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선 엘리야(열왕기 상 19:1-8)
대부분 이런 상상을 할 것이다. 즉 그 백성이 이제 하나님의 영광이 그처럼 공개적이면서도 현명하게 나타난 것을 보았고, 엘리야와 바알 사이의 투쟁의 그처럼 분명한 결말을 보았고, 그것이 엘리야에게는 영예가, 바알의 예언자들에게 당황이, 그리고 백성들에게는 보편적인 만족이 돌아가게 되었고-또 그들은 엘리야의 기도가 하늘에서 불과 물을 모두 내려오게 하는 것을 체험했고, 더구나 그 두 가지는 모두 그들에게 자비를 베푼 것이니, 불은 그들의 제물을 받아들이신 것을 뜻하고, 물은 "그들의 유업이 곤핍할 때에 새 기운을 주시는" 것임을 목격했기 때문에-흔히 어느 누구라도 이제는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회심하고, 엘리야를 자기들의 지도자로, 하나님의 사자로 삼아, 그 후로는 그가 총리대신이 되어 그의 명령이 임금이나 나라 법과도 같이 되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그와는 정반대여서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신 그를 멸시하여, 그를 존중히 여기지 아니하고 돌보지도 아니할 뿐만 아니라, 아무 소용도 닿지 않게 하였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이스라엘 땅에는 큰 축복임에 틀림 없는 그가, 이제는 구박을 받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1. 아합은 이세벨을 부추겨 엘리야에게 몹시 성을 내게 하였다. 생각건대, 이세벨은 국왕이 아내이지만 사실은 섭정을 하는 여왕이었을 것이다. 마치 후일 황태후가 되었을 때 오만한 여인이 되어 국왕과 그 왕국을 조정하여 마음대로 하였던 때와 같았을 것이다. 아합의 양심으로는 엘리야를 핍박하려고 하지 않았으리라(누군가가 그가 이스라엘 사람의 혈통과 정신을 이어받고 있는 자임을 상기시켜 주어서, 그것이 그의 행동의 자유를 억제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세벨에게 엘리야가 행한 모든 것을 알려 주었다(1절). 그것은 그녀를 납득시킨 것이 아니라, 단지 격노케 하였을 뿐이다. 아합은 "하나님" 께서 역사하신 바를 이야기 하지 아니하고, 마치 어떠한 주문이나 마력으로 엘리야가 하늘로부터 불을 가져왔으므로 하나님의 역사는 그 가운데 작용하지 아니한 양, "엘리야" 가 행한 바를 알려 주었다. 더욱이 그는 마치 그녀가 엘리야에게 노하기를 바라기라도 한 듯, 엘리야가 예언자들을 살해하였다는 식으로 말했다. 아합은 어느 누구도 그 이름에 합당한 자가 없다는 듯이, 바알의 예언자들을 "그 예언(선지)자들" 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의 마음은 그들 편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살해한 것을 엘리야의 범죄라고 악화시켰다. 그것은 이세벨이 여호와의 예언자들을 살해한 보복이라는 것(18:4)을 주지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 본인들은 수치심이나 공포감 때문에 악행을 하지 못하면서도, 남을 선동하여 그런 일을 행하게 하는 자는, 마치 자진해서 그러한 짓을 행한 것처럼 그 책임을 지게 마련이라는 것을 명심하자.2.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경고장을 보냈다(2절). 맹세코 24시간 내에 그를 죽이겠다는 것이다. 뭔가가 당장에 시행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로서는 오래지 않아 꼭 하리라는 결심이다.
