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열왕기상 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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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여로보암 왕의 아들의 병(열왕기 상 14:1-6)

여로보암이 하나님과 경건한 신앙에 대한 자기의 멸시를 얼마나 고집하였는지는 우리가 앞 장 말미에서 읽었다. 그런데 본 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집요하게 여로보암과의 논쟁을 계속하시는가를 읽게 된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때 그는 이기실 것이며 죄인들은 그 앞에서 굽거나 부서질 것이기 때문이다.

Ⅰ. 그의 아들이 병에 걸렸다(1절). 이 아들은 여로보암의 장자요 왕위 계승권자였을 가능성이 매우 짙다. 왜냐하면 이 아들이 죽자 온 나라가 그를 위해 슬퍼하였기 때문이다(18절). 왕자로서의 높은 신분과 젊은 왕자로서의 나이와 경건한 왕자로서의 천국에 대한 세력으로도 그는 질병 즉 위중한 질병을 면할 길이 없었다. 누구라도 자기의 건강이 계속될 것이라고 자신해서는 아니 된다. 건강한 동안에는 선한 목적을 위해 자기 건강을 선용해야 하는 것이다. "주여! 보시옵소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요 11:3). 주의 총애를 받던 자 곧 이스라엘이 사랑하고 애지중지하던 자가 병이 들었나이다." 여로보암이 제사장직을 악용하고 모독하였던(왕상 13:33) 그 때에 그의 아들은 병이 들었다. 질병이 우리 가정에 들어 올 때 우리는 우리 집안에 모종의 특정 범죄가 있지 아니한가를 조사해 보아야 한다. 고난을 보내시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돌이키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

Ⅱ. 여로보암은 그 아이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탐지하기 위하여 자기 아내를 변장시켜 선지자 아히야에게 보냈다(2, 3절). 그 아들의 병은 그의 아픈 데를 찔렀다. 자기 가문의 이 가지가 시든다는 것은 아마 자기 몸의 지체가 마르는 것(13:4)에 못지 않게 쓰라린 고통이 되었을 것이다 혈육의 정이란 이렇게 강렬하다. 우리 자녀는 일촌(一村)이란 것 말고는 우리 자신이나 다름없는 분신이다.

1. 이런 고난을 맞아 여로보암이 품은 큰 소원이란 그 아이의 어떻게 될 것 즉 그 아들이 살지 죽을지를 알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1) 여로보암이 만약 아이의 회복에 필요한 수단이 무엇이며 그에게 어떤 것을 주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고 싶어하였다면 훨씬 더 지혜로왔을 것이다. 그러나 아하시야(왕하 1:2) 및 벤하닷의 사례(왕하 8:8)와 더불어 본 장의 예로서는 그들이 재난에 대해 너무나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 모든 방법의 사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같이 보여진다. 그들이 환자가 살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면 그들은 병을 낫게 할 방법을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그가 죽으리라고 믿었다면 그런 방법 또한 소용없을 것으로 생각했을 테니까 말이다. 잠시 후면 나타날 일을 왜 선지자에게 설명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을까? 이것의 의무는 우리에게 속하였고 결과는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사실과, 목적을 제정하신 분이 수단도 제정하였다는 사실을 참작하지 못한 소치 때문이다.

(2) 여로보암이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자기와 다투시는지를 알고 싶어하고 선지자의 기도를 요청하며 우상을 타기하였더라면 보다 경건하게 될 터였다. 그랬더라면 그의 마른 손이 성하게 됐듯이 그의 아이도 회복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 잘못이나 의무에 대한 것보다 행운에 대한 것을 듣고 싶어 한다.

