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최후(열왕기 상 2:1-11)
그렇게도 위대하고 훌륭한 다윗이 이제 죽음을 맞이했다(1절). 그래서 마침내는 죽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10절). 이 생애가 다하면 다른 생애가 있다는 것은 복된 일이다. 죽음은 현생의 모든 영광을 무너뜨리고 땅 속에 묻어 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 수 있다.
Ⅰ. 다윗이 자기 아들이자 후계자로 선언한 솔로몬에게 임종하면서 준 명령과 지시 사항이 있다. 그는 자신이 기울어져 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또 죽음에 관하여 듣거나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나는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2절)고 했다. 원문에는 "내가 그 길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고 했다. 죽음은 하나의 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즉 죽음은 현생의 시한이 아니라, 더 좋은 세상으로 가는 통로이다. 그것은 이 세상(흙)에 살고 있는 모든 인류가 "걸어 가는 길" 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늘의 아들들이나 하늘의 후사들까지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야" 하므로, 그들도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시 23:4)를 지나면서도, 이 길을 기쁨으로 걸어간다. 선지자들도, 심지어는 왕들까지도 이 길을 지나서 예언과 정권보다 더 찬란한 빛으로 나아가야 하는 법이다. 다윗이 이제 이 길을 걸어가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솔로몬에게 장차 해야 할 일을 지시하고 있다.
1. 그는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의 의무를 의식하라고 명령하고 있다(2-4절).(1) 행동을 할 때 따라야 할 선한 법칙인 하나님의 뜻. "그것으로 네 정신을 다스리라." 다윗이 그에게 준 명령은 "여호와" 그의 "하나님의 명을 지키라" 는 것이었다. 죽어가는 부친의 권위는 크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의 권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약속은 너무나 크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산을 해야 할 자들처럼 그것을 주의 깊게 지키자. 또 우리가 지켜야 할 우수한 법도가 있다. 기록된 말씀은 우리의 법칙이다. 솔로몬은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행해야 한다.
(2) 행동할 때 지킬 훌륭한 정신을 주었다. 너는 나이를 먹었으나 어린애에 불과하니, "힘써 대장부가 되라." 여호와 하나님의 명을 지키려는 자들은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
(3) 이것을 해야 하는 까닭을 말했다. 이것을 지키면
[1] 그의 왕국이 실질적으로 번영하게 된다.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형통할 것이며", 무슨 일을 하든지 영광과 기쁨을 받을 것이다.
[2] 그 나라를 영속하게 한다. "여호와께서 그 나라를 계속케 할 것이요," "그가 내 일에 관하여 하신 약속을" 이루리라. 약속-그것은 거룩한 담보이다-이라는 보화를 올바르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 약속의 권리를 이어 받으려고 열망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자기들의 뒤를 이어받게 될 자들이 끊어지지 않기를 갈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각자는 자기 나이에 따라 하나님의 명령을 필히 지키자. 그러면 하나님은 분명코 당신의 말씀을 지킬 것이다. 우리는 그의 훈계를 파기하기 전까지는 약속이 파기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의 허리로부터 메시야가 올 것이라는 약속을 했는데, 이 약속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끊어지지 않으리라" 는 약속은 조건적인 것이었다. 즉 그의 후손이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할 때 에 한해서 이루어진다. 솔로몬이 자기 평생에 이 조건을 이행하면, 그는 약속을 영원토록 지속시키기 위한 본분을 다하는 셈이다. 이 조건이란 그가 하나님 앞에서 그의 규례대로 성실히, 열심히 그리고 결단성을 가지고 수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그의 길을 삼가야 한다." 신앙에 일관하기 위해서는, 깊은 주의와 용의주도한 자세만큼 더 필요한 것은 없다.
2. 다윗은 일부 특정한 사람에 관하여 그들을 어떻게 처우해야 할지 그 방도를 솔로몬에게 일러 주었는데, 이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정의가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친절이 결핍함을 보강해 주기 위함이었다.
