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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성전 봉헌식(열왕기 상 8:1-11)

이 성전은 비록 훌륭하게 단장되었지만, 법궤가 없이는 흡사 영혼없는 몸이나 초없는 촛대와 같은 것이었으며, (보다 적절하게 말해서) 기거할 사람 없는 집과도 흡사한 것이었다. 이러한 장엄하고도 품위있는 건물에 기울여진 온갖 비용과 수고라도 만일 하나님께서 이를 용납하시지 아니하시면 헛수고에 불과하며,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기록하실 곳으로 받아들이시고자 하시지 아니하시면 결국 파멸을 가져오는 무더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온갖 일을" 다 마쳤음에도(7:51) 아직 "없어서는 아니될 한 가지" 가 남아 있었으니 그것이 곧 법궤를 가져오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것이 곧 이 대역사를 마지막 장식하는 일이요, 여기에서 그 일이 지극히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사실을 살피게 된다.

Ⅰ. 다윗이 이전에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 올 때에 그랬듯이, 솔로몬은 이 의식을 주재했다. 다윗이나 솔로몬은 자기들이 그 궤를 뒤따른다든가 그것을 시중하는 백성들을 인도하는 일이 자기 자신들의 품위를 격하시키는 일이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았다.

솔로몬은 "전도자" 라는 칭호와(전 1:1) "회중의 스승" (전 12:11)이라는 칭호를 자랑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큰 회중을 그가 소집하고(1절), 그 회중의 중심이 되니, 그것은 "칠월 절기에" 그들 모두가 솔로몬에게로 모였기 때문이다. 그 절기는 소위 초막절이요, 7월 15일이었다(레 23:34). 다윗은 지극히 "선한" 사람답게, 궤를 자기 가까이로 "손쉽고 편리한" 장소로 인도하고 있다. 사람은 각자 받은 바 은사가 있으니, 그 은사로써 섬기는 자가 되게 하라. 자녀들은 그 부모가 중지한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다시 수행하자.

Ⅱ.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의식에 참례하였다. 즉 저들의 재판관들과 각 지파와 가문의 우두머리들과, 그리고 문무의 모든 관원들과(북부 지방에서 호칭하고 있듯이) 각 씨족들의 두목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대화는 능히 "모든 이스라엘의 집회" 라고 부를 만한 일이다. 이 기회에 저들은 한데 모여서,

1. 솔로몬에게 영예를 돌렸고, 그가 호의로서 그 백성에게 베풀어 준 훌륭한 소임에 대하여 범국민적인 감사의 뜻을 표했다.

2. 법궤를 존귀하게 했다. 또 그 법궤의 안치에 대한 만민의 기쁨과 만족을 표했다. 법궤를 외적으로 장려하게 꾸미려는 일은 종종 위선적인 추종자들에게는 매우 강렬한 시험의 대상이 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관심자들에게는 크게 유익하였다. 따라서 그 궤가 훌륭하게 안치 되기를 소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 법궤의 아름다운 안치가(경외하며) 기쁘게 해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공적인 자비는 공적인 감사 표시를 요구하는 법이다. 여호와 앞에 나서는 사람들은 결코 빈손으로 나서지 아니하였으니, 저들은 수 많은 양과 소를 희생의 재물로 드렸기 때문이다(5절). 솔로몬 당시의 백성들은 매우 부유하고 평안했으며 매우 활달했다. 따라서 이런 기회를 맞아 자기들의 활달성(유쾌한 마음)은 물론 재물까지도 하나님과 그 영광을 위하여 봉헌하는 것이 합당한 일이었다.

Ⅲ. 제사장들도 그 의식에서 자기들의 역할을 다했다. 광야에 있었을 당시에는 그 궤를 운반할 만한 제사장들이 그리 흔하지 아니하며 레위 사람들이 운반하여야 했으나, 이제 본 장에서 드러나는 바로는(이것은 법궤를 운반하는 최후의 기회이다) 여리고를 애워쌌을 당시 궤를 옮기라는 명을 받았던 때처럼, 제사장들이 손수 운반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세 가지 것을 듣게 된다.

1. 궤 안에 있었던 물건은 바로 두 돌판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데, 그것은 다윗과 솔로몬이 봉헌한 모든 것보다 훨씬 귀중한 보배였다.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는 궤 "옆에" 놓여 있었지 그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2. 궤와 함께 가지고 왔던 것은 무엇인가? "회막" 이었다. 이는 다분히 모세가 광야에서 세웠던 회막-이것은 기브온에 있었다-과 다윗이 세웠던 회막-이것은 시온에 있었다-을 함께 이 성전으로 가져왔을 듯하다. 말하자면 그 두 회막은 모두 저들의 온갖 성스러움을 이 성전의 신성함에다 굴복시킨 것이며, 이것은 이후로는 이 성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교회의 성스러운 물건들은, 그 교회로서도 크나큰 기쁨이요 지극히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지고하신 위에 있는 성결의 최고봉에 의해서 삼켜질 때가 있을 것이다.

3. 법궤를 안치한 장소 - 법궤는 이제 오랫동안의 방황 끝에 안식을 위하여 한 장소를 지정받았다(6절). 이는 곧 "전의 신탁 내부" (우리 성경은 "내전", 역주)이었는데, 그 곳은 그들이 하나님의 신탁을 기대할 수 있던 곳이요, 나아가 지성소였으니, 그것은 솔로몬이 세운 훌륭한 "그룹들의 날개 아래" (6:27) 자리잡고 있는데, 법궤가 그 아래 현존함으로써 지성소가 되는 것이다. 그룹들이 그 뒤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규례와 백성들의 집회에 대한 천사들의 특별한 보호를 뜻한다.

법궤에 채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그룹들의 날개 밑으로 그 채를 볼 수 있게 하였다. 그것은 일년에 한 번씩 제사장이 속죄의 피를 뿌리기 위하여 지성소로 들어갈 때 속죄소가 있는 법궤의 방향을 지시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궤를 다시는 운반할 필요가 없었으나. 계속해서 법궤의 채는 쓸모가 있었던 것이다.

