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열왕기상 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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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벤하닷의 무례한 요청(열왕기 상 20:1-11)

다음 몇 가지를 살펴 보자.

Ⅰ. 벤하닷은 아합의 왕국을 습격하고, 왕도 사마리아를 에워쌌다(1절). 그러한 싸움의 원인은 알 수가 없다. 탐욕과 야망이 그 근본 원인이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구실도 붙일 필요가 없었다. 다윗은 그의 시대에 아람 사람들을 완전히 정복하여, 그들을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만들었으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한 까닭으로 해서, 아람 사람들은 다시금 그들에게 무서운 존재로 만드셨다. 아사는 아람인들을 유혹하여 이스라엘을 이미 침략케 한 바 있는데(15:18-20) 이제는 그들이 스스로 침략을 감행하게 되었다. 외국 군대를 자기 나라로 끌어 들이는 일은 위험한 일이다. 후손들이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벤하닷은 왕 32인을 그와 함께 있게 했다. 아마도 이 왕들은 그에게 조공을 바치는 자들이거나 부득이 그를 따라 다녀야 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와 공모했거나, 그를 도움으로써 어떤 이득이 있었기에 따라야 했을 것이다. 이 보잘 것 없는 통치자들이 생각했던 왕의 칭호란 얼마나 값싼 것이 되었는가!

Ⅱ. 두 왕 사이의 흥정을 보자. 분명히 이스라엘의 방어선이 그들을 떠난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아람인들이 그토록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최근에 세운 이스라엘 수도 사마리아로 전진해 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도시의 방비는 허술했고, 침략자의 수중에 쉽게 함락되게 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두 나라가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1. 벤하닷의 자만심은 아합에게 무례한 요구를 하게 된다(2, 3절). 강화의 나팔을 울리면서, 아마 나팔수가 성중에 들어가,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그 사실을 알렸을 것이다. 만일 아합이 벤하닷의 노예가 되고, 그가 가진 것 중에서 공물을 바칠 뿐 아니라 그의 칭호도 벤하닷에게 양도하고, 모든 것, 곧 그의 처들과 자녀들, 그들의 가장 좋은 것들을 벤하닷의 멋대로 한다는 조건에 승복하면, 포위를 풀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온 말투로 보다 그들을 성나게 하려는 뜻이 들어 있다. "모든 것을 예외없이 나의 것으로 삼으리라" 는 것이다.

2. 아합의 가엾은 마음은 벤하닷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알린다. 벤하닷이 의기양양하게 요구 조건을 내세우는 것에 비하여, 아합이 항복의 구체적 사항을 열거하지 못함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사실상은 그의 말과 같은 뜻이다. 즉 "나와 나의 것은 다 왕의 것이니다" 라고 한 것이다(4절). 죄의 효과를 살펴 보자.

(1) 그가 만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노하게 하고 그를 떠나지 않았던들, 벤하닷이 그토록 엄청난 요구를 그에게 할 수는 없었으리라. 죄는 우리 인간들을 신의 가호에서 벗어나게 하고, 처참한 곤경으로 몰아 넣는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지 않으면 우리의 적이 우리를 다스리리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 외에 모든 것에 대한 노예가 된다. 아합은 바알을 위해 은과 금을 준비했었다(호 2:8). 그런고로 금과 은을 그가 빼앗긴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렇게 재물을 돌리면 결국 몰수당하게 된다. 죄로 말미암아 그의 양심을 부정하게 하지 않았던들 그는 그토록 비겁한 항복은 하지 않았으리라. 죄를 범한다는 것은 사람을 낙심케 하고 비겁자로 만든다. 바알이 그를 도와 줄 수 없음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리라고 믿을 아무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어떤 조건에서든지 자기 생명을 팔아 치우는 데 만족하였던 것이다. 목숨과 목숨을 맞바꾸었다. 즉 그에게 가장 귀중한 모든 것을 버렸다. 왕자로서 죽느니 보다 차라리 거지가 되어도 생명만은 부지하려 든 것이다.

3. 벤하닷의 오만함은 아합의 항복에 때 맞추어 커지고, 거만함과 건방짐이 더욱 커졌다(5, 6절). 아합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벤하닷의 처분에 맡기고, 왕이니까 서로 잘 봐 주리라고 기대했다. 다시 말하면 벤하닷이 차지한 통치권을 인지(認知)하는 것으로 그가 만족하게 느끼리라 믿었다. 그리고 벤하닷이 얻은 명예는 당분간 그를 충족시켰다. 그리고 그가 만일 어떤 명분을 내세울 수 있게 되면 그 권력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Satis est prostrasse leoni-즉 사자는 먹이를 넘어뜨려 깔고 앉아도 만족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가 통하지 않게 되었다.

