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의 승천(1)(열왕기 하 2:1-8)
엘리야의 시대와 또 그에 관한 사건의 연대는 성서에 나오는 다른 모든 주요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언급이 없다. 우리는 그의 나이에 대해서도 들은 바 없다. 그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아합의 제위 몇 년인지도 모른다. 또한 요람 왕 제위 몇 년에 그가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가 몇 년 간이나 일을 했는지도 추정할 수 없다. 다만 도합 20여 년이 되리라고 상상할 뿐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이런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Ⅰ. 하나님은 회오리 바람을 통해 그를 하늘로 올려 가시기로 작정하셨다(1절). 하나님은 그것을 작정하시고 나서, 아마 그 일이 있기 얼마 전에 본인에게 그런 사실을 미리 알려 주셨을 것이다. 즉 그는 머지 않아 이 세상에서 데려감을 당할 것이나, 죽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에녹과 같이 몸과 혼이 그대로 하늘로 옮겨져 가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영들이 사는 저 세상의 주민이 되기에 합당한 자질을 갖추는 데에 필수적인 그러한 변화,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생존한 채 세상에 있을 자들이 겪어야 될 그러한 변화만을 그에게 일어나게 하시는 사건이었다. 우리는 왜 하필 모든 예언자들 중에서 엘리야만 그런 유별난 영광을 차지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할 수 없다. 그도 "우리와 같이 육신을 입은" 사람이었다. 죄를 알았으나, 죽음을 맛보지는 않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왕 중 왕이신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 존귀하게 하셨으며, 남과 다른 영광을 주시기를 기뻐하셨을까? 우리는 이렇게 가정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1. 하나님은 엘리야의 봉사를 돌아보셨다 그의 지난 날의 봉사는 아주 훌륭했고 특별히 뛰어났었다. 그래서 엘리야의 봉사를 보상해 주며, 또 그의 열성과 신앙을 본받아서, 어떤 희생이 따르든지 자기들 세대의 죄악을 저지하는 증인들이 되려는 예언자들의 아들들을 격려해 주기로 작정하신 것이다.2. 하나님은 교회의 당면한 암흑과 부패상을 굽어보시고서, 이 세상 외에 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증명하시고자 하셨으며, 그리하여 신실한 소수의 무리들의 마음을 당신 자신과 저 세상으로 향하도록 유도하시려고 하셨던 것이다.
3. 하나님은 복음의 시대를 예상하셨다. 그리고 엘리야의 승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승천과 "모든 믿는 자들에게 개방된 하늘 나라" 의 모형과 상징을 보여 주시고자 하셨다. 믿음과 기도로써 엘리야는 하나님과 많은 교제를 나누었고, 마침내는 그리로 데려감을 입었으니, 이것은 우리도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지금은 비록 지상에 살고 있지만 머지 않아 우리의 영혼(곧 우리 자신)은 거기에서 영원히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을 확신케 해 준다.
Ⅱ. 지상에서 엘리야와 늘 동행하던 엘리사는 엘리야와 헤어지지 않으려고 결심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만류하려고 했던 것 같다. 엘리야는 엘리사가 길갈, 벧엘, 여리고 등에 머물러 있기를 기대했다(2, 4, 6절).
어떤 사람은 겸양의 행동으로 생각한다. 즉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주시기로 작정하신 영광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도 않았고,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하지도 않았다(하나님의 총애를 받고 있는 자들은 지상의 군왕들의 총애를 받고 있는 자들처럼, 자기들이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광고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또한 엘리사는 더욱 그것을 알고 싶어했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룻을 설득시키려는 나오미의 경우에서처럼, 더욱 엘리야와 친밀히 있고 싶어하는 충동을 주었을 것이다. 엘리야는 엘리사더러 이곳 저곳에 머물러 달라고 애걸했으나 모두 소용 없는 것이었다. 엘리사는 자기의 주인이 없이는 어디에서도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엘리야는 그를 지상에 남겨 두고 하늘로 가버리고 만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으리다." 왜 그랬는가? 엘리사가 엘리야를 사랑해서만은 아니다.
1. 엘리야가 지상에 살아 있는 한, 그와의 거룩한 대화를 통해 좀더 배우고 싶었던 때문이다. 그러한 일은 언제나 유익을 주어 왔으나, 그 어느 때보다도 그 때에는 더욱 절실했을 것이다. 우리는 지상에 함께 살고 있는 동안, 서로 협력하여 영적 선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잠시 동안만 같이" 있기 때문이다.2. 엘리사는 엘리야의 승천에 관한 확실한 사실을 알고 싶었고, 직접 목격하고 싶었다. 그래야 자기의 믿음이 더욱 돈독해질 수 있고,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한 지식이 더욱 성장하겠기 때문이다. 그는 오랫동안 엘리야를 따라 다녔다. 그래서 이제는 작별의 축복을 해 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와 헤어지기를 싫어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좇는 자들은 결단코 피곤치 않으리라.
Ⅲ. 작별에 앞서 엘리야는 예언자 학교를 방문하고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당시에는 이스라엘의 많은 도시에, 심지어는 사마리아에도 그러한 학교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본문에 보면, "선지자들의 아들들(개역:생도들)" 이 있는데, 그들의 수효는 상당했고, 벧엘에도 있었다. 벧엘이란 송아지 우상이 서 있던 곳이다. 여리고에도 있었는데, 그 곳을 얼마 전에 하나님의 저주를 무시하고 재건된 도시이다.
예루살렘과 유다 왕국에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성전 예배가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 대신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이러한 학교를 세워 주시사, 각종 종교 예식과 예배 의식을 위해서 사람들을 훈련하여 임용할 수 있도록 하셨고, 선량한 사람들은 거기에 모여서 기도와 말씀으로써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절기를 지킬 수 있었다. 당시 그들에게는 희생 제사와 분향이 익숙하지 않았었다. 이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신앙을 변절하는 그런 시기에도 그들의 신앙은 유지되어 왔던 것이다.
