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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오바댜의 인격(열왕기 상 18:1-6)

Ⅰ. 당시 이스라엘은 두 가지 이유로 매우 슬픈 상황에 놓여 있었다.

1.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하고(4절) 죽였다(13절). 이세벨은 우상 숭배자였으므로 경건한 신앙인을 박해하는 자였고 아합도 그런 자로 만들었다. 금송아지들을 숭배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유기하던 악한 시절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선한 백성이 다소 남아 있었고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그들에게 교수하며 저들의 신앙 생활을 도와 준 선한 선지자들도 더러 있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죄다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가버렸지만(대하 11:13, 14) 하나님은 그대신 이 선지자들을 일으키셨다. 이들은 사사로운 모임이나 자기 순전성을 보지하던 가정에서 율법을 읽고 설명하였다(우리는 이 때에 회당이 있었다는 말씀을 읽은 적이 없으므로). 그들은 엘리야처럼 예언의 영을 소유하진 못했고 제사를 드리거나 분향하지도 않았지만 백성에게 잘 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근접할 것을 가르쳤다. 이세벨은 이들의 박멸을 꾀했고 그 중 많은 자를 살해했다. 이것은 대중의 죄에 못지 않을 만큼 큰 재난이었고 이스라엘에 가냘프게 남아 있는 신앙의 무리를 뿌리부터 흔드는 위협이 되었다. 칼날을 피한 자는 소수에 불과했고 그들은 도망하여 동굴 속에 은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목숨은 부지하였지만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다. 하나님과 백성에게 대한 유용성으로부터 생매장당하고 멸절되어 있었던 셈이었다. 유용성은 생명의 목적이며 위안이 되는 때문이다. 선지자들이 핍박을 받고 궁지에 몰리게 되었을 때 그들의 친구들 곧 그 땅에 있던 선한 사람들도 틀림없이 마찬가지의 학대를 받았을 것이다.

(1) 그러나 사태는 악화되어 있었지만 매우 선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는 궁내에서 세력이 큰 오바댜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여호와의 종" 이란 자기 이름에 어울리는 자였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충실한 자이면서 다윗 집안의 청지기였다. 그의 인품을 관찰하자. 그는 크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였다(3절). 그는 선량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열성적으로 그리고 현저하게 선하기도 하였다. 그의 높은 지위는 그의 선함에다 광채를 입혔으며 선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였다(12절). 그는 적시에 신앙을 갖기 시작하여 신앙 생활을 오래도록 계속해왔다. 일찍부터 경건 생활을 익힌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로서 유명한 경건이 된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적시에 선하게 되는 자는 아주 선하게 될 가망이 크다. 유시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던 자는 크게 그를 경외하게 되었다. 될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 보듯 융성하기를 바라는 자는 늦기 전에 일어나야 한다. 그토록 훌륭한 선인이 아합집의 궁내대신 곧 존귀와 권력과 신임이 두터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1] 아합같은 악인이 오바댜를 그토록 중용하고 그 자리에 계속 앉혀둔다는 것은 이상하다. 확실히 그것은 오바댜가 정직과 근면과 재간의 소유자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합이 신뢰할 만한 자였고 5절에 나타난 대로 아합은 그의 눈을 자신의 눈만큼이나 믿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요셉과 다니엘이 발탁된 것은 그들이 기용된 자리에는 그들만큼 적격인 자가 없었던 때문이다.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은 성실성과 충성된 마음과 일에 대한 열성이 없는 자들한테서까지도 존중을 받도록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2] 오바댜같은 선인이 우상 숭배와 온갖 악에 탐닉하는 조정의 높은 관직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이상하다. 우리는 오바댜가 승진하는데 있어서 왕의 종교와 같은 종교를 가져야 하며 오므리의 율례나 아합가의 법령에 순응해야 한다는 게 필수 요건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실히 믿을 수 있다. 오바댜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서는 그 자리를 얻을 수 없다고 했다면 그 자리를 사양했을 것이다. 아합 또한 단지 자기 종교에 가담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기를 안성맞춤으로 섬길 수 있는 자를 제외시킬 만치 무모하진 않았다. 자기 하나님께 진실된 자야 말로 자기 군주에게도 신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바댜는 양심에 거리낌없이 그 지위를 향유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자리를 거절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그 직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자기가 바라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예견하였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자리를 포기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세상이 아무리 악하더라도 세상에서 나갈 필요가 없다.

[3] 그가 아합을 개선시키지 않았고 아합이 그를 타락시키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하다. 그들은 둘 다 고정되었던 것 같이 보인다. 추악한 자는 여전히 추악하려고 하였으며 거룩한 자는 계속 거룩하려고 하였다. 악한 시기와 악한 장소에도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유지하는 자는 하나님을 크게 경외하는 자이다. 오바댜가 그러했다. 하나님께서는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종류의 사람 가운데 당신의 남은 무리를 소유하고 계신다. 네로의 집안과 아합의 궁중에도 성도는 있었던 것이다.

(2) 이 위대한 선인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보호하는 데 자기 권력을 이용하였다. 그는 박해가 치열해지자 선지자 중 백 사람을 두 개의 동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그들을 먹였다(4절). 그는 스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 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남들을 도울 만한 재력과 권력이 있었으므로 그들을 돕고 후원하는 게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들에게 잘 해 주는 자기의 친절 때문에 그 자신은 선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 양자를 다 행하였다. 그는 자신이 직접 하나님을 크게 경외하였고 자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후견인이 되기도 하였다 하나님이 자신의 사역자들과 백성을 위해 조력자를 일으키시며 그 누구도 일루의 희망조차 기대하지 못할 어려운 시기에도 그들을 피난케 하시는 솜씨는 얼마나 놀라우냐? 그 때는 기근이 우심하던 때라서 떡과 물이 귀하였다. 그러나 오바댜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에게 이 양자를 공급할 능력이 있었다. 비록 그들이 그 때는 일선에서 밀려나 있지만 나중에는 역사할 일꾼들이었다. 오바댜는 그들이 후일 하나님께 쓸모가 있도록 그들을 연명시키려고 하였다.

