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니야의 야심(1)(열왕기 상 1:1-4)
사무엘 끝장에 기록되어 있듯이, 다윗은 한때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파멸케 하는 천사의 칼을 모면한 일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질병이나 위험으로부터 구조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집행 유예)에 불과하다. 촛불은 바람을 불어 끄지 아니하면, 저절로 다 타버리게 마련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고령이라는 약점 때문에 몰락해가고 있는 것과, 그것으로 인하여 무덤의 문턱에까지 이끌리고 있음을 보게 된다.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는" 자는 "덫에 빠지게 된다." 어차피 "우리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1. 이처럼 연약해진 다윗을 본다는 것은 염려스러운 일이다. 그의 몸은 늙었고 체온마저 다하여 어떠한 옷으로도 그의 몸을 따뜻하게 보온할 수가 없게 되었다(1절). 다윗은 과거에 원기 있는 활동가이자 사업자였고, 맹렬한 불길이 언제나 그의 가슴 속에서 불일듯 타오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제 그의 피는 싸늘해지고 순환이 불순하여, 침상에만 틀어박혀 있기만 하는데도 체온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이제 70세가 되었다. 허다한 사람들이 그 나이에는 아직까지 박력있게 사업을 수행하기에 알맞은 때라고 하겠다. 그러나 다윗은 이전에 범했던 자신의 죄, 특히 우리야의 사건을 통하여 범했던 죄에 대하여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 겪은 예전의 여러 가지 수고와 역경을 그 당시에는 예사로이 여기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더욱 악화됨을 깨닫게 되었다. "힘센 자들아 너희의 힘을 자랑말지니라." 그 힘은 질병으로 곧 쇠잔하여 질 수 있으며, 또 마침내는 노령으로 약화되고야 말 것이다. 젊은이들이여, 이러한 불행날이 이르기 전에 "너희들의 젊은 날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할지라." 우리의 손이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 그리고 우리들이 세대를 위하여 할 일을 발견했다면, 우리의 온 정성과 힘을 다하여 그 일을 하자. 왜냐하면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 곧 연륜이란 밤이 오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들의 정력이 다 사라지고 났을 때, 그 정력을 선용했다는 사실을 회상하면 큰 즐거움이요 위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2. 다윗의 의사들이 너무나도 무력하고 기술이 없어서 외형적인 처방으로밖에는 시술할 수 없음을 보는 일은 괴로운 일이 있을 수 없다. 강장제라던가 활력소가 아니라, 단지
(1) "그들이 이불로 그를 덮었다." 하였다. 이것은 다윗에 어떤 체온이 다소 있다면, 그 체온을 보존하여 온기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의 몸에 온기가 없다면, 온기를 전달하여 주는 데는 아무런 효험이 없는 것이니, 왕실의 침구로서는 소용이 없는 노릇이다. 엘리후는 "우리들의 의복이 우리에게 따뜻한 까닭" 을 알기 어렵다고 했다(욥 37:17). 그러나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지 아니하면 "사람이 옷을 입어도 따뜻하지 아니한데" (학 1:6), 다윗이 지금 그러하였다.
(2) 어리석게도 그들은 그의 장례식을 마련했어야 했는데도 혼례를 권하였다(2-4절). 그러나 그들은 무엇이 자기들의 타락을 충족시킬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마 다윗의 건강을 진단한다는 미명하에 다윗의 타락(된 마음)을 만족시키는 일에 급급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러서는 그의 의원들에게 처방을 물었듯이, 그의 예언자들에게도 뜻을 물었어야 했다. 그러나 선량한 사람들까지도 아내를 많이 거느리는 것이 묵인되던 그 당시였던지라, 이러한 일도 변명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같이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한 남자는 한 아내를 취해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았다(마 19:5). 나아가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 (고전 7:1)는 가르침을 받고 있다. 아비삭은 다윗과 동침하기 전에 먼저 다윗과 혼인하여, 그의 둘째 아내가 되었다. 그것은 아도니야가 자기 아버지 다윗이 죽은 후에는(2:22) 그녀와 결혼하려 했음을 그의 크나큰 범죄로 돌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아도니야의 야심(2)(열왕기 상 1:5-10)
다윗은 자기의 자녀들로 인하여 많은 고통을 받았다. 암논과 압살롬은 그의 슬픔의 대상이었으니, 전자는 장자요, 후자는 셋째였다(삼하 3:2, 3). 아비가일이 낳은 그의 둘째 아들에게서는 위안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넷째가 아도니야였다(삼하 3:4). 그는 헤브론에서 출생한 자 중의 하나이다. 지금까지는 그에 관한 말이 전혀 없었다. 여기에 나타난 바로는, 그 풍체가 준수하여, 연령이나 기질에 있어서 압살롬 다음가는 인물이다(3절). 그리고 줄곧 그의 아버지의 눈에는 보배같은 존재였으나 이제 와서는 하나의 가시가 되어버렸다.