이 예언자들 중 많은 자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었고,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더욱 많았다" (사 54:1 참조). 그 어느 대제사장도 이 두 거인 엘리야와 엘리사보다 훌륭한 자는 없었다. 생각건대,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에는 한 번도 참예한 일이 없는 것 같다.
신앙과 덕을 가르치는 이들 신학교는 아마 엘리야의 수고로 창건 되었을 것이다. 이제 엘리야는 작별하기에 앞서, 그들에게 교훈을 주고 용기를 주며 복을 빌어 주기 위하여 그들을 방문한 것이다. 하늘 나라에 갈 때가 된 자들은 지상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어, 그들에게 자기들의 경험과 증언과 조언을 들려주며 기도를 해 주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벧후 1:15). 그리스도께서 승리한 어조로 "나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난 후, "그러나 이들이 여기에 있나이다. 아버지여, 저들을 지키소서" 하고 계속 말씀하셨다.
Ⅳ. 예언자들의 아들들은 그 소식을 들었거나(엘리야 자신에게서거나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예언의 영을 받아 말했거나) 아니면 엘리야의 인사가 엄숙한 것을 보고 그가 머지 않아 떠나가리라는 것을 눈치 챘다.
1. 그리고는 그 사실을 엘리사에게 알렸다. 그리고 벧엘(3절)과 여리고(5절)에도 알렸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나이까?" 라고 했다. 이러한 말은, 그들이 엘리야를 잃는 일 때문에 엘리사에게 질책을 가하는 것이거나, 그의 선생이 없어지고 나면 엘리사도 자기들과 같은 수준으로 되어야 할 것이라고 바라는 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신중히 생각하고 있는가를 보였을 뿐이요, 이 사건을 크게 주목하고 있다는 뜻임과 동시에, 엘리사더러 엘리야가 없어지고 났을 때의 상황에 대해 준비 태세를 갖추라는 간언이었다.우리는 우리들의 아주 가까운 친척, 아주 사랑하는 친구도 머지 않아서 우리 곁을 떠나고야 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여호와께서" 그들을 "데려가실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시면 그 때는 그들을 잃고 말 것이니, 그가 "빼앗아 가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랴!" (욥 9:12) 하나님은 우리 머리 위에 있는 상급자들이나 우리 발 밑에 있는 하급자들, 그리고 우리 곁에 있는 동급자들, 그 누구든 데려가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가 친척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 이행에 힘쓰자. 그리하면 그 날이 오더라도 평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엘리사도 역시 그러한 실정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이와 비슷한 상황에서의 제자들처럼, 요 16:6) 이 일 때문에 "그 마음에 슬픔이 가득했다." 그러므로 엘리사가 새삼스레 그러한 말을 들어야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들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이 큰 근심에 대한 명상이나 자기 선생에 대한 수종에서 잠시라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고 말했다. 엘리사가 이렇게 말한 것은, 역정이 나서거나 예언자들의 아들들을 무시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의 심정을 토로한 것이며, 그들도 안정을 되찾기를 바라면서 이 사건의 결과를 주목하면서 무서운 침묵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나도 아느니라, 조용히 있으라" (슥 2:13).
2. 그들은 자기들도 비록 바싹 따라가지는 않더라도 멀리 서서 그 사건의 증인이 되겠다고 했다(7절). "그들 중 50인이" 자기들의 호기심을 채우려고 "멀리 서서 바라보았다" (7절)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다른 것을 의도하셨다. 즉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받고 거부당한" 그 예언자가 하늘에게서는 얼마나 큰 영광을 받는지를 자기들의 눈으로 보는 목격자로 삼고자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役事)는 주목해 볼 가치가 있다. "하늘에 문이 열릴" 때에, 한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오라. 와서 보라" 고 했던 것이다.Ⅴ. 엘리야가 기적적으로 요단 강물을 가른 것은 그의 승천의 서두였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와 같은 경우이다(8절). 엘리야가 승천하기 위해서는 요단 강 건너편까지 가야 했었다. 거기가 그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래야 모세가 죽었던 장소에 더 가까이 이를 수 있고, 가장 멸시를 받고 있던 요단 강 건너편의 땅도 영광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행인들과 마찬가지로 엘리야와 엘리사도 배를 타고 요단 강을 건너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입국할 때 요단 강을 가르게 했었듯이(수 3:7), 이제 엘리야가 출국할 때도 그렇게 함으로써 그를 존귀케 하시고자 하셨을 것이다. 모세가 자기의 지팡이로 바다를 갈랐듯이, 엘리야는 자기의 겉옷으로 요단 강을 갈랐다. 지팡이나 겉옷은 둘 다 그들의 직무의 insignia-배지였기 때문이다.
옛적에는 이 강물이 법궤에 굴복했었고, 지금은 예언자 엘리야의 겉옷에 굴복했다. 예언자들이야말로 법궤가 없었던 자들에게는 법궤와 동일한 하나님의 임재의 징표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신실한 자들을 하늘로 데려가실 때에는, 죽음이 바로 요단강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승천에 앞서 이 강을 건너야만하고, 그 강을 통과할 수 있는 안전하고 평안한 길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 강물을 이미 갈라 놓으셨으니, 주의 구속받은 백성들은 그리로 건너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 사망아! 네 쏘는 가시가 어디 있느냐?" 네가 어찌 사람에게 피해를 주며 공포를 줄 수 있으랴!
엘리야의 승천(2) (열왕기 하 2:9-12)
Ⅰ. 일제 엘리야는 유서를 작성하여 자기의 상속인 엘리사에게 준다. 즉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자기를 대신하는 예언자가 되게 했다. 그러나 실상은 엘리야가 "그의 겉옷을 그(엘리사)에게 던졌을" 때에 이미 그것은 이루어진 것이다(왕상 19:19).
