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하 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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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기브온 사람들의 복수(사무엘 하 21:1-9)

여기에서 우리는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에게 오래 전에 행했던 부당한 일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다.

Ⅰ. 그것은 사울의 통치역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요,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추측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기브온 사람들은 아모리 사람들의 남은 자다(2절). 하나의 책략으로 이스라엘의 평화를 이룩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안전을 위해 여호수아가 그들과 신앙으로 언약을 맺었다. 사울은 아모리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 주었으나 그들의 토지를 빼앗고 자유를 박탈하고 그들의 신분을 종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여호수아 9장 23절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잃은 토지와 자유를 회복하려 하지도 않고 그들의 봉사에도 거부하지 않으므로 모든 언약의 일부분도 어기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영광을 구실 삼아 사울은 많은 사람을 죽였고 그 백성을 근절시키려 하였다. 고로 그들은 아무도 자기 본토를 말하는 자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조들보다 의로웠고 공의를 위해 더욱 열심히 있었다. 사울은 아마 신성한 언약도 폐지할 수 있고 어떤 행위도 무시할 수 있는 왕으로서의 특권을 가지고 이런 일을 계획했던 것이다. 그는 기브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혹사하면서 아말렉 사람에게는 관대하게 속죄해 주었다. 그가 신접한 사람들을 쫓아낼 때(삼상 28:3 참조), 기브온 사람들을 마구 죽였다. 아마 그들 중에는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제사장들이 학살당할 때 그들도 함께 죽었다. 순진한 자의 피를 흘릴 뿐만 아니라 나라가 그들을 보호해야 할 신성한 법을 교란시키는 것은 대단히 무서운 죄를 짓는 일이다. 사울의 집이 왜 망했는가를 보라. 그것은 피를 많이 흘린 집이기 때문이다.

Ⅱ. 이스라엘 나라는 오래 전에 사울이 지은 죄로 인하여 무서운 기근으로 징계를 받았다.

1.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광스런 나라 다윗의 지배를 받는 비옥한 땅 이스라엘에 지독한 기근이 왔다. 삼 년 동안 한발이 계속되어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다. 한 해만 추수를 못해도 이듬해 궁핍하게 되는 법인데 3년이나 추수를 못했으니 이것은 지독한 천벌이 아닐 수 없다. 지혜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외칠 것이고 부요를 남용했던 죄를 회개하라고 외칠 것이다.

2. 다윗은 기근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비록 그는 일개 선지자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자기가 정한 길이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일단 결정 했을 때는 논쟁의 여지가 없이 "주여 당신의 길을 내게 보이소서" 라고 부르짖어야 한다. 다윗이 즉시 하나님과 상담하지 않고 3년씩이나 지체한 것은 그것이 어떤 특정죄로 정해진 벌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리 선량한 사람도 자주 자기 의무를 이행하는데 지체하고 태만할 때가 있다. 우리는 언제나 무지해서 잘못을 저지르고 항상 자신을 살피고 경계하는 일을 게을리 하기 때문이다.

3. 다윗은 지체했어도 하나님은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책망 받을 일을 하면 즉시 대가를 지급 받게 된다. 전 세대 사람의 죄 때문에 이 세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나님은 때때로 아비의 죄를 자식에게서 찾으시고 그 심판을 무겁게 내리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매사를 기억하신다. 하나님의 심판의 연기는 우리를 무사하게 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면 핑계할 자료가 없다. mullum tempus occurrit Deo-즉 하나님 좋은대로 심판하신다.

Ⅲ. 하나님의 진노로 사울의 집이 징계를 받았다. 그것은 그의 죄 때문이었다.

1.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에게 저질렀던 잘못에 대하여 그들이 만족할 만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3절). 그러나 그들은 침묵을 지켰으며, 불평자들로 다윗 왕국을 교란시키려고도 하지 않았다. 결국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말하지 않으므로 내가 듣지 못했다" (시 38:14, 15)라고 말했다. 그들의 인내를 명예스럽게 보상하기 위해 그들의 처지대로 판결되었다. 그들의 욕구를 채우도록 그들에게 공백기간을 준 것이다. "너희가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 (4절).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3절). 어느 가정이나 국가가 기도하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대적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므로 "망하게 된 자들의 복을 만회하기 위해 보상의 비용을 잘 수여했다" (욥 29:13). 너희가 오해하고 있는 나의 종 욥은 너희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와 그 후에야 화목하리라. 사람들은 가난한 자와 멸시받는 자의 기도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2. 그들은 사울의 자손 7인을 죽이겠다고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다윗은 그들의 요구를 허락했다.

