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변절과 타락(열왕기 상 11:1-8)
이것은 솔로몬의 변절과 타락에 관한 슬픈 이야기이며 아주 놀라운 기록이다.
Ⅰ. 그 세부적 경위와 사실을 알아 보기로 하자. 이스라엘의 정화(精華)였고 자기 세대의 그토록 큰 축복이 되었던 솔로몬이 실족한단 말인가? 그렇다. 그것은 역시 사실이며 성서는 그 일을 이야기하고 되풀이해서 말하며 오래 뒤에도 지적하는 데 충실하다(느 13:26). "솔로몬은 비길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자라. 그러나 이방 여인이 저로 범죄케 하였도다." 이것은 바로 그의 타락을 요약한 말씀이다. 그를 속이고 처음으로 범죄한 것도 여인이었다.
1. 그는 이방 여인들 즉 이방의 많은 여인을 열애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의 반역은 시작된다.(1) 그는 여자들에게 몰두하였다. 이것은 그의 어머니가 특히 경계한 일이었다(잠 31:3).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라" (아마 이 말씀은 자기 힘에 관한 비밀을 여인에게 알려 줌으로 말미암아 그 힘을 상실했던 삼손을 암시하는 것이리라). 왜냐하면 여색을 가까이하는 일은 딴 어느 일에 못지 않게 왕을 파멸시키는 화근이기 때문이다. 그의 아비 다윗의 몰락도 육신의 정욕과 더불어 시작되었는데 솔로몬은 이로써 경고를 받아야 했었다. 여인의 사랑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고(잠 7:26) 자기 자신의 갈비뼈(rib: 아내 또는 여인을 지칭함)로 인하여 머리를 깨는 자가 허다하다(Hall 주교는 그렇게 말한다).
(2) 그는 많은 여인을 취하였다. 그가 취한 처첩의 수는 너무나 많아 드디어 처가 칠백 명, 첩이 삼백 명, 합쳐서 천 명에 달하게 되었으나 그 중에는 그가 참회의 설교에서 자인하듯이(전 7:28) 선한 여인 하나가 없었다. 이는 부덕(婦德)이 뚜렷이 선 여자라면 그런 대열에 들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의해 특별히 왕들에게 군마나 비빈을 많이 두지 못하도록 금지시키셨다(신 18:16, 17). 솔로몬이 말들의 수를 많게 하고 더욱이 그 말들을 애굽에서 수입함으로써(이것은 명백히 금지된 행위였다) 어떻게 전자의 율법을 위반하였는지 봉독하였다(왕상 10:29). 여기에서는 그가 아내를 많게 함으로써 어떻게 후자의 율법을 범했는지를 듣게 된다(이것은 보다 치명적 결과로 나타났다). 보다 작은 죄일망정 대담하게 저지르다 보면 보다 큰 죄에 이르는 출입문이 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다윗은 아내를 너무나 많이 두었으므로 아마 솔로몬은 그것을 합법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경건한 신앙으로 정평이 난 자들이 어떤 일로든지 악한 본을 보이게 되면 그로 인해 자기들이 미칠 해가 얼마나 클지, 특히 자기 자녀들에게 끼치는 해로움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 선량한 자의 한 가지 악한 행위는 악한 자의 스무 가지 악행보다 더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아마 솔로몬이 처음 자기 아내를 늘리기 시작했을 때는 자기 아버지 다윗이 거느린 비빈의 수를 초과할 의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죄의 길은 내리막 길이어서 그 길에 들어선 자는 쉽사리 멈출 수가 없다. 하나님의 지혜는 한 남자에게 한 여자를 지정하였다. 처음에는 그러하였다. 그러나 하나로 족한 줄 모르는 자들은 둘 셋도 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재갈을 물리지 않은 욕망은 한계를 모를 것이며 고삐없는 숫사슴은 끝없이 방황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3) 그들은 이방 여인 즉 하나님이 특별히 상호 통혼을 금지한 모압 족속이나 암몬 족속 등의 이방 여인이었다(2절). 혹자는 솔로몬이 이들 외국 여인과 결혼한 것은 그들을 통해 상대 국가의 정보를 얻으려는 정략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스라엘 여인들은 솔로몬에게 너무 엄숙하고 정숙하였고 이에 반해 이방 여인들은 방정하지 못한 복장과 교태와 음탕한 말로 그를 즐겁게 해 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는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그는 아마 이방 여인을 딴 재물처럼 여기고 자기 처첩궁을 멀리서 데려 온 여인들로 가득 채우는 것을 위엄있는 일로 간주했을 것이다. 딸 덕에 부원군 된다는 식으로 솔로몬과 같이 큰 왕의 비빈이 된다는 것은 아무리 뛰어난 백성이라도 큰 영광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실은 아무리 미천한 자일 망정 그것은 수치가 되었을 것이다.
