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결혼과 종교(열왕기 상 3:1-4)
본 장에서 우리는 솔로몬에 관하여 상고해 본다.
Ⅰ. 의심할 필요도 없이, 솔로몬이 칭송받을 만하고 모범이 될 만한 좋은 점이 있다.
1. 그는 "여호와를 사랑했다" (3절). 하나님이 그를 사랑했다는 점이 특별히 지적되었다(삼하 12:24). 그래서 솔로몬은 여디디아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뜻은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 이다. 즉 이에 우리는 주의 사도 요한이 가장 사랑으로 충만했듯이, 솔로몬이 그 사랑을 보답하는 것을 보게 된다. 솔로몬은 현명한 사람이요, 부유하고, 위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여호와를 사랑하였다" 고 하는 사실이 그에 대한 칭찬이었는데, 그것은 모든 성도들, 심지어는 가장 가난한 자들의 특성이다. "그는 여호와의 예배를 사랑했다" 고 갈대아 역에는 되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은 그에게 예배드리기를 좋아하며,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즐기며, 하나님께 고하기를 기뻐하며, 그와 교제하기를 사랑한다.2. 그는 "그의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다." 즉 다윗이 솔로몬에게 준 법도(임종시의 그의 부친의 부탁은 신성하여 그에게는 율법자 같았다. 2:2, 3; 대상 28:9, 10)이든가, 또한 그의 부친 다윗이 솔로몬 앞에서 행한 하나님의 법도이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규례에 가까이 하고, 주의 깊게 지키고, 열심히 참례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 하는 자는 "그의 법도 행하기" 를 마음에 다짐할 것이다.
3.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일에는 매우 아낌없고 관대했다. 그가 제사를 드릴 때에는, 그는 많은 재산에 비례하여 왕답게 드렸으며, "1 천번제를 드렸다" 고 했다(4절). 하나님의 씨를 풍성하게 뿌린 곳에서는 거둘 때도 그만큼 기대하시는 법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예배에 소용되는 비용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무슨 목적으로 이것을 소비하느냐?" 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짐승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는 없을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할 때 바쳐진 것을 낭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실 한 번 제사드릴 때-7일 동안 계속되기는 하나-한 제단에서 그렇게도 많은 짐승들이 한꺼번에 불타 없어진다는 것은 이상하게 보인다. 그러나 제단의 불은 보통 불보다 더 빠르고 불길이 센 것으로 안다. 그것은 제물을 드리는 자는 피할 수 있으나 그 제물에 떨어지는 무섭고도 강력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 패트릭(Patrick) 주교는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번제물의 연기는 곧은 기둥처럼 곧장 위로 올라가며 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연기가 번제물을 드릴 때 참여한 많은 사람들을 그을리게 했을 것이라고 한다.
Ⅱ. 여기서 과연 그것이 좋은 일이냐 아니냐 하는 의아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요소를 볼 수 있다.