(1) 그들의 요구는 금이나 은이 아니었다(4절). 돈으로는 피 값을 치르기에 너무나 부족하다.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는 땅은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 (민 35:33). 옛 법에 이르기를 피는 피를 찾는다고 했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 (창 9:6), 생명보다 돈을 더 가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부정한 것을 위하여 친척의 피를 팔고 은과 금을 취할 것이다. 기브온 사람들은 지금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날 정정당당한 기회를 얻었다. "사람이 그 남종의 한 눈이나 여종의 눈을 쳐서 상하면 그 눈 대신 그를 놓아 줄 것이며" (출 21:26), 이런 공법에 따라 악을 그들에게 행한 대로 보상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주장하지 않았다. 비록 상대편에서 법을 어겼을지라도 그들은 어기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느디님이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이라 믿었다. 그들은 종살이로 봉사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은 것 같다.

(2) 그들은 사울의 가족만 죽이려 했다. 그가 그들에게 악을 행했으니 그 대가로 그 자손에게 보복하려 했다. 우리는 흔히 부모가 진 빚을 상속받는다. 그러나 생명에 관해서만은 이런 원리로 확대해서는 안 된다. "아비는 그 자식들을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비를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다.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신 24:16). 기브온 사람들의 이런 경우는 전연 독특한 경우이다. 하나님이 직접 기브온 사람들의 마음에 이런 요구를 하도록 하셨다. 그는 행한 대로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이다(14절). 그의 심판은 사람들의 판단을 초월한다. 조상의 죄를 피하라. 특히 어린 자녀들을 위하여 잔인한 죄, 박해하는 죄를 피하라. 그들이 무덤에서 하나님의 손을 들어 보복할 것이다. 범죄와 저주는 가정에 불행을 수반한다. 사울의 후손은 그의 전철을 밟았던 것 같다. 비운은 피 흘린 집을 방문하기 때문이다. 피 흘리는 것이 그들의 가정의 정신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죄를 그들도 저질렀던 것이다.

(3) 그들은 이런 처참한 처형을 다윗에게 위임하려 하지 않았다. "당신은 우리를 위해서 어떠한 사람도 죽일 수 없다" (4절). 그러나 "우리가 저희를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겠나이다" (6절). 다윗이나 그의 집에는 어떤 어려움도 부끄러움도 없게 하려 했다. 옛 법에 의하면 살인자에게 내려진 심판을 거절한다면 탄원하는 자의 가족들이 그를 처형할 것이라고 했다.

(4) 그들은 사울이나 그의 가족에 대해서 악의를 버리지 않았고 때를 계승하면서 원한을 품었던 것이다.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과 그의 가족에게 고통을 주어 괴로움 당하는 것을 보기를 원했다. "우리가 저희를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겠나이다" (6절). 그들은 보복심을 극대화하려는 것이 아니요, 그들의 명령을 위함도 아니며 대중의 선을 위해서요, 그들의 정의감 때문이었다.

(5) 그들은 처형할 사람 선택권을 다윗에게 맡겼다. 다윗은 요나단과 서로 맹세한 것이 있으므로 므비보셋을 아끼고(7절) 사울의 처첩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두 아들과 그의 딸 메랍이 아드리엘에게 나은 다섯 아들을 잡아 기브온 사람에게 넘겨 주었다. 그러나 그의 딸 미갈은 살려 두었다(8절). 사울은 다윗의 감정을 자극할 계획으로 다윗에게 주기로 약속했던 딸 메랍을 아드리엘에게 줌으로써 사울은 다윗을 배신했다. 여기서 사울의 그 배신 행위가 보복을 받는 것이었다. 홀 감독은 이 일을 가리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신임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매우 위험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만일 기브온 사람들이 온유함으로 그들의 죄를 너그러이 경감시켜 주었다면 그들의 하나님이 비록 오래 걸릴지라도 가혹한 형벌을 가하지 않으나 그대로 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6) 그들의 처형 집행 방법과 때와 장소는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드리는 장엄한 번제였다.

