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열왕기하 0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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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기름 부음을 받은 예후(열왕기 하 9:1-10)

여기에서는 예후가 왕이 되도록 기름부음을 받은 사건을 보게 된다. 그 때 그는 라못 길르앗에서 왕에게 고용된 군대 지휘관(아마 참모장이었을 것이다)으로 있었다(14절). 거기에서 그는 그의 주인인 왕을 위해서 싸우고 있었으나, 그 주군을 대항하여 싸우라는 보다 높은 왕의 명령을 받은 것이다. 예후가 이전에도 정권을 목적했거나 생각했던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에게 제시된 임무는 전혀 의외의 일이었던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엘리야에 의해서 이미 기름 부음을 받았었으나, 다른 명령을 받을 때까지는 행동하지 말라는 비밀지령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마치 사무엘이 다윗에게 왕이 되기 오래 전에 기름을 부었던 것과 같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가능성이 없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엘리야가 하사엘에게도 또한 기름을 부었다고 생각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아니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이 일들을 하도록 명령했을 때는, 하나님이 그에게 엘리사로 하여금 "그를 대신하여 예언자가 되도록"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그것은 엘리야가 없어진 후에 하나님은 엘리사에게 지시하여 그들에게 기름 붓는 일을 맡기시려 한 것이었다.

Ⅰ. 주어진 임무는 무엇인가를 보자.

1. 엘리사는 예후에게 기름 붓기 위하여 자기가 직접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늙어서 그러한 여행을 할 수 없었고, 너무 잘 알려져서 그 일을 몰래 할 수가 없었으며, 사람 눈에 띄지 않고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예언자의 생도들 중의 하나를" 보낸다(1절). 그들은 엘리사를 아버지와 같이 존경했을 뿐만 아니라고(2:15), 그를 아버지와 같이 쫓고 순종했다.

예후에게 기름 붓는 이 일은



(1) 위험이 따랐다(삼상 16:2). 그러므로 엘리사 자신이 나서는 것은 적합치 않았고, 예언자의 생도들 중의 하나가 적합했다. 그들의 생명은 엘리사의 생명보다는 귀하지 않았고, 엘리사가 하는 것보다는 위험이 적었다.

(2) 그 일은 수고를 요구했다. 그러므로 전력을 다할 젊은이에게 더 적합했다. 젊은이는 일하게 하고, 노인은 지휘하게 해야 한다.

(3) 그러나 그것은 왕에게 기름 붓는 명예로운 일이었다. 그 일을 하는 자는 그 후에 그 일을 위하여 발탁되어질 것을 희망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엘리사는 젊은 예언자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그들 중의 하나를 고용했다. 그는 모든 명예를 독차지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젊은 예언자들과 영예를 나누어 갖기를 주저치 않았다.

2. 엘리사가 그를 보냈을 때,

(1) 그가 예후에게 부을 기름을 그의 손에 들려 주었다. "이 기름 병을 취하라." 솔로몬은 "회막에서 가져온 기름" 으로 부음을 받았다(왕상 1:39). 그런 기름을 이 때에는 얻을 수가 없었지만 예언자의 손에서 온 기름은 하나님의 집에서 온 기름과 동등했다. 왕에게 기름 붓는 일은 항상 계속되던 행사는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솔로몬의 경우와 같이 왕위 계승이 혼란한 때, 또 요아스의 경우(11:12)와 같이 왕위 계승이 방해될 때, 또는 예후의 경우와 다윗의 경우와 같이 통치권이 새 가정으로 옮겨 질 때에만 기름 붓는 식이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항상 사용 되었지만,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2) 엘리사는 그가 해야 할 "말을 그의 입에" 두었다고 했다(3절). 즉 "내가 너에게 왕으로 기름 부었다" 라고 말하라고 했다. 그리고 그 외의 엘리사가 그에게 한 모든 말(7-10절)을 그에게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로 보내는 자들에게 자세히 지시하여 보내실 것이다.

(3) 엘리사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1] 그 일을 비밀리 행하라. 그는 예후를 다른 장관들 중에서 뽑아내어, 골방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2절). 아마 그래서 그 예언자의 임무에 대한 예후의 확신이 시험당했을지도 모른다. 그 때 그는 자기의 소명을 증명할 아무런 증거도 댈 수 없었다. 예후가 그 의식 때문에 갑자기 힘이 나게 되었다면, 그것이 그가 기름 부음을 받았음을 충분히 증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거기서 여하한 다른 증명도 필요치 않다. 나타난 결과가 그 표적의 최상의 증거였다.

