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넴 여인의 소유권 회복(열왕기 하 8:1-6)
Ⅰ. 장기간의 기근-이것은 가장 괴로운 심판의 하나이다-으로 처벌을 받게 된 이스라엘의 악은 율법 가운데 종종 경고되었던 바이다. 비옥한 땅 "가나안이 황무하게 변한" 것은 "거기에 거하던 자들의 불의" 때문이었다. 사마리아에서의 기근은 포위망이 사라지자 곧 구조되었지만, 그 심판과 자비는 그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또 다른 기근을 명하셨다."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때는 반드시 이기시기 때문이다. 만일 보다 작은 심판이 회개케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보다 크고, 장기간의 심판을 내리신다. 심판은 항상 하나님 뒤에 계시므로, 그가 부르시면 곧 심판이 온다. 하나님은 사역자들을 통해서 개혁과 순종을 명하신다. 그리고 만일 그러한 요구들이 간과된다면, 하나님은 여러 가지 다른 재앙을 명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그러한 소리가 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기근은 엘리야 시대의 기근과 같이 7년이나 계속되었다.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스려 행한다면, 하나님은 그 시련의 도가니를 더욱 뜨겁게 할 것이다.
Ⅱ. 그 예언자를 선대한 선한 수넴 여인의 친절은 기근 때에 돌보심을 받음으로써 보상 되었다. 그러나 수넴 여인은 사렙다 과부에게 그랬던 것처럼 기적에 의해서 양식을 공급받지는 않았다.
1. 그녀는 기근이 온다는 것을 미리 통고받았다. 그러므로 그녀는 준비를 할 수 있었고 또한 타국으로 이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스라엘 밖 어디든 양식이 충분한 곳으로 가도록 했다. 요셉시대에 애굽인들이 기근이 오기 전에 그것을 알았던 사실이 그들에게 큰 유익이 되었던 것같이, 수넴 여인에게도 그러했다. 다른 사람들도 역시 그 기근의 고통을 오래 겪은 후에는 마침내 이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그들은 자기들의 양식을 탕진한 후이며, 어디를 가도 수넴 여인이 이거한 때와 같은 좋은 조건으로 정착할 수 없었다. 그녀는 미리 이사를 갔으므로 자기의 재산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재앙을 예상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행복이며, 그것을 예상했을 때 우리 자신을 숨길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지혜이다.2. 섭리자 하나님은 "블레셋 땅에서" 그녀에게 평온한 정착을 주었다. 블레셋은 다윗의 정복을 당했으나,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스라엘에 인접했던 다른 나라들은 그 당시에도 풍부한 수확을 거두었고, 그 기근은 이스라엘 땅에만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기근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에 의한 것임을 보여 준다(이것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민족을 구분했던 애굽에서의 역병의 경우와 같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대한 이 심판이 직접 겨냥했던 이스라엘의 죄는 이방의 죄보다 하나님을 더욱 진노케 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고백한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내가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보응하리라" (암 3:2).
다른 나라에는 비가 오는데 그들에게는 비가 오지 않았고, 그들의 곡식은 메뚜기와 황충이 먹는데, 이방은 메뚜기와 황충의 해를 받지 않았다. 이것은 요엘서 1장 3, 4절에서 말하고 있는 바로 그 기근이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 이웃 나라에는 풍부한 양식이 있는 때에도 이스라엘 땅으로 곡식을 수입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자들이 없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했더라면 그들이 이사를 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우상 숭배로 인하여 바보처럼 되었듯이, 또한 자기들의 공익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된 것이다.
Ⅲ. 수넴 여인은 고향에 돌아오자 왕에게 간청을 드렸고, 그것은 그 시기적인 적합성 때문에 은혜를 입게 되었다.
1. 기근이 지나자 수넴 여인은 블레셋 땅에서 돌아왔다. 그 곳은 필요 이상으로 이스라엘 사람이 더 오래 머물 곳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그 여인이 월삭과 안식일을 자기 나라에서, 즉 예언자의 학교에서 지켰던 것처럼(4:23) 그렇게 지킬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2. 돌아온 수넴 여인은 자기 재산의 소유권이 박탈되었음을 알았다. 그것은 국고로 몰수되었거나, 임금이 빼앗았거나, 그녀가 없는 동안 이웃 사람이 횡령했을 것이다. 혹은 재산 관리를 맡은 자가 허위 입증을 하여 다시 양도하려 하지 않았거나, 그녀와 이익 계산을 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곤고한 때에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잠 25:19; 미 7:5).