[1] 그들은 목매어 달렸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표시로써 저주 받은 자로서 처형되었다. 율법에 이르기를 "목매달려 죽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 라고 했다(신 21:23 참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3). 그리스도는 우리 때문에 저주를 받았고 우리 죄를 완전케 하기 위해 죽었고 하나님의 진노를 바꾸기 위해 죽으신 이유는 이런 수치스러운 죽음에 복종자가 된 것이다.

[2] 그들은 사울의 자손들을 기브아에서 달려 죽게 했다(6절).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그의 죄 때문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사울의 가문에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그들의 집 앞에서 그들을 달려 죽게 했다. 이로써 하나님은 제사장들과 그들의 가족을 죽인 피 값을 찾기 위해 사울의 멸족을 성취시켰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행한 대로 심문하신다는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함이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시 9:12). 비록 오래된 언약이요 가나안 사람들이 맺은 언약이기는 하지만 신성한 언약을 거스리고 피 흘렸기 때문에 기브온 사람들이 피 값을 찾으려 했다. 언약을 멸시하고 계명을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모독한 자들의 머리 위에 보상한다. "그가 이미 손을 내밀어 언약하였거늘 맹서를 업신여겨 언약을 배반하고 이 모든 일을 행하였으니 피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가 내 맹서를 업신여기고 내 언약을 배반하였은 즉 내가 그 죄를 그 머리에 돌리되" (겔 17:18, 19), 그래서 하나님은 인생에게 가난과 부유가 서로 만나도록 하셨다. 평범한 하인에 불과한 기브온 사람들의 피 값을 찾기 위해 왕자의 피까지 뿌려져야만 했다. 천한 인간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피를 흘려야 했다(역자 주).

[3] 하나님의 진노를 막기 위한 번제로써 "곡식 베는 처음 날 곧 보리베기 시작하는데 그들을 죽게 했다" (9, 10절). 우리의 정욕과 부패된 마음은 고행을 당하거나 십자가에 못박는 길밖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달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청산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할 수 없다. 공익을 위하여 필요로 하는 것은 가혹하다고 불평을 해서는 안 된다. 피 흘린 사울의 가문에서 7 사람이나 달려 죽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굶어죽는 것보다는 훨씬 유익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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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후손의 죽음(사무엘 하 21:10-14)

우리는 본 절에서 사울의 후손들의 죽음에 대해서 다루게 된다.

Ⅰ. 사울의 자손들은 나무에 달렸을 뿐만 아니라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시체는 재판이 끝날 때까지 나무에 달려 노출되어 있어야 했다. 그들의 시체는 땅에 비를 내리시는 분에 의해서 처리되게 했다. 그래서 불로 단번에 살라버리는 것도 아니요 바람에 의하여 서서히 처리되도록 처참한 희생자로서의 죽음이었다. 그들은 추방자로서의 죽음을 당했으며 저주받은 자처럼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불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구세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죄를 지셨을 때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저주 받으셨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 21:23). 이런 율법이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유태의 율법학자는 자기 생각으로는 이 구절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수치스러운 것이므로 삭제해 버리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한 경우이다. 그런 율법 때문에 낙심될 것까지는 없는 일이다. 나무에 달려 죽은 자, 저주받은 자, 범죄자들은 이런 방법으로 처형해야만 했다. 이것은 그들이 희생을 당했기 때문에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만 했다. 국민신앙을 혼란시킨 죄 이상의 죄로 인하여 이런 심판을 받았다. "우리가 만물의 찌꺼기가 되어 세상의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고전 4:9-13 참조).

Ⅱ. 그들의 시체는 리스바에서 발각되었으니 리스바는 사울에게서 두 아들을 낳았다(10절). 두 아들의 시체를, 늙어 노년에 오직 그에게서 위로받고 생계를 공급해 주는 그들의 사체를 보는 것은 리스바에게는 큰 슬픔이었다. 또 그의 죽음이 너무도 처참해 있었다. 아무도 그의 슬픔을 위로할 자도 없었다. 그녀는 그 시체를 매장하려 하지 않고 보살피려고 했다. 그녀는 하나님이 비를 내리실 때까지 그 시체를 나무에 달아 두도록 판결한 재판을 항의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들의 시체를 유기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참고 복종했다 .굵은 삼베천으로 교수대 근처에 천막을 치고 먹이를 찾는 짐승들과 새들을 쫓으면서 그의 종들과 친구들과 함께 그 시체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때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나 생각해 보자.