(1) 요압에 관하여(5절). 다윗은 요압이 이스라엘의 훌륭한 두 군대 장관, 아브넬과 아마사를 차례로 죽임으로써 율법을 거역했을 때, 그를 살려둔 것이 잘못임을 알고 있었다. 요압은 두 사람을 무참하게 살해함으로써(" 태평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렸다") 다윗의 마음에 심한 상처를 주었던 것이다. "그가 나에게 어떻게 했는지 네가 알 것이다" 라고 했다. 신하를 살해하는 것은 왕에게 대한 잘못이요, 그것은 왕에게 큰 손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의 군주 왕의 평화에 반역하는 일이다. 그 당시에는 그가 희생자들과 친선관계에 있었던 때이므로, 다윗의 명성에 모독이요 특히 다윗에게는 불리한 것이었다. 죽은 그들은 다윗의 권세를 위해 크게 도움이 될 자들이었다. 위정자들은 자기들의 휘하에 있는 자들의 피를 복수해야 하는 복수자이다. 요압은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법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 왕의 공의를 무시하고 무고한 피로 더렵혀진 허리의 띠와 신을 신고 있었다는 것이 그의 죄를 더욱 가중시켰던 것이다. 다윗은 요압을 솔로몬의 정의감에 맡긴다는 암시를 하면서 그를 솔로몬의 지혜에 맡겼다(6절). "그는 백발이니 멀지않아 저절로 죽어 갈 것이므로, 그의 목을 자르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라고 말하지 말라. 결코 안 된다. "평안히 음부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는 것이었다. 그는 비록 오랫동안 사형집행이 유예되었으나 결국에는 헤아림을 받아야 한다. 시간이 지난다고 죄책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특히 살인죄는 더욱 그러하다.
(2) 다윗은 바실래의 가족에게는, 바실래를 인하여 모든 친절을 다하라고 명령했다. 아마 바실래는 이 당시 이미 죽은 것으로 짐작된다(7절). 이때 다윗은 그의 임종을 맞아 그가 전에 겪은 모든 피해를 회상하면서도, 자기가 받은 친절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친절을 보답할 책임은 자기 아들에게 맡겼다. 우리가 다른 친구들로부터 받은 친절은 그들의 무덤이나 우리의 무덤 속에 매몰시켜서는 안 되며, 우리의 자손들로 하여금 그 친절을 그들의 자손들에게 갚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에 솔로몬은 아마도 이러한 법칙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 같다. 즉 "네 친구와 네 부모의 친구를 버리지 말라" 는 것이다(잠 27:10). 바울은 자주 자기에게 원기를 회복시켜 주던 오네시보로의 집을 위하여 기도했다(딤후 1:16 이하 참조).
(3) 시므이에 관하여(8, 9절)
[1] 그의 죄가 기억되고 있다. 즉 "그가 나를 독한 말로 저주하였다" 고 했다. 더욱 슬픈 일은 그가 다윗의 곤비할 때에 저주하고 그의 상처에 식초를 부었던 사실이다.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이를 더욱 독한 저주로 만든 한 가지 사실은 사무엘 하 16장에서 언급한 것을 제외하고도, 시므이가 다윗을 모압 족속 룻의 계통이라고 비난한 일이라고 했다.
[2] 그의 용서를 잊지 않았다. 다윗은, 시므이가 때를 맞춰 다윗에게 굴복하고 piccavi-즉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고 외쳤기 때문에 그를 죽음에는 붙이지 않겠다고 맹세 한 사실과 자기에게 행한 악행에 대한 보복으로 이 중대한 시기에 공의의 칼을 쓰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솔로몬에게 고백했다.
[3] 지금 계류 중인 그의 소송 사건은, 솔로몬이 기회를 포착하면 무엇이 적당하며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므로, 그에게 맡겨졌다. 다윗은 그를 용서해 준 일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고 자기가 생존하고 있는 동안만의 집행유예에 지나지 않는다고 솔로몬에게 일러 주었다. "저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 그가 너와 너의 정권에 친구가 되고 믿음직스러운 자가 되리라고 생각지 말라. 그가 비록 자기의 악의를, 더욱 그 죄를 숨기고 있지만, 전과 같은 악의는 없다고 할 수가 없다. 그는 이전에 지은 죄 때문에 아직도 공의에 대한 채무자이다. 그리고 비록 내가 그를 죽이지는 않겠다고 약속은 하였으나 나의 후계자가 그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은 아니다. 그의 광난한 마음은 너에게 그 백발의 피를 흘려 음부에 내려가게 하는 기회를 부여할 것인데, 너는 그 기회를 틀림없이 붙잡아야 한다" 고 했다. 이 말은 그의 개인적인 복수심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그 나라의 정권의 영광을 갈망하는 깊은 열의와 하나님이 그의 가족에게 하신 언약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 언약을 모욕하면 결단코 무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비록 백발이라도 유죄하고 버림받은 머리라면, 공의로부터 어떤 사람의 보호도 받을 수 없다. "죄인은 백살 날 사람이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다" (사 65:20).
Ⅱ. 다윗의 죽음과 장례를 보자(10절). 그는 사울처럼 그의 아비가 묻힌 곳이 아니라 자기가 세운 자기의 도성, 다윗성에 장사되었다. 그런데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다" (행 13:36; 2:29 참조). 그의 비문은 사무엘 하 23장 1절에서 인용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이새의 아들,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부음을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 그리고 "나의 육은 편히 쉬리라" (시 16:9)고 말한 다윗이 누워있다. 조세푸스(Josephus)는 말하기를 그의 아들 솔로몬이 다윗을 통상적인 장엄한 의식을 갖추어서 장사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는 다윗의 무덤에 엄청나게 많은 돈을 넣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1300년 후(그의 추산) 안디옥 시대의 대 제사장 힐가누스에 의하여 무덤이 열렸는데, 거기서 3000달란트에 달하는 돈이 나왔다고 한다.