3. 수넴 여인은 구제를 받고자 왕에게 직접 의뢰했다. 왕은 남이 접근하기 쉬웠고(이것은 잘한 일이다) 피해 입은 백성들의 억울함을 직접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여인이 자기 백성들과 아주 안전히 거할 때는 "군대 장관에게, 혹은 왕에게 구할" 필요가 없었다(4:13). 그러나 이제 수넴 여인의 가까운 벗들은 신의(信義)를 저버리고 부정하고 불친절하게 증거하므로, 그녀는 그들에게 대하여 왕에게 고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피조물 가운데는 이러한 불확실성이 있다. 즉 우리가 지극히 의지하던 것이 우리를 실망시키고, 우리가 결코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그것이 우리를 도와주게도 되는 것이다.
4. 수넴 여인은 왕이 게하시와 함께 엘리사의 기적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발견했다(4절). 왕이 그 기적들에 관하여 그 때서야 알고자 했다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다. 즉 엘리사의 사명에 대한 확신할 만한 증거를 보지 않으려고 왕이 자기의 눈을 감아 버리려고 하지만 않았더라면, 엘리사가 그 기적을 행했을 때 그 때에 그 기적에 대하여 왕도 잘 알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계속 무시하지 않고 그 기적에 호감을 품고 그 사실을 잘 설명할 수 있는 한 문둥이와 얘기하길 원했다는 것은 이제 그의 마음이 바로 잡혔다는 것이요,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율법은 문둥이와의 일체의 교제를 금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과 함께 기거하는 것만을 금했다.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에 제사장이 없었고, 아마 왕이나 혹은 그의 지명을 받은 어떤 사람이 문둥이를 진단하여 그들에게 문둥병 여부를 판결했을 것이다. 아마 그것 때문에 왕이 게하시와 알게 되었을 것이다.
5. 이 다행스런 일치가 게하시의 이야기와 수넴 여인의 탄원을 도와주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사건의 전말(前末)을 조정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왜냐하면 때때로는 여기에서처럼 본질상 미미한 것들도 위대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1) 이렇게 긴밀히 관계된 당사자들의 말이 일치하자, 왕으로 하여금 게하시의 이야기를 믿게 했다. "이는 그 여인이요, 저는 그 아들이니,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이야기하게 하소서" (5절). 결국 하나님은 게하시가 거짓말쟁이로 낙인 찍혔기 때문에(문둥병이 그 증거이다) 그의 말만으로 왕이 의심할 수도 있었던 것을 믿지 않을 수 없게 했다.
(2) 그것이 왕으로 하여금 수넴 여인의 요구를 승낙하게 했다. 어느 누구가 하늘이 은혜를 베푼 자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겠으며, 기적으로 다시 얻은 생명을 부양하지 않겠는가? 이 점을 고려하여, 왕은 그 여인의 땅과 그 여인이 없을 때 그 땅으로 인하여 생긴 모든 이득을 그 여인에게 돌아가게 하라고 명령했다. 전답과 이득은 몰수되어서 바로 왕에게로 돌아가 있었다면, 그러한 완전한 반환은 관대하고 친절한 일이라 하겠다(바로가 요셉의 시대에 했던 바와는 달리 이 왕은 자기 백성의 불행으로 자기 왕위를 부요하게 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만일 그녀의 재산이 침해된 것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였다면, 그가 그 여인을 구제한 일은 왕으로서의 정당한 행위며 직위상의 의무인 셈이다(시 72:3, 4; 잠 31:9). 권세 잡은 자들은 본인들이 악을 행치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피해를 입은 자들의 권리를 지지해 줄 책임도 있기 때문이다.