(4) 솔로몬은 불행을 보다 완벽하게 하느라고 저희를 연애하였다(2절). 그는 이방 여인들을 거느렸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엄청나게 좋아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마음을 주고 그들 사이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그들의 행동과 말이면 무엇이나 다 좋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정식 아내인 바로의 딸을 멸시하였다. 바로의 딸은 그에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이었다. 또 그는 이스라엘의 모든 부인들을 이방 여인들과 비교하여 우습게 알았다. 솔로몬은 굉장히 많은 양의 지식에 통달하고 그것을 온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욕망을 잘 다스리지 못했을 때 그런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었는가?
2. 그는 이스라엘이 모압의 여인들로 인하여 바알브올을 섬기게 되었듯이 이방 여인들에게 이끌려 이방 신들을 섬기게 되었다. 이 신들은 알지 못하는 낯선 신이었고 이 일은 그가 아내를 많이 둔 데서 온 나쁜 결과였다. 우리는 그가 이 일로 건강을 해치고 노쇠를 재촉하게 되었다고 생각할 만하다. 이 일은 그의 재정을 고갈시켰다. 그의 보고(寶庫)가 아무리 무진장하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여인의 자만심과 허영심을 충족시키기에는 모자란 것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아마 솔로몬은 말년에 자기 사업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을 것이고 이로 인해 해외에서 받던 공급품이 끊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되자 그는 자기 위세를 유지하기 위해 백성에게 불평할 정도의 세금을 부담시킬 수밖에 없었다(왕상 12:4). 그러나 이런 나쁜 결과 중 어느 것도 "왕비들이 그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더라" (3, 4절)는 것보다 나쁘지는 않았다.
(1) 그는 자신의 종교에는 냉담하고 무관심하게 되었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태만해졌다. "그의 마음은 자기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고" (4절) 다윗처럼 그를 온전히 좇지도 않았다.(6절). 우리는 그가 하나님 예배를 완전히 일축해 버렸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더욱이 하나님 예배를 억제하거나 방해하였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성전 예배는 여전히 계속된다). 그러나 그가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 일과 그의 제단에 참예하는 일은 더욱 뜸해지고 더욱 진지성을 잃어갔다. 그는 자기 처음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께 대한 열성을 잃어 버렸으며 시작할 때처럼 끝까지 그것을 보존하지 못하였다. 그는 꾸준하지 못하였으므로 온전치 못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좇는 일에서 돌이켰고 끝까지 계속해서 좇지 아니했으므로 하나님을 온전히 좇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도 많은 과오가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솔로몬처럼(그의 아내들은 그를 하나님 예배에서 돌이키려고 온갖 기교를 다 부렸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게을리 하거나 태만하지는 않았다. 거기에서 그의 배반은 시작되었다.
(2) 그는 우상 숭배하는 자기 아내들을 용납하고 옹호했으며 거리낌없이 그들에게 가담하였다. 바로의 딸은(상상되는 대로) 유대교로 개종하였다. 그러나 솔로몬이 하나님 예배에 무성의해지기 시작하자 그는 딴 아내들을 개종시킬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방 아내들에게 순응하여 그는 저희 신들을 위한 예배당을 건축하고(7, 8절) 우상의 제사장들을 부양하였으며 때로는 그들의 제단에 직접 참가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이 일에 무슨 해가 있느냐? 모든 종교는 다 비슷한 게 아니냐?" 라고 물으면서 희롱하기까지 하였다.(Patrick 감독의 말대로) 지혜가 큰 자의 병이었다. 솔로몬이 이와 같이 한 여인에게만 비위를 맞추고 나머지 여인들에게 동등한 충족을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 일을 오해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 모든 처첩에게도 그와 같이 해 주었고 그러다 보니 결국 예루살렘 앞 산에 그모스를 위해 산당을 지을 정도로 불경건하게 되었다. 그 산은 감람산이었다. 그의 이런 행동은 마치 자신이 건축한 성전에 대항하기 위해 그모스 신당을 지은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이 산당들은 요시야 때까지도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다(왕하 23:13). 이상은 솔로몬의 변절에 대한 설명이다.
Ⅱ. 우리는 여기서 잠시 숨을 멈추고 솔로몬의 타락을 애도하자. 우리는 그의 실족에 놀라움을 금치 못해야 마땅하다. 어찌 금이 빛을 잃고 정금이 어찌 변하였는고!(렘 4:1) 하늘아! 이 일을 인하여 놀랄지어다! 심히 두려워할지어다!(렘 2:12) 선지자는 같은 경우를 당하여 그렇게 감탄하고 있다.