Ⅰ. 그의 부친은 그를 애지중지하였다(6절). 지금까지 그는 아버지 다윗을 조금도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전혀 그의 부친을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아마 종종 그의 부친을 괴롭혔기 때문에, 그의 부친은 그의 악한 소행으로 은근히 속이 썩어 하나님 앞에서 탄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아도니야를 그의 웃음도 자제하게 하고, 그가 마음먹고 있는 것을 부정하거나, 그가 무엇을 했고, 어디를 갔다 왔느냐를 대답하도록 부르고, 책이나 일에 집착게 하거나 잘못된 것을 보고들을 것을 꾸짖음으로서 섭섭하게 하지는 아니하였다. 단 한 번도 "네가 어찌하여 그런 짓을 하였느냐?" 고 말한 일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그에게 쉬운 일이 아니며, 화를 내지 않고 참고 들을 존재는 못되었기 때문이다. 꾸짖음을 불쾌하게 느끼고, 그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아들의 잘못이다. 그는 꾸짖음에서 오는 유익함을 상실하고 말았다. 반면 꾸짖음이 아들을 불쾌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들을 꾸짖지 아니하면, 그것은 그 아비의 잘못이다. 따라서 이제 그는 아들을 버려둠으로 인해서 징벌을 받는 것이니, 그것은 정당한 일이다. 하나님보다 자기 아들을 더 사랑하는 자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시키지 아니하는 자와 매 한가지로, 그것 때문에 그들의 아들들로부터 능히 기대할 수 있는 영예를 상실하게 마련이다.
Ⅱ. 거꾸로, 아도니야는 자기 부친을 우롱하였다. 자기 부친이 노쇄하여 침상에만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무시해 버려도 된다고 생각하여, "자기 스스로를 높혀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5절)고 하였다. 버릇없이 자라난 애들은 교만하고 야심이 생기게 마련이어서 허다한 젊은이들이 파멸로 이끌리게 된다. 젊은이들을 겸손하게 기르는 방법은 저들을 잘 통제하는 일이다.
아도니야의 무례성을 살펴 보기로 하자.
1. 그는 솔로몬이 하나님과 다윗이 지정해 준 왕위 계승자임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기 부친의 장례가 눈앞에 가까웠다고 생각하여, 그를 계승하려고 채비를 차렸다. 그러나 실상은 이미 하나님의 약속대로, 솔로몬의 왕위 계승을 다윗 자신이 이미 선포하였으므로, 왕위 계승권은 확정된 것이었다. 즉 국무회의로 가결되고 난 문제였다(대상 22:9; 23:1). 아도니야는 하나님과 그의 부친을 무시하고서 이 왕위 계승을 억압적으로 끊어 버리려고 획책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왕국도 반대를 받는다. "결코 그가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리라" 고 말하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2. 그는 자기 부친이 노쇠하여 폐물이 되었으므로,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즉시 왕좌로 나아갔다. 그는 자기 부친이 죽기를 기다릴 수가 없어서, 이제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다" (18절)고 하며, "아도니야 왕 만세를" 불렀다(25절). 그의 부친은 나이 들어 통치할 수 없기 때문에, 통치하기에 부족하고, 뿐만 아니라 솔로몬은 아직 어리고 통치할 능력이 없어 부적합하였다. 그래서 아도니야가 드디어 정권을 장악하려 한다. 자녀가 그 부모의 노쇠함을 기회로 그 부모를 모욕하는 것은 야비하고도 악한 생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3. 이러한 야심에 가득찬 계획을 추구하기 위하여,
(1) 아도니야는 자기를 수종들고 싸워 줄 힘세고 위용있는 병거의 기병 등 많은 시종을 취했다(5절).
(2) 그는 직접 장군 요압과 대제사장 아비아달에게 큰 호의를 받았다(7절). 그가 교회와 군부내에서 큰 영향력을 구사하여 자기에게 큰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했다는 것은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어떠한 책략 때문에 그들이 아도니야를 추종하고 조력하게 되었는지,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한때 다윗이 당면하였던 난국을 가장 충성스럽게 이겨나갔던 지각과 경륜이 많은 노련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쉽게 감언이설에 미혹당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이 아도니야를 지지한다고 하여, 그것이 자기들에게 어떤 이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다. 그들은 이미 가장 높은 지위에 확고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왕관이 솔로몬에게 상속되어 씌워질 것을 모르고 있을 수 없는 자들이다. 또 그 권한을 저지하는 것은 그들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솔로몬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 그들의 이득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그들을 멋대로 버려두셨다. 아마 그들 자신이 만든 채찍으로 이전의 어떤 그들의 비행을 바로잡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사독과 브나야 및 나단같은 사람들은 다윗에 대한 충성심에는 지극히 정평이 나있던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아도니야로서는 자신의 궤계를 이들에게 제시할 만한 자신조차 없었다(8절). 선한 일에 철저한 신념을 드러내 보이는 사람은 악한 일을 행하게 유혹당하지 않는 법이다.