하사엘의 즉위(열왕기 하 8:7-15)
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Ⅰ. 우리는 왜 엘리사가 아람의 수도인 다메섹에 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로만 보내어지지 않았는가? 그러했던 것 같다. 아마 그는 나아만의 회심을 기해 그를 방문하여 그가 참 종교를 선택했다는 확신을 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에는 엘리사의 방문이 보다 필요했던 것 같은데, 그 이유는 나아만이 직위를 떠났을 것이기 때문이었다(하사엘이 군대 장관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직위를 스스로 사양했거나 물러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림몬의 당에서 절하기를 원치 않았거나 혹은 진실한 맘으로 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생각하기를, 엘리사가 기근을 당하여 다메섹으로 갔다고 본다. 혹은 오히려 하나님이 엘리사에게 했던 명령에 순종하여 그리고 갔다고도 생각한다(왕상 19:15). "너 자신이나 네 후계자는 다메섹으로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으라" 는 명령이 있었었다.
Ⅱ. 위대하고 부유하고 힘이 강력한 왕 벤하닷이 병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떠한 명예, 부귀 혹은 세력도 인생들의 공통적인 재난과 모든 질병에서 그들을 보장해 주지 못할 것이다. 왕궁과 왕좌도 가장 초라한 오두막과 마찬가지로 질병과 사망의 쇠사슬을 당하게 된다.
Ⅲ. 병 중에서 아람 왕이 엘리사로 하여금 신탁을 말하게 한 것은 의아스러운 일이다.
1. "하나님의 사람" 이 다메섹에 왔다는 것이 곧 그에게 알려졌다(엘리사는 나아만을 고친 후, 아람에게도 "하나님의 사람" 이란 명칭으로 잘 알려졌었다). "즉시 가서 그를 통하여 여호와께 물어보라" 라고 벤하닷이 말했다(7절). 그가 건강했을 때에는, "림몬의 당에서 절했지만", 그가 병들었을 때는 자기의 우상을 버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묻기 위하여 사람을 보냈다. 재앙은, 번창할 때는 하나님을 경히 여기던 자들을 하나님께로 데려간다. 즉 때로는 재앙이 인간들의 눈을 뜨게 하고,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게 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주목할 만한 사실이라 할 수 있다.(1) 이스라엘의 왕이 자기가 병 중에 있을 때, 마치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듯이, 에그론의 신에게로 물으러 사람을 보낸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때의 일이기 때문이다(1:2). 하나님은 때때로 신앙을 고백한 그의 백성이 거부하고 멀리했던 명예를 이방인들에게서 받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벤하닷이 대병력을 보내어 엘리사를 적으로 대우했던 일이 있은 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4:14). 그러나 지금은 그가 이사야를 선지자로 존경한다. 재앙과 질병으로 인간들의 마음을 바꾼 실례들 중에는 이런 일도 있다. 즉 그것으로 인하여 종종 그들이 하나님의 종들을 달리 생각하게 되고, 그들이 증오하고 멸시했던 자들의 충고와 기도를 귀중히 여겨야겠다는 교훈을 배우게 되는 경우이다. 이것이 바로 그런 사건이다.
2. 벤하닷은 그 예언자에게 영예를 표하기 위해,
(1) 그는 백부장과 함께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 지붕 아래 오는 것을 감당치 못한다고 스스로 생각이나 한 것처럼, "그에게로" 사람을 보냈다. 즉 그를 "불러오려고" 사람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2) 그가 엘리사에게 보낸 사람은 일반 사신이 아니라 그 나라의 수상인 하사엘이었다.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수행하는 일은 아무리 높은 위치에 있는 자에게도 결코 비방거리가 될 수 없다 하사엘은 자기의 친구들과 회합을 약속한 그 곳에 가서 엘리사를 만나야만 했다.
(3) 벤하닷은 약 40마리에 약대에다 지울 수 있는 만큼의 "다메섹의 모든 좋은 것으로" 그에게 귀한 선물을 보내고(9절), 그것으로 예언자에게 자기의 사랑을 표시하면서, 다메섹으로 와 준 것을 환영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거기에서 체류하는 동안 그의 생계비를 제공하겠다 했다. 엘리사는 나아만의 선물은 거절했지만, 이 선물은 받아들였던 것 같다(그가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4) 그는 그 예언자를 "아버지" 라고 부르는 이스라엘의 어법과 맞추어 그는 자기를 "당신의 아들 벤하닷" 으로 칭하라고 명령했다.
