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열왕기하 0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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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물 위에 떠오른 도끼(열왕기 하 6:1-7)

본문에서는 여러 가지 사실들을 관찰해 볼 수 있다.

Ⅰ. 예언자들의 생도들과 그들이 처한 형편에 관한 사항을 보자. 여기서 말하는 학교는 길갈에 있는 학교를 말하는 듯하다. 엘리사가 이전에 거기에 있었고(4:38), 또 길갈은 요단에서 가깝기 때문이다. 아마 엘리사가 어디에 주재하든, 그가 있는 곳에는 그의 교훈과 고견과 기도 때문에 많은 생도들이 모여 들었을 것이다. 누구나 엘리사와 함께 또는 가까이 지내고 싶어했을 것이다. 선생이 되고자 하는 자들은 남들이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처지로 자신을 내어 놓아야 한다.

1. 생도들의 수효가 늘어났다. 결국 그들이 기거할 방이 없게끔 되었다. "보소서, 거한 곳이 우리에게 너무 좁습니다" (1절). 이것도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서 잘 들을 수 없다는 뜻이다. 필경 엘리사의 기적이 사람을 많이 끌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많아지고 게하시는 면직되었으므로 누군가 정직한 사람이 게하시를 대신하여 그들의 식생활을 돌보았을 것이다(4장 43절의 예로 보면). 게하시가 자기 주인의 후박함을 투정한 것이 나아만 때의 일만은 아니었기 때문에, 분명 그랬을 것이다.

2. 그들은 겸손한 사람들이라서, 화려하고 웅대한 집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방이 모자라게 되었을 때, 그들은 백향목 대리석과 공교한 공예 기술자들을 구하러 사람을 보내자고 말하지 않았다. 단지 각자 목재 하나씩을 가져와서 평범한 오두막을 짓자고 했다. 예언자의 생도들은 모두 이 세상의 비천함에도 만족히 여기면서 저 세상의 귀중한 일을 염두에 두고 있는 그런 자들이었다.

3. 그들은 가난했다. 그들은 요직에 앉은 자들과는 상관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것은 요람이 왕이었고 이세벨도 통치권을 쥐고 있었다는 것, 혹은 예언자들의 생도들은 방이 비좁게 되면 자기들끼리 집을 확장하려고 논의하며 단지 정부에다 건의를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말해 주는 한 표적이다.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세상에서 총애를 받는 일이 드물다. 오히려 그들은 너무나 가난하여 일꾼을 고용할 능력이 없었으며(그래서 일을 하기 위해서 공부를 중단해야 했었다) 연장을 살 능력도 없었다. 그래서 이웃집에 가서 연장을 빌어와야 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가난이란 것이 예언하는 일에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4. 그들은 근면하여 스스로 수고하려 했다. 그들은 게으른 수필처럼(게으른 "수도사" 라 부르면 좋으리라) 남의 수고로 살아가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자기들 스스로 일할 자유를 허락해 달라고 빌었다. 예언자들의 생도들이 너무나 명상에만 전념하여 행동하기에 부적합한 사람들로 변화될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되듯이, 일하기 싫어할 정도로 안일에 탐닉되어서도 안 된다. 먹어야 되는 자는 일을 해야 되며, 그렇지 않으려면 굶어 죽어야 한다(살후 3:8, 10). 그 누구도 정직한 노동을 짐스럽게 생각하거나 부끄러운 일로 여겨서는 안 된다.

5. 그들은 엘리사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자들이었다. 그들도 예언자였지만, 그들은 그에게 지극한 존경심을 보냈다.

(1) 그들은 그의 허락 없이는 도무지 집을 지으려 하지 않았다(2절). 우리 생각에는 아무리 온당하더라도, 우리들의 판단을 한번 검토해 보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그리하여 보다 지혜롭고 경험이 많은 자들의 충고를 들어보는 것이 좋은 일이다. 특히 그 예언자들이 자기들의 아버지(스승)를 함께 모시고 가려 했으며, 모든 행동은 그의 지시에 따라 하려 했다는 사실은 특히 자랑스러운 태도이다. 그들은 Permissu superiorim-연장자들의 허락을 얻어 일을 하려 했다.

