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만의 문둥병(열왕기 하 5:1-8)
우리 구주께서 베푸신 기적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식탁에서 떨어져 가나안 여인에게로 가게 되었던 부스러기와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 엘리사가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베푼 기적이 바로 그런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선하시므로, 또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은 것을 기뻐하신다.
Ⅰ. 나아만은 한창 명성을 떨치고 있던 때에 큰 곤경을 만났다(1절). 그는 높은 직위에 있는 요인이었다. 그에게는 돈이 많았고 계급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특히 두 가지 점에서 행복했다.
1. 그가 나라를 위해 큰 임무를 해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종종 "여호와께서는 그를 통하여 아람에게 구원을 주었었다." 즉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조차 그가 이기도록 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고 섬기지도 않는 자들의 번영까지도 하나님의 덕분이다. "그는 만인의 구주" 이시오,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이시기 때문이다.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을 이길 때는, 그것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일이란 것을 알도록 하자.2. 그는 왕의 마음에 아주 잘 들었다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총애를 받았고, 국무총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대단히 위대하고, 높은 존귀를 받았고, 장수였다. 그런데 문둥이가 된 것이다. 이것은 그 자신에게도 매우 수치러운 병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해 두자.
(1) 사람의 지위가 아무리 높고 명예가 있고 권세가 있고 정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인생의 가장 불행한 비극을 막아 주지는 못한다. 값지고 화려한 옷을 입고 있으나 병들고 미치광이가 될 자도 많다.
(2) 모든 사람들이 다 이런 저런 특성을 소유하고 있다. 그 중에 어떤 것은 수치스럽고 본인을 외소하게 만드나, 어떤 것은 그를 화려하게 하고, 또 어떤 것은 기쁨에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나아만도 대단히 행복하고 선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 점에 있어서는 자기가 원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복하지도, 좋지도 못했다. 나아만은 아마 지상에서는 최대한으로 위대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홀(Hall) 주교가 표현한 바대로, 아람 나라에서 가장 비천한 사람이라도 나아만의 살갗을 자기의 것과 바꾸어 가지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Ⅱ. 그에게 엘리사의 전능을 알려 주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 정보는 그의 아내를 시중드는 작은 계집종에게서 온 것이었다(2, 3절). 그 하녀는 이스라엘 태생이었다. 아마 아람(수리아)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 갔을 것이다. 그리고 나아만의 집안으로 뽑혀 갔을 것이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곳에서 엘리사의 명성을 퍼뜨린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불행한 분산이 때로는 하나님께 관한 지식을 퍼뜨리는 아름다운 기회가 된 적이 있다(행 8:4).
1. 이 계집종은 참 이스라엘인으로서 조국의 영예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비록 자기는 작은 소녀에 불과하지만, 자기들 나라에 있는 유명한 예언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었다. 어린아이들도 일찍부터 하나님의 놀라운 사업을 잘 알아야 된다. 그래야 어디를 가든지 그 사실을 이야기해 줄 수 있는 법이다(시 8:2 참조).2. 그녀는 좋은 하인이었다. 그녀는 포로로서 할 수 없이 종이 되었지만, 자기 주인의 건강과 복리를 염원했다. 종들은 모두 자기 주인들의 유익을 구해야 한다. 바벨론에 있는 유다인들은 그 포로 된 땅의 평화를 추구해야 했다(렘 29:7).
" 엘리사는 이스라엘 문둥이는 아무도 깨끗하게 해 주지 않았다" (눅 4:27). 그러나 이 소녀는 엘리사가 행한 다른 기적들을 미루어 보건대, "능히" 자기 주인을 고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자애심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가 아람 사람도 고쳐 줄 "마음이 있다" 고 판단한 것이다. 종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예언자들의 영예가 되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이야기해 줌으로써 그 집안에 축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Ⅲ. 이리하여 아람 왕은 나아만을 위하여 이스라엘 왕에게 탄원서를 내었다. 나아만은 평범한 하녀에게서 들은 정보였지만, 그는 그녀가 천하다 하여 그 정보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 정보는 그의 신체적 건강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소녀가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군. 아람의 모든 의원들도 못 고쳤는데, 이스라엘 예언자가 어떻게 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인가?"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유다 민족을 사랑하지도 존경하지도 않았지만, 유다 민족만이 자기 병을 고쳐 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들에게 은혜의 보답을 하리라고 마음 먹고 있었다. 오, 영혼의 병을 앓고 있는 자들이여, 저 위대한 의원(예수)에 관한 소식에 이처럼 귀를 기울여라!
나아만이 이 조그마한 암시를 받고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 살펴보자.