(1) 벤하닷은 자만심과 탐욕에 가득 차 있어 아합의 재산과 영토를 전부 점유하지 않는 한 떠날 수가 없었다. 그는 영토와 재산이 단지 그의 것이라고 불리우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하며, 직접 자기 수중에 넣어야 만족하는 자였다. 벤하닷은 아합이 그 자신의 물품들을 하루라도 더 쓰도록 빌려 주는 일도 하려 하지 않았다.

(2) 벤하닷은 거만하고 간악했다. 벤하닷 자신이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기 위해 직접 왔었더라도, 다소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자를 보내어 아합을 모욕하고 허세를 부리며 궁전을 샅샅이 뒤지고, 모든 장신구들을 뺏고 떼어버리는 것이었다. 아니, 아합에게 더 많은 원통함을 주기 위해 벤하닷의 사자들은 자기들이 기뻐할 만한 것뿐만 아니라, 아합이 특히 좋아하는 사람이나 재물이 있으면 그것들을 모조리 약탈해 오도록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무릇 네 눈이 기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져가리라." 우리는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에 방해물이 끼어 들 때가 있다. 가장 귀한 것이 가장 안전하지 못함을 말해 주는 것이리라.

(3) 벤하닷은 분별없고 부정한 자로서 아합의 항복은 아합의 모든 백성들의 항복으로도 해석하고, 자기 마음내키는 대로 내 맡긴 것으로 생각했다. "저희가 네 집 뿐만 아니라 네 신복의 집들도 수탐하며, 마음대로 약탈하리라." 하나님이여, 평화와 재물을 인하여, 더욱이 우리가 소유하는 그것들을 우리의 것이라 칭할 수 있음을 감사하나이다.

4. 벤하닷의 거만함이 이렇게 갈수록 커지자, 아합의 연약한 기백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비록 대담하지는 못했어도, 목숨을 건 저항을 하게 되었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기 보다는 오히려 목숨을 걸고 싸우려 했다.

(1) 아합은 이제 자기의 자문관들의 조언을 듣는다. 그들은 아합왕이 끝까지 버티기를 건의했었다. 그러나 아합왕은 힘없이 말하고(7절), 자문관들에게 벤하닷은 분별없는 적군이 아니며, 재해를 불러 일으키려는 것은 아니라고 호소한다. 하등의 도발을 하지 않았는데도 아합의 나라를 침범하고 그 수도를 강점한 벤하닷에게, 아합은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아합은 자문관들에게, 벤하닷이 이전에 자기에게 얼마나 강했던가를 말하면서, 이러한 난경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좋은 의견을 말하도록 한다. 그래서 담대히 말한다.(" 왕은 듣지도 말고 허락지도 마소서" 8절). 그들은 자기들은 왕의 편에 서서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2) 그러나 아합왕은 벤하닷을 거부하는 데도 매우 온건했다(9절). 아합은 이스라엘에 대한 벤하닷의 통치력을 승인하는 것이다. 너희는 "내 주 왕께 고하기를, 나는 태연히 맞설 의도가 없으며 이미 작정한 항복을 철회하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처음에 제공한 것은 내가 다 그대로 하려니와 이것만은 내가 할 수 없도다. 나의 것이 아닌 것은 내가 줄 수가 없도다 라고 하라" 는 것이다. 아합이 이렇게 비굴하게 요구를 거부했어도 벤하닷은 울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표현 방법으로 미루어 본다면, 아합이 이 정도로나마 대담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백성들이 그에게 활력을 주었기 때문이다.

5. 벤하닷은 사마리아를 파멸시키겠노라고 맹세한다. 폭풍우 같은 그의 분노가 저지를 받자 온통 소란해졌다. 벤하닷은 분노하여서, 자기의 신들의 무기력한 복수를 기원한다. "사마리아의 티끌이 나의 군대의 손에 가득 태워지기를!" (10절) 그는 엄청나게 많으면서 결심이 굳은 자기의 군대를 이끌고 사마리아로 침공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성공을 자신하고 있다. 그것은 티끌을 한주먹 가져가는 것처럼 쉬운 일일 것으로 본 것이다. 모든 것이 약탈될 것이고 심지어 사마리아 도시가 서 있는 땅덩이조차도 모두 가져 가리라는 것이다. 그의 자부심은 그렇게 드세듯, 그의 적의는 지극히 잔인했다. 비록 이스라엘 왕과 그 백성들은 벤하닷의 멸망을 보고 만족해야 할 자격은 없었지만, 이것은 그에게 멸망을 예비하고 있었다.