1. 엘리야는 엘리사의 한결같은 관심과 시종에 크게 만족했다. 그래서 그가 엘리사에게 뭘 해 주기를 바라느냐고 물었다. 즉 이제 작별에 임하여 어떤 축복을 해 주길 바라느냐고 물었다. 홀(Hall) 감독이 주장하고 있는 바대로, 엘리야는 "내가 하늘에 가 있을 때에 내게 구하라. 그 때는 네게 더 좋은 친구가 되어 줄 수 있느니라" 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가기 전에 구하라" 고 말했다.이 땅에서 우리는 우리의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그들은 우리에게 답변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늘에 가서는 그리스도와 그 안에 계시는 하나님 외에는 우리가 어떤 친구와 가까이 할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다.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른다."
2. 엘리사는 자기의 능력을 늘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포착하고 나서, "그의 영의 갑절" 을 구했다. 그는 재물이나 명예나, 또는 어떤 곤경에서의 해방을 구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 대한 봉사와 자기 세대들에게 해 줄 봉사에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해달라고 했다. 그는 이러한 것을 구했다.(1) 엘리야의 수중에 있는 어떤 능력이나 은사가 아니라, 성령을 구했다. 그러므로 그는 "내게 성령을 주옵소서." 하지 않고(그는 성령이 하나님의 은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내게 임하게 하소서. 이 일을 위하여 나와 하나님 사이를 중재해 주소서" 라고 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제자들에게 무엇이나 구하라고 했다. 어느 한 가지가 아니라 모든 것을 구하라고 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는 엘리야 이상의 권위와 확신을 가지고 말씀하셨다.
(2) "그(엘리야)" 의 정신(영)을 구했다. 그것은, 그가 엘리야를 대신할 예언자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하던 일을 계승하고, 그 예언자들의 아들들(생도들)을 보살피고, 그들의 원수들과 대적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엘리야가 접했던 바로 그 난관과 그 타락된 세대들과 대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엘리야의 정신을 갖지 않는다면, "그 날에 맞는 능력" 을 갖추지 못하는 것이다.
(3) "그의 정신(영)의 갑절" 을 구했다. 이것은 엘리야의 정신의 두 배가 아니라 다른 예언자들의 정신(영)의 두 배를 뜻한다. 다른 예언자들에게서는 엘리사에게서처럼 그렇게 큰 능력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엘리사는 엘리야 밑에서 자랐다.
"가장 좋은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은 거룩한 열망이다. 그러한 은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지극히 잘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줄 것이다. 우리는 모두-일반 신도이든 성직자이든-우리의 선배들의 좋은 본을 거울 삼아야 하며, 그들의 정신을 따르고, 그들이 그들의 사업을 수행해 나갈 때 함께 해 주셨던 그 은총을 간절히 하나님께 구하여, 우리도 그들의 일을 완성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3. 엘리야는 허락했다. 그러나 두 가지 단서를 붙였다(10절).(1) 즉 그가 그러한 은사를 마땅히 귀중히 여겨야 한다고 했다. 엘리야는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려운 일" 이라고 칭함으로써 그 값어치를 엘리사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못하실만큼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로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한 것이다. 신령한 축복의 진가를 잘 앎과 동시에 자기들은 그러한 축복을 받을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자야말로, 신령한 축복을 받을 준비가 가장 잘 되어 있는 자들이다.
(2) 엘리사가 그의 선생을 끝까지 바짝 좇아 다녀서, 그의 최후를 목격해야 된다고 했다. "내가 데려감을 당하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이루어지리라."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의 선생의 교훈에 부지런히 참예하고 듣고, 그의 모범을 주의 깊게 관찰하며, 특히 그의 최후의 장면을 목격하는 것이 바로 갑절의 영을 받을 조건이었다. 사실 그러한 조건이야 말로 그의 영을 많이 받을 수 있는 한 방법이 되기에 적합한 것이다. 엘리야가 승천하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는 것도 역시 그에게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떠나가나 성도들이나 그들의 체험이 가져다 주는 위안은 우리의 기쁨을 더욱 고조시켜 주며 우리의 결심을 더욱 굳세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러한 것은 하나의 신호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즉 "만일 내가 승천할 때의 모습을 네가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네게 은총을 베푸시거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네게 그 일을 이루어 주신 표시인 줄로 믿고 그대로 의지하라" 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는 것을 보고, 머지 않아 자기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확신했던 것이다(행 1:8). 아마 엘리사는 이렇게 기도했을 것이다. "여호와여, 내게 복을 베푸실 이 표징을 보여 주옵소서."
Ⅱ. 엘리야는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게 된다(11절). 에녹과 같이, 그도 "죽음을 보지 않고" 그대로 들리워 올라갔다. 그리고 코울리(Cowley)씨가 말하는 바와 같이 "모든 일류가 빠지고 마는 그 구렁을 뛰어 넘어, 하늘로 올라간 두 번째 사람" 이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호기심 어린 질문이 가해질 수 있다. 그런 것에 대해서는 해답도 없다. 우리는 단지 본문에서 알 수 있는 얘기로만 만족을 누리자.