1. 다음 네 가지 사실은 얼마나 이상한가!(1) 솔로몬은 노령에 들어서 육체적 욕망 즉 청년 특유의 욕정에 사로잡혔다. 우리는 자신의 결단력이 철석같다고 주제넘게 생각해서 안 되는 동시에 우리를 부패시키는 힘이 약하다고 추정해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안심하고 경계를 게을리하게 되는 것이다.
(2) 솔로몬처럼 지혜롭고 빠른 이해와 건전한 판단으로 소문이 난 분이 이들 우매한 여인으로 말미암아 어리석게 되도록 자신을 내버려 두었다는 것.
(3) 솔로몬은 여자에게 대한 사랑의 위험성을 타인들에게 너무나 자주 너무 분명히 경고해 주었다. 그런 그가 비참할 정도로 여자들에게 홀려 버린 것이다. 우리가 흉한 일을 보고 그걸 남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우리 스스로 그것을 피하는 것보다 더 쉽다.
(4) 그토록 선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데 그토록 열성적이었으며 하나님께 관한 일에 너무나 정통하였고 성전 봉헌시에 그토록 훌륭한 기도를 하였던 솔로몬이 이렇게 죄 많은 행동을 하였다는 사실. 이게 솔로몬인가? 그의 모든 지혜와 신앙은 결국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호화선이 이토록 난파한 적은 없으며 면류관이 이렇게 모독받은 적은 없었다.
2. 이 모든 일에 대해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허용하셨는지를 규명하는 것은 우리의 권한 안에 있지 않다. 주의 길은 바다에 있고 주의 첩경은 큰 물에 있기 때문이다(시 77:19). 하나님께서는 그 일로부터 자신의 영광을 유도할 줄 아셨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건축할 솔로몬에 대하여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삼하 7:14)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미 이렇게 될 것을 예견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일을 어떻게 선용해야 할 지 알아 보는 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된다.
(1)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잘 안다. 그러므로 시종일관 그 은혜에 의지하여 살자.
(2) 여의로운 상태조차 위험 속에 내재하며 시험을 극복하기가 얼마나 힘드는 일인지 주시하라. 솔로몬은 여수룬처럼 살이 찌개 되자 발로 차버렸다. 이들이 간구한 필요한 양식은 솔로몬이 넌더리를 낸 풍부한 양식보다 더 안전하고 훌륭하다(잠 30:8 참조).
(3) 큰 소리로 신앙을 고백하고 헌신에 진취적이고 열성적인 태도를 과시한 자들이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될 필요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명심하자. 악마는 그런 자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가할 것이며 그런 자들이 실수하면 그 수치는 더 클 것이기 때문이다. 낮을 돌보이게 하는 것은 저녁이다. 그러므로 잘 달려 왔더라도 우리는 부족한 감을 주지 않도록 조심하자.
솔로몬에 대한 하나님의 노여우심(열왕기 상 11:9-13)
Ⅰ. 하나님은 솔로몬의 죄 때문에 그에게 진노하셨다. 솔로몬이 행한 일은 하나님을 노엽게 하였다.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삼하 12:24) 그를 기뻐하시던 때도 있었다(왕상 10:9). 그러나 이제 여호와께서는 솔로몬에게 진노하셨으니 이는 그의 죄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1. 극히 야비한 배은망덕. 그는 자기에게 두 번씩이나 나타나신 여호와께로부터 돌이켜 떠났다. 한 번은 그가 성전을 짓기 전에 나타나셨고(왕상 3:5) 또 한번은 그가 성전을 준공하여 봉헌한 뒤에 나타나셨다(9:2).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든 모르든 간에 자기의 은혜로우신 방문을 셈하시고 계시며 우리에게 또 우리를 위하여 얼마나 빈번히 나타나셨는지를 알고 계시며 만일 우리가 돌이켜 그를 떠나면 우리에게 불리한 증거로서 그것을 기억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신 것은 누가 보아도 그의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다른 신에게 대한 경배를 영원히 방지시킬 수 있던 행위였다. 또한 그것은 그가 결코 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현저한 은총이었고 명예였다. 특히 하나님이 이 양차의 현현 가운데서 그에게 하신 말씀을 고려하면 그것을 잊지 않아야 마땅했다.2. 극히 고의적인 불순종.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일은 바로 "다른 신을 좇기 말라" 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런 명백한 훈계에 구애받지 않았다(10절). 사람을 다스리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 수하자들에게서는 복종을 요구하면서도 지고무상(至高無上)하신 그분께는 복종을 거부하기가 십상이다.
Ⅱ. 이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전언을 보내셨다(11절). "여호와께서는 솔로몬에게 변절에 대해 톡톡한 갚음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아마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을 것 같다)."
