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의 처음 예언(열왕기 상 17:1-7)
엘리야의 기사는 다소 돌연히 시작되는 듯한 감이 없지 않다. 예언서가 시작되면 대개는 그 선지자의 혈통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나오며 그가 누구의 아들이며 어느 지파 출신이라는 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말하자면 구름에서 떨어진 것 같은 존재다. 멜기세덱처럼 아비도 어미도 자식도 없는 듯이 갑자기 엘리야만 등장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가 하늘로부터 파송된 천사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도는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passion)이 같은 자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고 있다(약 5:17). 이 말씀은 아마 엘리야가 인간의 공통된 약점을 띄기 쉬웠다는 것 뿐만 아니라 그가 격정(strong passion)의 사람이어서 여늬 사람보다 열혈적이고 열성적이며 따라서 동시대의 겁없는 죄인들을 다루기에 더 적합하였다는 것까지 시사하는 말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적재를 적소에 맞추시는 솜씨는 이토록 놀라우시며 그렇게 하여 자신의 의도를 성취하시는 것이다. 거친 성미의 소유자는 거친 일에 부르심을 받는다. 종교 개혁은 얼음을 깨뜨리는 마르틴 루터와 같은 인물을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그의 이름은 엘리아후(Elijahu)였다. 즉 "그는 내 하나님 여호와시다" 는 의미이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는 나를 보내시는 분이시고 나를 인정하고 지지해 주실 분이시다. 그분은 내가 이스라엘을 인도해 돌아 갈 분이시며 오직 그분만이 이 위대한 사업을 성취하실 수가 있다.2. 그의 출신지. 그는 요단 저편에 있는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중 하나였다. 따라서 갓 지파나 므낫세 반지파에 소속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길르앗은 이들 지파에서 분배되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가 원래부터 이들 지파의 출신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의 부모가 모호하다고 하여 나중 그의 명성이 손상을 입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사람이 어디 출신인가 물어 볼 필요가 없다. 다만 어떤 인물인가를 알아 봐야 할 뿐이다. 선한 것이라면 나사렛에서 나온 것인들 무슨 문제가 되는가!(요 1:46) 이스라엘이 심한 부상을 입고 나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길르앗으로부터 이 유향과 의사를 보내 주셨던 것이다(렘 8:22 참조). 그는 길르앗 지방의 한 마을인 디셉을 따라 디셉 사람이라고 호칭되었다. 엘리야 기사의 서두에서 우리는 두 가지 설명을 읽게 된다.
Ⅰ. 그는 기근을 어떻게 예언하였는가? 가뭄은 오래 계속되고 쓰라릴 터였다. 이스라엘은 그 죄악에 대해 기근의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토록 비옥하던 땅이 가뭄 때문에 불모지로 화하며 그것은 그 땅에 사는 거민의 불의로 인함이라는 것이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가서 이 사실을 고하였다. 통치자에게서 민심을 이반시키기 위해 백성에게 가만히 퍼뜨린 것이 아니라 그 땅을 개혁할 권세가 있는 왕에게 정정당당히 이 일을 선포하여 심판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이 일을 예언하면서 그가 아합에게 우상 숭배와 딴 악에 대하여 책망하고 회개와 개혁이 없다면 그 땅에 심판이 내릴 것이라고 말했음직하다.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 하리라." 즉 "왕이 내게서 다시 말을 듣게 될 때까지는 아무 것도 기대치 마시오" 란 뜻이다. 사도는 우리에게 이것을 예언으로서 뿐만 아니라 기도로서도 이해하라고 가르쳐 준다(약 5:17, 18). 그 기도의 말씀은 구름의 문을 여닫는 열쇠였던 것이다. 그는(이스라엘의 탈선에 대한 거룩한 분노와 그 심판이 무시당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거룩한 열심에서)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런즉 하늘은 그가 비오기를 기도할 때까지 그의 기도대로 놋과 같이 되었다. 이 기사를 암시하여 계시록에서는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오지 못하게 하였다" (계 11:6)고 하나님의 증인에 대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리고 있다.
1. 주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아합은 그런 분을 버렸다는 것.2. 그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아합이 섬기는 벙어리 잡신이나 죽은 우상과 같지 않으시다는 것.
3. 엘리야 자신은 공직을 맡은 하나님의 종이며 하나님께로부터 파송된 사자라는 것. 그의 말은 이렇다. "그분은 내가 그 앞에 서서 섬기는 하나님이시다. 나는 그분을 대표한다. 나는 바알의 선지자와 아세라의 선지자에게 도전하여 그분 대신에 서 있으며 그분의 이름으로 나는 말하는 것이다."