(5) 벤하닷이 "나의 병이 낫겠나이까?" 하고 물은 것은 그가 엘리사는 하늘의 비밀을 아는 자라고 존경을 표한 것이 된다. 우리가 장래의 일들을 알기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영원한 세계의 일은 거의 생각하지도 않고 질문하지도 않는다.
Ⅳ. 하사엘과 엘리사 사이에 오고 간 이야기는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1. 엘리사는 왕에 관한 하사엘의 물음에 답했다. 즉 왕이 회복될 것이라 했다. 그리고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지만, 왕은 다른 모양으로 죽을 것이며(10절), 자연사가 아니라 횡사(橫死)할 것이라고 했다. 세상은 다른 길이 많다. 그리고 인간들이 종종 이 중의 한 길을 피했다고 생각하는 동안에 다른 길에 접어들게 되고 만다.2. 엘리사는 비상한 관심으로 하사엘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그래서 하사엘은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게 되었고, 마침내 엘리사 자신은 울게 되었다(11절). 하나님의 사람은 전사(戰士)의 얼굴을 붉히게 할 수 있었다. 엘리사가 하사엘이 꿈꾸는 일을 안 것은 그의 얼굴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때 엘리사에게 그 일을 알려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생각하고 엘리사는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인간들은 장래를 예견할수록 더욱 비탄에 빠지기 쉽다.
3. 하사엘이 왜 엘리사가 우는지를 물었을 때, 엘리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행할 너무나 많은 해악을 예견했기 때문이요, 그가 그들의 요새와 그들의 남녀노소에게 행할 처참한 광경을 예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엘리사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받을 학대를 생각하며 울었다 그가 비록 예언은 했지만 그 가공할 날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이 무엇을 황폐케 하며, 죄가 무엇을 황폐케 하며,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타락으로 어떤 변화를 초래하며, 인간성 자체까지도 얼마나 송두리째 빼앗기게 되는가를 보라.
4. 하사엘은 이 예언을 듣고 크게 놀랐다. "당신의 개같은 종이 무엇이관대 이런 큰 일을 행하오리까?" 라고 했다(13절). 그가 염두에 둔 큰 일이란 다음과 같다.
(1) 그것은 위대한 권력의 행위이다. 따라서 이는 국왕만이 할 일이다. "이스라엘을 쳐서 정복" 하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강력한 주권자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나는 아니다." 많은 사람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권력을 얻게 되고, 그것이 흔히 "자신들에게 해를" 끼친다(전 8:9).
(2) 그것은 크게 야만스런 행위이다. 이는 다만 명예와 덕을 상실한 자만이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속에서 그런 죄책을 찾지는 못하였습니다. 빼앗고 찢고 삼키는 자가 당신의 개 같은 종이니까? 만일 내가 개가 아니라면, 나는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엿볼 수 있다.
[1] 그가 그 죄를 얼마나 사악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그는 그것은 사람이 행하기 보다는 맹수나 짐승에게 더 적합한 큰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악한 사람도,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 죄에 대한 큰 증오를 표할 수 있지만, 그 후에는 다시 죄와 잘 야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2] 그는 자신을 얼마나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그러한 생각은 그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그 예언자가 예언한 것과 같이 그런 잔인스런 일을 자기로서는 행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스스로 이러한 죄악을 대항하기에 충분한 무장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러다가도 곧 베드로와 같이(마 26:35) 그 죄에 굴복되고 만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5. 이것에 대한 대답으로, 엘리사는 그에게 "네가 아람의 왕이 되리라" 는 말만 해주었다. 당시의 그는 왕이 될 권력을 원했고, 자기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명예는 인간의 기질과 태도를 변화시킨다." 그런데 더 좋은 방향으로 변화는 좀처럼 어렵다.
" 네가 왕이 되어서 무엇을 행할지 네가 알지 못하지만, 내가 네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네가 이 일을 행하리라." 세상에서 낮고 천히 지내는 자들은 권세와 재물의 유혹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그것을 얻는다면, 자기들의 마음이 얼마나 거짓되며, 생각했던 것보다 얼마나 더 악한지를 알게 될 것이다.