2. 이세벨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멸절시켰을 때 하나님께서는 극도의 한발로써 필수품인 양식을 끊어 버리셨다. 아마 이세벨은 엘리야가 심판을 예언했기 때문에 선지자가 그 심판의 일원이라는 구실로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박해했을 것이다. christianos ad leones.-즉 기독교인은 사자한테 주어서 없애버려라. 그러나 하나님은 저들에게 그 반대임을 알리셨다. 기근은 바알의 선지자들이 희생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왕과 오바댜가 직접 전국을 돌아다니며 목초를 찾을 정도로 가뭄은 심했던 것이다(5, 6절). 이것은 섭리가 그렇게 명하신 것이었다. 이는 아합으로 하여금 이 심판의 결과가 얼마나 나쁜지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보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그럼으로써 그가 엘리야의 말에 보다 잘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엘리야는 이 심판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의 방법을 제시해 줄 것이었다. 아합이 염려하는 것은 짐승을 다 잃는 일이었다. 그는 이미 많은 가축을 잃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고 영혼을 잃게 될까봐 염려하지도 않았다. 그는 꼴을 찾으려고 고심했지만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기 위해서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은 알아보지 않고 결과만 가지고 막아내려고 하였다. 유다 땅은 이스라엘 지경에 가까이 붙어 있었으나 우리는 유다에서 가뭄을 호소한 구절을 찾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유다는 하나님과 함께 다스렸고 성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신실했던 까닭이다(우리 성서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정함이 없도다, 호 11:10). 하나님께서 어떤 성읍에는 비를 내리시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셨을 때(암 4:7, 8) 그들은 이 차별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들과 다투신다는 근거를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눈을 가리며 자기 마음을 강퍅케 하여 이것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Ⅱ. 엘리야는 디셉인 즉 이스라엘의 개종자 또는 개혁자로 행세하기 위해(디셉인이란 칭호는 그런 의미라고 혹자는 생각한다) 여기에 재등장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진일보이다. 그들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반역하였다. "그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이키라. 그러면 만사가 단시간 내에 회복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엘리야가 해야 할 일이었다(눅 1:16, 17 참조).

1. 아합은 엘리야를 열심히 수색하였었다(10절). 그는 엘리야를 발견하는 자에게 상금을 주겠다고 제의하였다. 혹자가 이해하는 대로 아합은 자기 영토 내의 모든 족속과 영지에 정탐군을 보내었다. 또는 딴 사람들이 이해하듯 아합은 자기와 동맹을 맺은 모든 인접국가에 사람을 보내어 엘리야를 찾게 했을 것이다. 그들이 엘리야에게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노라고 부인할 때에도 그는 그들이 그것을 맹세하지 않는 한 믿지 않으려고 했다. 동시에 그는 그 맹세로써 만약 그들이 엘리야를 발견한다면 곧 내사하여 자기에게 인도해 주리라는 것까지 기대한 듯이 보여진다. 아합이 그를 이렇게 열심히 찾는 것은 심판을 통고 할 때 행한 일로 그를 벌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이 심판을 철회케 하기 위함이었다. 엘리야는 "내 말이 없으면(내 말대로, 원뜻)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고 말하였기 때문에 아합은 판결을 번복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아합은 사람들이 마녀에게 대해 어리석은 생각을 품듯 엘리야에게 대해서도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거나(마녀로 하여금 자기가 마술을 건 대상에게 대해 어쩔 수 없이 축복하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다시 성하게 된다는 생각을 품는다), 아니면 모압이 발람에게 대해 품었던 그런 생각을 품었을 것이다. 나는 후자의 경우가 더 타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가 읽는 대로 그들이 함께 만났을 때 엘리야는 아합이 자기한테서 바라는 게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갈멜산에서 만나도록 지정했으며 아합은 이 약속에 순순히 응했기 때문이다. 엘리야는 아합이 아마 거의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방법으로 심판을 철회시키고 그 땅을 축복케 하였던 것이다.

2.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보호하려는 엘리야의 열심과 자기 백성에게 대한 긍휼심은 이렇게 한 모퉁이에 갇혀있는 것을 너무 오래다고 생각하셨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이제는 네 시간 곧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 때가 이르렀음이라" 고 명하시기까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자들을 그들의 모퉁이에서 불러내시고 그들에게 보이라고 명하실 때는 어떤 백성에게든지 그것은 좋은 전조가 된다. 즉 그것을 지면에, 즉 그 땅에 내리실 때가 왔으므로 아합한테 모습을 드러내라고 엘리야에게 명령하신다(1절).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서 일년을 숨어 지냈고 그 뒤 2년 이상이나 사렙다의 과부집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본문에서 말하는 그의 체재 제삼년은 기근 제사년째를 말한다. 그 기근은 우리가 누가복음에서 보듯 만 삼년 육개월간 계속되었던 것이다(눅 4:25; 약 5:17). 바알에게의 대항은 하나님이 지면에 비를 내리시리라는 징조가 된다는 데 주목하자. 적어도 우리가 우리 스승을 눈으로 보는 한 우리는 환란의 떡에 보다 잘 만족할 수 있다(사 30:20, 21).

3. 엘리야는 먼저 오바댜에게 자수했거나 스스로 그의 눈에 띄게 했을 것이다. 그는 성령에 의해 오바댜를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알았다. 우리는 그들 사이에 오간 대화를 읽게 된다.

(1) 오바댜는 엘리야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시하면서 인사했다. 그는 엎드렸다. 그리고 겸손히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니까?" 하고 물었다(7절). 엘리야가 선지자들의 자녀들에게 아비의 자정(子情)을 보였던 것같이 오바댜는 선지자의 아비된 엘리야에게 아들로서의 경의를 표하고 있다. 이 사실로써 그가 참으로 하나님을 크게 경외하였다는 것과 그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자된 자를 명예롭게 했다는 것과 천국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2) 이 말에 대한 엘리야의 대답.

[1] 그는 오바댜가 자기에게 붙인 명예로운 칭호를 아합에게로 전가시킨다. "나를 주라 부르지 말고 아합을 네 주라고 불러라." 그것은 선지자보다 제왕에게 더 어울리는 칭호이다. 선지자는 사람들에게서 존귀를 구하지 않는다. 선지자는 통치보다 의무에 더 전념하는 자로서 주라고 불리우기보다 선견자라, 목자라, 파수꾼이라 불리운다.

[2] 엘리야는 오바댜더러 왕에게 가서 자기가 그와 말을 나누겠더라고 전하기를 명한다. "보소서 엘리야가 오고 있나이다고 네 주에게 고하라." 엘리야는 왕에게 먼저 자기의 출현을 알리기를 원했다. 이는 자신의 출현이 왕에게 뜻밖의 놀라움이 되지 않도록 하고 왕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선지자 자신의 행위임을 그로 확실히 믿게 하기 위함이다.

