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열왕기상 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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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징계를 받은 여로보암 왕(열왕기 상 13:1-10)

Ⅰ.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노여움을 알리기 위하여 여로보암에게 한 사자가 파견되고 있다(1절). 여로보암의 파멸을 꾀하던 유다군은 소환되었고 그를 치기 위해 한 자루의 칼을 뽑아 드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왕상 12:24). 그런 대신에 유다의 한 선지자가 여로보암을 악한 길로부터 돌이키기 위해 파견되었는데 그 시기는 적절하여서 여로보암이 단지 자기 제단에 분향하고 있을 때였고, 그의 마음이 아직 자기의 거짓된 죄로 강퍅해지기 전이었다. 이런 시기를 택하셔서 그를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죄인의 죽음을 즐겨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인이 돌이켜서 살게 되기를 바라시는 때문이다. 감히 자존망대한 왕을 공박하고 그가 자랑으로 삼고 있던 의식을 훼방한 이 사자는 얼마나 대담한가! 하나님의 심부름을 가는 자들은 사람의 낯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누가 자기들을 지원하고 계신지를 안다.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경고하시기 위하여 사자를 보내신 하나님은 매우 인자하신 하나님이시다. 그것은 여로보암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해 하늘로 좇아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경고였다(롬 1:18 참조).

Ⅱ.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달된 말씀은 기어드는 듯한 속삭임이 아닌 큰 소리로 외쳐서 선언되었는데 이는 선지자의 용기와 그의 열성을 의미한다. 그는 이 예언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또 그는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경청하기를 원하였다. 이 엄숙한 제의에 참석하고 있던 자는 소수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예언은 여로보암이나 백성을 향해 외쳐진 것이 아니라 제단을 향하여 포고되었다. 우상에 미쳐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가 먹은 자들보다 제단의 돌들이 먼저 듣고 복종할 터였다. 단을 향해 경고하시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주조자나 경배자를 다 위협하셨다. 그들에게는 단이 자기들의 영혼만큼이나 소중한 것이어서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생명없고 죄없는 단에 달라 붙으면 우리가 어떻게 피하겠는가?" 하고 결론을 내릴 것이었다. 제단에 대해 예언된 것은 때가 이르면 요시아라는 이름의 한 통치자가 다윗가에서 나와 우상 숭배하는 제사장들을 이 제단 위에 바치고 또 죽은 자의 뼈를 그 위에서 불사름으로써 이 제단을 더럽힐 것이라는 내용이었다(2절). 여로보암이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그는 이 제단을 신성시하였으나 그 신성성은 오욕을 입게 될 것이다. 우상 숭배는 존속하지 못할 것이지만 여호와의 말씀은 영영토록 지속할 것이다.

2. 그는 산당 제사장을 세웠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제물이 되고 이 제단 위에서 드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희생 제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제사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유의 제사로 되는 경우 결과적으로 그 제사를 드리는 자 역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들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노는 그들 위에 머물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노가 발해지지 않는다.

3. 이 일은 다윗 집의 한 자손에 의하여 성취될 것이다. 여로보암과 그의 나라는 다윗 가문을 업신여기고 배반하였다. 그러나 여로보암이 든든하게 서 있으리라고 믿었던 바로 그 제단을 훼파할만큼 다윗가는 많은 세력을 회복하리라는 것이다. 현재는 하나님과 왕에게 대한 경외심을 다 버리고 있는 자들이 승리를 만끽하고 있지만 결국 정의와 진리는 세상사와 거룩한 일에 있어서 우세하게 될 것이었다. 이 예언이 성취된 것은 약 356년 뒤에 가서였으나 이 예언이 곧 바로 있을 확실한 일로 선포되는 것은 하나님께는 천년도 하루와 같기 때문이다. 사람 이름을 명명하는 것보다 불확실하고 임의적인 것은 없는 터에 요시아 탄생 300여년 전에 그 이름이 여기에 등장하고 있다. 하나님께는 미래의 어떤 일도 숨겨져 있지 않다. 하나님의 예지의 책에는 이름들이 있으며(빌 4:3), 천국에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Ⅲ. 이 예고의 진정성을 확신시키기 위해 제단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한 진동으로 산산조각이 나며 그 희생의 재가 흩날리게 되리라는 예조가 나오는데(3절) 이 일은 즉시 일어났다(5절).