육적인 마음은 그 마음을 오히려 회개시키어 하나님께 복종케 해야 할 것을 통해서도 다시금 하나님께 대해서 더 완악해지고 원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녀는 자기의 신들을 두고 맹세하고, 미친 자와도 같이 사납게 날뛰며,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이라는 아무런 단서도 없이, 엘리야를 살해하지 아니하면, 자기 자신이 저주받으리라고 했다. 잔인함과 담대함이 흔히 핍박자들에게서 서로 만난다(공존한다). "내가 쫓아가서, 탈취하리라" 고 했다(출 15:9).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계획을 그에게 알려, 그로 하여금 도망갈 기회를 주게 된 것은 어찌된 일인지? 그녀는 엘리야가 담대한 사람이어서 도망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을 막강한 존재로 생각하여, 자기가 그를 도망가지 못하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는 그녀가 자신의 광포에 그처럼 이성을 잃게 된 데는 특별한 섭리라도 있었을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비록 그녀가 그의 목숨 이상의 것은 바라지 않았다 해도, 이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예언자." 그것도 위대한 예언자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무서워" 감히 그의 일을 간섭하지 아니하려 했던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러한 전갈을 보낸 것은, 단순히 그에게 겁을 주어 당분간이라도 물러가게 함으로써, 엘리야가 자기의 사업을 계속하지 못하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맹세와 저주를 포함한 그녀의 협박의 속셈은, 진정 자기가 그를 살해하리라는 의도를 밝힌 것이 아니라, 단지 그로 하여금 그런 사실을 믿게 하려고 함이었던 것뿐이다. 그녀가 그 이름을 두고 맹세한 그녀 자신의 신들은 그녀에게도 아무런 해악을 끼치지 못하였다.
3. 이에 엘리야는 매우 놀라서,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아마 밤중에) 도망하여 브엘세바에까지 이르렀다(3절). 우리는 이 일로 그를 칭찬해야 하겠는가? 칭찬하지 않는다. 최근에 아합과 바알의 모든 예언자들과 대적했던 그 용기는 어디로 갔는가? 아니 그 보다는 오히려 여호와의 불이 강림할 때, 자신 제물을 드려 자기를 지키던 그 용기는 어디에 갔는가? 하늘과 땅,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주는 공포 사이에서도 용감하게 버티어 섰던 그가, 이제 교만하고도 정욕에 빠진 한 여인의 허약한 협박에 떨고 있는 것이다. "오, 주님이시오, 도대체 인간이 무엇입니까!" 위대한 신앙이라고 해서 반드시 한결같이 강인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이 중대한 시기에 자기가 이스라엘에게 크게 도움이 되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도망하였다. 이전에 그에게 위협이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몸을 숨기라고 명하였었다(17:3). 따라서 그는 지금도 숨기는 것이 무방하다고 생각하고 있다.4. 그는 브엘세바를 떠나 이스르엘 사람들이 유리 방황하였던, 저 황량하고도 광막한 광야를 향해 들어갔다. 브엘세바는 이스르엘에게는 매우 원거리에 있었다. 여호사밧 과 같이 매우 선량한 왕이 다스리는 영토 내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안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이 위험의 범위를 벗어나 있었는데도, 두려움이 그림자 같이 좇아가서 거기서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하룻길의 여행을 하여 사막(광야)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엘리야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보다 더 자유롭고 친밀한 하나님과의 친교를 위하여 이 세상을 완전히 물러나 그곳으로 갔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예배드리기 위하여 산으로 올라갈 때, 그 종들을 산 기슭에 남겨두었고, 또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그리스도께서 "그 제자들을 떠났던" 것처럼, 광야에서 은밀히 지내기 위하여 엘리야도 자기의 사환을 브엘세바에 머물게 하였다. 아마 그렇게 한 것은 자기 사환을 위험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 사환은 아직 광야의 고생을 하기에는 젊고 약했다. 그런 고생을 시키는 것은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는 격이리라. 이같이 우리들은 우리들의 휘하에 있는 자들의 처지를 잘 생각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의 처지를 그렇게 생각해 주시기 때문이다.
