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대책(사무엘 하 18:1-8)
다윗이 어떤 방법으로 군사를 양육했으며 어떻게 후원병이 그에게 보내졌는가를 알 수 없다. 아히도벨의 예언에 따르는 압살롬을 대항할 군장을 능력에 따라 정하고 이스라엘 해안으로부터 많은 사람을 택했다.
Ⅰ. 그는 병력을 점검하고 정돈했다(1, 2절). 그는 모든 일을 기도하고 하나님께 위탁했다. 그는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나서 군사를 소집했다. 요세푸스는 말하기를 4,000명을 소집했었다고 했다. 그는 병력을 대대와 연대로 분류하고 좌우와 중앙에 경험이 많은 요압과 아비새 장군과 잇대를 세워 파견했다. 선한 명령과 선한 지휘관은 많은 병력을 가지는 것보다 낫다. 지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을 더욱 강하게 인도하며 최고의 극치점까지 우리를 인도한다.
Ⅱ. 정복자는 홀로 전쟁터에 나가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압살롬의 거짓된 친구들은 그의 교만심을 북돋우어 왕을 전쟁터에 나가도록 권장했다. 그러나 다윗의 참된 친구들은 왕만 죽이려는 아히도벨의 음모를 알고 그를 전쟁터에 나가는 것을 만류했다. 다윗은 자기 군사들과 함께 출정하겠다고 말했다(2절). 그러나 그들은 만류했다. 그들이 출정을 막은 것은 선을 막는 것이 아니었다.
1.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시오니" 라고 말한 것은 자기들이 아첨으로 한 말은 결코 아니다. 왕은 백성들의 복종에 의해 가치가 있으며 백성의 안정을 위해 왕의 출정은 금해야 했다.2. 그들은 적에게 더 이상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 적들은 전체 군사가 패하는 것보다 다윗왕 한 사람이 패하는 것을 더 기뻐하기 때문이다.
3. 그는 성에 머물면서 그들을 돕기로 했다. 그리고 신병을 보충해서 파견하려 했다. 그곳은 위험스런 곳이 아니라 봉사의 자리임에 틀림없다. 왕은 그들의 제안을 묵묵히 받아들였다(4절). "너희가 선히 여기는 대로 내가 행하리라." 이 말은 자기가 결정하는대로 한다는 말이 아니라 비록 부하들의 말이지만 선을 나타내려는 뜻을 행하겠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무리 신중하다 해도 부분적임을 면치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다윗이 전쟁터에 참가하지 않도록 명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폐하시기로 작정된 압살롬을 구하려고 다윗은 전지에서 서둘 것이기 때문이다.
Ⅲ. 압살롬에 관한 부탁(5절). 요세푸스는 말하기를 군사에게 계급을 달아 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나서 압살롬에게 상처나지 않도록 조심하여 사로잡으라고 명령했다고 했다. 악인에게 이렇게 선할 수가 있는가. 압살롬은 다윗만을 죽이려고 했다. 다윗은 압살롬만 살리려 했다. 계획이 서로 달랐다. 아버지는 아들 압살롬처럼 강렬하게 미워하지 않았으며 아들은 아버지 다윗처럼 강렬하게 사랑하지 못하였다. 각각 극에서 극으로 행하려 했다. 자녀가 부모에게 할 수 있었던 최악의 모습과 부모가 자식에게 보여주는 최선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은 인간을 향해 자비를 베푸시는데 인간들은 하나님을 향해 악을 행하는 것과 같다. "나를 위하여 압살롬에게 너그럽게 대접하라." 그는 젊고 성급하고 기민했으며 다윗이 사랑하는 자식이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만일 나를 사랑하거든 그에게 잔인하게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이 부탁은 잘 지켜질 줄 생각했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압살롬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주실 줄 믿고 "그에게 너그러이 대접하라" 고 명했다. 그의 심판을 보류하고 그의 생명을 남겨두라고 했던 것이다. 홀 감독은 이에 대해 말하기를 잘못 택한 사랑의 대상, 잘못 행한 자비라고 했다. 배반자를 어째서 너그러이 대접하라는가. 압살롬을 아들로 대할 수 있는 것인가. 야비한 자를 좋은 부모는 사랑해야 하는가. 누구를 위해 피흘려야 했으며 누구를 위해 추적했던가. 아무리 거룩하고 선한 부모라도 해로운 친절과 출혈의 낭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살인자를 위하여, 박해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한 참 왕의 측량할 수 없는 그런 자비를 실천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교육하시려고 고통을 줄 때 이런 부탁을 하신다. "나를 위하여 너그러이 대접하라" 라고 하신다.