1. 이것은 그 선지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증거였다. 하나님은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신다(막 16:20).

2.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상에 대한 제사를 노여워하신다는 증좌였다. 성별되어야 할 제단이 가증한 것으로 될 때 그 제물이 어찌 열납될 수 있겠는가?

3. 마음이 돌보다 더 굳어서 여호와의 말씀으로도 쪼개지지 않는 백성에게 이것은 하나의 수치가 되었다.

4. 이것은 요시아에 의하여 예언이 성취될 때 어떻게 되리라는 것에 대한 표본이었다. 지금은 단이 갈라졌으나 그 때는 파괴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Ⅳ.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사람을 잡거나 치려고 손을 내밀자 그 손은 말라 버렸다(4절). 그는 당연히 그 전언에 놀라 벌벌 떨어야 했는데도 자기가 경고받은 진노를 무시하고 그 경고를 전해 준 은혜를 경멸하여 그 사자를 공격하였다. 죄인을 책망해 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미워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네게 해를 입히려 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그런 것을 무릅쓰고라도 위탁받은 것을 고수해야 한다. 그들을 부리시는 분께서 그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며 인간의 분노를 막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손을 마르게 함으로써 여로보암의 분노를 제거시키셨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선지자를 해칠 수도 없었고 마음대로 거두어 들일 수도 없었다. 그가 송아지에게 분향하기 위하여 손을 내밀었을 때는 그 손이 마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선지자를 치려고 손을 뻗치자 그는 스스로 낮추기까지 그 손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선지자들에게 대하여 "그들을 손대지 말라, 그들을 해하지 말라" 고 말씀하셨다. 악인의 모든 악중 선지자를 치려는 흉계보다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은 없다. 이것은 여로보암에게는 그 죄에 보응하는 형벌이었지만 하나님의 선지자에게는 구원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교회의 원수들이 악한 목적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여러 가지 방법을 구사하신다. 여로보암은 자기 손을 거두어 들이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보고 두려움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께서 공의로 죄인의 마음을 강퍅케 하시사 그들로 죄악에 손을 내밀게 하신다면 그들은 회개로서도 그 손을 다시 거두어 들일 수가 없다. 이것은 하나의 영적 심판이며 본문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훨씬 더 두려운 심판이 된다.

Ⅴ. 급작스레 말라 버렸던 손도 그가 순복하자 돌연히 나아 버린다(6절). 그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감전되어야 했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겸손해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교만하던 마음도 자기 뼈와 살을 건드리는 이것에는 꺾이고 만다. 그는 이제 도움을 요청한다.

1. 자기의 송아지로부터 도움을 구하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구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으로부터 도움을 구하고 있다. 상처를 입히신 분도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손 이외의 그 어떤 손도 성하게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2. 그 자신의 제사나 분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방금 협박하고 죽이려 했던 선지자의 기도와 도고에 의한 도움을 구한다.