6. 아합은 벤하닷의 장담에 대해 점잖게 비난하고 그의 협박에 감히 반항을 하지 않으며 다만 싸움의 불확실한 결과만 걱정했다(11절). "그로 하여금 싸움을 시작하게 하지 말며, 칼을 차고 갑옷을 두르고 승리에 도취되지 않게 하여라. 마치 갑옷을 벗은 자처럼, 갑옷을 생각지 말게 하라. 그리고 전승자가 되어 돌아오게 하지 말라." 이것은 아합의 말 가운데 가장 지혜있는 말이고, 우리 모두에게 좋은 조목인 것이다. 어떤 앞날을 미리 자랑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하는 까닭에서다(잠 27:1). 특히 싸움하는 어떤 날을 자랑함은 어리석으니 그것은 싸움의 결과가 우리에게 유리해지리라고 믿었던 만큼 불리해질 수 있고, 적을 무시하는 것은 좋은 정책이 못되며, 승리를 지나치게 확신하는 것도 패배에 이르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이 논리를 우리의 심령상의 갈등에 적용해 보기로 하자. 베드로는 그의 자신감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동안 우리는 갑옷을 준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마치 우리가 싸움에 이겨 갑옷을 벗는 것처럼 결코 자랑을 해서는 안 된다. "항상 두려움을 갖는 자는 행복" 하며,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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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하닷의 패배(열왕기 상 20:12-21)

공격군과 농성군 사이에 맺어진 조약이 갑자기 파기되었으므로, 곧 발생한 전쟁과 그 결과를 살펴 보기로 하자.

Ⅰ. 아람 사람, 즉 침략자들은 술에 취한 왕으로부터 명령을 받았는데, 왕은 술잔을 든 채 명령을 내렸다. 또한 그는 "술을 마시면서" (12절), "장막에서, 대낮에 부하 왕들과 더불어 마시고 있었다" (16절). 술에 취함은 그의 백성들과 군인들이 옛부터 깊이 빠졌던 죄였다. 이 점에 관해서, 즉 옛날은 현대보다 술에 만취될 수 있었으니 좋은 시절이었다고 말하지 말라.

자기 스스로를 과신하지 않았으면, 그는 술도 마시지 않았을 것이며, 술에 만취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방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방심과 관능은 옛 세상(홍수 이전 시대)과 소돔에는 병존했었다(눅 17:26). 벤하닷이 술취한 것은 벨사살왕의 경우와 같이 멸망의 전조였다(단 5장). 벤하닷왕을 위하여 각기 맡은 직위에서 싸워야 할 왕들이 술을 마시고, 업무보다는 유흥에 빠졌으니 어떻게 성공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음주를 하면서 벤하닷은 어떻게 행하였는가 보기로 하자.

1. 사마리아를 포위하라고 명령하고, 모든 병기들을 준비시켜, 전면 공격이 가능하도록 준비시킨다(12절). 그러나 술 마시는 통에 이러한 지시가 실시되는가를 보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오! 슬프도다. 너희들의 왕이 이토록 어린 아이같은지고!"

2. 갇혔던 자들의 역습이 시작되자(그 때쯤에는 그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가 되었으며) 모든 적군을 살해하는 편이 쉬웠을 터인데, 살해하지 말고 사로잡으라는 명령을 하달했고, 이 기회에 그들은 오히려 침략군을 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맹약을 새로이 하고 평화를 갈구하여 나온 자들을 사로잡으라는 그의 명령이 얼마나 불법이며 경망스러웠는가. 이리하여 항상 그러듯이 그는 술을 마시고 법률을 망각하며 정책이나 전쟁의 응보(應報)를 잊어버리게 되었다.

Ⅱ. 이에 반하여 갇혔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영감을 받은 한 선지자로부터 지시를 받았다. 그런데 아합은 이 선지자를 미워한 나머지 박해했다. "이스라엘의 왕 앞에 나아가는, 선지자 한 사람을 보라." 13절은 이렇게 읽을 수 있다.

1. 여호와께서 아합과 같은 사악한 왕에게 선지자를 통해서 친절하고 고마운 말씀을 보내심을 보라. 그러나 그것은

(1) 비록 타락했지만, 하나님은 자기의 친구인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야곱이 선택한 바요, 성약(聖約)의 자손이며, 아직은 완전히 버림받지 않았던 자기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서 이렇게 하신 것이다.