그가 다스린 연수는 40년으로 계산되는데(11절), 헤브론에서 치리한 7년 이외의 나머지 6개월은 계산되지 않고, 연수에 해당하는 통계만 계산되었다.
아도니야의 종말(열왕기 상 2:12-25)
Ⅰ. 이제 솔로몬은 왕좌에 올랐다(12절). 솔로몬은 다윗보다 훨씬 용이하게 그리고 평온하게 즉위했고, 그의 정권은 훨씬 신속히 확립되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한 사람의 선군(善君)의 종언이 다른 한 왕의 시작이 된다면, 그것은 그 나라의 행복이다.
Ⅱ. 왕권 확립을 위한 적수 아도니야를 제거했다. 그것은 정당한 일이요 필요한 일이었다. 아도니야는 대담하게도 왕권을 넘보고 있으나, 곧 그 허식은 여지없이 추락되지 않으면 안 되고, 자기를 솔로몬의 처분에 맡겨야 할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를 선행을 조건으로 하여 놓아 주었다. 그러므로 만약에 그가 가만히만 있었더라도 목숨은 안전했을 뻔했다. 그러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그는 스스로 배반하여 솔로몬의 정의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으니, 그것은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를 방임해 두시사, 전에 그가 반역한 일 때문에 벌을 받게 하시고, 또한 솔로몬의 왕위가 확립되도록 하셨다. 많은 사람들은 언제 자기들이 잘 지내는 때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몰락하는 수가 많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참으심을 기화로 스스로에게 진노를 쌓아 둔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라.
1. 다윗의 첩 아비삭과 결혼하려는 아도니야의 음모가 있다. 이 음모는 그가 아비삭을 연모해서가 아니라, 그녀를 통해서 그가 대신 왕위에 오르기 위해 집요한 왕권 주장을 새롭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선왕의 처" (삼하 12:8)를 취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또 하나의 국가가 탄생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압살롬은 자기 부친의 첩들과 동침하는 것이 자기의 자만심을 지탱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도니야는 특히 다윗의 첩 중에서 가장 훌륭한 여인과 다윗의 침실에 들 수만 있다면, 그것을 발판으로 다윗의 왕좌에도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속으로 부풀었던 것이다.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은 고조되었다. 그것은 따지고 보면 불장난에 지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왕국을 쟁취하기 위한 불장난을 시도하여 무력으로는 얻을 수 없으나 한 여인을 통해서 이룩하기를 바랬다.2. 이 음모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을 보자. 아도니야는 직접 아비삭에게 구혼하려 들지 않았다[이스보셋이 이와 같은 경우에 그랬듯이(삼하 3:7), 그녀는 솔로몬의 의사에 달려있기 때문에 솔로몬의 동의를 먼저 얻지 않으면 솔로몬이 정당히 분개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솔로몬이 자기를 불쾌하게 여기고 있는 처지라 자기 자신이 솔로몬에게 직접 청원해 보지도 않았다. 그는 밧세바를 이 사건에 중재자로 써 보았다. 그것은 밧세바가 이 사건을 애정 문제로 생각하고, 쉽사리 정책 문제로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밧세바는 아도니야가 그녀의 방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자기에게 해를 끼칠 마음을 먹고 오지나 않았나 하고 그에게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도니야의 최근의 음모를 분쇄하는 도구의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아니올시다. 나는 화평한 목적으로 와서(13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14절) 이는 그녀가 그녀의 아들에게 가지고 있는 관심을 이용하여 아비삭에게 장가들기 위한 그의 동의를 얻으려 함이었다. 그래서 이 동의를 얻기만 하면 그것을
(1) 왕국을 잃은 손해 배상으로 여기고 감사히 여기려 한 것이다. "그는, 당신도 아시는 바와 같이, 왕위는 나의 부친의 생존시 그의 장자인 나의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였습니다" 라고 넌즈시 말했다(15절). 그러나 이것은 거짓이었다. 다시 말하면 자기 편에 선 자들은 불과 몇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의 왕위가 빼앗기게 된 데 대한 자기 자신을 동정의 대상으로 보이기 위하여, 한 여인으로 만족하려고 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그가 비록 그의 부친의 왕위를 계승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부친이 소유하고 있던 중 값이 나가는 어떤 것을 가지려고 한 것인데 이것이 곧 아비삭이었다.