2. 여로보암은 자식의 운명을 알아 보려고 선지자 아히야에게 사람을 보냈다. 아히야는 이 때 실로에서 한미하게 은거하면서 소홀히 취급되고 있었다. 그는 노령으로 인하여 눈이 보이지 않았으나 전능자의 환상을 볼 수 있는 축복은 여전하였다. 환상을 보는 데는 육안이 필요없고 오히려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으면 은혜가 된다. 마음의 눈이 아주 열중하여 바라보고 조금도 곁눈질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로보암은 송아지 우상의 건립이나 제사장의 임명에 대한 자문을 얻으려고 아히야에게 사람을 파견한 것이 아니라 환란을 당하자 그에게 의지하였다. 즉 그가 섬기던 신들은 환란시에 그를 구출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여호와여, 전에는 주를 무시하던 자들이 환란 중에는 주를 앙모하나이다(사 26:16). 목사나 기도해 주는 친구들을 까마득히 잊었다가 질병을 통해 생각하게 되는 자들도 있다. 여로보암이 아히야에게 사람을 보낸 것은 그가 왕 될 것을 말해 준 때문이다(2절). "그는 이전에 좋은 소식을 전하였는데 이번에도 틀림없이 아름다운 기별을 전해 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로보암의 생각이었다. 범죄로 인해 위로 받을 자격이 없으면서도 목사가 선량하다는 이유로 자기들에게 평강과 위로의 말을 해 줄 것으로 기대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목사도 크게 그릇되게 만드는 자이다.

3. 그는 자기 아내를 보내 선지자에게 아이의 운명을 묻게 한다. 그가 자기 아내를 보낸 것은 그 여인이 이름도 대지 않고 딴 어떤 설명도 없이 "선지자님, 내게는 병든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회복될 것입니까? 회복하지 못할 것입니까?" 라는 질문을 거침없이 해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가슴은 아내에게 대한 신뢰감으로 넘쳤다. 아내는 그 말을 전하거나 답을 얻어 오는 일에 충실할 것이라고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가 이토록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모든 대신들을 다 꼽아봐야 없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병난 아들이 한사코 놓지 않으려는 어머니를 왜 보냈겠는가? 어머니는 가장 훌륭한 간호사이기 때문에 여로보암의 아내로서는 아들이 어떻게 될지 알아 보려고 실로에 가느니 보다 차라리 집에서 아들을 돌보는게 더 합당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여인은 간다면 incognito 즉 변장해 가지고 가야 했다. 복장을 바꾸고 얼굴을 가리며 변성명해 가지고 가야 했다. 그 여인은 궁중과 자기가 통과하는 지역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해야 했다(그런 심부름을 가는 게 자기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기라도 한 듯). 밤에 예수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처럼 이 여인이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라도 있었단 말인가! 아무리 큰 자라도 하나님의 선지자를 찾아보는 일은 하등 흠될 것이 없다.

이 여인이 변장을 해야 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선지자에게서 자신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선지자로 하여금 자기 아들에 관한 질문에만 대답하고 자기 남편의 변절이란 재미없는 화제에 끼여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자기 신분을 감추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도록 하기 위해 자기 신분을 감추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들은 목사에게 지시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목사를 순조로운 일에만 제한시키려 들고 하나님의 뜻을 자기들에게 다 전해 주는 것을 달가와하지 않는다(행 20:27). 이는 그것이 자기들에게 대한 선한 예언이 아닌 악한 예언으로 나타날까봐 두려워해서이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선지자에 대해 매우 이상한 견해를 품고 있었다. 그는 선지자가 아이가 어떻게 될 것을 확실히 말해 줄 수 있고 또 쾌히 말해 주리라고 믿었다. 그러면서도 아히야 선지가 그 아이의 어머니는 누구인지 알 수도 없고 알려고도 않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선지자가 미래의 두터운 암흑은 꿰뚫어 보면서 이 변장의 얇은 천은 꿰뚫어 볼 수 없다는 말인가?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기가 좋아하던 송아지와 꼭 같은 줄로 생각하였는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갈 6:7).

Ⅲ. 하나님께서는 아히야에게 여로보암의 처가 가까이 오고 있으며 그 여인이 변장하고 온다는 것을 알려 주셨다. 동시에 그 여인에게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도 상세히 가르쳐 주셨다(5절). 이 때문에 그는 그 여인이 문으로 들어올 때 이름을 불러 깜짝 놀라게 할 수가 있었고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자에게 그 여인이 누군지도 밝힐 수가 있었다(6절). "여로보암의 처여, 들어오라. 네가 어찌하여 다른 사람인 체하느뇨?" 선지자는 다음과 같은 것을 주목하지 않았다.

