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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축복받은 과부의 기름(열왕기 하 4:1-7)

엘리사는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기적을 행했다. 이 기적 사건은 참된 자선의 행위이기 때문에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들도 이처럼 경이로운 사건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기적을 받는 자들에게는 실로 커다란 은혜였던 것이다.

Ⅰ. 엘리사는 가난한 한 과부의 애로 사항을 기꺼이 들어 주었다. 그 여인은 어느 예언자의 과부였다. 그러니 그 여인이 예언자들의 생도들의 아버지 역할을 하던 엘리사 외에 누구에게 사정을 호소할 것인가? 이 예언자야 말로 자기 가족들의 복지를 돌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제사장들처럼 그 직위가 세습되지는 않았지만, 예언자들에게도 제사장들처럼 아내가 있었던 것 같다. 결혼은 모든 사람이 귀히 여겨야 할 것이요, 아무리 고귀한 직업에라도 부조화되지 않는 것이다.

이제 이 가난한 여인의 애로 사항을 통해서 다음 사건을 이해하도록 하자.

1. 그녀의 남편은 "예언자의 생도 중 하나" 였으므로, 엘리사가 잘 알고 있었다. 탁월한 은사와 지위를 지니고 있는 사역자들은 자기들 밑에 있는 자들을 잘 알고서 그들의 성격과 처지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2. 그녀의 남편은 경건한 자를 존경하고 있었다. 엘리사는 그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는 예언자라는 명예와 사명을 담당하기에 부적합한 자였을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신앙을 변절하는 그런 시대에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던 7천 명 중 하나같이 자기의 정절을 지킨 자였다.

3. 그는 선한 사람이요, 훌륭한 사역자였지만 죽었다. 예언자들이라 하여 영원히 살기를 바라겠는가? 예언의 영으로 옷 입은 자들에게도, 그 옷이 죽음의 공격을 막아 주지는 못한다.

4. 그는 가난할 때 죽었다. 빚을 다 못 갚고 죽었던 것이다. 그는 여호와를 경외하던 자였으므로, 방랑이나 사치나 무절제 때문에 남의 빚을 지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런 생활에 빠질 수 없는 자였다. 신앙을 가진 자는 자기들이 가진 것 이상의 생활을 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것 이상을 쓸 수도 없다. 물론 과도한 지출이 불법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마침내는 그들이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돌려 줄 능력을 잃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계속 악을 행했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도 어려운 재난이나 높은 이자가 있는 빚을 지거나 본인들의 무사례함 때문에 빚을 지게 되는 수가 있다. "빛의 자녀들" 이 항상 "이 세상 일에 더 지혜로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이 예언자는 박해로 인하여 가난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세벨이 집권하고 있던 시절에는, 예언자들의 생활이 매우 어려웠고, 가족이 있는 자들은 더욱 더했다.

5. 그 채권자는 과부에게 지독하게 굴었다. 그 과부는 두 아들을 자기 힘으로 부양해야 했다. 그런데 그 채권자는 그녀의 아들들의 노동력을 그녀의 "재산" 으로 계산하여 차압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 아들들은 채권자에게로 가서 7년 동안 종살이를 해야 빚을 깊게 되는 것이다(출 21:2).

감당할 수 없는 빚을 가족들에게 남겨 두고 죽은 자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가족들에게 무엇을 물려 주게 되는가를 알아야 한다.

이러한 곤경 속에서 그 가난한 과부는 엘리사를 찾아갔다. 그녀는 의인의 자손은 저버림을 받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믿었던 것이다. 정직한 자들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예언자들의 은혜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엘리사는 이 가난한 과부의 곤경을 실질적으로 해결해 주었다. 빚도 갚고 그녀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능력을 갖추어 준 것이다. 그는 입으로만 "따뜻이 하고, 배불리 먹으라" 고 하지 않고, 실제적인 도움을 그녀에게 베풀었다. 엘리사는 그녀의 잠정적 생계를 도울 작은 물질을 준 것이 아니라, 시장에 나가 기름을 팔아 자급자족하며 자기 손으로 재산을 모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 사건은 기적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자선이 되는지를 알려 준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의 친절은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다. 즉 가능한 한, 그들이 가진 작은 것을 활용하여 자기들의 노력과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1. 엘리사는 정상을 고려하여 그녀가 할 일을 일러 주었다.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예언자의 생도들은 가난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서 그녀를 위해 모금을 한다 하더라도 별 의미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거룩한 예언자들의 하나님은 그녀의 모든 궁핍을 능히 채워 주실 수 있다. 그리하여, 그녀에게 그녀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엘리사에 축복하여 그 작은 것을 크게 해 주면, 그녀의 모든 필요는 채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엘리사는 그녀가 뭘 하면 돈을 벌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녀에게서는 기름 한 병 외에는 내다 팔 것이 없었다(2절). 만일 그녀에게 어떤 그릇이나 가구가 있었다면, 엘리사는 그것이라도 채권자에게 주어야 마땅하지 않았겠느냐고 말했을 것이다. 우리의 빚이 없어지고 난 다음이 아니고는, 그 무엇이라도 정말로 우리 것이라거나 우리의 안위거리가 된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에게 이 기름 한 병마저 없었더라도, 하나님의 능력은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은 그것을 통해서 역사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최대한으로 응용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해 주는 것이다.