(2) 나라를 잃는 손해를 감수한 대가로 보려했다. 그는 솔로몬의 왕위 계승권을 자인했다. "그것은 여호와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내가 왕위를 쟁취하려고 경쟁한 것은 어리석었습니다. 이제 그것은 솔로몬에게 돌아갔으나 나는 만족합니다." 이렇게 그는 솔로몬의 왕위 즉위를 기뻐하는 척하기는 했으나, 그때 그는 솔로몬의 마음을 교란시킬 수 있는 모든 수작을 다하고 있었다. "그의 말은 버터보다 더 부드러웠으나, 그의 마음 속에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3. 아도니야를 위해 밧세바가 솔로몬에게 한 말이 있다. 밧세바는 솔로몬 왕 앞에서 아도니야를 대변하기로 약속했고(18절), 또 그렇게 했다(19절). 솔로몬은 비록 자기가 왕이기는 했으나 어머니에게 하여야 할 최대의 경의를 표했다. 즉 "왕이 일어나 영접하여 접한 후 우편에 앉게" 했는데, 이것은 제5계명에 따른 것이다. 자녀들은 그들이 성장했을 때 뿐만 아니라 위대하게 된 후라도, 자기 부모를 공경하여야 하며, 충순하게 그리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너의 어미가 늙었더라도 경시하지 말라." 그가 자기 어머니의 지혜와 권위에 대하여 표할 수 있는 공경의 일례를 더 든다면, 그녀가 자기 앞에 나와서 청원할 일이 있음을 알았을 때 그는 그 청원을 괄시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으며, 그 약속은 다음과 같은 제한을 받고 있었다. 곧 그것이 정당하고 합리적이며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것이어야 하며, 만약에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녀의 말을 기각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드디어 심부름으로 왕에게 나왔음을 실토했다. "아비삭을 당신의 형 아도니야에게 주소서" (21절). 이상한 것은 그녀가 이 음모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 사실이며, 더욱 이상한 것은 그 청원 속에 내포되어 있는 근친상간을 증오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가 아비삭을 다윗의 아내로 들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 결혼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그녀는 아도니야가 솔로몬에게 순순히 복종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녀의 생각에는 아도니야를 만족케 해주기 위해 그런 결혼을 허락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음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그녀의 약점이자 우행이었다. 그녀가 섭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음은 다행한 일이다.
여기서 주목할 일은 군왕이나 고관을 보필하는 자들에게 있어 군왕이나 고관의 이익을 너무 탕진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지혜이듯이, 죄를 조장하거나 사악한 궤휼을 방조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또한 그들의 의무이다. 왕들에게는 그들이 수락해서는 안 되는 것을, 청탁하지 말자. 사악한 간청을 더 기뻐하거나 사악한 궤계 앞에 나서는 것은 훌륭한 사람에게는 합당치 않다.
4. 솔로몬은 요구를 정당하고도 합법적으로 기각시켰다. 그의 모친 자신이 대변인이 되었고, 그것은 "한 가지 작은 일로 간청" 하는 것이라고 칭해졌고, 또 그것이 아마도 솔로몬이 왕이 된 이후 밧세바가 그에게 괴로움을 끼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를 거부한 것은 자기가 전에 한 총괄적인 약속을 파기한 것은 아니다(20절). 만약에 헤롯이 세례 요한의 머리를 자를 마음이 없었더라면, 그는 이 경우와 같이 자기가 헤로디아에게 한 총괄적인 약속에 의하여서 그런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이 세상에서의 아무리 좋은 우리의 친구라도 우리로 하여금 부당하고 어리석은 그러한 나쁜 일을 하게 할 정도로 우리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1) 솔로몬은 그의 모친에게 그 간청의 불법성을 확인시켰으며, 그녀가 전에 알고 있지 못한 그 일의 귀추를 설명해 주었다. 그의 대답은 약간 신랄했다. 즉 "그를 위하여 왕위까지도 구하옵서서(22절). 왕의 침상을 계승하겠다는 것은 사실상 왕위 계승 요구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아도니야가 노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솔로몬은 아도니야가 요압과 아비아달과 더불어 자기를 교란시킬 음모를 하고 있다는 정보와 그렇게 의심할 만한 이유를 포착하고 있었으리라. 그런데 그것이 바로 아도니야의 요구를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계기를 주었을 것이다.
(2)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헛된 교만을 지적하고 맹세하면서 정죄했다. 솔로몬은 아도니야를 그 자신의 말 때문에 정죄했다(23절). 그 자신의 혀가 그에게 떨어지고 만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더 무거운 짐을 떨어뜨릴 필요가 없었다. 밧세바는 속았을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아도니아가 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지었다 즉 "그는 이런 말을 하였은 즉 그 생명을 잃으리라. 그는 그 입술로부터 나온 자신의 말로 함정에 빠지고 있으므로, 그가 무슨 일을 당하게 될 것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다" 라고. 그는 곧 아도니야의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오늘 죽임을 당하리라" (24절).