1. 그 여인의 신분.

그녀는 왕후였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는 그 여인에게 전할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았고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모든 자녀가 동일한 수준 위에 서 있다.

2. 그 여인의 선물. 선지자에게 물으러 오는 자들은 존경의 표시로 선물을 지참하는 게 통례였다. 선지자들은 그 예물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삯군이 아니었고 그 예물은 복채가 아니었다. 그 여인은 아히야에게 농촌에서는 상당하다고 할 선물을 가지고 왔다(3절). 그럼에도 선지자는 선물 때문에 그 여인에게 아름다운 말을 해야겠다는 부담감을 갖지 않고 꼭 전해야 할 말만 하였다.

3. 그 여인의 애써 자기를 숨김.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 자에게는 알은 체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예의라고 할 수 있으나 아히야 선지는 아첨꾼이 아니었고 조정의 신하도 아니었다. 그는 아첨하는 칭호를 줏어 섬기지도 않았다. 솔직하게 대한다는 것은 매우 좋은 것이다. 여로보암의 처는 첫마디로 자기가 믿어야 할 말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내가 명령을 받아 흉한 일을 네게 고하리라." 변장으로 자신을 하나님께로부터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발각되는 날 크게 낭패를 맛보게 될 것이다. 그 날에는 그들이 자신의 의도가 전혀 빗나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현재는 죄인들도 성도의 옷을 입고 나타나며 또 성도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너울이 벗겨지고 본색이 탄로나서 그들 자신의 이름으로 부름을 받을 때면 그 낯을 얼마나 붉힐 것이며 얼마나 떨게 될 것인가! "너! 패역하고 성실치 못한 외식자여! 내가 결코 너를 알지 못하니 썩나가라. 네가 어찌하여 다른 사람인 체하느냐?" 외식하는 자가 차지할 소식은 무거운 소식(한글 개역 성서:흉한 일)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 외모대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그 인간 됨됨이를 따라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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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로보암의 최후(열왕기 상 14:7-20)

우상을 세워 놓고 계속 숭배하는 자들이 여호와께 물으러 올 때에는 그들이 알기를 요구하는 대로가 아니라 그 우상의 많은 대로 응답하시겠다고 하나님께서는 결심을 천명하신다(겔 14:4). 본문에서 여로보암에게 내리신 대답도 그와 같다.

1.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부르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고 그들의 음행에도 불구하고 이혼장을 써주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최대의 위해를 가하고 그들을 타락시키며 하나님께로부터 그들을 떼내어 간 여로보암에게 복수하실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여로보암에게 베푸셨던 큰 은총을 들어서 그를 꾸짖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을 백성 중에서 곧 하층민으로부터 들어 올려 왕으로 삼으셨다. 그를 높여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게 하셨고 나라를 다윗의 집에서 찢어 그에게 주셨다.

우리가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기장(記帳)하듣 않든 하나님께서는 계산하시며 우리가 만약 은혜를 모르는 경우에는 그것들을 우리 앞에 열거하심으로써 우리를 크게 당황하게 하실 것이다. 우리가 은혜를 안다면 하나님께서는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신다.

3.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의 불경건과 타락 그리고 특히 우상 숭배를 힐책하신다. "너는 너의 이전 사람들보다도 더 악을 행하였다." 사울은 하나님께 배척당하였지만 우상을 섬기지는 않았다. 솔로몬이 우상을 숭배하였다고는 하나 노망기에 가서 이따금씩 그랬을 뿐이며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지는 않았었다.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명분으로 송아지를 세웠고 그것을 애굽에서 자기들을 이끌어낸 신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다른 신 곧 이방 신들로 칭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방인들이 이상한 신들을 숭배하듯 여로보암도 송아지를 통해 하나님을 섬겼으며 이로써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롬 1:25) 하나님을 실제의 하나님과 전혀 다른 분으로 나타냈기 때문이다. 다수의 무지한 숭배자들은 형상을 섬기는 데서 그 신앙을 종결시켜버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따위는 도무지 중시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금송아지였다. 그러나 금속의 고가성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하나님께 열납되기는커녕 도리어 그들은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게 되었고 그를 기쁘게 해드린다는 구실로 그에게 짐짓 모욕을 가하였다.