(3) 오바댜는 아합왕에게 전갈을 가지고 가는 일 만큼은 시키지 말아달라고 엘리야에게 간청한다. 자칫 잘못하면 자기 목숨을 요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던 때문이다.

[1] 오바댜는 엘리야에게 아합이 얼마나 대대적으로 그를 수색했으며 그를 찾아내는 데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는지를 설명한다(10절).

[2] 오바댜는 엘리야가 당연히 재차 물러갈 것이라고 생각한다(12절). "여호와의 신이 나의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이다." 아합이 틀림 없이 엘리야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때 그는 연기처럼 종적을 감춘 때가 더러 있었던 것 같다(왕하 2:16 참조). 오바댜는 아합에게 가서 자기의 소재를 얘기하라는 엘리야가 매우 진지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엘리야의 의사를 무산시키려고만 들었다. 이는 아합이 선지자로부터 온정을 받을만한 존재가 못된다는 것과 선지자가 아합으로부터 해를 입는다는 것도 온당치 못한 일임을 그가 알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3] 오바댜는 엘리야가 없으면 틀림 없이 아합이 격노하여 그를 조롱했다거나 엘리야가 지척에 있을 때 직접 손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기를 사형에 처하리라고 믿는다(12절). 폭군이나 박해자들이 격노하면 흔히 자기 친구나 막역한 벗에게조차 터무니없이 횡포를 부리는 법이다.

[4] 그는 자기가 이와 같이 목숨을 위협받을 정도로 악하진 않았다고 자기 변호를 하고 있다. "내가 잘못 말한 게 무엇이니이까?(9절). 아니, 내가 선지자들을 어떻게 숨겼는지 내 주께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 (13절) 그는 이것을 자랑이나 허세로 말하는 게 아니다. 비록 아합의 신복이긴 하지만 아합의 이익을 구하지 않았으므로 박해하는 데 아합의 수족이 되기라도 한양 조롱받을 일은 없다는 것을 엘리야에게 납득시키려고 이것을 말하고 있다. 그는 아주 많은 선지자를 보호했던 자가 위대한 선지자 때문에 목숨이 위태하게 된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였다.

(4) 엘리야는 오바댜가 안심하고 이 전언을 아합에게 전달하도록 하기 위해 그를 흡족하게 해 준다. 즉 그는 바로 그날 아합에게 보이겠노라고 맹세함으로써 그를 안심시켰다(15절). 엘리야는 자기 말이 진심에서 하는 말이며 실제로 그렇게 할 예정임을 오바댜에게 알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오바댜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 말을 아합에게 전달할 터였다. 엘리야는 만군의 여호와로 맹세한다. 여호와는 모든 권세를 자기 수중에 잡고 계신 분이므로 음부와 땅의 모든 권세로부터 자기 종들을 능히 보호하실 수 있으시다.

(5) 아합에게는 엘리야가 모처에서 즉시 만나자는 제의를 보내왔다는 통지가 곧 가게 되고 아합은 이 제의를 수락한다. "아합은 엘리야를 만나려 하여 갔다" (16절). 우리는 아합이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도 종적을 알 수 없던 엘리야가 절로 나타났다고 듣는 순간 깜짝 놀랐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다. 아합은 풀을 찾아 길을 나섰다가 그의 말로부터 비를 기대치 않으면 안될 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죄에 찌든 양심 때문에 그럴 필요성을 거의 발견치 못하였고 외려 보다 두려운 딴 심판을 두려워하기만 하였다. 만일 그가 정탐꾼으로서 엘리야를 덮쳤더라면 그는 엘리야에게 의기양양해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와 같이 엘리야에게 기습을 당하고 보니 아합은 그를 쳐다 보고 떨기까지 했으며 헤롯이 세례 요한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를 미워하면서도 두려워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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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와 아합의 면담(열왕기 상 18:17-20)

우리는 여기서 엘리야와 아합의 만남을 보게 된다. 그것은 세상이 지금까지 겪어 왔던 왕 중 가장 악한 왕과 교회가 축복으로 누려 왔던 예언자 중 가장 훌륭한 예언자와의 만남이었다.

1. 아합은 생긴 그대로 엘리야를 비열하게 고소했다. 그는 감히 엘리야를 직접 치려는 하지 못했다. 여로보암왕이 예언자에게 손을 대려 했으나 그 뻗쳤던 손을 거둘 수밖에 없게 되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는 엘리야에게 지극히 모독적인 인사를 가했다. 그가 첫마디에 엘리야를 헐뜯은 그 불평은 지극히 조잡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가 너냐?" (17절) 이 말이야 말로 아합의 종 오바댜가 한 인사말과는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가? 그는 "당신이 나의 주 엘리야이니까?" (7절) 오바댜는 하나님을 크게 경외했다. 그러나 아합은 악행을 함부로 하는 자였다. 그들은 둘 다 그 예언자에게 건넨 그들의 말씨를 통해서 자기들의 품격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과 일꾼들에게 얼마나 애착을 가지느냐를 보아서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엘리야는 지금 비가 오리라는 축복의 소식을 이스라엘에게 전해 주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무례한 대접을 받고 있다. 그가 정말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 라면, 이스라엘의 왕인 아합은 당연히 그를 책망해야 한다. 공인을 유지해야 할 책임을 맡고 있는 자들의 악행 때문에 이스라엘이 괴로움을 겪는 수도 많이 있다. 그러나 엘리야에게 대해서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복지에 원수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복지의 지주였다. 즉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 이었던 자이다.

가장 훌륭하고 가장 유용한 일을 하는 자들도 때로는 "국가의 방해꾼" 이란 소리를 듣게 되고 공안을 침해하는 자라는 낙인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도 그런 말을 들었다(행 17:6).

2. 엘리야는 역시 그답게 아합왕에게 대담하게 힐책을 역공하고, 진실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 는 바로 그라고 말했다(18절). 엘리야는 아간이 아니었다. "나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았거니와 그런 일을 계획한 일도 없도다."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게 하는 자들이 피해를 입히는 자들이다. 심판을 예고하고 경고하여, 회개하면 막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자가 피해를 끼치는 자인 것은 아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고치려 하였으나, 저희들이 원치 않았도다."

아합이 바로 아간이었다. 그는 금지된 바알을 좇음으로써 괴로움을 가져오는 장본인이다. 제왕과 그 집안의 부정함 및 불경스러움 이상으로 그 나라에 더 큰 괴로움을 가져오는 것도 없다.