[2] 그 일을 신속히 행하라고 했다. 그가 그 일을 위하여 갔을 때, 그는 "허리를 동여야" 했다. 그가 그 일을 하고서, 사례비나 대접을 받으려고, 혹은 예후가 무슨 일을 하려는가 보기 위하여 "지체하지 말고 빨리 달아나야" 했다. 빈둥거리고 쓸데 없이 지내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과 같이, 자기의 일을 민활하고 힘차게 하는 것이 예언자의 생도들이 할 일이다. 그들은 재빠르게 날아 다니는 천사와 같이 되어야 한다.

Ⅱ. 위임이 전달 되었다. 그 젊은 예언자는 자기 일을 신속히 행했고, 곧 라못 길르앗으로 갔다(4절). 거기에서 그는 함께 앉아서 식사를 하고 전쟁 회의를 하는 장군들을 발견했다(5절).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고-자기의 외모는 초라하지만-그는 무리 가운데서 예후를 불러내었다. 그는 틈 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면서-마치 권위 있는 자와 같이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전할 말이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아마 예후는 자기의 사명에 대해 약간의 예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영예를 찾아서 조급해 하지 않으면서, "우리 모든 사람 중에서 뉘게 하려느냐?" 고 물었다. 그가 먼저 말했기 때문에 그가 용무의 대상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모두 예후 그가 바로 목표한 사람임을 만족하였던 것 같다. 예언자는 그를 혼자 데리고 가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6절). 성령의 기름부음은 숨겨진 일이다. 그것은 아무도 알지 못하나, 그것을 받은 자만이 아는 새로운 기름이다. 이와 함께,

1. 그는 예후에게 왕의 관작을 수여한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나는 그의 이름으로 온 사신이다-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여호와의 백성 곧 이스라엘의 왕을 삼노라." 그는 그에게 논의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칭호를 주고, 다음과 같이 하여 그가 왕이 되리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1) "이스라엘 하나님에 의해서" 이다. 즉 그 하나님에게서 자기의 권력이 나왔음을 그는 알아야 한다(그에 의해서 왕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권력을 써야만 하며, 하나님께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치리자들도 하나님의 사역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에 의지해서, 그리고 그에게 온전히 헌신하면서 그의 영광을 위해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여호와의 백성의" 왕이 되었음을 상기시킨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히 타락하였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과 그들의 모든 영예로운 관계를 박탈당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여호와의 백성" 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고, 아직은 그들에게 이혼증서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후는 자기가 왕이 되어 다스릴 그 백성을 "여호와의 백성" 으로서, 즉 자기의 예속자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인, 그의 아들들, 그의 장자들로서 대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 을 학대하거나 압제해서는 안 되며, 그 자신도 하나님을 위하여 자제하며, 하나님의 법에 의하여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2. 그 젊은 예언자는 예후가 당장에 할 일을 지시한다. 그가 할 일이란 아합의 모든 집을 멸절시키는 일이다(7절). 이것은 그가 왕위에 나아가는 길을 개척하여, 권좌의 소유를 보장하기 위한 일이 아니라, 죄악되고 가증스런 그 아합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시행하기 위한 일이다. 예언자는 아합을 그의 "주인" 이라고 불렀다. 이 관계는 아무런 이의(異意)가 없을 것이다. "그는 너의 주인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아들과 그의 후계자에게 대항하여 일어서는 것은, 하나님께 직접 받은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닐 경우라면, 단지 천박한 망은(忘恩)이요, 반역, 반란, 그리고 나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너는 너의 주인 아합에게보다도 하늘에 계신 너의 주님께 더 높은 의무를 지고 있다." 하나님은 "아합의 온 집을 멸망시킬 것이요, 그것은 바로 너의 손으로 하기로 결정하셨다. 그런즉 두려워 말라. 그가 너에게 명령하시지 않았느냐? 범죄 할까 두려워 말라. 그의 명령이 너를 의롭다 할 것이고, 너를 지지해 줄 것이다. 위험을 두려워 말라. 그의 명령이 너를 안전케 하실 것이며, 성공하게 하실 것이다."

