제사에 그들의 피를 섞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제사는 마치 그들이 맹목적인 헌신을 할 때 "피가 흘러나오기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던 그 제법과 같다(왕상 18:28). 이 일은 계속 수행되었다. 그리고 이런 일은 비록 보기엔 잔인해도 그들의 죄의 본질을 생각하면 실로 정당하다.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시다" (출 34:14).
4. 우상 숭배자들은 이렇게 처형되었고, 우상은 완전히 제하여졌다. 바알의 제사장들과 그들의 가족이 살았던, 바알 신전주변의 건물들(그것은 매우 많고 위엄 있기 때문에 성이라고 불리워졌다)도 파괴되었다. 바알의 거대한 상과 함께 바알 신전을 아름답게 장식했던 모든 작은 상들, 목상들, 그림들, 성소들이 내어다가 불살라졌다. 바알 신전은 파괴되어, 그 도성의 변소, 쓰레기장, 혹은 하수구가 되어 버렸다. 이것은 그것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거나 악명이 떨쳐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던 사람은 오직 7천 명뿐이었을 정도로 한때는 성행했던 바알 숭배는, 최소한 현재로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이교도의 모든 신들을 파괴하며, 조만간 그들 모두를 물리치고 승리하게 될 것이다.
예후 치적의 총평(열왕기 하 10:29-36)
여기에는 28년 동안 계속된 예후의 치리에 관한 모든 설명이 있다. 치리의 과정은 그 재임 시작 때에 지녔던 영광에 부합되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 수 있다.
Ⅰ. 예후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칭찬이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마도 그를 반역적이고 야만적이라고 비난했을 것이다. 즉 예후는 반역자요, 탐욕자, 살인자로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에 대한 불길 전조로 보고, 이렇게 해서 지위가 높혀진 가족이기에 머지 않아 파멸되리라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잘하였다" (30절)고 말씀했다. 그러므로 다른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1. 하나님은 예후가 한 일이 옳다고 하셨다. 예후가 선한 원리에서 이 일을 했는지, 그리고 이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거짓된 방법을 택하지는 않았는지는 정말로 의문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네가 나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였도다" (30절).우상 숭배자들과 우상 숭배의 근절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우상 숭배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리고 가혹하게 벌 주시는 죄악이었기 때문이다. 또 예후의 행동은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는 대로", 즉 그가 원하던 모든 것, 그가 계획한 모 든 것을 행한 것일 뿐이다. 예후는 하나님의 일을 계속 수행했다.
2. 하나님은 그에게 그로부터 그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왕위를 이어 4대를 지나리라" 는 상급을 약속했다(30절). 이것은 그 나라의 어떤 관작이나 왕가에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이었다. 아합의 집안은 사실 오므리, 아합, 아하시야, 요람 등 4명의 왕이 있었는데, 마지막 둘은 형제이었기 때문에 3대에만 이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전 가족이 다해서 약 45년밖에 계속되지 못했으나, 예후의 가족은 모두 120년간 계속되었다. 하나님을 위한 봉사 중에서 보상 받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다.Ⅱ. 예후는 앞으로 계속했어야 할 일에는 부주의했다. 여기서 예후의 마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과 그의 개혁이 부분적이었음을 볼 수 있다.
1. 예후는 모든 악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는 아합의 죄로부터는 떠났으나, 여로보암의 죄에서는 떠나지 않았다. 즉 바알은 버렸으나, 금송아지는 버리지 않았다. 바알 숭배는 사실 가장 큰 악이었으며, 하나님 보시기에 더욱 더 가증스런 것이었다. 그러나 금송아지 숭배도 큰 악이었다. 진정한 회개는 큰 죄뿐만 아니라 모든 죄, 즉 거짓 신들, 거짓된 우상 숭배로부터의 회개도 있어야 한다.바알 숭배는 이스라엘을 약화시켰고, 그 수효를 감소시켰고, 시돈 사람들의 신세를 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예후는 그것을 쉽게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금송아지 숭배는 정략적인 우상 숭배였다. 그것은 나라의 이유 즉 열 족속(이스라엘 왕국)이 다윗의 집(유다)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시작되었고, 보존되어 왔다. 그래서 예후도 그것을 버리지 못했다. 진정한 회개는 손해를 보던 죄들 뿐만이 아니라 이익이 되던 죄를-세속적인 이익에 대해서 파괴적인 죄들만 아니라 그 이익을 지지해 주고 도와주는 죄까지도 버려야 한다. 그런 것을 버리는 것은, 과연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지 않는지를 판가름하는 큰 시험이 된다.
2. 예후는 악을 버렸으나 선한 일은 생각지 아니했다. "그가 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31절). 그는 바알 숭배는 제하였으나 하나님을 숭배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법대로 행하지 않았다. 그는 거짓 종교를 근절하는데 많은 주의와 열심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에 대해서는(1) 주의도 하지 않았고, 조심도 하지 않았고, 되는 대로 살았다.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나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수행하는 일에는 아무런 열심도 없었고, 성경이나 예언자들 자신의 양심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저 모험적으로만 살았다. 조심성이 없는 사람들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므로, 마음에 선한 원리가 있어야 사람들은 조심성 있고 신중하게 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열성적이며, 그에게 범죄하는 일에 대해 조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2) 예후는 열성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종교적으로 행한 모든 일은 전심으로 한 일이 아니다. 그는 기쁨이나 관심도 없이, 하지 말아야 될 것을 하는 듯이 했다. 그 자신은 신앙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개혁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다. 타인에게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에게도 항상 복이 되지 못하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다.
Ⅲ. 예후의 집권시에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내렸다. 예후 자신이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일에 주의하지 않았을 때, 그 백성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들의 헌신이나 생활에 주의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두려운 생각을 능히 품을 수 있다 그 나라에는 전반적으로 경건이 부패되었고, 죄악이 증가되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이 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이스라엘을 찢으시니라" (32절). 이스라엘의 이웃 나라가 사방에서 쳐들어왔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의무 수행에 있어서 부족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건강, 힘 등 모든 면에서 부족케 하셨다. 아람의 하사엘 왕은 다른 누구보다도 이스라엘에게 위협적이며 피해를 많이 주었다. 하사엘은 "이스라엘의 사방을 쳤다." 특별히 그들은 요단 동편에 가까이 위치해 있었으므로, 그 지역들을 계속 침입하여 황폐케 했다.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들은 그들의 선조가 요단쪽에다 거처를 잡은 것 때문에 이제 보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모세가 그들을 책망한 적이 있다(민 32장). 이제 하사엘은 엘리사가 예언했던 대로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하나님은, 아모스 1장 3, 4절에서 보는 것처럼, 하사엘과 그의 나라를 대적하셨다. 다메섹 사람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사엘의 집에 불을 보내리니 벤하닷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고 하셨다.
끝으로, 예후 통치의 결론(34-36절)을 보면,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의 강대한 힘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에, 그의 강대한 활약과 성과에 대한 기억은 망각 속에 장사지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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