(2) 여호와의 자비심을 넓혀 간악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자에게 선(善)을 베품으로써, 그들을 참회하도록 하거나 도저히 더 이상 용서할 수 없게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3) 벤하닷의 자만심을 억제하고 그의 거만함을 누르기 위함이었다. 아합의 우상 숭배는 이후에 처벌되지만 벤하닷의 거만함은 당장 징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거부하시며, 신명기 32장 26, 27절처럼 "그가 대적의 분노를 두려워 한다" 고 말하기를 즐기시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에는 아마도 단 한 사람의 선지자가 있었고, 그가 메시지를 가지고 다가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사마리아에 접근할 수 없었던 처지였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번영을 누렸다면 아합은 이 선지자를 보기조차 싫어했을 것인데, 아세라의 어떤 선지자도 그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그런 때에 이 선지자를 환영하게 된 것이다. 아합은 하나님의 예언을 물어보지도 않았으나, 여호와께서는 선지자를 아합에게 보내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비롭게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2. 선지자가 행한 두 가지 일은 다음과 같다.

(1) 아합에게 승리의 확신을 주어 활력을 갖게 했다. 이것은 비록 아합을 따르기는 했지만 이스라엘의 장로들 전체가 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일이었다(8절). 이 선지자는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으나(왜냐하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므로"), 아합에게 말하기를 바로 이날 포위 공격이 풀릴 것이고, 아람인들은 패주하리라고 한다(13절). 선지자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도다" 라고 말했을 때, 아합는 아마도 격노(激怒)의 말씀인 줄 알고 공포에 떨었으리라. 그러나 말씀의 내용이 자비로움을 알고, 그는 회생되었다. 그리고 이 축복스런 싸움의 역전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그 방법에 대해 말씀을 듣게 된다. "너는 내가 만날의 왕인 여호와인 줄을 알지어다." 잘되어 질 것 같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그것이 이루어질 때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일이었음이 입증된다.

(2) 이 승리를 얻은 데 대하여 대처할 일을 선지자는 아합에게 교시한다.

[1] 벤하닷의 무리가 공격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역습하여 참호 속의 적을 기습하라.

[2]참전할 인원은 "각 도의 방백의 소년들." 즉 전쟁에 대해서는 익숙하지 못하며 숫자적으로는 겨우 232명에 불과한 종들이요 보병들로 곧 하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대담한 기도(企圖)를 실천해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는 그런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 빈약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지혜있고 강력한 적을 분쇄하는 도구가 되어 공격을 감행해야 한다. 즉, 벤하닷의 교만함이 처벌되는 동안 아합의 교만은 사전에 예방되고, "권능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나타나게 된다."

[3] 아합은 자신이 여호와의 말씀을 믿고 있음을 증명해야 하므로, 이성의 눈으로 보건대는 가장 위험한 환경이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해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 은혜를 입은 자들은 그 약속들을 믿고 나아감이 타당한 일이다.

[4] 그러나, 소년들이 어려운 일을 해치고 나면, 여세를 몰기 위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다른 병력들을 활용하는 것은 아합에게 허용된다. 사마리아 내에서 그리고 부르면 들릴 가까운 곳에서 소집한 병력은 단지 7천 명이었다(15절). 비록 사람은 다르지만 이 숫자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던" 숫자와 같은 것에 주목해야 한다(19:18).

Ⅲ. 싸움의 결과는 자명한 것이었다. 교만했던 아람 사람들이 패배되고, 무시를 당해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승리를 구가하였다. 젊은 소년들은, 적은 수의 병력의 지원을 받으면서, 정오에 아람 사람들에게 경보를 발했다(16절). 그러나 견줄 데 없는 용감성과 기민함으로 소년들이 벤하닷의 군인들을 모두 쳐 죽이고 교란시키자, 처음에는 소년들을 무시했던 벤하닷은 싸울 생각은 않고 술에 취한 채 말을 타고 도망을 쳤다(20절). "여호와께서 지상의 왕들의 기백을 빼앗아버리시며,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을 보자. 벤하닷이 아합에게 요구했던 금과 은은 어디 있는가? 손에 가득하리라 하던 사마리아의 티끌은 어디 있는가? 가장 안심하고 있는 자들이 일반적으로 가장 용기가 없는 자일 수가 많다. 아합은 이 유리한 점을 이용함에 실패하였으나, "많은 아람 사람들을 살육했다" (21절). 여호와께서는 이따금 사악한 자들을 다른 사람의 채찍으로 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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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하닷의 두 번째 패배(열왕기 상 20:22-30)

여기서 우리는 아합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전번 싸움에서 보다 더 큰 승리를 거두는 성공담을 볼 수가 있다. 아합이 우상 숭배자임에도 싸움의 승리자이요, 박해자이면서 정복자인 것이니 이상한 일이다. 하나님이 사악한 자가 번영을 누리게 허락하시는 데는 거룩한 지혜와 목적이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신다.