1. 솔로몬이 바로의 딸과 결혼을 했다(1절). 우리는 그녀가 개종한 여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결혼은 합법적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 중 한 사람에게 애정을 가져야만 한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과의 배합은 유해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혹자는 그가 친구의 말을 듣고, 그녀가 진정한 개종자라는 말을 듣고 그녀와 결혼한 것이라고 한다(솔로몬의 이방인의 아내들이 솔로몬에게 예배하게 한 이방신들 중에 애굽의 신은 들어있지 않으므로, 11:5, 6). 더욱이 솔로몬의 아가와 그의 시편 제45편은 이 때를 즈음하여 기록된 것으로 본다. 이 결혼은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결혼, 특히 이방인 교회의 그리스도와의 결혼을 나타내는 하나의 전형이 되었다.2. 솔로몬이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고, 그것이 백성들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유인했다(2, 3절). 아브라함은 산에다 제단을 쌓고(창 12:8; 22:2), 숲 속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창 21:33). 이때로부터 이러한 관습이 내려왔고, 하나님의 율법이 한곳에서만 예배드리라고 명령하기 전까지는 인정이 되었었다(신 12:5, 6). 다윗은 언약궤를 고수하고 산당같은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솔로몬은 다른 문제에 있어서는 "자기 부친의 율법을 행하였으나" 언약궤를 고수하는 점에 있어서는 자기 부친에게 미치지는 못하였다. 이로써 그는 번제 드리는 데에 대한 대단한 열성을 보였으나, 오히려 복종이 더 좋은 제사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불규칙적인 것이었다. 아직도 집이 건축되지 않았으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 쳐진 장막이 있었고, 언약궤가 그들의 통일성의 중심을 차지했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거룩한 제도(명령)에 의해서 되어진 일이요, 산당은 이와는 별개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른 모든 면에서는 법을 따라서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였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결점을 어여삐 보시고 간과하시면서 그들의 예배를 받아 들였던 것이다. 그래서 솔로몬이 "산당에서 분향하였지만" "솔로몬은 하나님을 사랑했다" 고 인정해 주었다. 하나님 이상으로 사람이 가혹하지는 말자.
지혜를 구한 솔로몬(열왕기 상 3:5-15)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찾아 오신 은혜로운 방문의 기록을 본다. 그리고 그는 그 방문 중에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사건은 그의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재물과 권력이 솔로몬에게 준 것보다 더 큰 영광을 솔로몬에게 주었다.
Ⅰ. 이 방문의 주위 사정을 보자(5절).
1. 장소는 어디인가? 그것은 기브온이었다. 즉 그곳에 있는 대산당이었는데, 그 산당이 유일한 산당이라야 했었다. 거기에는 회막과 놋제단이 있었기 때문이다(대하 1:3). 거기서 솔로몬은 중대한 자기의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은 다른 어떤 곳보다도 거기서 드린 그의 제사를 인정해 주셨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법칙에 더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의 표정을 더욱 크게 기대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기록하신 곳에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축복하신다.2. 시간을 보자. 때는 밤, 솔로몬이 풍성한 제사를 드린 후의 밤이었다(4절). 정적과 고독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도와 준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방문은 종종 밤에 나타났었다(시 12:3).
3. 그 방법을 보자. 솔로몬이 깊이 잠들어 의식이 닫힌 꿈에서였다. 꿈에서는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다가서기가 자유롭고 보다 직접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은 예언자들과 이야기하시곤 하였으며(민 12:6), 사람들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사람들 귀에 속삭이시곤 하신다(욥 33:15, 16). 이러한 신성한 꿈은 말할 것도 없이 여러 가지 헛된 것을 꾸는 꿈과는 분명히 다르다(전 5:7).
Ⅱ. 솔로몬이 선택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제의가 있다(5절). 그는 하나님의 영광이 자기에게 비추인 것을 보았고,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이는 하나님이 그가 드린 제사로 인해 부채를 쳤기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함으로써 그 제물을 받으셨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비록 솔로몬 자신이 부족함이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얼마나 큰 자비를 쌓아 두셨는가를 나타내고자 함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마음 자세를 시험해 보시고, 믿음의 기도에 영광을 부여하시고 싶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롭게 나타나셔서, 우리가 구하는 것은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심으로써, 이미 닦아져 있는 행복의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요 16:23; 요일 5:14). 우리가 더 무엇을 구하리요?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다."