하나님은 친히 다윗의 위를 견고하게 하시겠다고 맹서로 선언했다(시 89:35). 그러므로 솔로몬은 그 왕위를 노리는 원수를 제거함으로써, 왕위를 견고케 하겠다고 하는 꼭 같은 확약을 했다. "왕위를 견고케 하시는 하나님이 살아계신즉, 이를 교란시키려는 아도니야는 정녕 죽어야 하리라." 그리스도 왕국을 대적하는 원수들의 패망이 분명한 것은 그의 왕국의 견고성이 분명한 것과 같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자녀와 모든 생명의 확고부동한 것과 같다. 아도니야의 사형집행 승인은 곧 서명되었고, 그 사형집행자로서는 다름 아닌 군대장관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임명되었다(25절). 아도니야에게 자기 변호의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솔로몬의 지혜는 이 사건을 더 이상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보지 않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아도니야가 왕위를 노린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야심이 많고 불온한 마음을 품은 자들은 죽음의 도구를 스스로 준비하게 마련이다. 왕권을 잡으려다가 목이 잘린 자들이 너무나 많다.
아비아들과 요압의 최후(열왕기 상 2:26-34)
아비아달과 요압은 둘 다 아도니야의 반역 음모를 방조하며 교사하고 있던 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아도니야가 아비삭을 취하려는 이 새로운 계획에도 초석을 놓았을 것이며, 솔로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22절). 두 사람이 다 하나님과 왕권에 대한 용서할 수도 없는 무엄한 일을 저질렀고, 더욱 나쁜 것은 그들의 소위(所爲)가 높은 지위와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자들이란 점이다. 그러므로 아도니야 다음으로 심판을 받은 자들은 그들이었다. 그들은 반역죄라는 점에서는 동등하나, 그들이 받는 죄의 심판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유가 있는 일이었다.
Ⅰ. 아비아달은 그가 오랫동안 봉직해 왔다는 점을 고려하여, 겨우 감형을 받았다(26, 27절).
1. 솔로몬은 그의 위대한 지혜로 그를 유죄선고를 내렸다. 즉 "너는 하나님이 누구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 주기를 원하시는 것을 알고도 아도니야와 공모했으므로 죽음에 합당하다."2. 솔로몬은 아비아달이 전에 솔로몬의 부친 다윗에게 보인 존경, 그가 거룩한 일(" 그가 다윗 앞에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었다")로 다윗을 섬겼던 사실, 그리고 그가 다윗이 환란을 당했을 때 후의로 동정했던 일과 또 다윗이 사울의 핍박과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하여 받은 추방과 곤역 속에서 다윗과 함께 했던 이전 모든 일들을 상기시켰다. 여기서 주목하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들은 어느 때이고 그 친절이 기억된 바 되어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3. 이런 까닭에 그는 아비아달의 목숨은 살려 두었으나, 그의 직분은 파면시키고, 주거지를 시골 아나돗으로 제한시켰다. 그뿐 아니라 그로 하여금 근신시키기 위하여, 궁중 성읍 성막 제단등 공적 업무에서는 손을 떼도록 엄금시켰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도 이에 위배했기 때문에 고위직에는 합당치 않다고 생각되어, 제사장 직분만이 박탈당하였다.
사울은 죄를 지은 것으로 생각하고서, 아비아달의 아버지 등 85명의 제사장과 그의 가족과 성읍에 있는 자들에게 잔인한 살해를 가한 바 있다. 솔로몬은 실제로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비아달의 목숨을 살려 주었다. 이렇게 해서 사울의 정권은 무너지고 솔로몬의 왕권은 왕성하게 되었다. 사람이란 자기들이 하나님의 사역자들에 대해 준 그대로, 하나님이 다시 자기들에게 대해 주시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4. 아비아달의 직위 박탈은 엘리의 집(삼상 2:30)에 내렸던 경고의 성취였다. 왜냐하면 그는 엘리의 집의 마지막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이다. 파멸의 경고를 받은 지 80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심판은 급속히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반드시 이루어진다.Ⅱ. 요압은 그의 오랫동안의 죄악을 고려하여 사형에 처했다.