1. 여호와 그의 주님께서 오셨을 때, 엘리야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는 엘리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에게 교훈을 들려 주고, 격려를 해 주며, 사업을 지시해 주고 촉구시키는 얘기였다. 그것은 남아 있는 자들의 선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엘리야는 이제 자기가 갈 저 세상에 홀린 사람처럼 명상이나 기도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두면서 담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우리는 명상과 예배만을 행하는 것이 하늘 나라를 위한 준비 요건이라고 생각해서는 잘못이다. 다른 일도 그러하거니와 남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도 우리의 선행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신성한 것을 생각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그러한 것이 마음에 떠올랐거든), 그것을 서로 이야기하는 일은 더욱 좋다. 그것은 교육적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고전 14:4).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의 제자들을 축복해 주시면서 승천하셨다.2. 그의 주님 여호와는 엘리야를 위해서 어떤 호위병을 보냈는가? "불수레와 불말을" 보냈다. 아마 불말과 불수레가 구름을 타고 그들 위에 내려오는 것이 보였거나-패트릭(Patrick) 주교의 말대로-땅 위에서 그들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을 것이다. 천사들은 흔히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신실한 자들의 영혼은 모두 보이지 않는 천사들의 호위로 아브라함의 품에 인도된다. 그러나 엘리야는 몸이 함께 들리워 올라갔고, 이 거룩한 호위병들은 눈에 보이는 존재들이었고, 그렇다고 통례적인 어떤 인간의 모양으로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엘리야를 팔로 안았든가 또는 독수리 같이 날개 위에 그를 태워 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엘리야를 어린아이나 어린 양 같이(사 40:11, 31) 데려갔다. 그 호위병들은 수레와 말의 모양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그는 제왕이나 정복자처럼 위엄 있고 승리에 찬 모습으로 말을 달릴 수 있었다. 아니 그는 "정복자 이상" 의 모습이었다.
천사들을 성경에서는" 그룹들" 과 "스랍들" 이라 부른다. 그리고 오늘의 모습은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들의 존엄성에는 못 미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두 가지의 이름에는 모두 합당하다. 이유는 이렇다.
(1) "스랍들" 이란 "불" 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꽃" 으로 만드셨다고 했다(시 104:4).
(2) (많은 학자들의 견해대로) "그룹들" 이란 "수레" (병거)를 의미한다. 그래서 천사들은 "하나님의 수레" 라고 불리운다(시 68:17).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룹을 타신다" (시 18:10)고 되어 있다. 아마 이러한 사실은 에스겔이 본 생물과 바퀴들, 곧 말과 병기를 연상하는 말일 것이다. 스가랴의 환상에도 그렇게 나타나 있다(슥 1:8; 6:1계6:2 이하 참조).
하나님의 천사들은-비록 아무리 미천한 일이라도-구원을 상속받을 자들을 위한 일이라면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행할 태세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엘리야는 천사들의 세계로 옮겨가야 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엘리야가 오기를 얼마나 고대하면서, 그들 중 몇이 마중 나왔다는 사실을 보여 준 것이다. 수레와 말이 불처럼 보였으나, 태우지는 않았고 단지 밝은 빛만 내었다. 엘리야를 괴롭히거나 태워버리려는 불이 아니라, 멀리 서서 엘리야의 승천을 지켜보고 있는 자들에게 그 모습이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엘리야는 일찍이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성으로 그 마음이 불타 올랐었는데, 이제는 그가 하늘의 거룩한 불에 의해서 세련되었고, 옮기워졌다.
3. 그는 어떻게 엘리사를 작별했는가? 그 수레가 그들 사이를 갈라 놓아 버렸다. 아무리 친한 친구들끼리라도 헤어져야 한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고 싶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홀로 남게 되었다.4. 그는 어디로 갔는가? 그는 "회오리 바람에 의해서 하늘로 올라갔다." 불은 위로 올라가는 성질이 있다. 그리고 회오리 바람은 엘리야가 대기권을 통과하여 지구의 자력권을 벗어나도록 도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순수한 에데르층을 벗어나서 거룩하고 복된 영들이 사는 세계로 얼마나 순식간에 승천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설사 그가 어느 곳에 머물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피닉스처럼 영영 살았으리라.
그는 더 좋은 존재가 되기를 열망했고,
산들도 그와 같이 불 속에서 영원에 이르기를 사모했느니라."
-코울리(Cowley)-
엘리야는, 한때 화가 나서 죽고 싶어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지극한 은총을 베푸사, 그때 그의 소망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특유의 특권으로 그에게 영예를 주셨다. 그리하여 그는 죽음을 보지 않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사건이나 에녹의 사건을 통하여
(1) 사람이 죄를 짓지 않으면, 죽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승천을 통해서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셨다.
(2) 하나님은 복음에 의해서 분명히 드러난 저 세상과 인간의 불멸성을 어렴풋이 보여 주신 것이다. 그 불멸성은 성도의 몸이 입게 될 영광이다. 그리고 엘리야 시대와 같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는 하늘 나라의 문이 열려 있다" 는 것을 밝혀 주신 것이다. 또한 이 사건은 그리스도 승천의 한 상징이기도 하다.
Ⅲ. 엘리사는 저 위대한 예언자의 상심을 가끔 깊이 통애했다. 그러나 그에게 찬미를 보냈다(12절).
1. 엘리사는 엘리야의 승천을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엘리야의 영의 갑절을 요구한 자기의 요청이 분명히 허락되었다는 징표를 얻는 셈이다. 그는 하늘 쪽을 계속하여 바라보았다. 제자들처럼, 그리로부터 그 은사가 오기를 기대한 것이다(행 1:10). 그가 잠시동안 그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으나, 곧 그 장면은 그의 시계(視界)에서 벗어 났다. 그리고 그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했다."2. 그는 자기 자신과 민중이 엘리야를 잃은 것을 슬퍼하는 뜻으로 자기의 옷을 찢었다. 엘리야가 비록 승리에 넘쳐서 하늘로 올라갔지만, 이 세상은 그를 아까와 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잔존자들에게는 그의 승천이 큰 통한을 가져다 주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신실하고 쓸모 있는 자들을 데려가심으로써, 사람들의 눈물과 애통을 요구하는 데도, 그 눈에 눈물이 없는 자라면 그런 자들의 마음도 역시 굳은 것이다. 비록 엘리야가 떠남으로써 엘리사가 능력이 더해지게 되고, 특히 이제 엘리사가 그의 영을 갑절이나 받은 것이 분명하기는 해도, 그는 엘리야를 잃은 사실을 슬퍼했다. 그가 엘리야를 사랑하여 영원토록 그를 받들고 싶어했었기 때문이다.