1. 그는 예언자를 불러 오도록 하려 하지 않았다. 자기의 병을 고칠 그런 신적인 전능을 가진 자에게는, 비록 자기 몸이 아프고, 사람에게 나설 형편이 못되고, 또 긴 여행을 해야 되고, 자기가 가야 할 나라가 적국이었지만, 직접 찾아가 만나 보려는 극진한 존경을 표하고자 했다. 제왕들도 필요하다면 예언자들에게 간청을 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 것이다.2. 그는 In cognito-변장하고 가려 하지 않았다. 비록 자기의 용무가 역겨운 자기의 질병을 알리는 것이었지만, 당당한 모습으로 많은 수행원을 대동하고 갔으니, 그것은 그 예언자를 더욱 존경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3. 그는 빈손으로 가려 하지 않았다. 금, 은, 의류 등을 자기의 의원에게 선물로 가지고 갔다. 부유한 자는 건강을 원한다. 이것은 그들이 건강을 더 큰 축복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부유한 자들이 몸의 평안과 힘과 건강을 위해서 무엇을 아끼겠는가?
4. 그는 자기의 주군이 이스라엘 왕에게 쓴 편지를 가지지 않고서는 가지 않으려 했다. 그 주군은 나아만의 건강 회복을 진심으로 염원하고 있는 자였다. 아람 왕은 이 기적을 행하는 예언자, 나아만에게 가장 귀중한 일을 베풀 예언자가 사마리아 어느 곳에 살고 있는지를 몰랐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은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나아만은 그 예언자가 자기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줄 것을 바라면서 두 왕들의 권세로 지원을 받으며 그에게로 가고자 한 것이다. 만일 아람 왕이 이스라엘 왕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이스라엘 왕은 자기의 한 제후이므로 그 요구를 들어 주리라고 희망했다. 아람 왕은 자기 신하가 주는 선물은 틀림 없이 이스라엘 왕에게 좋은 선물과 존경의 뜻을 표하게 될 것이요, 그러면 그가 "문둥병을 고쳐" 줄 마음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6절). 그는 왕과 예언자를 사실 이상으로 유사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Ⅳ. 이것이 이스라엘 왕에게는 경보가 되었다(7절). 그는 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읽었다.
1. 하나님을 지독하게 모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되는 말이나 글을 보았을 때 행하는 유다인의 관습을 따라서, 이스라엘 왕은 자기의 옷을 찢었다. 어떻게 하나님의 권능을 자기와 같은 인간에게 돌릴 수 있다는 것인가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하나님이냐? 내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다는 것인가? 아니다. 결코 내겐 그런 능력이 없다." 이리하여 이 높은 지위에 있으나 좋지 못한 사람은, 자기 자신은 단지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끔 되었다. 왜 이런 생각을 한 그가 우상 숭배를 떠나지 못했을까? 이렇게 생각해 보라-" 나는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으며, 복을 줄 수도 화를 줄 수도 없는 그런 것을 신으로 숭배해야 하는가?" 고.2. 왕은 자기를 해치려는 계획이 들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자기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그(아람왕)가 나로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 줄 알라. 그는 나더러 문둥병을 고치라고 하는도다. 내가 그렇게 못하면-물론 난 그렇게 할 수 없도다-그걸로 구실을 잡아 내게 전쟁을 걸어 올 것이니라." 나아만이 그의 장군이었던 관계로 이스라엘 왕은 더욱 의심을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왕이 그 편지의 사연, 즉 아람 왕이 문둥병을 고쳐 달라고 그에게 편지를 쓸 때는 분명히 그 병이 고쳐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바로 이해했더라면,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도 종종, 남이 우리들에게 좋은 뜻으로 한 말이나 행실을 오해하여 스스로 큰 불안을 일으키는 수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스스로 나쁜 생각을 품지 않는 것이 우리 자신들에게 좋다.
이스라엘 왕이 엘리사와 그의 능력을 알고 있었더라면, 편지의 뜻을 쉽게 이해했으리라. 그래서 자기가 취할 바를 즉시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이 그 예언자에 대해서 전혀 이방인이었던 연고로 이러한 당혹에 빠지고 만 것이다. 왕보다도 포로가 된 하녀가 예언자를 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Ⅴ. 엘리사가 이 일을 맡겠다고 제의를 했다. 그는 왕이 비록 자기를 몰라 주고, 자기가 베푼 이전의 선행을 벌써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그 왕을 편안하게 해 주는 일이라면 뭐든 기꺼이 하려고 했다. 왕이 옷을 찢었다는 소식을 듣고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만일 그 환자가 자기에게 오면 결코 그 수고의 대가를 잃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8절).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다는 것을 그가 알리이다"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없다면, 그것은 슬픈 일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예언자는 이스라엘 왕이 감히 해 볼 생각도 못했고, 아람 예언자들은 흉내낼 수 없는 일을 능히 해 낸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 예언자는 비록 알려지지 않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다" 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고침 받은 나아만(열왕기 하 5:9-14)
여기서는 나아만의 문둥병이 고쳐지는 것을 보게 된다.
