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에 대한 요압의 비난(사무엘 하 19:1-8)
전령들이 마하나임 궁정에 압살롬의 패배와 죽음의 소식을 전하자 요압과 승리한 군대가 왕의 승리를 찬양하고 그의 명령을 받으려고 따라왔다. 여기서 우리가 탐구할 바는 다음과 같다.
Ⅰ. 요압의 병사들이 압살롬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왕을 보았을 때 얼마나 실망이 컸을까? 이는 요압 군대들의 훌륭한 업적에 대해서 다윗왕이 기쁨과 감사로 맞이해 주리라 기대했으나 오히려 그들의 행한 일에 대해서 불쾌한 감정의 표시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 사실이 요압에게 전해졌다(1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슬퍼한다는 소식이 군대 안에 퍼졌다. 백성들은 그의 지도자들이 말하고 행하는 바에 특별한 유의를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를 주시하는 눈이 많고 우리의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말과 행동을 더욱 지혜롭게 하고 우리의 감정을 더욱 엄격히 통제함이 필요하다. 그들이 성에 이르렀을 때 왕이 얼굴을 가리우고 크게 슬퍼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4절). 그는 얼굴을 가리우고 아무 것도 바라보지 않으며 장군들이 그에게 왔으나 보지도 아니했다.
1. 다윗은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불합리한 감정의 폭군에 끌려 그의 용기에 대한 평판이 흐려진다는 사실과 국민들의 관심을 생각했더라면 숨겨야만 했던 격정을 어찌 폭로했는가? 하는 것을 그들이 알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그의 슬픔은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 큰 소리로 부르되 오! 나의 아들 압살롬아! 나의 종들은 평안히 돌아왔건만 나의 아들은 어디 있는가. 그는 죄로 인해 죽었도다. 영원히 내 아들을 잃었도다. 내 영혼은 이런 죄인들과 자리를 같이 할 수 없으니 나는 어찌할까 오! 압살롬 내 아들 내 아들아!2.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군대가 그에게 올 때까지 복받치는 감정을 어떻게 제어하고 있었는가? 한 두 시간의 격정은 돌출구를 열어놓아 해결할 수 있으나 마치 야곱이 요셉처럼 선한 아들을 위해 울었던 것같이 불량한 아들 압살롬을 위해 크게 슬퍼하며 승리의 기쁨을 손상시키는 일은 대단히 슬기롭지 못하며 무가치한 것이었다. 왕이 행하는 모든 일은 백성을 기쁘게 하는 것이므로 그들은 왕을 비난하기는 원치는 않았으나(3:36) 왕이 슬퍼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크나큰 모욕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의 승리는 슬픔이 되었다(2절). 그들은 부끄러운 사람처럼 몰래 성으로 들어갔다(3절). 그들의 군왕을 찬양하는 일에 있어서 왕이 그토록 괴로워하는 것을 안 무리들은 기뻐할 수 없었으며 그들의 기쁨을 숨겨야만 하는 일도 쉬운 것이 아니었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이와 같은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
Ⅱ. 요압은 이러한 심각한 위기 가운데서 무분별하게 처신하는 다윗을 얼마나 명백하고도 통렬하게 비난했는가? 다윗에게 지금보다 부하들의 충정이 필요한 때는 없다. 그들의 충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때는 지금보다 더 필요한 때가 없었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윗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일이요, 그에게 가까이 하는 친구들에게 가장 나쁜 인상을 주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요압은 다윗왕을 비난하였으나(5-7절) 그는 많은 이유를 들어 다윗왕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는 왕에게 마땅히 지녀야 할 존경과 복종심으로 하지 아니하였다. 이는 "당신은 악한 자요" 라고 왕에게 말한 정도의 의미가 된다. 이런 경우는 우리들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확히 해당되는 것으로 그들이 행한 과오에 대해 질책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무례와 오만으로 행해져서는 안 된다. 다윗왕은 진실로 경계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요압은 다윗을 질책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만일 윗사람이 어리석은 일을 행했을 경우 그것을 이상히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이 사실을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퉁명스럽게 이야기하더라도 언짢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1. 요압은 다윗의 군인들의 업적을 과장했다. "이날에 그들이 당신의 생명을 구원했으니 마땅히 그들의 공로를 인정할 만하며 만일 그렇지 못할 때에 마땅히 이에 대한 항변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 고 말했다. 다윗의 눈물 때문에 영광 받는 압살롬, 지금도 다윗이 눈물 때문에 그를 보호하려는 이들과 그를 사랑하는 자들로 멸시받고 그의 눈물 때문에 자신이 망하고 가정이 망하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큰 악이 좋은 장점이 되어 왕을 모욕으로부터 일어나게 했다.2. 요압은 의기소침한 다윗을 더욱 악화시켰다. "당신은 충신들을 부끄럽게 하셨나이다" 라고 말했다. 당신은 당신의 생명만 귀하고 저희들의 생명은 천한 것처럼 행하셨나이다. 그리고 당신은 버릇없고 나라와 조국을 배신한 잘 죽어버린 배도자를 당신의 지혜있는 모사들과 용감한 장군들과 충신들 앞에서 사랑하셨나이다. 당신의 원수는 사랑하고 당신의 친구를 미워함이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가? 라고 말했다.