3. 그는 엘리야를 매우 존경스러운 인물이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엘리야를 잃는 것에 대해 그토록 슬퍼한 이유이기도 하다.(1) 엘리사 본인으로서는 자기의 젊은 날의 안내자를 잃은 것이다. 그는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라고 했다. 엘리사는 마치 자기의 꼴이 이 세상에서 아버지를 여읜 자식과 같다고 생각하여, 심히 슬퍼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남겨두고 떠나실 때는, 그들을 고아와 같이 저들끼리 있도록 내버려 두시지는 않으셨다(요 14:15). 그러나 엘리야는 어쩔 수 없었다.
(2) 민중은 자기들의 최대의 안내자를 잃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수레요 그 마부" 였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 모든 사람들에게 각자의 잘못만 없다면, 이 수레와 같이, 그들을 모두 하늘로 데려가고 싶어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쟁할 때 수레(병거)나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엘리야가 충언과 견책과 기도-이런 것은 가장 힘센 수레와 말보다 더 나은 것이다-로써 이스라엘에게 수레와 말노릇을 했으며, 하나님이 심판을 면하게 해 주었다. 그런데 그러던 그가 사라진다는 사실은 그들 군대의 참패요, 만회될 수 없는 대 손실과 같았다. "이 하나님의 사람을 잃느니 차라리 우리의 온 군대를 잃는 것이 좋았으리라."
능력을 받은 엘리사(열왕기 하 2:13-18)
본문은 엘리야 승천 직후에 일어났던 일에 관한 기록이다.
Ⅰ. 하나님께서 엘리사와 함께 계신다는 징표와 엘리사가 엘리야의 자리로 승진했다는 표징-이것은 곧 엘리야처럼 그가 예언자들의 생도들의 아버지 역할을 해야 하며, 이스라엘의 수레와 마부 노릇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을 받았다.
1. 그는 엘리야의 직무의 상징이었던 그의 옷을 물려받았다. 아마 그는 그의 선생을 위해서 그 옷을 입고 있었을 것이다(13절).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갈 때, 일반 사람들처럼 자기의 몸을 지상에 남겨두고 가지는 않았지만, 그대신 자기의 겉옷을 떨어뜨리고 갔다. 그러므로 이제 그가 옷을 벗어버린 것은 아마 불멸성으로 옷입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제 그는 자기의 몸을 단장해 줄 옷이나 기후에서 몸을 보호해 줄 은신처나 얼굴을 가릴 수건 따위는 필요 없는 세계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왕상 19:13 참조).그는 자기의 옷을 엘리사에게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 그 옷 자체로는 별로 가치가 없는 것이었지만, 성령께서 엘리사 위에 강림하셨다는 표징이기 때문에, 수천만금 이상의 값어치가 있었다. 엘리사는 그 옷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숭배하려는 신성한 유물로서가 아니라 입고 다녀야 할 중요한 의복으로서, 그리고 그가 찢어 버린 자기 옷 대신에 그에게 주어진 보상으로서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그 외투가 자기에게 처음으로 씌워졌던 이래로 줄곧 그 옷을 사랑해 왔다(왕상 19:19). 그 때는 쾌히 엘리야의 소명에 따라 나섰다. 그래서 엘리야의 한 종이 되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옷이 그에게 존귀를 더하게 해 주었으니, 그가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옷과 마찬가지로 중요 위치에 있는 선한 사람들의 유품이 있다. 그럴 때는, 그 후계자들이 모아서 보존해야 한다. 즉 그들의 어록이나 저작들 또는 그들의 모범적 행실들로서, 후계자들이 선임자들을 존경하는 뜻에서 그러한 사업들을 좇아야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그 선임자들의 은덕 안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그는 요단강을 가를 수 있는 엘리야의 권능을 이어받았다(14절). 그의 아버지를 작별하고, 이제는 그 예언자들의 학교, 그의 아들들(생도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엘리사와 그들 사이에는 요단 강이 놓여 있었다. 엘리야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 강을 가른 적이 있었다. 이제 엘리사는 자기의 직임을 수행해 나가기 위해서 자기도 그 강을 가를 수 있을는지 시험해 보고자 했다. 그것으로써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해 주시는지, 그리고 자기가 과연 갑절의 영을 받았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엘리야가 행한 마지막 기적이 엘리사가 행하는 처음 기적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엘리야가 멈춘 바로 거기서부터 일을 해나갔다. 그 사이에는 아무런 여백도 없었다.(1) 물을 가름에 있어서, 엘리사는 엘리야의 겉옷을 이용했다. 그는 자기가 직접 그 일을 해내는데(8절) 자기 선생이 하던 방식을 그대로 따르려 했고, 어떤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려 하지 않았다. 즉 그는 자기의 선임자들보다도 자기들이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처럼 자기 마음대로 일을 하지 않았다.
(2) 그는 엘리야의 하나님께 구했다. "여호와, 엘리야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나이까?" 그는 이제 엘리야가 없어서 편안할 수 없는 자처럼, 엘리야의 상실에만 신경을 쓰고서, "엘리야는 어디 계십니까?" 하고 묻지 않았다-또는 남아 있는 예언자들의 생도들처럼 자기의 결과를 알지 못한다는 듯이, 자기의 행복을 의심하지도 않았다-또는 엘리야가 어디에 가서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에게 관해 자꾸만 질문을 던진 것도 아니다(즉 우리에게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숨은 세계의 삶에 대해서),-또한 엘리야가 도와 주기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아니, 물론 엘리야는 행복한 사람이지만, 전지(全知)하거나 전능한 인간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구했다.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라고. 엘리야가 하늘로 가게 되었으니,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엘리야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스스로 충분히 입증하신 셈이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위해 하늘 도성을 예비해 놓으셨으나, 만일 그 도성이 그가 이 세상에서 누리던 그 어떤 성보다도 좋은 곳이 아니라면, 그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라 불리우기에 부끄러울 것이다" (히 11:16; 마 27:31, 32). 이제 엘리야는 하늘로 들려져 가고 없으므로,
[1] 엘리사는 하나님께 물은 것이다. 피조물에게서 얻는 우리의 위안이 끝나도, 우리에게는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신다.