Ⅳ. 하나님께서 자비롭게도 되어진 바를 모두 인정해 주시고, 그것을 받으셨다는 증거를 보여 주셨다(10,11절).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그곳 지성소에 현시하시기 전까지는 여러 제사장들이 그곳을 무상으로 드나들었을지 몰라도, 그 후로부터는 속죄의 날의 대제사장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목숨을 걸지 아니하고는 결코 법궤에 접근할 수조차도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세키나(하나님의 엄위의 현현)가 성전을 구름으로써 차지하며, 지성소뿐만 아니라 성전 전체를 가득 채운 것은, 제사장들이 그 내전에서 나온 다음이었다. 금제단에서 분향을 드리던 제사장들이 그런 광경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가시적인 하나님 영광의 발산을 통하여,

1. 하나님께서는 법궤를 존귀하게 하셨고, 당신의 임재의 증표로서 삼는다는 것을 인정해 주셨다. 법궤는 빈번한 이동과 그 머무는 곳의 초라함과 아무나 볼 수 있게 드러나 있음으로 해서 오랫동안 영광이 겸각되어 왔고 실추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당신에게는 언제나 끊임없이 귀한 것이요, 모세가 처음에 그것을 자기의 회막으로 옮겨 왔을 때처럼 여전히 귀중하게 하실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이 건물과 성전의 모든 비품을 자기의 이름과 인간들 중에 있는 자기의 나라를 위해 이루어진 선한 봉사라고 인정하셨음을 입증하셨다.

3. 하나님께서는 이 큰 회중에서 경외감을 느끼게 하셨으며, 저들이 본 바를 통하여 저들의 조상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영광에 관해서 모세의 책 가운데서 읽어 믿고 있던 저들의 신앙을 더욱 공고히 하여 주셨다. 이것을 통해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집착하며, 우상 숭배에 대한 유혹에 대해서 방어를 공고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4.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지금 곧 드리려고 하는 기도를 기꺼이 들으실 준비를 하고 있음을 보여 주셨다. 뿐만 아니라, 이 집을 하나님 자신의 처소로 삼으심으로써, 기도하는 모든 자들에게 거기서 하나님께 자기들의 간구를 드릴 수 있도록 용기를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구름, 곧 검은 구름 가운데서 나타나셨다. 이 사실이 뜻하는 바는



(1) 복음의 빛에 비유되는 율법의 어두움을 상징한다. 우리는 복음의 빛에 의해서 "순전한 얼굴로도 거울로 보듯이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

(2)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는 일과 비교해 볼 때, 오늘날의 우리들 형편의 어두움을 상징해 준다. 하나님을 보는 것이 하늘나라의 행복이 될 것이다. 거기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밝히 드러난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은 어떠 어떠한 분이 아니라는 식으로 소극적인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으나, 그때에는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눈으로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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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봉헌사(열왕기 상 8:12-21)

Ⅰ. 솔로몬은 자기들의 직무를 마치고 성전에서 나오자 자기들을 뒤덮고 있는 검은 구름을 보고 지극히 놀란 제사장들에게 격려를 했다. 그리스도 제자들은 "빛나는 구름" 이었는데도 "자기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 갈 때에 무서워하였으며" (눅 9:34), 여기에 나오는 제사장들 역시 자기들이 짙은 구름에 휩싸이게 되자 무서워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두려움을 진정시키기 위해

1. 솔로몬은 제사장들에게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증표로 봐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여호와께서는 자기가 캄캄한 데 계시겠다고 하였느니라" (12절). 이는 전혀 하나님의 불쾌의 표시가 아니라, 그의 은총의 징조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구름 가운데 나타나리라" 고 하셨기 때문이다(레 16:2). 어두운 경륜에 우리를 적응시키는 길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생각하고, 그의 말씀과 이루신 일을 함께 비교해 보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레위기에 보면, "이것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바이다" 라고 했다(레 10:5).

하나님은 빛이시라(요일 1:5). 빛 가운데 거하신다(딤전 6:16). 그러나 하나님은 "캄캄한 데서" 우리 인간과 함께 거하시며, 그 캄캄한 데를 자기의 거처로 삼으시니, 이는 인간들이 그의 영광의 찬란한 광채를 견디어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는 진실로 자신을 가리시는 이 하나님이시니이다." 이같이 하여 우리들의 성스러운 믿음은 연단되고, 경외하는 마음은 증가된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거하시는 곳(하늘나라)에서는 믿음이 눈으로 보는 광경을 지양하고 두려움은 사랑 안에서 삼켜진다.

2. 솔로몬 자신이 그 구름이야말로 지극히 영접할 만한 것으로 여겨 환영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구름에 의해서 성전을 소유하시려고 내려오셨으므로, 솔로몬은 몇 마디 말로써 엄숙하게 그 소유권을 하나님께 드렸다(13절). 하나님은 "틀림 없이 내가 가리라" 고 말씀하셨고, 솔로몬은 "아멘" 하고 말하고, "바로 지금 여호와여, 오소서 이 집은 주의 것이옵니다. 온전히 주의 것이오며,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건축하였사오며 주를 위하여 설비하였나이다. 이는 영원히 주님의 것이 오며,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로소이다. 이 집은 결코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거나 다른 목적으로 사용키 위하여 변조하지도 아니할 것이옵니다. 법궤도 역시 두 번 다시 이곳으로부터 옮기거나 그 위치를 흩으리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옵니다." 라고 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고 하는 사실이 솔로몬의 기쁨이며, 하나님께서 계속 소유하시리라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솔로몬이 그렇게 크게 기뻐하고 있는 그 구름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자.

Ⅱ. 솔로몬이 그 백성들을 가르치고, 저들이 방금 하나님께서 용납하시는 것을 목도한 이 성전에 관하여 그들에게 분명하게 설명한다. 그는 제사장들에게는 지극히 간략하게 설명하여 그들을 납득시켰다(현자에게는 단 한마디로). 그러나 그는 제사장들에게서 떠나 바깥 마당에 서 있는 "회중들" 에게로 "얼굴을 돌이켜" 몸소 이들에게 크게 말을 하였다.

1. 그는 이들을 축복하였다. 그들은 검은 구름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크게 놀라서, 그 짙은 구름이 저들에게 칠흑 같은 암흑으로 변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자기들 당대에는 전혀 보지 못하던 이 놀라운 광경이, 우리가 상상하기로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기도 드리게 하였을 것이며, 지극히 교만스러운 마음의 소유자들을 성실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솔로몬은 저들의 기도에 합세하고, 권위있게(" 열등한 자는 우월한 자의 축복을 받기" 때문이다) 이들 온 회중을 축복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화평함과 축복의 말을 하였는데, 이는 흡사한 경우를 당하여 기브온이 놀라고 있을 때에 천사가 그를 축복하던 것과 같은 언사였다. 즉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삿 6:22, 23).

솔로몬이 "이들을 축복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곧 그가 이들을 평화롭게 하고 그들을 공포에서 구해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축복을 받고 이들은 경외와 축복의 말을 기꺼이 듣고 받아들이는 표시로, 모두가 일어섰다. 이것이 곧 축복의 언사가 행하여질 때 마땅히 취하여야 할 올바른 태도이다.