1. 판결은 공정하다. 즉 그가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나라의 일부는 그의 가문을 배반하리라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에게 바쳤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도 그의 왕권을 그의 신복에게 주시리란 것이다. "내가 나라를 네게서 즉 네 자손대에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니 그는 네가 수고한 나라의 많은 부분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솔로몬에게는 이것이 여간 큰 굴욕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의 부유한 나라를 상속자에게 영원히 물려 주리라는 기대로 즐거워했으리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죄는 가정에 파멸을 불러오며 상속을 단절시키고 재산을 소외시키며 사람의 명예를 실추시킨다.2. 그러나 매우 인자하시게도 다윗을 위하여(12, 13절) 즉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인하여 그 심판을 경감시키신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모든 은총은 그리스도를 위해서이며 그와 맺은 언약을 위해서이다. 나라는 솔로몬가로부터 찢어져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서가 붙어있다.
(1) 즉각적인 것은 아님. 솔로몬 생전에는 이 일의 시행을 보지 않게 될 것이다. 나라는 그의 아들의 손에서 빼앗기게 될 것이다. 그 아들은 이방 아내 중 하나에게서 난 자였다. 그의 어미는 암몬 여인이었다(왕상 14:31). 이 여인은 아마 우상 숭배의 장려자였을 것이다. 사람이 축복을 남기지 않는다면 자녀와 재산을 남긴다고 해서 무슨 위안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심판이 오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사는 날에 임하지 않는다면(왕하 20:19 참조) 그것은 우리에게 은총이 된다.
(2) 전적은 아님. 하나의 지파 곧 가장 강성하고 인구가 많은 유다 지파는 다윗가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13절). 이것은 다윗이 건축한 예루살렘과 솔로몬이 건축한, 그곳의 성전을 위해서였다. 이 양자는 남의 수장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솔로몬은 하나님께로부터 급속히 돌이키지 않았으며 완전히 돌이키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나라를 급히, 전부 다 빼앗으시지도 않았다. 솔로몬의 양심을 깨우치고 그를 회개시키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은혜로이 보내신 이 전언에 접하자, 그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였다고 생각할 만하다. 즉 솔로몬이 자기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며 자기 의무에로 복귀했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다. 그런 뒤 그는 전도서에다 자기의 회개를 피력하였을 것이다 그는 전도서에서 자신의 어리석음과 미침을 통렬히 비탄하고 있다(전 7:25, 26). 그리고 그는 장차 올 심판을 고려하여 그와 같은 악한 행로를 조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라고 남들에게 경고한다. 올 심판은 벨릭스를 전율케 했던 것처럼 솔로몬을 떨게 했던 것 같다. 이 참회의 설교는 다소 성격이 다르긴 하나 다윗의 회개시에 못지 않게 죄로 심령이 상하여 죄로부터 돌이켰다는 것을 참되게 나타내는 설교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기 백성 속에서 여러 가지로 역사하신다. 이와 같이 솔로몬은 비록 실족하긴 했으나 완전히 엎드러진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대해 그에게 하신 말씀은 성취되었다.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그를 징계하려니와 내 은총은 그에게서 빼앗지 아니하리라(삼하 7:14, 15)." 하나님이 비록 자기의 사랑하는 자를 죄에 빠지도록 허용하시더라도 그들을 계속 죄중에 있도록 놔두지는 않으신다. 솔로몬의 변절은 그의 치욕이 되고 개인적 명망에 큰 오점이 되긴 했으나 그의 치적에 대한 평판을 훼손하지는 않았다. 그의 통치는 후에 선정(善政)의 귀감이 되었다(대하 11:17). 역대기에서는 왕들이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하는 한 정치를 잘 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 모든 점을 미루어 보아 우리는 그가 회개하여 자비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가 회복한 데 대해 기록하는 것을 적합치 않는 것으로 생각하시고 불분명한 상태로 그냥 두셨다. 이것은 회개를 전제로 죄짓는 일이 없도록 남에게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이 저들을 회개케 해 주실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설령 회개하도록 해 주신다고 하더라도 그들 자신이나 남에게 그 증거를 보여 주시는지의 여부도 알 수 없다. 큰 죄인은 스스로 각성할 수도 있고 회개의 혜택을 입을 수도 있지만 평안과 명예는 얻지 못한다. 지은 죄는 없어지나 오명은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대적들(열왕기 상 11:14-25)