3. 요압은 다윗이 참모회에 곧 참여하여 그들을 웃게 하고 그들의 승리를 축하하고 그들의 수고에 대해 감사하라고 권유했다. 할 일을 잘 완수했을 때는 지휘관이라도 감사하다는 말듣기를 원하는 법이다.
4. 요압은 다윗에게 만일 일러 준 대로 행치 아니하면 제 2의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은혜를 모르는 왕을 섬기느니보다는 차라리 그를 떠나 반란군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 낫다고 암시했다(이런 고백은 백성에게 관심이 있는 요압 자신의 고백이다). "당신 한 사람을 위해 지체할 수 없다. 내가 가면 그들 모두 떠날 것이다. 지금은 당신이 울고만 있을 때가 아니요, 그러나 만일 당신이 고집한다면 내가 당신에게 슬퍼해야 할 정말로 더 쓰라린 눈물을 흘러야 할 것을 제공하겠다" (요세푸스의 말).
Ⅲ. 신중하고 온화하게 다윗을 설득시켰다. 다윗은 사람들 앞에 슬퍼보이지 않게 하려고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슬픈 기색없이 성문 앞 대중 앞에 나타났다. 백성들이 그에게 나와 그와 온 국민의 안전을 축하했다. 손아래 사람에 의하여 충고를 받을 때 볼상사납기는 하지만 잘못을 깨닫거든 무조건 수락해야 한다.
본토로 돌아온 다윗(사무엘 하 19:9-15)
다윗이 압살롬의 패잔병들이 수도권 회복을 위하여 급히 예루살렘으로 행진하는 것을 보고 폭도들의 혼란을 일으켜 재결합을 하지 못하도록 곧 처리해 버리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무슨 이유로 그가 거기에 왔는지? 길르앗에 그와 함께 있는 개선군과는 함께 돌아올 수 없었는지? 물론 있었다. ① 그는 물론 정복자로서가 아니라 온 국민의 환영을 받으며 왕으로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백성들의 자유를 회복시켰다. 백성을 강압으로 수탈하거나 그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았다. ② 그가 환궁하는 데는 반대자도 없고 어떤 장애도 없을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그가 출발하기 전에 백성들이 그에게 감화를 준 것은 더욱 그를 기쁘게 했을 것이다. ③ 그는 도의상 야인으로 가고저 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군대의 지휘관으로서가 아니라 일반 예속된 군인으로서 돌아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는 백성들의 총애를 받을 만큼 선하고 지혜로운 왕이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공포를 주는 강한 왕이라는 것보다는 더 위대하고 훌륭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는 자기 가정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거기서 축하식을 가지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협정을 볼 수 있다.
Ⅰ. 이스라엘 10 지파의 모든 백성들이 변론했다(9, 10절). 다윗 왕을 데려오는 일에 대해서 백성들은 큰 논쟁거리가 되었다. 어떤 사람은 반대하기를 "그를 혼자만 오게 하든지 그가 지금 있는 곳에 머물게 하라" 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이에 대해 이유를 들어 열광적인 계획을 보이기도 했다.