엘리사는 그녀가 이웃집에게서 신용을 얻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웃집에 가서 그들의 "빈 그릇들" (3절)을 빌려 오라고 말했다. 아마 그릇이 전에는 그녀의 것이었으나, 빚을 갚느라고 팔아 버린 것이었을 것이다.

엘리사는 그녀 자신과 아들들만 데리고 들어와서 문을 닫으라고 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그 한 병의 기름으로 빈 그릇들을 모두 가득 채웠다. 그녀는 문을 닫아야 했었다. 기름을 따르는 동안 빚쟁이나 남들이 들어와서 방해를 하는 일이 없도록 하지 위해서였다. 또 그래야 그녀와 아들들이 이 기적적인 기름 공급을 과장해서 자랑하지 않을 것이요, 오직 이 기적적인 일을 인하여 하나님께 기도와 찬양을 드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다른 한 과부의 음식은 그것을 소비할 때 늘어났듯이, 이 기름은 그것을 쏟아 부을 때 늘어났던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것을 늘이는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다. 가진 것을 그렇게 사용하는 자는 받게 될 것이다. 재능을 배로 늘이는 길은 그것을 묻어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장사를 하는 길이다.

(2) 엘리사나 다른 어떤 예언자들의 생도들 중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녀 자신이 기름을 부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을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충만히 받고자 한다면, 우리의 세심한 노력과 근면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것을 우리 손으로 쓸 때, 제일 잘 늘어난다.

2. 그녀는 그대로 했다. 그녀는 이 엘리사가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지 않았다.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를 굳게 믿고, 또 예언자 엘리사를 믿는 순수한 복종심에서, 그녀는 그릇을 많이 빌려 와서 거기에다가 자기의 기름을 부었다. 그녀의 한 아들도 그릇 빌려 오는 일에 참가했다. 또 다른 한 아들은 그릇이 차는 대로 치워 놓는 일을 주의 깊게 도왔다. 그러면서 그들은 마치 샘물에서 물이 계속 차고 넘치듯, 그들의 기름병에서 자꾸만 기름이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랐던 것이다. 그들은 그 기름의 근원이 어디인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생의" 구원이 되시는 그 분에게 있다는 것을 믿었다. 나중에 "반석이 나를 위하여 기름 시내를 흘려 내렸도다" (욥 29:6)라고 했던 욥의 비유는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마 이 여인은 아셀 지파에 속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셀의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하는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다(신 33:24).

3. 그 과부의 그릇이 다 차기까지 계속하여 기름이 흘러 나왔다. 그리고 모든 그릇에 기름이 차자, 그 기름은 그쳤다(6절). 이 진귀한 기름이 넘쳐 흐른다는 것은 적합하지 못한 일이요, 땅에 쏟아진 물같이 되면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이나 자비나 은총을 제한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자. 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믿음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요구하는 것 이상을 주신다. 거기에 빈 그릇이 더 있었더라면, 하나님은 그 모두를 채워 주셨을 것이다. 그 모두를 각각 가득히 채우실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이다.

그릇들이 다 차기까지는 그 기름 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지 않은가? 우리는 좋은 감람나무의 뿌리와 가지에서 흘러나는 기름이 부족하여 등불을 다 채우지 못할까봐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자(슥 4:12).

4. 엘리사는 이제 그 여인이 기름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일러 주었다(7절). 그녀가 그 기름을 "자기의 얼굴을 빛내기" 위해서 혼자 쓰려고 간직해 둔다면, 안 되는 일이다. 섭리자께서 가난하게 만드신 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이 작은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이것이 곧 "가난에 처할 줄 아는 것" 이다). 그러면서 보통 때보다 다소 재산이 늘었더라도 이제 호사할 때가 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1) 그런 사치 생활을 할 게 아니라, 그녀는 부자들로서 자기들의 그 기름을 살 능력이 있는 그런 자들에게 기름을 팔아야 했다. 아마 기적적으로 생겨난 기름이라서, 그 품질은 최상의 것이었을 것이다. 마치 신약성서의 기적의 포도주처럼(요 2:10). 그러므로 그녀는 값도 잘 받았을 것이요 팔기도 쉬웠을 것이다. 아마 그러한 사실을 안 상인들은 수출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무역을 하는 품목 중의 하나가 기름이었기 때문이다(겔 27:17).

(2) 기름을 팔아 얻은 돈으로 그녀는 빚을 갚아야 했다. 그녀의 채권자가 그녀에게 지독하게 가혹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빚을 갚지 않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먼저 빚을 갚아야 했다. 물론 그것으로 자식들을 위한 식량을 준비하기도 전에 말이다. 남에게 돌려야 할 모든 응분을 돌리고, 적당한 빚을 갚고,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의 기본적 율법이다. 우리들의 몫이 작아지더라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도 주저하며 마지 못해 할 것이 아니라 기꺼이 해야 한다. 채권자가 화가 나서 고소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도 해야겠지만, 양심을 위해서도 해야 하는 것이다.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자기들의 양식이 아닌 것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는다면, 결코 기뻐할 수 없는 법이다.

(3) 나머지 기름을 저장해 둘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판돈으로 자녀들과 함께 생계를 이어나가야 했다. 그들은 그 돈으로 정직하게 생계를 유지해 나갈 능력을 얻게 되었다.