5. 긴 여행에 몹시 피곤하게 된 그는(졸릴 때의 어린애들이 그렇듯이) 찌무룩하게 되어 "죽기를 원하였다" (4절)."그는 죽기를 구하였다." 그는 "자기의 생명을 위하여(한글에는 없음) 죽기를 구하였다." 선한 사람에게는 죽음이 곧 생명이 되기 때문이며, 육체의 사망은 영혼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죽기를 소원했던 이유는 아니었다. 그것은 바울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바라듯, 은총에 대한 간절한 열망도 아니다. 욥의 소망처럼 자기의 타락을 바라는 욕정에 찬 소원이었다. 이러한 식으로 자진하여 죽고저 하는 자는 죽기에 적합한 처지가 못된 자이다. 이세벨이 엘리야의 죽음을 맹세한 바 있기 때문에, 그는 짜증이 나서, 죽음을 헤매며, 죽음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특수한 뜻이 내재되어 있는데, 그것은 여호와-그의 부드러운 자비는 위대하다-의 손에 의해서 죽기를 바란 것이지, 사람-그의 부드러운 자비는 잔인성이다-의 손에 의하여 죽기를 바란 것은 아니다. 그는 이세벨의 경고에 따라, 바알의 예언자처럼 죽기보다는 차라리 광야에서 죽기를 바랬다. 그것은 바알 숭상자들이 승리의 찬가를 부르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만은 없도록 하고자 해서였다. 그들은 하나님 옹호자를 거꾸러뜨리고 나면, 자기들은 이스라엘 하나님보다 더 강하다고 자처할 자들이었다.
이제 그는 "이것으로 족합니다. 나는 할만큼 행하였고, 견딜 만큼 견디어 냈습니다. 사는 것이 싫어졌습니다" 라고 탄원한다. 저 세상에서 행복을 확보한 자는 멀지 않아 이 세상의 행복에 진력을 느낀다. 이제 그는,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이와 같은 곤고한 노역을 그들보다 더 잘 버티어 낼 만큼 낫지도 못하온데, 어찌하여 내 열조들보다 더 오래 이러한 고역을 치러야 하는 것입니까?" 라고 탄원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바로 "내 주 엘리야" 란 말인가! 저 위대하고도 용감하였던 정신이 이다지도 위축되었는가?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 자신에게 버려두신 것이다. 그리하여, 엘리야가 담대하고 강인하였던 것은, "여호와와 그 크신 권능이 그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요, 엘리야 자신은 "그의 열조나" 형제 "보다 낫지 못한다" 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6.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하여 광야에서 그를 먹이셨다. 엘리야는 스스로 광야의 위험과 곤궁 가운데도 자신을 내맡기고 있었다. 만일 광야에서 하나님이 자비롭게 그를 구원해 주시지 아니하였던들, 그는 죽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완고하고 고집이 센 자녀들이 받아 마땅한 것 이상으로 이 얼마나 인자스럽게 그 자녀들을 대하여 주시는고! 엘리야는 부루퉁하여 죽고자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필요치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쓰시고 영예롭게 하고자 하여 한 천사를 보내 주셔서 "그를 살게 하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말을 그대로 들어 주시고, 우리들의 우매하고도 정욕적인 요구를 허락하여 주신다면, 우리들의 경우는 악화될 것이다. 엘리야는 죽기를 바라서, 그는 "누워 잤다" (5절). 잠자다가 다시 깨지 않고 죽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자다가 깨어 보니, 떡과 물이 잘 마련되어 있음을 알았다. 뿐만 아니라 더욱 놀라웠던 바는 한 천사의 돌봄을 받고 있음을 안 것이다. 천사는 그가 잘 때에 보호해 주었고, 음식을 마련해 놓고는 음식을 먹으라고 두 번씩이나 그를 불렀던 것이다(5, 7절). 이렇게 천사들의 봉사로 보충 받는다면, 그가 인간의 몰인정을 탓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식량 조달을 받은 그는, "이세벨의 식탁에서 먹던, 바알의 예언자들" 보다 자기가 훨씬 잘 먹었다고 생각해야 마땅하였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느 곳에 처하든지 간에 여전히 아버지의 땅 안에 존재하듯이, 여전히 아버지의 감찰하시는 바와 돌보심 가운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광야에서 길을 잃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들을 놓쳐버리지 아니하시며, 그곳에서 그들은 "하갈처럼 살아계셔서 그들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다" (창 16:13).7. 그는 이 음식의 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까지 갔다(8절). 아마도 엘리야 자신의 의도가 아니라 여호와의 성령께서 그를 이끄셨을 것이다. 그래서 모세가 교제하였던 바로 그 장소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모세를 통해 준 그 율법이 그에 의해서 부활되게 하려 했을 것이다. 