2. 그는 자기가 세운 이 성전에 관한 것을 온 회중에게 알리고, 이제 그것을 하나님께 봉헌하고 있는 것이다.

(1) 그는 지금까지 자기에게 보여 주신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보살핌에 대하여 감사하는 자백으로 말머리를 시작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15절).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즐거움을 입게 되면, 그에 대한 찬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그는 이렇게 하여 온 회중을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를 드리도록 이끌었으니, 아마도 마음이 산란해 있던 이들을 잔잔케 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그는 "자, 나아오라, 하나님의 경외스러운 출현이 우리로 하여금 그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이 아니라, 그에게로 우리를 가까이 이끄시도록 할 것이며,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 라고 말한다. 이같이 욥도 캄캄한 상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였었다."

여기서 솔로몬은 하나님을 찬양하였는데, 이는



[1] "여호와께서 그 입으로 다윗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인해서였다. 또

[2] 이제 그 약속을 "그(하나님)의 손으로 이루신" 실행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족히 깨닫게 되고 또한 그러한 흐름을 따라 하나님의 언약의 근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전에 그가 말씀하신 것과 비교해 보게 되면 우리 자신과 우리 하나님에게 참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2) 솔로몬은 이제 자기 자신의 경의와 행동에 의해서, 이 성전을 하나님께로 인도함으로써, 이 전을 엄숙하게 그에게 봉헌하고 있다.

증여와 전달이라고 하는 것은, 흔히 전에 이루어졌던 바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하여, 현재 성취한 바로 유도되는 것이 상례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솔로몬이 이 성전을 건축할 마음을 생기게 한 특별한 원인과 이유에 대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1] 그는 그러한 장소가 없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먼저 전제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처하였던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기록하시리라고 저들이 생각하기에 마땅한 장소는 단 한 곳이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어느 다른 장소를 택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은 전에 하나님께서 몸소 말씀하신 바를 들어 다른 장소가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16절). "내가 내 이름을 둘 만한 집을 건축하기 위하여 아무 성읍도 택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이런 성전을 건축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2] 그는 그같은 장소를 세우려 했던 다윗의 의도를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다스릴 사람을 먼저 택하셨고(" 내가 다윗을 택하였다" 16절), 그 다음에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 을 그에게 불어넣어 주셨다(17절). 그것은 솔로몬이 자신을 과대시하기 위해 스스로 생각해낸 계획이 아니었다. 오히려 비록 착공을 할 때까지 살지는 못했지만, 고인이 된 그의 어지신 아버지가 세운 계획이었다.

[3]그는 자기 자신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버지의 의도를 인정해 주셨다. "이르시기를……이 마음이 네게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18절). 섭리는 우리에게 그 시작을 막을지언정, 선을 행하려는 성실한 의도는 은혜롭게도 하나님께서는 인정해 주시고 받아 주신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사람의 소망이란 곧 하나님의 자비이시다." (고후 8:12 참조).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선량한 뜻을 받아들이셨다. 그러나 그로 하여금 그 선한 일을 행하도록 허용하시지 아니하시고, 그 일을 수행하는 영예는 그 아들에게로 미루어 두셨다. 이르시기를 "그(솔로몬)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라" 고 하셨다(19절). 그러므로 솔로몬이 행한 바는 자신의 두뇌로서도 아니요 자신의 영예가 될 일도 아니였으며, 단지 역사(役寺) 그 자체를 자기 아버지의 계획에 따른 것이며, 그가 그것을 행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뿐이었다.

[4] 솔로몬은 자기 자신이 행한 일과 그 행위의 뜻을 설명하고 있다. "내가 나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고(20절), 또 그곳에 언약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였노라" 고 하였다(21절). 이리하여, 솔로몬이나 그의 재산이 이 성전이나 이에 속한 어느 부속물에 대해 지니는 온갖 권리와, 자격, 이권과 청구권과 주장 등 온갖 것을 영원히 하나님께 양도하며 포기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함이며, 그의 언약궤를 위함인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이루셨도다" 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한 선행은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하나님에게 약속한 바를 수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이루신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면 할수록, 더욱 더 그에게 은혜를 입는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능력이란 그로 말미암은 것이지 결코 우리들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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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서 드려진 솔로몬의 기도(열왕기 상 8:22-53)

솔로몬은 그 집을 총괄적으로 하나님께 양도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집을 점령하심으로써 그것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표했다. 거기에 뒤이어 솔로몬의 기도가 나온다. 그 기도를 통해서 그는 온갖 겸손과 경외심을 품고 그 양도물의 사용 목적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선언하면서, 하나님께서 그것에 동의해 주시기를 바랬다. 간략하게 말해서, 그가 간구하는 바는 이 성전을 제사의 집으로서 뿐만 아니라(그의 전체 기도를 통하여 이러한 것은 언급되는 바 없지만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다) "모든 백성들이 기도 드리는 집" 으로 여겨지고 받아들여지기를 원한 것이다. 기도하는 집이란 의미에서 보면 성전은 복음 교회의 한 예표가 된다(마 21:13 과 비교하여, 사 56:7 참조). 그러므로 솔로몬은 특별한 제사뿐만 아니라 또한 특별한 기도를 가지고 이 집의 문을 열었다.

Ⅰ. 이 기도를 드린 인물은 높은 지위의 사람이었다. 솔로몬은 이 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제사장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나 예언자들 중의 어느 누구를 지명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이 "이스라엘의 큰 회중을 마주서서" 기도를 드렸다(22절).

1. 그가 이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는 사실은 다행한 일이며, 그것은 그 부모가 그에게 베풀어 주신 신앙심 깊은 교육을 그가 크게 발전시켰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배운 바 모든 지식을 활용하여 그는 훌륭하게 기도 드리는 것을 익혔으며 정해진 형식을 갖추지 아니하고 prore nata-즉 즉석에서 올바른 태도로 하나님에게 생각했던 바를 아뢰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그의 철학적 담화, 그의 잠언과 노래 가운데서도, 그는 자신의 신앙심을 잊지 아니하였다. 그는 기도하여 뜻을 이룬 자요(3:11 이하), 생각건데 그는 기도에 열중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여기에서 엿볼 수 있듯이 기도의 은사에서도 뛰어났던 것 같다.

2. 그가 서슴치 않고 기도 드리려 했고, 또한 그렇게 많은 회중들 앞에서 거룩한 의식을 행하는 것을 결코 수줍어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다행한 일이다. 그는 자신이 성직자역을 맡으며 하나님께 대한 회중의 대변자 역을 하는 것이 자기 체면을 깎는 일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어느 누가 자기들은 너무나 지위가 높아서 자신의 가족들을 위하여 이러한 직분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겠는가? 솔로몬의 온갖 다른 영광, 특히 상아로 만든 그의 왕좌까지도 지금의 솔로몬보다 더 훌륭하게 할 수는 없다. 높은 자들은 이처럼 신앙적 행사의 존귀성을 지원해 주어야 하며, 자기들의 지위 높음을 이용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여기에서의 솔로몬은 그리스도의 한 예표이니, 그리스도는 자기가 다스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대중재자이시다.