4. 이스라엘 왕국이 현지는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고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우상 숭배를 노여워하시고 가뭄으로 그들을 징계하시리라는 것. 하나님께서 비를 억제하셨을 때는 그들이 섬기던 신들로서도 비를 내리게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열방의 허무한 것 중에는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렘 14:22). 가뭄은 그들의 무력성을 효과적으로 입증할 터였다 동시에 그것은 선도 악도 행할 능력이 없는 것들에게 호소한답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버린 자들의 우매성을 증명할 것이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하는 엄숙한 맹세로써 이 예언을 확증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생명이 그 예언의 성취에 개입되어 있으므로 아합으로 하여금 그 위협적 경고에 대해 더욱 경외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5. 엘리야는 자기가 하늘에 얼마만큼의 권세를 갖고 있는지 아합에게 알려 준다. 그것은 "내 말대로" 될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할 때는 얼마나 위엄을 가지고 말하는가! 그는 선지자의 임무 부여, 곧 "내가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웠노라(렘 1:10)" 는 위탁을 충분히 이해한 자였다. 기도의 위력과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유의해 보라. 하나님께서는 자기 사자들의 계획을 수행하신다.
Ⅱ. 그 기근 가운데서 엘리야는 어떤 보살핌을 받았던가?
1. 그는 어떻게 숨었는가?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릿 시냇가로 가서 숨으라고 명하셨다(3절). 아합은 즉각 그를 죽이려고 찾은 듯이 보이지는 않기 때문에 이 명령의 의도는 그의 생명을 보전하려는 데 있었다기 보다는 백성에게 대한 심판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엘리야가 공공연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면 그는 훈계와 중보에 의하여 백성에게 축복이 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재난의 기간을 단축시켰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뭄이 3년 6개월 동안 계속되도록 결정하셨다. 따라서 그 동안은 잠적해 있도록 엘리야에게 명하신 것이다. 예언의 실시는 엘리야의 말을 따라 좌우될 것이었으므로 엘리야가 은둔해 있어야 만이 형 집행의 철회는 탄원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하나님께서 한 나라에 대해 뽑으며 파괴한다는 것을 말씀하실 때에는, 자기 노를 돌이키게 하려고 그 틈바구니에서 중재하려는 자들을 제외시킬 이런 저런 방도가 마련되어 있다. 착한 사람들과 선한 목사들이 숨으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백성에게 흉조가 된다. 하나님께서 지면에 비를 내리시기로 작정하셨을 때는 엘리야더러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고 명하셨다(왕상 18:1). 그러나 본 장에서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인적이 드물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에 가서 그야말로 혼자 거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그는 거기서 사람의 눈에 띄지 않았다. 아마 냇가의 갈대 속에 은신했을 것이다 섭리가 우리에게 고적한 곳으로 은퇴할 것을 요구하실 때에는 묵묵 히 거기에 따르는 것이 온당하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쓸모가 없을 때 참고 있지 않으면 안되며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없을 때는 은인 자중하고 있어야만 한다.
2. 그는 어떻게 기갈을 면했는가? 그는 거기서 기도와 명상 외에 달리 할 것이 없었으므로(그것이 후일 그의 유용성의 준비에 도움이 되었다) 하나님의 일을 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의무의 길에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 먹게 해 주신다. 참으로 그는 기근의 날에도 배를 채우며 충족하게 될 것이다(시 37:19). 여자 곧 교회가 광야로 도망할 때 거기서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즉 3년 6개월간 양육되도록 보살핌을 받게 된다(계 12:6, 14). 이 기간은 엘리야가 은신한 기간과 꼭 같다. 엘리야는 시냇물로 목을 축여야만 했다. 그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주는 당번으로는 까마귀가 지정되었고(4절) 또 그 까마귀는 그 일을 실천하였다(6절).(1) 양식은 풍족하고 훌륭하며 끊이지 않았다. 떡과 고기가 하루에 두 번씩 공급되었으며 일용할 양식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엘리야가 이세벨의 상에서 먹은(왕상 18:19)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들보다는 호화판으로 지내지는 못했으나 오바댜에게 떡과 물로 부양되던 여호와의 나머지 선지자들(18:4)보다야 나았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다. 음식에 대해 까다롭고 진미를 찾으며 맛난 것과 별미를 좋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종 특히 선지자 된 하나님의 종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체력만 유지된다고 할 것 같으면 미각을 즐겁게 해 주지 못한다고 해도 무슨 상관이 있는가! 우리는 호의호식하는 자들을 부러워하기보다 거친 음식일망정 맛나게 먹고 우리가 먹다 남긴 찌꺼기라도 감지덕지할 사람이 얼마나 많으며 우리가 그런 자보다 더 낫다는 것을 명심해야 마땅하다. 엘리야에게는 한 번에 꼭 한 끼만 조석으로 배달되었는데 이는 그에게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였다.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사는 자들은 섭리가 베풀어 주시는 대로 먹고 살아갈 줄 알아야 하며 그 날의 양식은 그 날에 맡기도록 배워야 한다. 오늘의 양식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내일의 양식은 내일에 맡기란 말이다.