Ⅰ. 예언자는 나아만에게 간단하고 평범한 지시를 내려 주고서는, 분명히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아만은 수레를 타고 수행원을 대동하고서 엘리사의 집에 당도했을 때는, 그를 지극히 존경하려고 했다(9절). 평소에는 예언자를 존경하지 않던 자들도 때가 되어 그들이 필요해지면 지극히 아부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엘리사의 문간에서 구걸하는 거지처럼 엘리사의 집 문간에 대기했다. 영적 문둥병에서 낮고자 하는 자들도 "지혜의 문" 에 나아가 "그 문설주를 경청해야" 된다.
나아만은 자기의 인사에 대한 보답을 기대했다. 그러나 아무런 공식적 답례도 없이 대답만 했다. 예언자는 문간에 나아가 그를 맞으려하지 않았다. 엘리사는 자기에게 베풀어진 그런 영예를 그렇게 좋아한다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사환을 시켜서 이렇게 전달하라고 했다. "가서 요단 강 물에 7번 씻으라." 그렇게 하면, 그이 병이 깨끗해질 것이라고 약속해 주었다.
그 약속은 분명했다. "네가 깨끗해질 것이다." 그 처방법도 명백했다. "요단 물에 씻으라." 이런 것이 병을 고쳐 주는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물론 냉수욕이 건강에 좋다고 추천하는 자들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문둥병일 경우에는 오히려 해가 된다고 보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치유의 한 표징이었으며, 그의 복종을 시험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자들은 명령대로 해야 한다.
그런데, 왜 엘리사는 이러한 지시를 사환을 통해서 했을까? 이유가 있다.
1. 아마 그때 엘리사가 예배를 위해서 은거 중이라, 그 치유를 위해 기도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2. 아니면, 나아만이 거만한 사람임을 알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그에게 알려 주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Ⅱ. 이렇게 처방된 방법에 대해서 나아만은 역겨움을 느꼈다. 자기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두 가지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1. 엘리사가 자기를 업신여기고 종을 보내면서, 직접 와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11절). 나아만은 치유에 대한 기대가 몹시 컸으므로, 그 치유 방법도 거창하리라고 혼자서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꿈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그가 내게로 올 줄로 확신했노라. 아람 귀족인 나에게 최소한 그 정도는 할 줄 알았노라. 나는 그에게 온갖 체모를 다 갖추어 왔으며, 이스라엘을 물리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닌 내게 말이다. 그리고 그가 일어서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내 이름도 넣어가며 기도해 주고, 그리고 나서 그의 손으로 상처를 씻으면 고쳐질 줄 알았노라."그런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으므로, 그는 화를 내게 된 것이다.
(1) 그는 자기 자신이 문둥이라는 것을 잊었다. 엘리사는 모세의 법을 거룩히 준수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율법은 문둥병자들과의 교제를 금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아만은 자기에게 정중한 격식을 요구할 수 없는 처지였다. 섭리에 따라서 당연히 겸비해져야 할 많은 사람들이 겸손치 못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민 12:14).
(2) 나아만은 자기가 감히 요청할 수도 없는 처지에서 호의를 바라는 탄원자임을 잊었다. 거지가 선택권을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환자가 의원에게 처방을 내릴 수도 없는 법이다. 나아만의 어리석은 자만심을 보라. 그는 위풍당당하고 법석을 떠는 격식을 거쳐서 치료되지 않으면, 어떤 치료에도 만족을 못 누릴 자이다. 그는 자기 비위에 맞지 않는다면, 고쳐지는 것도 싫어했던 자이다.