3. 엘리야는, 왕 중 왕으로부터 직접 권위를 받은 자로서, 갈멜산에다 국사(國事)대회를 소집할 것을 명했다. 갈멜산은 하나님의 제단이 세워져 있던 곳이다(30절). 아마 그 산 위에는 유명한 산당도 있었을 것이다. 그곳은 예루살렘 이외의 곳에서도 가능했던 이전 시절에는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예배가 드려지던 곳이었을 것이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엘리야를 만나러 그 곳으로 나아와야 했다. 그리고 이세벨의 집안 종무관(宗務官)들인 아스다롯 예언자들과 전국에 흩어져 있던 바알의 예언자들도 각기 출두해야 했다.

4. 이에 따라서 아합이 이 대회를 위해 영장을 발부했다(20절). 아마 그가 엘리야를 두려워하여 감히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든가(사울은 하나님보다도 사무엘 앞에 서는 것을 더 무서워 했다), 아니면 엘리야가 그 나라를 축복해 주고, 비를 오도록 해 주며, 그러한 조건으로 그의 말을 모두 따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엘리야의 조언을 경시하고 미워하던 자들이라도 그가 자기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을 쾌히 기뻐할 것이다. 이제 하나님도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사탄의 회당에 속한 자들을 불러서" 사실상 "그의 말에 경비하고,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계 3: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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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 없음.

 

18:20 없음.

 

18:21

갈멜산의 대결(열왕기 상 18:21-40)

이 엄숙한 집회를 통해서, 아합과 그 백성들은 엘리야가 "그 나라를 축복해" 주고 비가 오도록 기도해 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 백성이 회개하고 개심해야 하며,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그 심판의 제거를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이 바른 순서이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들의 마음을 예비하시고," 그 다음에야 "들을 귀를 주신다." 그리고 "우리를" 먼저 "그에게 향하게" 하신 후에 그가 "우리를 향하신다" (시 10:17; 80:3). 도망자는 다시 돌아와 충성을 다하기 전까지는 결코 하나님의 호의를 바랄 수 없다.

엘리야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의 일을 정당한 목적으로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3년 반 동안의 기근도 그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지 못했다. 엘리야는 그들의 심판을 깨우쳐 주려고 노력했다. 그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 공개적인 시험을 붙인 사건은 하늘로부터 각별한 허락과 지시가 있는 일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바알을 자기의 적수로 여기고 논쟁의 대상으로 여기게까지 된 일은 하나님으로서는 지극히 겸양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심으로써 모든 입이 그 앞에서 침묵케 되고 모든 육체가 그 앞에서 조용케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유는 이렇듯 언제나 쟁론의 여지없이 정당하므로, 그 공평성에 대한 증거를 수사한다고 해도 결코 겁낼 것이 없다.

1. 엘리야는 하나님 예배와 바알 예배를 혼합시킨 데 대하여 백성들을 힐책했다. 어떤 자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또 어떤 자들은 바알을 예배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사람이 두 신을 동시에 섬기는 일도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가리켜 그는 "두 사이에서 머뭇거림" 이라고 했다(21절). 그들은 예언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예배했고, 이세벨의 비위를 맞추고 조정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는 바알을 섬겼던 것이다. 그들은 사마리아인들(왕하 17:38)처럼 기회를 엿보면서 양편을 다 편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엘리야가 그들의 부조리를 지적한 것이다. 그는 그들이 여호와와 맺은 관계를 주장하지 않았다.-" 여호와가 너희의 하나님,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이며, 바알은 시논 사람들의 신이 아니더냐? 어느 백성이 자기들의 신을 바꾸더냐?" (렘 2:11)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사건의 법적 권리를 포기하고, 이 사건의 공과를 따졌다.-" 한 분 하나님, 무한하시고 거룩하신 한 분 하나님이 계실 뿐이다. 한 분, 전능하신 한 분 외에는 하나님이 필요하지도 않다. 이미 완전한 것이 무엇을 더하려는가? 이제 시험하여, 바알이 유일하고 무한하며 전능한 존재요, 유일한 지고의 주님이며, 모든 것에 넉넉히 은혜를 베푸는 자이라면, 너희는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만을 섬기라. 그러나 만일 여호와가 유일한 분이시면, 바알은 거짓 신이니, 이제는 더 이상 바알과 관계는 없느니라."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것" 은 매우 나쁜 일이다. "조화시킬 수 있는 차이점에 있어서는 실제적으로도 의견상으로 모두 무관심해 버리는 것 이상으로 안전한 것도 없다[고 홀(Hall)주교는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바알의 사이처럼 적대적인 관계 속에서는 하나님 편에 서지 않는 자는 그를 대적하는 자이다" (막 9:38; 마 12:30 을 비교하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죄를 섬기는 일, 그리스도의 통치권과 우리의 정욕의 통치권, 그 사이를 머뭇거린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양심의 가책을 받으나 결단하지 않으며, 뜻을 세움에 있어서 불안하고, 좋은 약속을 하나 실행은 하지 않으며, 시작은 잘 하나 끝을 맺지 못하고, 자기 주장이 시종일관하지 못하며 선한 일에 뜨뜨미지근한 자들은 모두 둘 사이를 머뭇거리는 자들이다. "그들의 마음을 나뉘었다" (호 10:2). 그러나 하나님은 전부가 아니면 전혀 가지지 않으신다.

2. 우리는 "우리가 섬길 자" 를 선택하는 것이 정당하다(수 24:15). 우리는 어떤 자가 하나님보다도 우리에게 더욱 옳게 보이거나 앞으로 더 좋은 우리의 주인이 될 가망이 있는 자를 발견했다면, 목숨을 걸고 그를 취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가 우리에게 입증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권한을 우리에게서 요구하지 않는다.

엘리야가 제시한 이 정당한 제의에 대해, 백성들은 할 말을 잃었다. "백성은 한 마디로 대결치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을 변명할 줄도 몰랐고, 또 자신들을 정죄하는 말을 하고도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당황한 나머지 엘리야가 할 말을 하도록 버려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Ⅱ. 엘리야는 공정한 심판을 하자고 제의했다. 외적인 유리한 조건은 바알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 심판은 그만큼 더 공정했다. 왕과 조정은 모두 바알 편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또 이스라엘 백성이란 집단도 그러했다. 바알을 변호하는 자는 기름지고 잘 먹은(22절) 450명의 실행위원이 있었고, 그 외에 그들을 지원하고 후원해 주는 400명이 있었다(19절). 하나님을 변호하는 자는 단 한 명이었고, 게다가 가까스로 불쌍한 유배에서 돌아왔고 거의 굶어 죽을 뻔한 자였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입장은 그 자체의 정당성 외에는 아무 것도 뒷받침해 주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실험을 하기로 했다. "각 희생 제사를 준비하고, 자기 편의 하나님께 기도하자. 그리고 불로 그 제사를 응답하는 그 하나님이 참으로 하나님인 것으로 알자. 만일 어느 쪽도 그런 응답이 없으면, 계속 그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라."