1. 다윗은 자기들을 도와 적과 싸워 적을 물리쳤으며 자기들을 위해 봉사했으므로 이렇게 큰 은혜를 끼친 백성들로부터 추방생활을 계속하게 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공익을 위한 선행은 잠시 동안은 잊혀질 수 있어도 사람들의 마음이 바로잡히면 다시 기억될 것이다.2. 압살롬은 그들에게 실망을 주었다. "우리는 어리석게 우리를 다스릴 사람으로 병든 삼목의 가지를 택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압살롬이라면 질색이다. 그는 사라졌다. 우리도 함께 그와 같이 죽을 자리를 간신히 모면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왕을 모셔다가 전과 같이 충성을 다하자." 아마 이 말은 왕을 모셔오자 혹은 말자는 것이 논쟁의 초점이 아니라 그를 모셔오지 않은 것이 누구의 잘못이냐는 것이 모두 그들의 논쟁거리였다. 이런 경우는 언제나 있는 것처럼 사람은 모두 자기를 의롭게 생각하고 남을 비난하는 법이다. 백성들은 장로들에게 잘못이 있다 하고 장로들은 백성들에게, 이 지파는 저 지파에게 전가했다. 자극적인 선행을 서로 찬양하고 그렇지 못하면 비난을 서로 피해야 한다. 왜냐하면 공적인 봉사는 언제나 무지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듣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관습을 뜯어 고치거나 상처를 싸매는 등등의 일보다는 책망하기를 더 좋아한다.
Ⅱ. 유다 사람들이 다윗의 계획대로 먼저 왕을 영접했다. 오히려 다윗이 속한 지파 사람들이 그를 영접하는 데 서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다윗은 항상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유다 지파 외에 다른 지파들은 자기를 선대한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가장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이 가장 불친절한 위험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다윗은 그의 지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낼 때까지는 돌아오려고 하지 않았다. 유다 지파는 그의 입법자였다(시 60:7 참조). 그의 귀향 길은 더욱 뚜렸해졌다.
1. 다윗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을 유다 족속의 장로로 대우하고 그들로 왕을 자기 집으로 초빙할 것을 암시했다. 그것은 그 지파의 영광이 되기 때문이다(11, 12절). 이런 일을 수행함에는 백성들에게 큰 영향력도 있고 신중성이 있고 다윗의 뜻을 잘 따르는 이 두 제사장들보다 더 적당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유다 족속들은 부주의하고 무기력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일을 시키는 이도 없고 하는 이도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선한 일을 자발적으로 하는 사람은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들이 말없이 나태하게 계속 머물러 있다는 것이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이 압살롬과 관계를 가짐으로 다윗에게 큰 자극을 주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그의 은혜를 배신한 것을 앎으로 그의 왕위 환궁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들로부터 확실한 보증을 요구했다.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어늘" 정열적으로 자기를 불러 주지 않는가를 물었다. 온 이스라엘이 왕을 궁으로 도로 모셔오자 하는데 유다 족속은 어째서 가만히 있는가? 라고 책망을 했다. 어느 지파가 충성이 있고 용감한가 생각해 보자. 충성의 정도는 신분에 따라 다르고 혈통이나 친분에 따라 다른 것이다. 지위가 높은 자라고 의무에도 첫째가 되는 것은 아니다.2. 다윗은 압살롬의 장군이었던 아미사에게 특별히 환심을 얻으려고 했다. 그는 요압가 마찬가지로 그의 조카벌 되는 사람이었다(13절). 만약 그가 다윗을 위해 뜻을 비치기만 한다면 요압을 대신하여 그의 군대 장군으로 삼을 것을 약속했다. 그는 그를 친척으로 인정하고 그를 매우 좋아했다. 적이었던 사람과 친교해서 손해보는 일은 별로 없다. 아미사에게 다윗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위기에 대처해서 매우 좋은 처사였다. 그러나 다윗이 건방진 요압을 참을 수 없어 그 자리에 아미사를 지명했다. 아미사는 다윗의 계획을 방해하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게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윗의 이러한 처사는 현명한 처사라고 볼 수 없는 것은 이 일로 인해 아미사는 요압의 손에 죽었기 때문이다(20:10 참조).
3. 여기서 그는 목적을 달성했다. 그는 유다 사람들로 마음을 일제히 돌리게 하였다(14절). 이의없이 만장일치로 투표 결과 유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하나님의 섭리는 제사장들이 설득과 아마사의 관심을 통해 그들에게 이러한 결과를 가져왔다. 다윗은 이러한 환영을 받을 때까지 움직이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멀리 떨어진 요단(그들이 거기서 만남)으로 돌아왔다(1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마음의 왕좌에 그를 영접하고 모시는 사람들을 다스리신다. 주님을 먼저 마음으로 경배하고 그의 권능의 날에 즐거워하며 원수 중에서 다스리신다(시 10:2, 3 참조).