2. 그는 엘리사가 자기의 나라 아람을 경시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강, 요단에 가서 씻으라고 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스라엘의 모든 강보다 뛰어난, 다메섹의 아바나 강과 바르발 강" 을 생각했다. 그는 다메섹에 있는 이 두 강을 지나치게 자랑했다. 그 강들은 얼마 후에는 하나가 되어, 지리학자들은 그 강을 "크리소로아스" -곧 "황금의 강" 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한편 그는 이스라엘의 모든 강을 지극히 조소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을 "모든 땅의 영광" 이라고 불렀고, 특히 그 땅에 있는 "시내" (신 8:7)를 염두에 두시고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사람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은 흔히 이렇게 차이가 나게 된다. 또한 그는 예언자의 지시를 얼마나 업신여겼던가! "내가 거기서(자기 나라 강) 몸을 씻으면 깨끗해지지 않으랴!" 라고 했다. 그는 자기 나라 강에서 씻으면 때를 깨끗이 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씻더라도 문둥병을 씻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그 예언자가 자기더러 몸을 씻으면 깨끗게 되리라고 명령한 사실에 대해서 분노했다. 그는 예언자가 온갖 것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별로 중요치 않은 일을 시킨 것에 대해 불쾌히 여겼다. 아마 그는 그 처방이 너무 값싸고 평이하며, 자기처럼 위대한 자의 치료법으로서는 저속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또는 그것이 아무 효험이 없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도대체 요단 강물이 다메섹의 강물보다 치료 효력이 더 크단 말인가 하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생각지 못했다.
(1) 요단 강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치유의 효력은 바로 그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이지 다메섹의 신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요단 강은 여호와의 땅, 거룩한 땅을 흐르는 강이다. 기적적인 치유 효과는 그 강의 깊이라든가 물줄기의 수려함이 아니라 그 강과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이라는 것을 몰랐다.
(2) 요단 강은 이 일 전에도 여러 번 전능자의 명령에 순복한 일이 있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이스라엘에게 통행로를 제공했고, 최근에는 엘리야와 엘리사에게 통행로를 주었었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공통된 법칙에만 따르며 한 번도 달리 행하여 본 일이 없는 그런 강들보다는 이 요단 강이야말로 그러한 목적에 적합했던 것이다.
(3)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요단은 지정된 강이라는 점이다. 나아만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낫기를 기대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순복해야 할 것이요, 이유를 묻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자기들의 생각에는 지혜로운 자들이, 하나님의 지혜의 명령과 처방을 업신여기며,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들의 환상을 쫓으려 한다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라는 것을 명심해 두자. "자기의 의를 세우려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의에 순복하려" 하지 않는다(롬 10:3).
(화가 난 사람은 흔히 그러하듯이) 나아만은 화가 나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홧김에 예언자의 집을 나와서 더 이상 예언자와는 말도 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해야 되겠다고 한 것이다. 그런다면 누가 손해를 볼 것인가?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풀어진 자비를 저버린다" 는 것을 기억하자(욘 2:8). 교만한 자들은 그들 스스로에게 최악의 원수가 되며, 자기들의 구원을 망친다.
Ⅲ. 이 때에 나아만의 종들이 간곡한 조언을 했다. 그들은 그의 분노를 은근히 비난하면서 그 예언자의 처방을 따라 보라고 제의했다(13절). 다른 때에는 그들이 그에게 다가갈 수도 없었지만, 이제 그가 분노해 있는 것을 보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멀리 있었지만, 평소에 그가 이상적인 추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것이야말로 귀인들이 지닐 훌륭한 성격이요, 귀한 것이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와 이 문제를 놓고 대담한 추론을 폈다. 그들은 그 예언자의 중대한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다(아마 그들은 엘리사에 대한 얘기도 서민들에게서 더 많이 들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서민들과 대화를 나누었었고, 나아만은 이스라엘 왕과 조신들과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 예언자가 당신을 명하여 이보다 큰 일을 하라고 명하였더라면, 즉 지루한 치료기간을 가지라든가 어떤 고통스런 수술을 받으라든가 흡각법(吸角法)이나 침을 빨아내는 법을 쓰라고 했더라면 당신은 행하지 않았겠나이까?"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바로 나아만 자신의 종들이 그를 이렇게 책망하고 충고했다. 나아만의 아내의 계집종에게서 그의 병을 고칠 자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나아만은 이들의 조언을 조금도 경시하지 않았다(3절).우리에게 거리낌 없이 대해 주는 자들이 있고, 우리의 결점과 어리석음을 신실하게 얘기해 주는 자들-비록 우리들 밑에 있는 자들이라도-이 우리 가까이 있다면, 그것은 큰 축복으로 알아야 한다. 주인들도 종들의 논리에 기꺼이 귀를 기울여야 한다(욥 31:13, 14). 아무리 높고 존경스러운 자의 이름으로 주어질지라도, 불신앙적인 조언은 듣지 말아야 하듯이, 우리보다 훨씬 아래에 있는 자들이 들려 줄지라도 좋은 충고에는 또한 귀를 기울여야 한다. 바른 말만 하면, 그 말하는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2. 그 책망은 지극히 온당했고 또 존경할 만한 것이었다. 그들은 나아만을 "아버지여" 라고 불렀다. 종들은 자식들이 부모에게 대하듯 효심을 가지고 상전을 대해야 하기 때문이다.남을 책망하듯이 충고할 때는, 그 말이 사랑과 참된 존경에서 우러나온 것이요,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라 바로 잡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 한다.