엘리야는 필경 이런 실험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으리라. 그렇지 않다면 그는 하나님을 시험하고 신앙을 모독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비상했고, 그 결과로 인한 판결은 유용했을 것이로되, 그 때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에 유용했을 것이다.

그가 막강한 권력자들과 숫자 앞에 단신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사유를 대변했다는 것은 그의 용기를 보여 주는 한 사례이다. 그리고 이 사건의 결과는 하나님의 모든 증인들과 변호자들에게 사람의 얼굴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는 격려가 된다.

엘리야는 "물로 응답하는 신" 이 아니라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라고 말했다(실상 그 당시 그 나라에는 물이 간절히 필요하던 때였다). 이와 같이 된 이유는, 심판이 자비롭게 물러가게 되기 이전에 먼저 속죄가 제사를 통해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신, 또 그 용서를 속죄 제물을 소멸함으로 입증할 수 있는 그 신이 우리를 이 비극에서 구출할 수 있는 하나님이 틀림없다. 불을 주실 수 있는 그가 물도 주실 수 있다(마 9:26 참조).

Ⅲ. 백성이 그와 합의했다. "그 말이 옳도다" (24절). 그들은 엘리야의 제언이야말로 정당하고 틀림이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은 종종 불로 응답하셨도다. 만일 바알이 그리할 수 없다면, 그는 가짜이니 추방을 시켜야 하리라."

그들은 이 실험이 검증되기를 몹시 원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하든 거기에 따르기로 각오를 했다. 하나님의 편에 확신을 둔 자들은 이러한 결과가 결국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바지할 뿐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냉담한 자들도 결단을 내릴 채비를 했다. 그리고 아합과 바알의 예언자들은 백성이 두려워서 감히 반대를 제기하지도 못했다. 그러면서 "자기들" 이 하늘에서 불을 구할 수 있기를 바랬으며(그들은 결코 그런 적이 없었지만), 또 혹자가 생각하듯 그들은 바알을 통해 태양을 숭배하고 있었으므로 그럴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하면서, "엘리야" 는 그럴 수 없게 되기를 바랬는데, 그것은 지금 그 곳이 하나님이 자기의 영광을 불로 나타내던 성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만일 이 시합에서 그들이 이 사건을 무승부로만 할 수 있다면,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여러 가지 유리한 조건들 때문에 승리는 그들의 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 시합을 살펴 보자.

Ⅳ. 바알의 예언자들이 먼저 자기들의 신으로 시험을 했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그들은 먼저 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먼저 하는 게 영예롭기도 하거니와, 만일 조금이라도 점수를 확보하는 것이 보이기만 하면 엘리야는 더 이상 시험을 해 보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엘리야는 허락을 했다(25절). 그들이 더 큰 혼란을 당하도록 우선권을 준 것이다. 그는 사탄의 역사는 거짓 이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단지 그들의 속임수만을 막으려고 애썼다. 분명히 "그 밑에 불을 놓지 않았는지" 확인하라고 했다.

이제 그들의 실험에서 다음 사실들을 관찰해 보자.

1. 바알의 예언자들은 바알에게 지극히 안달을 하고 법석을 피웠다. 그들은 자기들의 제물을 준비했다. 450명이 하나같이 있는 힘을 다하여 소리쳤으니, 얼마나 시끄러웠는지는 가히 짐작이 간다. "오 바알이여, 들으소서. 오 바알이여! 응답하소서." 그들은 여러 시간을 이렇게 소리쳤고,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고 아데미 숭배자들은 두 시간 동안 소리 쳤는데, 그들은 그 이상 소리쳤다(행 19:34).

그들이 자기들의 바알에게 한 말을 보면, 얼마나 무지각하고 짐승 같은가!



(1) 바보같이 보였다. 그들은 그 송아지와 함께 자기들이 직접 제물이라도 되려는 듯이, "그들은 그 단 주위에서 뛰놀았다" 고 했다. 아마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들의 열망을 표명했을 것이다. "그들이 뛰놀았다" 는 것은 제단 주변에서 춤을 춘 것이다(라고도 본다). 그들은 자기들이 춤을 춤으로써, 헤로디아가 헤롯을 즐겁게 해 주고서 자기의 소원을 성취했듯이, 자기들의 신을 기쁘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2) 마치 미친 자들 같았다. 그들은 "칼과 창으로 자기들의 몸을 상하게" 했다(28절). 아무런 응답도 없어서 화가 났든가 아니면 일종의 예언자적 광란으로써, 자기들의 피를 바침으로써 신의 은총을 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송아지의 피가 뜻을 못 이루자 자기들의 피로 소원을 이루려는 심산이었다. 하나님은 자기를 경배하는 자들에게 그런 식으로 자기를 섬기기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악마의 일은 때로는 몸을 즐겁게 해 주지만, 또 때로는 질투나 술취함 같이 몸을 잔인하게 만들고 만다.

아마 이러한 짓은 바알을 경배하는 자들의 한 습관이었던 것 같다. 하나님은 자기를 경배하는 자들에게 몸을 해치지 말라고 명하셨다(신 14:1). 하나님은 우리의 정욕과 죄악을 죽이라고는 하신다. 그러나 카톨릭 교도들의 한 관습인 육체적 참회와 고행-이것은 정욕이나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 "누가 이런 것들을 네게서 원하더냐?"