틀림없이 그녀는 하나님의 사람의 명령을 그대로 따랐을 것이다.



[1] 그러므로 가난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자들도, 자기들의 의무를 다하기 위한 물자의 공급을 하나님께 빌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비록 잔치를 베풀어 받지는 못할지라도 "너는 정직히 먹게 되리라."

또 우리로서는 지금 그러한 기적을 기대할 수 없지만, 그런 자비는 역시 기대할 수 있다. 즉 우리도 하나님께 시중들고 그를 구하기만 하면 말이다. 특히 과부들과 예언자들의 과부들은 자기들 자신과 자식들의 보존을 하나님께 의탁하자. 하나님은 바로 그런 자들의 남편이요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 풍성한 것을 베풀어 주신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그의 말씀의 명령에 따라서 그 재물을 써야 한다. 이 과부처럼 그들은 그 은사를 정당하게 써야 하며, 그것을 사용하면서 즐거이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그리고 엘리사처럼, 자기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기꺼이 도움을 주고, 장님들에게는 기꺼이 눈이 되어 주며, 절름발이들에게는 다리가 되어 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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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넴 여인의 정성(열왕기 하 4:8-17)

오랫동안 자식이 없다가, 늙으막에 아들을 얻게 되는 것은, 예전에는 아브라함, 이삭, 마노아, 엘가나의 경우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전능과 은총이 나타나신 사례도 보았던 것이다. 이제 바로 엘리사에 의해서 그러한 기적이 베풀어진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한 착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친절한 대접을 해 주고 났을 때, 그 보상으로 이루어진 사건이다. 마치 아브라함이 천사들을 대접하고 났을 때 아들을 얻으리라 했던 약속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관찰해 볼 수 있다.

Ⅰ. 수넴 여인이 엘리사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이스라엘의 물자 사정은 엉망이었다. 그러나 어디로 가든 예언자들이 자기들의 친구들을 만날 수 없을 만한 정도로까지 악화되어 있지는 않았다.

수넴은 잇사갈 지파의 도성이었다. 사마리아와, 엘리사가 자주 들르던 갈멜 사이에 위치하고 있던 도시이다(2:25 참조). "거기에 귀한 여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좋은 집이 있었고, 그녀의 인심도 매우 좋았었다. 또 그녀의 남편은 많은 재산을 지니고 있었다. 그 남편도 아내를 지극히 신뢰했으며, 그녀의 분별력 있는 처사(잠 31:1)를 신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유명했던 엘리사까지도 그들의 집을 지나쳐 버릴 수 없었다. 아마 엘리사는 그 마을의 어떤 조용한 숙소를 찾아 들곤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경건한 부인이 한 번은 그 숙소에서 엘리사를 발견하고는, 자기 집에 와서 식사를 같이 하자고 자꾸만 졸라대었던 것이다(8절). 엘리사는 겸손하여 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사양했다. 그런 일류 인사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했던 것이다. 그래서 엘리사가 처음으로 그녀의 집에까지 들르는 데는 다소간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친숙해진 후로는, 그리로 순회할 때마다 그 집을 방문했을 것이다.

그녀는 자기의 손님을 지극히 반겼다. 엘리사와 교제하는 것을 지극히 소망했다. 그래서 그녀는 식사만 같이 하자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집에다 그의 숙소를 마련해 줌으로써, 보다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있도록 해 준 것이다. 그녀의 가정이 이 손님으로 인하여 축복을 받았을 것은 물론이요, 그 지붕 밑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손님의 신앙적인 담화와 모범을 배웠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훌륭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사실을 자기 남편에게 알리고 나서야 실행했다. 그녀는 남편의 동의를 얻지 않고는 집안의 돈을 지출하거나 낯선 자를 불러들이는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9, 10절). 그래서 그녀는 남편에게 제안했다.

1. 자기가 초대하려는 그 손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 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집에도 축복이 될 것이며, 하나님도 그에게 베푼 친절을 당신 자신께 베푼 친절로 간주하고 보상해 주리라는 것이었다. 아마 그녀는 사렙다의 과부가 엘리야를 영접하여 얼마나 큰 복을 받았는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2. 그녀가 그 손님에게 친절을 베풀더라도, 그것이 자기에게 짐이 되지는 않는다 했다. 그녀는 그 손님에게 단지 작은 방 하나를 지어 주고자 했던 것이다. 아마 그녀에게는 여분의 방이 없었을 것이다. 또는 그 손님이 거할 만큼 은밀하고 조용한 방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엘리사는 명상을 위해 많은 시간을 써야 했고, 그 집안의 소란으로 인하여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해야 했었기 때문이다. 가구도 매우 소박하게 갖추면 된다. 값비싼 옷걸이나 스탠드, 또는 소파나 거울 따위는 없어도 되며, 침상, 식탁, 의자, 촛대, 그것이면 그에게 필요한 물품의 전부이며, 휴식과 연구에, 읽기와 쓰기에 모두 넉넉했다. 엘리사는 그러한 비품으로 지극히 만족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다른 곳에 갔다가도 그리로 돌아와 유했기 때문이다(11절). 아마 엘리사는 별로 체면을 차리는 사람이 아니므로, 그의 하인과 같은 방을 쓴 것으로 보인다.