그 천사는 두 번씩이나 그에게 먹으라고 권했다. "그 앞에" 있는 "여행길" 이 크기 때문이다(7절). 비록 우리는 알지 못하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주실는지, 즉 어떤 일이나 시련을 주실는지를 알고 있어서, 예지의 부족으로 우리들 자신은 알지 못할 때에라도 우리들에게 "흡족한 은혜" 를 주신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겠다. 어떤 항해를 해야 될지를 정하신 이가 거기에 따라서 맞는 배를 공급해 주실 것이다. 그 얼마나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살아가도록 지켜 주셨는지를 살펴보자. 그는 어떤 때는 까마귀를 통하여 여러 가지 음식을 먹었고, 또 어떤 때는 천사를 통하여서 먹었다. 이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것" 을 보여 주시기 위해, 사십일 간이나 휴식과 수면도 취하지 아니하고 먹지 않고도 살아 있게 지켜 주셨다. 그것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이 일년을 하루같이 방황했듯이, 생명을 유지할 음식을 조금도 간구하지 아니한 채 계속해서 사막의 미로를 가로지를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엘리야는 식물을 필요로 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원하지도 아니한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바로 이 장소는 엘리야에게 만나를 회상시켜 주었을 것이며, 용기를 주어서, 옛날 이스라엘이 지금의 그처럼 초조하여 하나님을 불신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듯이, 엘리야로 하여금 하나님이 여기에서도 자기를 돌보아 주시리라는 소망과 때가 이르게 되면, 이 자리에서 그를 인도해 가리라는 희망을 품게 해 주었다.
엘리야와 하나님과의 교제(열왕기 상 19:9-18)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살필 수가 있다.
Ⅰ. 엘리야가 "하나님의 산" 이라고 불리우는 호렙산에 있는 한 굴에 거하게 되었다. 그 산은 이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현시하셨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여호와가 모세 앞을 지나시며 자기 이름을 밝히 드러내실 때에" (출 33:22), 모세가 숨었던 바로 그 동굴이거나 바위틈이었을 것이다. 엘리야가 이곳까지 와서 유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나로서 모르는 일이겠으나, 다음의 몇 가지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즉 자신의 울적함을 충족하기 위함이었든지, 아니면 자신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고, 율법이 부여되었던 곳이요 그처럼 놀라운 여러 가지 역사가 일어났던 그 유명한 장소를 눈앞에 봄으로써 자신의 믿음과 헌신에 도움이 되게 하고, 모세가 하나님을 접하게 된 바로 그곳에서 자신도 하나님을 만나뵙고자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개심하기를 싫어하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포기한다는 표시였을 것이다(후자의 경우, 이는 예레미야의 소원과 일치하는 것이다. 렘 9:2 에 이르기를, "어찌하면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의 유할 곳을 얻을꼬, 그렇게 되면 내 백성을 떠나가리니, 그들은 다 행음하는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들을 저버리셨다는 흉조였었다. 아니면, 이는 그가 여하한 곳에서도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도가 언급한 것도 바로 이 선한 사람이 겪어야 했던 이 곤경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즉 히브리서 11장 38절에, 이르기를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고 하였다.
Ⅱ. 그곳에서 하나님이 그를 찾아와 요구한 것이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였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 하나님의 눈과 그의 팔과 말씀의 범위에서 떠날 수 없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 139:7 참조)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버림받은 자들을 돌보아 주실 것이며, 하나님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추방당한 자들을 찾으시고 인정하여 주셔서, 영원무궁한 인자함으로 그들을 모아 주실 것이다. 요한이 밧모 섬으로 추방당하여 있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었다(계 1:9).