Ⅴ. 이리하여 하사엘이 자기 주인에게 행한 악을 생각해 보자. 그가 엘리사가 한 말에서 이 일을 행할 기회를 포착했다면, 그 책임은 그에게 있지 않고 그 말에 있을 것이다.
1. 그는 야비하게도 자기 주인을 속이고, 그 예언자의 말을 속였다. "그는 나에게 당신이 분명히 회복되리라고 말했습니다(14절)." 이것은 지독한 허위였다. 엘리사는 그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했다(10절). 그러나 그는 부당하고 불성실하게도 그것을 감추었다. 그것은, 그가 왕으로 하여금 나쁜 소식을 듣고 기분 상하게 하기가 싫었든가, 아니면 자기가 그의 후계자가 되리라는 것을 들을 때보다는, 그가 생각했던 유혈 계획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려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악마는 인간들에게 그들이 회복되어 잘될 것이 분명하다고 말해 줌으로써 그들을 멸망시킨다. 그리하여 그들을 안심하고 잠들게 유인한다. 이보다 더 치명적인 일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죽음을 대비하라는 경고를 해 줄 경우의 장점을 상실하게 된 왕에게와 그리고 거짓 예언자로 간주되게 된 엘리사에게는 하나님의 상해(傷害)였다.2. 그는 잔인하게 자기 주인을 살해했다. 그리하여 결국 그 예언자의 말을 실현했다(15절). 그는 두터운 옷을 찬물에 적셔서, 그것을 왕의 얼굴에 덮어 씌웠다. 아마 그때 하사엘은 왕을 시원하게 해 주고, 기운을 북돋우어 주는 체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함으로써 왕을 질식시켜 죽였다. 그는(자기를 가눌 힘도 없을 만큼) 쇠약해 있었든가 잠들었던 것 같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의 생명이라도 이렇게 물거품 같은 것이다. 또 이와 같이 항상 제왕들은 폭력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하사엘은 벤하닷의 극진한 친구이며, 그를 살해한 자이다. 그래서 혹자는 의심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그가 그 사실은 결코 밝히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영감받은 이 역사가(성경기자)가 그것을 밝혔다고 한다.
우리는 이 오만한 군주가 "산 자의 땅에 큰 두려움" 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왕상 20장). 그러나 그는 "자기 백골에 자기의 죄악을 지고" "살해되어 음부로 내려갔다" (겔 32:27).
여호람의 통치(열왕기 하 8:16-24)
여기서 우리는 여호람(혹은 요람)의 통치와 생애의 간략한 기록을 보게 된다. 그는 유다 열왕 중의 가장 악한 자이지만, 가장 선한 여호사밧의 아들이요 그의 후계자이기도 하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부모라 할지라도 자식들에게 은혜를 물려 줄 수는 없다. 본인들은 경건했지만 자기 뱃 속에서 나온 자들은 사악하고 타락한 것을 보는 수치와 비애를 맛보는 자들도 많다. 이런 괴로움을 받는 자들은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하자.2. 선한 부모의 자녀들이 악하게 되면, 대체로 다른 자녀들보다 더 악하게 된다. 부정한 영은 자기보다 더 악한 다른 영을 일곱이나 데리고 온다(눅 11:26).
3. 선한 왕의 통치를 받는 축복과 이점을 살리지 못한 민족은 악한 통치자의 학정으로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이제 여호람에 대하여 살펴보자.
Ⅰ. 그의 악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이렇다(18절). 즉 "그는 아합의 집과 같이 행했다" 는 것이다. 그 누구도 아합보다 더 악하게는 행할 수 없다. 그의 성격도 그가 본받은 그 나쁜 본도 닮았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가 사귀는 친구에 의해서, 그리고 그가 베껴 쓰는 그 사본에 의해서 좌우되기 때문이다. 청년이 스스로 본 받으려 하고 표준으로 삼으며 자기들의 의견의 척도로 삼을 자들을 잘못 선택하는 것만큼 자기들에게 치명적인 운명이 되는 것은 없다. 여호람은 자기 아버지의 집보다는 오히려 아합의 집을 그의 모범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이 선택이 그의 멸망이 되었다. 우리에게는 그의 사악성, 곧 살인, 우상 숭배, 박해, 그리고 그가 한 모든 악한 일들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대하 21절).