Ⅲ. 솔로몬이 여기서 하나님께 구한 경건한 요구를 보자. 그는 이러한 제의를 즉각적으로 했다. 우리는 왜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사 7:12)라고 말한 아하스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제의를 무시하겠는가? 솔로몬은 자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도와 주실 것을 기도했다. 그러나 실로 그것은 살아있는 기도였다. 우리가 가장 간절하게 염려하고 있는 것, 우리가 깨어 있을 때 우리에게 가장 큰 인상을 주는 것은, 우리가 잠들고 있을 때에도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는 법이다. 그리고 때로는 꿈에 의하여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의 맥박이 어떻게 뛰는지를 알 수 있다. 플루타아츠(Plutarch)는 말하기를, 유덕한 꿈은 유덕하게 자라나고 있다는 표증이라고 했다. 그러나 솔로몬의 꿈은 더 높은 차원에 근원을 두고 있다. 솔로몬이 자라면서도 이와 같은 지혜로운 선택을 하였다고 하는 사실과 또 이성(理性)의 힘이 거의 작용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온 꿈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솔로몬 속에서 이 은혜로운 욕망을 일으키고 있었다. 만일 "밤마다 심장이 교훈한다면," 솔로몬은 "자기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하였음" 에 틀림없다(시 16:7)
그러면 이제 그의 기도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솔로몬은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자기 부친 다윗에게 나타났던 일을 시인한다(6절). 그는 "부친 다윗이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행하였다" 고 하여, 자기 부친의 경건성을 높이 평가함으로써 자기의 허물에 베일을 치고 있다. 자기들의 경건한 부모를 예찬하는 사람들은 역시 부모를 본받게 되리라고 바랄 수 있다.그러나 솔로몬은 자기 부친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의 자비를 더욱 영예롭게 말했다. 즉 하나님이 생존시의 다윗에게 보여 준 자비, 즉 그를 진실하고 경건하시고는 그의 진실성에 보상을 주셨던 자비, 그리고 다윗이 죽은 후에라도 그의 집안에 계속 은혜 베푸사, "그의 보좌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심" 으로써 보여 주신 커다란 인자하심을 높이 찬양했다. 자녀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의 부모에게 주신 자비-다윗의 순전한 자비-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자비를 우리보다 앞서 간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물려받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자비는 더욱 더 은혜롭게 된다. 상속이 영속되도록 하게 하는 방법은 그 상속이 이와 같이 보존되게 되었음을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이다.
2. 그는 자기가 소명받은 그 위대한 위탁을 수행할 능력이 없는 자기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한다(7, 8절).여기서 지혜의 간청을 더욱 뒷받침 해주는 두 가지 근거를 보자.
(1) 그는 다윗의 후계자이므로, 그의 지휘 자체가 지혜를 요구하고 있다(" 나로 하여금 지혜롭고 의로운 다윗을 대신하여 왕을 삼으셨나이다. 주여, 나로 그가 행한 것을 지킬 수 있도록, 그리고 그가 시작한 것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제 또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주여, 나에게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저들은 수효가 많아서 상당한 주의를 하지 않고는 다스릴 수 없사오며, 저들은 주께서 택하신 백성이므로 주를 위하여 잘 다스려야 하겠나이다. 저들을 지혜롭게 다스리면, 그만큼 더 주께 영광이 되겠나이다."
(2) 그에게는 지혜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부족함을 통렬하게 의식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이렇게 탄원한다. "여호와여 나는 작은 아이에 불과합니다[그의 부친은 그를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였으나(2:9), 그는 자기를 총명이 부족한 어린아이라고 불렀다]. 나는 언제가 나의 출입할 때인지를 알지 못하고, 나라 살림의 통상업무조차 할 줄 모를 뿐만 아니라, 위급한 일이 닥치면 어쩔 줄 모르는 어린아이옵니다" 라고 했다. 공무를 수행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의 일의 중량과 중요성, 심지어는 자기들의 무능함을 깨달을 줄 알아야 그런 다음에야 하나님의 교훈을 받아들일 자격을 갖추게 된다는 점을 기억하자.
바울의 질문("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고후 2:16 후반)은 솔로몬이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까?" (9절) 하는 질문과 같다.
압살롬은 어리석으면서도 자기가 재판관이 되기를 바랐는데 반하여, 솔로몬은 지혜로우면서 자기가 이 일에 합당한가 여부를 놓고 두려워 떨며 자기를 의심하였다. 사람이 아는 것이 많아 신중해지면 해질수록 자기의 약점을 더 많이 알고, 자기 자신을 더욱 경계하게 된다.