그 예언자는 예후가 현명하게, 그리고 올바른 방법으로 이 큰 일을 아합의 집에 시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그들의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이 다루시는 그들의 논쟁의 근거가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과 싸우시는가를 말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유의하시는 것을 예후도 유의하게 하기 위함이요, 즉 하나님이 유의하시는 것은 바로 그들이 흘린 하나님의 종들, 예언자들 그리고 다른 신실한 예배자들의 피였다. 이제는 이세벨의 손에서 그 피를 찾으시겠다고 하였다. 또 그들이 우상 숭배자들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벌을 받기에 충분할 만큼 악했고, 그들에게 임한 모든 것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에서 아직 언급되지도 않고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다투시는 이유는 그들이 박해자들이라는 점에 대해서였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제단들을 훼파" 했을 뿐 아니라, "칼로써 그의 예언자들을 살해" 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떤 죄악도 이것보다는 군주와 백성의 죄악의 그릇을 완벽하게 채우지 못하며, 어떤 죄악도 이러한 죄악보다 더 분명하고 쓰라린 파멸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이 죄악이 바로 예루살렘의 최초의 파멸(대하 34:16)과 최후의 파멸을 가져왔던 죄이다(마 23:37, 38).

이세벨의 음행과 마술보다도 그녀가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고, 남은 자들은 골방과 동굴 속으로 몰아 넣었다는 사실이 더 하나님을 자극시켰다(왕상 18:4).



(2) 아합가의 운명을 말해 주었다. 그들은 철저한 파멸을 선고 받았다. 즉 그들은 교정하기 위한 징계가 아니라 뿌리째 뽑아버리려는 심판이다. 예후는 동정이나 호의나 인정을 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했다. 아합에게 속한 모든 자는 살해되어야 한다(8절). 여로보암과 바아사의 집안이 파멸된 것에서 본을 따서 시행해야 했다(9절). 그리고 특히 이세벨을 개들에게 던지라는 지시를 받는다(10절). 아합 왕가의 피의 전량(全量)으로도 예언자들과 성도들과 순교자들의 피를 보상하기에는 너무나 적고 부족했다. 하나님의 계산으로는 그의 종들의 피가 너무나 고가(高價)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이 용무를 마친 예언자는 최선을 다해 속히 귀가했다. 그리고 예후를 혼자 남겨 두어, 그가 앞으로 해야 할 바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지시를 구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했다.

 

9:2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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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에 나선 예후(열왕기 하 9:11-15)

잠시 후 예후는 회의 석상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일어난 일을 억지로 알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 사실을 그냥 덮어두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면 그와 그 군대장들 사이에 일어난 것을 알아보도록 하자.

Ⅰ. 군대장들은 그 젊은 예언자를 경멸하면서 말했다. "그 미친 자가 무슨 까닭으로 그대에게 왔더뇨?(11절) 그가 그대에게 온 용무가 무엇이뇨? 그리고 왜 그대는 그와 얘기하기 위하여 그렇게 물러가 줄만큼 그의 비위를 맞추려 했었는가? 예언자들은 군대장들과 친구인가?" 그들은 그를 "미친 자" 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 예언자는 "저희와 함께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기를" 원치 않고(벧전 4:4) 그는 자기를 부정하는 생활과, 금욕과 이 세상 경멸의 생활을 살았고, 자기들의 시간을 예배에 바치는 그런 자들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 때문에 그들은 예언자들이란 바보들이요, "신이 감동한 자는 미쳤다" (호 9:7)고 생각했다.

종교를 갖지 않은 자들은 흔히 신앙심을 경멸하여 말한다. 그리고, 그들을 미친 사람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우리의 구주를 향해서 "그는 미쳤다" 고 말했고,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그는 악마에 들렸다" (그런 자는 실로 얼마나 불쌍한 자인가!)고 말했고, 사도 바울에 대해서는 "많은 학식이 그를 미치게 했다" 고 말했다. 이처럼 지고(至高)의 지혜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고,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자들은 미친 사람들로 간주된다. 아마 예후는 동료들을 책망하기 위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즉 "너희는 그 사람이 예언자임을 알라. 그런데 왜 그를 미친 자라고 부르는가? 너희는 그의 가르침이 광기에서 나오지 않고 영에서부터 나옴을 알라?" 고 하던가 혹은 "너희는 그가 예언자임을 알라, 그 용무는 나에게 내 결점을 말해 주고, 나에게 나의 의무를 가르쳐 주는 것임을 알 수 있지 않느냐?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너희에게 알려 줄 필요가 없다" 고 말할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그들의 말을 일축해 버리려 했지만, 그들은 그에게 얘기하기를 강청했다. "그것은 당치 않은 말이다." 우리는 그의 임무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없노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말하라고 그들은 말했다. 예후는 재촉을 받고 나서, 그 예언자가 "자기 왕으로 기름 부었다" 고 알렸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머리에는 기름이 보였을 것이다(12절). 그들 중 어떤 자가 나서서, 요람에 대한 충성심에서이거나 그에게 질투를 느껴 왕이 되는 길을 막아서거나, 아예 처음부터 그의 계획을 좌절시킬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예후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했고, 그 사실을 고백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누구를 믿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일으킨 자가 자기를 지원하시리라는 것을 믿었다.