Ⅱ. 그가 기도 드리는 자세는 매우 경건했고, 그 기도는 겸손함과 진지함 그리고 열성이 아주 잘 나타나 있었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단 앞에 서서" 라고 하였으니, 이는 때가 차면 장차 드려질 희생의 제물을 힘입어 자기의 기도가 성공하리라고 믿었던 것을 시사한다. 이 제단에서 드리는 제사는 그 제사(예수)의 한 예표이다.

그러나 기도 드리기 시작할 때,

1. 그는 "무릎을 꿇었다" (54절 참조; 대하 6:13 비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기도 드리는 사람으로서는 가장 올바른 자세이다(엡 3:15). 아무리 지위 높은 자라도 "자기의 조물주 앞에 무릎 꿇는" 것이 그의 지위를 손상시킨다고 생각해서는 아니 될 일이다. 허버트(Herbert)씨는 "무릎 꿇는 것이 결코 실크 양말을 못쓰게 하지는 않는다" 고 말하고 있다.

2. "그는 하늘을 향하여 손을 폈다." 그리고는(54절로 보아 그런 것 같다) 계속하여 그 기도가 끝날 때까지 그러한 자세로 있었으니, 이것이 뜻하는 바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향한 그의 소망과 그로부터의 기대를 말함이다. 그가 손을 폈으니 이는 말하자면 활짝 열어놓은 마음으로부터의 기도를 드리고, 그것을 하늘에 바치고자 하며, 또한 자기가 간구한 그 자비로우심을 양팔로 받고자 함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이렇듯 신앙심의 집착과 열의를 외적으로 표현한 것을 보고 멸시하거나 조롱해서는 안 된다.

Ⅲ. 그 기도는 매우 길었다. 아마도 실제로는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의 보좌 앞에서 우리는 언론의 자유가 있으니, 이 자유를 활용해야 마땅하다. 그리스도께서 책망하시는 것은 긴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가식적으로 행하는 기도인 것이다. 모든 기도를 통하여 우리도 그러해야 마땅한 사실이지만, 솔로몬은 이같은 훌륭한 기도를 통하여,

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그는 가장 올바른 경앙의 행동으로써 이 기도를 시작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라고 말머리를 시작하고 있으니, 곧 이스라엘과 언약 관계에 있는 하나님을 말한다. 그리고는

(1) 그는 하나님 자신의 놀라운 존재를 총괄적인 말로 찬양한다. 존재 가운데 으뜸이시며(" 주와 같은 신이 없사오며, 하늘과 땅에 있는 어떠한 권능도 결코 주와 비교할 수 없나이다") 또 그 백성들에게는 가장 훌륭한 상전이 되심을 찬양했다. "주께서는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셨나이다. 언약을 지키시는 데만 신실하신 것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시는 일에 있어서도 신실하시나이다. 이는 저들 종들이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고, 그 눈을 주께로 돌려 열성을 보이기만 하면, 저들에게 분명히 약속하지 않으신 자비까지도 베푸시옵니다."

(2) 그는 하나님께서 전에 행하신 바에 대해, 특히 자기 가족들을 위하여 이룩하신 바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고 있다(24절). "주께서는 주의 다른 종들에게와 같이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에게 허하신 말씀을 지키셨나이다." 이 약속은 그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놀라운 은총이요 지주이며 기쁨이었으며, 이제 그 약속의 성취는 그 극치인 것이다. "주께서 오늘날과 같이 말씀하신 바를 이루셨나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성을 새로이 체험하면 보다 큰 찬양을 드리게 된다.

2. 그는 하나님께 은혜와 돌보심을 간구하고 있다.

(1) 그는 하나님께서 그 전에 약속하신 바 있는 자비로움이 자기와 그 가정에 이루실 것을 간구한다(25, 26절). 어떻게 되어가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부분적으로 약속의 성취에 감사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께서 하신 그 말씀을 성실하게 지키셨다. "주께서 주의 종 다윗에게 허락하신 말씀을 지키사, 그 아들로 하여금 그의 왕위에 앉게 하고, 뜻하셨던 바 성전을 건축케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이제 주의 종 다윗에게 계속 허락하신 말씀을 지키시옵소서. 그것은 아직도 때를 기다리며 남아있나이다." 하나님이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것을 우리가 체험하면, 우리들은 용기를 내야 하며, 그 약속을 의지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간구해야 마땅함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앞으로의 그의 자비로우심을 희구하는 자는 이전에 베풀어 주신 자비로우심에 깊은 감사를 드려야 마땅하다는 것도 마음에 새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도우셨다(고후 2:10). 솔로몬이 이제 하나님의 약속을 반복하고 있다. "네 자손이 자기 길을 삼가서" 그 조건을 소홀히 하지만 아니한다면, "네게로 좇아나서 위에 앉을 사람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는 약속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주시는 조건을 이행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께서 그 약속하신 바를 이루시리라고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솔로몬은 겸손하게 그 계승권을 간구한다. "이스라엘 하나님이여 원컨대, 주는 주의 하신 말씀이 확실하게 하옵소서" (26절). 하나님의 약속은(우리가 빈번히 살펴 보아 왔듯이) 우리들의 소원에 대한 길잡이요, 우리들 소망의 근본이며, 기도를 통한 기대가 되어야 마땅하다. 전에 다윗이 기도하기를(삼하 7:25), "여호와여, 말씀 하신대로 행하소서" 라고 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사실은, 자녀 된 자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섬기는 그 부모들로부터 기도하는 법과 기도를 통하여 간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점이다.



(2) 하나님께서 이제 소유하신 이 성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실 것과 주의 눈이 "끊임없이 이곳을 향하사" (29절), 너그럽게 그 성전을 소유하시고, 그것을 존귀케 하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1] 그가 전제로 삼고 있는 것이 있다.

첫째,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겸양에 대한 겸손한 감탄이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리이까? 한량없이 높으시고 지극히 거룩하시며 자족하신 하나님께서 땅에 거하시고-타락하여 죄악으로 뒤덮인 이 땅-저주받아 불태우기 위하여 남겨둔-이 땅의 벌레만도 못한 인간을 축복하여 줍소사고 말씀을 들을 만큼 창피함을 무릅쓰고 낮추실 수가 있으리라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사오리까? 주님이시여, 어찌되는 일이옵니까?"