(2) 그들은 엘리사가 같이 가지 않으면 재목을 자르려 하지 않았다. "당신도 종들과 함께 하소서" (3절). 위급한 경우에 조언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들 사이의 질서를 지키며, 감독을 해 주시사 각자가 훌륭히 일을 해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니라. 훌륭한 생도들은 항상 훌륭한 규율 밑에 있기를 바란다.

6. 그들은 정직했다.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것을 돌리려고 한 자들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도끼질을 너무 열심히 하다가 불행히도 그 도끼를 물 속에 빠뜨려 버렸을 때(일을 잘 안 하던 사람들은 흔히 과열하기 쉽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이건 우연한 실수다. 도와 줄 자 없는가? 도끼 자루 탓이로다. 주인은 이제 할 수 없게 되었도다." 오히려 그는 큰 걱정으로 소리를 쳤다. "오, 주인이여! 그 도끼는 빌어온 것입니다" (5절)라고 했다. 만일 도끼가 본인의 것이었다면, 자기 동료들과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된 것만 걱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걱정 외에도, 정당하게 대하고 감사를 드려야 할 그 도끼 임자에게 부당한 일을 저지르게 된 것을 걱정했다. 빌어온 물건에 대해서도 내 것처럼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웃을 우리 자신같이 사랑해야 하며,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 그 예언자 생도는 가난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도끼도 살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 도끼를 잃어버린 것이 남달리 큰 걱정거리가 된 것이다. 정직한 마음씨를 가진 자들에게는, 그 가난이 수치스럽다기보다는 남에게 갚아야 할 빚을 갚을 수 없게 되는 것이 가난이 주는 가장 큰 슬픔이다.

Ⅱ. 예언자들의 아버지 엘리사에 관한 기록을 보라.

1. 그는 지극히 겸손하고 동정심이 많은 자였다. 그는 생도들이 원하자, 그들과 함께 삼림으로 갔다(3절). 누구든지, 특히 사역자들은 자기들은 너무나 위대하여 자신을 낮출 수 없다거나 자선을 베풀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직 모든 자들에게 다정히 대해야 한다.

2. 그는 위대한 권능을 지닌 자였다. 자연의 법칙과는 반대로, 도끼가 물 위에 뜨도록 할 수도 있었다(6절). 자연을 지은 하나님은 자연의 법칙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도끼 자루마저 집어 던져 버리지 않고, 새로 나무 가지를 잘라서 물 위에 내밀었다. 우리는 그 나무 가지가 가라앉아서 도끼를 올려놨다고 생각하여 그 기적을 두 배로 늘일 필요는 없다. 나뭇가지는 도끼에게 떠오르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선포하는 한 신화로 보면 족하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총은 이 세상의 진흙탕에 깊이 침윤된 돌같은 영혼들을 떠오르게 하시사, 그들의 이 세상적 욕망을 위에 있는 거룩한 것들에게 행하도록 하실 수 있다.

 

6:2 없음.

 

6:3 없음.

 

6:4 없음.

 

6:5 없음.

 

6:6 없음.

 

6:7 없음.

 

6:8

아람 왕의 번뇌(열왕기 하 6:8-12)

예언의 영을 가진 엘리사가, 전에는 예언자들의 생도들을 도와 주었듯이, 여기서는 왕에게 협력한 사실을 읽게 된다. 모든 은사가 다 그렇지만, 예언의 은사는 그것을 유용하게 쓸 줄 아는 자들에게 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든 자기에게 선을 행할 만한 능력이 있는 자는, 그 능력으로 현명한 자와 그렇지 못한 모든 자들에게 빚을 갚아야 한다.

Ⅰ.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적국 아람 왕의 의도와 거동을 모두 왕에게 알려 주었으니, 그야말로 가장 힘센 장수나 신실한 첩자들보다도 더 유용한 일을 한 것이다. 아람 왕이 전쟁 비밀 회합을 열고, 이스라엘 변방의 어느 지역에 매복해 있기로 결정하고 나서,이 계획이야말로 실로 놀랄 만한 일이요, 이스라엘군은 아무 저항도 못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의 군대가 아직 명령을 받기도 전에 먼저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에게서 그러한 정보를 듣고 미리 피해를 막을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여러 번 일어났다(8-10절).

여기서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1.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적들은 교묘히 궁리하며 끊임없이 공격을 시도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저희가 알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저들에게 들어가 저들을 살육하리라" 라고 그들은 벼른다(느 4:11).