(1) 여로보암은 다윗을 자기 앞에 두지 않았다(8절). "너는 내 종 다윗과 같지 아니하다." 다윗은 과오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중 몇몇 과실은 악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섬기는 일을 중지하지 않았고 태만하거나 냉담해지지도 않았다.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충실히 고수함으로써 그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좇았다는 명예로운 평판을 획득하게 되었고 이 점에서 그는 그의 모든 후대자들에게 대한 사표로 간주되었다. 다윗처럼 행하지 않는 자는 선히 행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2) 그는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다. "너는 나를 네 등뒤에 버렸고 내 법과 나에게 대한 경외심도 버렸다. 너는 나에게 소홀히 하였고 나를 잊었으며 내 교훈보다 네 책략을 우선시 하였다."

4. 그는 여로보암가의 완전한 파멸을 예고하신다(10, 11절). 여로보암은 우상 숭배로써 자기의 통치를 확립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그 때문에 도리어 정권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가문의 파멸을 초래하였다. 그것은 매인 자나 놓인 자나 기혼자나 미혼자나 할 것 없이 모든 남자에게 미치는 보편적 멸망이었다.

(1) 그것은 수치스런 멸망이다. 분뇨는 보기 싫고 사람들이 치워버리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 거름처럼 일소될 것이다. 여로보암은 거름더미 잡신들을 섬겼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족을 큰 쓰레기더미를 치우듯 쓸어버리셨다. 고귀한 제왕의 가족이라 하더라도 악하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나을 것도 없다.

(2) 비상한 멸망이다. 그들의 시체는 거리의 개나 들의 새가 먹을 것이다(11절). 이와 같이 재앙은 죄인을 추격한다. 이 예언의 성취는 15장 29절에 나온다.

5. 하나님께서는 병든 아이가 곧 죽을 것이라고 예고하신다(12,13절).

(1) 그의 죽음은 그에게 대한 하나님의 자비였다. 그가 만약 산다면 죄악에 감염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기 아비 집의 파멸에 휩쓸려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죽음을 내리셨던 것이다. 그 아이의 품성에 대한 칭찬을 관찰해 보자. "여로보암이 집 가운데서 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 그는 하나님께 대한 참 예배를 애호하였고 송아지 숭배를 싫어하였다. 다음 사실에 주의하자.

[1]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고 선한 취향, 선한 목적, 선한 소원을 품는 자는 선한 자이다.

[2] 이런 종류의 선한 뜻이 있기만 하면 그것은 발견될 것이다. 그런 선한 뜻을 찾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눈여겨 보시고 기뻐하신다.

[3] 조그만 은혜라도 큰 자에게는 크게 효과가 있다. 권세자들이 신앙에 돈독한 것을 보기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주권자들이 독실한 신앙을 갖는 경우에는 이중의 영예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4] 어린 자들이 경건한 뜻을 품는 경우에는 특히 귀엽고 마음에 든다. 축소판 하나님의 형상은 그 안에 독특한 아름다움과 광채를 가진다.

[5] 악한 시대와 악한 장소에 살면서 선한 자들이 하나님의 눈에는 매우 빛나는 존재들이다.

여로보암의 집 가운데 선한 아이가 우뚝 서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낳은 기적이다. 그 집에 있으면서 물들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이글거리는 용광로 속에서 다치지도 않고 그을리지도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아이에 대한 배려를 살펴 보자. 여로보암 집의 모든 사람 중에서 유독 그만이 존귀하게 죽을 것이며 산 자들이 바라는 대로 매장되고 애도를 받게 될 것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별된 자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도 구별될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소망에 가득 찬 이 아이는 그의 가족 중 맨 먼저 죽는다. 하나님께서는 왕왕 당신께서 극히 사랑하시는 자를 극히 빨리 데려 가시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에게는 천국이 가장 적합한 곳이다. 이 땅은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2) 그의 죽음은 그의 가족에게 대한 하나님의 진노였다.