하나님께서 이 예언자에게 내시는 질문이란 곧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는 것인데(9절) 13절에서 거듭 묻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일종의 질책인 것이다. 그 이유는
1. 이곳까지의 그의 도피 때문이다. "어찌하여 네가 집에서 이다지 멀리 떨어져 있게 되느냐? 네가 이세벨을 피하느냐? 네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의지할 수 없단 말인가?" 본문에는 "너" 라는 대명사가 강조되고 있다. "어찌하여 네가! 그처럼 위대한 인간이요, 위대한 예언자이며 결단력으로 그다지도 명성을 떨쳤던 네가, 자기 나라를 피하고 자신의 개성을 이처럼 타기한단 말인가?" 이같은 비겁성은 다른 한 경우에서는 변명할 여지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다지 좋지 못한 본보기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경우는 "나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리이까?……" 라고 했다(느 6:11). "삼목이 그처럼 요동한다면 잔나무는 윙윙거린다."2. 이곳에 고착해 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네가 여기 이 굴 속에 있느냐? 이곳이 여호와의 예언자로서 은신할 곳이냐? 지금이 너같은 사람이 은실할 때냐! 지금은 세상이 너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다." 하나님이 전에 엘리야를 은거하게 했을 때에는(17장), 그것이 가난한 사렙다의 과부에게는 축복이었으나, 여기에서는 그가 선행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의당 있어야 할 장소에 있으며, 우리들이 행할 바 책무를 다하는 처지에 있는지 아닌지를 이따금 자문해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내가 의당 있어야 할 곳에 있는가? 하나님께서 소명하시는 곳, 내 직무가 있는 곳, 그리고 내가 쓸모가 있는 곳에 있는가?"
Ⅲ. 엘리야에게 던져진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자신을 해명하는 기사가 두 번 나온다(10절). 그것은 동일한 질문에 대한 반복 대답이다(14절).
1. 그는 자신의 은신을 변명하고 있다. 이것이 개심을 위한 자신의 열의의 부족의 탓이라고 들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단지 그 노력이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하나님과 자신의 양심은, 선행의 소망이 있는 한은, 그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별히 컸다" 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헛되이 수고했다." 그의 온갖 노력은 아무런 효력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이야말로 그 일을 포기할 때요, 고쳐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애통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하였다. "너의 독방으로 돌아가서, 절규하라.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2. 그는 죄 가운데 완악하고 불신앙의 극치에까지 이르게 된 백성들을 불평한다. 즉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렸나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저들을 저버리게 된 이유입니다. 그 누가 이들 가운데 버티어 서서 온갖 신성한 것이 파괴되고 헐리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을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가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한 것" 이라고 부르고 있다(롬 11:2, 3). 그는 빈번히 자진해서 그들의 대변자가 되었으나, 지금은 불가피하게 하나님 앞에 저들을 힐난하는 고발자가 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요한복음 5장 45절에는 "너희를 고소하는 자가 있으니 곧 너희가 희망을 걸고 있는 자 모세니라" 라고 했다 자기들을 고발하는 증인과 거역하는 하나님의 예언자들의 기도를 얻는 자들은 진정 비참한 것이다.
(1)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렸다는 혐의로 저들을 고발하고 있다. 이들은 비록 언약의 징표와 서약으로 할례를 시행하고 있었으나, 그 언약의 목적이 되는 예배와 봉사는 중지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규례를 소홀히 하고, 그와의 교제를 화해시키는 자는 진정 그의 언약을 저버리는 자요, 동시에 그와의 맹약을 파기하는 자이다.
(2) "주의 단을 헐었기" 때문에, 저들을 돌보지 아니하고 부패하게 내버려 두었을 뿐만 아니라, 바알을 숭상하는 저들의 열의로 인하여 고의적으로 자신들을 멸망시켰다고 비난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예언자들이 소유하고 있던 개인 제단이요, 거기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도 없거니와 송아지나 바알을 섬기려 하지 아니하였던 선량한 백성들이 참례하던 제단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독립적인 제단은 비록 교회의 통일성을 저해하는 것이었으나 건립되어 있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성실하게 목표 삼고 그를 충성스럽게 섬기고자 하던 사람들이 참례하였다. 따라서 외관상의 분열은 용서되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있는 제단과 매한가지로 그 제단들을 인하여 저들을 인정하였다. 그래서 그러한 제단을 헌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을 고발하는 죄라고 엘리야가 부르짖은 것이다.