2. 그들의 모든 궁리가 하나님께 알려지며, 그들의 은밀한 것까지 알려진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하는 행동뿐만 아니라 생각까지 아시며, 그것을 분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책을 가지고 계신다.

3. 미리 위험이 경고되면, 그것은 우리에게 유리하다. 사전에 방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예언자들의 역할은 우리에게 경고를 주는 것이다. 우리가 경고를 받았는데도 구원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들 자신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피가 우리의 머리 위에 쏟아지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왕은 아람 왕의 계획으로 인한 자기의 위험을 엘리사가 경고해 주자 그것을 중히 여겼다. 그러나 죄로 인한 그의 위험을 경고해 주었을 때는 그 경고를 중히 여기려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죽음의 위험을 피할 수는 있을지언정, 지옥은 피할 수 없게 된다.

Ⅱ. 아람 왕은 이 일로 대단히 분개했다. 그는 자기의 중진 신하들 중에 첩자가 있지 않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참모 회의 내용이 누설된다고 본 것이다(11절). 그러나 그 신하들 중 한 사람-나아만과 다른 신하들에게서 들었을 것이다-이 엘리사의 기적 역사를 알고서는, 이스라엘 왕에게 이 정보를 제공하는 자는 틀림없이 엘리사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12절). 게하시의 생각을 알 수 있었던 자가 무엇인들 모르랴? 이리하여 아람 사람들은, 이전에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무한한 권능을, 이번에는 그의 무한한 지식을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누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무슨 말을 하며, 무슨 생각을 했든지 간에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지식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6:9 없음.

 

6:10 없음.

 

6:11 없음.

 

6:12 없음.

 

6:13

아람의 정탐꾼들(열왕기 하 6:13-23)

1. 아람 왕은 엘리사를 잡아 오라고 많은 군대를 파견했다. 그는 엘리사가 도단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는데(13절), 도단은 사마리아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왕은 그리로 많은 군사를 보내어, 밤중에 그를 공격하여, 잡아오든지 체포하여 오라 했다(14절). 아마 아람왕은, 예전에 엘리야를 잡으려고 50부장 한 사람과 그의 부하들만이 갔다가 실패하고 만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군사" 를 보내어 엘리사를 잡아오게 했다. 마치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더라도 50명쯤이야 쉽겠지만 5만 명 정도면 쉽게 불살라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어떤 요새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호위병을 거느리고 있지도 않으며, 또 그 백성들과 그렇게 큰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라서 백성들에게서 일어나는 소요를 무서워하지도 않는다는 따위의 사실을 왕에게 일러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큰 군대를 필요로 했겠는가? 그러나 나아만은 아람 왕이 완전, 특히 돌연한 기습을 조심하기 위한 안정책을 쓰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사람이로다! 엘리사가 자기 왕의 비밀 회담 내용까지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할 수 있었다는 것을 도대체 나아만은 못 믿었다는 것인가? 못 믿었다면 왜 그와 시비를 거는가? 믿었다면, 엘리사가 자신을 해치려는 계획을 적발해 낼 수 없을 것이라는, 그렇게 빈약한 상상밖에 할 수 없었다는 것인가? 더욱이 엘리사가 하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그러한 계획을 발견해 낼 수 있다면, 또한 그 계획을 물리칠만한 권세 또한 가지고 있으리라는 것쯤 생각할 수 없었단 말인가?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예언자들과 더불어 싸우려는 자들은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하는 것이다.

Ⅱ. 예언자 엘리사의 종이 아람군에 의해 도단 성읍이 포위된 것을 알았을 때 크게 걱정하며 놀라움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를 진정시키고 공포를 제거해 줄 수 있는 유효 적절한 방도를 강구했다. 엘리사는 자기 종을 일찍 일어나게 하여, 그 날 결재하고 해야 할 일들을 알아보게 하는 관습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종이 일어났을 때, 군대의 웅성대는 소리를 듣고, 그 쪽으로 내다보니, 자기 성읍의 주변을 애워싸고 있는 군대가 있었던 것 같다(15절). 그리고 그는 그들의 공격이 반드시 승리하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래서 즉시 저들의 수중에 들어간 이 난경을 예언자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제 다음 사실들을 엿볼 수 있다.