설교를 증오하는 자들이 신실한 목사의 기도를 기뻐하게 될 때가 올 수도 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 고 여로보암은 말하고 있다. "너는 그에게 발언권을 가지고 있으니 나를 위하여 그 점을 이용해 다오" 란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관찰할 것은 그가 자기 죄의 사유와 자기 심령이 변화를 위해 선지자의 기도를 희구한 게 아니라 "내 손으로 다시 성하게 기도해 주기" 만 바랐다는 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로도 모세가 하나님께 구하여 이 죄가 아니라 이 죽음만을 자기에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하였던 것이다(출 10:17).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답게 악을 선으로 갚는다. 그는 여로보암의 무능한 악의를 비난하거나 그의 굴복을 뻐기지 아니하고 즉각 그를 위해 하나님께 호소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핍박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셨다(마 5:10, 44). 그러나 자기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줄 아는 자들만이 이 축복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 선지자가 이와 같이 용서하는 심령을 스스로 내보임으로써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을 들으시고 심판을 철회하심으로써 선지자를 보다 영예롭게 하셨으며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의하여 회개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해 다른 기적으로써 그의 마른 손을 치유하셨던 것이다. 이는 그가 심판으로는 꺾이지 않더라도 자비에는 녹도록 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장에는 그가 심판과 자비에 감동이 되는 듯이 보였으나 그 감동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Ⅵ. 여기에는 여로보암의 친절한 초대에 대한 선지자의 거절이 나오는데 우리는 다음 사실을 살펴야 한다.

1.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저주받을 우상 숭배와 하나님께로부터의 이탈에 대한 혐오감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서 또 흑암의 일에 관계하지 말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자기의 사자에게 벧엘에서 먹고 마시는 것을 금지시키셨다(9절). 우리가 악인에게서 전염되거나 죄인의 어두운 행사를 격려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자리에 앉는 일을 금하신다.

선지자는 왔던 길로 도로 가서는 안 되었다. 말하자면 그는 in tr ansitu 즉 지나가는 길에 그 말을 전달해야 하였다. 그는 일부러 보낸 것 같은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되었다(그들은 그런 은총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자들이었다). 그는 아덴에서 바울이 지나다가 그들의 위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한 것처럼 도중에 분을 느껴 들린 자같이 보여야 했다(행 17:16, 23 참조). 하나님께서는 이 명령으로 자기의 선지자를 시험하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마찬가지로 에스겔이 패역한 족속같이 패역한지 않은지를 시험하려고 하셨다(겔 2:8).

2. 여로보암은 자기 손의 회복에 무척 감동을 받았다.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감사하였다거나 그 일에 대한 감사로 예루살렘의 제단에 제물을 보냈다는 기사는 읽을 수 없으나 그가 선지자에게 기꺼이 사의를 표명하고 그의 기도에 대한 보답을 하려고 하였다는 것은 읽을 수 있다(7절). 은혜가 없는 사람도 자기 신체에 대하여 베풀어 준 혜택을 인해서는 선한 목사에게 감사할 줄 안다.

3. 선지자는 굶주리고 피곤하였으며 아마 돈도 떨어졌을 테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자기에게 제의된 향응과 보수를 거절하였다. 선지자는 자기가 그 제의를 수락하면 왕이 깨달음을 얻은 차제에 그와 더 많은 담화를 나누게 되어 그를 효과적으로 회개시킬 수 있는 기화가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신실하고 주의 깊은 심부름꾼답게 자기 일을 마치자 곧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금지된 한 가지 음식조차 참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 부인의 가르침을 거의 배우지 못한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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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선지자(열왕기 상 13:11-22)