(3) 아도니야는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에느로겔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9절). 손객으로는 왕자들과 왕의 신복들이었는데, 그것은 저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어 자기 일당으로 이끌어 들이려고 무마하기 위함이었으나, 솔로몬은 여기에 청하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그를 멸시해서든가 체념해서였을 것이다(10절). 이러한 자들은 자신의 배를 섬기는 자들과 같아서, 어느 편에 속하든지 간에 자기들에게 향응을 베풀어 주는 자를 위하게 된다. 이러한 자들이야 말로 용이하게 유혹자들의 희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롬 16:18).
아도니야가 양과 소와 살진 송아지를 잡은 것은 희생 제사를 위함이요, 나아가 그는 하나의 종교적 축제를 연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 이것은 흡사 압살롬이 맹세를 구실 삼았듯이(삼하 15:7), 제사장을 자기 편에 가담시키면, 일이 더 잘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어떤 경우는 In nomine Domini in cipit omne malum-즉 주님의 이름으로 온갖 사악이 시작된다고 하거나, 모든 종교 의식이란 온갖 종교적인 관습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이루어져야 하노라고 말하게 된다면, 그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솔로몬의 즉위(열왕기 상 1:11-31)
우리는 여기서 나단과 밧세바가 아도니야의 찬탈 행위를 분쇄함으로써 다윗에게 솔로몬의 왕위 계승권을 인정하게 하는 유효 적절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1. 다윗 자신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 불순종하는 자식들은, 자기들의 인자하고 연로한 부모에게 자기들의 악행을 숨기기만 한다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공중의 새가 말을 전하는 법이다."2. 밧세바는 물러나 있었으므로, 나단이 일러 줄 때까지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거의 모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을 매우 평안하게 살아가고 있다.
3. 솔로몬은 이러한 것을 미리 알고 있었나 본데도, 귀머거리인 양 못들은 체하고 있었다. 그는 나이도 들었고, 또 그 나이에 비해 지혜가 뛰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도니야를 반대할 만큼 흥분하지도 않고, 조용히 침착하게 있으면서, 하나님과 그의 친구들에게 이 사건을 해결하도록 맡겨 버린 것을 볼 수 있다. 이리하여 다윗은 솔로몬을 위한 그의 시편 가운데서, 사람들이 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여 헛되게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나,"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그의 "여디디야")에게 잠을 주시어", 평안함을 주시며, 동요함이 없이도 목적을 달성케 하신다고 술회하고 있다(시 127:1-2).
그렇다면 이러한 의도가 어떻게 실현되는 것일까?
Ⅰ. 나단 선지자가 밧세바에게 이 사건의 전말을 알려 줌으로써 밧세바는 놀랐다. 그리고 그녀로 하여금 솔로몬의 왕위 계승권을 확약하는 왕명을 얻는 일에 나서게 만들었다. 나단은 하나님의 뜻과 다윗의 마음을 알고 있었으며, 다윗의 이익과 이스라엘의 이익도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여디디야" 라는 이름을 주신 것도 바로 이 나단을 통해서였다(삼하 12:25). 따라서 사람을 승진케 하시는 자의 뜻에 따라서 왕위 계승은 솔로몬의 권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나단이, 그 권리가 찬탈당하는 것을 좌시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왕권이 하늘로부터의 직접적인 영에 의해서 정해지던 때에는, 예언자들이 그러한 일에 관여하고 개입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일반 섭리가 인간 나라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고 보니(단 4:32), 그에 따른 기능도 일반 사람들에게로 넘어가게 되어, 예언자들은 그 문제에는 간여하지 않게 되었고, 오직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일만을 살피게 되었다.
나단은 솔로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자이므로, 밧세바에게 나아갔다. 그리고 그는 다윗에게도 지극히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그는 밧세바에게 아도니야가 기도하는 바를 알려 주었다(11절). 그것은 다윗의 동의한 바도 아니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일이라고 일러 주었다. 그는 또 밧세바에게, 솔로몬이 왕관을 잃을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아도니야의 세력이 커지면 솔로몬과 밧세바 자신의 생명도 위험하다고 일러 주었다. 비천한 사람은 왕권 따위에는 관심도 없으며, 왕관을 쓸 전망이 있다손 치더라도, 왕관없이 그냥 주저 앉아 있는 데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 보존의 법칙과 제6계명은 우리 자신의 생명과 남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가능한 온갖 노력을 경주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이제 나단은 나로 하여금 "당신의 생명과 당신의 아들 솔로몬의 생명 구원할 계교 베풀기를 허락하소서" 라고 말한다(12절). 이러한 계교는,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이르기를, "누구든 우리의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계 3:11), 우리가 우리의 생명과 곧 영적 생명까지 구원하도록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는 것이 그런 조언이다. 그는 밧세바로 하여금 왕에게 가서 솔로몬이 다윗의 후계자가 되어야 함을 맹서한 사실을 상기시키고, 또 가장 정중한 태도로 "무슨 연고로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나이까?" 하고 묻도록 지시하였다. 나단은 생각하기를, 다윗은 그다지 냉담한 사람이 아닌고로 이 말이 자극을 줄 것이라 여겼다. 명예심은 물론이요 양심도 이 비슷한 경우서처럼 다윗에게 생기를 불어 줄 것이다. 그리고 밧세바가 왕에게 이 일을 설득하고 있는 동안, 나단은 자기가 우연히 들어 온 것처럼 들어가서 밧세바를 후원해 줄 것을 약속했다(14절). 그렇게 되면 왕은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다윗은 그러한 증거를 알아챘던 사람이다. 삼상 25:32-33)라고 생각하여, 적어도 다윗을 깨우치는 데 더 없이 유익하리라고 일러 주었다.