Ⅱ. 그의 악의 원인들은 무엇인가? 그의 아버지는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고, 그에게 여호와의 선한 지식을 가르쳐 주려고 애썼을 것이 틀림 없다.
1. 그러나 그가 아합의 딸과 결혼한 것이 분명 잘못이었다. 우상 숭배의 가정과 결혼해서 유익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어머니에 그 딸격인 이세벨의 딸 아달랴와 결혼했으니, 온갖 불행밖에 뭐가 나오랴! 타락은 신앙 고백자들이 세속적인 자들과 저 옛 세상(노아 시대)의 부당한 멍에를 같이 멘 결과였다. 나쁜 결합은 이미 절반은 파멸된 일이다.2. 여호사밧이 자기 생존 중에 그를 왕으로 세운 것이 잘못한 일인 것 같다. 본문에 보면, "여호사밧이 위(位)에 있을 때에, 여호람이 왕이 되었더라" 고 했다(16절). 이리하여 여호사밧은 여호람의 자만심을 만족시켜 주었다(자만심보다도 젊은이들에게 더 해로운 것은 없다). 그리고 아들의 비위를 맞추어 줌으로써 그를 개심시키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으나, 오히려 그를 야망에 빠지게 하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그의 가정에 저주가 임했다. 엘리의 경우와 같이, "그의 아들들이 스스로 타락했고, 그는 그들을 자제시키지 못했다." 여호사밧은 아합과 라롯 길라앗에 갔을 때, 이 악한 아들을 자기 부왕(副王)으로 삼았다. 여호사밧의 재위 17년은(왕상 22:51) 여호람의 제2년이 된다(왕하 1:17). 그러나 그후 여호사밧은 자기의 재위 제22년에 가서 아들을 동등한 군주로 삼았다. 그리고 그 때는 요람의 재위 제8년이요, 그의 아버지가 죽기 전 3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너무 빨리 지위를 얻는 것이 많은 젊은이들에게 해가 된다. 사무엘은 "자기 아들들로 사사를 삼아서"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Ⅲ. 그는 악하기 때문에 섭리자 하나님의 질책을 받았다.
1. 에돔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다윗 시대 이후로 유다 왕들의 통치 하에서 약 150년간 지배를 받아왔다(20절). 그는 그들의 진압을 꾀하여 좌절시켰지만(21절), 자기가 이미 확보했던 이점을 증진시킬 수 없었다. 즉 그는 그들에 대하여 이와 같이 "에돔이 반역하였다" 고 했다(22절). 그리고 오바댜의 예언과 시편 137편 7절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에돔 사람들은 이후로부터 더 혹독한 유다인의 원수가 되었다. 이제 이삭의 예언은 성취되었다. 즉 장자 에서가 동생 야곱을 섬기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또한 "그(에서)는 자기 목의 멍에를 벗을 것이다" 라 했다(창 27:40)2. 립나가 반역했다. 이 도시는 유다의 성읍으로서, 그의 나라의 중심이며 제사장들의 성읍이었다. 이 성읍의 주민들은 그의 통치를 벗어 버렸다. 그것은 "그(여호람)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또 그러한 사실들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대하 21:10, 11).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를 보존하기 위하여 하나의 자유로운 국가를 세웠다. 아마 다른 성읍들도 똑같은 일을 했을 것이다.
3. 그의 통치 기간은 짧았다. 하나님은 한창 때에 그를 죽게 하셨다. 그때 그는 40세에 불과했고, 8년밖에 통치하지 않았던 때였다. "피를 흘리고 그리고 거짓된 자들은 자기 날의 절반을 넘어 살지 못할 것이다."
Ⅳ. 여호람의 통치가 하나님을 배반함을 가져왔지만, 유다 왕국과 다윗의 집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돌보심이 있다. "여호와께서 유다를 멸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다" 고 했다(19절). 하나님은 능히 그럴 수 있었다. 또 그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는 아무런 손해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것은 다윗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은혜를 받을만한 그 집안의 어떤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언제나 그 가정에 등불을 주시겠다고 다윗에게 약속한 그 약속 때문이었다(즉 세세토록 왕위를 계승하리라는 약속이었다. 이로 인해서 그의 이름이 빛나고 유명하게 보존될 것이다. 마치 등불이 끊임없이 새로운 기름이 공급됨으로써 계속 불타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그 약속은 그의 가정이 메시야 즉 다윗의 자손(예수)에게서 끝 날 때까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다. "그의 아버지의 모든 영광이" 바로 이 메시야에게 "부여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메시야의 영속하는 왕국에서 다윗에 대한 약속은 성취된다. "내가 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위하여 한 등불을 준비하였노라" (시 132:17).