Ⅱ. 그들은 예후가 왕위에 오른 것을 알게 되자 마자 그 새로운 왕에게 경의를 표했다(13절). 아무리 그들이 그에게 기름 부은 예언자와 그의 직분에 대하여는 천하게 생각했을지라도, 그들은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왕으로서의 작위에 대하여는 대단한 존경심을 표했고 앞서 나가 나팔 소리로 그가 왕됨을 알렸다. 그들은 예후에 대한 복종과 충성 그리고 그의 인간됨과 정권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가 왕이 되어 높은 지위와 평안을 누리는 것을 보고자 한다는 욕망 따위를 표하기 위해, 그들은 자기 옷을 그의 발 아래 깔았다. 그래서 예후가 "계단 꼭대기에" 있는 옷 위에 섰거나 혹은 앉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그 광경은 그 의식을 빛내기 위해 최초로 통고 받고 모여 온 군인들에게 보였을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그들의 마음 속에 예후를 승인할 마음을 주신 것이다. 이것은, 강물의 흐름과 같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왕들의 마음은 물론이요, 백성의 마음을 돌리시기 때문이다. 아마 그들은 요람의 통치에 불안을 느꼈든가 예후에 대해 특별한 애착을 가졌던 것 같다. 아무튼 사태는 혁명이 일어날 만큼 무르익었고, 그들은 모두 예후의 편이 되었고, "요람을 배반하였다" (14절).

Ⅲ. 예후는 지극히 조심스럽게 진행해 나갔다. 그는 요람에 비해 이점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 이점들을 활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요람은 군대를 떠났다. 심하게 부상당하여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예후의 훌륭한 처신은 두 가지 사실에서 나타났다.

1. 그는 군대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들의 조언과 승낙 없이는 아무 것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만일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이라면, 우리는 이러이러하게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했을 것이다). 이것은 예후가 그들의 판결과 그들의 충성을 신뢰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것은 둘 다 그들을 기쁘게 하고, 확고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일어나, 굳게 서기를 원하는 자들은 친구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2. 그는 요람을 급습하고자 했다. 그래서 신속히 그를 공격하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채지 못하게 했다. "아무도 이스라엘에 그것을 전하러 가지 못하게 하라. 그래서 덫과 같이 파멸이 그와 그의 집에 임하게 되리라. 공격에는 때로 신속성이 공격력만큼 중요해지는 수가 있다.

 

9:12 없음.

 

9:13 없음.

 

9:14 없음.

 

9:15 없음.

 

9:16

예후의 혁명(열왕기 하 9:16-29)

라못 길르앗에서 이스라엘까지는 하룻길의 행군 이상이었다. 두 지점 중도쯤에서 그는 요단강을 건너야 했다. 예후는 가능한 한 아주 신속히 행군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보다 먼저 이스라엘에 이 소식이 닿지 않도록 최선의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그의 모습을 먼저 보게 된다. 다음에는 그가 선고받은 왕에게 도달하는 것을 본다.

Ⅰ. 요람의 파수꾼이 먼저 멀리서 예후와 그의 종자(從者)들을 보고, 왕에게 한 무리의 가까이 옴을 알렸으나, 그들이 우방인지 원수들인지를 말해 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왕은(그 일이 무엇인지 알고자 안달이 나서, 그리고 아마도 그에게 부상을 입힌 아람 사람들이 그를 추격하여 그의 궁전에 피를 흘리게 하고 그리고 그를 사로잡으러 오고 있다고 생각하여 마음을 놓지 못해서) 먼저 한 연락병을 보내고 다음에 또 다른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정보를 가져오도록 했다(17-19절). 그는 그가 전투에서 겪은 커다란 공포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죄책에 대한 그의 양심은 그를 끊임없는 전율 속으로 몰아 넣었다.