3. 그는 하나님께 지혜를 주십사고 간청했다. "지혜로운 마음을 주의 종에게 주시옵소서" (9절). 그는 자기를 "하나님의 종" 이라 칭하고, 하나님과의 그런 관계(시 116:16)를 기뻐하면서, 그 사실을 근거로 탄원했다. "나는 주를 위하여 헌신하고 주를 위하여 쓰여진 몸이오니, 주의 일을 수행함에 필요한 것을 주시옵소서."그의 의로운 부친도 시편 119편 125절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즉 "나는 주의 종이오니, 내게 총명을 주옵소서." 총명한 마음은 하나님의 은사이다(잠 2:6). 우리는 그것을 달라고 기도하여야 하며(약 1:5) 그 총명을 우리의 구체적인 직업 속에서 또 총명을 필요로 하는 많은 경우에 적용시킬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 이와 같이 솔로몬도 자기 호기심을 기쁘게 하거나, 이웃 사람들을 신기하게 만드는 그러한 지혜가 아니라, "주의 백성을 재판할 총명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다.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총명이 가장 큰 지식이다. 그러한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선함과 악함, 의로움과 불의, 죄악과 의무, 그리고 진리와 거짓을 분간케 하는 지식이므로, 타인의 행동과 나 자신의 행동을 심판하는 데 거짓된 색안경을 쓰지 않게 하는 것이다.
4. 그의 간청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응답을 보자.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기도였다. "그 말이 주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마음에 맞았다)고 했다(10절). 하나님은 자기 백성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역사, 곧 자기가 불붙인 욕망, 그의 성령이 드리는 기도를 기뻐하신다. 이것을 선택함으로써, 솔로몬은 자기가 위대하게 되는 것보다는 선하게 되기를, 자기의 출세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기를 원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인 셈이다. 육적인 것보다 영적인 축복을 더 바라고, 자기의 영예보다 자기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기를 기뻐하는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신다.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기도는 이기는(응답받는) 기도였다. 또 그가 구한 것 이상의 응답을 받았다.
(1)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를 주셨다(12절). 하나님은 그를 부르신 그 위대한 일에 합당하도록 그를 채워 주셨고, 그가 재판할 때 의거해야 할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력(총명)과 그가 판정해야 할 소송 사건을 바로 보는 총명을 주셨다. 그래서 솔로몬은 명석한 두뇌, 굳은 판단력, 예민한 통찰력에서 따를 자가 없게 되었다. 일찍이 왕이 그러한 통찰력과 선견지명을 축복받은 자는 없었다.
(2)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구하지 않은 것을 덤으로 주었다. 즉 부와 영광을 주셨다(13절). 그리고 지혜에서는 물론이요 이러한 모든 점에 있어서도 그의 선왕들이나 그의 후계자들, 또는 이웃 사람들보다 훨씬 능가하게 되리라는 것을 약속해 주셨다. 이러한 부귀와 영화도 모두 하나님의 은사이다. 이것들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들에게 한해서 그것은 좋은 것이다(마 6:33).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은 어떤 선택의 경우이든 황금보다도 은혜를 택할 줄을 알라. 그 까닭은, "경건에는 현생의 약속이 있으나" (딤전 4:8 참조), "현생에는 경건의 약속" 이 없기 때문이다.