3. 그것은 지극히 합리적이었고 지혜로왔다. 무례하고 무사려한 종들이 주인의 분노에 부채질을 하여, 그 예언자와 싸움을 걸어 복수를 하라고 제의했더라면-(나아만은) 엘리사가 자기를 모독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그 결과는 얼마나 불행스럽게 되었겠는가! 아마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 모두를 죽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아주 놀라웁게도, 그들은 예언자의 편을 들었다. 엘리사는 자기의 말이 나아만의 비위에 거슬릴 것을 알았지만, 그의 마음을 달래 줄려고는 하지 않았다. 나아만이 계속 화를 낸다면 자신의 생명이 위험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종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나아만의 분노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들은 조리 있게 추궁했다.(1) 나아만은 자기의 병을 고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무엇이든 "하지 않았겠나이까?" 이렇게 병든 죄인들이 치료를 위해서 뭐든 하려 할 때, 즉 어떤 일에도 만족하며, 뭐든 복종하며, 뭐든 버릴 각오가 되어 있을 그때에-그 때가 되기까지는 안 된다-비로소 약간의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런 죄인이 어떤 조건으로든 그리스도를 모시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그 때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자기 편으로 삼을 수 있게 될 것이다.
(2) 그 처방이 매우 싫다고 논증했다. "단지 몸을 씻으면 깨끗해지리이다. 그냥 해 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 일에는 돈도 안 들고 어렵지도 않습니다. 몸에 유익이 되면 되었지, 해가 될 것은 없습니다" 고 했던 것이다. 죄라는 문둥병에 걸린 자들을 위한 처방법도 이렇게 평이하므로, 우리가 그 처방에 따르지 않는다면, 그 때는 전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믿기만 하라. 그러면 구원받으리라" -" 회개하라. 그러면 용서받으리라" -" 씻으라. 그러면 깨끗해지리라" 하는 처방을 받은 것이다.
Ⅳ. 그대로 행하니, 치료가 되었다(14절). 나아만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나서, 실천을 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아직은 깊은 믿음이나 결단력을 가지고 행한 듯이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 예언자는 요단 강물에 7번 씻으라고 했는데, 그는 단지, 할 수 있는대로 쉽게 7번 물에 들어갔다가 나왔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과 당신 자신의 말씀이 영광 받게 되는 것을 지극히 기뻐하시사, 그것이 효력을 발생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의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 살같이 되었다." 이것을 보고 그는 크게 놀라면서 기뻐하였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그의 제도에 참여하는 자들은 이러한 놀라움과 기쁨을 맛보게 된다.
나아만이 물로 씻음으로써 깨끗게 되었다는 사실은 문둥병자를 정결케 하는 율법을 존귀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그 이름 이상으로 굳게 하실 것이다.
기쁨으로 돌아가는 나아만(열왕기 하 5:15-19)
우리 구주께서 열 문둥이를 고쳐 주셨을 대, 그 중에 한 사람만 "돌아와 감사를 드렸는데," 그가 바로 "사마리아 사람" 이었다(눅 17:16) 이 아람사람도 그렇게 감사를 표하고 있다.
Ⅰ.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권능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가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그만이 홀로 하나님이시요, "이스라엘 외에는 천지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 (15절)는 것을 실제로 알게 되었다. 이것은 아주 고귀한 고백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방 세계의 불행을 시사해 주는 고백이기도 하다. 많은 신들을 지니고 있는 열방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온 세상에 이스라엘 하나님만 계시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나아만도 아람의 신이 진짜 신인 줄로 알았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이스라엘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시요, 온 우주의 절대주(主)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 나아만이 다른 문둥이들도 깨끗해지는 것을 보았더라도, 그러한 체험이 그에게 이런 확신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단순히 병이 나았다는 기적보다도 그 치료의 자비가 그를 감동시킨 것이다. 체험으로 아는 자가 하나님의 권능을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법이다.