(2) 음식 조달자는 정말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까마귀가 그에게 음식을 가져왔던 것이다. 오바댜나 그외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던 이스라엘인들은 기꺼이 엘리야를 접대하려고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혼자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비상한 방법으로 공궤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메뚜기와 석청을 먹던 세례 요한의 예표였다. 하나님께서는 나중처럼(왕상 19:5) 또 우리 구세주께 그랬던 것처럼(마 4:11), 천사를 보내어 엘리야에게 시중들게 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차라리 본성이 다른 날개 달린 사자를 보내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에는 지극히 천한 미물에 의해서도 극히 강한 용사를 이용하는 것 만큼이나 효과적으로 당신의 의도를 충족시킬 수 있으시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함이다. 까마귀가 이 양식을 어디서 가져 왔으며 그 음식은 어디서 어떻게 요리되었으며 정직하게 가져온 것인지에 대해 질문이 제기된다면 우리는 야곱처럼(창 27:20)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로 순적히 만나게 하셨다" 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땅도 그의 것이며 거기에 충만한 것도 세계와 그 안에 거하는 것도 다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까마귀인가?
[1] 까마귀는 맹금류이다. 먹을 것을 보면 게걸스레 잡아 먹고 그에게서 고기를 외려 빼앗아 먹거나 그의 눈을 쪼아 먹을 상 싶은(잠 30:17) 새이다. 그러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온다" (삿 14:14)는 삼손의 수수께끼는 다시 해석할 수도 있다.
[2] 까마귀는 부정한 동물이어서 모든 까마귀 종류는 율법에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레 11:15). 그런데도 엘리야는 까마귀가 가져 온 음식이라 하여 더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양심을 위하여 묻지 않고 먹고는 감사하였다(고전 10:27 참조). 노아에게는 비둘기가 까마귀보다 더 신실한 사자였으나 엘리야에게는 까마귀가 신실하고 변치 않는 사자였다.
[3] 까마귀는 곤충과 썩은 고기를 먹고 사는 새이다. 그런데도 까마귀들은 엘리야 선지에게 고기와 건전한 음식을 가져다 주었다. 남에게는 생명의 양식을 갖다 주는 자들이 자신은 양식 아닌 것을 취한다는 것은 유감된 일이다(사 55:2).
[4] 까마귀는 소량의 음식밖에 가져 올 수 없었고 그나마도 그것은 얼치기 음식이었는데 엘리야는 자기가 갖고 있던 것이나 진배없이 만족해 하였고 성찬을 대접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요기하게 됨을 감사하였다.
[5] 까마귀는 새끼를 제대로 잘 돌보지 않으며 먹이지 않는 동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는 까마귀가 선지자를 먹여 살리게 된다. 젊은 사자와 까마귀는 궁핍하여 주릴지언정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그렇지 않다(시 34:10).
[6] 까마귀는 특별하신 섭리로 양육되는데(욥 38:41; 시 147:9) 여기에서는 선지자를 봉양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속한 자에게 대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인자를 체험하였는가?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그에게 속한 자들한테 친절히 하는 일을 의무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 모든 피조물에게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권세를 인식하는 것.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위해서든 자비를 위해서든 모든 피조물을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능히 사용하실 수가 있다.
둘째, 최대의 곤경 중에도 하나님 가운데서 담대하며 하나님을 불신하지 말 것.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도 식탁을 차리실 수 있으셨고 까마귀를 자기 선지자의 음식 배달꾼이자, 요리사이자, 시중꾼으로 만드실 수 있으셨다. 그러신 분이 그 영광의 부요함을 따라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능력이 없겠는가!