그 사신들은 모두 동일한 질문을 했다. 즉 "평안이냐? 우리 편이냐 적군 편이냐? 희소식이냐 흉보냐?" 하는 질문이다. 각기 대답도 동일한 것이었다. 즉 "평안이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내 뒤로 돌아서라" (18, 19절)고 예후는 대답했다. 마치 이렇게 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내가 대답할 답변은 너에게가 아니라, 너를 보낸 자에게니라. 그러므로 너는 네 자신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내 뒤로 돌아서며, 나를 따르는 병사들 중에 편입하라" 는 뜻이다. 파수꾼은 그 사신들이 포로가 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그 파수꾼은 그 군대의 지휘관이 예후처럼 말을 몰고 있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예후는 맹렬하게 모든 것으로 알려진 것 같다. 이리하여 그는 자기 일에 뜨겁고 열정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임을 보여 주었고, 전력을 다하여 전진하는 자임을 드러내었다. 그러한 격렬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야 예후에게 맡겨진 그 일에 대한 최적임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할 적절한 도구를 선택하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의 격렬성 때문에 알려진다면, 그것은 명예스런 일이 아니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용사보다 낫다. 갈대아 의역본은 정반대의 의미를 준다 즉 "통솔하는 모습이 예후의 통솔법과 같습니다 그는 조용히 통솔하기 때문입니다" 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그리 급히 올라 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별로 지체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가 천천히 행군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것은 요람이 자기에게로 나아올 시간적인 여유를 주어서, 자기가 성에 들어가기 전에 그를 미리 처분하려 했기 때문이라 한다.

Ⅱ. 요람 자신이 그를 맞으러 나갔다. 그리고 유다 왕 아하시야도 함께 데리고 갔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려고 나갔을 뿐 적을 예상하지 않았고, 싸울 준비도 하지 않은 채였다. 사람들은 때로 자기들의 멸망의 날이 오면, 급히 나아가 멸망을 맞으려 하니, 섭리자 하나님은 인간을 얼마나 기묘하게 조정하시는가?

1. 요람이 예후를 맞은 곳은 불길한 장소였다.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토지에서" 만났다고 했다(21절). 그 땅을 보는 것만으로도 요람을 두려워 떨게 하여 예후를 승리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요람은 나봇의 피를 흘린 죄가 있었고, 이제 예후는 나봇을 위하여 싸운 엘리야의 저주를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하나님의 섭리는 사건들의 상황을 기묘하게 조정하사, 죄와 벌의 관계가 얼굴과 거울 속의 얼굴과의 관계와 같게 하신다.

2. 요람의 물음은 동일했다. 즉 "예후여, 평안이뇨? 너는 아람 사람들에게서 도망쳐 오는가, 아니면 그들을 정복하고 오는가?" 요람은 그것이 평화인 줄로 알았다.

다른 어떤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흔히 매우 악질적인 죄인들은 자기들이 비록 멸망 직전에 있을 때에도, 만사가 잘 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뽐내며 스스로에 대해 평화를 소리쳐 외치는 수가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3. 예후의 대답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예후는 그에게 하나의 질문으로 답했다. "네 어미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비록 그녀는 왕의 미망인이었으나, 실제로는 섭정을 하는 여왕이었다)" 예후가 얼마나 그를 단순하게 취급했는가 보라. 전에는 그가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었지만, 이제는 또 다른 한 마음을 가졌었다. 죄인들이 항상 달콤한 말을 듣지는 못할 것이다. 언젠가는 자기들의 몫을 받게 될 것이다(시 36:2).

다음 사실들을 살펴보자.



(1) 예후는 요람의 어미의 죄악을 꾸짖었다. 왜냐하면 제일 먼저는 그가 그 죄악을 배웠고, 다음에는 자기의 왕권으로 그것을 보호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음행, 곧 육체적 음행과 영적 음행으로(그녀는 우상을 섬겼고, 그것도 아주 음탕하게 섬겼다) 비난을 받는 처지에 놓였다. 그리고 그녀의 우상들을 위하여 사용된 점과 복술과 마술로 인하여 비난을 받았다. 이런 일들은 수 없이 많았다. 또 음행과 복술을 더욱 심하게 했다. 왜냐하면 악한 길에 자신을 던진 자들은 그들이 어디에서 멈추어 설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죄는 또 다른 죄를 낳는다.

(2) 이러한 이유로, 예후는 그를 평안을 가장하는 모든 허식에서 추방시켰다. "뉘우치지 않은 죄악이 그렇게 많은데, 그 집에 무슨 평안이 임할 수 있겠는가?" 죄의 길은 결코 평안의 길이 될 수 없음을 명심하자(사 42:21). 죄인들이 하나님과 무슨 평안을 가질 수 있겠으며, 자기 양심에 무슨 평안을 지니겠는가? 여전히 자기의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이 이생에서나 저생에서 무슨 선한 것과 평안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죄를 고집하는 한, 아무 평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죄를 뉘우치고 버리면, 즉시 평안이 있게 되리라.

4. 즉시 처형이 시작되었다. 요람은 그의 어미의 죄에 대한 말을 듣고 낙담했다. 그는 곧 오랫동안 자기에게 위협을 주던 그 최후의 날이 왔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는 "아하시야여! 반역이로다! 예후가 바로 우리의 원수이며, 지금은 우리가 안전을 위하여 도망갈 때로다" 하고 소리쳤다. 두 사람이 다 도망갔다.