Ⅳ. 완전한 승리로 압살롬 군대를 정복했다. 전쟁터는 에브라임 수풀에서였다(6절). 가드 지파가 있는 곳이지만 그곳은 에브라임 사람들의 유명한 전투가 있었기 때문에 에브라임이라 그렇게 불렀다. 다윗은 자기 군대가 마하나임에 이르기 전에 적군과 만나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그 성에서 안식처를 찾지 못하도록 하려 했다. 정정당당한 전투로 판결이 날 것이다. 요세푸스는 대단히 치열한 싸움이였다고 상기시켰다. "이 날에 살육이 커서 20,000에 이르렀고" (7절) 그들은 법적 왕을 향해 반기를 들었고 선한 정치를 하는 정부를 파괴하려 했던 것을 보복하려고 했으므로 전투는 가장 치열했다. 다윗의 병사들은 약탈자들 때문에 무장하게 되었다. 약탈자들은 입맞추고 포옹하고 감언이설로 속여 빼앗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결국 그들은 에브라임, 거기서 보상의 날, 승리의 날, 황금의 날을 맞았다.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이 원수들을 대적하여 싸우시는 것을 보았다. ① 적은 군사를 가지고 많은 적을 정복했다. ② 자신을 구하려던 적들을 스스로 자멸했다. 은신처로 알았던 수풀은 칼보다 더 무서운 피해를 입혔다. 하나님의 복수는 반란자에게는 피할 곳을 허락지 않는다. 수렁과 함정, 그루터기와 덤불이 절 고통스럽게 했다. 갈데아에서 처음 숲의 사나운 짐승이 미친 듯이 쏘다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2만명이나 삼켜버렸다. 하나님은 여기서 다윗을 위해 싸우셨다. 살육된 자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데 참여한 자들이였다. 로마 사람들은 내란을 진압하는 데는 승리를 가름하지 않는다.
압살롬의 최후(사무엘 하 18:9-18)
여기서 압살롬은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당황한다. 결국 생명의 종말을 고한다. 애당초 다윗을 정복할 큰 기대를 가지고 싸움을 시작했던 압살롬은 그의 손아귀에 다윗을 잡았다면 너그럽게 다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다윗의 신복과 마주칠 때에 몹시 당황했다. 그들은 압살롬에 대하여 간섭말라고 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자기 앞에 발견되니 노새의 자갈에 박차를 가해 급히 도망하려고 최선을 다하다가 머리가 나무에 걸려 죽게 되었다. "두려움에서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떨어지겠고 함정에서 나오는 자는 율무에 걸리리니" (렘 48:44). 다윗은 그를 살리려고 했으나 하나님은 반역자로서 그를 처단 목매달아 죽게 했다. 산채로 잡아 활복시키고 그의 몸을 잔인하게 노출시켰다.
Ⅰ. 압살롬이 교수형에 처단된다. 그는 무성한 상수리나무 밑을 필사적으로 말을 달렸다. 그 상수리 나무는 열매도 맺지 못하고 큰 가지가 쇠시랑처럼 꼬여져서 아래로 드리워졌다. 거기에 그의 머리와 목이 걸렸다. 어떤 이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는 자랑삼아 장발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에게 교수형틀이 되었다. 거기에 목이 걸렸다. 스스로 손쓸 수 없이 너무도 놀라왔다. 풀려고 힘쓰면 쓸수록 더욱 곤란했다. 그는 다윗의 신복들 앞에서 싸울 수도 날라갈 수도 고통을 면할 수도 없는 반역자의 말로가 이처럼 부끄러운 것임을 산증거로 보여 주었다. 이에 관해 관찰해 보자.