엘리야는 한참동안 이와 같이 홀로 식물을 먹고(욥 31:17) 물을 공급받았다. 자연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 시내로부터 여늬 방법으로 얻을 수 있던 물도 그가 기적으로 얻게 되기 전에는 떨어져 버렸었다. 그러나 자연의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이 무한하시다. 엘리야의 시냇물은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말라 버렸다(7절). 하늘이 저버리게 되면 땅도 물론 저버리게 된다. 우리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것은 전부 그렇다. 여름철의 시내처럼 우리에게 극히 필요할 때에 우리는 그것을 손에 넣지 못한다(욥 6:15). 그러나 결코 마르지 아니하는 한 시내가 있어서 하나님의 성을 기쁘게 하며(시 46:4)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있다(요 4:14)는 것은 우리에게 위안이 된다. 주여! 우리에게 그 생수를 주시옵소서!
사르밧 과부(열왕기 상 17:8-16)
우리는 엘리야에게 대한 보호 조치가 계속되고 은둔한 가운데 있는 그에게 양식이 계속 공급된다는 기사를 여기서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을 친구로 모시고 있는 자들은 멸망과 기근을 비웃을 것이니(욥 5:22) 그가 보호해 주시고 부양해 주시는 친구이시기 때문이다. 그릿 시내는 말라 버렸으나 자기 백성에게 대한 하나님의 배려와 친절심은 이완되지 않고, 결핍되지 않았으며, 전과 꼭 같으며 주를 아는 자에게는 그 인자하심이 여전히 계속되고 연장된다(시 36:10). 그릿 시냇물이 고갈되었을 때 요단강은 마르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째서 엘리야를 요단으로 보내지 않으셨을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먹여 살리시는 데에 다양한 방법을 갖고 계셔서 어떤 한 가지 방법에 얽매여 계시지는 않다. 확실히 하나님께서는 이 점을 나타내 보이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기회를 제공하신다. 그 기회는 아는 사람이 생길 곳에서 쓸모있는 자가 되게 하는 기회였다. 하나님께서는 앞에서처럼 엘리야를 산 채로 파묻혀 있게 하시지는 않으신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Ⅰ. 그가 보냄을 받은 곳은 사르밧 또는 사렙다였다. 사르밧은 시돈에 속한 한 성으로서 이스라엘 지경 밖에 있었다(9절). 우리의 구주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이 불쌍한 이방인을 위해 오래 전에 예정된 하나님의 은총이 때가 차매 나타난 것이라고 주목하신다(눅 4:25, 26).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많은 과부가 있었다. 그중에는 엘리야를 자기 집에 영접할 사람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엘리야는 이방 도시이던 시돈의 한 성으로 보내심을 입고 거기에 몸을 나타냄으로써 그 땅을 존귀케 하며 복되게 하였다. 그래서 엘리야는-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가 말하는 대로-이방에게 속한 첫 선지자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열방의 우상 숭배로써 스스로 부패하였고 심지어 열방보다 더욱 더 악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을 세상의 부요한 것으로부터 쫓아내어 마땅하다. 엘리야는 자기 동포에게 미움을 받아 추방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후일 사도들이 그런 명령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행 18:6) 이방인에게로 발길을 돌린다. 그러나 하필이면 시돈의 성읍인가? 아마 이것은 당시에 이스라엘의 사무치는 죄였던 바알 숭배가 시돈 사람이었던 이세벨(왕상 16:31)과 함께 거기서 갓 들어왔던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그는 시돈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래야 그 우상 숭배의 파괴자는 바로 시돈에서 데려오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선지자, 나의 개혁자를 바로 시돈에서 불렀노라." 엘리야의 최대의 원수는 이세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세벨의 악의가 무력함을 증명하시기 위해 바로 이세벨의 나라에서 은신할 곳을 찾아 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시돈 지방에 한 번 가신 것 외에는 이방인 중에 가시지 않으셨다(마 15:21)
Ⅱ. 엘리야를 접대하도록 지정된 사람은 시돈에서 부유한 상인 중 한 사람이거나 오바댜와 같이 권세있는 자가 아니었다. 오바댜는 아합 집의 장관으로서 선지자들을 공궤한 자이다. 한 불쌍한 과부, 즉 궁핍하고 고독한 과부가 엘리야 선지의 공궤를 하명받은 것이다(즉 능력과 의향의 양면에서 그렇게 되었다). 세상의 약하고 미련한 것들을 사용하시고 그런 것들에게 존귀를 입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며 또한 그의 영광이다(고전 1:27).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의미에서 과부의 하나님이시며 과부들을 먹여 주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 무엇을 갚아야 할지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Ⅲ. 사르밧에서 그에게 제공된 양식. 섭리는 과부로 하여금 성문에서 꼭 안성맞춤으로 엘리야를 만나게 하셨다. 