Ⅰ. 솔로몬이 하나님과 자기 의무를 고수하는 동안에는 어떤 대적이나 재앙도 일어나지 않았다(4절). 그에게 동요와 불편을 야기시키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솔로몬에게 대항하여 등장하는 두 대적의 기사를 읽게 된다. 그들은 대수롭지 않은 존재들이었다. 솔로몬이 먼저 하나님을 자기 원수로 삼지만 않았던들 그들은 솔로몬의 주목을 끌 만한 일이라곤 전혀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솔로몬이 죄로써 자신을 초라하고 약한 존재로 만들지만 않았던들 하닷이나 르손이 솔로몬같이 크고 강한 왕에게 무슨 해를 입힐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죄를 지은 솔로몬은 어떤가? 그토록 보잘 것 없던 자들이 그를 위협하고 모욕을 주는 존재로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신다면 우리는 제 아무리 큰 자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시게 되면 극히 작은 것도 우리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게 하실 수 있으시다. 메뚜기조차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실 것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이들 두 대적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자들이었다(14, 23절). 그들 스스로야 야망이나 복수의 원리에 의해 움직였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이용하여 솔로몬의 징계라는 당신의 의도를 이루고자 하신 것이다. 경고된 심판 중 주요한 것, 즉 그에게서 나라를 빼앗는 것은 연기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보다 크게 낮추시기 위해 내리시는 막대기의 따끔한 맛을 보게 되었다. 누가 어떤 식으로 우리를 대적하든지간에 우리는 그들을 그렇게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시므이에게 명하사 다윗을 저주하게 하셨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란 도구를 통해 그 도구를 지으신 분을 바라 보아야 하며 그 일 가운데서 논쟁하시는 여호와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Ⅱ. 이들 두 대적이 솔로몬과 이스라엘에게 대해 품은 적개심은 다윗 시대로부터 연유하였다. 다윗은 이들의 조국을 각각 공략하였던 것이다(15, 24절). 솔로몬은 영토의 확장이라든가 국고 수입의 증가 등으로 자기 아버지가 이룩한 성공의 혜택과 이득을 향유하였다. 만일 그가 하나님께 밀착되어 있기만 했던들 그런 혜택 이외에는 아무 것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솔로몬은 그런 이득을 상쇄시킬 만한 악한 일을 당하게 된 것이다. 다윗이 스스로 맺은 원수들을 그가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 원수들은 그의 옆구리의 가시들이 되었다. 너무 함부로 남의 원한 살 일을 하는 자들은 장차 때가 되면 그 일이 기억나게 될지도 모르며 자기 자식대에 가서 이자까지 부쳐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마땅하다. 친구라고는 거의 없는 이 세상에서 어쩔 수 없어 원수 맺는 것 외에 원수를 만들지 않는 게 현명한 일이다.
1. 에돔인 하닷은 솔로몬의 대적이었다. 우리는 하닷이 솔로몬을 대적하여 어떤 일을 행했으며 어떤 식으로 그에게 괴로움을 주었는지 아무런 설명을 받지 않고 다만 전체적으로 그가 솔로몬의 대적이었다는 말밖에 보지 못 한다. 그러나 본문은 우리에게 다음 사실을 이야기 해 준다.(1) 그가 솔로몬에게 원한을 품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다윗은 에돔을 정복하였었다(삼하 8:14). 요압은 그때 모든 남자를 다 칼로 쳐 죽였다(15, 16절). 그는 가공할 만한 처형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대한 에돔의 묵은 적대 관계를 보복하는 행위였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것은 너무 가혹한 행위였던 것 같다. 요압이 피살자들을 매장하는 동안(그는 자기 동포를 매장한 에돔인을 하나도 살려 두지 않았고 또 그들은 매장해 주어야만 하였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은 나라를 성가시게 하는 존재가 될 것이었다, 겔 39:12 참조) 하닷은 이 전면적 학살로부터 구출되었다. 왕가의 핏줄을 받은 하닷은 이때 어린 아이였는데 에돔왕의 신복 중 몇몇이 그를 보호하여 애굽으로 인도하였다(17절). 그들은 도중에 지체하였는데 처음에는 미디안에서 길을 멈추고 그 다음에는 바란에서 지체하였다. 여기서 그들은 사람들을 모았다. 이것은 전투하거나 강제 통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닷을 시종토록 하기 위해서였다. 자기들의 어린 주인 하닷이 자기 신분에 어울리는 수행원을 배종시킨 채 애굽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애굽에서 그는 친절한 보호를 받았고 영락한 왕자로서 바로에게 잘 대우받고 부양받게 되었다. 그는 바로의 마음에 썩 들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는 왕비의 아우와 결혼하게 되었다(19절). 하닷은 바로의 처제에게서 아들을 낳았는데 왕비는 그 아이에게 아주 많은 친절심을 품었으니 그 아이를 바로의 집 왕의 아들 가운데서 양육시킬 정도였다.