Ⅱ. 밧세바는 나단의 권고와 지시에 따라, 때를 놓치지 않고 곧 왕에게 가서 간청했다. 그것은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에게 가서 자기 생명을 위하여 중재한 심부름의 경우와 흡사하다. 밧세바는 에스더가 부름을 기다리던 것과 같이 부름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으며, 언제 들어가도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밧세바가 왕에게 나아갔을 때, 아비삭이 왕을 시종들고 있었으나(15절) 그녀는 왕이나 아비삭에게 불쾌감을 갖지는 않고(16절) 자기의 군왕이며 또 남편인 다윗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서 "몸을 굽혀 왕께 절하였다" (16절)는 사실이다. 그녀는 그와 같이 정직한 사라의 딸이었다.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 라고 부르면서 복종한 여자이다. 어른들에게 사랑을 받으려는 자는 어른을 존경해야 하며, 친절을 대접받고자 하면 먼저 그들에게 공손해야 한다.
이때 밧세바가 왕에게 한 간언은 매우 신중했다.
1. 밧세바는 다윗이 자기에게 한 언약을 상기시키고, 솔로몬이 그를 계승해야 한다고 하면서, 엄숙한 맹세로 확인시켰다(17절). 그녀는 이렇게 하면 다윗과 같은 양심적인 사람을 재빨리 붙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2. 그녀는 다윗이 알고 있지 못하던 아도니야의 간계를 알려 주었다(18절). "아도니야가 왕위에 오른 것은 오늘날 왕과 경합하려 함이요, 장차 왕의 언약을 파기하려 함이옵니다. 왕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므로, 그 허물이 왕의 것은 아니옵니다. 이제 왕께서 알고 계시오니, 왕의 언약을 위해서도 이 왕위 찬탈을 진압토록 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밧세바는 다윗에게 아도니야의 손객과 그의 편에 서 있는 자들이 누구누구인지 알려 주었다. 그리고 아도니야가 "왕의 종 솔로몬을 청하지 않은 것은, 분명히 솔로몬이 그의 경쟁자라 여김을 나타내는 것이며, 솔로몬을 몰래 없애 버리려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19절). 그리고 솔로몬이 무시당하고 있는 것은, 왕권 안정을 과중히 보아서가 아니라 멸시해서 입니다" 하고 덧붙였다.
3. 그녀는 이러한 불행을 근절하는 것은 왕 자신의 권력에 크게 달려 있는 문제라고 탄원했다(20절). "온 이스라엘이 주를 다 주목하고 있나이다" 라고 했다. 그것은 "왕" 으로서 만이 아니라 왕들이 자기 백성들을(마치 자신의 가재 도구인양) 자신이 좋아하는 자에게 유언에 따라 유증(遺贈)하는 것이 그의 특권이라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또한 "선지자" 로서도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이야말로 야곱의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 일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영이 그를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삼하 23:1, 2). 따라서 이같이 중대한 일을 당하여는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기다리고 이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윗의 말은 곧 그들에게 있어서는 신탁이요 율법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밧세바는 말하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의 말이야말로 그러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며, 아도니야의 자칭 왕됨을 유효적절하게 분쇄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왕의 입술에 있다" (잠 16:10). 사람이 아무리 권력과 권세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것을 메시야의 왕국을 잘 유지하고 발전시키도록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솔로몬의 왕국은 메시야의 나라의 한 모형이었다.4. 밧세바는, 이 사건이 다윗의 생존시에 해결되지 않으면, 자신과 자기의 아들은 급박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리라는 것을 시사했다(21절). "아도니야의 세력이(요압 장군과 아비아달 제사장을 자기 편에 거느리고) 번창하기만 하면-지금 상태 또는 그럴 가능성이 많다-빨리 진압시키지 않는 한 솔로몬과 그의 모든 부하들은 반역자로 인정받아 처단될 것입니다" 라는 것이다. 찬탈자는 지극히 잔인하다. 아도니야가 만약에 왕위에 오르면, 솔로몬이 그를 신사적으로 대우해 준 것처럼 그는 솔로몬을 신사적으로 대우하지 않을 것이다. 정당한 힘에 거역하여 사람이 들어가는 길을 가로막는 사람은 무슨 일이나 위태롭게 한다.