엘리야와 과부간에 있은 일에 대한 언급에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1. 과부의 형편과 품성.(1) 그 여인은 매우 가난하고 핍절하였던 것같이 보인다.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 약간밖에 먹고 살 거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가장 형편이 좋을 때에도 궁핍하였거든 하물 며 모두가 굶주리는 기근에는 그 형편이 최후의 극한 점에 이르지 않았겠는가! 그 여인은 자기가 가진 소량을 먹고 나면 모르긴 하나 그와 아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줄로 전망하고 있다(12절). 그 여인은 땔감도 없었다. 종이 없으므로 손수 길거리에서 나뭇가지를 줍지 않을 수 없었다(10절). 이렇게 하여 이 과부는 대접하기보다 적선을 받아야 할 형편이었던 것이다. 엘리야는 바로 이런 여인에게 보냄을 받은 것이다. 까마귀가 그를 먹여 주던 때와 마찬가지로 계속 섭리에 의지하여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그 여인에게 보내신 것은 자기 계집종의 비천함을 긍휼히 여기셨음이니 곧 그 여인에게서 구걸하려 함이 아니라 그 집에 하숙시키고자 함이었으며 선지자의 밥상에 대해 후히 지불하시고자 함이었던 것이다.
(2) 그 여인은 매우 겸손하고 부지런했던 것 같다. 엘리야는 그 여인이 나뭇가지를 주워서 그 여인 자신의 빵 구울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10, 12절). 그 여인은 자기 처지를 돌이켜 생각하였으나 자신의 곤경을 불평하지 않았으며 비를 내리지 않으시는 섭리와 다투지도 않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섭리에 잘 순응하였다. 환란 날에 이와 같은 기질을 지닌 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존귀와 구원을 얻을 준비가 가장 잘 되어 있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3) 그 여인은 매우 자비롭고 관대하였다. 이 낯선 자가 가서 마실 물을 좀 갖다 주기를 희망하였을 때 그 여인은 첫 마디에 즉시 갔다(10, 11절). 그 여인은 물이 귀하다는 것을 들어 거절하지도 않았고 물 한 그릇 따라 오는 데 대해 무엇을 내놓을지 묻지도 않았다(그 때는 물이 곧 돈만치 가치가 있었다). 그 여인은 그가 나그네 곧 이스라엘인이란 것을 넌즈시 말하지도 않았다. 시돈인들은 아마 사마리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인과 상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요 4:9). 그 여인은 기아로 말미암아 허약해진 것이나 자신의 급한 일을 들어 변명하지 않았다. 그의 심부름을 가기보다 해야 할 딴 일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줍고 있던 나뭇가지를 놔 둔채 그를 위해 물을 가지러 갔던 것이다. 아마 그 여인은 엘리야의 근엄한 풍모에 감동되어 물 떠오는 일을 더 기쁘게 여겼을 것이다. 우리는 낯선 사람일망정 기꺼이 친절한 일을 해 주어야만 한다. 우리는 설령 고통받는 자에게 줄 것이 없는 경우 그 때문에라도 더욱 더 그들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잔의 냉수는 떠 가지고 오는 수고밖에 들 것이 없지만 결코 그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4) 그 여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크게 신뢰하였다. 과부는 자기에게 남아있는 밀가루와 기름이 얼마나 소량인지 자기 모자가 겨우 먹을 정도라는 것을 얘기 하였다. 그러나 엘리야는 자기를 위하여 떡 하나를 만들되 먼저 자기 것을 만들고 난 뒤 그 여인과 그 여인의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고 명하였다. 이것은 그 여인의 믿음과 순종심에 대한 큰 시험이었다. 잘 살펴 보면 그토록 작은 일로 최대의 시험이 성립되는 것 같다. 그 여인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으리라. "아이들을 먼저 먹게 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선은 가정에서부터 비롯하는 법입니다. 저는 가진 것도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언제 그것이 떨어질지, 또 어디서 생길지도 모르는 판국에 주다니요? 아무도 제가 주리라고 기대할 자가 없습니다." 나발보다 오히려 이 여인이 "내가 내 가루와 기름을 취하여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는 자에게 주겠느냐?" (삼상 25:11)고 물을 만하였다. 엘리야는 사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언급하였는데(14절) 그것이 시돈 여인에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또 설사 이 여인이 여호와란 이름에 대해 경외심을 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이 나그네가 여호와의 선지자이며 그의 이름으로 말할 만한 근거가 있는지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굶주린 방랑자가 그 여인을 속이기란 식은 죽 먹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인은 이 모든 반대의 념을 극복하고 약속에 의지하여 명령에 순종한다.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라" (15절).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마 15:28). 이와 같은 믿음은 이스라엘에서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마 8:10). 