(1) 그러나 이스라엘 왕 요람은 즉시 살해되었다(24절). 예후는 자기 손으로 직접 그를 처치했다. 그의 아버지에게는 갑옷의 접합점 사이로 그 운명의 화살이 뚫고 지나 갔는데, 화살이 그렇게 모험적으로 당겨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후는 요람이 도망갈 때, 그의 양 어깨 사이로 화살을 쏘았다(그것은 하나님이 "그 박해자에 대하여 정하셨던" 하나님 자신의 화살들 중의 하나였다. 시 7:13). 그리하여 그 화살은 그의 심장을 뚫었고, 그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는 아합의 집의 종손이었으므로 제일 먼저 제거되었다. 그는 율법의 선고에 의해서 범죄자로 죽었다. 예후는 그 율법의 선고를 시행하는 자로서 그 죽은 시체를 처리했다.

나봇의 포도원은 굳어 버렸고, 그것은 엘리야가 아합에게 선고한 파멸의 전말을 요람에게 생각나게 했다. 엘리야는 그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내가 나봇 자신의 피와 또 그의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25, 26절). 그 아이들은 아버지 나봇의 범죄 공모자로 함께 처형되었거나 아니면 그 후에 비밀리에 살해되었다. 그래야 아들들이 탄원하지 않을 것이며, 또 그들의 아버지의 죽음을 보복하지 않을 것이고, 아버지를 잃었다 해서 그들이 낙담하지 않을 것이며, 또는(그의 전 재산이 그의 포도원과 함께 몰수되었을 때) 그들의 생활 터전을 잃는 일이 없도록-그렇게 되면 실상 죽게 되는 것이다-하자는 것이었다. 이 일에 대해 아합의 집은 심판을 받아야 한다. 게다가 요람이 아주 교만하고 유쾌한 태도로 그 무죄한 피를 희생시키고서 자기가 차지했던 바로 그 땅이 이제는 극장이 되어서 거기서 그의 자식의 죽은 시체가 세상에게 구경거리로 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는 그가 시행하시는 심판에 의해서 알려지신다(학가욘, 셀라)(시 9:16).



(2) 그는 유다 왕 아하시야를 추격하여 곧 멀지 않은 곳에서 살해하였다(27, 28절).

[1]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가 비록 요람의 무리 가운데 있었다 할지라도, 그가 혈족으로나 죄악으로나 아합의 집과 결합되지만 않았더라면 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아합가의 일원이었다(그는 자기의 죄로 인하여 스스로 그렇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운명과 아하시야도 함께 해야 했던 것이다. 예후는 정당하게 자기의 임무가 그들에게까지 미치는 것으로 해석했다.

[2] 그러나 만일 그가 그들과 함께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함께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악을 행하는 자들과 연합하는 일은 위험한 것이다. 우리도 죄와 그 죄로 인한 비참함에 함께 휩쓸릴 수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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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0

이세벨의 비극(열왕기 하 9:30-37)

아합의 집안에서 최악의 범죄자는 바로 이세벨이었다. 바알 우상을 끌어들인 것도 바로 이세벨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여호와의 예언자들을 살해했고, 나봇의 살해를 음모했고, 먼저는 자기 남편을 충동질하고 다음에는 자기 아들들을 충동하여 악을 행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여기서 그녀는 "저주받는 계집" 이라고 불리우며(34절), 그 저주는 그 나라에 대한 저주이다. 또한 자기 나라가 잘 되길 원하는 모든 사람은 모두 그녀에게 저주를 하게 된다. 그녀의 통치가 3대까지 계속했으나, 마침내 그녀의 날은 끝나게 되었다. 우리는 이세벨과 비교되는 두아디라 교회의 거짓 여예언자에 대하여 읽는다(계 2:20). 그녀의 죄악도 이세벨과 동일했다. 즉 하나님의 종들을 꾀어서 우상을 숭배하게 했고, 그녀에게는 이세벨에서와 같이 "회개할 긴 기간이 주어졌다" (계 2:21). 그리고 여기서 이세벨에게 임한 것처럼 마침내는 무서운 파멸이 그녀에게 임했다(계 2:22, 23). 그래서 이세벨의 파멸은 우상 숭배자들과 성도 박해자들의 파멸을 보여 주는 한 전형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특히 저 큰 음녀, 곧 매춘부의 어미, 자기도 "성도들의 피에 취하고" 열방을 "그녀의 음탕한 포도주로 취하게" 만드는 자의 한 모형이다(계 17:5, 6, 16).