1. 그는 죄책감 때문에 제단 뿔로 갔었다. 그는 아도니야가 처형되고 아비아달이 파면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다음은 자기 차례일 것이라고 무서워서 제단으로 피난했다. 평안할 때에는 제단 섬기기를 생각지도 아니하다가 환란 때에는 제단에서 보호 받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많다.어떤 사람들은, 요압이 자기의 죄를 용서받기 바라는 마음으로 앞으로는 계속 제단에 나와서 봉사할 생각이었다고 본다. 즉 이는 마치 일생을 고독하게 살던 사람들이, 만년에 세상을 등지고 세상과는 아무런 관계를 갖지 않고 살려고 사원에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함으로써 자기들의 죄를 속량받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2. 솔로몬은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인 죄 때문에 요압을 사형에 처했다. 그를 사형하기에 합당하다고 생각된 죄는, 그가 아도니야에게 집요하게 붙어서 반역하려했다는 죄라기보다는 그가 그들을 죽인 바로 그 범죄 때문이었다. 요압은 "비록 압살롬을 좇아가지는 않았으나" (28절), 솔로몬과 그의 왕위 지명을 무시하고 아도니야를 좇았으므로 실상은 그것만으로도 사형에 상당한다.옛날의 충성이 결코 그 후의 배반 행위에 변명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밖에, 요압은 다윗의 집과 그의 나라를 위해서 대단히 많은 봉사를 함으로써 큰 공을 세웠다. 이러한 점을 감안했더라면 솔로몬은 그에게 범한 죄를 용서해 주었을 것이다(관대성은 정부초창기에 큰 명성과 흥왕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아비아달에게 한 것처럼 그를 해직시키는 것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에 지은 살인죄 때문에 마땅히 죽어야만 했다. 그 죄는 다윗이 그에게 갚아 달라고 솔로몬에게 당부했던 바로 그 죄이다. 다윗은 피흘린 자의 피를 요구하여 부르짖는 소리에 응답함으로써, 흘려진 무고한 피에 대한 자기의 빚을 갚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서 꼭 갚을 수 있는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그 책임을 맡겼던 것이다. 이리하여 솔로몬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그의 죄를 가중시키는 것이 있었다. 즉 "그는 자기보다 의롭고 선한 두 사람을 쳐 죽였다" 는 사실, 그리고 그들은 요압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도 않은 사람들이었다는 점, 그리고 만약에 그들이 살았더라면 다윗을 더욱 잘 섬겼을 것이라는 점(흘려진 그 피는 전혀 무고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것이었고, 그들의 생명은 보통 사람들보다 더 귀중했다. 그러므로 그 죄는 더욱 가증스럽다), 그리고 다윗 자신은 알지도 못했고, 오히려 다윗이 그 사건에 은밀히 관계된 것처럼 혐의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사건이었다는 점 등이다. 이리하여 요압은 자기의 대적을 죽임으로써 자기의 임군 다윗의 명성을 위험하게 했으니, 그 사실은 더욱 가중한 죄가 되었다.
(1) 이러한 죄악들 때문에 그는 죽어 마땅하다. 죽되 공의의 칼에 죽어야 한다. "사람에게 의해서 그의 피는 흘려져야만 한다." 그리고 그의 피는 그의 머리 위로 돌아간다(32절). 그가 죽인 사람들의 피도 아울러 그에게 돌아가야 한다(33절) 화였을진저 피 흘리게 한 죄인의 머리요!
살인 행위에 대한 복수는 요압에게 더디 왔다. 그러나 막상 오고보니 너무나도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여기에 보면 그 복수는 "그의 자손의 머리 위에 영영 돌아가게" 되었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 자손들은 그의 영웅적 행위로부터 명예를 얻었을 것이지만, 그 대신 그들은 그의 극악한 행위 때문에 죄책과 수치와 저주를 얻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세상에서 더욱 더 구차한 생애를 영위하게 되었다. 그런 악행을 한 자들의 후손은 결코 새로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2) 그는 제단에서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맞이해야 된다. 요압은 제단에서 꼼짝도 하지 않으려 했다(30절). 그는 제단에서 자기 안전을 도모하리라는 희망을 가졌든가, 또는 만약에 솔로몬이 자기를 제단에서 처형하면, 솔로몬이 성소 모독죄로 백성에게 증오를 받게 되리라는 희망에서였다.