모든 점을 참작할 때 이 일은 두 렙돈밖에 없으면서 그것을 전부 연보 궤에 넣은 과부의 행위(막 12:42)를 능가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여인은 선지자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즉 이 일로 여인이 손해보지 않을 것이며 이자까지 쳐서 보상받게 되리라는 말을 믿은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는 하나님께 대한 봉사에 자신을 노출시키고 빈털털이로 만드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즉 적은 것 중에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바치며 그의 몫을 먼저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섬길 것이다. 하나님과 거래하는 자들은 신용으로 거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면 딴 모든 것이 더해질 것이다. 율법에 의하면 첫 소산은 하나님께 속하였고 십일조는 맨 먼저 떼어야 했으며 처음 가루 떡으로 거제를 드려야 했다(민 15:20, 21). 이 여인의 믿음은 자신을 부인하고 신적 약속에 의존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확실히 증가하였다. 이러한 믿음의 증가는 그 여인의 기름이 많아진 게 섭리의 나라에서 큰 기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은혜의 나라에서 큰 기적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소망에 대해 믿고 소망 가운데서 순종할 수 있는 자는 복이 있다.
2. 하나님께서 이 여인의 손님에게 대해 베푸시는 배려.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16절). 퍼낼 때마다 그 통과 병에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다 많은 양이 보태어졌던 것이다. 곡식이나 감람나무가 자라면서 불어간다고 해도 이들이 사용되는 가운데 증가하는 것만은 못하였다-홀(Hall) 주교는 그렇게 말한다. 보통의 섭리 속에서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는 것은(고후 9:10) 흔하기 때문에 간과하기 쉬운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에 대한 실례이다. 가루와 기름은 저축하는 가운데 많아 진 것이 아니라 소비하는 가운데 증가되었던 것이다. 흩어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잠 11:24). 비록 적은 것이더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축복하시는 때에는 그것이 기대 이상의 굉장한 효과를 나타낼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풍성한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이 그것을 불어 버리실 때에는 거의 유야무야한 상태로 되어 버린다(학 1:9; 2:16).
(1) 이것은 선지자를 부양시켰다. 그가 매일 먹는 떡은 계속적인 기적의 산물이었다. 엘리야는 그때까지 떡과 고기로 배를 채웠었는데 이제는 떡과 기름으로 요기하게 되었다. 그때 사람들은 우리가 버터를 사용하듯 기름을 사용하였다. 만나는 이 두 가지를 다 의미하였으니 이는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과 같았기 때문이다(민 11:8). 엘리야는 하루에 두 번씩 고기를 먹어 오다 이제는 전혀 입에 대지도 못하게 되었지만 이를 감사히 여겼다. 육류를 상식해 왔기 때문에 고기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람, 즉 최소 하루 한 번은 고기를 먹어야 하는 자는 만족스럽게 엘리야한테 하숙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기적의 떡일망정 떡만으로는 살 수가 없었을 것이다.
(2) 그것은 가난한 과부와 그의 아들을 부양시켰으며 선지자를 접대한 데 대한 보상이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과 사역자들에게 친절을 베풀어서 손해될 것은 하나도 없다. 선지자를 영접한 그 여인은 선지자의 상도 받게 되었다. 그 여인은 그에게 방을 제공하였는데 그는 온 가족이 먹을 수 있는 양식으로 되갚아 주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에게 문을 열어 주는 자들한테 들어오셔서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자기와 더불어 먹게 되리라고 약속하셨던 것이다(계 3:20). 본문의 엘리야처럼 그는 자기를 영접하는 자를 그 자신의 향응뿐만 아니라 그들의 향응에도 초대하신다. 상은 얼마나 봉사에 부합한지 살펴보자. 여인은 관대하게도 선지자에게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주었다가 자신과 자신의 아들을 위한 많은 떡으로 보상받았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독자를 하나님께 바쳤다가 많은 무리의 아비가 되리라는 말씀을 듣게 되었다. 경건한 일이나 자선에 투자한 것은 가장 높은 고리로 가장 안전하게 금리를 놓는 셈이다. 이 가난한 과부는 선지자에게 보잘 것 없는 한 덩어리의 떡을 주었을 뿐인데 그 보답으로 과부와 그 아들은 여러 날 동안 먹게 되었고(15절) 모두가 굶주리는 기근의 시기에 2년 이상이나 연명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으로 음식을 얻게 되고 엘리야와 같은 훌륭한 분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니 그 음식은 갑절 이상 맛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는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게 되리라고 약속한다(시 37:19).