하나님의 사람은 왕이 자기에게 상을 내릴듯한 뜻을 비췄지만 왕의 초대를 터놓고 단호히 뿌리쳤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받은 명령과 역행하는, 늙은 선지자의 설득에 넘어가서 그와 함께 돌아가 벧엘에서 식사를 함께 하고 말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 식사가 그에게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요구하였는지 알 수 있다. 경이감을 갖고서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Ⅰ. 늙은 선지자의 악함. 나는 이 늙은 선지자를 거짓 선지자요 악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진실된 선지자와 선량한 사람이 이 늙은 선지자처럼 고의로 거짓말을 하고 그 책임을 하나님께 미룬다고 믿기보다 악한 성품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사람이 한 말씀을 억지로 확인했다(32절에 나오듯이)고 믿기가 더 용이한 때문이다. 좋은 나무라면 결코 이와 같이 나쁜 열매를 맺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마 17:7). 그는 아마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사무엘의 한 학교에서 선지자들의 아들들과 교육을 받았으며 거기서 선지자의 칭호를 얻었으나 점차 세속화되어서 예언의 영이 그를 떠나간 듯 싶다. 그가 만일 선한 선지자였다면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를 꾸짖었을 것이며 자기 아들들로 하여금 그의 제단을 받들게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1. 그가 하나님의 사람을 데리고 온 데에는 어떤 선한 의도가 개재되어 있었는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원기 회복을 위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결론짓고 그에게 대한 동정심에서 이렇게 했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 그의 사명에 대해 자기 자식에게서 들은 소문보다 더 상세히 알고 싶은 생각과 그와의 친분을 보다 두터이 하려는 바램에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이 저간에 일어난 일을 죄다 그에게 알려 주었고 특히 벧엘에서는 먹고 마시는 게 금지되었다는 것까지도 말했으므로-그는 이를 여로보암 앞에서 공공연히 말했으므로-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을 함정에 몰아넣고 그럼으로써 그를 위태한 지경에 빠뜨리려는 나쁜 의도에서 행한 것으로 생각한다. 거짓 선지자들은 항상 참 선지자의 최악의 적이 되어 왔고 흔히는 참된 선지자를 멸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본문에서와 같이 때로는 그들을 타락시키고 의무를 행치 못하도록 유혹하려는 의도를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나실인의 타락을 자랑하기 위하여 나실인에게 포도주를 먹였다(암 2:12).

2. 그가 하나님의 사람을 도로 데려오기 위해 매우 악한 방법을 취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나님의 사람이 그에게 "나는 그대와 함께 떡을 먹으러 돌아 갈 수도, 가지도 않겠노라(그의 결심은 하나님의 명령과 일치하고 있다. 16, 17절)" 고 말했을 때 그는 사악하게도 자기가 그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하늘로부터 받았노라고 빙자하였던 것이다. 그는 선지자로서의 이전 신분을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하나님의 사람을 기만했다.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그는 이 심부름을 보낸 천사의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전부가 거짓말이었다. 그것은 예언에 대한 희롱이었고 극히 참람한 짓이었다. 열왕기 하에서는 이 늙은 선지자를 사마리아에서 온 선지자라고 칭하고 있으나(왕하 23:18), 상당히 뒤에까지 사마리아와 같은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왕상 16:24). 그러므로 나는 그가 벧엘 출신의 선지자인데도 그렇게 불리운 것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그릇되게 한 사마리아 선지자들이 나중에 나오는데(렘 23:13) 이 늙은 선지자도 그들과 같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Ⅱ. 이런 기만에 넘어가고 만 선한 선지자의 약함. "그 사람이 저와 함께 돌아갔더라" (19절). 상을 주마고 한 왕의 권유도 일언지하에 물리칠 만큼 결단심이 풍부하던 그도 선지자로 자처하는 자의 교묘한 수작에는 거역할 수가 없었다. 외형적인 유혹보다 신성과 성결을 빙자한 구실로 인해 의무에서 이탈할 우려가 더 많은 게 바로 선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하며(마 7:15) 영을 다 믿지 않을 필요가 없다(요일 4:1).

Ⅲ. 이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조치. 거짓말을 하여 화를 입힌 거짓 선지자는 벌받지 않고 무사히 갔는데 반하여 그 거짓 선지자 때문에 범죄하게 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은 돌연히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는 사실에 경악한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나님의 판단은 측량할 수가 없다. 속는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고(욥 12:16), 그는 자신의 일을 조금도 설명해 주지 않으신다. 확실히 심판은 오고 있음에 틀림 없다. 그 때에는 이런 일들이 다시 책임을 추궁당하게 될 것이다. 극히 많은 죄를 짓고도 이 세상에서는 거의 고통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 때에는 자기 행위대로 받게 될 것이다.