브나야는 그를 거기서 죽일 것인가, 또는 거기서 끌어낼 것인가 깊이 생각했다. 그러나 솔로몬은 여호와 제단은 간악한 살인자를 보호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을 알고 있었다(출 21:14). "너희는 제단에서라도 잡아 내려 죽일지니라." 그래서 희생 제물로 삼아야 한다. 짐승의 피가 속죄 제물이 될 수 있는 경우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만일 그를 거기서 끌어낼 수 없다면, 거기서 처형하라고 명했다. 그것은 솔로몬은 자기의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서는 백성들의 비난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의 잘못을 교정하려 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고, 또 정의의 실행(사법 행정)은 제사보다 더 나은 것이며, 어떤 장소의 거룩함이 어떤 인간의 사악성을 묵인해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에 있다. 살아 있는 믿음으로 죽는 한이 있어도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확고하게 붙잡는 사람들은, 요압이 잡고 있던 제단 뿔에서 찾은 것보다 더욱 강력한 보호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
브나야는 분명히 공개적으로 사형을 집행하여 엄숙히 그를 죽였을 것이다(34절). 이리하여 율법이 시행되자, 요압은 장엄한 장례를 치른 병사같지 않고 일개의 형사범과 같이 "그는 거친 땅에 있는 자기 집에 매장되었다." 그의 시체에는 아무런 경멸의 표시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든지 간에, 시체 위에 죄악을 더하는 것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3. 솔로몬은 공의가 행해진데 만족했다. 즉 개인적인 복수를 기뻐한 것이 아니라, 자기 부친의 명령이 수행된 것이며, 자기 자신과 자기 왕권에 실제적인 자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1) 이로써 죄책이 제거되었다(31절). 그가 흘린 무고한 피를 그의 머리로 돌아가게 함으로써, 솔로몬과 그의 부친의 집에서 죄책이 제거되었다. 이 사실은 살인자에게서 요구되지 않은 피는 치리자에게 피를 요구하게 되든가, 그렇지 않으면 그들에게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자기 집이 안전하고 확고하게 세워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죄악을 제거해 버려야 한다.
(2) 이로써 평강이 다윗의 집에 보장되었다. 다음의 말에서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솔로몬은 자기 개인이 아니라, "그(다윗)의 후손과 그의 집과 그 왕위 위에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 고 했다. 그것은 자기의 욕망과 희망을 말한 것이다. "이제 공의는 실현되고 피의 호소는 성취되었으니, 왕위는 흥왕하여질 것이다." 이리하여 "의로움과 평강이 서로 입맞추고 있다."
요압과 같은 불온한 자가 제거되었으니, 평강이 있을지어다.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러면 그 왕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 (잠 25:5). 솔로몬은 자기 집과 그의 왕위가 평강하기를 빌면서 평강을 만드신 이가 여호와이심을 경건하게 우러러 보았고, 영원의 완성자이신 하나님의 영원을 대망하였다. "그것은 여호와로 말미암은 평강이요 또 영원한 평강일지라." 평강의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평강을 주신다.
시므이의 최후(열왕기 상 2:35-46)
Ⅰ. 솔로몬과 그의 왕권에 충성을 한 두 신복 브나야와 사독의 승진이 나와 있다(35절). 요압이 처형되자 브나야가 그 대신 군대장관으로 승진하고, 아비아달이 파면되자 사독이 그를 대신하여 대제사장이 되었다. 이로써 하나님이 엘리의 집을 제하여 버리시겠다고 경고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이 이루어졌다. 즉 "내가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켜서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라" (삼상 2:35)는 말씀이다.
비록 거룩한 직능의 위신은 추락되어도, 그 직능 자체는 위탁받은 사람의 악정 때문에 파멸되어서도 안 되며, 또한 이를 수행할 손길이 없는 채 하나님의 사업이 버려져 있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직접 하나님의 섭리로 왕이 된 사람이 합당한 사람을 찾아 내 제사장으로 삼을 권한을 가진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공명정대하게 이 권한을 행사하였으니, 옛부터 내려오던 권리가 사독에게 주어졌다. 사독은 엘르아살의 집에 속하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 편 엘리와 그의 집은 이다말에게 속하여 있다.
Ⅱ. 시므이를 제거하게 된 경과가 나와 있다. 그는 바후림에 있는 자기 집에서 솔로몬왕이 보낸 사자를 통해서 소환령을 받았다. 그때 그는 자기의 운명도 아도니야의 운명과 별다를 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다윗의 집에 대해 품은 자기의 적대감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로몬은 죄와 죄인을 구분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다윗은 자기 생전에는 시므이의 목숨을 살려 줄 것을 약속한 바 있다. 솔로몬은 그 약속에 구애받지는 않으나, 그 약속을 정면으로 위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1. 솔로몬은 시므이의 주거를 예루살렘에 한정시키고, 기드론 강 건너 그 성읍을 나가지 못하게 했다(36, 37절). 솔로몬은 시므이가 그의 이웃들간에 불행한 일을 할까봐 그를 계속 고향에 살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를 예루살렘으로 보내, 그 속에서만 살도록 하였다. 따라서 시므이의 주거 제한은 자기 자신에게는 편안한 생활이 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그 위치가 아름다웠고, "온 땅의 기쁨이요," 왕이 있은 성읍이요, 거룩한 성읍이었기 때문이었다(그는 그와 같은 천국에 갇혀 있으므로 그것을 불평할 이유가 없었다). 그의 감금은 솔로몬에게 더욱 안전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예루살렘에서는 늘 자기가 볼 수 있는 곳에 두어 그의 모든 행동을 감시할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솔로몬은 분명하게 그에게 만일 그가 왕의 지배를 벗어나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복종을 위한 공정한 심판이며 그가 불평할 이유가 없는 충순함을 시험하는 것이기도 했다. 시므이는 아주 경미한 조건으로 생명을 얻고 있는 것이었다. 즉 그는 예루살렘에서 살기를 만족하여 여기기만 하면 그의 목숨은 부지할 수 있게 되었다.2. 시므이는 감금 생활에 복종하고 이러한 조건으로 그의 생을 감사하게 누렸던 것이다. 그는 사형에 해당하는 형벌하에서도 예루살렘을 교란시키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왕의 말이 옳다고 자책했다.