1. 그녀는 선한 뜻도 없이 상주들처럼 큰 슬픔에 젖어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극단의 위기에 빠지게 되므로 우리는 슬픔을 가라앉히고 기분을 전환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무슨 이유로 우리는 흔히 슬픈 일에다 우리의 마음을 굳히려 하는지 모르겠다.

2. 그녀는 자기의 사랑을 증거하려 했다. 그는 자기 두 아들이 죽은 것은 그들이 죄 때문이 아니므로 배반자 불량아가 아님을 세상에 알리려 했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잠 30:17). 만약 그가 이런 경우라면 그녀는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고난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아버지의 죄 때문에 죽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녀는 그들의 시체 앞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죄 값이 흉악범처럼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탄식하며 유감스럽게 죽임을 당했다.

Ⅲ. 사울과 요나단의 뼈가 묻혀 있는 가족 묘지에 그들의 시체를 장엄하게 매장했다. 다윗은 리스바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불쾌하여 가문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멀리서 그 후손의 뼈를 한곳으로 옮기게 했다. 이 일에 대하여 아무도 혐오를 느끼는 이도 없었고 그런 재앙의 날을 기억하려 하지도 않았다. 공익을 위해 당연한 일이었다.

1. 야베스 길르앗 사람의 묘지로부터 사울과 요나단의 뼈를 옮기려 생각하던 다윗은 그들의 뼈도 혼자서 슬쩍 어떤 나무 밑에 매장했다. "모든 장사가 일어나 밤새도록 가서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취하여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와서 거기서 불 사르고 그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나무 아래 장사하고 7일을 금식하였더라" (삼상 31:12, 13). 비록 사울의 방패는 기름부음 받지 아니한 사람처럼 골짜기에 버려졌지만 그러나 그의 티끌은 보통 사람의 무덤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도록 할 것이다. 인류는 특히 위인들의 뼈를 존경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었으며 무슨 일을 했는가를 생각하고 존경해야 한다.

2. 나무에 달려 죽은 뼈와 함께 매장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저주받은 자 취급을 면하려고였다. 그 후에야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게 되기 때문이다(13, 14절). 나무에 달려 있는 동안에 하늘에서 비를 땅에 내리시면 그것은 그들을 나무에 오랫동안 달아 두지 말라는 뜻으로 그 시체를 나무에서 내린 후부터는 그 땅에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것이다. 땅에서 공의가 실현되면 하늘에서도 원한의 보복이 끝이 난다. 나무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도 우리를 위해 잘못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우리의 잘못 때문에 그처럼 끔찍한 저주를 당하셨으므로 하나님의 노가 풀려서 우리를 속량하셨다. 이것은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행 13:29). 즉 그들을 나무에서 내려 무덤에 장사지낸 것은 하나님의 수락의 표시요 완전한 번제의 표시로 기록된 말씀을 이루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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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셋을 물리침(사무엘 하 21:15-22)

다윗의 통치말엽에 일어났던 블레셋 사람들과의 투쟁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서 다루었다. 다윗은 비록 거인들을 단번에 정복했으나 많은 용사들을 이끌어 내지도 못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평화를 파괴하고 침략하는 등 결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Ⅰ. 다윗 자신이 장대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과 교전을 하게 되었다. "블레셋 사람이 다시 이스라엘을 치거늘" (15절) 이스라엘 하나님의 원수들은 쉬지 않고 도전해 왔다. 다윗은 비록 늙었어도 은퇴할 생각은 전연 없었고 블레셋 전쟁에 나가서 접전에 참가했다. 그는 노쇄하였으나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한 것이라면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이 접전에서 우리가 배울 것이 있다.