과부 아들의 소생(열왕기 상 17:17-24)
우리는 여기에서 과부가 선지자에게 베푼 친절에 대해 계속 보상받게 되는 장면을 목도한다. 마치 살리는 일이 사소한 일이기라도 하듯 여인의 아들이 죽자 그는 그를 소생시켜서 여인에게 돌려 주었다. 다음 사실을 눈여겨 보자.
Ⅰ. 아이의 병과 죽음. 그 아이는 여인의 독자였던 것 같다. 그 아이는 과부살이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 아이는 기적에 의해 먹이를 공급받았다. 그러나 질병과 죽음으로부터 안전히 보호받지는 못하였다. "너희 조상은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으나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떡이 있으니" 이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해 준 것이니라(요 6:49, 50). 과부에게 있어서 이 고통은 육체에 가시 같았으니 이는 그 여인에게 베푼 은총과 존귀로 인하여 여인이 너무 자고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1. 과부는 선지자를 돌보는 사람이었다. 선지자를 부양하는데 종사하고 있었으므로 그 여인은 여호와께서 선히 행해 주실 것으로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자기의 아들을 여의고 있다. 우리가 의무의 길에 서 있고 하나님께 두드러진 봉사를 하고 있는데 몹시 쓰라린 고난이 닥쳐오는 경우 우리는 이를 이상히 여겨서는 안 된다는 데 유의하자.2. 과부는 그 자신이 기적에 의해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그 여인은 하늘로서 내려오는 현저한 축복으로 비용을 들이거나 걱정하는 일이 없이 가계를 훌륭히 꾸려 나가고 있었다. 여인은 한창 이 모든 만족을 누리는 중에 이같은 고난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총과 호의가 극히 분명하게 나타난 때에도 우리는 섭리의 책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의 산은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떨리는 것을 항상 기뻐해야 한다.
Ⅱ. 여인은 이 고난을 당하게 되자 선지자에게 가련한 호소를 한다. 아이는 갑자기 죽은 것 같이 보여진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인은 아이가 아플 동안에 낫게 해 달라고 엘리야에게 사정했을 것이다. 여인은 아이가 자기 가슴에 안겨 숨을 거두었기 때문에 구출될 수 있다는 희망을 걸기 보다 자기 슬픔을 발산하기 위해 선지자에게 간언하고 있다(18절).
1. 여인은 정열적으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 여인이 양식이 떨어져 죽음을 각오했을 때는 자신과 그 자식은 죽음에 대해 온화한 어조로 말했었다(12절). "우리가 먹고 죽으리라." 그러나 이제 아들이 죽자-굶어 죽는 것만치 비참한 죽음도 아닌데도-여인은 극히 혼란을 일으킨다. 우리는 멀리 있는 고난은 대수롭지 않게 말할 수 있으나 일단 우리에게 당하면 우리는 놀라게 된다(욥 4:5). 그 때에는 이 여인이 침착하게 말했으나 이제는 경황 중에 부르짖는다. 그 자식의 죽음이 여인을 놀라게 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한창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고 있을 때 예기치 못한 재난이 갑자기 엄습하면 마음을 침착히 가지기가 어렵다. 여인은 그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르면서도 마치 그가 자기 아들을 죽게 한 장본인이듯 힐난하며 이전의 자비와 기적을 잊어버리고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원망하기를 서슴치 않는다. "내가 당신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습니까?(그렇게 해독하는 자도 있다) 내가 어떤 일로 당신의 감정을 상하게 하였으며 내 의무에 결여된 것이 무엇입니까?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욥 10:2)."2. 그러나 여인은 스스로 참회하는 말을 하고 있다. "당신은 이 고난의 원인으로서 내 죄를 생각하고 고난의 결과로서 내 죄를 생각나게 하려고 오셨나이까?" 이 여인은 아마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쳐서 기원한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죄를 의식하고-아마 이전에 시돈인의 신이었던 바알을 숭배한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꼈을 것이다-엘리야가 자기를 치기로 기원한 것이나 아닌지 염려하고 있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하나님께서 우리의 위안물을 제거하실 때에는 그가 우리 죄를 기억하시는 때이다. 우리 죄는 우리를 치는 것이며 그것은 아마 경과한지 오래더라도 우리가 젊은 때 저지른 범죄일 것이다(욥 13:26). 우리의 죄는 우리 자녀를 죽인다는 것을 잊지 말자.