1. 종은 지극히 당황했다. 곧장 엘리사에게 달려가서, 보고를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우린 이제 죽었습니다. 도망갈 수도 없고 날아갈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손에 처분되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가 다윗의 시편-이것은 당시에도 있었다-을 공부했더라면, 일만 명의 사람이 와도 "두렵지 않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시 3:6), 또한 "군사가 그를 치려고 에워쌌을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시 27:3).

2. 그가 자기는 자기의 주인과 함께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고, 또 그 주인을 통해서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이미 해냈으며 지금도 그가 "무할례자들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고 계신다는 것, 그리고 그 주인은 이미 다른 사람들을 구원해 낸 적이 있으므로 분명코 그 자신을 구원해낼 것이라는 점들을 생각해 보았더라면, 그가 이처럼 당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단지 "내가 어찌할꼬?" 하고만 말했더라면 다소 변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주여, 우리를 구하소서. 죽게 되었나이다" 라고 말했던 제자들과 같은 행동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주인까지도 지금 곤경에 처해 있다고 결론내려야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는 따위의 말을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3. 그의 주인은 그를 어떻게 진정시켰는지 보자.

(1) 말씀으로 진정시켰다. 엘리사가 종에게 한 말(16절)은 하나님의 모든 신실한 종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밖에 놀라움, 안에 걱정이 있더라도", "두려워말라. 우리와 함께 하여 우리를 보호할 자들이 우리를 대적하여 죽이려는 자들보다 더 많으니라-천사들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많다-하나님은 무한히 위대한 권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니라." 우리에게 큰 두려움이 닥쳤을 때는, 하나님과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명백하고 위대하고 숭고한 생각으로 우리 자신을 진정시킬 줄 알아야 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그 결과가 어찌될지 우리는 안다(롬 8:31).

(2) 환상을 보여 주어 진정시켰다(17절).

[1] 엘리사는 자기 종이 만족을 찾게 되기를 크게 고심한 것 같다. 선한 사람들은 자신의 평안만이 아니라 자기 주변의 사람들도 평안하기를 소망한다. 엘리사는 오랫동안 데리고 있던 자기의 옛 종을 얼마 전에 내어보냈다. 그래서 새 종을 데려 온 것이다. 이 종은 경험이 부족했다. 그래서 엘리사는 자기와 함께 역사하고 있는, 그래서 결국 그 종과도 관계가 되는 그 전능하신 권능을 믿을 수 있는 다른 한 증거를 종에게 보여 주고자 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믿음이 약하여 겁이 많은 사람들을 친절히 돌봐 주고 동정해야 하며, 그들의 손을 힘 있게 할 수 있는 모든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2] 엘리사는 자신의 안전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단 자기 종도 자기가 본 것을, 곧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천사들의 호위를 보게 해 주고자 했을 따름이다. 엘리사의 스승을 천국문으로 데려다 주었던 바로 그 호위병들이 또한 엘리사를 지옥문에 가지 않도록 막아 주는 보호병이 되었던 것이다. 곧 그 호위병들은 "불수레와 불말" 이었다. 불은 무서운 것이기도 하거니와 태워 없애 버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엘리사의 호위을 맡은 바로 그 능력이 저 침략자들을 공포에 떨게 할 수도 있고 불살라 없앨 수도 있었던 것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의 병사요 군사이며(창 32:2), 그의 군단이요 연대(병력)이다(마 26:53).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복리를 위해 일하는 것이다.

[3] 그 종을 확신케 하기 위해서는 단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래서 엘리사는 "그것" 을 기도하여 얻었다. "여호와여, 그의 눈을 뜨게 하사 보게 하소서." 물론 그 종의 신체적 눈은 열려 있었지만, 그 눈으로는 그의 위험을 보았을 뿐이다. "여호와여, 그의 믿음의 눈을 뜨게 하사, 우리가 안전한 보호를 받고 있음을 보게 하소서" 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명심하자.

첫째, 공포에 떠는 겁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베풀 수 있는 우리의 최대의 친절은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서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하는 것이다.

둘째, 눈의 열림은 두려움을 침묵시킬 것이다. 어두운 때에 우리는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을 보다 분명히 보면 볼수록 우리는 이 세상의 재난에 대해서 그만큼 적게 두려워할 수 있다.