1. 하나님의 사람에게 전달된 말씀은 이상하였다. 그의 죄가 낭송되었는데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여 명백한 긴급 명령에 불복종 했다는 것이다(21, 22절). 그것에 대한 판결이 내려지고 있다.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즉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말이다. "너는 결코 네 집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곧 시체가 될 것이다. 네 시체는 매장을 위해 네 열조의 묘실이 있는 곳으로 운반되지도 못할 것이다."

2. 더욱 이상한 것은 그 늙은 선지자가 바로 이 말씀의 전달자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 외에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발람에게는 그의 나귀를 통해 말씀하셨고 사울에게는 사무엘의 형상으로 나타난 악신에 의하여 자기 운명을 해독하게 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의도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1) 거짓말하는 선지자를 놀라게 하며 그 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직접 이 말씀을 전하게 되었는데 이 전언으로 인하여 더욱 감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심령은 너무나 강력한 느낌을 받아 그는 마치 고뇌하는 자처럼 외쳤던 것이다(21절). 하나님의 사람은 얼떨떨한 결에 죄를 지었다. 그가 하찮은 일에 대한 불순종으로 죽어야만 한다면 늙은 선지자 자신은 어떠했던가! 치밀한 날조극에 의하여 천사를 빙자한 거짓말을 하나님의 사자에게 하였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을 속였던 것이다. 그런 자기는 굉장히 더 쓰라린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할 만하였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아마 이것은 그 늙은 선지자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노여움을 남에게 선포하면서도 스스로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참으로 강심장을 가졌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속은 선지자에게 보다 큰 굴욕을 주고 저 큰 사기꾼, 즉 마귀에게 청종하는 자들이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기 위하여, 시험하는 자된 마귀에게 복종하는 자는 고문하는 자된 마귀에 의하여 경악하게 될 것이다. 현재는 그가 알랑거리지만 나중에는 그가 덮칠 것이며 지금은 그가 죄 가운데로 끌어 들이지만 후에는 자포자기하도록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라도 하려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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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로보암의 계속적인 타락(열왕기 상 13:23-34)

Ⅰ. 기만당하여 본의 아니게 불순종하게 된 선지자의 죽음이 나오고 있다. 그를 미혹하였던 늙은 선지자는 그에게 저지른 잘못을 보상하거나 그에게 경고된 불행을 방지하는 데 도움이라도 주려는 듯이 집에까지 타고 갈 나귀를 그에게 제공하였다. 그러나 도중에서 사자가 그를 습격하여 그를 죽여 버렸다(23, 24절). 그는 배가 고플 때 원기를 도우려고 돌아 갔을 뿐인데도 그로 인해 죽지 않으면 안되었다(삼상 14:43). 그러나 우리는 다음 사실을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그의 죄는 중죄였다. 거짓말 때문에 죄를 범하게 됐다고 하여 그가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는 결코 없다. 그는 자신이 직접 받은 명령을 굳게 믿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딴 자가 가지고 온 철회 명령은 그다지 믿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또 그 명령의 원인이 계속 발효하고 있는 한 명령이 철회되리라고 생각할 만한 근거도 없었다. 그것은 그 악한 장소에 대한 그의 혐오감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이 늙은 선지자의 정직성을 크게 의심할 만하였다. 그 늙은 선지자는 자신의 증언을 하지 않았다. 그는 벧엘에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성읍의 우상 숭배에 대한 증인으로 그를 사용하시는 게 적합치 않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여하튼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지시를 구하느라 시간을 지체해야 했고 그렇게 빨리 응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벧엘의 어느 곳에서도 먹지 말라고 금지하셨는데 딴 어느 집보다 이 늙은 선지자의 집에서라면 먹어도 안전한 것으로 생각하였단 말인가? 그것은 명령을 개량하겠다는 수작이었고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현명하게 여기는 행위였다. 그는 배고프다는 것을 들어 변명하려고 생각했던가? 그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란 말씀을 읽어 보지 못하였단 말인가?

2.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 이로써 다음 사실이 나타난다.