Ⅱ. 그리고 예언자 엘리사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므로 당신이 누구의 종이든, 나는 당신의 주인을 위하여 금은, 보화 무엇이든 당신이 받기 원하는 것을 선물로 드리리이다." 그는 문둥병 치료가 예언자에게 너무나 용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효험이 자기에게 나타났기 때문에 그 치료를 높이 평가했다. 따라서 거기에 따른 보상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엘리사는 선물을 받으라는 강요를 들었으나, 한사코 사례를 거부했다. 더 이상 졸라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맹세하면서 거절했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받지 않으리라." (16절) 엘리사는 매우 가난했고, 또 그러한 재물이 있으면 써야 할 곳도 알고 있었던지라, 필요 없어서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그 재물이 있다면, 그것을 예언자 생도들에게 잘 나누어 줄 수 있는 길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 그 사례가 부당하다고 생각하여 안 받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때에도 엘리사가 사례를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단지 이 아람인에게서, "내가 엘리사를 부유하게 했노라" (창 14:23)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이스라엘 하나님의 종들은 거룩한 신앙을 가지고 이 세상 부귀를 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는 교육을 받았다는 새로운 자각을 준다면, 하나님께 더욱 영광이 돌아갈 수 있고, 그 자각이 "이스라엘 외에는 하나님이 없도다" 라고 하던 나아만의 신앙을 더욱 굳혀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고전 9:18; 고후 11:9 참조).
Ⅲ. 나아만은 이스라엘 하나님을 예배하기로 개종했다. 그는 자기의 치유에 감사하여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신에게도 제사드리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이다(7절). 문둥병 치료라는 행복된 치료가 보다 더 무서운 병 우상 숭배까지 치료해 준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의 회심에 두 가지의 약점과 결점이 있다.
1. 한 가지 일은, 그의 행동이 지나치다는 것이다. 즉 그는 이스라엘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제단을 만들기 위해" 엘리사 집이 마당 흙을 가져가고자 했으며, 적어도 엘리사가 그런 일을 명령만이라도 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는 점이다(17절).얼마 전에는 이스라엘의 강물을 아주 경시하던(12절) 그가 이제는 다른 한 극단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스라엘의 흙을 지나치게 존귀히 여기는 것이다(하나님께서 "흙 제단" 을 만들라고 하신 적이 있으므로, 출 20:24) 그 흙으로 제단을 만들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온 "땅이 여호와의 것이요, 그 모든 소산도" 여호와의 것이라는 점은 생각지 못한 것이다. 어쩌면, 그 예언자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엘리사의 권능은 물론이요 그의 덕과 관대성에 대한 이야기까지 곁들어서-지니고 가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옛말에도, 왕을 사랑하는 자는, 그 땅에 나아가 흙을 얼마간 집어서 집으로 가져간다고 했다. 현대판 아첨의 인사에도 이와 대등한 것이 있다. 즉 "선생님, 선생님 사진 한 장을 가지고 싶습니다."
2. 또 한가지 일은 지나치게 모자란 점이다. 그는 자기의 주군을 기쁘게 하며, 또 조신의 의무에 따라서 림몬의 신당에 나아가 그 앞에 경배할 자유가 남아 있다고 생각하고(18절). "이 일은" 용서해 달라고 한 것이다. 그는 자기가 꼭 그렇게 하지는 않아도 된다고 했다. 다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현재의 자리에 붙어 있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즉 자기가 경배하는 것은 결코 어떤 우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왕을 위한 것 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따라서 하나님께서도 자기를 용서해 주시기를 바랐다. 이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왕을 위한 것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따라서 하나님께서도 자기를 용서해 주기를 바랐다. 이것은 옳은 일이라는 것이 아니나, 모든 정상을 참착한다면, 다소 변명의 여지는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확신하는 바로는 다음과 같다.(1) 우리가 하나님과 계약을 맺으면서, 이미 알고 있는 죄를 계속 짓겠다는 유보 조항을 만든다면, 그 조항은 우리를 계속 죄에 빠지게 만들 것이요, 또한 그 계약에 대한 모독이다. 우리는 우리의 온갖 죄악을 버려야 하며, 림몬의 어떤 신당도 예외가 될 수 없다.
(2)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격려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어떤 죄든지 앞으로 계속 지을테니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다면, 하나님을 조롱하는 일이요,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3) 하나님께 대해 범죄하고 양심을 더럽히지 않고서는 지킬 수 없는 자리인데도, 그 자리가 궁궐이라 하여 떠날 줄을 모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제대로 평가한 자들이 아니다.
(4) 진실로 악을 역겨워하는 자들은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려고 애쓰게 된다.
나아만이 자기의 종교를 감추지는 못했지만, 이스라엘 하나님 외에는 아무에게도 제사를 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은 아람인으로서는 대단히 장한 일이며, 그 문제로 인하여 용서를 빌고 있는 것을 미루어 보건대, 회심과 정직성에는 그래도 개선의 희망이 보일 만큼 지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예언자 엘리사는 그를 "평안히 가라" 고 명한 것이다. 젊은 개심자들은 부드럽게 다루어야 한다.