Ⅱ. 엘리사는 이 친절에 감사했음을 알 수 있다 자기의 방이 매우 조용하고 그 대접이 매우 후했으므로, 그는 그녀에게 뭘로 보답할까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은혜를 입은 자들은 다시 갚으려고 애써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도 감사한 줄 모르거나, 마음씨 좋은 사람들의 식객노릇만 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못쓰게 된다.

1. 그는 자기가 궁정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제의했다(13절). "당신은 우리를 위한 주의 깊은 배려를 베풀었도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받은 친절을 귀히 보았다. 그렇게 부유하고 관대한 자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이지만, 겸손한 자들은 친절을 받으면 이렇게 감사를 한다). 이제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하고 물었다.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은 너그러운 일을 궁리하고, 감사할 줄 아는 자는 고마운 일을 궁리하는 법이다. "당신이 왕께나 군대장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는가? 당신의 남편에게 무슨 일반 직책이나 군대의 직위를 주기를 원하는가? 무슨 탄원을 해야 할 일이 있거나, 고소를 했는데 지연되는 일이 되는가? 고등 법원에 상소할 일이 있는가? 내가 도와 주리다."

엘리사가 지난 번 전장 때 왕들에게 베푼 은혜로 인하여, 궁정과 그렇게 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그가 자신을 위해서는 그런 권세를 택하지 않았지만, 자기의 친구들을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진 사람은 자신의 출세 이상으로 남을 돕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유의 일이란 필요치 않다고 했다. "나는 내 백성 중에 거하리이다" 라고 말했다. 즉 "우리는 이대로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 이상의 영달을 원치 않습니다" 고 했다.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면서 "자기 백성 중에 거하는" 것은 실로 행복스런 일이다. 우리는 그들과 서로 선행을 베풀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지내는 것을 만족히 여기고 평안히 살 수 있으며, 우리의 평안한 시절을 아는 것은 더욱 큰 행복이다. 왜 자기 백성들과 잘 지내고 있는 자들이 궁궐에 살기를 부러워하겠는가? 그런 자들은 어느 때가 자기들이 편히 사는 때인지를 알기만 해도 족할 것이다.

이 일이 있은 몇 년 후에, 수넴 여인이 지금은 필요 없다고 말한 바로 그것, 곧 왕께 여쭈어야 할 일이 생기게 되는 사실을 보게 된다(8:3, 4). 자기 백성들과 거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의지하고 있는 그 산이 평생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착한 여인처럼, 그들도 낯선 자들과 함께 거해야 될 때가 올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영원히 거할 도성은 하늘에 있다.

2. 엘리사는 왕의 궁정보다 훨씬 우세한 하늘의 궁정과 자기의 관계를 그녀를 위해 사용했다. 엘리사는 그녀에게 뭘 해 주면 좋겠느냐고 자기의 하인과 상의했다. 이 위대한 예언자는 이 정도로 자기의 하인에게 대했다. 그래서 하인 게하시는 그녀에게 자식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들에게 큰 재산은 있었지만, 그것을 물려받을 아들이 없었고, 그녀의 남편은 이미 늙었으므로 자식을 가질 희망조차도 없었던 것이다. 엘리사가 그녀를 위해서 이러한 은총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어낼 수 있다면, 현재로서는 그녀의 가장 걱정거리를 치워 주게 되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의 궁핍에 가장 도움이 되는 자들은 가장 친절한 환영을 받게 된다. 그는 즉시 그녀를 불러오라고 했다.

그녀는 아주 겸손하고 정중한 태도로 "문간에 섰다" (15절). 이것은 그녀가 늘 행하던 정숙한 태도의 결과였다. 그리고 났을 때, 엘리사는 일년이 못 되어 그녀가 아들을 나으리라고 확신케 했다(16절). 그녀는" 예언자의 이름으로" 이 예언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왕께 사정을 얘기해 주는 왕의 조신의 보답은 못 받았지만 예언자의 보답을 받았다. 그것은 예언자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지는 하나의 놀라운 자비를 보답 받은 셈이다. 이 약속은 그녀를 놀라게 했다. 그녀는 그 말로 조롱을 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아닙니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내게 농담을 마시옵고 진실을 말하소서. 당신의 여종을 속이지 마소서" 라고 했다.

약속된 시일이 차자, 그 약속을 입증해 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엘리사가 말해 준 그 시기가 되자,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17절). 그녀가 예언자를 위해서 방을 지어 주는 친절을 베푼 보답으로, 하나님은 그녀의 가정을 세워 주셨다. 우리는 이 사건이 그 집안에 얼마나 큰 기쁨을 주었을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노래하라, 오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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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넴 여인의 아들의 죽음(열왕기 하 4:18-37)

아마 아들이 태어난 뒤로는, 예언자가 선한 수넴 여인에게서 갑절의 대접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그는 그녀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후로는 일생 동안 그녀가 엘리사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리 해도 그 신세를 갚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자기의 기도로 태어난 아들이기 때문에 예언자에게도 그 아들은 지극히 귀여웠을 것이며, 부모에게도 그들의 노년에 태어난 아기이기 때문에 몹시 귀여웠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생겼다.