시므이를 용서함(사무엘 하 19:16-23)
여호수아 영도하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단강을 건넌 이후 지금까지 엄청난 사건들이 이 강을 건널 때마다 일어났다. 고통스러운 전투 중에서 다윗은 특별히 요단 땅에 왔을 때 하나님을 기억했다. "오직 저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시 62:6). 그는 환궁의 영광을 안고 이 강을 또 건너게 되었다. 다윗의 군인들이 이 강을 건너기 위해 숙박소를 마련했고 왕의 가족을 건네기 위하여 나룻배를 마련했다(18절). 나룻배를 어떤 이는 구조선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함선의 다리라고도 한다. 나룻배는 그에게 봉사하기에 편리하게 하려고 만든 것이다. 그가 싸울 때 야비하게 그를 학대했던 두 사람을 요단뚝에서 만났다.
Ⅰ. 시바를 만났다. 그는 정중한 말로 왕을 악이용 했다. 시바는 왕에게 그의 주인을 비난함으로 그의 재산을 할례받았다(16:4). 그는 고지식한 왕을 속여서 왕의 친구 요나단의 아들에게 매정하게 하도록 유도한 것은 다윗에게는 이보다 더 큰 악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왕을 만나려고 지금 그의 종들과 아들들을 수행하고 찾아왔다(17절). 그가 찾아 온 것은 왕의 총애를 받으려고였다. 또한 므비보셋이 자기의 오점을 드러냈으면 이를 벗어버리기 위해서였다(26절).
Ⅱ. 시므이를 만났다. 그는 불쾌한 말로 그를 학대하고 비난하고 저주했다(16:5). 만약 다윗이 패배했더라면 그는 계속 그를 무시했을 것이며, 그가 행한 것이 찬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윗이 지금 개선하여 왕좌에 회복되는 것을 알고 그와 평화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윗의 아들 예수를 지금 멸시하고 악용하는 자들은 그가 영광 중에 오실 때 그들이 화해하려고 할 것이나 이미 그 때는 늦을 것이다. 시므이는 왕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1. 그는 급히 유다 사람과 함께 도움이 될 만한 좋은 동료들을 데리고 왔다.2. 그는 베냐민 족속 중에 많은 사람들을 데려왔다. 그들 중에는 왕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총사령관과 지도자들이 1,000여명이나 되었다. 왕을 만나려는 관심 때문에 자발적으로 지원한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중에는 유다 지파를 제하고는 이러한 존경을 왕에게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친절했다.
3. 그는 서둘러서 기회를 잃지 않았다. 당신이 노중에 있을 때 속히 적과 손 잡으라.
(1) 죄인의 복종(18-20절). 그는 왕 앞에 참회자로서 애원자로서 엎드렸다. 그는 이로써 겸허를 나타내려 했다. 다윗의 모든 신하들 앞에 베냐민 지파인 그의 친구들 앞에 수 천명 자기 수하 사람 앞에 엎드렸다. 많은 사람 앞에서 저지른 죄이므로 많은 사람 앞에서 복종했다. 그는 그의 죄를 인정했다. "당신의 종인 내가 지은 죄를 아나이다." 이것으로 그는 괴로워했다. 그는 왕의 용서를 간청했다. 내가 심술궂게 행하였나이다. 당신의 종의 패역을 기억지 마소서. 그는 자기의 생명이 다윗 왕의 관대한 마음에 달렸음을 암시했다. 그는 요셉 지파(다윗의 치정초기에 이스보셋을 추종하여 유다 지파로부터 분리되었던 이스라엘 지파 중 하나임. 2:10 참조) 모든 사람들보다 가장 먼저 돌아온 것은 그의 충성심의 표현이었다. 그는 의무의 본보기로서 다른 사람들을 권유하고 왕의 온화한 성품을 대해 본 경험에 의하여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따르게 하려고 제일 먼저 왔다.