[1] 자기 가족을 개조시킬 수 있던 자가 취해 감을 입었다는 것은 그 집안이 파멸되리라는 징조였다. 의인은 이 세상에서 올 악한 것으로부터 보다 나은 세상에서 올 선한 것으로 옮겨진다. 가족 중 가장 훌륭한 자가 장사될 때 그것은 가족에게 대한 흉조이다. 귀중한 것을 가려내는 것은 나머지를 아궁이에 갖다 넣기 위함이다.

[2] 가문과 나라를 다 향상시켜야 할 자가 죽었다는 것은 동시에 집안과 나라에 대한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이 죽기 전에 귀가하지 못하리라고 하는 것은 그 불쌍한 어미의 불행을 더 가중시켰다. "네 발이 성에 들어갈 때에 그 아이가 죽으리라." 이것은 나머지 경고가 반드시 성취될 것에 대한 표징이었다(삼상 2:34).

6. 하나님께서는 딴 가계를 세워 이스라엘을 통치시키겠다고 예고하신다(14절). 이 예언은 잇사갈의 바아사에게서 이루어졌다. 바아사는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 재위 이년에 역모를 하여 나답과 그 일족을 살해하였던 것이다. "어느 때냐? 곧 이제라. 왜 내가 그 일이 멀리 있다고 말하지 않는 줄 아느냐? 그 일은 문 앞에 닥쳐 와 있기 때문이다. 그 일은 바로 지금 시행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죄인들에게 대한 일을 빨리 마무리 지으신다. 여로보암의 집에 대해서 바로 그렇게 하셨다. 그가 처음 등극한 지 24년도 채 되지 못해 그 일족은 멸절되었던 것이다.

7.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이 확립한 우상 숭배를 준봉한 데 대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예고하신다. 소경된 자가 소경을 인도하면 인도하는 소경이나 따르는 소경이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될 것이다. 여기에 예고되고 있는 내용는 다음과 같다(15절).

(1) 그들은 결코 편안하지 않을 것이고 자기 땅에서도 올바로 안주하지 못하며 끊임없이 물에서 흔들리는 갈대같이 되리라는 것.

그들이 다윗가를 떠난 뒤 정권은 결코 한 가문에서 오래 유지되지 못하였다. 하나가 득세하면 다른 집이 반역하여 그 정권을 무너뜨렸다. 이와 같은 빈번한 정변은 필연적으로 백성 가운데 큰 불안과 혼란을 조성시켰다.



(2) 그들은 머지 않아 자기 땅에서 통째 추방당하며 그 복지에서 쫓겨나 파멸에 삼키우리라는 것(16절).

이 예언은 열 지파가 앗수르 왕에 의해 포로됨으로써 이루어졌다. 가정과 나라는 죄로 인해 파멸되며 그 우두머리의 악함 때문에 멸망하게 된다. 여로보암은 자신이 범죄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였다. 권세자들이 악하게 행하는 경우 그들은 다른 많은 사람들을 범죄와 올무에 연루시키게 된다. 많은 무리가 저희의 악한 길을 따르게 되는 때문이다. 그들은 객차를 많이 달고 지옥으로 달려 가는 열차와 같다. 그런 자들이 받을 정죄가 더 참을 수 없는 것이 될 것은 자신의 죄 뿐만 아니라 타인들을 죄 가운데로 끌어넣고 자기의 영향력에 의해 죄 속에 머물게 한 죄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Ⅱ. 여로보암의 처는 여호와의 말씀에 대해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무거운 마음으로 디르사에 있는 자기 집에 돌아간다. 디르사는 그 지명이 의미하듯 아늑하고 즐거운 곳으로 그 아름다움이 유명하였다(아 6:4). 그러나 죽음이 그 아름다움을 더럽히며 그 모든 즐거움을 쓰라림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니 그 때는 죽음을 몰아낼 수 없는 죽음의 도시가 될 것이다.