Ⅲ. 나단 선지자는 약속에 따라서 적시에 들어가서 밧세바를 후원했다. 그때 그녀는 왕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아직 왕이 답변을 하지는 않은 때였다. 그것은 왕이 밧세바가 하는 말만 들어서는, 그 대답이 지연될 것이요, 그 문제를 생각만 해보고 말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증인의 말은 뜻을 이룰 수 있고, 즉각 왕이 적극적인 명령을 내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왕은 나단 선지자가 왔다는 말을 들었다. 나단은 왕이 불편하거나 왕의 생각에 큰 문제거리가 있을 때면 언제나 자기를 기쁘게 맞아들이는 것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선지자는 위의 두 경우 중 어느 한 경우에라도 왕을 특별히 돕는 법이기 때문이다. 나단은 누구나 존경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에게는 존경을 해야 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왕이 왕좌에 있을 때 전에도 늘 병중에 있으면 와서 문병을 갖던 것처럼, 이제도 왕이 병상에 있음을 알고 있는 한 예방을 했다. "그는 얼굴을 땅에 대고 왕께 절을 했다" (23절).
그는 밧세바보다는 좀 더 분명하게 왕에게 상의했다. 이 때에 나단의 인품이 다윗을 크게 지원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다윗이 원기가 떨어지고 있으므로 원기가 회복되도록 함이 필요했다.
1. 그는 밧세바가 설명한 것과 꼭 같이 아도니야의 궤계를 설명하고(25, 26절), 마치 다윗왕이 이미 죽은 것처럼 아도니야 일파는 "하나님이 아도니야왕을 도우신다" 고 외치는 확신의 극치에 이르렀음을 덧붙여 말하면서, 그들이 자기를 잔치에 초대하지 않았음(" 주의 종 나를 청하지 않았나이다")을 알리고, 그것으로써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이나 다윗에게 상의하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넌지시 일러 주었다. 사실 나단은 secretioribus consiliis-즉 그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2. 그는 이 문제에 다윗 자신이 얼마나 개입되어 있는지를 밝히라고 한다. "내 주 왕께서 이르시기를 아도니야가 내 뒤를 이어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나이까?" (24절) 그리고 또 "이것이 내 주 왕께서 하신 일이오니까?" (27절) 만일 그렇다면,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 자신의 말에 우리 모두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충실하지는 않은 자이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찬탈 행위를 단호히 고발하고, 솔로몬을 후계자로 선포할 유일무이한 시기이다. 만일 그렇다면, 왜 보통 때에는 다윗의 신복이요, 이런 문제에는 특별히 관계되어 있는 자이던 나단이 그것을 모르고 있었는가? 나단은 왕권 계승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다윗에게 통고해 준 일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주 왕께서 이 일을 알지 못한다면 아도니야와 그의 일파는 얼마나 감히 무엄한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하여 나단은 다윗이 그들에게 분노하여, 솔로몬의 권익을 강력히 지원하도록 했다. 명심할 것은, 선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의무를 깨우침 받아 그것을 알게 되고, 또 자기들이 나서서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자기의 의무를 다하려 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것을 깨우쳐 주는 사람은 그들에게 참된 호의를 베푸는 것이 된다. 여기서 나단이 다윗에게 그와 같이 했다.
Ⅳ. 이에 다윗은 전에 굳게 결심한 대로 솔로몬이 그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엄숙한 선포를 하게 되었다. 밧세바가 불려들어 갔다(28절). 왕은 그녀의 아들을 위해서 그리고 그녀의 아들을 대신하여 그녀에게 다음과 같은 확증을 다시 해 주었다.
1. 그는 전에 하던 언약과 서언을 반복하고, "이스라엘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켜, 그녀에게 맹세하기를, 솔로몬이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앉으리라" 고 고백했다(30절). 그는 늙었고, 기억력도 쇠했으나, 이것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서언은 너무나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파기되어서는 아니 되며, 서언은 너무나 엄숙한 일이기 때문에 망각될 수 없는 것임을 기억하자.2. 그는 필요에 따라서, 다시 한번 맹세하여 그 약속을 비준했다. "여호와는 살아계시사 내 영혼을 모든 환란에서 건져 내셨으니 내가 오늘날" 논란없이 주저없이, "이를 정녕코 행하리라." 그가 서언하는 모습은, 엄숙한 의식이 있을 때 늘 하던 모습과 흡사하였다(삼하 4:9). 다윗은 자기 앞에 놓여 있는 모든 고난과 환란으로부터 자기를 구하신 하나님의 의가 자기에게 나타났음을 감사하게 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야곱이 죽을 때도 그랬다 창 48:16). 그리하여 여호와의 영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은, 자기의 체험에 비추어 보아 다 옳다고 인정하였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구원하신다" (시 34:22). 임종을 맞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위한 증언이 되어야 하며, 자기들이 겪은 바대로 하나님을 이야기해야 한다.
Ⅴ. 밧세바는 왕 자신에게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이 확약을 받았다(31절).