2. 엘리야는 그들에게 대해 얼마나 통렬했던가?(27절) 그는 그들 옆에 서서, 그들이 장시간 동안 우상에게 기도하는 소리를 인내성 있게 듣고 있었다. 그러나 은근히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정오가 되자, 태양은 가장 뜨겁게 되었고, 그들은(지금까지와 같이) 여전히 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엘리야는 자기의 직책이 이제 중하고, 해야 할 일이 심각했지만, 그들을 조롱하고 있다. "크게 외쳐라. 너무나 경건하여 크게 소리치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그가 신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는 이야기하고 있거나 명상하고 있을 것이며(문자적 뜻은 그렇다), 또는 어떤 깊은 생각에 빠져서 뭔가 다른 일을 생각하느라고, 너희들의 위신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권세가 달려 있는 이런 판국에 자기의 일을 잊은 모양이로다. 그가 빨리 자기를 돌아보지 않으면, 그의 새로운 점령지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우상을 예배한다는 일은 지극히 조소거리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에게 조소하는 자들을 정당화시킬 수는 결코 없다. 그 예배는 우상의 예배와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바알의 예언자들은 엘리야가 퍼부은 정당한 비난으로 확신을 얻기는커녕 수치를 맛보게 되었다. 그 비난은 그들을 더욱 난폭하게 만들었고, 더욱 우스꽝스런 짓을 낳게 되었다. "미혹된 마음은 스스로 미혹되어서," "나의 오른손에 거짓이 있지 아니하냐?" 고 말함으로써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사 44:20 참조).

3. 바알은 그들의 말에 얼마나 귀가 멀었던가! 엘리야는 그들을 중단시키지 않았다. 그들이 지칠 때까지 버려 두었다. 아주 절망할 때까지 버려 두었다. 그래서 마침내 "저녁 제사의 시간이" 되었다(29절). 그동안 줄곧 어떤 자들은 기도를 하고, 어떤 자들은 예언을 하고, 찬송을 불렀다. 아마 바알을 찬양했을 것이다. 혹은 마침내는 바알이 응답해 주리라고 그들을 위로하는 격려의 노래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응답하는 자도 돌아보는 자도 없었다." 우상은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공중 권세자의 임금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때에만, 이런 때에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오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자기의 바알을 위해 기꺼이 그런 일을 하려 할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미혹하는 짐승이 이런 일을 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그들을 속인다" (계 13:13, 14).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 악마에게 그런 허락을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이 결과에 따라 그의 권리가 양 당사자들 간에 판결이 나고 말기 때문이다.

Ⅴ. 엘리야는 즉시 하나님으로부터 불의 응답을 받았다. 이제 바알주의자들은 항복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엘리야가 자기의 시험을 할 차례가 되었다. 그가 얼마나 신속히 처리했는가를 보자.

1. 그는 한 제단을 수리했다. 그는 바알에게 보내는 기도 때문에 더러워진 그들의 제단을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 또한 이전에 여호와를 예배하는 데 사용되던 제단은 완전히 황폐해진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 제단을 고쳐 쓰는 길을 택했다(30절). 이것은 그가 어떤 새로운 종교를 소개하려고 하지는 않았으며, 단지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께 대한 예비와 신앙을 소생시키려 하며, 그들의 첫사랑, 처음 일을 복구시키려고 했다는 것을 뜻해 준다. 그는 두 나라를 다시 연합시키기 전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제단에다 제물을 바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하나님은 두 나라를 징계하기 위해서, 당장 두 국가의 통합은 원치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예언자의 권위를 가지고 갈멜 산상에다 제단을 세웠고, 그것은 이전에도 사용되어 오던 것임을 시인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개혁을 이룰 수 없을 때에라도 어떤 타락된 일에 순응할 것이 아니라 바알을 근절시키기 위해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는 "열 두 지파의 수효를 따라서 열 두 돌" 을 세워 그 제단을 수리했다(31절). 비록 그 중 열 지파는 바알에게로 반란해 나갔지만, 그들의 조상들과의 옛 계약에 힘입어 그들도 역시 하나님에게 속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비록 정치적 이권 때문에 불행히도 열 지파와 두 지파가 나뉘었지만, 이스라엘 하나님의 예배에 있어서는 서로 교통하여 열 두 지파가 하나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 야곱을 "이스라엘" 곧 "하나님과 겨룸" 이라는 뜻으로 불렀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31절). 이것은 자기들이 신으로 알았으나 응답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자를 섬겼던 그의 타락한 후손들에게 수치를 주기 위함이요, 또한 이제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었듯이 용감히 그 예언자가 하나님과 싸워야 한다고 격려해 주기 위함이었다. "오 야곱아, 너는 얼굴을 찾으라!" (시 24:6). "거기서 그는 우리와 말씀하시는도다" (호 12:4).

2. "여호와의 이름으로" 자기의 제단을 건립한 것은, 그의 지시를 받아, 그리고 그를 염두에 두고서, 그리고 자기의 영예란 조금도 생각지 않고, 제물을 준비했다(33절). "보라, 송아지와 나무는 있는데, 불은 어디 있는가?" (창 22:7, 8)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준비하시리라."

우리가 우리 마음을 정직히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은 은혜로써 우리의 마음 속에 거룩한 불을 붙여 주실 것이다.

엘리야는 제사장도 아니었고, 레위인 수행자도 없었다. 그리고 갈멜산에는 회막도 성전도 없었다. 또 증거의 궤와 하나님이 택하신 장소와는 굉장히 먼 곳이었다. 또 그 제단은 예물을 성별케 한 그 제단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제사보다 더 잘 하나님께 열납된 제사는 없었다.

그와 같은 특별한 제위적 제도들은 종종 면제되었었다(사사 시대, 사무엘 시대, 그리고 지금의 경우 등이다). 그러므로 어떤 자는 그러한 제도들은 율법처럼 복음 속에서 엄격히 실현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모형으로써, 복음의 원형 속에서 실현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이와 같이 그 사용이 폐지된 것에 대해서 바울 사도가 한 말(골 2:22)은, 머지 않아 그 모든 제도 등이 완전히 사라 질 것을 뜻한다(히 8:13).

3. 그는 도랑을 파고 자기 제단 주위에 물을 많이 부었다(32절). 혹자는 그 제단도 우묵하게 만들었던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12바렐 짜리 통 넷의 물(아마 바다물이었을 것이다. 바다가 가까웠고, 당시에는 신선한 물이 너무나 귀했었는데, 그가 그렇게 물을 낭비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을 세 번이나 제물 위에 부었다. 그래서 제물 밑에다 혹시 불이라도 놓아 두지 않았나 하는 의축을 제거했다(그렇게 했더라도 이렇게 하면 꺼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올 기적을 더욱 찬란하게 했다.