여로보암의 처는 이제 디르사로 왔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가 자기 아들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자기 가문의 숙명을 기다리는 장면에 접하게 된다.

1. 아이는 죽었고(17절) 온 이스라엘은 마땅히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그토록 유망한 왕자를 잃어버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 선한 왕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타락자였다. 그들이 슬퍼한 것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수문이 뚫려서 심판의 물결이 범람해 들어 온 때문이다.

2. 여로보암 자신도 그 뒤에 곧 죽었다(20절). 역대기에는 여호와께서 모종의 고질병으로 그를 치셨다고 되어 있다(대하 13:20). 그는 재위 22년만에 비참하게 죽었고 왕위는 그의 아들에게 계승되었으나 그 아들은 2년 후 왕좌와 생명까지 내놓게 되었고 그 일족도 모조리 주살되었던 것이다.

그에게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은 그 자신의 서기들이 그의 치적에 관해 기록한 연대기나 런던탑의 사고(史庫) 안에 든 실록처럼 이스라엘왕 역대지략이라고 하는 공적인 기록을 참조하라고 하고 있다. 당시에는 이런 기록을 신뢰할 수 있었을지 모르나 신적 영감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니므로 이런 책들은 오래 전에 유실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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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호보암의 수치와 사망(열왕기 상 14:21-31)

본서에는 유다와 이스라엘에 관한 기사가 혼합되어 있다. 여로보암는 르호보암 보다 4, 5년 더 오래 살았는데 르호보암에 관한 역사가 먼저 마무리되는 것은 그의 치적에 관한 기록을 함께 비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것은 슬픈 기록이기도 하다.

Ⅰ. 여기에는 르호보암 왕에게 대해 좋은 말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본문에서 그에게 대해 얻을 수 있는 전 묘사는 다음과 같다.

1. 르호보암이 왕위에 등극한 것은 그의 나이 41세 때였다. 이로써 계산해 보면 그의 출생 시기는 다윗 말년에 해당되며 그의 교육과 사상의 형성 시기는 바로 솔로몬의 전성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이런 이점을 살려 생활하지 못하였다. 솔로몬은 지혜와 믿음으로 자기 아들에게 선한 원리들을 가르쳐 주었다고 하기보다 말년의 태만으로 그를 타락시킨 면이 더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2. 그는 예루살렘에서 17년간 통치하였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신 성이어서 르호보암이 할 마음만 가지고 있었다면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배울 기회가 얼마든지 있는 곳이었다.

3. 그의 어머니는 암몬 사람 나아마였는데 이 사실은 두 번 언급되어 있다(21, 31절). 다윗이 자기 아들 솔로몬을 암몬 여인과 결혼시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솔로몬의 결혼은 다윗 생존시에 있었으므로). 그러나 솔로몬이 나아마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여인은 나아마 즉 미인(나아마는 미인을 의미함)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비 다윗은 솔로몬의 비위를 건드리기 싫어하였으나 그것은 후손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 여인은 아마 암몬 사람 소비의 딸이었을 것이다. 소비는 다윗에게 친절하였고(삼하 17:27) 다윗은 자기 아들을 그쪽 가문에 결혼시킴으로써 보답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한결같지 않은 불신자와 인연을 맺는 일의 결과가 얼마나 지속적이며 치명적인가는 아무도 상상할 수가 없다.

4. 그는 여로보암과 끊임없이 전쟁하였고(30절) 이것은 그에게 끊임없는 불안이 되었다.

5. 그는 고작 재위 17년만에 죽었고 자기 아들에게 왕좌를 물리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나 손자는 모두들 선정을 베풀어서 재위 기간도 길었다. 그들은 각각 40년간 통치하였던 것이다. 흔히 죄는 인간의 수명과 위안을 단축시킨다.

Ⅱ. 여기에는 유다 신민(臣民)의 특성과 형편에 대해 많은 악한 일이 지적되어 있다.