(2) 어떻게 하여 하닷이 솔로몬에게 화근이 될 수 있었는가? 다윗과 요압이 죽자 그는 자기 본국으로 돌아가 정착하였다. 솔로몬이 계속 지혜롭고 일반 대중의 이익을 위해 방심하지 않는 동안에는 그가 조용히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솔로몬은 삼손이 범죄로 말미암아 자기 힘을 잃은 것같이 범죄로 인해 지혜를 상실하게 되었다. 솔로몬은 공무에 무관심하게 되었고 방심하게 되고 신의 보호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하닷은 이스라엘을 침공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하닷이 솔로몬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본문에는 언급이 없다. 다만 바로가 그와 헤어지기를 얼마나 싫어하였으며 그의 체류를 얼마나 간절히 청원했는가가 나와 있을 뿐이다(22절). "네가 나와 함께 있어 무슨 부족함이 있느뇨?" 하닷은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다" 고 말한다. 그는 자기를 "내 고국, 나의 고국의 공기와 흙으로 보내달라" 고 말한다. 순교자 베드로는 이 점을 경건히 상기하고 있다. "천국은 우리의 본향이다. 우리는 그 본향에 대해 거룩한 애착심을 품고 그곳을 향한 열망과 향수를 간직해야 한다. 심지어 우리가 추방당한 장소 곧 이 세상이 우리에게 아주 미소를 띄고 있을 때에라도 말이다." 세상이 "너희가 무엇이 부족하여 그다지도 그리고 가고 싶어하느냐?" 고 묻는다면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로 하여금 그곳으로 가게 해 달라. 거기에는 우리의 소망과 영광과 보물이 있다" 고 대답할 수 있다.
2. 수리아인 르손은 솔로몬의 또 다른 대적이었다. 다윗이 수리아인들을 정복했을 때 르손은 남은 무리의 두목이 되었다. 그는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으면서도 붙잡히지 않고 살았다. 솔로몬은 무관심하게 되었고 급기야 그는 다메섹을 점유하였다(24절). 그는 그곳과 그 주변 지방을 장악하고 통치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에게 괴로움을 끼쳤다. 아마 그는 하닷과 제휴하여 솔로몬이 사는 모든 날 동안(즉 그가 변절한 이후의) 환란을 끼쳤을 것이다. 또는 그는 솔로몬의 모든 재위 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원수가 되었을 것이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반역하기 전까지는 그가 이스라엘에게 무력한 악의를 노출하였다. 그때에는 그가 이스라엘에게 아무런 해도 입힐 수가 없었다. 솔로몬이 반역한 때는 바로 그의 방비가 그에게서 떠나간 때이다. 르손에 대해서는 그가 이스라엘을 싫어하였다고들 한다. 딴 군왕들은 이스라엘과 솔로몬을 사랑하고 찬양하였으며 우호를 청하였는데 여기에는 이스라엘을 미워한 자가 등장한다. 통치자나 백성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훌륭한 자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많은 존경을 받더라도 아마 일부 사람들에게는 미움과 증오를 받을 것이다.
여로보암의 출세가 예언됨(열왕기 상 11:26-40)
우리는 저 치욕스런 이름 곧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설명을 여기서 처음으로 대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솔로몬의 대적으로 무대에 등장한다. 하나님은 솔로몬 왕국의 대부분을 그의 신복에게 주리라고 분명히 예언하셨는데(11절) 여로보암이 바로 그자였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읽게 된다.
Ⅰ. 그의 혈통. 그는 유다 지파 다음으로 명예로운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다. 그의 어머니는 과부였다. 섭리는 남편을 여윈 그녀에게 활동적이고 솜씨좋은 아들로 보상해 주셨던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었다(우리는 그렇게 상상할 수 있다).
Ⅱ. 그의 승진. 할 일이 있을 때 적당한 사람을 등용하는 것은 솔로몬의 지혜로움이었다. 그는 여로보암이 매우 부지런한 청년임을 관찰하였다. 솔로몬이 관찰한 여로보암은 자기 일에 전념하고 그 일에 즐거움을 느끼며 그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는 자였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점차로 그를 승진시켜서 마침내 그는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두 지파에게 대한 국세청장으로 삼기까지 하였다. 또는 아마 솔로몬은 그 두 지방의 도백(道伯)에 해당하는 직임을 그에게 맡겼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요셉가의 부역이나 공납 즉 세금이나 동원을 담당하는 관원이었던 때문이다. 근면은 승진의 지름길임을 명심하자.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자를 보느냐? 자기 일을 보살피고 수고하며 끝까지 해내려는 자를 보느냐?(잠 22:29). 그런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늘 비천한 자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다윗과 그의 전임자와 후계자 이 세 사람의 차이를 살펴 보자. 사울은 용맹있는 자를 보면 자기에게 모아 들였다(삼상 14:52). 솔로몬은 부지런한 자를 보면 그를 등용하였다. 그러나 다윗의 눈은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자기와 함께 거하게 하였다(시 101:6). 그는 경건한 자를 보면 등용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는 사람이었고 정직한 자를 보는(시 37:37)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Ⅲ. 솔로몬의 사후 열 지파의 통치자로 선정됨. 혹자는 여로보암이 직접 솔로몬에 거역하는 음모를 꾸몄으며 왕위에 오르려고 노력하였으며 그는 거칠고 야망에 불타는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유대인들은 여로보암이 솔로몬에 의해 밀로 건축의 책임자로 발탁되자 기회를 다잡아 솔로몬을 백성의 학대자로 비난하고 백성을 그의 통치로부터 이간시키려고 하였다고 한다. 그가 그런 의도로 말을 많이 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랬다면 솔로몬이 목석이 아닌 이상 그 통보를 받았을 터이고 그렇게 되면 그의 출세도 막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심중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명백히 암시하고 있다. 선지자가 그에게 "너는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스리게 될 것이다" (37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게 된 일의 원인이다. 아니, 이것은 오히려 그 일의 줄거리이다. 솔로몬은 그를 요셉 지파의 치리자로 삼았다. 그는 통치권을 인수하러 가다가 선지자를 만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가 왕이 될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듣는다. 이리해서 그는 담이 커져 높은 자리를 엿보게 되고 몇몇 일로 왕을 대적하며 성가시게 만든다.