4. 그리고서는 자기의 제단 앞에 서서 엄숙히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이번 제물이 재가 되게" (시 20:3 과 같이) 해 달라고 간구했다. 그것은 그 제사의 열납을 입증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기도는 길지 않았다. 그는 헛된 반복을 하지 않았고, "말을 많이 해야 듣는다" 고도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은 지극히 엄숙하고 침착했으며, 자기의 마음을 조용히 내어 보이는 것이요, 바알의 예언자들이 보였던 광란과 무질서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36, 37절). 엘리야는 지정된 "장소" 를 택하지는 못했지만, "저녁 소제를 드릴 때" 곧 지정된 때로 선택했다. 그것은 이것을 통해 그가 예루살렘의 제단과 통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인 것이다.

그는 지금 불의 응답을 구하고 있지만, 담대하게 제단에 가까이 왔다. 그리고 조금도 그 불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옛 계약을 믿으면서 또 하나님과 족장들에 대한 백성들의 관계를 백성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이신 하나님께 자기의 뜻을 아뢰었다.

여기서 그는 두 가지 점을 탄원한 것이다.



(1) 하나님의 영광이다. "여호와여, 들으시고 응답하소서. 주가 이스라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소서(그것이 지금 극도로 부정되고 망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충성과 헌신은 주께만 합당하옵니다. 또 내가 주의 종임을 알게 하소서. 내가 주의 일꾼으로서 행한 것, 하고 있는 것, 앞으로 해야 할 모든 것이 주의 말씀에 따라 하는 것임을 알게 하옵소서. 그리고 조금이라도 나의 기분이나 감정을 만족케 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나를 고용하겠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그리하심을 알게 하옵소서" (민 16:28, 29 참조). 엘리야는 자기의 영광을 구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영광에 도움이 될 것과 자기에게 필요한 변호를 위해서 빌었다.

(2) 백성의 교화를 탄원했다. "주가 여호와이심을 저들이 알게 하시고, 주의 은총을 체험하게 하시며, 이 기적에 의해 저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옵시고, 그들이 다시 주께 돌아오게 됨으로써, 하나님은 다시 저들에게 자비를 내리게 되기를 원하나이다."

5. 하나님은 즉시 불로 그에게 응답했다(38절). 엘리야의 하나님은 담화를 하거나 생각하고 있지 않았으며, 일으켜 깨워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아직 말을 다 마치기 전에, "여호와의 불이 떨어졌다." 다른 경우에서처럼(레 9:24; 대상 21:26; 대하 7:1) "제물과 나무를 소멸하여"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으신 표시를 했을 뿐만 아니라 "도랑에 있던 물을 모두 핥았다." 즉 그 물을 수증기로 증발시켜 버림으로써, 이 제사와 기도의 결실로 올 그 비가 자연의 소산이 아니라는 사실은 더욱 분명히 말해 줄 수 있게 되었다. 시편 135편 7절을 보라. "그는 증기(안개)를 일으키시며, 비를 위해 번개를 만드시도다." 이 비를 위해서 하나님은 증기와 번개를 모두 만드셨다.

여호와의 진노의 희생물이 되어 버리는 자들은, 어떠한 물도 그 불을 막아 줄 수 없을 것이며, 어떠한 장벽이나 보좌도 그 불을 막아 줄 수는 없다(사 27:4, 5).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 기적을 완수하기 위해, 그 불은 "제단의 돌과" 바로 "그 티끌" 까지 소멸함으로써, 이 불은 비상한 불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또 어쩌면 하나님이 이 특별한 제사를 이 제단에서 열납하셨지만, 앞으로는 그들의 산장에 있는 모든 제단을 훼파해야 하며, 그들의 제사를 위해서는 예루살렘에 있는 그 제단만을 사용하라는 것을 시사해 주는 것이리라.

모세의 제단과 솔로몬의 제단은 하늘에서 내려 온 불로 성별되어 졌다. 그러나 이 제단은 그 불로 파괴되었다. 더 이상 사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불은 아합과 바알 숭배자들에 무서운 죄책감을 주었을 것이며, 그들은 최선을 다해 도망치면서 "우리도 타 죽을까 하노라" 고 말했을 것이다(민 16:34 참조).

Ⅳ. 이 공정한 재판의 결과는 무엇인가? 바알의 예언자들은 자기들의 증명에 실패했고, 자기들의 신을 빙자한 그 허실을 증명해 낼 아무런 증거를 대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엘리야에 대한 고발은 완전히 취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가장 신빙성 있고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입증했다.

1. 배심원격이던 백성들은 이 재판에 대해 판결을 내리게 되었고, 그 판결에 대해서 는 모두가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시비가 이렇게 분명하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법정에서 떠나서 다시 재고해 보고 판결을 의논해 볼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보고 엎드렸다." 그리고는 일제히 "여호와가 하나님이시오, 바알이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는 그 점을 깨닫게 되었고, 이제 확증을 얻었노라. 여호와 그가 하나님이로다" (39절)라고 말했다. 이것을 보고 어떤 자는 이렇게 추측하리라. "그가 만일 하나님이시면, 그가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야 하며, 우리는 오직 그만 섬기리라" (수 24:24 과 같이)라고 그들이 결론을 내렸으리라고. 우리는 바라건대, 혹자들은 그렇게 자기들의 마음을 고쳐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다수는 깨닫기만 하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진리에 굴복하지는 않았다. 그가 하나님이란 것은 알았다. 그러나 마땅히 했어야 했을, 그와의 계약에 대한 동의는 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본 것을 보지 못하고도 믿어, 그것으로써 본 자들보다 더 큰 일을 하는 자들은 복을 받으리로다.

"여호와, 그가 하나님이시요" 그만이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은 영원히 모든 거짓된 자들을 막아내는 요점으로 알아야 한다(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지금까지 받아온 도전 중에서도 가장 대범하고 위협적인 적들을 모든 사람이 듣는 가운데서 물리쳐 주었기 때문이다).

2. 범인들격인 바알의 예언자들은 체포되어, 정죄받고, 법에 따라 처형되었다(40절).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라면, 바알은 거짓 하나님이다. 그런데 이들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짓 신에게로 갔으며, 하나님 예배자들을 꼬여서 다른 길로 가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명시적인 하나님의 율법에 의거해서, 그들은 사형되어야 했다(신 13:1-11). 사실을 입증할 자료가 필요치 않았다. 이스라엘 모두가 그 증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엘리야(이 일은 전례가 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비상한 위탁을 받고 행동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는 그들은 나라를 괴롭게 한 자들이므로 즉각 살해하라고 명령했다. 아합은 지금 하늘에서 온 불 때문에 심히 떨고 있었다. 그래서 엘리야의 명령에 감히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바알의 예언자들 450명이었다. 그리고 아세라의 예언자들 400명(이들은 시돈 사람들일 거라고 한다)은 소환을 받았으나(19절), 출석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들은 이 처형을 면할 수 있었다. 아합과 아세벨은 자기들도 다행스럽게 화를 면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 아합을 라못길르앗으로 가라고 독려함으로써, 그를 파멸케 하는 도구 노릇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만다(22:6).