지혜와 재물을 동시에 누리는 솔로몬이야말로 얼마나 완벽한 축복을 받고 있는가! 지혜와 은혜없이 재물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는 그것 때문에 해를 끼칠 위험이 있고, 재물과 권력이 없이 지혜와 은혜만 소유한 자는 그 양자를 모두 겸비하고 있는 자처럼 선한 일을 할 능력을 지니지 못하게 된다. 지혜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재물이 동반되면 그만큼 더 좋은 것이다(전 7:11). 그러나 만일 우리가 지혜와 은혜를 확신하면, 그것들이 외적인 번영을 함께 가져오든가 그 외적인 번영이 없음도 달게 받게 해 줄 것이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부와 영광은 절대적으로 약속하셨으나, 장수만은 조건부로 약속하였다. "네가 만일 다윗의 행함과 같이 내 길로 행하면, 내가 네 날을 길게 해 주리라" (14절). 그는 이러한 조건을 이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비록 부와 명예는 소유하였으나, 그가 마땅히 누릴 천수를 다하지 못했다. 장수는 지혜의 우편에 있는 축복이요, 영생의 한 모형이다. 그러나 부귀가 있는 곳은 지혜의 좌편이다(잠 3:16).
여기서 알아볼 것이 있다.
[1] 영적 축복을 얻는 길은 솔로몬이 "꼭 필요한 것 하나" 로서 지혜를 구한 것처럼, 달라고 졸라대야 하며, 그것은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이다.
[2] 현제적인 복을 얻는 길은 거기에 냉담하면서 하나님께 맡겨두는 것이다. 솔로몬이 지혜를 얻은 것은 그가 그것을 진실로 구했기 때문이며, 부를 얻은 것은 그가 부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5.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기쁨으로 찾아 주신 데 대해 솔로몬은 감사로 보답했다(15절). 그는 꿈에서 깨어났다-아마 그는 기쁨에 도취되었으리라-깨어 보니,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과 같이 "그의 잠이 그에게 달았다" (렘 31:26).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졌으므로,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무엇을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할 것인가" 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브온에 있는 산당에서 기도해 왔으며, 하나님은 거기서 자비롭게 그에게 찾아와 주셨었다. 그런데 솔로몬은 "언약궤 앞에서" 감사드리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왔다. 말하자면 그는 자기가 하나님이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있는 예루살렘에서 기도하지 않았음을 자책하면서 또 하나님은 어디서든 자기를 만나신다는 사실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허물을 간과해 주시며, 우리는 그것을 보고 그 허물을 고쳐야 한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1) 하나님께 큰 제사를 드렸다.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은사에 대해서, 그것이 비록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한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 하곤 했다(시 55:10; 특히 삼하 7:8). 그래서 솔로몬도 이제 다윗의 발자취를 따랐던 것이다.
(2) 솔로몬은 제물을 놓고 큰 잔치를 베풀어, 자기 주위의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같이 기뻐하게 하였다.
빛나는 지혜(열왕기 상 3:16-28)
여기서 솔로몬의 지혜의 한 사례가 있다. 그것은 이제 막 그에게 주어진 그 은사가 그에게 현실적인 힘이 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 증거가 주어졌다. 그것은 그 나라의 어떤 비법이나 고문기관의 정책-분명 그것들도 우수했을 것이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소송 사건의 판결로부터 주어졌다. 왕들은 그런 사건은 재판관들에게 맡길 수 있지만, 자기들이 직접 사실을 심리한다고 하여 그것이 자기들의 존엄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Ⅰ. 법관들이 아니라 당사자들에 의해서 소송이 제기되었다. 그 당사자들은 여자였으나, 솔로몬과 같은 통찰력 있는 눈으로는 옳고 그름을 본인들의 태도로 보아 구별하기는 쉬웠다.
이 두 여인들은 창기들이었으며, 공동 주택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들이 남편에 대한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아기들은 사생아일 것이라고 보는 자들도 있다. 이 사건은 솔로몬 앞에까지 오기 전에 이미 하급 법정에서 다루어졌음에 틀림 없다. 그 재판관들이 결정할 수가 없어서 솔로몬의 지혜로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급기야 더 잘 처리되는 것으로 여겼다.