[2] 그는 "엘리야의 하나님." 곧 엘리야가 섬기고 영광 돌리고 간구하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버리는 가운데서도 끝까지 집착하던 그 하나님께 구했다. 모든 사람들이 신앙을 변절하는 그런 시대에도 하나님께 붙어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의미에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는 영광이 부여된다. "엘리야를 인정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물자를 공급해 주시던 그 하나님, 그리고 여러모로 그에게 영예를 부여하시되, 이제 마지막에 더욱 그를 존귀하게 해 주신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여호와여, 내게 엘리야의 영을 약속하시지 않으시렵니까? 그 약속을 지금 이루소서" 라고 한 것이다.
흠정역(개역도)은 원문에 나와 있는 Aphbis-그까지도라는 말이 "그도 물을 치매……" 하고 그 다음 문장에다 포함시키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 말이 "엘리야의 하나님 어디 계시나이까?" 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Etiam ille adhuc superest-" 그는 여전히 계시느니라. 바로 네 가까이에 말이다. 우리에게 엘리야는 없지만, 엘리야의 하나님을 잃은 것이 아니다. 그는 땅을 저버리지 않으셨느니라. 아직도 나와 함께 계시는 분은 역시 그 분이로다" 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
첫째, 지상에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찾아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그리고 앞서서 하늘에 가 있는 성도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그분을 아뢰어야 한다. 즉 "우리 열조의 하나님" 이라고.
둘째,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알게 되면 큰 위로를 받는다. "그의 거룩한 성전에 계신" 분은 역시 그분(시 1:4)이요, "그에게 나아가는 모든 자들 가까이에" 그가 계신다(시 145:18).
셋째, 경건하고 신실한 선임자들의 정신과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은 선임자들이 체험한 것과 같은 은혜를 분명코 체험하게 된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엘리사의 하나님도 되신다. 거룩한 예언자들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그들의 정신과 그들의 하나님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앞서 간 자들의 옷이나 장소나 서적을 가진들 무슨 소용 있으랴?
3. 엘리사는 예언자들의 생도들에게 대한 엘리야의 권한을 이어받았다(15절). 요단 강까지 따라갔던, 여리고의 어떤 생도들은 그 사건의 전말을 보았고, 엘리사가 돌아올 때 그 앞에서 강물이 갈라지는 것을 보고 놀랐으며, 그것으로써 "엘리야의 영이 그에게 임했다" 는 확증을 얻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난날 엘리야에게 보냈던 것과 같은 존경과 경의를 표해야 했던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엘리사를 대면하자, 그가 불과 물을 무사히 통과한 사실에 대해서 축하를 드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영예를 베풀어 주신 사실을 같이 기뻐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렸다" 고 했다. 그들은 예언자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엘리사는 농부였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엘리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바로 이 사람이 "그가 영예롭게 하시기를 기뻐하는 자라는 것" 을 알고 났을 때에는, 즉각적으로 그를 자기들의 우두머리요 아버지로서 대하여 복종했다. 마치 모세가 죽자 백성들이 여호수아에게 복종한 것과 같다(수 1:17).
우리는 하나님의 영과 임재가 함께 하여 있는 것이 드러난 자들에게는-그들의 출신과 교육이 아무리 비천하더라도-최대의 경의와 사랑을 보내야 한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영예를 주든, 우리도 그들을 존경해야 한다. 예언자들의 생도들이 이렇게 즉각 엘리사에게 복종하자, 이 사실은 필경 그에게 커다란 격려가 되었을 것이고, 그가 맡은 소명을 더욱 확실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Ⅱ. 예언자들의 생도들은 불필요하게도 엘리야를 찾으려 했다.
1. 그들은 엘리야가 살았거나 혹은 죽어서, 산이나 어느 계곡에 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엘리야를 찾으러 용사들을 내어보내 보았으면 만족했으리라(16절). 아마 어떤 생도들은 이 일로써 엘리사를 지명한 일에 대해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먼저 엘리야가 정말로 사라졌는지를 확인해 봅시다. 어떻게 그렇게 선택받은 그릇(엘리야를 말함-역주)이, 그 안에 기분 좋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릇처럼 버림을 받고, 하늘의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나섰던 것이다.2. 엘리사는 그들의 동의(動意)에 찬성하지 않았으나, 그들이 자꾸만 간청하자 마침내 허락했다(17절). 엘리사가 자기가 자기의 옛 스승을 존경하지 않는다거나 그의 의복을 내어 주려는 마음이 없다고 하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더 이상 부끄러워서도 그들의 의견에 반대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그들은 간청했다. 지혜로운 자들은 남들의 판단이 소용 없고 불필요한 줄을 알면서도, 평화를 위해서 타인의 의사를 존중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양보를 한다.
3. 그들은 결국 엘리사가 부끄러워서 그 의견에 반대할 수 없었던 그런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었다. 쓸데 없이 애를 썼으나, 그 심부름꾼들은 non est inventus-그는 찾을 수 없다고 하는 답변을 가지고 돌아왔으며, 엘리사에게 그들의 우행을 진심으로 책망해 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내가 가지 말라고 이르지 않던가?" (18절) 결국 이 일로 인해서 그들은 다시 한 번 엘리사의 판단에 보다 기꺼이 복종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산과 골짜기를 가로질러 찾아 다니더라도 엘리야에게 이를 수 없다. 단지 때가 되면, 그의 거룩한 신앙과 열성을 모방하는 길만이 그에게 이르는 길이 될 것이다.
다시 먹게 된 우물물(열왕기 하 2:19-25)
엘리사가 엘리야보다는 더욱 많은 기적을 행했다는 의미에서 보면, 그는 영을 갑절이나 받은 셈이다. 어떤 사람들은 엘리사가 기적을 행한 수는 엘리야에 비해 꼭 두 배가 된다고 생각한다.