1. 그녀는 왕을 존경했다. 반면에 아도니야와 그 일당은 무례하게 대결했다.2. 왕의 건강을 마음 깊이 바라면서 밧세바는 "다윗왕은 만세 수를 하소서." 했다. 그녀는 다윗이 너무 오래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는커녕, 가능하면 왕이 만세 수를 하여 그가 쓰고 있는 왕관을 찬란하게 하고, 백성들에게도 축복이 되기를 기원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리 손해가 오더라도 쓸모있는 사람의 생명이 오래 연장되기를 진정으로 바라야 한다.
솔로몬의 대관식(열왕기 상 1:32-40)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아도니야의 계획을 초기에 분쇄함으로써, 솔로몬의 계승권을 보존함과 동시에 사회 평화를 유지하는 적절한 조치를 취한 것을 볼 수 있다.
Ⅰ. 다윗은 솔로몬의 계승권을 명백히 선언했다. "다윗이 이 사건을 위탁한 사람들은 사독과 나단과 브나야인데, 이들은 다윗이 항상 신임하며, 자기에게 충성을 다한다고 생각한 유력한 사람들이었으며, 아도니야는 언제나 그들을 자기의 초대에서는 제외시켰었다(10절).
다윗은 즉각적으로 솔로몬의 계승권을 선포하면서, 가능한 엄숙한 의식을 가지도록 명령했다. 그들은 "그들의 주의 종들" 과 호위병들과 그리고 왕실의 일을 돕는 모든 사람들을 동원해야 했다. 그들은 솔로몬을 왕이 타고 다니던 노새에 태워야 했다. 다윗에게는 그의 아들 이후에 가지고 있었던 그런 말은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들이 갈 곳(33, 34, 35절)과 할 일을 명령했다.
1. 사독과 나단, 두 성직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를 왕으로 기름부어야 한다. 솔로몬은 사울과 다윗처럼 장자는 아니고 나이 어린 자였지만,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왕이 되었다. 또 그의 왕위는 비록 경쟁이 되었으나, 그것 때문에 오히려 왕위는 확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게 됐다.이 기름부음(성별식)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 기름부음 받은 자의 위임과 자격을 말해 주는 전형적인 것이다.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는 성령 곧 즐거움의 기름이 무한히 부어진다(히 1:9; 시 89:20). 그리고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자" (약 2:5), 곧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으로부터 "기름 부으심을 받는다" (요일 2:27).
2. 고관들은 문관이든 무관이든 이 사실을 널리 반포하기 위하여 나팔을 불어 이 기쁨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나팔 소리는 모세의 율법이 큰 행사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명령한 바이다. 그뿐 아니라 백성들의 환호성이 이에 더해져야 한다. "솔로몬 왕 만세. 솔로몬 왕은 번창하소서. 그의 왕국이여 영원 무궁하여 기쁨 속에서 영존하소서." 이로써 솔로몬에 대한 약속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는 생존하리라" (시 72:15).3. 그들은 솔로몬을 위풍당당하게 다윗성에 인도하여야 했고, 솔로몬은 자기 아버지의 보좌에 앉아야 했다. 그는 이제 그 아버지의 대리인이요, 다윗왕의 부왕(副王)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병중에는 공무를 수행하고, 사후에는 그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이다. "저가 나를 대신하여 왕이 되리라." 왕이 죽어갈 때에도 국사의 논란이나 선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 일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다윗 자신에게나 거기에 관계된 모든 일파에게 있어서는 크게 만족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윗은 그의 계승자가 자기 생전에 영광으로 나타나는 것을 조금도 나쁘게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병상에서 자기의 경건 생활에 깊이 몰두하고 있었으므로, 만일 누군가가 그 일을 상기시켜 주지 않았더라면, 나라의 안정에 절대 필요한 이 위대한 사업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방치되었을 뻔했다.
Ⅱ. 브나야가 나머지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 명령에 커다란 만족을 표했다. 왕은 "솔로몬은 나를 위해 내 뒤를 이어 왕이 되리라" 고 했다. "아멘" (하고 브나야는 진정으로 말했다) "왕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도 말하리이다. 우리는 왕위 지명에 전적으로 만족하며 그 선택에 찬동합니다. 우리는 nemine contradicente-즉 만장일치로 솔로몬을 지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순조로운 선기가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더구나 그것을 완성할 수도 없나이다. 내 주 왕의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36절). 이것은 솔로몬의 왕권이 수립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말이다. 하나님이 말씀에 신실하듯 우리도 우리의 말에 신실하면, 하나님도 그의 섭리에 의해서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브나야는 여기에 솔로몬을 위한 기도를 첨부했다(37절). 즉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솔로몬과도 함께 하시고, 그의 왕좌가 더 크게 되게 기원했다. 브나야는, 다윗이 자기 아들들이 위대하게 되는 것을 시기하는 사람이 아니므로 이런 기원을 꺼림직스럽게 여기거나 모욕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진정으로 아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고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도 아들들이 자기보다 더 현명하고 훌륭하게 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현재의 자기보다 더 현명하고 훌륭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혜로움과 선한 마음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다.