Ⅰ. 아합은 선지자의 권고로 또 다른 싸움에 대비한다(22절). 이제 그는 안심하고 있었고, 자기 앞에는 큰 난관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자신의 영혼을 소홀히 하는 자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소홀해지는 법이다. 그러나 선지자는(하나님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아람 사람들의 계획을 알려 주신다) 해가 바뀔 무렵이면 벤하닷이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하고 그들이 입었던 타격을 복수하고자 새로운 기도를 세우게 되리라는 것을 아합에게 가르쳐 준다. 선지자는 아합이 힘을 기르고 방어 태세를 갖추어 강한 저항을 하도록 분부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결과에 대해서 선언하였다. 그러나 아합이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된다. "너의 힘을 기르고 준비하라. 하나님이 도움을 주시며 저를 튼튼히 할 것이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항하는 적은 원한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며 가끔 그들 스스로 휴식을 취하지만 교회에 대하여 위협과 학살을 감행할 뜻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영적인 적으로부터 공격이 있으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이에 대하여 주의하며, 항상 대처해야 한다.

Ⅱ. 벤하닷은 다음에 있을 싸움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건의를 듣는다.

1. 그들은 "싸움터를 바꾸라" 고 건의한다. 그들은 지난번 싸움에서 그들을 패배시킨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때문이라고 간주한 것이다(당시에는 이렇듯 보이지 않는 권세에 대한 신뢰가 깊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를 지극히 어리석게 말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한 분이며 이름도 하나인데, 여호와 하나님은 "많은" 분이 계시고,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모든 세계의 지배자인 데도 "이스라엘 민족만의" 하나님이고 이스라엘 국가에 특유한 작은 지역만의 하나님이며 그들의 예언자 다윗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시편 121:1)라고 말했다 해서 여호와를 "산의" 신 일 뿐이라 했다. 그러나 다윗은 "그 기초가 성산에 있음이여" (시편 78:54; 87:1)라고 말했고, "그의 성산" 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한다(시 15:1; 24:3). 이처럼 여호와를 아람 사람들이 상상하는 대로의 신이라고 치고 그들은 여호와께서 성산에만 거하시고 그곳에서 내려 오시지도 않고 오실 수도 없으리라 믿으며, 그러기에 평지에 군대는 여호와의 눈 아래 쪽에서 인지되어 보호를 받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방인이 상상" 이 터무니없고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들이 초라하게 음울" 해지고 그들이 "매우 현명하다고 예언하지만," 그들은 "바보가 되는 것이다."

2. 그들은 벤하닷에게 장관들을 바꾸고(24, 25절), 타고난 지휘관들인 왕들을 제거하고 대신 겉만 번드르르한 왕들보다 전쟁에 익숙하며 전쟁만을 철저히 수행하는 오직 공적을 인정받는 장교들을 활용할 것을 건의한다. 모든 아람 백성은 각자 마다의 여건하에서 익숙해진 분야에서 그리고 적재 적소에서 싸우도록 활용되어야 한다. 아람은 부하고 인구가 많아서, 그토록 크게 패배했음에도 말을 말로 전차는 전차로 보충을 충분히 해 낼 수가 있었다.

Ⅲ. 양쪽 군대가 평지에 진을 친다. 벤하닷은 아람 사람들과 더불어 아셀 지파의 아벡 근처에 진을 친다. 아셀 지파의 땅은 아마 벤하닷 부친이 빼앗었던(34절) 곳으로서, 그가 소유하던 도성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땅 주위는 평평하여서, 그의 목적하는 바에 합당하였다(26절). 아합도 그의 군졸과 함께 얼마간의 거리를 띄우고 대치했다 (27절). 양군의 숫자상의 불균형은 현저하였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2개 대대로 배치되었고, "마치 어린애들이 두 개의 무리로" 모여 있듯이 보였고, 숫자도 적으려니와, 장비도 허술하여 외관(外觀)이 초라했다. 그러나 "아람인들" 은 숫자와 소리, 전차, 수송차, 짐들로 온통 "그 땅에 가득하였다."

Ⅳ. 아람의 유리한 점이나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아합은 용솟음치는 가운데 싸움을 전개한다.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와서, 이 많 군대를 모두 "네 손에 붙이리라" 고(28절)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 왕을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합을 위해 이와 같이 할 만큼 아합이 가치 있는 왕이 아니라는 것은 그가 알아야 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하심은 아합이 하나님을 찬양했거나 기도한 때문이 아니라(이스라엘 왕이 그렇게 했다는 기록은 없다) 아람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은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고 말했기 때문이다. 고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옹호하시어 그의 이름의 영예를 유지하시는 것이다. 만약 아람인들이, "아합과 그의 백성들은 그들의 하나님을 망각하였으니, 하나님의 보호를 벗어났도다. 그러니 우리가 그들을 쳐부수리다" 라고 말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이스라엘을 멸하셔 아람 사람들에게 굴복케 하였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과 하늘과 땅, 계곡과 산의 만군의 주님이신 그 영예와 전능하심을 그토록 무시 했으니, 그들의 자부심과 자신감의 근원이었던 군대를 모두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러한 잘못을 깨닫게 되리라.