(3) "그들이 칼로 주의 예언자들을 죽였음이오며" 라고 하였다. 아마도 이들 제단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을 말할 것이다. 외국 여인 이세벨이 이들 예언자들을 살해하였으나(18:4), 이에 대한 범죄 혐의는 이들 백성들 공동체에 씌워지는데, 이는 그들 대다수가 "그들의 죽음에 찬성하고" 흡족해 했기 때문이다.
3. 엘리야는 이 사막에까지 물러나서 이곳 굴 속에 은거하게 된 이유를 밝힌다.
(1) 그것은 여하한 목적을 위해서 그가 나타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직 나만 남았사오며, 아무런 선량한 목적이라도 나를 찬성하고 지지해 줄 이가 아무도 없나이다. 백성들 모두가 한결같이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나를 지지하려 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호하려 하지도 아니 하나이다. 한때 쟁취하였던 목표물도 지금은 상실하고 말았으며, 내가 저들을 개심케 하는 것 이상으로 이세벨이 저들을 더욱 더 용이하게 타락케 할 수 있나이다. 어찌 한 사람이 수천 명을 대항할 수 있겠나이까?" 성과를 이루지 못한 데서 오는 절망이 수많은 훌륭한 기업을 저해한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는 홀로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감히 홀로 있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2) 안전하게 공개석상에 나설 수 없었기 때문이라 했다.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그러므로 개심하기 싫어 하는 자들을 개심케 하는 열매없는 노력에 내 생명을 잃느니 보다는 쓸모없는 황야에서 생활하는 편이 낫습니다."
Ⅳ. 하나님이 친히 그에게 현시하셨다. 그가 하나님을 뵙기 위하여 이곳으로 왔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상면해 주시리라는 것을 그는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앞을 지날 때에, 모세를 동굴 안에 있게 하셨으나 엘리야는 그 밖으로 나오라는 부름을 받았다. 본문에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11절)고 했다. 엘리야는, 하나님이 "호렙에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던" 때처럼, 하나님의 "어떤 모양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1. 그는 강한 바람 소리를 듣고, 그 가공할 만한 효과를 목도하였다. 그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갈랐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하늘과 땅의 재판장 앞에서 나팔이 그의 천사들을 통해서, 불려났다. 그 재판장은 "영들" 곧 바람을 자기의 천사로 삼으신 자이다(시 104:4). 그 나팔 소리가 너무나 크게 울려, 땅이 진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갈라지기도 하였다.2. 엘리야는 지진의 진동을 느꼈다.
3. 그는 불의 분출을 목도하였다(12절). 이러한 것들은 예정된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이 도착했다는 것을 말해 주는 사건들이다. 하나님은 "화염으로 자기의 천사를 삼으셨는데," 천사들이 그 일에 고용되었고, 그 천사들의 하나님의 사신들로서 하나님 앞에 행군하여, "이 사막 가운데에 우리 하나님의 대로(大路)를 예비하기" 위함이었다.
4. 그러나 최후에 그는 한 "세미한 소리" 를 감지하였는데, 그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셨다" 하였다. 하나님은 곧 그 세미한 소리를 통하여 그에게 말씀하신 것이요,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 가운데서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다. 경외심에 눌리게 되는 자는 주의를 환기하게 되어 겸손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같이 무시무시한 소리가 아니라 부드럽고도 온화한 속삭임으로 그에게 당신의 마음을 알게 하시는 방도를 택하였다. 그가 이것을 감지하였을 때
(1)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리고 자신의 눈을 현혹게 하고 자신을 압도하는 것을 자각하여, "그는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웠다." 천사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경외하는 표시로 "그 얼굴을 가린다" (사 6:2). 그러나 엘리야는, 능력의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는 놀라운 그 의무에서 도피하고 비겁자가 된 데 대한 수치심의 표시로 그 얼굴을 가렸다. 바람이나 지진, 불 따위가 그의 얼굴을 가리게 한 것이 아니라, 조용한 목소리가 얼굴을 가리게 하였던 것이다. 은혜에 찬 사람은 여호와의 공포보다는 그의 애정에 찬 자비로움으로 더욱 큰 감동을 받게 된다.