1. 노새가 그에게서 빠져 나갔다. 마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려고 그 치욕적인 나무에 떠맡기라고 한 것처럼 빠져 달아났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롬 8:21, 22).2.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려 있었다는 것이다. 하늘에서도 쓸모 없고 땅에서도 쓸모 없는 사람이라 양쪽에서 버림받은 자가 되었다. 땅도 그를 받을 수 없고 하늘도 그를 책임질 수 없으니 그러므로 지옥밖에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다.
3. 이런 사건은 흔히 볼 수 없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의 죄의 소행으로 보아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만일 격전지에서 그의 탄 노새가 그를 땅바닥의 메쳐 버렸더라면 그의 반쯤 죽어 있는 것을 다윗의 신복들이 발견하면 즉시 처단해 버렸을 것이다. 죄인의 운명은 결과적으로 똑 같은 결과에 처해진다. 하나님은 여기서도 나단과 에브라임이 여호와를 멸시하다 멸망받은 것같이 다른 배반자들과 똑 같은 형벌을 가하셨다(민 16:29, 30). 압살롬은 그의 부모에게 불순종하여 무서운 형벌을 받았다(30:17 참조).
Ⅱ. 압살롬이 다윗의 신복의 한 사람에 의해 사로잡혔다. 그의 대반란자 압살롬이 나무에 걸린 것을 요압 장군에게 보고했다(10절). 이처럼 비참한 광경을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저를 비웃으리라" (시 52:6). 그가 나무에 달려 호흡이 곤란할 때 그가 환심을 샀던 친구들과 비밀을 말하던 모든 자들은 자기의 이익만 생각했다. 그의 헝크러진 것을 풀어 주지 않았다. "요압이 그 고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으리라" (11절)(사 22:21 참조). 그러나 그 병사는 압살롬을 대적하는 열심은 대단했지만 그를 죽이는 일에는 자기 결단으로 행하지 않았다. 요압이 말하기를 그를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라" 했을 때 "그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내 손에 은 천 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12절). "내가 만일 거역하여 그 생명을 해하였다면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다" (13절). 반란을 좋아하는 자는 반역자를 증오한다. 요압은 이처럼 신중한 사람을 반대할 수도 책망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답변이나 논쟁을 중단하고 서둘렀다. "나는 너와같이 지체할 수 없다" (14절). 상관들은 명령을 내리기 전에 책망부터 하지 말라. 좋은 길을 찾아 행하고 후에 부끄러워하지 말라.
Ⅲ. 압살롬이 사지를 찢기고 창자가 터졌다. 반역자는 사정없이 난도질을 하여 모든 고통을 가하고 또 모든 배반자들이 보도록 했다.
1. 요압이 창 세 개로 아직 상수리 나무에 살아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찔렀다(14절). 요압이 왕의 명령을 이렇게 거역한 것을 의롭게 볼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이것이 그를 너그러이 대접하는 것인가? 만일 그가 오점을 남긴다면 다윗이 그를 괴롭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다윗왕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관대한 아버지의 명령은 거슬렀지만 요압은 나라와 왕을 위해서는 매우 잘한 것이다. 만일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나라와 왕에게 위험했을 것이다. 국민의 안전을 위하는 것이 최고의 법이다(Salus populi supr ema Lx).2. 요압이 그를 찌르니 그의 소년 10사람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였다(15절). 여호와여! 당신의 모든 적을 멸하소서. 요압은 퇴각 나팔을 불었다(16절). 압살롬은 죽고 위험은 끝났다. 백성들은 다윗왕께 충성하고 피흘리는 전쟁이나 배반자들을 가둘 일도 없어 졌다. 모든 백성이 자기 본무에 임하고 왕의 다스림을 받았다.