둘째, 솔로몬은 자기가 지은 집이 매우 넓기는 하나 하나님을 용납하기에는 지극히 부족하게 여기는 겸손한 자이다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나이다. 왜냐하면 무소부재하신 이를 그 일부라도 포함시킬 수 있는 곳이 없사오며, 이 집 역시 너무나도 협소하고 누추하여, 그 존재와 영광에 있어서 한량없으신 이의 거소로 삼을 수가 없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최선을 행하였을 때 명심해야 할 사실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 우리들의 봉사와 그의 완전하심 사이의 무한한 차이와 불균형을 자인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2] 그의 총괄적인 기도는 이런 전제를 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가 지금 드리고 있는 기도를 은혜롭게 들어 응답하시리라(28절). 그것은 겸손한 기도(" 종의 기도")라 했다. 열렬하기도 하였으며(" 부르짖음" 과 같은 기도였다),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였다(나의 하나님 여호와로서의 "주의 앞에서" 의 기도였다).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기도가 아니라(이 세상에 있는 여하한 고관 대작이나 명예로운 칭호라도 그것으로 하나님 마음에 들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당신의 종의 기도도 들으시고 돌보아 주옵소서."

둘째, 그가 이제 건축하고, 특히 하나님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29절)고 하신 이 집안에서나 이 집을 향하여 금후 언제든지 드리는 온갖 기도를 하나님께서 마찬가지로 들어 응답하시리라. 자기 자신의 기도와(" 당신의 종이 드릴 기도를 들으시옵시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과 이스라엘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도를 들어 응답하실 것을 빌고 있다(30절). "이곳은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옵니다마는, 진정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저들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죄와 저들의 성물(聖物)의 부정함까지 사하여 주옵소서."

ㄱ.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나 기도하는 백성들이 되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도 몸소 그러한 본분을 준수할 것을 결심하고 있다.

ㄴ. 그는 이 땅 위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광을 기꺼이 드러내시고자 하신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라고 백성들에게 명하고 있다. 제사장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나, 저들의 성전 뜰에서 예배드리게 될 때에 저들의 예배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그것은 우상이니) 저들의 나약한 신앙을 돕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행하여야 할 온갖 일에 눈을 돌려야 마땅한, 진정한 성전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의 예표로서 제정된 저들의 예배의 중재자가 되는 이 성전을 향하여 눈을 돌려야 마땅한 것이다. 성전이 폐허화되었을 때까지도 그 성전을 위하여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도 예루살렘 쪽으로 얼굴을 돌렸던 것이다(단 6:10).

ㄷ.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죄를 사하여 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 그것은 이 집에 대하여 전혀 아는 바 없고 또한 이곳을 바라보지도 아니하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는 아무리 열성적인 기도라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 이 집이 축복으로 받은 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가시적 표징이 언제나 마음이 있는 간구자들에게 뚜렷한 용기와 위안이 되게 하실 것을 바라고 있다.



[3] 더욱 자세하게, 이 기도의 집 안에서나 이 집을 향하여 하나님께 드려질 간구의 여러 가지 경우를 열거하고 있다.

첫째, 사람과 사람 사이에 논쟁의 대상이 되어 그 정당성을 결정 짓기 위하여 맹세로써 하나님께 탄원되었고, 그 맹세가 이제 단 앞에서 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논쟁하는 당사자간의 진실을 찾아내시사 심판하여 달라고 솔로몬은 기도했다(31, 32절). 그는 어려운 일에 대하여는, 은혜의 이 보좌가 심판의 보좌가 되어, 믿음으로 이곳에서 호소하는 피해자의 권리를 하나님께서 찾아 주시어, 뻔뻔스럽게도 이곳에서 호소하는 가해자들을 벌하실 것을 기도하고 있다.

성전과 제단을 걸어 맹세하는 것이 상례였던 것인데(마 23:16, 18), 성전이나 제단을 "걸어서" 하지 않고 성전과 "제단에서" 또는 그 "가까이에서" 맹세하는 것이 더욱 엄숙한 맹세가 된다는 가정 때문에 그 맹세는 타락해 버렸다.

둘째,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민족적인 재난으로 신음 한다든가 또는 어느 특정한 이스라엘 사람이 사적인 불행으로 괴로워 한다든가 하면, 이 집에서나 이 집을 향하여 기도할 것이요,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 응답해주실 것을 희구하였다.

ㄱ. 공적인 심판, 즉 전쟁(33절), 가뭄(35절), 기근과 온역(37절), 그리고 다른 재앙이나 질병 등 "기타 여러 가지" 로(라는 말을 끝맺고 있다)-어떠한 재난이나 질병이 발생했을 경우의 기근이다. "기타 여러 가지" 란 말은, 다른 백성들에게 재난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그가 생각하고 있는 바로

(ㄱ) 심판의 원인은 다름 아닌 죄악이 될 것이다. "만일 저들이 적국 앞에 패하거나 비가 부족하다면 이는 저들이 당신을 거역하여 죄지음을 말미암은 것이옵니다." 온갖 재앙을 낳는 것은 죄악이다.

(ㄴ) 심판의 결과는 저들이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며 이 집에서나 이 집을 향하여 하나님에게 간구하게 되리라. 이전에 하나님을 멸시한 자는 후일 그에게 간청하게 되고야 만다. "여호와여, 재난 가운데서도 저들이 주를 찾아 왔나이다." "재난 중에 저들이 조속히, 그리고 진정으로 나를 찾으려 할 것이라."

(ㄷ) 심판을 벗어나는 조건은 단순히 그것을 위하여 기도 드리는 것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저들이 "죄악으로부터 돌이키고(35절) 다시금 하나님께로 돌아서지" 아니하는 한, 저들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 달라고 청할 수도 없고 또 그러려고도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곧 저들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행실을 바로 잡지 아니하면 그렇다 함이라. 다른 어떠한 조건으로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 구원을 탐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저들이 자비로움을 입기에 합당하다면,

[ㄱ] 하나님이 하늘, 곧 위에 있는 거룩한 그의 성전-이것을 저들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에서 "이" 성전을 통하여 들으실 것이다.

[ㄴ] 하나님께서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죄사함을 받은 후에야만 심판이 제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ㄷ]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의 말씀과 예언을 통하여 "저들이 걸어야 할 선한 길을 저들에게 가르쳐 주실 것" 이다. 그리하여 저들은 저들의 고난을 인하여 유익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연단하고 가르치시는 자가 복이 있기 때문이다"), 쾌히 구원함을 얻게 될 것이다. 이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신 길과 의무의 길을 걷는 것을 발견하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으로 임하게 되는 것이다.