Ⅴ. 서로의 군대가 칠일 동안을 대전하고서(아마 아람인들은 기고만장 했을 것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겠지만) 이스라엘 사람의 칼에 살육당한 아람인의 숫자는 10만이 되고(29절), 강고하게 방어된 도시 아벡의 성벽 밑에 있으면 안전하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네들을 보호해 주리라 기대했던 성벽에서 파멸했다(아벡 도시의 성벽에서는 활쏘는 자들이 적을 괴롭힐 수도 있었다. 삼하 11:24). 아마 지진으로 성벽이 그들 위에 무너지고 가나안의 도성들은 하늘 높이 싸여져, 그들은 모두 죽거나 다치거나 놀랐을 것이다. 자기의 도성 아벡이 정복자들을 막아내리라고 믿었던 벤하닷은, 그 도성의 성벽이 이렇게 무너졌고 그의 군대의 자존자들도 사기가 저하되고 분산되자, 그의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 비밀히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추적자를 피해 "골방" 에 들어갔다. 비할 데 없이 큰 자신감도 이따금 최대의 비겁으로 끝나게 됨을 기억하자. "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계곡의 하나님인가 아닌가?" 이제 벤하닷은 "자기를 숨기기 위해 골방에 들어가야" 함을 알라(왕상 22:25).

 

20:23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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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1

아합의 어리석은 자비(열왕기 상 20:31-43)

본 장에서는 이스라엘이 아람에게 거둔 승리 이후에 일어났던 일들이 설명되어 있다.

Ⅰ. 벤하닷의 비겁하고 비열한 항복을 보자. 골방 속에서조차 그는 무서워하여, 아무도 쫓지 않는데도 할 수만 있으면 더 도망하려고 한다. 그의 부하들은 벤하닷과 부하들 스스로가 극도로 위축이 되어 있음을 보고, 항복하여 스스로 포로가 되고, 아합왕에게 자기들의 목숨을 구해 달라고 탄원하자고 권유한다(31절). 벤하닷의 부하들이 그들의 목숨을 내맡겨 먼저 나서게 되면 그들의 독촉 때문에 벤하닷 왕도 따르리라. 그들이 이러한 방도를 권유함은 이스라엘 왕이 어떤 주변 나라보다 인자스럽다는 평판 때문에서였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자비로우시며 그 백성들에게도 탄압적이 아니며" (그 당시 이스라엘 정부가 가장 선하고 유했다), "이스라엘의 적일지라도 자비를 구하면 잔인하게 대하지 않는다 하옵니다." 이스라엘 왕들에 대하여 그들이 이러한 생각을 가졌던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의 이름이 "자비심이 많으니라" 고 선언한 것을 들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이스라엘 왕들이 그 하나님의 모범을 따를 것이라고 결론지었던 것이다. 모든 이스라엘인들이 "자비를 베풀 듯" 자비로 옷 입고 있었다는 듯이 여겨졌다는 것은 이스라엘 왕들에게는 하나의 영예로운 일이었다. "그들은 자비심 많은 왕들이다. 따라서 우리의 항복에 어떤 자비의 혜택이 있을지 모른다" 고 생각했다. 가엾은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겸비해지고 회개하기 위해서는 이런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듣지 않았는가? 그러한 자비스러운 분임을 우리가 보지 않았던가?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을 찢고, 그에게로 돌아가라" (욜 2:13).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가운데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이해하는 데서 흐르는 복음주의적 참회이다. 즉 "하나님에게는 용서함이 있도다."

벤하닷의 부하가 아합에게 설명한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그들의 왕 벤하닷은 참회자가 되었다. 그들은 마치 아합의 나라를 침범하여 그 나라의 안온함을 깨뜨려 죽을 죄를 지었으니 죽어 마땅하다는 듯, 조객처럼 "굵은 베로 허리를 묶었다." 여기에서 보면 저들은 잘못을 회개하려고 그들이 상처를 입혔던 아합 왕의 발 앞에 부복했다. 못된 짓을 한 자는 그 짓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 회개하는 체하고, 반면 그 짓이 성공하게 되면 이를 정당화시키고 자랑한다.