1. 이 말씀을 전달한 선지자는 실로의 아히야였다. 우리는 이 아히야에게 대해서는 다시 읽게 될 것이다(14:2). 실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고 망각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전 날을 기억하사 하나님은 한 선지자로 그곳을 축복하신 듯하다. 아히야는 길에서 여로보암에게 사신(使信)을 전달하였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을 전달할 때 그랬던 것처럼(삼상 9:27) 아마 그의 종들도 명하여 물러가게 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이 눈에 띄지 않게 여로보암한테 전달됐다고 하여 그 신성함이나 확실성이 덜하게 되지 않는다. 비록 울타리 아래서 전달된다고 해도 말이다.2. 여로보암에게 보여 준 표적은 의복을 열 두 조각으로 찢어 열 조각을 그에게 주는 것이었다(30, 31절). 이 의복이 보통 당연히 여기듯 여로보암의 것인지 아니면 아히야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후자의 옷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즉 선지자)는 여로보암에게 표적을 주려는 의도에서 새 옷을 입었다. 사울에게서 왕국이 종결된다는 것은 외투자락의 찢어짐으로 예고되었는데 찢어진 옷은 사울의 것이 아니라 사무엘의 옷이었다(삼상 15:27, 28). 여로보암의 옷이 아닌 것을 열 조각 준 것은 여로보암의 옷을 주기 보다 더 의미심장하였다. 진짜든 가짜든 신약에서조차 아가보 같은 선지자도 그런 표적을 사용하였다(행 21:10, 11).
3. 전언 자체는 매우 자상하다.
(1) 아히야는 그가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 열 지파의 왕이 될 것이라고 납득시킨다(31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왕들은 그를 의지하여 통치한다-" 내가 열 지파를 네게 주리라" 고 말씀하실 때에는 그의 미천한 출생이나 고용살이가 그의 출세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다.
(2) 아히야는 그에게 이유를 설명한다. 여로보암의 선한 인격이나 공적 때문이 아니라 솔로몬의 배반을 징계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솔로몬과 그의 가족과 많은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을 숭배함이라" (33절). 그가 왕이 되는 것은 저희가 그릇되이 행한 때문이지 여로보암이 더 잘 할 것 같아서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그들이 가나안의 주인이 된 게 자기들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가나안인들의 악함 때문이었다는 것을 인식해야했다(신 9:4). 여로보암은 그토록 훌륭한 자리에 앉을 만한 가치가 없었으나 이스라엘은 그렇게 못된 군주를 맞이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아히야는 솔로몬가로부터 왕국을 분할하는 이유가 그들이 하나님을 버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는 가운데 여로보암도 범죄함으로써 자기 위치를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3) 그는 여로보암의 기대를 제한시킨다. 열 지파만 기대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솔로몬의 사후에 그 열 지파가 그에게 귀속되리라는 것이다. 이는 그가 전부를 노리거나 즉각적으로 솔로몬의 통치를 교란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을 듣게 된다.
[1] 두 지파(여기서는 한 지파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소수의 베냐민이 어떤 의미에서 다수의 유다 지파 속에 파묻혀버린 때문이다)는 다윗가의 보루로서 확실히 남을 것이므로 결코 그들을 도모해서는 안된다는 것. "내가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라" (32절). 그리고 다시(36절) "다윗에게 한 등불이 있게 하리라" 고 말씀하신다. 즉 빛나는 이름과 기억 그리고 왕가로서의 그의 가계가 끊어지지 않게 하시겠다는 말씀이다(시 132:17 참조). 여로보암은 다윗이 사울처럼 배척받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었다. 하나님이 사울한테서는 그러셨으나 다윗에게서는 자기 인자를 거두시지 않으려고 하셨다.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다윗가는 옹호받고 그 명성을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로부터 메시야가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상하지(원뜻: 멸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음이라" (사 65:8).