본문에는 두 가지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다. 즉 여리고에 자비를 베푼 기적과 벧엘에서 심판을 행한 기적이 그것이다(시 101:1).
Ⅰ. 여리고의 물이 축복을 받게 된다. 즉 그들의 물을 좋은 물로 바꿔 주었다. 여리고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또 그 성읍을 재건하는 자들의 자녀들이 죽는 희생을 치르고서 재건된 마을이다. 그러나 일단 건설되고 나자, 그 성읍을 철폐하라는 명령이 다시 내리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예언자들이나 백성들에게 거기에 거주하지 말라는 금지령도 내려지지 않았다. 물론 그 성읍을 재건한 자들은 악을 행했지만, 그 성읍에는 경건을 낳는 산실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어리석은 자들은 지혜로운 자들이 들어가 살 집을 짓는다는 속담이 그들에게 있었다. 바로 여기에서 보면, 죄인들의 재물이 의로운 자들의 거처를 마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리고에 가신 적이 있다(눅 19:).
이제 엘리사가 바로 그곳으로 온 것이다. 그는 예언자들의 생도들이 밀파한 정탐꾼들이 멀리에서 보고 들려 주는 것보다는 더 자세히 엘리야 승천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 줌으로서 그들을 안심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는 그 용사 50인들이 엘리야를 수색하는 동안 여기에 잠시 머물러 있었다.
1. 그 때 여리고 사람들이 와서 자기들의 고통을 말한 것이다(19절). 신실한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남의 일을 기꺼이 돌본다. 예언자들의 빛이 아직 잠시 우리에게 함께 있을 때 그들을 이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그들은 그 문제를 엘리야에게는 말하지 않았었다. 아마 엘리야는 엘리사보다 접근하기가 만만치 않았던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신학교의 감화를 받아 그 마을에도 개혁이 왔다고 볼 수 있다.그 마을의 지리적 형편은 쾌적하여 좋은 전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먹기에 좋은 물이나 식물을 생산해 낼 옥토가 없었다. 전망이 아무리 좋은들 이런 곳에서 무슨 낙이 있으랴? 물은 일반 자비이다. 물이 부족하거나 먹을 수 있는 물이 없을 때 당할 극심한 곤경을 생각하고 우리는 물로 인해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어떤 이는 여리고 땅 전체가 불모의 땅이고 물도 나쁜 지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지 일부만 그러한데, 바로 "거기에" 예언자 생도들의 숙소가 있었다는 것이며, 그들이 여기서는 "그 성 사람들" 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2. 그는 곧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었다. 예언자들은 자기들의 정신을 수양하기 위해서 적당한 곳을 찾으려고 노력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불모의 사람들을 옥토의 사람들로 만드는 일에 전념해야 하는 자들이다.엘리사는 그들이 물을 고쳐 줄 것이다. 그러나
(1) 그들은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가지고 엘리사에게 주어야 했다(20절). 소금이 물을 순화시키는 작용을 한다면, 그렇게 소량의 소금으로 무엇을 할 것이며, 왜 하필 새 그릇에 담긴 소금이라야 되겠는가? 그러나 도움을 받고자 하는 자들은 스스로 힘써야 하며, 신앙과 복종을 단련받아야 된다.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는 작용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어떤 기술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칙을 준수함으로써 가능해진다.
(2) 엘리사는 "물 근원으로 나아가" 서 소금을 던졌다. 그래서 물줄기와 그 기초를 치료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생활을 개혁하는 길은 곧 그들의 마음을 갱신시키는 것이다. "생명의 과실을 맺고자" 하는 자들은 이렇게 은총이라는 소금으로(자기 자신을) 간을 맞추어야 한다. "나무를 좋게 하면, 그 열매도 좋아지리라." 마음을 정결케 하라. 그리하면 손도 깨끗해지리라.
(3) 엘리사는 이 기적을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듯 가장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 물을 고쳤느니라" 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의 도구였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치유의 효험을 기꺼이 내어보내시고자 하신 그 통로에 불과했다.
그가 이렇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라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었으므로, 이후로는 그들이 그와 같은 서두로 시작되는 그의 견책과 충언과 명령을 더욱 기쁜 마음으로 좇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었다면,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통솔해야 될 것이다. 이후부터는 엘리사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하고 말하면, 그들에게 큰 능력이 나타나게 되었다.
(4) 그 치유의 효과는 영속적이었다. 잠시 잠깐의 일이 아니었다. "그 물이 고쳐져 오늘날까지 이르느니라" (22절)고 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영원토록 있으리라" (전 3:14).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령으로 "영혼(사람)을 치유하시면", "다시는 죽음이나 불모성이" 있지 아니하리라. 그 성질이 변경된다. 무용하고 악하던 것이 고마움을 알게 되고 쓸모가 있게 된다.
Ⅱ. 벧엘의 어린아이들에게 저주가 임한 기록이 있다. 그 저주는 실상 그들을 죽여 버렸다. 그 저주는 이유 없는 저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벧엘에도 예언자 학교가 하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엘리사가 그리고 갔다. 이것은 그의 처음 방문이었다. 아마 거기에 있던 생도들은 최대의 성의를 다하여 그를 환영했을 것이 틀림 없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를 비난했다. 여로보암의 송아지 상 하나가 벧엘에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자랑하며 좋아했고, 그것을 비난하는 자들을 미워했다.
율법이 이 경건한 학원 폐쇄의 권한을 그들에게 부여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언자들이 거리에 나오면 별명이나 기타 다른 이름을 부르면서 그들을 놀려대곤 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을 멸시하고 청년들로 그들에게 대해서 반감을 갖게 하기 위해서였으며, 가능하다면 그 예언자들을 마을에서 쫓아내도록 충동질하기 위해서 였다.