(1)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명백한 명령에 대한 불복종은 어느 무엇보다 하나님을 노엽게 해 드린다. 우리의 첫 조상에 대한 하나님의 조처도 실은 작은 일 때문이었다. 금지된 열매를 먹었다는 것은 변명하기가 보다 용이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2)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죄를 노여워하신다. 불순종하는 가운데 보호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 그의 직업이 신성하고 그 직위가 높으며 비록 하나님께 가깝고 또 하나님께 아무리 훌륭한 봉사를 했다고 하더라도 불순종하면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마 이 의로운 심판의 방법으로 여로보암의 마음을 강퍅케 하시려고 하셨을 것이다. 여로보암은 자기 손이 말랐음에도 잘못을 고치지 않았던 때문이다. 그는 십중 팔구 이 일을 악용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 선지자가 자기 제단에 참견한 대가를 톡톡히 받았다거나 차라리 집에나 처박혀 있는 게 더 나았을 것이라고 여로보암은 말했을 것이다. 아니, 그는 섭리가 그 선지자의 무례함에 대해 처벌을 내렸으며 자기의 마른 손이 할 수 없는 것을 사자가 해치웠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일로서 경고하시려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고용되는 모든 자가 자기 목숨을 걸고 명령을 준행하라는 것이다.

Ⅱ.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는 놀라울 정도로 잘 보존된다. 이것은 진노하심 가운데서도 기억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움을 표상한다. 사자는 그를 조용히 질식사시켰거나 아니면 찢어 죽였을 터인데 그의 시체를 먹지도 않았고 나귀조차 찢지도 않았다(24, 25, 28). 더군다나, 사자는 지나가면서 보는 행인들에게 덤비지도 않았고 늙은 선지자가 그 시체를 거두러 왔을 때 그 노인-그는 충분히 사자를 무서워 할만한 이유가 있었다-에게도 덤벼들지 않았다. 그 사자가 받은 임무는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는 여기까지 와야 하지만 더 이상 넘어가서는 안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하나님의 사람에게 노하셨지만 이렇게 자기의 노를 돌이키시고 그 형벌이 죽음이상 넘지는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셨다.

Ⅲ. 늙은 선지자는 그의 매장을 돌보았다. 늙은 선지자는 이 이례적 사건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는 여호와 곧 자기 주인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그 잘못은 누구에게 있었던가?).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사자에게 붙이셨다(26절)고 결론지었다. 늙은 선지자로서는 사자를 왜 자기와 자기 집에 보내시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속인 선량한 자에게 보내셨는지를 물어 보는 게 어울릴 것이었다. 그는 시체를 떠들었다(29절). 만약 항간에서 떠도는 말에 진실성이 다소라도 있다면 늙은 선지자가 시체에 손을 댔을 때 그 시체에서는 틀림 없이 새로 피가 흘러나왔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사실상 살인자였고 시체를 매장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가 입힌 피해에 대한 보상 치고 너무나 초라한 것이었던 까닭이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을 속여서 파멸로 몰아 넣었을 때 아마 그는 하나님의 사람을 조소하려는 심산이었을 게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양심이 녹아져서 하나님의 사람을 위해 울 정도로 되었고 아브넬의 장례식에 참석한 요압처럼 자기가 죽인 자의 조상객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호라! 나의 형제여" (30절). 거짓말쟁이 늙은 선지자가 편안히 살며 우상 숭배하는 왕은 사치와 권세를 누리며 살고 있는 반면에 그토록 선하고 충실하며 하나님의 일을 위해 그토록 담대하던 선지자가 한 가지 범죄로 흉악범처럼 죽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매우 비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이시여! 주의 길은 바다에 있고 주의 첩경은 큰 물에 있나이다" (시 77:19). 우리는 사람을 그 고난으로 판단할 수가 없고 사람이 현재 당하고 있는 형벌로써 그 사람의 죄를 논할 수 없다. 어떤 자는 그 영이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 육이 멸망을 받는 데 반하여 또 딴 사람들은 그 영혼이 음부에 합당하도록 되기까지 그 육이 제멋대로 행하게 버려 두시는 때문이다.