[ㄹ]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심판을 제거하실 것과 불평의 호소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고쳐 주시리라-그 기도를 용납하실 뿐만 아니라, 간구한 자비를 주시리라.

ㄴ. 개인적인 재난의 경우도 열거했다(38-40). "어느 이스라엘 사람이 주께 용무가 있다면, 그로 하여금 여기에서 주를 찾게 하시고, 이곳에서 주로부터의 은총을 찾게 하소서."

그는 낱낱이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참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생의 고난이 있다.

(ㄱ) 자기를 원망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고통을 지극히 민감하게 느끼면서도, 그것을 남에게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정을 하나님께는 공개하고자 한다고 솔로몬은 생각한다. "그들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자기를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문제점을 알아, 저들의 손을 펴리라. 곧 저들의 사정을 공개하리라. 이는 곧 히스기야가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는 중에 편지를 공개함과 같은 것이다. 그 괴로움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저들은 그것을 하나님 앞에 밝힐 것이다. 특히 내적인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죄는 우리들 자신의 마음의 재앙이 된다. 우리가 타락 가운데 거함이 곧 우리들의 영적 질병이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인 진정 이러한 것을 알려고 노력하여, 그러한 것을 억누르고, 그러한 것들이 소생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솔로몬은 탄식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신음하고 있는 고통이다. "오, 불쌍한 자여, 그가 곧 나이니라!" 이러한 것들이 그로 하여금 무릎꿇게 하고, 그를 지성소로까지 이끈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비탄해 가면서, "그는" 기도 중에 "손을 펴고 있다."

(ㄴ) 솔로몬은 이 전으로 가져와야 할 이러한 종류의 온갖 사정을 하나님께 맡긴다.

[ㄱ] 그의 전지(全知) 하심에 맡긴다.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시오니" 저들 마음의 재앙과 몇 가지 궁핍함과 고통뿐만 아니라(이러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아시지만 우리들로부터 이러한 것을 아시게 되리라), 마음의 소망과 의사, 마음의 신실함과 위선까지도 다 아심이니이다." 주는 어떠한 기도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이며, 또한 어떠한 것이 입술만으로 행하는 기도인지를 아시옵니다." 왕들의 마음이라도 하나님께는 헤아려질 수밖에 없다.

[ㄴ] 그는 공의에 맡긴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으시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아니라 은혜의 법칙으로 어김없이 그렇게 하여 주실 것이다. 율법으로서라면 우리들 모두가 멸망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ㄷ] 그의 자비로움에 맡긴다.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행하소서" (39절). "그리하면 저희가 사는 동안에 항상 주를 경외하리이다" (40절). 우리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움을 활용하여, 우리가 사는 동안 그를 더욱 경외해야 하겠다. "여호와 그의 선하심을 경외할지어다." 그에게는 "용서함이 있으니, 경외하리로다."

ㄷ. 이스라엘 사람 아닌 이방인의 경우가 다음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자기 나라 신을 숭상하는 일이 우매하고 사악함을 뉘우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 드리려고 이 성전에 오는 개종자를 말함이다.

(ㄱ) 그는 그와 같은 사람이 많이 있게 되리라고 생각한다(41, 42절).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룩하신 위대한 일에 대한 명성이 먼 나라에까지 미치리라고 보았다. 하나님은 그러한 위대한 일을 통해서 자신이 모든 신들 위에 있고, 홀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입증하셨다. "먼 곳에 사는 자들이 주의 능한 손과 주의 펴신 팔의 소문을 듣게 되리라. 그리고 이것은 모든 사려 깊은 백성들을 이 전을 향하여 기도 드리도록 할 것이며, 그리하여 그들은 그네들에게도 참된 자비를 베푸실 수 있는 그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될 것이옵니다.

(ㄴ) 그는 하나님께서 개종자들의 기도를 용납하시고 응답해 주실 것을 구한다(43절). "무릇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소서" . 이처럼 일찍부터, 이처럼 고대적부터, "이방의 죄인들" 을 향한 은총에 대한 징조가 있었다. 그때에도 "본토인이나 이방인에게나 하나의 법" 이 있었던 것과 같이(출 12:49), 모두에게 같은 복음이 있었다.

(ㄷ) 그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에 대한 지식이 전파되기를 목표로 삼고 있다. "오, 이방인들이여! 특별히, 그대들의 말을 속히 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스라엘 하나님께 대한 좋은 평판을 본국으로 가게 하시사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만민으로 주를 알고 경외하게 하소서(그리고 저들이 주를 바르게 알기만 하면 주를 경외할 것이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예배를 독점하여 그것을 이스라엘에만 한정하기를 원하는 자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며(그러한 소행은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이 계시던 시대에 유대인들의 시기심 많은 욕망이었다), 이제 그는 "이스라엘처럼 만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할 것" 을 기도하고 있다.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양자로 택함을 입어, 그의 자녀가 되기를! "아버지여" 그리하여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소서."

ㄹ. 다음으로 전장에 임하는 군대의 경우를 솔로몬이 하나님의 은총에 맡기고 있다. 그 군대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그 적국과 대적하여" 싸우기 위해 아주 먼 거리에 떨어져서 야영을 하게 될 것을 생각하고 있다(44절). "저들이 적과 교전할 태세를 갖추고 전쟁의 큰 위험성과 미심쩍은 그 결말을 생각하여 저들의 눈을 이 도성과 성전을 향하고 하나님의 가호와 승전을 기도하게 될 때, 저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마음에 용기를 일깨워 주시며, 저들의 팔을 강건케 하시고, 저들의 머리를 엄호하시사, 저들의 대의명분을 지켜 승전을 허락하게 주소서." 전선에 있는 군사들은 집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는 것으로 만족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저들 자신이 기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면 자비로우신 응답의 소망이 있다고 격려를 받고 있다. 기도 드리는 일이 항상 싸움과 동행해야 한다.

ㅁ. 끝으로 가련한 포로의 경우가 여기에 하나님의 연민의 합당한 대상으로 언급되어 있다.

(ㄱ) 솔로몬은 이스라엘이 범죄하리라고 예상하고 있다. 그는 그들과 자기 자신,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런 생각을 그릇된 것이라고 볼 수 없었다. "범죄치 아니하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무리 가혹한 섭리로 인간을 책망하시더라도 그것이 능히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정당화가 될 수 없고, 큰 죄를 질 위험에 빠져있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하나님이 버려두시면 죄 짓지 않을 사람이 없는 때문이다.

(ㄴ) 그는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하면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진노하사 저들을 적의 수중에 넘겨" 낯선 이국 땅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시리라는 당연한 예상을 했다(46절).