엘리사에게 욕을 퍼부은 것이 그런 짓의 첫 사례였다고 하면, 그렇게 지독한 벌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들을 조롱하는 것" 과 "예언자들을 학대하는 것" 은 하나님께 그 복수를 "부르짖는 이스라엘의 죄" 중 하나였다(대하 36:16 참조). 이에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그러한 죄의 실례를 보라. "벧엘의 아이들" 곧 거리에서 놀고 있던 소년 소녀들(아마 그들은 엘리사가 오는 것을 보고 그 마을로 내려 왔을 것이다.)이 엘리사를 만났다. 그들은 당연히 "호산나" 하면서 영접해야 했지만, 욕설로 맞이했다. 그들은 마치 엘리사가 바보인 양, 또는 그렇게 놀림을 받을 사람인 양, 생각하여 그 주위에 모여들어 그를 놀려대었다. 그들은 다른 때에도 여러 가지 농담으로 예언자들을 놀려대곤 했었는데, 엘리사를 이렇게 놀려댔다.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도대체 사람이 자연적으로 타고난 어떤 약점이나 기형을 가지고 비난을 한다는 것은 나쁜 일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다면,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사의 경우는 그렇지도 않았다. 대머리는 결국 흠이 될 수 없으며, 그들이 다른 이유를 품지 않았던들, 결코 그를 그런 식으로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이 비난한 것은 그가 예언자라는 이유 바로 그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러한 영예를 주셨다면, 그것은 그가 대머리라는 사실을 감싸주기에 넉넉하며, 그러한 비난을 막아 주기에도 넉넉함이 틀림 없다.
그 아이들은 "올라가라" 고 엘리사에게 말했다. 그것은 아마 엘리야의 승천을 비꼬는 말일 것이다 그들은 "너의 선생이 올라갔는데, 왜 너는 그를 좇아 올라가지 않았느냐? 불수레는 어디 있지? 너도 언젠가 없어지겠지?" 하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이 아이들은 배운대로 지껄인 것이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부모들에게서 그렇게 별명을 부르며 욕설을 퍼붓고, 특히 예언자들을 놀려대는 것을 배웠다. 말하자면, 이 아이들은 새끼 닭으로서 어미 닭이 울면 같이 우는 것이다. 아마 이 때 그들의 부모들이 그들을 그 곳으로 내어보냈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예언자들을 쫓아낼 심산으로 말이다.
2. 마침내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학대한 이스라엘 위에 내릴 폐망의 전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정당한 경고를 주려는 것이었다. 엘리사는 잠시 동안 그들의 조롱을 참고 들었다. 그러나 이윽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성의 불이, 그 계속되는 자극으로 인하여 그의 가슴에서 불타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돌이켜 저들을 보았다" 근엄하고 진지한 얼굴을 하면 행여나 그들을 누그러뜨릴 수 있거나 물러가게 할 수 있을까 해서였으며, 혹시 그 아이들의 얼굴에 어떤 순진한 표정이라도 있는지 확인하려 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은 "부끄러워하거나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엘리사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저주했다." 이것은 그들에게 앞으로 내릴 심판을 불러서 선포한 것이다. 자기 개인에게 가해진 일로 인하여 사적인 보복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로우신 입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가해진 치욕을 벌한 것이다.그의 저주는 즉각 실현되었다. 두 마리의 암곰(아마 자기 새끼들을 빼앗긴 곰들)이 근처의 숲에서 나와 아이들 42명을 현장에서 죽여 버렸다(24절).
(1) 이 사건에서 볼 때, 예언자 엘리사는 정당하다. 그는 거룩한 충동을 받아서 저주했기 때문이다. 그 저주가 어떤 나쁜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그 저주에 "아멘" (긍정)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는 그 두 마리의 곰을 그 아이들을 죽인 곰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들을 징계한 두 개의 채찍이라고 부르는게 더 마땅할 것 같다. 그는 이들이 얼마나 악질적인 독사의 자식들인지 알았고, 이렇게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괴롭히는 자들이 커서 어른이 되고 나면 그 예언자들에게 얼마나 악랄한 원수들이 될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이로써 그는 그들 부모들을 벌하고, 그 부모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도록 만들려 했던 것이다.
(2) 이 사건에서,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으로서 영광을 받으셔야 했다. 그는 죄를 미워하실 뿐만 아니라 그 죄를 헤아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비록 어린 아이들에게라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이 악의에 가득 찬 병아리들의 소름끼치는 비명을 듣는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공경하자. 아이들도 나쁜 말을 삼가게 하자. 하나님은 그들의 말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 정신이나 신체에 결함이 있는 자라고 하여 조롱하지 말자. 우리는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이나 사역자들을 놀리고, 그들의 선행을 비방하는 것은, 목숨에 위험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자녀들로 위안을 얻고자 하는 부모들은 그들을 잘 교육시키고, 그들의 마음 속에 깃들어 있는 어리석음을 몰아내기 위해 일찍부터 부모들의 최선을 다해야 한다. 홀(Hall)주교의 말과 같이, "교육을 소홀히 한 자녀들에게서 선을 기대한다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 돌보았더라면 예방할 수 있었을 불행을 당하여 탄식하는 것은 쓸데 없는 것" 이기 때문이다.
엘리사는 벧엘에 왔다. 자식들을 잃은 부모들의 보복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했을 뿐이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떠나 갈멜 산으로 갔다(25절). 아마 거기에 휴양과 명상에 적합한 예배 처소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 다음에는 사마리아로 돌아갔다. 그 곳은 예언자들이 모이는 공적 장소였다. 그는 거기에서 예언자들의 아버지(선생)로서 최상의 봉사를 할 수 있었으리라. 홀(Hall) 주교는 이 사실에서 이러한 사실을 주목했다. 즉 "항상 홀로 있거나, 또는 결코 홀로 있어 본 적이 없는 자는 유능한 예언자가 될 수 없다."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