2. 벤하닷 왕은 자기 목숨을 애원하는 걸인이 되었다. "왕의 종 벤하닷이 말하기를 나의 생활을 살려 주옵소서(32절). 비록 나의 조국을 떠나 영구적인 망명생활을 할지라도 어떤 조건하에서이건 나를 살게만 하소서."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1) 그의 처지에서의 변화. 권력과 부귀에서 망신(亡身)과 고통의 구렁텅이로, 그리고 온갖 빈곤과 심신의 고통과 노예 상태로 빠져들다니! 인간사의 불확실성을 유의하라. 인간사란 수레바퀴의 살처럼 최상에서 쉽사리 최하로 바꾸어지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2) 그의 성질의 변화. 본 장의 서두에서 나타난 벤하닷은 허세를 부리고 욕을 잘하며 공갈을 하며, 도저히 수락 못할 요구를 하던 그런 자였다. 그러나 이제는 움츠려 들어 흐느껴 울며, 최하의 요구를 하게 되었다. 지금껏 유린해 온 자 앞에서 목숨의 부지를 위해 비열하게 매달리고 있다! 번영을 만끽할 때 거만해지는 자는 흔히 역경에 부딛치면 가장 비열해지는 법이다. 평범한 마음을 가진 자는 번영의 때에나 역경의 때에나 꼭 같으니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멸시하시며, 티끌 속에 묻어버리심" 으로써(욥 11:11-13) 자신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을 주목하자.

Ⅱ. 아합은 벤하닷의 항복을 어리석게도 수락했다. 이제 갑작스럽게 그와 맺은 동맹을 살펴보자. 몹시 두려워했던 벤하닷이 비위를 맞추어 오는 바람에 아합은 교만해지며, 매우 온유하게 그의 안부를 묻는다. "아직도 그가 살아있느냐? 그는 나의 형제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피를 나눈 자는 아니나 형제 왕이로다. 아합은 그의 신앙보다는 오히려 왕권이나 그에 부수적인 것을 더 중요시했다. "벤하닷이 당신의 형제란 말인가 아합 왕이요? 벤하닷이 그토록 야만스러운 전언을 그대에게 보낼 때에도 이런 말을 사용했었는가?(5, 6절). 벤하닷이 정복자가 되었다면 과연 그가 당시 아합을 자기의 형제라고 불렀을 것인가? 벤하닷이 최악의 곤경에 처하게 되지 않았다면 아합 앞에서 과연 당신의 종이라고 자신을 불렀겠는가? 억지이며 위조된 항복에 속아 넘어갔을 때 그대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형제라는 이 말을 듣고(33절), 그들은 벤하닷을 보고 아합왕에게 가라고 격려했다. 아합은 자기가 "형제" 라고 부른 자를 살려줄 것이다. 참회자들이여, 하나님께서 그대들을 사랑하는 "자식들" 이라고 말씀하시니(렘 31:20), "아버지" 라고 반향을 올리라.

벤하닷은 항복을 했지만 명예롭게도 병거에 실리워지고(아합이 "벤하닷을 병거에 실었다"), 또 한 친구처럼 대접받았다(34절). 아합은 하나님의 선지자나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아무 의논도 없이 자기 스스로 무엇을 강조할 것인가를 생각지도 않고, "벤하닷과 약조를 했다." 그런데 마치 벤하닷이 정복하자 된 듯이 아합에게 조건들을 제시한다. 승승장구한 아합의 마음대로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는 때이니, 아합은 벤하닷이 소유했던 몇 개의 도시를 요구할 수도 있을 터인데도, 그는 자기네 도시가 반환된 것에만 만족한다. 아합은 자기 나라의 부강을 보충하기 위해 다메섹의 상점, 보물, 창고 들을 요구 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는 자기들이 비용을 들여 다메섹에다 이점이 아니라 명예로 도로를 만들어졌다는 것으로만 만족했다. 이것은 아무런 권력 행사도 할 수 없는 아람의 왕들이 사마리아에서 누릴 수 있었던 것과 동일한 정도의 것이었다. 이 조약을 하고서, 아합은 벤하닷을 보냈다. 아합은 벤하닷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가한 모독적이었던 언사에 대해 일언반구도 책망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그 자신도 하나님의 영예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성공이 잘못 주어지는 때도 있음을 명심하라. 이스라엘이야말로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성공이 하나님과 자기들의 후손과 자기들 스스로의 참된 이익에 이바지하도록 하는 법을 모르는 자들이었다. "사악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은총을 주어도, 의를 깨닫지 못한다."