(ㄷ) 다음으로는 저들이 자신을 잘 생각하고 저들의 길을 잘 살펴서(재난이라는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심사숙고케 하기 때문이다) 일단 깨닫게 되면, 저들이 회개하고 기도 드릴 것이며, 저들의 범죄를 자백하고 "우리가 범죄하여 패역을 행하였나이다" 라고 말하면서 겸손하게 처신할 것이며(47절), 저들이 "적국의 땅에서-본국에서는 멸시하던-하나님께로 돌이키리라" 는 것을 예상했다.

(ㄹ) 저들이 기도로써 자기들의 나라, 거룩한 땅,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 거룩한 집인 이 성전을 향하여 바라보게 될 것을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 땅을 저들에게 주시고 그 도성을 택하신 분, 그리고 성전의 건립의 목표가 되었던 그 영광의 주인공인 분을 그렇게 기도하라고 명하고 있다(48절).

(ㅁ) 그는 하나님께서 저희 기도를 들어 주시고 저희 죄를 사해 주시며 저희를 위해 신원해 주시고 저희 원수로 하여금 저희를 불쌍히 여기게 해 주시도록 간구한다(49, 50절). 하나님은 모든 심령을 장악하고 계신다. 그는 원하시면 극히 물살이 센 격류도 반대로 흐르게 하실 수 있으며 자기 백성에게 극히 잔인한 박해자 되었던 자로 긍휼심을 품게 하실 수 있다. 이 기도가 응답받는 것을 눈여겨 보자(시 106:46). "그는 저희로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 포획자들이 포로를 방면하지는 않았다면 하다 못해 그들의 포로 생활을 편하게라도 해 주었던 것이다.

(ㅂ) 그는 하나님께 대한 저희의 관계와 저희에게 대한 하나님의 권익을 들어 강변한다. "저희는 주의 백성이 됨이니이다. 주께서는 저희를 취하여 주의 언약 안으로 끌어 들이셨고 주의 인도와 돌보심 아래 들이셨으며 주의 산업으로 삼으셨나이다. 주의 공세(貢稅)와 영광의 납세는 딴 어느 민족보다 이 산업으로부터 많이 나옵니다. 저희는 세상 만민 가운데서 구별되어 주의 산업이 되었고 현저한 은총에 의하여 주의 전유물로 되었나이다(53절)."

마지막으로, 그는 전체적인 간청으로 기도를 끝맺는다. 그는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모든 백성이 부르짖는 대로 다 경청하시기를 요구하고 있다(52절). 구약의 성전 시대와는 달리 복음 하에서는 장소가 기도의 수용성을 좌우한다고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 때에는 성전에서 기도하면 그 기도가 받아들여지는 데 보탬이 되었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림자였다. 실체는 그리스도시다. 그의 이름으로 간구하면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8:23 없음.

 

8:24 없음.

 

8:25 없음.

 

8:26 없음.

 

8:27 없음.

 

8:28 없음.

 

8:29 없음.

 

8:30 없음.

 

8:31 없음.

 

8:32 없음.

 

8:33 없음.

 

8:34 없음.

 

8:35 없음.

 

8:36 없음.

 

8:37 없음.

 

8:38 없음.

 

8:39 없음.

 

8:40 없음.

 

8:41 없음.

 

8:42 없음.

 

8:43 없음.

 

8:44 없음.

 

8:45 없음.

 

8:46 없음.

 

8:47 없음.

 

8:48 없음.

 

8:49 없음.

 

8:50 없음.

 

8:51 없음.

 

8:52 없음.

 

8:53 없음.

 

8:54

솔로몬의 백성에게 대한 축복과 권면(열왕기 상 8:54-61)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자기 설교를 다한 뒤 전반적인 것에 대한 결론을 제시하는데 여기서도 긴 기도를 마친 뒤 그렇게 하고 있다. 그는 백성을 축복하였다고 말하고 있다(55절). 그는 서서 축복하였는데 이는 보다 잘 들리도록 하기 위해서였고 권세를 가진 자로서 축복하였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너무나도 적절했고 격에 어울렸다. 회중은 결코 흩어지지 않았다. 그의 말은 회중을 감동시키고 그들이 기억에 남을 만하였다.

Ⅰ. 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셨던 크고 인자한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56절). 그는 회중을 축복하기 위해 일어섰으나 하나님을 송축함으로써 시작하였다. 우리는 범사에 감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에게 속한 것을 위해 잘 해 주시기를 기대하는가? 그러면 우리는 온갖 기회를 이용하여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것을 칭찬하자. 솔로몬은 태평을 주신 하나님을 송축하고 있다. 그는 재물과 명예와 권세를 말하지 않고 평안이 딴 어떤 것보다 고귀한 축복인 듯 태평을 운위하고 있다. 평안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은 딴 게 다소 결여되어 있더라도 그 축복을 과소평가하지 말 것이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저희에게 내리신 축복과 약속을 비교하는데 이는 신실성과 말씀의 진리성으로 하나님께서 존귀를 받으시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주께서는 주의 모든 이름보다 주의 말씀을 높게 하셨다" (시 138:2).

1. 솔로몬은 모세를 빙자하여 허하신 약속을 언급한다. 그는 다윗에게 허락된 약속도 언급하였다(15, 24절). 모세는 교훈 외에 약속도 하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태평을 약속하신 것은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들은 많은 시련 끝에 마침내 평안을 얻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이 그 모든 수고로부터 안식하게 될 날은 올 것이다(계 14:13).

2. 그는 말하자면 계약서의 뒷면에다 완전히 영수하였다는 사실을 기재하는 셈이다." 무릇 허하신 그 선한 말씀이 하나도 이루지 않음이 없도다." 그는 모든 이스라엘인의 이름으로 계약이 이행되었음을 공표하여 하나님의 성실성에 대한 영원한 명예가 되게 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격려가 되게 한다.

Ⅱ. 그는 다음 네 가지에 대한 자신의 진지한 소원과 희망을 표명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회중을 축복하고 있다.