(2)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들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동굴 입구에 섰다. 이곳 호렙산에서 하나님께서 몸소 자신을 현시하시는 이러한 방법은, 이전에 바로 이 장소에서 모세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 모세의 때에는 폭풍과 지진, 그리고 불이 있었다(히 12:18).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실 때에는 그가 친히 "자기의 자비를 선포하셨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미세한 소리"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셨다" 곧 "말씀이" 계셨다.
[2] 모세 당시에는 처음에는 공포의 모양으로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 말씀의 소리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다. 그리고 지금 엘리야는 그 율법을 소생케 해야 하는 부름을 받고 있다. 특히 여기에서는 첫 번째 두 가지 계명을 소생시켜야 했다. 그래서 그 율법은 운영하는 방법을 지시받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진과 불같은 놀라운 표적으로 백성들을 깨우치고 무섭게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말해야 할 때는, 조용하고도 낮은 목소리로 저들을 설복하고 확신시키도록 진력해야 하며, 저들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믿음이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오는 것이다. 기적이라도 그것을 위한 길을 닦는 것일 뿐이다.
[3] 그 당시는 하나님께서 공포로써 그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엘리야의 영과 능력으로 도입되는, 그리스도의 복음서에서는 조용하고도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그 말씀에 대한 공포가 우리들로 두렵게 해서는 안 된다(히 12:18 이하 참조).
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실행하라고 주시는 명령을 보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전에 내리신 질문을 반복하신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여기는 네가 지금 있을 곳이 아니니라" 라고. 엘리야는 전과 동일한 대답을 하며(14절)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변절과 그들의 신앙의 파괴 등을 들어 불평한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해답하신다. 그가 "죽기를" 원하였을 때(4절), 하나님께서는 그의 우둔함을 따라서 그에게 그대로 들어 주시지 않으시고, 그를 죽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남게 지켜 주셨을 뿐만 아니라 죽지 않게끔 마련하여 주셨다. 그래서 그는 죽지 않고 승천했던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가 자신의 낙담을 호소하였을 때는(하나님의 예언자들에게 이러한 종류의 불평이 있다면, 자기 주인 이외에 다른 어느 곳으로 가야겠는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대로 응답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되돌려 보내어, 하사엘을 아람 왕으로(15절), 예후를 이스라엘 왕으로, 그리고 엘리사를 그의 후계자로 삼아 예언자의 직능에 임명하라고 지시하신다. 이러한 사건은 하나의 예언적 사건이다. 즉 하나님께서 장차 "타락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응징하고, 그들에게서 당신 자신의 뜻을 펴시며, 배약(背約)의 복수를 갚으실 것" (레 26:25)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사악함이 처벌되지 않았다고 호소하였다. 기근의 심판은 너무나도 관대한 것이어서 이들을 개심케 하지 못하였다. 이들의 개심하기 전에 심판이 제거되었으나, 엘리야가 이르기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내가 열심이었으나, 하나님 자신은 마음을 쓰시는 것 같지 않나이다" 라고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러냐. 만족히 여겨라. 때가 오면 이루어지리라. 저들이 아직은 형벌을 받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저 경멸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심판이 마련되어 있느니라. 사람들이 택하여졌으니, 이제 지명을 하리라. 그 일을 할 자들이 지금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니라."
1. "하사엘이 아람 왕이 되면,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간에 유혈극을 벌이게 하여(왕하 8:12) 그들의 우상 숭배를 교정 할 것이니라."2. "예후가 이스라엘이 되기에 이르면 왕족과 혈투극을 벌여서 우상을 세워 섬기고 있는 아합 일가를 철저히 파멸하고 말 것이라."