 

18:22 없음.

 

18:23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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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

기근이 풀리다(열왕기 상 18:41-46)

이스라엘은 개심해서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자인하게 되었고, 이 이상 자기들을 속이지 못하도록 바알의 예언자들을 처형시키는 일에 동의하게 되었으니, 비록 이러한 것이 충분한 개심에는 훨씬 못미치는 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 받으셨다. 그래서 이들이 이와 같이 선한 일을 행한 바로 그 날 저녁에(아무래도 그러한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문을 여시고, 그 땅에 한량없는 축복을 부어 내리셨으니, 이는 그들의 개심을 더욱 공고히 하였음에 틀림없다 할 것이다(학 2:18, 19 참조).

Ⅰ. 엘리야가 아합을 보내며 "먹고 마시라" 고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가 한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고, 또 비가 몰려오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서였다(전 9:7 참조). 아합은 온 종일 금식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 날이 기도하는 날이므로 경건을 위해서였든지, 또는 놀라운 기대의 날이므로 여가가 없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먹고 마시게" 라고 하고 있으니, 이는 비록 남들은 아무런 징조도 깨닫지 못하나 엘리야는 믿음으로 "큰 비의 소리" 를 이미 듣고 있기 때문이다(41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 되시는 예언자들에게 그 신비로움을 드러내 보이신다. 그러나 우리는 계시 없어도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이 그러하시리라는 것을 예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비는 "하나님의 강" 이다(시 65:9).

Ⅱ. 엘리야는 몸소 물러가서 기도하고(하나님께서 비를 약속하셨다 하더라도 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슥 10:1), 불로 응답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다시금 물로 응답해 주실 것을 간구한다. 그가 무슨 말로 간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1. 그는 생소한 곳으로 물러갔다. 즉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갔는데, 이는 매우 높기도 하고 지극히 은밀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갈멜산 꼭대기에 숨은" 자들에 관한 기사를 보게 된다(암 9:3). 그곳에는 엘리야 하나뿐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여러 사람 앞에 나서서 일하라고 하는 부르심을 받은 자는 더욱 더 하나님과 은밀히 지내고 홀로 그와의 교제를 유지하는 시간을 찾도록 애쓰지 아니하면 안 된다.

말하자면 그곳에서 그는 그 예언자로써 "그의 파수대" 에 섰던 것이다(합 2:1).

2. 그는 이상한 자세를 취하였다. 그는 겸손하고 경외하고 끈질기게 조르는 표로 땅 위에 꿇어 엎드렸으며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이는 곧 머리를 너무 숙여서 무릎에까지 닿았다는 뜻이다), 자신의 비천함을 나타내는 뜻에서 이처럼 스스로를 낮추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이같이 그를 영예롭게 하여 주셨다.

Ⅲ. 엘리야는 자기 사환에게 바다에서 즉 지중해에서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식별하게 되면 곧 자기에게 알리라고 명하였는데 그는 갈멜산 꼭대기에서 이미 그것을 크게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항해사들은 이 곳을 "캐이프 갈멜(Cape Carmel)" 이라고 부른다.

그 사환은 여섯 번이나 언덕 끝까지 나아가 보았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했고, 주인에게 희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엘리야는 계속해서 기도를 드리며 가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까지는 마음을 돌리지 않은 뜻으로 있으나, 계속해서 그는 희망에 가득 찬 구름을 발견할 수 있을까 하여 그 종을 보내고 있다. 그동안 엘리야는 조상 야곱의 결심, 즉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는 결심을 택한 것처럼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에만 전념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깊이 명심해 두어야 할 사실은 비록 열렬하게 믿고 의지하는 우리들의 간구에 대한 응답이 조속히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약해진다거나 중단하지 말고 계속해 순간 순간을 기도에 힘쓰도록 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결국 들어 응답하시지, 거짓말하지 않을 것" 이기 때문이다.

Ⅳ.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급기야 나타나서, 곧 온 하늘을 뒤덮고 땅을 적시게 된다(44, 45절). 놀라우리 만큼 큰 축복이란, 흔히 사소한 것에서부터 생기게 되며, 한 뼘이나 되는 길이의 구름에서 풍성한 소나기를 얻게 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사소한 일이 일어나는 시기를 얕볼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에서 큰 것을 바라고 기다려야 할 일이다. 이 구름은 곧 소멸되고 마는 (비록 이스라엘의 미덕이 그와 같기는 하였지만) 아침에 이는 구름과 같은 것이 아니라, 흡족한 비를 일으키되(시 68:9) 보다 더 많이 본격적으로 내리게 하는 그러한 구름인 것이다.

Ⅴ. 여기에서 엘리야는 서둘러 집으로 가라고 아합을 재촉하고 자신도 그를 수행하였다. 아합은 편안하고도 당당하게 마차를 타고 갔다(45절). 그러나 엘리야는 아합 앞에서 도보로 달려갔다. 만일 아합이 엘리야가 받아 마땅한 존경을 표시하였더라면, 내시가 빌립에게 하였듯이 엘리야를 자기 마차에 함께 동승시켰을 것이며, 이스라엘의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존경을 표명하고 왕정개혁에 대한 문제를 그와 협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타락이 뉘우침을 능가하여 벨릭스가 바울을 물러가게 하고, 보다 형편 좋을 때 다시 협의하자고 연기한 것과 같이, 일부러 엘리야를 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합이 엘리야로 하여금 동승하도록 하지 아니했으므로, 엘리야는 아합의 마부 가운데 한 사람인양 "그 앞에서 달려" 가고자 했다(46절).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려 주신 큰 영광으로 교만해 진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고 그가 비록 신실하게 문책했지만 시정 문제에서는 조금도 그에 대한 존경이 감해지지 않았음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때에는 비록 누구보다도 위대해 보이지만, 세속적인 풍모에 대해서는 전혀 애착이 없다는 점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한 것은 이 세상에 속한 임금들에게 맡겨 두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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