게하시의 미련(열왕기 하 5:20-27)
아람 사람이요, 조신이요, 군인인 나아만에게는 많은 종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지혜와 선행에 대해서 읽어 보았다(13절). 거룩한 예언자요,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에게는 단 한 사람의 종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천박하고 남을 속이며, 아주 쓸모없는 녀석이었다. 멀리서 엘리사 소식만 듣는 자들도 그를 존경했고, 자기들이 들은 소식으로 유익을 얻었다. 그러니 줄곧 엘리사 앞에서 있으며 그의 지혜를 듣는 자가 엘리사의 교훈이나 기적을 보고 듣고도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엘리사의 종이라면 당연히 성도라고 생각할 것이다(아합이나 오바댜의 종들은 그러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에도 가롯 유다 같은 자가 있는 법이다. 은총을 전달하는 수단(매개체)들은 은총을 줄 수 없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고, 가장 선한 사역자들이라도 자기들 주변에 저들의 걱정과 수치가 되는 자들이 흔히 있는 법이다. 교회당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하나님과는 더욱 더 멀어지는 수가 있다. 그 나라의 자녀들이 쫓겨나는 그 때에, "동서에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아브라함과 함께 앉으리라."
Ⅰ. 게하시의 죄를 보자. 그것은 아주 복합적인 죄였다.
1. 돈을 사랑함은 일만 악의 뿌리이다. 그것이 그의 죄악의 바탕이었다. 그의 선생은 나아만의 보물을 경멸했으나, 게하시는 그것을 탐냈다(20절). 홀(Hall) 주교의 말대로, 그의 마음은 나아만의 금고로 온통 꽉 차 있었다. 따라서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 나아만을 좇아갈 수밖에 없었다. 세상 재물을 탐내다가 "신앙에 실수를" 범하는 자들이 많으며, 결국 "많은 근심에 빠지게 되고" 만다.2. 그는 자기 선생이 나아만의 선물을 거절했다 하여 선생을 비난했다. 충분히 가져도 되는데 금을 갖지 않았으니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으며, 이 이방인에게 지나친 친절과 관용을 베푼다고 시기와 증오를 보냈다. 그 재물은 엘리사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자기가 선생보다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3. 나아만이 교양 있는 자세로 자기의 수레에서 내려 게하시를 맞아 주자(21절), 게하시는 고의적인 거짓말을 했다. 즉 자기의 주인이 자기를 보냈다고 했고, 나아만이 자기 선생에게 표하는 정중한 인사를 대신 받았다.
4. 그는 자기 선생을 악용하고, 나아만에게 거짓으로 선생을 설명했다. 즉 자기 선생은 그 관대하던 마음을 즉시 후회하는 변덕스런 사람이요, 자기 마음도 제대로 모르는 자이며, 말을 이랬다 저랬다 하는 자요, 맹세해 놓고 취소하는 자이며, 존경스런 일을 했다가 또 곧 번복하고 마는 그런 자라도 되는 듯이 말을 해 버렸다.
그가 얘기 중에 예언자들의 생도들 중 두 사람을 들먹인 것은 실로 어리석은 것이었다. 두 젊은 생도들을 위해서 선물을 구했다면, 은 한 달란트 쯤으로는 그들에게 별로 소용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5. 또 그것은 나아만의 거룩한 신앙을 잃어버리게 할 위험이 있었다. 나아만은 이제 새로이 그 신앙과 결합했던 것이다. 또한 나아만이 그 신앙에 대해 가졌던 인상을 그릇칠 위험성도 알고 있었다.바울의 적이 바울을 말했을 때처럼(고후 12:16, 17), 게하시는, 엘리사가 직접 자기를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교묘한 수를 써서, 자기에게 이득이 될 물건들을 되돌려 보냄으로써 자기를 기만했다고 하는 말을 능히 할 위인이었다.
우리는 엘리사의 손길이 그 일과는 상관이 없음을 나중에 나아만도 알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게하시가 부당하게 취했던 것을 할 수 없이 도로 돌려 주게 되었다는 것도 알았으리라. 아마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아만은 다시금 우상을 섬기게 되었을 것이다.
6. 부당하게 취한 것을 감추려 했다는 것은 더욱 가중한 죄이다.(1) 아간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취한 물건을 아주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되는 망대 속에다 숨겼듯이, 게하시도 할 수 없이 그 물건을 내어 놓게 되었을 때까지는 숨기고 있었다(24절).
이제 게하시는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자기가 나아만의 지혜나 엘리사의 분별의 영까지도 속일 수 있었던 능란한 사기술에 스스로 만족하고 있었다. 마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도들을 속이고 흡족해 하던 꼴과 같다.