(2)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우리를 치는 우리 죄를 기억하실 때에는 그로써 우리가 우리 죄를 기억하고 회개하게 하시려는 의도를 가지시는 때이다.
Ⅲ. 이 경우를 당하여 선지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 그는 여인의 간언에 대답하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께 가져갔다. 스스로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알지 못하여 그는 사건을 하나님 앞에 송치시켜 놓았던 것이다. 그는 죽은 아이를 어미의 품에서 받아 가지고 자기 침상에다 갖다 놓았다(19절). 아마 그는 죽은 아이에게 각별히 두터운 정을 느껴 왔으므로 동정심에서가 아니라 이 일을 자신의 불행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는 자기 방으로 물러갔다.
1. 그는 아이의 죽음에 대하여 겸손하게 하나님을 설득한다. 그는 죽음이 아이를 친 것은 하나님의 명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주께서 이 재앙을 내리셨나이다." 성 중의 가정에는 이런 유의 재앙이 없으니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시지 않았겠는가? 그는 불쌍한 어머니에게 임한 재난이 너무 과중하다는 것을 들어 말한다. "이것은 과부에게 내린 재앙입니다. 주께서는 과부의 하나님이셔서 과부에게는 좀체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엎친데 덮치는 격으로 고난당한 자에게 고난을 더하는 셈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역설한다. "이 여인은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입니다 나의 하나님 되신 주께서 내게 가장 잘해 준 자에게 재앙을 내리시렵니까? 나는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내가 가는 집에 죽음을 동반한다면 딴 사람들은 나에게 대접하기를 두려워할 것입니다."2. 그는 하나님께 아이를 소생시켜 주실 것을 간곡히 빈다(21절). 우리는 죽은 자가 소생한 기사를 이 앞에서 읽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엘리야는 신적 충동에 의하여 이 아이의 부활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도 이 같은 기도를 하도록 보증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금식하며 기도하였던 다윗도 자기 아이를 소생시킬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삼하 12:23). 그러나 엘리야는 기적을 행하는 권능이 있었다. 다윗은 이런 권능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는 아이 위에 몸을 펴서 엎드렸다." 이는 그 자신이 직접 이 일에 연루(連累)되기 위해서였으며 자신이 얼마나 많은 느낌을 받았고 그의 소생을 얼마나 염원하는지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호흡과 온기로써 그에게 생명을 넣을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 하나님이 권능으로 행하실 일과 은혜로써 죽은 영혼을 일으키사 영적 생명을 얻게 하는 일에 대한 표적을 제시하기 위해서였다. 성령께서는 죽은 영혼에게 임하셔서 그들을 가리시고 그들에게 생명을 넣어 주시는 것이다. 엘리야의 기도는 각별하다.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이 기도는 영혼이 육에서 분리된 상태에 있으며 결과적으로 영혼의 불멸성을 명백히 가정하고 있다. 그로티우스(Grotius)는 하나님께서 이 기적으로 영혼 불멸설에 대한 암시와 증거를 제공하시고 자기의 고난받는 백성을 격려하시려는 의도를 가지셨다고 생각한다.
Ⅳ. 아이의 부활과 이로써 그 어머니가 얻은 큰 만족. 아이는 다시 살아났다(22절). 기도의 위력과 기도를 들으시는 분의 권능을 유의하라. 그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이시다. 엘리야는 그 아이를 과부에게 데려다 주었다. 우리는 그 어머니가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그 여인에게 그 아기가 그녀의 소생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네 아들이 살았느니라. 이 아이가 네 소생이며 남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살펴 보아라." 그 선한 여인은 이에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인 줄 아노라" 고 부르짖는다. 여인은 양식이 붓는 것을 보고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자기 아들의 죽음을 너무 악의로 해석하다 보니 그를 의심하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선한 사람이라면 결코 자기에게 그와 같이 갚지는 않으리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하나님의 사람의 권능과 자비심을 다 구비하고 있다는 사실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고 극히 흡족히 여기게 되었다. 여인은 다시는 그런 점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어서 그가 지시하는 말씀에 완전히 순종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숭배하는 일에 헌신할 터였다. 이와 같이 아이의 죽음은-나사로의 죽음처럼, 요한복음 11장 4절-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선지자의 명예를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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