1. 그들이 얼마나 사악하고 속되었는지 살펴보자.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하였다는 극히 슬픈 기사가 나온다(22-24절). 유다는 하나님께서 소유하시는 이 세상 백성 중 유일하게 신앙을 고백하는 민족이었다. 그 유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며 하나님을 멸시하고 그의 특별하신 임재의 표징을 무시하였다. 그들은 간음하는 아내가 혼약을 깨뜨림으로써 그 남편을 격분하게 하듯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다. 그들의 조상들은 그 악함이 이만저만 아니었으며 특히 사사 시대에는 악이 성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그 열조의 행한 모든 일보다 뛰어나게 가증한 일들을 행하였다. 성전의 장엄함과 제사장의 화려함 그리고 그들의 신앙생활에 부수되는 갖가지 세상적 혜택도 그들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위에서부터 부어 주시는 성신만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충성되게 할 것이다(사 32:15 참조). 유대인의 악함에 대한 본문의 설명은 이방 세계의 악함에 대한 사도의 묘사(롬 1:21, 24)와 일치한다. 그래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는 것이다(롬 3:9).

(1)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그 생각이 허망하여져서(롬 1:21) 하나님의 영광을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다(롬 1:23). 그들은 산당과 우상과 목상을 세웠고(23절) 그런 형상에다 하나님의 이름을 결부시킴으로써 그의 이름을 모독하였으며 우상을 섬기는 데 하나님의 규례를 사용함으로써 그 규례를 더럽혔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산당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높였다고 생각하며 푸른 나무의 즐거운 그늘 아래서 그를 섬기고는 그를 즐거우시도록 하였다는 망상에 젖어 있었다.

(2) 그들은 야비한 애욕에 혹하도록 포기되었다(로마서에 나오는 우상 숭배자들처럼, 롬 1:26, 27). 그 땅에는 남색하는 자들이 있었으며(24절)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혐오감과 분노심이 없이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물며 입에 올리는 일이랴! 그들은 하나의 범죄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죄로써 그들을 수치에 이르도록 버려 두신 것이다. 그들은 거룩한 민족의 특권을 모독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들 자신의 마음의 정욕에 내버려 두사 저주받은 가나안인들의 가증한 짓을 모방하도록 두신 것이다. 그리고 이 일에 있어서도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셨다. 그들이 쫓겨난 자들과 마찬가지로 행하였으니 그들처럼 쫓겨나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을 기대할 수 있으랴!

2. 그들이 얼마나 약하고 불쌍한 민족인지 살펴 보자. 그들은 선주민의 전철을 밟았다. 죄는 어떤 민족이고 할 것 없이 위험에 노출시키며 가난하게 만들며 약화시킨다.

애굽왕 시삭이 그들을 치러 올라왔다. 그리고 무력에 의해서든 항복을 통해서든 그는 예루살렘을 장악하여 성전과 국고의 모든 보물을 약탈해 갔다. 그것은 여호와의 전과 왕의 집에 있는 보물로서 다윗과 솔로몬이 축적해 놓은 것이었다(25, 26절). 아마 이들 보물이 시삭의 내습을 꾀어들였을 것이고 르호보암도 아합처럼 나머지 것이나마 보존하기 위해 순순히 내어 주었을 것이다(20:4). 또 시삭은 겨우 솔로몬 때에 만들어진 금방패를 가져 가버렸다(26절). 애굽왕은 이들을 전리품으로 탈취해 간 것이다. 르호보암은 그 대신 놋방패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그가 위용을 갖추고 성전에 들어 갈 때 호위병들이 휴대하던 것이다(27, 28절). 이 일은 그의 영광이 감소된 것에 대한 상징이었다. 죄는 금도 빛을 잃게 만들며 극히 아름다운 정금을 변화시켜 놋이 되게 한다.

우리는 여호와의 전에 들어간 데 대해 르호보암을 칭찬할지언정 그가 화려한 위의를 갖추고 들어갔다 하여 비난할 마음은 없다. 그는 아마 책망을 듣기 위해 자주 성전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권세 있는 자들은 자기들의 존귀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려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그들 자신도 그 일로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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