(2) 그에게 불리한 제안(21절).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인하여 죽어야 마땅치 아니한가?" 많은 사람 가운데 그를 본보기로 삼으라고 했다. 이러한 제안은 그가 저주했을 때 시므이를 죽이자고 했던 아비새의 제안이었다(16:9 참조). 다윗은 이런 일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의 사법권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이런 저주를 묵인하는가? 아비새는 그의 진실한 관심보다 다윗의 감정을 생각하고 이런 제안을 했다. 왕은 이런 시련에 대비해서 자신을 무장할 필요가 있었다.
(3) 왕의 명으로 면제됨(22, 23절). 다윗은 불쾌하게 아비새의 동의를 거절했다.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복수심으로 분노하거나 난폭하고 거친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과는 함께 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좋은 것이다. 그는 그의 상대로서 이런 기소자들을 방관했다. 그들은 친분이 있는 것처럼 했지만 그의 명예에 대한 의협심도 있었다. 옳지 않은 것으로 우리에게 충고하는 자들은 사실 사탄들이요 적수인 것이다.
[1] 그들은 그의 온화한 성품의 방해자들이었다. 그는 이 날이 바로 그의 왕국이 재건되고 이스라엘의 왕위가 회복되는 날인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의 영광의 날에 그를 용서해 주었다. 항복자를 용서하는 것은 왕의 특권이다. 먹이를 놓아두는 것은 사자를 배불리는 것이다(Satis est prostrass leioni). 그의 기쁨은 그를 용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찌푸둥한 일에 돌입하는 것을 막는 일은 매우 좋은 일이다. 기쁨의 날은 용서의 날일 것이다. 그의 죄 때문에 당했던 망명 생활에서 그의 왕국이 다시 회복 된 것은 하나님의 궁휼에 의해서다. 그래서 그는 시므이에게 긍휼을 베풀려고 했다. 암몬 사람들로 악행하게 한 자들을 혹독히 보복했다(12:31 참조).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자신이 당한 악행에는 묵인했다. 전자는 이스라엘 사람에 대한 전반적인 모욕이요 왕국과 왕관에 대한 침해였다. 그러나 후자는 단순한 자기 개인에 대한 모욕이었으므로 선한 사람들의 호의에 따라 그들을 쉽게 용서할 수 있었다.
[2] 그들은 그의 관심사에 방해자들이었다. 만일 그가 그를 저주했던 시므이를 죽였다면 그에 대해 실질로 전쟁을 일으키고 무장하고 나섰던 자들도 같은 운명에 처해졌을 것이다. 가혹한 행위는 정책을 수반하지 않는다. 왕위는 긍휼로 인하여 성취되었다. 이에 있어서 시므이가 사면되었고 맹세가 확정되었다. 그의 선한 행위는 적중되었지만 만일 그가 후에도 부정한 짓을 한다면 그는 박해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신중하고 온화함으로써 국가 정의 실현의 기념비를 위하여, 후일을 위하여 예비했다.
다윗이 므비보셋을 만남(사무엘 하 19:24-30)
다윗이 돌아오던 날은 추억의 날이었다. 그가 패주하던 일을 회상하며 이야기하는 날이다. 많은 이야기 가운데 시므이 사건과 므비보셋의 요청하던 일들이 그 자신에게 떠올랐다.
Ⅰ. 그가 무리 가운데 내려와서 왕을 만났다(24절). 그는 왕의 궁을 기뻐하며 환영의 뜻을 표했다. 왕의 망명 생활을 얼마나 슬퍼하며 지냈는가를 여기서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위업이 떠났을 때 므비보셋은 이 우울한 날 동안을 매우 침울하게 지냈다. 그는 수염도 깎지 않고 옷도 빨아 입지 않고 오직 나라의 재난과 왕의 고통을 생각하고 슬픔에 젖어 자신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 재난시에는 기쁨의 감정을 억제해야만 한다. 하나님이 슬퍼하시면 우리는 웃어야 할 때도 슬퍼할 때다.
Ⅱ. 좀처럼 기회를 가질 수 없었던 므비보셋은 왕이 예루살렘에 이르자 그 앞에 알현했다(25절). 어찌 한 가족으로서 망명길에 함께 하지 않고 뒤에 남아 있었느냐고 왕이 물었을 때 그는 왕에게 충분한 그의 입장을 설명했다.