이 두 여인은 같은 집에 살고 있으면서, 서로가 3일 간격으로 아들을 낳았다(17, 18절). 그들은 너무나 가난하여서 하녀나 간호할 사람이 없었다. 또 그들은 창녀들이어서 멸시를 받았으므로, 친구나 친척을 동반할 수가 없었다. 그들 중의 한 여인은 밤중에 어린이를 깔아 죽이고 나서, 다른 아이와 바꾸었다(19, 20절). 이에 다른 여인은 곧 크게 속았음을 알고 시비를 가리려고 공의(公義)에 호소했다(21절).
1. 어린애들 때문에 야기되는 근심이 얼마나 많으며, 또 그들의 생명이 얼마나 불확실하며, 그리고 그들은 얼마나 많은 위험을 끊임없이 당하고 있는가를 알자. 유아기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켜진 그 생명의 등불은 곧 꺼지기 쉽다. 기르는 중에 죽는 자들이 거의 없다는 것은 일종의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다.2. 그 당시의 사생아들은 오늘날 흔히 겪는 형편보다는 훨씬 좋았다. 그 당시 창녀들은 자기 아이들을 사랑하고, 보살피고, 그들과 떨어져 있는 것을 퍽 싫어했다. 한편 오늘날 사생아들은 먼데 보내어지고 유기되고 죽음을 당한다. 그러나 그것은 예언된 일이다. 즉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그때에 사람들은 본성적인 애정도 잃을 것이라고 했다(딤후 3:1, 3).
Ⅱ. 사건 해결의 난점은 무엇인가? 최종적으로 판정을 내려 주기를 호소하는 문제는 살아있는 어린이의 어미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 바로 그 문제가 법정에 제기 된 것이다. 두 어미는 맹렬하게 권리를 주장하며, 이에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두 여인이 다 같이 고집에는 완강했다. 한 여인은 "이 애는 내 아이다" 라고 말하는가 하면 다른 여인은 "아니요, 이 애는 내 애요" 라고 주장했다. 어느 누구도 살아있는 애를 기르는 것보다는 죽은 애를 매장하는 것이 비용이 덜 들건만, 죽은 애를 갖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애써 주장하는 것은 살아 있는 애였다. 살아 있는 애는 부모의 소망이 되기 때문에 부모의 기쁨이 된다. 그런데 죽은 애도 그들에게 기쁨과 소망이 될 수 있을까?(렘 31:17 참조)
그런데 문제는 어느 편에도 증거가 없다는 사실이다. 가령 이웃 사람이 아이들의 출생과 할례를 지켜 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들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자세히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사자들에게 고문을 가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야만적인 것이 되었을 것이다. 정당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완고한 여자가 자기에게 유리한 재판을 원한다. 위증을 제시하는 편에는 가책조차 없다. 재판관이나 배석 판사들은 이처럼 거짓이 숨겨져 있을 때 진실성을 발견할 지혜가 필요하다.
Ⅲ. 사건의 결말을 보자.
솔로몬은 양쪽이 주장하는 것을 정성껏 듣고 증거를 종합했다(23절). 그러자 온 법정은, 솔로몬의 지혜가 진실성을 찾아내는 데 어떤 과정을 밟는가 하고 기대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무슨 말이 떨어질는지 모르고 있는가 하면, 다른 이는 아마도, 제비를 뽑아 결정되는가 하였다. 그러나 솔로몬은 칼을 가져오라고 시켜서 두 쟁론자에게 살아있는 아이를 칼로 잘라 나눠 가지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1. 이것은 그 사건을 우스꽝스럽게 해결하려는 듯이 보였다. 즉 풀을 수 없는 매듭을 칼로 잔인하게 잘라버리려는 듯이 보였다. 명철한 판관들은 "이것이 과연 솔로몬의 지혜란 말인가?" 하고 솔로몬이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도 생각해 보지도 않고 비웃었다. 이렇듯,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잠 25:3). 사실 율법에는 살아있는 황소와 죽은 황소를 반분하라는 법이 있기는 하나(출 21:35), 이것은 이 사건을 해결할 수는 없다.2.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진실성을 발견하는 데 유효 적절한 것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솔로몬은 두 여인들의 외모와 말하는 투로 보아, 이와 같은 실험을 하기 전에 이미 사실을 분명히 분간했을 거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모든 참관자들에게 만족감을 주었고, 거짓 주장자를 잠잠케 할 수 있었다.