이제 우리는 여기서 다음 사실들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Ⅰ. 이세벨이 심판에 도전한다. 그녀는 자기 아들을 죽였다는 사실과, 그를 죽인 이유는 그녀의 음란과 술수 때문이라는 것, 아들의 시체를 나봇의 땅에 던졌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에 따른 것이요, 그가 지금 이스르엘로 오고 있다는 등의 사실을 들었다. 따라서 그녀는 거기서 그의 복수의 칼에 희생될 차례가 되었다는 것을 각오해야만 했었다. 이제 그녀가 자기의 운명을 어떻게 맞이하였는지 보라. 그녀는 성문 입구의 창문에 앉아서 예후를 모욕하고 반항했다.

1. 그녀는 하나님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자신을 숨기는 대신, 자신을 드러내며, 도망가는 것을 조소했고, 두려움을 조롱했으며 놀라지도 않았다. 하나님을 거역하여 굳어진 마음이 얼마나 대담하게 고집을 부리는가 보라. 그녀는 "하나님을 치려고 달려가는 지라" (욥 15:26). 그러나 자기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대하여 이처럼 굳게 하지 않는 자들은 번영하리라.

2. 그녀는 자신을 겸비케 하거나 자기 자식에 대한 숨막힐 듯한 슬픔에 잠기지도 않고 오히려 "얼굴에 화장을 하고 머리를 꾸몄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위대하고 위엄 있는 것처럼 나타내려 했다. 그러면 예후가 위압되어 용기를 잃고 그의 진로를 멈추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단조함과 굵은 베를 띠라 하셨다." 그러나 화장하고 분장하고 나서는 것은 하나님을 거슬러 행하는 것이다(사 22:12, 13).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오만한 마음보다 더 명백한 명망의 길은 없다. 화장한 얼굴을 이세벨의 얼굴에 비추어 보라. 그리고 그 얼굴이 어떻게 보이는가를 알아보라. 그녀는 하나님의 보복의 도구인 예후 앞에서 두려워 떠는 대신에 오히려 위협적인 질문을 함으로써 그를 두렵게 하려고 생각했다. "주인을 죽인 시모리여 평안하냐?" 하고 물었다.

여기에서 다음의 사실들을 관찰해 보자.



(1) 그녀는 자기 집안을 치기 위해 나온 하나님의 손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들린 칼에 불과한 예후 앞에서는 화를 냈다. 우리가 고난을 받고 있을 때는, 우리는 하나님께 굴복하고, 자기 자신에게 대해서만 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때인 데도 우리의 고난의 도구에 대해서 화를 내기 쉽다.

(2) 그녀는, 예후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분명히 그 자신의 멸망으로 끝날 것이며, 그 일로 예후가 평안을 얻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하면서 제멋대로 즐거워 했다. 예후는 그녀에게서 평안의 모든 허식을 제거해 버렸다(22절). 그런데 이제 그녀는 자기가 그를 죽이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 평화의 길에서 떠난 자로 간주되는 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님을 명심하자. 적극적인 개혁자들, 곧 신실한 견책자들은 고통을 당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것도 두려워 하지 말라(빌 1:28).

(3) 그녀는 예후에게 이 기도의 실행을 단념시키게 하기 위해서 한 선례를 인용했다. "시므리여 평안이뇨? 아니, 그는 평안하지 않았다. 그 유혈과 반역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7일 만에 부득이 궁전을 불살랐고, 그 속에서 자신도 불탔다. 그런데 너는 그 보다 더 나은 운명을 기대할 수 있겠느뇨?" 라고 한 것이다. 그 사건과 유사한 경우라면, 예후에게 그런 메모를 들려 주는 것은 아주 적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앞서 간 죄인들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도 그들의 발자취를 밟을까 조심하게 하는 경고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므리의 실례를 예후에게 적용시킨 것은 잘못이었다. 시므리는 그가 한 일에 대한 아무런 정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야심과 잔인성 때문에 그 일을 하게끔 저주 받았었다. 반면에 예후는 예언자의 생도 중의 하나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았고, 하늘로부터의 명령에 따라 이것을 행했다. 그리고 하늘도 그를 지지해 줄 수 있었다. 사람이나 사물을 비교함에 있어서 우리는 값진 것과 비루한 것 사이를 주의 깊게 구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죄인들의 운명과 유용한 사람들의 운명을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Ⅱ. 예후는 그녀를 치려고 도움을 청한다. 그는 창을 올려다 보고, 무례하지만 무력한 그녀의 분노의 위협에 위압되지 않고,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 누구냐?" 하고 소리쳤다(32절).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름 받았다. 즉 그 땅을 개혁하고, 그 땅을 더럽힌 자들을 처벌해야 할 사명이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그 일을 하기 위해 도움을 구하고 있다. 도울 만한 사람, 이 일을 지지해 줄만한 자를 찾는 것이다(사 43:5). 모세와 같이, 그는 깃발을 들고 선언한다(출 32:26). "누가 여호와의 편이냐?" 그리고 시편 기자는(시편 94:16) "누가 나를 위하여 저 행악하는 자들에게 올라갈꼬?" 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개혁사업이 일단 착수되었을 때는, "누가 그것에 편들 것인가?" 하고 물어야 할 때이다.