Ⅰ. 그렇게 귀여움을 받던 그 아이가 갑자기 죽어 버린 것이다. 그는 유아기의 많은 위험을 잘 넘기고, 이제는 아버지의 밭에까지 나아갈 수 있게끔 되었다. 그 아버지는 필경 그와 얘기하는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아마 그에게는 추수하는 기쁨보다 아들에 대한 기쁨이 훨씬 더 컸을 것이다. 그러나 빈들의 냉기 또는 열기가 그 아이에게 덮쳤다. 그 아이는 평소 귀엽게 자라났었다. 그래서 아이는 머리가 아프다고 아버지께 말했다(19절).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외에 그 누구에게 우리의 사정을 고하겠는가? 양자(養子)의 영이 믿는 자들의 온갖 근심과 바램을 아버지께로 올려다 줄 것이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머리야, 머리야, 가슴이야, 가슴이야" 하고 부르짖도록 가르쳐 줄 것이다.

아이의 아버지는 그를 어머니 품으로, 어머니의 무릎으로 돌려보냈다. 아버지는 아들의 형편이 별로 중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어머니 품에 안겨 한참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의 병은 중태였다. 그는 죽음의 잠을 자고 만 것이다(20절). 아침에는 멀쩡했던 아이가 점심 때가 되자 죽어 버렸다. 어머니의 사랑과 걱정이 아들의 생명을 보존시키지 못한다.

약속의 자녀, 기도의 자녀, 사랑으로 선사되었던 자녀를 이제 빼앗기고 만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질병과 죽음의 습격에 약하다. 그러나 그 지혜롭고도 믿음이 있는 어머니는 이 갑작스런 고난을 당하고도 입을 열지 않았으니, 얼마나 감탄할 일인가! 그녀는 성급한 애곡의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아이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강력히 믿었다. 그녀는 사자와도 같고 아브라함의 믿음의 참 딸답게도,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려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아들)를, 비유적으로 말하면, 다시 받아들인 것이다" (히 11:19). 그녀는 사렙다 과부의 아들이 소생한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고, 엘리야의 영이 엘리사에게 임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하나님의 자비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믿고 있었던 고로, 하나님이 주셨던 것을 그렇게 빨리 도로 데려갔으니 이제 그것을 다시 회복시켜 주리라는 것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믿음으로 "여자들은 자기들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았다" (히 11:35). 이 믿음으로, 그녀는 자기의 죽은 아이를 위해서 장례 준비를 하지 않고 부활을 위한 준비를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그를 예언자의 침상에 눕혔다" (22절)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예언자가 그녀에게 친절을 베풀 것을 기대한 때문이다. "오 여인이여! 네 믿음이 크도다." 이런 믿음을 가진 자는 좌절을 모르리라.

Ⅱ. 이 슬픈 사정을 그 어머니는 예언자에게 알렸다. 다행히도 예언자는 거기에서 멀지 않은, 갈멜 산 예언자 학교에 나가 있었다.

1. 그녀는 남편에게 자기가 예언자에게 가도 좋다고 허락을 받기 원했다. 그러나 자기의 용무는 알리지 않았다. 아마 남편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녀를 보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22절). 그런데 남편은 거부했다. "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23절). 이 말은 여호와의 절기 때에는, 그녀가 엘리사가 주관하는 집회에 참예하곤 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럴 때면 그녀는 다른 선한 사람들과 더불어 그의 말을 들으러 갔고, 그와 함께 기도와 찬양에 동참했을 것이다. 그녀는 자기 집안에서 그 예언자를 모시고 그의 도움을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귀인이었지만, 공중예배에 참예하러 나갔던 것이다. 그 날은 그 지정된 날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왜, 무슨 일로 오늘 그에게로 나아 가려는거요?"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 나쁜 일도 없소이다. 두고 보면 당신도 잘되었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부부가 얼마나 서로를 생각해 주는가를 보라. 그녀는 남편에게 알리지 않고는 아무 데도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남편은, 그녀에게 지극히 친절하므로 그녀가 자기의 용무를 알리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말했더라도 그녀를 말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2. 그녀는 황급히 예언자에게로 달려갔다(24절). 그리고 그는 이미 멀리서부터 그녀가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하인을 시켜 뭐 잘못된 일이 있느냐고 물어 보게 했다(25, 26절). 그 질문은 아주 구체적이었다.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도 평안하냐? 아이도 평안하냐?"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친구들과 가족들의 안녕에 대해서 물어 볼 수 있는 깊은 관심과 사랑이 있어야 한다.

그 답변은 일반적인 말투였다. "평안하니라." 그녀가 찾아 온 사람은 게하시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시 39:1, 2). 그러나 그녀가 한 말은 지극히 인내심 있는 말이었다. "나와, 내 남편과 아이도 평안하니라" -모두가 평안하나, 아이는 집에 죽어 있나이다.

하나님께서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장 귀한 인척을 부르셨을 때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다-" 우리에게나 그들에게 잘 된 일입니다" 라고. 그것은 실로 잘 된 일이다. 하나님께서 하는 모든 일은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늘 나라로 간 것이라면, 가버린 모든 자들에게는 잘 된 일이다. 또 그러한 재난으로 인하여 이후로 우리들이 더욱 의무에 바른 길을 걷게 된다면, 우리에게도 다행한 일이다.