Ⅳ. 그의 시체를 잔인하게 노출시켰다(17, 18절). 그들이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시체를 던지고 그의 아버지께 가져가지도 않았고(그것을 보면 그의 슬픔을 더 할 것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법에 따라 매장하지도 않고 분개하여 함정에 던졌다. 그곳은 그가 화려하게 존경을 받던 장소였다. 그가 열광하던 계획과 공중 누각을 세우던 곳이다. 그의 생각은 무너졌으며 그의 모든 꿈도 사라졌다.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겔 32:27 참조), 그의 죽음은 그의 뼈 속에 있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의미한다. 그들이 그의 시체 위에 돌무더기를 쌓아서 그의 생전에 지은 악행의 기념비로 삼았다. 이것은 패역한 자녀는 돌로 쳐죽임이 마땅하다는 계명을 의미했다(신 21:21). 어떤 이들은 패역한 아들 압살롬의 저주를 기억하라. 여행자들은 지금도 이곳을 찾아오며 자기 부모에게 배덕한 악한 자에게 영원히 저주 있으라 말하면서 이 돌무더기에 돌을 던진다. 역사가는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기드혼 골짜기에다가 주석 기둥에 경고판을 세워 악명높은 압살롬의 이름을 기억하게 했다. 처음부터 그는 이런 죽음을 계획했다(18절). 교만한 자가 그 머리 속에 계획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교만한 자는 죽을 때 전에 환심을 끌었던 사람은 다 떠나며 그의 부끄러움은 만방에 드러나게 된다. 압살롬은 아들이 있었다(14:27). 그러나 하나님이 모두 데려가셨다. 악한 자에게는 자녀가 없다는 기록을 이루셨다. 그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 이 비석을 세웠으나 하나님은 대리석 대신 무시무시한 돌무더기로 그의 기념을 삼으셨다. 그러므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진다. 그의 관심사는 자기 이름을 남기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 것이다. 영원히 불명예로 남게 되었다. 그는 다윗의 아들이라는 이름만 기록되는 것을 만족할 수 없었다. 유명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악명으로 유명해진 것이다. 압살롬의 영광을 위하여 세워진 이 비석은 압살롬의 어리석음을 증거하고 있다.
다윗의 슬픔(사무엘 하 18:19-33)
압살롬의 생애는 끝났다. 여기서 우리는 압살롬을 위한 다윗의 슬픔을 알아 보자.
Ⅰ. 다윗에게 보고됨. 그는 격전지였던 에브라임 수풀로부터 수 마일 떨어진 국경 내의 마하나임에 있었다. 압살롬의 패잔병들이 마하나임 반대쪽 길로 가는 분단을 향해 고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의 파수병들은 격전지의 실패를 알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전달자가 소식을 가지고 달려오고 있고 왕은 소식을 듣고자 성문누에 앉아있다(24절).
1. 구스는 요압이 소식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은 에치오피아 사람이다(21절). 그는 선천적으로 피부가 검은 사람이요 요압이 압살롬을 죽일 때 돕던 10명 중에 한 사람이다(15절). 그가 소식을 가지고 다윗에게 간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울의 죽음과 이스보셋의 죽음을 전하는 자가 다 다윗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2. 아히마스는 압살롬의 거동에 관한 정보를 다윗에게 제공한 자중에 하나인 젊은 제사장이다(17:16). 그는 폭풍이 잔잔해진 것이 너무나 기뻐서 왕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싶어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19절)라고 자청했다. 이러한 그의 소청은 상급을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왕에게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만족과 기쁨을 제공하고 싶어서였다. 요압도 다윗이 아히마스를 좋게 보고 있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압살롬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말하면 나머지 모든 것을 용납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요압은 아히마스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소식을 가지고 가게 할 수 없었다(20절). 그 일은 제사장에 전할 것이 아니라 보병이 전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구스가 이미 가버린 후 그 뒤를 따르겠다고 간청했다. 사람은 이런 일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타인이 기용되었을지라도 좀처럼 단념하지 않는다.