1. 그는 그의 종 시바 때문이었다고 불평을 한다. 그는 종을 친구처럼 했으나 복선을 가진 적이었다. 첫째로 그는 왕을 따라가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그는 나귀에 안장을 준비하라는 주인의 명을 거스렸다(26절). 그는 자신이 절름발이이므로 도움없이는 스스로 할 수 없었다. 둘째로 그는 왕에게 자기가 정권을 약탈하려는 음모자라고 참소했다(27절). 선한 주인에 대한 얼마나 야비하고 악한 종의 폭력인가!2. 그는 그가 아버지(요나단) 때부터 받은 왕의 은혜를 고맙게 생각했다(28절). 그가 모반자로 몰렸을 때 왕은 그를 아들처럼 친구로서 대해 주었다. 당신은 한 식탁에서 먹는 사람 중에 당신의 종을 두지 않았는가. 시바의 언급은 참말 같지 않았다. 왜냐하면 므비보셋은 언제 그렇게 평안하게 또 그런 일을 할만큼 행복하게 살아 본 일도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높은 벼슬을 탐할만큼 어리석은 사람도 아니였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친절을 다해 준 다윗에게 손해를 끼칠 음모자처럼 그렇게 표리가 부동할 수 있었겠는가?
3. 그는 왕에게 기쁨을 제공했다. 나와 나의 재산에 대하여 당신의 좋은 대로 행하소서라고 자신의 선악의 분별력도 왕의 지혜만 의존했다. 그의 모든 주장을 포기하고 나의 주 왕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로소이다라고 했다. 내가 받은 분에 넘치는 친절을 어찌 더 이상 무엇을 왕께 구할 것인가? 왕이 고난 중에 있을 때 어째서 내가 그에게 불평을 했던가? 이러한 친절을 받으면서 왜 그것을 고통스럽게 생각했을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죽은 자들처럼 있었다. 그러면 그는 우리를 그의 식탁에 앉게 할 뿐만 아니라 먹을 것도 나누어 주신다. 우리가 고통 중에 빠지면 얼마나 불평을 했으며 또 하나님이 하신 일이 모든 것이 잘 된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얼마나 되겠는가?
Ⅲ. 다윗은 므비보셋의 재산을 압류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의 간교에 속아서 이를 책망하고 전에 거주하던 정착지를 주라고 했다.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29절). 내가 먼저 명한 대로 하라(9:10). 재산권은 네게 주지만 시바가 차지할 것인즉 그가 땅을 경작하고 그를 공개할 것이다. 그래서 므비보셋은 그가 있던 곳에 있고 시바는 그 주인에 대하여 거짓되고 악한 소식을 전한 것으로 책벌을 당하지 않았다. "재판장은 자세히 사실하여 그 증인이 위증인이라.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거든 그가 그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신 19:18, 19). 다윗은 이 율법에 따라 그를 많이 의심도 했고 사랑도 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평안을 주기 위해 용서해 주고 문제를 풀어 주었다.
Ⅳ. 므비보셋은 왕이 돌아온 것이 너무 기뻐서 그의 재산에 대한 모든 관심은 잊어버렸다(30절). "왕께서 궁에 평안히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저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왕의 총애를 받으며 그와 함께 살면 그 모든 것 다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선한 사람은 이스라엘의 평화와 다윗의 아들의 왕위가 완성되고 찬양받은 것을 보는 동안에는 자신의 손실과 낭패를 충분히 견딜 수 있다. 다윗이 평화 중에 있으니 므비보셋은 모든 것 다 잃어도 기쁘기 한이 없었다.
바실래에게 보상함(사무엘 하 19:31-39)
다윗은 이미 은혜를 입어서 그가 입었던 상처들이 관대한 사면으로 복귀하는데 승리를 거두었다. 그에게 보여 준 친절에 대한 다소의 보상을 얻는 것을 볼 수 있다. 길르앗 사람 바실래는 마하나임에서 가까운 로글림에 사는 귀족이다. 그 성읍의 상류층 귀족계급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고난 중에 있는 다윗에게 극진한 공궤를 다했다. 만일 압살롬이 승리했더라면 그의 충성심 때문에 고난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모든 것은 압살롬이 좌절됨으로써 아무 일도 없게 되었다.