3. 그녀는 예언자에게 오자, 자기가 당면한 재난에 대해서 그에게 겸손히 시비를 가린다. 그녀는 그의 발 밑에 나아갔다. 이것은 그녀가 자기를 도울 수 있으리라고 믿을 수 있었던 그에게 오기까지는 아무에게도 표명하지 아니했던 근심과 걱정이 있었기 때문이다(27절). 그녀는 감정이 터져 나오려 하자, 이제는 그 감정을 밝히는 방법을 알았던 것이다. 그녀는 그 감정의 발로가 소용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는 역시 숨길 줄도 알고 있었던 여인이다. 게하시는 그녀가 자기 선생의 발 밑에 앉는 것을 보면 기분 나쁘게 여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대로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는 그녀의 고민 이유를 하나님께로부터 즉시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이 원한다고 알려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생각에 합당한 때에만 사물을 알려 주신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알려 주시지 않았다. 그 선량한 여인의 입을 통해 예언자가 직접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은 매우 애처러운 것이었다. 그녀는 예언자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1) 그녀는 하나님께서 주셨다가 이제 다시 빼앗아 간 이 자비를 요구하지 않았었다는 것. "내 주여, 내가 아들을 원하더이까? 내가 원치 않았음을 당신은 아시리이다. 나는 아들이 없다고 안달을 떨지 않았습니다. 한나처럼 빌지도 않았고, 라헬처럼 아들을 주시든지 나를 죽여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위안물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은총을 받아서, 거기에 지나치게 신경을 쏟지 않을 수 있다면 다행한 일이겠다. 그럴 때에는, 그러한 위안물이 분노 속에 왔다가 진노 속에 사라져 간 것이나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2) 예언자의 말에 전적으로 의지해 있다고 했다. "나를 속이지 말라고 말하지 않더이까?" 실로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16절). 그러므로 이 말은 이런 얘기일 것이다.

[1] 자기를 속였다고 그 예언자와 시비를 거는 말일 수도 있다. 그 자비의 선물이 그렇게 속히 사라져 간 것은 자기를 속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며, 차라리 그 아이가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자기가 그 아들로 위안을 얻기 시작하자 곧 다시 데려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은혜의 선물이 다시 사라졌다고 하여, 그 은혜의 선물 자체를 없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 두자.

[2] 또는 그 아이를 다시 소생시켜 달라는 탄원일 수도 있는 "나는 속이지 말라고 말했나이다. 당신은 그러지 않으리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를 실망시키더라도 결코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를 속이지 않았으며 또 속일 수도 없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 좋다. 그러한 희망은 결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Ⅲ. 그 아이가 다시 소생하는 것을 보게 된다. 아마 그 여인은 아이의 죽음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간단히 언급된 것 이상으로, 자세히 그 아이의 소생에 대한 약속을 일러 주었을 것이다. 그 이야기가 여기서는 간략하게 나와 있다.

1. 엘리사는 게하시더러 전속력으로 그 죽은 아이에게로 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의 지팡이를 그에게 주어 보냈다. 그리고 그 지팡이를 아이의 얼굴에 올려 놓으라는 명령을 주었다(29절). 나로서는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자기의 몸을 죽은 아이에게 가까이 대고 아주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하여 아이를 살려냈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엘리사는 이런 간단한 의식을 통해서, 더구나 그가 직접 거기까지 가지 못할 이유도 없는 그런 때에, 그렇게 아이를 다시 살릴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할 수 있었을까? 그러한 능력이 게하시 같은 사람을 통해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인가? 홀(Hall) 주교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감동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으로 되어진 일이므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토록 위대한 은총을 그렇게 값싸게 주고자 하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은총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쉽사리 은총이 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2. 그 여인은 예언자가 직접 가지 않으면 안 가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홀로 가지 않으리이다" (30절). 그녀는 지팡이에다가 그렇게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원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그 손 오른편에 있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종들에 불과한 피조물을 신뢰하지 말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창조주, 곧 종들의 주요, 우리의 주이신 분의 권능만이 신뢰를 받아야 한다.

게하시는 re infecta-성공을 못하고 돌아왔다. 그 아이에게 어떤 생기도 보이지 않더라고 보고했다. "아이가 깨지 않더이다" (31절). 이것은 그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서, 아이의 죽음이 단지 잠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게하시 자신도 그 아이가 곧 깨어날 것으로 믿었다는 얘기다.

여기서의 게하시처럼, 사역자들은 죽은 영혼들에게 영적인 생명을 불어넣는 데에는 자기들의 힘으로는 아무 일도 못하는 법이다. 그들은 예언자의 지팡이처럼 사람들 앞에 말씀을 늘어 놓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당신의 영으로 임하시기까지는 아무런 음성도 들리지 않는다. 문자만은 생명을 죽인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오직 영이다. 마른 뼈에 생명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은 예언이 아니라, 하늘에서 호흡이 내려와 죽은 자들에게 들어가야만 된다.

3. 예언자는 간절히 기도하여 이 죽은 아이를 다시 소생시키는 은총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낸다.