Ⅲ. 엘리사는 자기를 사로잡으러 온 아람 군사들을 깨끗이 물리쳤다. 그들은 이제 엘리사를 잡아가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는 그들을 완벽하게 희롱해 버렸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들 때문에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1. 엘리사는 하나님께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해 줍시사고 기도했다. 그래서 그들은 즉시 장님이 되었지만, 완전 장님이 아니라 자기들이 장님이라는 것도 모를 정도로만 장님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빛을 식별할 수 있었으나, 단지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잘 알아보는 사람과 지형을 알아 보지 못하도록 시각적 판단력만 바뀌었기 때문이다(18절). 그들은 너무나 혼란을 당하여, 자기들이 누구의 말을 듣고 있는지, 지금 거기가 도단이라는 것도, 그 사람이 엘리사라는 것조차 전혀 모르면서, "낮에도 황혼 때와 같이 넘어졌다" (사 59:10; 욥 12:24, 25). 기억력이 사라졌고, 분별력도 없어졌다.

사람의 정신과 오성에 두 가지로 모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라. 하나님은 엘리사의 친구의 눈을 열어 주셨고, 그의 대적의 눈을 어둡게 하시사,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게 하셨다(사 6:9). 그리스도께서도 이 세상에 심판하러 오셨다고 했으니, 곧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이 되게 하려 함이라" (요 9:39). 그래서 어떤 자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되고, 또 어떤 자에게는 죽음의 냄새가 된다.

2. 이처럼 그들이 방황하게 되고 혼란을 당하자, 엘리사는 그들을 사마리아로 인도해 갔다(19절). 그들이 찾으러 가고자 하는 데로 데려 가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는 그렇게 했다. "여기는 그 길이 아니요, 그 성읍도 아니라" 고 말한 것은 엘리사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다. 이제는 그 성읍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엘리사를 만나기를 원한다면, 엘리사가 인도하고자 하는 다른 성읍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그 예언자들과 더불어 싸우는 자들은 스스로를 속이게 되고, 망상에 굴복하게 되고 만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3. 엘리사는 그들을 사마리아까지 인도하고 나서는, 다시 그들의 눈이 열리게 되고 기억력이 회복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래서 그들이 자기들의 있는 처소를 분별하게 되자(20절), 큰 공포에 떨면서 "그들이 사마리아 성읍의 한 가운데 와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마 사마리아에는 그들을 모두 처형할 만한 상비군이 있었을 것이요, 그들을 모두 전쟁 포로로 만들어 버릴 힘도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이 세상의 신, 사탄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며 그들을 멸망으로 매혹시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시며 그들은 자신들이 적군의 중앙에, 사탄의 포로가 되어 있으며 곧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도 그들은 자기들이 안전한 곳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과 교회의 원수들은, 자기들이 한참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을 때에 자기들이 곧 정복되고 참패를 당하고 말게 되는 꼴을 보게 될 것이다.

4. 엘리사가 그들을 마음대로 처분 할 수 있게 되자,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권능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에도 감화를 받고 있는 자임을 보여 주었다.

(1) 그는 그가 그들에게 준 공포에서 그들을 구해내고, 자기가 그들에게 무슨 일을 행할 수 있는지 그것만을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는 자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천사의 칼이나 또는 자기가 원하면 명령을 내릴 수 있는(21절) 이스라엘 왕이 칼을 휘두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왕은 엘리사를 지극히 존경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요, 곧 엘리사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내 아버지여, 내가 그들을 치리이까?" 하고 왕이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마치 폭력을 동경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내가 그들을 치리이까?" 하고 물었다. 아마 왕은 자기의 아버지가, 이전에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죽여버렸어야 했던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않은" 연고로 하나님이 몹시 분노하셨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와 비슷한 방식의 죄를 범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 왕은 이 예언자의 허락이 없이는 결코 한사람도 치지 않을 만큼, 그 예언자를 존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예언자는 왕에게 조금도 이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고 했다. 그들을 이 곳까지 끌어온 것은 그들로 하여금 최대의 수치를 얻게 하려 함이지 죽이려는 목적에서였던 것은 아니다(22절). 만일 그들이 왕의 죄수들이요, 그가 칼과 활로 잡아온 포로들이라면, 그들이 살려달라고 했더라도 잔인하게 거부되었을 것이다. 또 살려 주겠다고 했다면, 그들을 해치려는 다른 어떤 의도에서 그렇게 했을 것이요, 그것은 포로들을 냉정히 죽이는 군법에도 저촉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왕의 죄수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죄수들이요 그 예언자의 죄수들이었다. 따라서 왕은 이들에게 아무런 피해를 가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겸손히 복종하는 자들이 자신들을 위해서도 가장 안전한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2) 엘리사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조치했다. 엘리사는 그들을 정중히 대접하여 평안히 보내라고 왕에게 명령했고, 왕은 그대로 했다(23절).