Ⅴ. 이 불경건하고 영광스럽지 못한 통치자의 결과를 보자(23, 24절). 그에게 대하여 특별한 것은 아무 것도 언급되지 않았다. 단지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하여진다. 그는 "심한 병으로 죽었고", 그리고 "아끼는 자 하나 없이 죽었다" 고(대하 21:19, 20).
아하시야의 통치(열왕기 하 8:25-29)
일반 사람들 중에도, "보잘 것 없는 사람" 들이라고 지칭되며, 두각을 나타내지도 못하고, 거의 중요시되지 않으며, 별로 가치 있게 평가되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왕들 중에도 다른 왕들과 비교하여 볼 때, "보잘 것 없는" 왕들이라고 지칭될 수 있는 자들이 있다. 아하시야가 바로 이런 왕들 중의 하나다. 그는 역사상에서 보잘 것 없어 보이고, 하나님 보시기에도 하찮은 자였으니, 그것은 그가 약했기 때문이다.
여호사밧과 아하시야가 동일한 때에 자기들의 가족들의 이름을 동일하게 붙였다는 것은, 그들 사이의 유사성을 말해 주는 너무나 명백한 증거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서로 간의 경의를 표하려고 했던 것 같다. 아합은 두 아들 즉 아하시야와 여호람을 두었고, 그들은 계속하여 통치자가 되었다. 여호사밧은 아들과 손자를 두었는데, 이름도 여호람과 아하시야였다. 그들도 같은 식으로 대를 이어 통치했다. 이름이 성품을 만들지는 않지만, 아합가(家)에서 이름을 따온 것은 여호사밧가에게는 하나의 흉조였다. 또는 여호사밧이 파산된 가문에다가 이름을 빌려 주었다면, 비록 이름은 주었지만 그 이름에 합당한 믿음, 곧 아하스 "여호와를 붙들다." 그리고 여호람 "여호와께서 높이셨다" 는 믿음은 전해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는 불과 2년을 통치했고, 유다의 왕 아하시야는 겨우 1년을 통치했다. 유다 왕 아하시야가 이스라엘 왕 아합의 가문과 맺은 관계가 다음 사건의 이유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1. 아하시야의 악의 원인(기회)이었다. "그는 아합의 집의 길로 갔다" (23절)고 했다. 아합은 우상 숭배의 피를 받은 집이다. 왜냐하면 그의 어머니는 아합의 딸이었기 때문이다(26절). 그래서 그는 그녀의 젖과 함께 그녀의 악도 빨아 먹었다. Partus sequiturventrem-" 어린이는 어머니를 닮게 된다."남자들이 아내를 선택할 때, 그들이 반드시 기억할 일은, 자기의 자녀들을 위한 어머니를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선택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어야 한다.
2. 그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아하시야의 어머니의 남(男) 형제 요람은 라롯 길르앗의 회복을 위하여 자기와 합세하자고 아하시야에게 요구했으며, 이것이 아합가에는 치명적인 결과가 되었다. 그것은 아합의 아들 요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원정에서 요람은 부상하였고(28절), 치료받기 위하여 이스라엘로 귀환할 때는 그의 군대를 그 곳 영지에 그대로 남겨 두고 홀로 갔다. 또한 아하시야도 귀환했으나, 그는 여호람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보려고 이스르엘로 갔다(29절). 섭리자께서 그렇게 조정하신고로, 아합의 집에 의해서 타락된 그는 그들과 함께 죽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때는 그들의 죄악의 그릇이 가득 찬 때였다. 이 사실은 다음 장에서 보게 될 것이다. 죄인들과 함께 죄에 참여한 자들은, 죄인들의 저주에도 동참하게 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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