3. "엘리사는 네가 이 땅위에 살아있는 동안 네게 큰 힘이 될 것이며, 네가 떠나가고 없게 되면 너의 일을 계승하여 이스라엘의 변절에 대한 산 증인이 될 것이며, 우상 숭배하는 도성, 벧엘의 자녀들을 살해하기까지에 이를 것이니라."
사악한 자들이 남아있는 것은 심판을 받기 위함임을 깊이 명심 해 두어야 하겠다. "재앙이 악한 죄인들을 추적한다." 따라서 재앙을 면할 도리가 없으며, 그것은 면하려고 시도한다는 일은 한 사람의 칼끝에서 다른 사람의 칼끝으로 피해 다니는 것에 불과하다. "두려움에서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떨어지겠고, 함정에서 나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라" (렘 48:44 참조). 엘리사는 "성령의 검" 으로 하사엘의 전쟁의 칼과 예후의 정의의 칼을 피하는 자들의 양심에게 겁을 주고 상처를 입힐 것이다.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그가 악인을 죽일 것이라" (사 11:4; 살후 2:8; 호 6:5).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시간에 자기의 일을 해 줄 도구가 모자라는 일이 없다. 즉 한 도구(사람)가 사라지면 다른 도구들을 세워 자기의 일을 수행케 하신다. 이점을 생각하는 것은 선량한 사람들과 성실한 사역자들에는 크나큰 위로가 되는 법이다.
Ⅵ. 오직 나만 남았다고 생각했으나 정직을 지킨 이스라엘 사람의 수효를 하나님께서 그에게 알려 주시는 고무적인 통보를 살펴 볼 수가 있다(18절).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유다 외에) 칠천 인을 남겼으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한 자라." 여기에 깊이 명심해 두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다.
1. 가장 극심한 타락과 변심의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항상 당신에게 신실한 남은 자를 남겨 주셨으며, 앞으로도 남겨 주시리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정직을 수호하며, 시류(時流)에 굴복하지 아니한 자들이다. 바울 사도도 엘리야에 대한 하나님의 이와 같은 대답을 언급하고 있으며(롬 11:4), 그것을 유대인들이 보편적으로 복음을 거역하던 자기의 시대에 적용시키고 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남은 자가 있느니라" 라고 말하고 있다(롬 11:5).2. 남은 자들을 보호하시고 이들을 다른 자들과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자신을 성별할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본문에 이르기를, "내가(나를 위해) 남겼노라" 라고 하였다. 이는 "자비로우신 선택에 따라" 남게 됨을 일컫는 것이다.
3. 이는 타락한 전체 민족에 비하면 지극히 적은 남은 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수천 수만이나 되는 이스라엘에 비하면 칠천 명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모든 세대의 남은 자를 한데 모으면 훨씬 더 많아지리라. 즉 "각 지파에서 알맞은" 자들의 수효는 12만 명이다(계 7:4).
4. 하나님의 신실한 자들은 흔히 그의 숨긴 자이다(시 83:3). 그리고 가시적(可視的)인 교회는 좀처럼 뚜렷하지 못하며, 알곡이 겨속에 잊혀져 있고, 금이 불순물 속에 숨겨있다. 그러나 키질을 하고, 정제하여, 서로를 분리하는 날이 오고야 만다.
5. 우리들로서는 알지 못하나, "여호와는 자기의 것에 속한 자를 아신다." 그는 은밀한 가운데 감찰하신다.
6. 이 세상에는 현명하고 경건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선량한 백성들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자. 저들 자신과 하나님께 대한 저들의 열성이 저들로 하여금 타락이 보편화 되었다고 생각게 하나,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생각하듯이 보시지 아니하신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갈 때 그곳에서 만나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허다한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게 되듯이, 만나게 되리라고는 거의 생각조차 하지 않던 많은 사람들을 대하게 될 것이다. 흔히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자애보다 훨씬 크고 넓다는 것이 입증된다.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