Ⅲ. 아합이 벤하닷에게 준 동정에 대한 책망을 살펴보자. 어떤 선지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책망을 가했다. 유태인은 이 선지자가 미가야라고 한다. 그런데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아합은 미가야 선지자를 "항상 자기에게 악을 예언한다" 고 불평했기 때문이다(22:8). 이 선지자는 나산과 드고아의 부인이 다윗에게 한 것처럼 아합이 스스로 정죄할 수밖에 없도록 하기 위해 비유로서 아합을 비난코자 하였다. 그리고 비유를 더욱 호소력 있게 보이기 위해, 선지자는 스스로 부상병으로 꾸미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1. 다소 어려운 일이었으나, 선지자는 스스로를 부상시키게 된다. 어려웠다는 것은 아무도 자기 손으로 부상을 입히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선지자는 자기의 "동료" 선지자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를 세게 때리라고 한다(35절). 그러나 별로 의욕적으로 자기를 때리려 하지 않는 것을 알게 된다. 그의 동료 선지자는 때리기를 거부한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선지자를 때릴 수 있을지언정 선지자 사이에 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가 때리기를 거부한 것은 좋은 정신에서 비롯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꼭 때려야 한다면 다른 사람이 때리도록 하라. 나는 안되겠다. 나는 친구를 때려야 한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라는 원칙을 말함이다. 마음이 선량한 사람은 타인을 때리기보다는 도리어 맞지 않는 구타라도 더욱 쉽게 맞아 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확한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그 선지자 동료는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안했던 또 다른 선지자처럼(왕상 13:24) "사자에게 물려 죽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도전적인 불복종에 대해서 뿐 아니라 아합에게(아마 알고 있었겠지만) 선한 선지자도 하나님께서 "때리라고" 말씀하였을 때 친구 선지자를 때리지 않다가 이처럼 처벌을 받게 되니, 하나님께서, "때리라" 고 말씀하셨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적을 때리지 않는 사악한 왕은 더욱 심한 처벌을 받아 마땅한 것임을 암시하려는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하나님보다도 더 공정하고 결백하며 자비심이 많다는 듯이 자기를 가장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이 자비로우실 때에 자비를 베풀어야지, 달리해서는 안 된다. 다음에 만난 사람은 이 선지자를 여지없이 때렸다. 이렇게 하여 그 선지자는 "상하게 되었다" (37절). 아마 얼굴에 구타를 당해서 피가 나왔을 것이다.

2. 선지자가 얻어 맞은 후 재(灰)를 가지고 위장하여 자기가 선지자임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벤하닷을 살려 준 일이 범죄가 된다하여 아합왕을 비난하는 얘기를 하고 아합왕의 판단이 있기를 기대했다. 얘기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전장에서 붙잡은 포로 한 명을 어떤 사람의 감시 하에 두게 된다(어떤 고급 장관의 권한 하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감시할 때의 조건은 "만약 이 포로를 놓치면 지키는 자의 생명과 바꾸리라" (39절)였다는 것이었다.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포로가 도망을 쳤다. 포로를 놓치면 목숨을 빼앗겠다고 말한 그의 상급자의 지시를 무시한 이 사람을 아합왕은 놓아 주겠는가 하는 것이다.

아합왕은 "천만에 그런 책임을 맡지 않았었거나, 혹은 더욱 충실하고 주의하였어야 옳았을 것이며(법 대로 해야 한다) 약속을 이행 안했으니 그대로 당해야 하며 구제란 있을 수 없노라. 그대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한다" 고 말했다. 선지자가 위장한 것을 벗기고 아합에게 자기가 선지자임을 보여 주고(41절), "그대가 그 사람이로다. 그것이 나의 운명인가? 아니다 네 것이로다. 그대가 스스로 결정 한 것이다. 당신 입으로 판단하였도다" 라고 분명히 말했다. 총사령관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긍지와 섭리로서 그대의 손에 벤하닷을 파멸하도록 하였는데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의로 그리고 자진해서 하나님을 깨끗이 잊어버렸고, 하나님의 신임을 배반했으며, 그대의 승리의 목적을 잃었도다. 그대가 구조했던 바로 "그 사람의 목숨과 그대의 목숨을 바꾸는 것 이외에는 기대할 것이 없도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22:35). "그리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으로 대신하리라" 고 하였다 그후에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왕하 10:32, 33). 그들의 다른 죄악이 그들을 비천하게 만들었을 때, 이 사건도 심판을 받았다. "자기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속여서 하는 것" 이 되는 그런 때가 있다(렘 48:10). 어리석은 동정은 도성을 붕괴한다.

3. 이 비난에 아합이 몹시 분개하는 것을 본다. "아합은 근심하고 답답하여 그 궁으로 돌아가지만" (43절), 진실로 참회하는 것이 아니며, 실수한 바를 원상태로 하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선지자에 대해 격노하고 하나님에 대해 분격하며(마치 아합에게 선고된 형이 너무 가혹한 것처럼) 자신이 안절부절 못하고, 승리에도 불구하고 모든 웃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은 그 섭리로 한 왕의 긍지를 견제하셨고, 말씀으로 또 하나의 왕의 승리에 실망을 안겨 주셨다. "그런 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시 2: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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