Ⅳ. 늙은 선지자는 자신의 매장에 대한 당부를 자식들에게 하는 데 그것은 그들이 꼭 자기를 하나님의 사람과 같은 묘실에 매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31절).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내 티끌이 그의 티끌과 섞이도록 될 수 있는대로 그의 뼈 가까이에 두라." 그는 비록 거짓말을 한 선지자였지만 참된 선지자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였다(민 23:10). "내 영혼을 벧엘의 죄인들과 함께 모아 두지 말고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모아 두라."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여 사람의 뼈가 그 위에서 살라지리라고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이기 때문이었다(32절).

1.그는 선지자의 예언을 인준하고 있다. 이는 두 증인의 입으로 말을 증참케 하여(마 18:16) 가능하다면 여로보암을 깨우치고 교화시키기 위함이었다(그리고 그 두 증인 중 하나는 사도 바울이 딛 1:12 에서 인용하는 대로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 같은 자이다).

2. 그는 죽은 선지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몸은 비록 땅에 엎드러졌으나 그의 말은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 자로서 존경하고 있다. 목사들은 죽는다. 오히려 남보다 일찍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존속하며(벧전 1:25) 그들과 함께 죽지 아니한다.

3. 그는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 있다. 사람들의 뼈는 여로보암의 단 위에서 살라지리라고 예언되었다. 그래서 그는 "내 뼈를 그의 뼈 가까이에 두라. 그리하면 내 뼈가 흐트러지지 않게 될 것이다" 고 말한다. 이에 따라 그것은 우리가 읽는대로 안전하게 되었다(왕하 23:18). 선한 자들과 교제하면 자고 행하고 살고 죽는 것이 안전하다. 선지자의 묘비명에 대해서는 여기에 아무런 언급이 없으나 열왕기 하 23장 17절에서는 언급하고 있다. 거기서 요시야는 "저것은 무슨 비석이냐?" 고 묻고 "왕께서 행하신 이 일을 전하러 유다에서 왔던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이니이다" 라는 대답을 듣는다. 따라서 선지자의 묘비는 그의 예언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벧엘의 우상 숭배에 대한 항구적 증거였다. 만일 그가 죽어서 딴 곳에 묻혔더라면 그것은 그다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마리아라는 이름은 그 당시 아직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여기서 이스라엘 성읍들이 사마리아 성읍들로 불리우고 있는 것은 늙은 선지자가 어떻게 말했든지간에 영감받은 기자는 자기 당대의 언어로 기록하였던 때문이다.

Ⅴ. 여로보암의 집요한 우상 숭배(33절). "여로보암은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갈라 놓으신 단의 수리를 감행하려고 하는 자를 찾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시 그 단위에 제물을 바쳤으며 전보다 한층 대담하게 제사를 지냈다. 이는 전에 자기의 제사를 훼방하던 선지자가 무덤 속에 있었고(계 11:10) 예언이 성취되려면 한참 뒤라야 하기 때문이다. 여로보암을 개심시키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들이 동원되었으나 위협도, 예조도, 심판도, 자비도 그에게는 효과가 없었다. 그는 자기 송아지한테 그토록 이상하게 밀착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을 개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사장직도 선용하지 않았다.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그는 자기의 수족으로 만들어 무식하든, 부도덕하든, 어떤 지파 출신이든 상관하지 않고 제사장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었다. 즉 처음에는 올무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파멸이 되어 그 집을 지면에서 끊어지게 하였다(34절). 가족의 감소와 동요와 풍지박산은 죄의 결과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여로보암은 송아지가 왕권을 자기 자손에게 확보해 줄 것으로 기대하였지만 오히려 왕관을 상실하게 하고 자기 가족을 몰살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어떤 죄악으로 자신을 부지하겠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스스로 실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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