(1) 아마 그의 신속성을 나타내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구tm는 가까운 지름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먼 길을 택해 늦게 도착했다. 아히마스는 자기가 얼마나 빨리 달릴 수 있는가를 보이고 싶었다. 그는 멀리 앞섰던 구스를 앞질러 갈 수 있었다. 제사장이 달음질 잘한다고 크게 찬양할 것은 없다. 그러나 아히마스는 그것을 자랑했다.
(2) 그가 이 일을 원했던 것은 왕에게 부드럽고 조심성있게 전하려고 원했던 것 같다. 그는 구스보다 먼저 갈 수 있음을 알고 먼저 가서 구스가 전할 보고를 모호하게 함으로 왕께 준비시키려는 것이였다. 나쁜 소식을 전할 때는 점차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 참고 더딜수록 좋은 것이다.
3. 마하나임 성문에 있던 파수꾼이 아히마스와 구스를 발견했다(24절). 처음에 구스가 앞섰으나 곧 아히마스가 그를 앞질렀다(26절).
(1) 왕이 한 사람이 뛰어 오고 있다 함을 듣고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만일 혼자면 그 입에 소식이 있으리라" (25절). 왜냐하면 만약 그들이 졌다면 적으로부터 도망할 것이니 많은 사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다윗이 아히마스가 오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자라고 결론부터 지었다(27절). 아히마스는 장거리 선수로 유명했던 것 같다. 또한 관대하며 현저하게 선한 사람으로 알려졌던 것 같다. 만일 아히마스가 전하는 소식이라면 좋은 소식일 것이다. 그는 선한 사람이다. 왕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니 나쁜 소식을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좋은 사람에 의해 가져온 것은 언제나 복음이 좋은 소식뿐이다. 우리는 거짓된 소식만을 전하고 있는 자를 얼마나 환영했나.
4. 아히마스는 승리를 외치고 싶어했다. 멀리서 외치기를 "평안하소서" (28절)라고 했다. 전쟁 후의 평화는 만 배의 기쁨을 준다. "왕의 하나님이 모든 것이 잘되게 하셨습니다. 위험은 끝났으니 왕은 어서 예루살렘으로 환궁하소서" 라고 소리쳤다. 가까이 왔을 때 왕을 대적하던 자를 모두 살육하였다라고 특별한 새소식을 말했다. 그는 제사장이므로 왕에게 기쁜 소식만을 말했다. 그는 하나님께 승리의 영광을 돌렸다. 평화의 하나님은 구원과 승리의 하나님이시다. 왕의 하나님이 약속을 굳게 지키는 당신에게 복을 주사 당신의 왕위를 높이셨도다(7:17 참조). 이 말을 할 때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한 것은 왕께 존경심의 표현뿐만 아니라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겸손함에서였다. 다윗에게 하나님이 승리하게 해 주심을 먼저 감사한 것은 충격적인 슬픈 소식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다윗을 준비시킨 것이다. 우리는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고정시키고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넓혀나가면 나갈수록 더욱 좋은 것을 부여받으며 어려운 난관도 극복할 수 있다. 다윗은 소년 압살롬의 생명이 안전한지를 알기 전까지는 승리의 소식을 듣고도 기뻐할 줄 몰랐다. 그것은 다윗이 자신은 나라의 왕이라는 것을 잊을 정도로 지나치게 한 사람의 아버지에 치중했다. 마치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의 법궤에 관한 소식은 알려고 하지 않고 자녀들의 전사통보에 상심한 것과 같다. 그의 마음이 떨렸기 때문일 것이다. 아히마스는 곧 요압이 암시한 것을 그에게 인식시켰다. 왕자의 죽음은 우울한 소식이 되기 때문에 어리둥절한 가련한 왕에게 청천병력을 갑자기 내릴 수 없으므로 모호한 보고를 했다. 더 자세한 소식은 다음 전달자에게 위임했다. 요압이 왕의 신복 구스를 보낼 때 "내가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으나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라고 차츰차츰 정보를 제공하게 했다. 구스는 나보다 더 좋은 소식을 당신에게 줄 것이다. 나는 결코 나쁜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정확한 이야기가 되지 못하는 것은 알려고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구스가 올 때까지 옆에 서 있었다(30절). 그가 가져온 소식은 역시 승리의 소식이었다.