Ⅲ. 그녀의 수종자들이 그의 정당한 보복에 그녀를 넘겨 준다. 두세 사람의 시종들이 자기들은 예후의 편임을 믿도록 그를 격려하는 얼굴로 내다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보고 소리쳤다. 다른 명령을 들을 때까지는 그녀를 사로잡거나 확보하지 말고, 단지 그녀를 아래로 던지라고만 했다. 이것은 행악자에게 돌을 던지는 한 방법이었다. 즉 그들을 어떤 가파른 곳에서 거꾸로 집어던지는 방법이다. 그래서 그녀가 나봇에게 돌을 던진 그 일은 보복되었다. 그들은 그녀를 아래로 던졌다(33절). 만일 하나님이 예후를 옳다고 인정한다면, 그의 명령은 또한 그들을 옳다고 인정해 줄 것이다. 그들은 그녀를 섬겼지만, 이세벨의 악을 은근히 싫어했고, 그녀를 증오했을 것이다. 혹은 그녀는 자기 주위의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대하였고 난폭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그녀에게 복수 할 기회를 기뻐했다. 혹은 그들은 예후의 성공을 살펴보고서, 그에게 비위를 맞추어 궁전에서의 자기들의 자리를 유지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녀는 아주 수치스럽게 죽음을 당했다. 성벽과 길바닥에 부딪치고 나서 말들에게 짓밟혔다. 그리고 그녀의 피와 뇌수들로 길바닥과 말이 온통 더럽혀졌다. 교만과 잔인성의 종말을 보라. 그리고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로 말하라.

Ⅳ. 예언과 같이 개들이 그녀의 수치와 멸망을 극에 달하게 했다. 예후는 궁전에서 다소 원기를 되찾고 나서, 그는 이세벨이 여자이고 직위를 가지고 있던 자이니 그 점을 생각하여 그녀를 매장해 주는 정도의 존경을 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매우 악했지만, 그녀는 딸이며, 왕의 딸이며, 왕의 부인이며, 왕의 어미였다. 그래서 "가서 그녀를 매장하라" (34절)고 했다. 그러나 그는 예언자가 말한 것(10절 "개가 이세벨을 먹으리라")을 잊어버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잊지 않으셨다. 예후가 마시고 먹는 동안, "마을을 배회하던" 개들(시 59:6)이 그녀의 죽은 시체를 먹어 치웠다. 그리하여 그녀의 화장했던 얼굴은 사라져 버렸고, 뼈만 남은 해골과 다리와 손만이 남았다. 굶주린 개들은 그녀의 혈통이 지니는 위엄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왕의 딸도 개들에게는 한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우리가 우리의 육체를 배불리 먹이고, 육체를 유쾌하게 움직일 때도, 그것들은 얼마나 비천한가를 생각하자. 잠시 후 육체들은 지하의 벌레들이나 지상의 짐승들에게 향연을 베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후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자, 그는 다음의 경고를 기억해 냈다(왕상 21:23). "개들이 이스르엘 성 곁에서 이세벨을 먹으리라." 불명예스런 기념비 이외에 그녀를 회상할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는 공적인 날에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나곤 했었고, 그 때면 "이 사람이 이세벨이다. 그 자태가 얼마나 위엄 있으며, 아름다운 모습인가! 그녀는 얼마나 위대하게 보이는가!" 라는 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악한 자들도 매장되는 것을 보아 왔다(전 8:10). 그러나 때로는 여기에서처럼 그들은 매장되지 못한다(전 6:3). 이세벨의 이름으로 아무데도 남아 있지 않지만, 성경 속에 오점이 찍힌 채로 남아 있다. "이것이 이세벨의 티끌이다." "이것이 이세벨의 무덤이다." 혹은 "이것이 이세벨의 자손이다" 라는 말조차도 이젠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악한 자들의 이름은 썩어질 것이다-지상에서 썩어 없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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