멸망하는 자들도 용서와 생명의 조건이 예상 밖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기들의 머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인정해야 한다. 시므이는 한계 구역 바깥에는 나가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다(42절).
3. 시므이는 자기의 서약을 망각하고 말았다. 이것은 솔로몬 왕이 예상했던 바였다. 하나님은 의로우사 시므이가 그의 옛 죄값을 받게 하시기 위하여 그로 하여금 그 서약을 망각하게 하셨다.그의 종들 중 두 사람(그는 죄수였지만 그를 수종드는 자들과 함께 살았던 것 같다)이 그에게서 블레셋 땅으로 도망해 갔다(39절). 그는 거기까지 그들을 쫓아가서,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려 왔다. 그는 몰래 나귀를 타고, 아마 밤에 떠났던 모양이다. 그는 집에 돌아와서 들키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홀(Hall)주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그의 종들을 찾으려 했으나, 자기 자신을 잃었다.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종들이며, 또 종이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 테두리를 벗어나서 땅의 것을 추구하다가 드디어 자기들의 영혼이 무서운 심판을 자초하는 사실을 얼마나 자주 보는가!"
4. 솔로몬은 그의 생명을 몰수했다. 시므이가 범법했다는 정보가 솔로몬에게 입수되었다(41절). 왕은 사람을 보내 그를 불러서(1) 그의 현재의 범죄를 책망했다(42, 43절). 즉 그는 하나님과 왕의 권위와 진노를 크게 무시했다. 또 그는 "여호와의 맹세" 를 파기하고 왕명에 불복종했다. 그리고 이로써 그의 정신상태가 입증되었다. 즉 그는 감사와 양심의 굴레를 모르는 자이다. 만일 그가 솔로몬에게 출타해야 할 사정이 긴박함을 진언하고, 허가를 간구했더라면, 솔로몬은 아마도 허가를 내려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이 모르고 있는 것과 묵인하고 있는 것을 기화로 삼는 것은 그를 최대로 모욕하는 것이었다.
(2) 솔로몬은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고, 그가 다윗성에서 환란을 당하고 있을 때 돌을 던진, 이전의 죄를 비난했다. 다시 말하면 그 죄란 "네 마음이 아는 모든 악이었다" (44절).
이제는 그 사실의 증거를 입증할 증인을 세울 필요도 없었다. 그 대신 양심이 그 자신의 수천 명의 증인이 되었다. "죄 값이 자기 머리 위에 돌아갈 것을 뻔히 알고도 마음만이 홀로 알고 있는 악" 은 그 사람을 혼란으로 충만시키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이 그것을 알고 있다면, 하나님은 그 마음보다 더 위대하시며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이다.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한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은 별도로 하고라도 시므이 자신은 그가 다윗을 저주할 때 보여 준 증오심과 적개심, 그리고 자기가 복종했던 것은 허례 아니면 억지로 한 것 등 그 악의 요인을 알고 있었다.
(3) 그는 자기 자신과 왕권을 축복했다(45절). 분노와 낙담으로 시므이가 한 무력한 저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왕은 복을 받으소서" 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마음껏 소리를 냈다. 즉 "그들이 저주하려면 저주하게 하라." 너는 "복을 빌라."
" 다윗의 위는" 그를 전복하려는 자를 제거함으로써 "견고히 설지어다." 교회의 원수들의 악을 생각해 보면 그들이 아무리 격노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상상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리스도의 왕좌는 견고히 설 것이니, 원수는 이를 흔들 수가 없다.
(4) 솔로몬은 시므이를 즉시 처형할 명을 내렸다(46절). 모든 심판은 예수께 맡겨졌다. 따라서 주 예수님이 평화의 왕이긴 하지만 그는 역시 정의의 왕이심이 알려지리라. 그리고 머지 않아 예수의 통치를 기뻐하지 않던 모든 원수들에게도 그러한 그의 명령이 내려지리라. "그들을 데리고 와서 내 앞에서 쳐 죽이라" 는 것이다. 예수를 모독한 자들의 죄값은 자기들의 머리 위에 떨어져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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