1. 위험한 재난 중에서도 젊었을 때와 같이 전투의 피로를 이겨냈다. 그의 의지는 언제나 선하고 무엇이든 해 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희망에 넘쳐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는 속일 수가 없었다. 조금만 수고를 해도 곧 피곤해지는 것이었다. 그의 몸은 그의 마음을 따라가지 못했다. 블레셋의 투사는 이스라엘의 용장 다윗이 늙어 힘이 쇄잔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생각을 전복시켰다. 하나님의 백성의 적은 언제나 이스비브놉처럼 강했고 음흉하므로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주님과 함께 싸우는 성도 앞에는 힘도 없고 목적도 없고 확신도 없었다.

2. 아비새에 의해 다윗이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다(17절). 여기서 우리는 왕을 위하여 충성을 다한 용감한 아비새를 본받아야 한다. 왕의 생명을 구출하기 위하여 그는 모험을 했다. 비상수단으로 그를 구출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섭리였다. 어떤 투사도 이런 역경을 당하면 도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비새가 다윗을 구출할 때 그의 충성심을 보여 주었다. 그 때에 불레셋 사람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다윗이 죽임을 당할 뻔했다. 다윗은 노쇄하여 약했으나 도피하지 않고 자기 위치를 담대하게 지켰다. 그럴 때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그를 도와 주셨다. "장대한 자의 소생이 다윗의 손과 그 신복의 손에 다 죽었더라" (22절). 기록된 대로 되었다. 하나님은 그가 위급할 때 도와 주셨다. 손아래 사람이었고 자기만 못한 사람이었지만 쾌히 수락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곤경 중에 있을 때는 천사로 도와 주었다. 영력이 강한 성자들도 때로는 영력이 떨어질 때가 있었다. 사탄이 아무리 교묘하게 공격해도 자기 위치를 지키며 사탄의 공격을 대항하는 자는 항상 도와주신다. 그래서 마침내는 사탄을 정복하게 된다.

3. 다윗은 더 이상 적전지에 나타나지 않기를 그의 신복들은 원했다. "우리가 절반이나 죽을지라도 우리에게 주목하지 않을 것이요 왕은 우리의 만 명보다 중하십니다" (18:3).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라고 했다. 다윗같이 존귀한 사람의 생명은 부하들의 생명과 국가의 운명을 위해 갑절의 관심을 가져야만 했다.

Ⅱ. 장대한 적의 잔당은 다윗의 신복들의 손에 의하여 패하고 말았다.

1. 장대한 자의 아들 삽은 다윗의 신복 가운데 한 사람인 십브개가 죽였다(18절 참조). 다윗은 군인 중에 큰 용사를 택했으니 그 중에 십브개도 포함되었다(대상 11:29 참조).

2. 또 다른 거인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는 베들레헴 사람 도도의 아들 엘하난이 죽였다(23:24 참조).

3. 또 다른 거인의 후손 즉 매 손마다 6개와 매 발마다 6개 달린 24개의 손가락 발가락을 가진 장대한 사람은 시므이의 아들 요나단이 죽였다. 시므이는 요나답이라 불리우는 아들 하나뿐이다(삼하 13:3 참조). 같은 이름을 여기서 요나단으로 기록된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기록된 것은 본 장뿐이다. 전자는 음흉한 자로 묘사되었으나 후자는 용감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거인들은 오랫동안 두려워했던 아낙 자손들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멸망되고 말았다. 몇 가지 생각해 보자.

(1) 자기 힘을 자랑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다. 다윗의 신복은 그들보다 강하지도 못했고 장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어 거인을 정복했고 남을 다스릴 수 있었다. 하나님은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2) 가련한 자를 살육하려는 용사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다. "그들이 할례받지 못한 자 중에 이미 엎드러진 용사와 함께 누운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이 용사들은 다 병기를 가지고 음부에 내려 자기의 칼을 베개 하였으니 그 백골이 자기 죄악을 졌음이여 생존 세상에서 용사의 두려움이 있던 자로다(겔 32:27).

(3) 가장 강한 대적은 흔히 마지막 싸움에서 운명이 결정된다. 다윗은 그의 명예를 걸고 한 거인과 싸워 마침내 네 사람을 모두 정복했다. 죽음이란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마지막 적이요 아낙 자손 같은 숙적이다. 그러나 다윗을 통해 그들의 대적을 물리치고 승리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승리가 주어질 것이다. 우리는 마침내 그 죽음을 정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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