엘리사는 그 죽은 아이가 자기의 침상에 있는 것을 보았다(32절). "그래서 문을 닫으니 두 사람뿐이었다" (33절). 여기서는 죽은 아이까지도 "두 사람" 중의 하나, 곧 산 자로 언급되어 있다. 아직도 그 아이는 존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사는 아무도 못 들어오게 문을 닫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권능을 자랑해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거나,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과장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1) 엘리사는 이 중대한 일에 온전히 정성을 다했다. 아마 게하시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로 실효를 거두리라고 생각한 것은 하나님을 지나치게 시험한 것이라는 점을 알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실망으로 인하여 그는 자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기가 생각하던 이 문제가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주 엄숙한 자세로 하나님께 아뢰었다.

[1] 그는 "여호와께 기도했다" (33절). 아마 엘리야가 했던 것처럼, "이 아이의 영혼이 되돌아오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실 때, 아주 권위 있는 자로서 말했다. 즉 Damsel, arise-젊은이여,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또한 "나사로야, 나오라" (그는 하나님의 아들, 생명의 주로서 권능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엘리야나 엘리사는 간절히 간구했다-그들은 하나님의 종이었기 때문이다.

[2] 그는 "아이에게 엎드렸다" (34절). 마치 자기의 열을 그에게 전해 주려는 듯한 태도였다. 이것은 엘리사의 갈망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위대한 일을 해 낼 것으로 그가 믿고 있는 하나님의 권능이 임한다는 한 표적을 보인 것이다.

그는 먼저 "자기의 입을 그 아이의 입에다 대었다." 이것은 마치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이에게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고자 하려는 것과 같다. 다음에는 "자기의 눈을 아이의 눈에다가" 대고는 생명의 빛이 들어가 그 눈을 뜨게 하려고 했다. 다음에는 "자기의 손을 그 아이의 손에다 대었다." 그 손에는 힘을 주려는 것이었다. 다음에는 "내려와서 집 안을 걸어다녔다." 그것은 근심과 걱정이 가득 찬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자기가 하려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다는 표시였다. 그리고는 다시 올라가서 "그 아이 위에 엎드렸다" (35절). 죽은 자들에게 영적 생명을 불어넣고자 하는 자들은 이처럼 그들 자신이 먼저 그 문제에 깊이 관심을 쏟고 참여하며, 그들을 위해 열렬히 기도하는 수고를 다해야 한다.



(2) 이 일은 점차적으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해졌다" (34절). 이것은 예언자에게 계속 기도할 용기를 넣어 주었다. 잠시 후에는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를 했다." 이것은 목숨뿐만 아니라 활기를 약속해 주는 것이었다. 어떤 자들은 옛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었을 때 그가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최초의 증거는 재채기였다고 보고한다. 그래서 재채기하는 자들을 존중해 주는 관례가 생겼다고 한다.

어떤 자는 그 재채기가 머리를 맑게 해 주며, 아이의 병을 낫게 해 주었다고 본다.



(3) 아이가 살아나서 아주 유쾌한 모습으로 어머니에게 돌아갔다(36, 37절). 그래서 걱정하던 모든 사람들이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다" (행 20:12).

사람을 죽이고 또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라. 그리고 기도의 위력을 깨달으라. 그 기도에는 하늘의 구름을 움직이는 열쇠가 있었듯이, 죽음을 움직이는 열쇠가 또한 있다. 신앙의 위력을 보라. 고정된 자연의 법(죽음이란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이다)이 물러가는 것이 이 믿음 있는 수넴 여인이 실망을 겪는 것보다 더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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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 식물에 나타난 기적(열왕기 하 4:38-44)

이제 엘리사가 자기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서 예언자의 생도들과 더불어 있고, 그들을 가르치며 또 아버지로서 그들에게 양식을 조달하는 사실들을 엿보게 된다. 자기들의 형편을 자상히 살펴 주고 잘 먹여 주고 잘 가르쳐 주는 그런 자를 우두머리로 삼은 자들은 행복하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다. 8장 1절에서도 읽었듯이, 그 땅 거민들의 죄악으로 인한 기근이었다. 그 기근은 7년 간이나 계속되었다. 엘리야의 시대와 꼭 같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기근이 아니라, 빵이 없어서 기근이었다. 왜냐하면 엘리사가 예언자들의 아들들(생도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들은 그의 지혜와 가르침을 들었으며, 또 서로를 가르쳐 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본문에는 그 예언자가 그들의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취한 두 가지 방법이 나와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말씀을 증거하시다가 사람들에게 두 번 먹을 것을 준 적이 있다. 엘리사는 그 땅에 기근이 왔기 때문에 이 문제에 더욱 걱정을 했다. 즉 예언자들의 생도들은 이 어려운 시기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고, "기근의 날에도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시 37:19) 해 주기 위해서였다.

Ⅰ. 그는 유해한 음식을 안전하고 영양이 좋은 음식이 되게 했다.