Ⅲ. 이 명령은 즉각적으로 집행되었다(38-40절). 때를 놓칠새라 솔로몬은 지정한 장소에 위풍당당하게 인도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사독(추측컨대 대제사장은 아니나 대제사장 차위자, 유대인들은 현자 또는 둘째 제사장이라고 불렀다)이 나단 선지자와 다윗왕의 지시에 따라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었다. 사독은 여러 가지 성물과 함께 언약궤가 안치되어 있던 성막에서, 권세와 풍요를 상징하는 "기름 뿔" 곧 모든 종교 의식에 쓰여지는 거룩한 기름을 가져다가 솔로몬에게 부었다. 우리는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에게 기름을 붓는 주제넘은 짓을 한 사실을 알지 못한다. 즉 아도니야는 기름부음으로써가 아니라 잔치에 의해서 왕이 되었다. 하나님은 당신이 부르시는 자를 인정하며, 그 인정은 기름부음으로 표시되는데 찬탈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 는 "기름부음 받은 자" 를 뜻하며,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뜻에 따라 "시온의 거룩한 산에 세운" 왕이다(시 2:6, 7). 그리스도인도 역시 우리 하나님이 세우신 왕들이며, 그들은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다" (요일 2:20). 이에 백성들은 솔로몬이 높아진 것을 크게 기뻐하고 만족하였으므로, "하나님이 솔로몬왕을 구원하셨다" 고 호산나를 부르며, 그를 얼싸안고 노래와 춤으로 그를 맞았다(40절). 이로써 그들은 솔로몬의 책정에 찬의를 선언했고, 나아가 솔로몬은 억지로가 아니고 백성들에게 의해서 즐거움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표했다. 왕은 자기의 권력이 자기 백성들에게 기쁨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왕 자신에게도 조금도 기쁨이 될 수 없다. 참으로 모든 이스라엘 사람은 다윗의 아들(예수)의 등극을 기뻐 찬양하리라.
아도니야의 좌절(열왕기 상 1:41-53)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 수 있다.
Ⅰ. 솔로몬이 취임했다는 소식이 아도니야 및 그의 일파의 주흥이 한창일 때 그들에게 전해졌다. "그들은 먹기를 마쳤다" 고 했다. 아마 그들이 먹기를 마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갔던 것 같다. 아도니야 일파가 향연을 즐기고 있는 동안 솔로몬의 성별식이 시작되고 마쳐졌기 때문이다.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고" 반대하는 자들은 보통 "자기 배만 섬기는 자" (롬 16:18)요, "자기 배를 신으로" 섬기는(빌 3:19)자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오랜 향연은, 자기들의 권세를 지극히 확신하고 있었다는 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시간을 그렇게 허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옛 세상과 소돔은 멸망의 때가 가까운 줄을 분명하게 알면서도 "먹고 마셨다" (눅 17:26 이하).
그들이 먹기를 마치고 그들의 왕을 선포하면서 개가를 부르며 왕을 성중으로 인도하려던 때에 "나팔 소리를 들었다" (41절). "그 소리는 그들의 귀에 놀라운 소리였다" (욥 15:21). 요압은 나이 많은 사람이므로, 그 성중이 소동함을 알고 깜짝 놀랐으나, 아도니야는 자기의 사신이 "용사이므로 좋은 소식을 가져오리라" 고 확신했다(42절). 찬탈자들은 성공하리라는 희망을 안고 스스로에게 아첨했다. 그들은 평소 자기들의 조건이 아주 난처하게 되어도 조금도 겁을 내지 않았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악행을 하는 자들이 어떻게 좋은 소식 얻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는 없었다. 제사장의 아들이 여기서 아도니야에게 그랬듯이, 제일 귀한 자가 제일 악한 소식을 그들에게 가져오고야 말 것이다(43절). "진실로, 내가 가져와야 할 제일 좋은 소식은 솔로몬이 왕이 되었다는 것이요, 따라서 당신의 교만은 모두 분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들에게 매우 자세히 말해 주었다.
1. 지극히 엄숙하게 "솔로몬이 왕이 되었고" (44, 45절), 이제는 "왕좌에 앉아 있다" (46절)고 했다. 아도니야는 자기가 솔로몬보다 먼저 왕좌에 나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작 솔로몬은 그에 비해 너무나도 빨랐다.2. 또 솔로몬은 너무나도 백성들이 기뻐하는 가운데 왕이 되었기 때문에, 이미 되어진 그 일은 다시는 허물어지지 않을 것만 같다고 했다.
(1) 그들은 자기들의 기쁨을 환호로서 입증했다(45절).
(2) 궁궐이 기뻐했다. 즉 왕의 신복들은 이 때를 당하여 그를 둘러싸서 송축하는 소리를 질렀다(47절). 우리는 여기서 그들이 송축하는 말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다윗왕에게 축복을 하고 공공복지를 위한 사려깊은 조치를 칭찬하고, 그의 집권하에서 누리는 행복을 예찬하고 그의 병 회복을 기원했다. 그들은 또 솔로몬을 위해서도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그의 부친의 이름보다 더 크게 해 주시고, 그 부친이 견고하게 닦은 기반이 더 잘 되게 해 주기를 기원했다. 어린이가 거인의 어깨 위에 있으면 거인 자신보다 더 높은 것이다.