5. 느림보 우체부 구스는 아히마스가 전해 준 승리의 소식을 재인식시켰다. "여호와께서 왕을 대적하는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31절). 압살롬에 관한 왕의 질문을 그가 만족시켜 주었다(32절). 다윗이 그에게 묻기를 "그가 평안하냐." 구스가 대답하되 "네 그가 무덤에서 평안합니다." 그는 직설적으로 소식을 전했다. 얼마나 우울한 소식인가, 전달자를 책망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그는 왕에게 압살롬이 도망가다가 목매달려 죽었고 돌무더기에 장사되었으나 왕을 대적한 반역자의 운명을 걸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이 다 그 소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했다. 나는 그들이 더 이상 악을 원치 않기를 원한다.
Ⅱ. 다윗이 정보를 입수하고 어떻게 했나. 그는 자기 생명이 구출된 기쁨도 잊어버리고 압살롬의 죽음에 대한 슬픈 소식에 완전히 압도되었다(33절). 압살롬이 죽었다는 구스의 답변을 듣자마자 더 이상 묻지 않고 동료를 떠나 슬픔에 잠겨 그의 문루(門樓)에 올라가 슬피 울었다. 그의 울음을 엿들은 갈데인의 말을 보충하면 "오! 나의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어쩌다가 죽었느냐. 너 대신 내가 죽었다면 네가 오늘 살아남아 있을 것을!" "오 압살롬! 나의 아들, 나의 아들!" 다윗은 압살롬의 영원한 나라에 대해 걱정이 되어서 이렇게 슬피 울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압살롬을 위해 다윗이 대신 죽기를 원한 것은 만일 그가 살았으면 회개하고 구원받을 희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생각 없이 한말 같고 감정적이고 의지박약인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에게 결점이 있다.
1.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버림받은 자를 용모가 잘생겼고 재치가 있다고 버릇없는 아들을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잘못이다.2. 묵묵히 따라야 할 하나님의 섭리뿐만 아니라 찬동하고 경배해야 할 하나님의 공의를 대해 싸우려는 점이다. 빌닷이 어떻게 논쟁했는가를 보라(욥 8:3, 4). 만일 네 자녀들이 주께 범죄했으면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 너희는 하나님의 공의를 따르고 복종하라(레 10:3).
3. 행정 집행권을 위임맡은 왕으로서 공리를 위하여 일해야 할 사람으로서 국가의 정의를 역행했다는 점이다. 그는 어떤 본능적인 애정에 앞서서 국가의 이익을 기뻐해야만 한다.
4. 그는 그 자신과 가정과 국가를 압살롬의 악한 음모로부터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이 긍휼로 인한 것이지만 그것을 무시한 점이다. 마치 그의 구원은 압살롬의 생명이 끝났기 때문인지 하나님의 긍휼로 된 것이 아닌 것처럼 전연 감사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 점이다.
5. 맹렬한 감정에 빠져서 그의 입술로 분별없이 말한 점이다. 그는 지금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는 없는가? 라고 다른 자녀들의 죽음에 대한 추론도 잊어 버렸다. 그래서 그는 마음이 뜨거워질 때나 습관이 나올 때는 자갈을 물려 입을 지켜 젖뗀 아이처럼 침묵할 것을 결심했다. 지나친 사랑은 지나친 번뇌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적당한 애정으로 우리 자신의 영혼을 잘 다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지나친 사랑을 받다가 그것이 이동할 때는 우리 자신을 엄격히 경계해야 한다. 말을 많이 하는 자는 많은 것을 잃는 자다. 그러나 적게 말하면 곧 보충된다. 참회자는 홀로 앉아 고통을 참고 침묵을 지킨다(애 3:28). 욥도 여호와의 이름이 복되도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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