1. 강의가 있는 날에는 예언자들의 생도들이 모두 출석을 한다. 그러면 엘리사는 자기가 그들에게 영혼의 양식을 공급하는 동안 자기 종 게하시에게는 그들에게 육의 양식을 주라고 했다. 아마 그들에게 어떤 육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단지 그들을 위해 채소국을 끓이라고만 했기 때문이다(38절). 그 생도들은 절제와 고행의 본을 보여야만 했다. 진수성찬을 바랄 것이 아니라 초라한 음식으로도 만족을 해야 했다. 우리가 만일 맛 있는 달콤한 음식을 못 먹더라도, 아니 채소가 매끼의 식사의 전부라 하더라도, 우리는 이 위대한 예언자나 그의 손님들도 더 잘 먹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풀을 뜯으러 간 하인 한 사람(아마 고기 대신 채소를 넣고 국을 끓인 것이 분명하다)이 실수를 하여 먹지 못하는 풀, 적어도 독소가 들어 있는 풀을 뜯어 와서 국솥에다 넣었다. 그들은 그 풀을 "야등덩굴" 이라 불렀다(39절). 어떤 사람은 그 풀을 "클로신드," 곧 강한 설사를 일으키는 위험한 풀이었다고 본다.

예언자들의 생도들은 일반 철학이 아니라 신학의 수련을 닦았고, 풀이 아니라 성경책을 읽었다. 땅의 어떤 열매가 유독하다면, 그것은 그 저주(" 가시와 엉겅퀴를 내리라")의 결과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원래는 그것들도 모두 축복으로 만들어졌던 것들이다.

3. 생도들은 자기들의 음식이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엘리사에게 알렸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미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좋은 음식은 맛이 좋을 뿐 아니라, 나쁜 음식은 배에까지 들어가기 전에 미리 발각되고 마는 것이다. 입은 맛으로 음식을 구별하느니라(욥 12:11).

그 국이 좋지 않다는 것이 즉시 맛으로 판명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솥에 죽음이 있나이다" 라고 소리쳤다(40절). 식탁이 종종 함정이 되어서, 우리의 안녕을 돌보아야 할 것이 덫이 되고 마는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음식을 함부로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죽음과 죄를 생각하여야 한다.

4. 엘리사는 즉시 그 나쁜 맛을 제거했다. 그래서 이 나쁜 국이 줄 좋지 못한 결과를 막았다. 엘리사는 이전에 쓴 물을 고칠 때 소금을 쓴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가루를 가져다가 쓴 국을 변화시켰다(41절). 아마 그 국에는 이미 가루가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가루는 단지 국을 진하게 할 목적으로 일반 사람이 집어 넣은 가루였다 이번에 넣은 가루도 같은 가루이다. 그러나 엘리사의 손으로 집어 넣어졌다. 그리고 그 목적은 국을 고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국의 변화는 그 가루 때문이 아니라(그것은 수단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신호였다) 하나님의 권능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셈이다. 이제 만사가 다 잘 되었다. 그 국 솥에는 죽음도 피해도 없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음식이 영양가 있고 또 건강에도 좋다는 것을 생각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너를 고친 여호와니라."

Ⅱ. 그는 작은 음식이 크게 쓰이도록 했다.

1. 엘리사는 보리떡 20 덩이와 곡물 얼마를 선사 받았다(42절). 이 때에는 이러한 선물도 무시할 수 없는 큰 값어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 땅에 굶어 죽는 자들이 있던 그런 때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첫 열매" 라고 했다. 즉 그것은 그들의 수확물 중에서 하나님께 바쳐야 될 하나님의 몫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제사상들과 레위 사람들이 모두 예루살렘에만 살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없는 지역에 사는 믿음 깊은 사람들이 예언자들에게 그 예물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 첫 열매를 그들에게 바쳐서 학교를 운영해 나가는 데에 도움이 되게 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일이었다.

2. 엘리사는 값 없이 받았으므로 또한 값 없이 나누어 주었다. 그것을 모두 예언자들의 생도들 앞에 갖다 주라고 명했고, 나중을 위해서나 엘리사 자신을 위해서 남겨 두지 말라고 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그것을 모두 그들에게 주어 먹게 하라." 하나님의 사람들은 관대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예언자들의 선생들은 그 생도들에게 아낌 없이 주어야 한다.

3. 그 떡은 적은 것이었지만, 그것으로 엘리사는 백 명을 모두 배불리 먹게 했다(43, 44절). 그 떡의 분량은 아마 정상적으로 한 사람의 한 끼 식사밖에 안 되었을 것이다. 그 하인은,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 그렇게 적은 식사를 갖다 주는 것은 그들을 희롱하는 것일 뿐이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초대한 것은 일반 사람의 수준에도 이르지 못하는 것이니 자기의 선생이 필경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엘리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모두 실컷 먹이라고 말했다. 그 말은 실현되었다. 그들은 먹었고, 남았다. 그것은, 그들이 먹지 않아서가 아니라 먹는 대로 떡이 자꾸만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에다 이렇게 약속하셨다. 즉 "내가 그들의 식량에 풍족히 축복을 주고, 그 가난한 거민들에게 식량을 만족히 주리라" (시 132:15). 하나님께서 먹이시는 자들은, 또한 하나님께서 배불리 먹게 하시리라. 또 하나님께서 불어 버리면 작아지듯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면 작은 것도 커진다.

그리스도께서 청중들을 먹이신 사건은 이것보다 훨씬 뛰어난 기적이었다. 그러나 그 두 사건은 모두, 자기들의 의무를 다하여 하나님께 시중을 드는 자들은, 거룩한 섭리의 특별하신 배려로 인하여 본인들이 보호를 받을뿐더러 양식까지도 공급받게 된다는 희망을 가지라고 교훈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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