(3) 다윗왕 자신도 기뻐했다. 그는 침상에서 몸을 굽혔는데 그것은 그의 신복들의 송축에 답을 표하기 위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송축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함이었다(48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는 이스라엘 하나님으로서 이스라엘의 선을 위하여 이 일을 좋게 매듭지어 주셨으니, 그것을 내 눈으로 목도하게 하셨도다." 착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세상을 하직하려 할 때에, 자기들의 가족이 잘 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 다시 없는 기쁨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Ⅱ. 아도니야의 기도는 효과적으로 분쇄되었다. 그 낭패로 인하여 아도니야 일파의 무모한 일은 수포로 돌아갔고, 그 일파는 분산 되었으며, 급기야 각자는 자기 안전을 구하여 각기 갈 길을 찾게 되었다. "악인의 승리는 짧다."
그들은 기반이 없어 곧 무너지고 깨어질 누각을 공중에 세웠다. 그들은 반역죄를 기도하는 동안, 그 사건에 말려들까 봐 각자 자기의 길을 서둘렀다.
Ⅲ. 아도니야 자신이 빠진 공포와 그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취한 조처를 보자. 그는 지금까지 높이 앉았던 것에 반비례하여 그만큼 비참한 구렁에 빠졌다(42, 50절). 그는 솔로몬이 자기의 귀빈에 합당치 않다고 멸시했으나(10절) 지금은 그를 자기의 심판자로 두려워했다. 그는 솔로몬을 인하여 두려워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을 반대하는 자는 머지 않아 그의 앞에서 벌벌 떨게 될 것이며, 공연히 그의 진노에서 피할 바위와 산을 찾게 될 것이다.
그는 제단뿔을 굳게 잡았는데, 이것은 언제나 지성소 또는 피난처(출 21:14)로 간주되어 왔다. 그는 감히 재판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 이외의 다른 수단에는 의지할 수 없음을 알고, 자기 자신을 왕의 처분에 맡겼다. 그 하나님의 자비란 제단 위에 바쳐진 희생 제물의 제도, 그 제물의 용납 및 그에 따른 속죄 속에 나타나 있다. 아마도 아도니야는 전부터 제단 섬기기를 경홀히 여겼던 것 같으나, 지금은 그 제단의 보호를 간청하고 있다. 태평한 날에 위대한 구원을 부인하는 자들도, 여호와의 진노에 잡힌 바 되며 그리스도와 그의 공로를 입게 되기를 바라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때가 너무 늦어지면, "제단의 뿔을 잡게 될" 것이다.
Ⅳ. 솔로몬의 자비를 구하는 아도니야의 겸손한 언사를 보자. 솔로몬의 소식을 전해 준 사람들을 통하여 아도니야는 자기 생명을 구해 달라고 탄원을 전했다(51절). 즉 "솔로몬왕이 자기 종을 죽이지 않겠다고 나에게 맹세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했다. 그는 솔로몬을 자기의 군왕으로, 자기 자신은 신복으로 자인했다. 자신을 정당화하기는커녕 "자기의 심판자에게 간구했다." 이는 그에게 있어 너무나도 큰 변화였다. 아침에 왕관을 잡은 자가 밤이 오기 전에 자기 생명을 애걸하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 아도니야가 이제는 벌벌 떨고 있다. 그는 솔로몬이 자기를 죽이지 않겠다는 맹세로 약속하지 않는 이상 무사하리라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Ⅴ. 솔로몬이 아도니야에게 대해 말한 명령을 보자. 그는 아도니야에게 선한 행위를 하라고 명했다(52, 53절). 그는 아도니야가 자기 형이며, 더구나 이번 일이 첫 번째 범행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마 그는 아도니야가 자기 과오를 깨닫고 있으며 반역 행위를 고집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 평화적이고도 신실한 신하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에 그가 앞으로 잘만 행동하기만 하면 지나간 일은 용서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에 그가 모반심을 품고 있다면 그의 죄는 그를 고발하는 것으로 기억될 것이며 그의(지금 법의 말하는) 전과를 다시 환기시켜 형벌이 집행될 것이다.
이렇게 다윗의 아들(예수)은 반역자들을 자비롭게 받아들인다. 만일 그들이 돌아가 충성하고, 그들의 주권자에게 신실하면, 그들이 지은 이전의 죄가 그들에게 불리하게 되지 않을 것이나, 만일 그들이 계속 이 세상과 육신의 이익을 추구한다면, 이는 그들의 파멸이 될 것이다.
아도니야에게 사람이 보내졌다. 그래서 어떤 마음인지를 물었다. 그런 그는 기꺼이 복종하겠다는 대답을 했으므로, 집으로 돌아가 거기서 은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솔로몬이 그의 생명뿐만 아니라 재산까지도 구해 주었다. 이리하여 "그의 왕위는 자비심에 의하여" 견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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