Ⅰ. 바실래가 다윗을 가장 존경한 것은 그가 선한 사람이어서 뿐만 아니라 의로운 주권자이므로 존경을 했다. "왕이 마하나임에 유할 때에 왕을 공궤하였더라" (32절). 그는 매우 대범한 사람이라 하나님이 그에게 큰 부자가 되게 했다. 그 재산으로 선행을 하도록 큰 마음을 주었다. 큰 재산을 주신 것은 선을 행하라고 주신 것 이외에 다른 무엇이 또 있는가? 우리 마음에서 관대함을 격하시키거나 선량한 동정심을 억누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할 능력으로 친절을 베풀도록 하라고 주신 것이다. 바실래는 다윗이 자신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였지만 조금도 그것을 염려하지 않고 그를 요단까지 안내해 주었다(31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롬 13:7).
Ⅱ. 다윗이 바실래를 왕궁으로 초대했다. "너는 나와 함께 건너 가자" (33절)라고 그를 초대했다.
1. 그는 그와 동행해 주고 은혜를 입은 사람과 기쁨을 나누려고 그를 초대했다. 바실래는 매우 지혜롭고 선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큰 부자였다. 여기서 그는 위대한 사람으로 불리어지지는 않았으나 다윗에게 제공한 그의 공로는 그의 가진 것 전부였고 그의 인격 전체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2. 그는 그의 친절에 대한 보답을 하려고 그를 초대했다. 거룩한 성 수도 예루살렘에서 네가 나를 공궤한 것처럼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다윗은 바실래가 자기에게 베푼 은혜를 그대로 삼켜버리지 않았다. 그는 자기 좋은대로 함부로 행하는 어떤 왕들 같은 사람이 아니였다. 바실래가 베푸는 성의를 받고 사람으로 보답하려고 했다. 어려움 중에 있을 때 도와 준 사람들에게 특히 친구들에게 은혜를 보답하는 법을 언제나 배워야 한다.
Ⅲ. 그의 초대에 대한 바실래의 답변.
1. 그는 과분한 왕의 관대함에 감탄하여 자기의 공로는 감추고 왕의 업적을 확대했다. "왕께서 어찌하여 이 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 (36절). 종이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어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어떤 봉사도 왕의 영광을 위하여 했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에게 하늘 나라가 상속될 때 이 세상에서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한 대로 갚으신다. 봉사한 것과 상급이 엄청난 차이에 놀랄 것이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 주의 주되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마 25:37),2. 그는 초대를 사절했다. 그는 이처럼 후박한 초대를 사양하는 심정을 왕이 이해해 주기를 원했다. 그는 왕과 함께 있는 것을 행복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늙었으므로 특히 왕궁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전연 불가능했다.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삽관대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34절). 내가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으니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가 너무 늙었기 때문에 왕궁으로 전환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전연 멋을 모르는 사람에게 잘못 주는 것이요, 버리는 것이다. 모세 때도 있었고 바실래 때도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도 그렇다.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 90:10).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희 창조자를 기억하라" (전 12:1). 식욕을 잃으면 진수성찬도 맛이 없다. 노인의 귀에 음악을 들려 주는 것은 수심이 있는 사람에게 노래를 불러 주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러므로 어떻게 여인의 소리를 알아 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바실래의 기쁜 감정을 배워야 한다. 필요한 일만 하는 예절을 배우라. 나이 많은 바실래는 왕에게 도움은커녕 오히려 누를 끼칠까봐 염려했다. 선한 사람은 남에게 폐가 될 만한 곳에는 가지 않는 법이다.
(2) 노쇄기의 바실래는 긴 일생의 나그네 여행길을 회상하면서 세상을 떠날 것을 생각했다(37절). 노인이 되면 특별히 죽음에 관해 말을 많이 하게 된다. "청컨대 종을 돌려 보내소서. 내가 내 본성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 라고 바실래가 말했다. 나의 무덤은 준비되어 있으니 나의 안식처에 가서 쉬게 하소서라고 했다.
3. 그는 그의 아들 김함에게 가까이 대해 줄 것을 왕께 요청했다. 그를 데리고 가서 왕의 처분대로 해 주기를 바랬다. 김함에게 베푼 왕의 총애는 바실래에게 베푼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노인들은 자기가 젊었을 때 즐기던 것을 좋아하는 젊은이들을 싫어해선 안 된다. 은퇴할 때까지 그들을 제한해서도 안 된다. 바실래는 자기만 돌아가고 김함은 왕을 따라 가기를 원했다. 그것은 자기의 불행을 김함에게 물려 주고 싶지 않았으며 그를 크게 성장시키고 더욱 발전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Ⅳ. 다윗이 바실래에게 작별 인사를 하다.