[1] 왕은 자기의 마음을 억누르고, 또 자기에게 유리해 보이는 것도 물리치고서 예언자에게 그토록 순종했다는 것은 정말로 칭찬할 만한 일이다(삼상 24:19). 더구나 왕은 엘리사를 지극히 공경했다. 곧 엘리사는 단지 그들에게 "떡과 물" 을 주라(이것도 포로들에게는 큰 자비이다)고만 했는데, 왕은 그들을 위해, 그리고 자기의 궁정과 나라와 엘리사의 위신을 생각하여 "큰 식량을 베풀었다."

[2] 예언자 엘리사가 자기의 원수들에게 그토록 후한 마음씨로 대했다는 것은 또한 칭찬할 만한 일이다. 실상 그 원수들은 그를 잡으러 왔다가 그에게 탄복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엘리사야말로 그들이 이제껏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위대한 권능을 가지고 있으며 가장 친절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할 저 위대한 의무는 구약성서(잠 25:21, 22 .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라." 출 23:4, 5)에서 명령되어 있고, 또한 본문 중의 엘리사처럼 실행되어야 하는 사실이다. 엘리사의 선배들은, 자기들을 박해하던 자들을 불살라 죽이는 불길을 요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정의의 증거를 보여 주었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의 박해자들의 머리에 숯불을 놓아 그들을 변화시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비의 증거를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도록" 하자.

Ⅳ. 이 사건은 잠시동안 아람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다.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않았다" (23절)고 했다. 즉 엘리사를 잡을 목적으로는 침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해 봐야 헛된 일이라는 것을 알았고, 또 자기들 중에서는 아무도 그렇게 위대하고 선량한 사람을 죽이려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적을 가장 멋있게 이기는 승리는 그들을 친구로 만드는 것이다.

 

6:14 없음.

 

6:15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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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3 없음.

 

6:24

포위된 사마리아 성(열왕기 하 6:24-33)

본문은 본 장의 결말이 되었지만, 사실상은 다음 장의 첫 머리가 되었어야 옳은 일이다. 새로운 이야기가 여기서부터 시작되고 있고, 그 이야기는 계속되어 다음 장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Ⅰ. 아람 왕이 사마리아를 포위했다. 그리하여 그 성읍은 큰 곤경에 빠지고 말았다. 아람 사람들은 얼마 전에 저들이 사마리아에서 대접받은 그 친절을 잊어버렸으며, 어떤 명백한 구실도 없는 것 같은데, 배은망덕하게도 사마리아 성읍을 파멸시키려고 하고 있다(24절). 은혜를 모르는 아주 비천한 인간들도 세상에는 있다.

아마 수도가 극한 상황으로까지 사정이 악화되었을 때는(25절), 그 나라 전체가 약탈을 당하고, 황폐해졌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얼마 전 그 땅에는 기근이 있었고, 아마 그 기근으로 인해 저들의 창고는 바닥이 나게 되었을 것이며, 갑자기 포위를 당했기 때문에 식량을 비축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밖에서는 칼이 죽음을 휘두르는 동안, 안에서는 기근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받았다(애 4:9). 아람 사람들이 그 성읍을 일시에 몰락시키지 않고 굶어 죽도록 꾀했기 때문이었다. 실로 기근은 굉장했다. 살도 별로 붙어 있지 않으며 맛이나 영양도 별로 좋지 못하고 그네들의 의식법상으로 정결하지도 못한 나귀 머리통 하나가 은 80세겔(5파운드)씩이나 나갔으며, 본문에서는 "비둘기 똥" (dove's dung:개역-합분태)이라 불리우는 족제비나 편두 또는 어떤 조야한 곡물의 소량이-달걀 6개의 분량 정도도 못되었다-은 다섯 세겔(약 18~20실링)에 팔렸다. 풍요를 귀중히 여기며 감사할 줄 알아야겠다. 기근 때문에 돈의 값어치가 얼마나 무시되는가를 보라. 먹을 수 있는 것을 위해서라면 돈쯤이야 얼마든지 쓰게 되는 것이다.