[2] 솔로몬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가 열 지파를 소유하지 못 하리라는 것(34, 35절). 여로보암은 솔로몬을 폐위시키겠다고 나서서는 안 되었다. 그는 자기의 시간이 올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했다. 솔로몬이 생전에는 그로 온 나라를 주관하게 할 것이다. 이는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그는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왕관을 몰수당했으므로) "내 종 다윗" 을 위해서였다. 다윗은 "내 명령" 을 지켰기 때문이다. 자녀가 부모의 발자취를 따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선한 부모의 경건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경우가 왕왕 있다.
(4) 그는 여로보암이 선한 행실에 의존하고 있음을 그에게 이해시킨다. 면류관은 quamdiu se bene gesserit-즉 선한 행실을 보이는 동안에만 허용되어야 한다. "네가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면 내가 너를 위해 견고한 집을 세우리라. 네가 그러지 않으면 나도 그렇게 하지 않겠노라" (38절). 이 말씀은 그가 하나님을 버리면 비록 왕좌에까지 올랐다고 하더라도 그 집안은 티끌에 놓이게 되리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에 반해 다윗의 자손은 환란 중에 있긴 하나 영원히 환란을 당하는 건 아니며(39절), 다시 흥왕하기도 할 터였다. 사실 유다에서는 유명한 임금이 여러 명 나왔던 것이다. 여로보암 가문이 멸절된 때에도 그들은 영광 중에 통치를 하였다.
Ⅳ. 애굽으로 도주하는 여로보암(40절). 솔로몬은 우여곡절 끝에 이 모든 일을 알게 되었다. 아마 여로보암 자신의 입에서 이런 말이 새어나왔을 것이다. 그는 사울과는 달리 이 일을 감추지 못하였으며 자기만 알고 있지 못하고 남에게 말해버렸다. 만일 그가 혼자만 알고 있었더라면 본국에 남아서 미래의 웅비를 위해 준비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 일이 알려지고 난 뒤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1. 어리석게도 솔로몬은 자신의 후계자를 살해하려고 하였다. 사람의 마음에 어떤 계획이 있더라도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잠 19:21)고 남에게 가르친 이는 솔로몬이 아닌가?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의 의향을 꺾어보겠다고 생각하는가?2. 여로보암은 슬기롭게도 애굽으로 물러났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가 어디에 있든 안전히 지켜 줄 것이었으나 그는 자기 보존을 위한 수단을 강구하려고 하였다. 그는 결국 나라가 자기 수중에 들어올 것을 확신했기에 잠시 망명하여 미미하게 사는 데 만족하였다. 우리에게는 보다 좋은 나라가 예비되어 있다. 그런데 어찌 우리도 그러지 않을 것인가?
솔로몬의 죽음(열왕기 상 11:41-43)
우리는 여기서 솔로몬 기사의 종결을 읽게 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딴 역사서가 언급된다. 이 책은 곧 솔로몬의 행장이다(41절). 당시에는 현존하였으나 그 뒤 유실된 책이다(하나님의 영감을 받지 못한 책이기에). 이 책은 아마 역대기자나 실록 기록자가 썼을 것이다. 솔로몬은 자기의 연대기를 기록하는 데 이들을 고용했을 것이다. 성서 기자는 이 기록 중에서 하나님이 교회에 남기기에 적당하다고 보신 것만을 골라 냈을 것이다.2. 그의 재위 기간에 대한 요약(42절). "그가 예루살렘에서 온 이스라엘을 다스린 날 수가 사십 년이라." 그는 자기 아버지와 달랐다. 다윗은 한동안 헤브론에서 다스렸고 나머지는 예루살렘에서 통치하였다. 그러나 솔로몬은 예루살렘에서만 다스렸다. 그는 자기 아들과 달랐고 통치 초기에 유다만 다스린 자기 아버지와도 달랐다. 그는 온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것이다. 사십 년이란 그의 통치 기간은 다윗과 같았으나 수명은 자기 아버지만 못하였다. 죄가 그의 연한을 단축시켰던 것이다.
3. 그의 죽음과 장례 그리고 그의 계승자(43절).
(1) 그는 열조를 따라 무덤으로 내려가 그들과 함께 잠들었다. 그는 다윗의 장지에 묻혔는데 틀림없이 존귀하게 장사되었을 것이다.
(2) 그의 아들은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처럼 묘지는 떠나가는 세대로 가득 차고 집은 자라는 세대로 가득 차게 된다. 무덤이 "다고, 다고" 하며 부르짖듯이 땅은 상속자가 없어 사라지는 법이라곤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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