1. 다윗은 바실래에게 입을 맞추고 위하여 복을 빈 후 그를 자기 성으로 돌려 보냈다(39절). 그는 바실래의 친절에 대해 보답하는 뜻에서 그를 늘 사모할 것과 그를 위해서 늘 기도할 것을 약속했다. 또한 "네가 내게 요구하는 것은 다 너를 위하여 시행하리라" (38절)라고 약속하고 작별했다.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있을까?2. 다윗은 김함을 데리고 떠난다. "내가 너에게 좋아하는 대로 저에게 베풀겠고" 라고 약속하고 떠났다. 경험 많고 호인인 은퇴자 바실래는 예루살렘성 안에서 살기보다는 예루살렘 가까운 촌에 안주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곳이 오랜 후에 우리가 읽기는 다윗성 베들레헴 가까운 곳이였다고 알려졌다. 그곳은 김함의 거주지로 불려졌고 그곳은 왕실 소유지였으나 그에게 분배되었거나 혹은 그의 소유가 몰수되었던 것이 아니라 다윗의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토지로 알려지고 있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충돌(사무엘 하 19:40-43)
다윗이 유다 백성들에 의해서만 호행(扈行)을 받으며 요단강을 건너왔다. 그러나 길갈까지 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나(장로들과 귀족들) 왕을 영접하러 와서 그의 손에 입을 맞추고 그가 돌아옴을 환영했다. 그러나 그들이 늦게 왔기 때문에 왕의 입성을 성대하게 환영할 우선권을 뺐겼음을 깨달았다. 이것이 그들의 충돌의 동기가 되었다. 그것이 그날의 감격을 깨뜨렸고 불운촉발의 시초가 되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 앞에서 유다 백성에 대한 불평을 말했다(41절). 왕을 초빙하는 일에 무관심하던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적하였는가. 왕이 요단을 건너도록 일을 성취한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인데 하고 불평했다. 이런 감정은 유다 사람들에게 반영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만이 왕을 생각하고 왕의 복귀를 기다렸던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왕 자신도 유다 사람들이 이 일을 생각하기 전에 말했던 것을 알고 있었다(11절 참조). 그가 돌아왔을 때 마치 그의 찾던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마치 왕의 총애를 독점이나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질투와 교만에서 오는 행위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보라.2. 유다 백성들의 답변(42절).
(1) "왕은 우리의 지친인 까닭이라." 왕을 모시는 일에 우선권을 가질 만하다고 그들은 입증했다. 그가 온 곳은 자기 나라인데 누가 그를 모시기에 적합하겠는가.
(2) 유다 사람들은 자기 본위로 환심을 얻으려는 자들을 그들이 행한 일로 반박했다. "우리가 왕의 물건을 조금이라도 먹었느냐. 왕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신 것이 있느냐?" 다만 우리는 의무를 이행했을 뿐이다. 그의 복귀를 이루기 위해 독점한 일도 없다라고 반박했다.
3. 유다 사람들의 공격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변증. "우리는 왕에 대하여 10분을 가졌으니 다윗에 대하여 너희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 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 (43절). 유다 사람은 시므온 지파뿐이지만 대부분의 지파가 모두 이스라엘에 속해 있었다. 다수파를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에 대해 얼마나 미진한가를 생각해 보라. 그들이 얼마전 왕을 추방하는 데 앞장서더니 이제는 왕을 경배하고 모셔오는 일에 앞장서려고 애쓰는 것을 볼 수 있다. 선한 사람의 길은 언제나 신임을 받게 마련이다. 비록 당분간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 같지만은 곧 회복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싸움이 어디로부터 오는가, 모욕감에서 오는 초조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대부분이 등한심 때문인 것이다. 유다 사람들이 만약 자기들의 골육 친척의 조언을 들었더라면 잘되었을 것을, 그러나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우리가 한 일이 아닐지라도 결과가 좋거든 잘된 것이다. 불평도 말고 무시하지도 말라.
4. 성경은 불평의 방법으로 자기 감정을 주장하는 이들을 경고한다.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 (43절). 비록 우리가 옳고 우리편이 정당하다 하더라도 만일 강경하게 우리 감정을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경고하시고 이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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