Ⅱ. 한 가난한 여인이 기근의 극한 상황에서 당한 슬픈 사연을 왕에게 알려 왔다. 왕이 파수병을 돌아보며 궁술가들의 배열과 무너진 곳을 보수하게 하는 일 따위를 위해 명령을 내리려고 "성 위로 통과하고" 있을 때에 그 성읍의 한 여인이 "나의 주 왕이요! 도우소서!" 하고 소리쳤다(26절). 어려움을 당한 백성들이 직무상 자기들의 권리의 보호자요 억울한 일을 풀어 주는 자인 임군에게 나아가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면, 어디로 가서 도움을 구하랴? 왕은 돌아보았으나, 불쾌한 답변을 했다(27절).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않으시면, 내가 어쩌랴?" 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이 "시비를 건 것" 이라고 본다. 곧 그가 화를 냈다고 보는 것이다 즉 "하나님까지도 우리를 못 살게 구는 이런 때에, 도대체 너는 내게서 뭘 바라는 것인가?" 라는 뜻으로 본다. 왕은 타작 마당이나 포도주틀을 이용하여 자기가 원하는 대로 그 여인을 도와 줄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려 하지 않았다. 우리도 어떠한 처지에 놓이지 않을까 삼가 조심해야 된다.

그러나 오히려 그 말은 위안하여 "진정시키는" 말로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가 우리를 도울 때까지는 참으면서 현재의 고통을 잘 이용하도록 노력하자. 나는 너를 도울 수 없노라" 는 뜻으로 말이다.

1. 왕은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이 비어 있는 것을 슬퍼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그들의 형편과는 달랐고, 왕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는 군대를 대접하기 위하여 왕이 쓰도록 명령한 큰 식량에 관해 읽었다(23절). 그러나 지금은 가난한 여인 한사람도 구제할 식량이 왕에게는 없었다. 큰 풍요 뒤에 큰 궁핍이 오는 수가 종종 있다. "내일도 오늘과 같으리라" 는 확신은 결코 금물이다(사 65:12; 시 30:6).

2. 왕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돕지 않는다면, 자기로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자인했다. 피조물이란 하나님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대로요, 오직 그대로일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은 자기가 그 여인을 도와줄 수는 없었지만, 그 여인의 말을 기꺼이 들으려 했다(28절). "무슨 일이냐? 네게 무슨 특별한 사정이 있느냐, 아니면 네 이웃보다 더 어려운 점이 있느냐?" 정말로 그러했다. 그녀와 이웃집 여인 한 사람이 비극적인 계약을 맺었다. 즉 식량이란 모조리 떨어졌으므로, 그녀의 아들을 먼저 잡아 먹은 다음, 그 이웃집 여인의 아들을 잡아 먹자고 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녀의 아들을 잡아먹었다(어찌 무서워 생각이나 하랴?). 그런데 그 이웃 여인은 자기 아들을 숨겨 버렸다(28, 29). 육이 영을 지배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 실례를 보라. 그 때에는 정신의 가장 자연스런(본능적인) 애정마저도 몸의 본능적 욕망 때문에 무참히 정복되고 마는 법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된 것을 보라. 이스라엘 죄악으로 인하여 그들에게 경고한 하나님의 심판 중에는 이런 것이 들어 있다(신 28:53-57). 즉 그들이 자식을 잡아먹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감히 누가 믿었으랴? 그러나 사실화되었다.