(2) 그는 그 사실을 부정했다. 그는 "들어가서 그의 주인 앞에 섰다." 그의 명령을 기다린 것이다. 아무도 그의 주인의 말에 게하시처럼 순종하던 자도 없지만, 또 아무도 실상 엘리사에게 피해를 입히는 자도 없었다. 게하시는 에브라임처럼 생각했다. "나는 실로 부자가 되었도다. 아무도 내게서 불의를 발견하지 못하리라" (호 12:8)
그의 주인은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물었다. 그는 답하기를 "선생님, 아무 데도 가지 않았었습니다." 고 했다. 흔히 거짓말은 또 하나의 거짓말을 몰고 들어온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한 죄악의 길은 내리막길이다. 그러므로 대범하게도 진실인 척 한다.
Ⅱ. 이 죄는 처벌을 받게 된다. 엘리사는 즉각 사실을 말하도록 했다.
1. 게하시는 크게 확신하고 있었다. 예언자를 속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언의 영은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이 곧 드러났고, 성령을 속이려는 것은 무익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엘리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1) 게하시는 부정하지만, 그가 한 일을 말할 수도 있었다. "너는 아무 데도 안 갔다고 말한다면, 네 마음이 너와 함께 가지 아니하더냐(한글 난외 참조)?" (26절) 도대체 게하시는 예언자들에게는 신령한 눈이 있다는 것을 아직 못 배웠단 말인가? 아니면 선견자나 여호와의 은밀한 것을 알고 있는 자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죄를 짓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기억하자. 우리가 몰래 곁길로 들어서면, 양심이 동행하지 않는가? 또 하나님의 눈이 동행하지 않겠는가? "자기의 죄를 은폐하는 자는 잘 되지 못하리라." 특히 "속이는 혀는 잠시 뿐이니라" (잠 12:19). 거짓말로 혼란된 속에서도 진리는 그 표면을 꽤뚫고 나올 것이요, 유난히 빛나게 되리라.
(2) 게하시 자신이 은밀히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까지도 엘리사는 말할 수 있었다. 게하시의 생각과 의도, 그리고 지금 두 달란트-땅이나 가축을 사려고-가지고 있으니 앞으로는 엘리사를 떠나 자활하리라는 구상까지도 말해 버릴 수 있었다. 이 세상적인 온갖 희망과 궁리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드러나고 마는 것임을 명심하자.
또한 그 행위는 악했다는 사실을 말했다. "지금이 어찌 돈을 받을 때냐? 지금이 네 자신의 재물을 늘일 기회이냐? 네 주인을 속이고 갓 개종한 자에게 걸림돌을 놓는 수를 쓰지 않고는 돈을 벌 수 없었다는 것이냐?" 항상 재물만 생각하고, 특히 옳든 그르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려는 자들은 스스로 엄청난 유혹에 뛰어드는 것임을 명심하자. 부해지려고 하는 자들은 (per fas, per nefas; rem, rem, quocunque modo rem-정당한 수단으로든 그릇된 수단으로든, 원칙은 생각지도 않고 돈만 의도하는 자들은) "침윤과 멸망에 빠지게 된다" (딤전 6:9). 흔히들 그렇게 하지만, 전쟁이나 불이나 질병이나 파선 따위는 돈 버는 방편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 신앙에 치욕이 되거나 우리 자신이 남에게 해를 끼치는 수를 쓰지 않고는 돈을 벌 수 없다면, 그 때야말로 재산을 늘일 때는 아닌 것이다.
2. 게하시는 무슨 벌을 받았는가?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갈지니라" (27절). 게하시가 그의 돈을 가지고자 했으니, 그의 돈과 함께 그의 병도 가지게 되어야 마땅하다. 즉 Transit cum onere-장애물까지 가지고 사라진다. 그는 후손에게 땅을 물려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대신 세세토록 자기 몸의 역겨운 병을 상속해 주게 되었다.이 선고는 즉시 시행되었다. 엘리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루어졌다. 게하시가 "그의 앞에서 나아오니, 문둥병이 발하여 흰눈같이 되었다" 고 했다. 이리하여 게하시는 어디로 가든 낙인을 달고 다니고 그 악명을 떨치게 되었으니, 항상 그 치욕의 표지를 지니고 다녀야 했다. 이리하여 그는 자신과 자기 가족에게 저주를 가져다 주었다. 그 저주는 그의 악행을 잠시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기억되게 했다.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니라" (잠 21:6). 사기의 불의로 치부한 자들은, 그 재물로 위안을 받게 되거나 또 그 재물이 계속 보존되리라는 따위의 기대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게하시가 두 달란트를 얻게 되자. 그것으로 인하여 건강과 영예가 평안과 직업을 잃게 되었고, 또 만일 회개하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자기의 영혼까지 잃게 되고 말았는데, 그가 얻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욥 20:12 이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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