1. 하나님의 임재. 교회나 민족이나 개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행복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이 큰 회중도 조금 있으면 뿔뿔이 흩어질 터였고 이 세상에서 다시 함께 모인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해산에 앞서 이렇게 축복한다.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옵소서. 그러시면 우리가 서로 떠나 있게 되는 때에도 우리에게 충분한 위로가 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원합니다(57절). 우리를 떠나지 마옵시고 우리 앞에 있던 자에게 하신 것 같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시고 우리 후손에게도 영원히 그렇게 해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2.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 "우리와 함께 계시옵기를 원하나이다." 우리와 계속 함께 하소서. 이 소원은 해안선의 확장과 부의 증가를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자기에게로 향하게 하셔서 그 모든 길로 행하게 하시고 그의 계명을 지키게" 하기 위함이다(58절). 영적 축복은 최선의 축복이기에 우리는 이 축복을 간절히 탐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자연히 의무를 싫어하기 마련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지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 마음을 하나님께로 기울어지게 하는 것은 바로 그의 은혜이며 은혜는 기도로써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그가 방금 한 기도에 대한 응답. "나의 말씀을 주야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있게 하옵소서" (59절). "여기에서 하는 모든 기도에 대해 은혜로 돌아오게 하소서. 그리하면 그것은 이 기도에 대한 계속적 응답이 될 것입니다." 솔로몬이 여기에서 자기 기도에 대해 요구한 것은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에서 허락되었다. 솔로몬의 간원은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의 예표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간구는 주야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있다. 우리의 크신 대언자(Advocate)께서 바로 이 일에 끊임없이 힘쓰시고 계신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신원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 의뢰할 수 있다. 그는 우리를 밤낮 참소하는 원수와 대항하신다(계 12:10). 그는 우리를 위해 신원하시며 우리 주장을 대변하신다. 그는 우리 일과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일을 날마다 당하는 대로 돌아보신다. 모든 경우에, 필요할 때마다 그는 우리 일을 돌아보신다(" 돌아본다" 는 단어는 "신원한다" "…의 주장을 대신 한다" 는 뜻도 가짐:역주). 원문은 "그 날의 말씀을 그 날에" 우리를 위해 말해 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이로부터 모든 때를 따라(히 4:16, 원의: 모든 궁핍한 때에) 충분하고 알맞고 적절한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다.

4. 하나님의 영광.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 이러한 축복과 은총을 이스라엘에게 내려 달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만백성이 우리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솔로몬은 자기 나라가 자기의 바램만큼 크다고 생각한다) 만민이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와서 그를 경배하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솔로몬의 기도는 자기 아비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와 같이 이로써 끝이 난다(시 72:19, 20).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우리는 기도를 끝냄에 있어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란 함축된 말보다 더 나은 것을 찾을 수 없다.

Ⅲ. 솔로몬은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꾸준히 이행할 것을 엄숙히 당부하고 있다. 백성을 위한 기도는 끝냈으므로 솔로몬은 여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백성한테로 말머리를 돌린다. 그의 설교로 더 선하게 된 자들만이 그의 기도에서 보다 나은 혜택을 얻을 것이었다. 그의 고별사는 "너희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화합하여 완전케 하라" 는 것이었다. "너희는 순종하라. 그러나 그 순종은 나뉨이 없이 절대적이어야 하며 꾸밈이 없이 정직해야 하고 쇠퇴함이 없이 항구적이어야 한다" 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적인 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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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2

성전의 낙성식(열왕기 상 8:62-66)

우리는 앞에서 유다와 이스라엘이 먹고 마시며 자기들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매우 즐거워하는 것을 읽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뜰에서 희희낙낙하는 것을 읽게 된다. 그들은 이제 지혜의 길에 대한 솔로몬의 말씀 즉 지혜의 길은 즐거움의 길이라는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Ⅰ. 그들은 하나님의 집에 참석하는 동안 기쁨과 만족을 풍성히 맛보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사실 때문이다.

1. 솔로몬은 화목제의 희생을 드렸는데 소가 이만 이천이요 양이 십 이만 마리였다. 이 숫자는 그 땅이 매우 비옥한 땅이 아니었다면 전국의 가축을 씨도 남지 않게 하기에 족할만큼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이방인들은 기백 마리의 희생을 바치고도 스스로 통이 크다고 생각했으나(이방인들은 황소 백 마리의 제사를 hecatombs라고 불렀다) 솔로몬은 그들을 훨씬 능가했다. 그는 수천 수만 마리씩 바쳤던 것이다. 모세가 제단을 봉헌할 때는 화목 제물이 수소 스물 넷, 수양과 수염소와 어린 수양이 합해서 백 육십 마리에 지나지 않았다(민 7:88). 그 때는 백성이 가난하였지만 이제는 재물이 한층 많이 불어났으므로 보다 많은 것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풍성하게 심은 곳에서 풍성히 거두시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희생은 단 하루에 드릴 수가 없었고 그 절기 중의 여러 날 동안에 나누어 드렸다. 솔로몬의 식탁에는 하루 서른 마리의 황소가 올랐지만 하나님의 제단에는 수천 마리가 올라야 했다. 이와 같이 자기 몸보다 영혼에 더 많은 것을 투자하려고 마음먹는 자는 거의 없다. 화목제의 고기는 드리는 자의 것이 되었는데 솔로몬은 이것으로 백성을 대접한 듯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말씀을 들으러 나온 자들을 먹이셨다는 데 주목하자.

놋단은 이 희생들을 죄다 수용할 만큼 크지 못했다. 그래서 임시 방편으로 그들은 전 앞뜰 가운데에서 다수의 희생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64절). 혹자는 이 목적을 위해 흙이나 돌로 단을 전 앞뜰 한 가운데 세우고 그 위에서 희생 제물을 드렸으며 식이 끝난 뒤에는 철거하였다고 생각한다. 또 딴 이들은 맨 땅에서 희생을 드렸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 관대하려고 하는 자들은 장소의 부족을 이유로 인색할 필요가 없으며 또 장소가 모자라는 일도 없다.

2. 솔로몬은 절기를 지켰다. 이 절기는 낙성 축제가 끝난 뒤에 계속된 것으로 초막절인 듯이 보여진다. 이 두 축제는 합쳐서 2주간 동안 계속되었다(65절). 그러나 그들은 "보라. 이 얼마나 지루한 일이냐!" 라고 말하지 않았다.

Ⅱ. 그들은 이 기쁨과 만족을 자기들의 집에까지 가지고 돌아갔다. 그들은 해산하면서 왕을 축복하였다(66절). 왕에게 박수갈채를 보내고 그를 찬미하며 그에게 회중의 치하를 돌렸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는데 기뻐하며 마음에 즐거워하였고 모두가 매우 편안하고 유쾌하게 느꼈다. 그들이 기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그의 선하심을 항상 우리의 기쁨으로 삼아야 마땅하다. 그들은 왕의 집안과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기뻐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는 거룩한 의식을 필하고 나면 즐거운 마음으로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기뻐하며 우리 길을 계속 행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와 모든 신도들에게 선하셨던 것이다. 그 종 다윗은 구속의 언약을 따라 그 보좌를 세우고 확립했다는 데에서 그리스도의 예표였으며 모든 신도들은 은혜의 언약을 따라 성별되고 위로받았다는 점에서 그의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다. 우리가 만일 언제나 이 점을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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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4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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