참된 어미를 찾아내기 위하여 그는 아이가 어느 여인을 가장 사랑하는 가는 시험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느 여인이 그 아이를 가장 사랑하는가를 시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실로 두 여인은 모성애를 가장했으나, 그 아이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그들의 성실성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1) 그 아이가 자기애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여인은, 아기가 자기 것이라는 쟁론을 벌이면서도 체면 지키기에 급급하여, 반분한다는 점에 만족하였다. 자기 애기를 깔아 죽인 여인은 진짜 어미가 이 애를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이러한 결과가 가져오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하여 아무런 관심조차 안 가졌다. 즉 "내 것도 네 것도 되지 못하게 하도록 나누게 하소서" 하였다.
이리하여 그 여인은 자기의 본심이 폭로된 것은 조금도 모르고 자기의 권한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는, 솔로몬이 그러한 사실을 알면 어떻게 하나 두려워한 것 같다. 그러나 솔로몬은 참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 이 여인이 참된 어미였더라면, 그녀는 이와 같은 피비린내 나는 결정에 그렇게 빨리 동의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2) 그러나 어린애가 자기애라고 알고 있은 여인은, 어린애가 도살을 당하는 것보다는 그 애를 자기의 대적자에게 주어 버린다. 그 여자의 우는 소리는 얼마나 애처로운가? "오! 내 주요, 그 산 아이를 저에게 주소서" (26절). "그 애를 전혀 못보게 되기보다는 차라리 그 여인의 것으로 되게 하소서."
그 어린애에 대한 이와 같은 순정으로 보아 그 여인은 어린애 깔아 죽인 여인과 같은 무정한 어미가 아니라 살아있는 아이의 참된 어미이며, 자기가 낳은 자식에 대한 애정 때문에 차마 죽음을 볼 수 없는 참된 어미였음이 판명되게 되었다.
" 사건은 명확하다. 더 이상 무슨 증거를 필요로 하리요" 라고 솔로몬은 말했다. 곧 "이 여인에게 산 아이를 주라. 여러분이 모두 보는 바와 같이, 이 거짓없는 모성애로 보아 이 여인이 그 애의 어미이다" 라고 했다.
부모들이여 어린애들을 잘 보살펴서, 특히 그들의 영혼을 잘 보살펴 줌으로써 자기들의 사랑을 보여 주도록 하되, 특히 거룩한 그 폭력으로 그들을 타는 불 속에서 끄집어낸 부지갱이처럼 여기고 사랑하라. 자녀들에게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위안을 주는 사람과 같은 사람이다. 사탄은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여 하나님과 나누어 가지는 것을 기뻐하는 거짓된 자임을 알 수 있으나, 그 마음을 의로운 주권이 지배하는 자는 마음을 통째로 가지든가 아니면 아예 가지지 않는다.
Ⅳ. 이러한 일과 솔로몬의 지혜의 여러 가지 사례로 인하여, 솔로몬은 자기 백성들에게 큰 명성을 얻어 그의 나라를 평안하게 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들은 왕을 두려워하였다" (28절). 또 높이 받들어, 그를 거역하는 일은 감히 하려고도 못하고, 불의한 일은 두려워서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솔로몬 앞에 나타나면 모든 것이 분명히 드러나게 됨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가 그(솔로몬) 속에 있음을 알았으니," 곧 그 지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였다" (전 8:1). 이는 그에게 있어서 "병기보다 나았다" (전 9:18). 이로 말미암아 그는 백성들에게 두려움과 사랑을 다같이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