Ⅲ. 왕은 이 일로 인하여 엘리사에게 분노했다. 그는 그 재난을 애통해 하면서, "자기 옷을 찢고, 속에 굵은 베옷을 입었다" (30절). 그가 이 백성의 비극을 진심으로 걱정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을 도울 만한 힘이 자기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의 불의를 통애하지는 않았다. 또 그 백성의 불의를 통애하지도 않았다 실은 그 불의가 이 참상을 불러들인 원인이었다. 그는 이것을 몰랐다. 자기의 "길과 행실이 이 일들을 부르게 하셨나니, 이는 너의 악함이라. 그 고통이 네 마음까지 이르리라" (렘 4:18).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의 길을 굽게 하고" 나서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느니라" (잠 19:3). 그리하여 그는 단과 벧엘에 있는 송아지 상을 헐어버리겠다거나 바알의 예언자들과 아스다롯 상에게 율법을 시행하겠다는 맹세를 하지 않고, 그 대신 "엘리사를 죽이기로" 맹세했다(31절). 왜, 무엇 때문인가? 엘리사가 뭘 했다는 것인가? 그의 머리야말로 모든 이스라엘인들 중에서도 가장 순결하고 값 있는 것이었으며, 신앙심이 깊은 자임에 틀림 없었으나, 그가 파문을 받았다. 이와 같이 핍박을 일삼는 황제들의 시대에는 제국 전체가 비상한 참변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그러고서도 그들은 그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전가시켰고, 마침내 그들은 파멸의 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Christianos ad lones-기독교인들을 사자들에게로 데려가라.

아마 여호람이 이렇게 엘리사에게 분노한 이유는, 그가 이 사실을 미리 예고했었기 때문이든가 또는 아람에게 투항하지 말고 버티라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리라. 아니면, 엘리사가 기도를 통하여 포위를 풀어 그 성읍을 구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엘리사가 그렇게 할 수도 있다고 가르쳐 놓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이 회개하고 개심하며, 구원받을 준비를 하기까지는, 그 예언자가 자기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리라는 기대는 가질 수 없었다.

Ⅳ. 엘리사는 왕이 자기를 해치려 한다는 것을 예견했다(32절). 그는 자기 집안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마 장로들이 분명히 그와 함께 태연히 있었을 것이다. 반면에 왕은 그물에 걸린 들소 같았고, 조용할 수 없어서 노호하고 있는 바다와도 같았다. 엘리사는 자기의 목을 자르도록 왕이 보낸 한 관리가 있다는 사실을 장로들에게 이야기했다. 오거든 문간에 세워두고 들여 보내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 관리의 주인인 왕이 그를 뒤쫓아 와서 그의 명령을 취소할 것이었기 때문이다(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엘리사에게 멀리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준 그 예언의 영이 또한 왕을 "살인자의 아들" 이라고 부를 수 있는 권위를 주었다. 그러한 특별한 사명을 띠지 않는 이상, 우리가 그러한 말씨를 모방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주권자를 경멸하고 존귀한 자를 악평하라고 씌어진 말이 아니다.

엘리사는 자기가 왕의 손에 의해 그런 화를 받아야 되겠는지 생각해 보라고 장로들에게 말했다. "이 왕이야말로 살인자의 아들이 아닌가 생각해 보라." "엘리사가 무슨 악을 행했다는 것인가?" 그는 "재앙의 날을 갈망하지 않았다" (렘 7:16).

Ⅴ. 왕은 엘리사를 죽이라는 칙령의 시행을 막기 위해서, 엘리사에게 와서는 아주 다정하게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자기의 양심의 자책과 죄악성 속에서 갈등을 느꼈던 것 같다. 그는 할 말을 몰랐다. 그러나 사태는 절망의 끝까지 나아갔다는 것을 알았고, 자기 자신도 구원받지 못할 것으로 포기해 버렸다. "이 재앙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 고 말했다(33절). 사실 이것은 옳은 말이었다. 제1원인(자연)과 마찬가지로 모든 괴로운 재앙은 여호와 곧 절대 심판주에게 속한 것이라는 점(암 3:6)은 일반적인 진리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그러한 사실의 구체적인 실례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가 지금 당하는 모든 재앙은 무엇이든지-그러므로 이 재앙까지도-하나님이 시키시는 것을 하는 도구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진리에서 연역해낸 왕의 추론은 어리석고 악한 것이었다. "내가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 하고 말했다. 엘리, 다윗, 욥들은 "그것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로다" 라고 말하고서도, 마지막까지 인내하였다. 그러나 이 악한 인간은 거기에다가 무례함을 더 범했다. "이제는 사태가 더 악화될 수도, 더 호전될 수도 없으니, 나는 선악 간에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리라. 우리는 모두 망했다. 구제책이 없도다" 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을 기다리다가 지치는 일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는 심판의 하나님이시며, 그를 기다리는 모든 자들의 축복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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