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살롬의 야욕(사무엘 하 15:1-6)
압살롬은 궁전에서 자기의 지위가 회복되자마자 왕위에 오르고자 하는 목표를 세웠다. 고통 속에서 겸손할 줄 모르는 압살롬은 고통이 끝났을 때 교만이 싹텄다. 이제 그는 왕자라는 명예나 왕인 아버지의 후계자가 된다는 기대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당장 왕이 되고 싶었다. 압살롬의 어머니는 한 왕의 딸이었다. 그래서 압살롬은 자신을 높이 평가했고, 이새의 아들에 불과한 아버지를 경멸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어머니는 이방신을 섬기는 왕의 딸이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평화에 대해 무관심하게 하는 이유였을 것이다. 다윗은 이방 불신자와의 이질적인 결혼으로 불행의 벌을 받았다. 압살롬이 왕의 총애를 다시 받게 되었을 때 만일 고마운 생각을 가졌다면 어떻게 아버지께 보답하며 그를 기쁘게 할까를 생각하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왕의 눈을 피해 백성들의 마음을 도둑질하고 어떻게 하면 왕을 약화시킬 수 있을까를 음모했다. 압살롬이 민중의 존경과 환심을 일시에 끈 것은 두 가지다. 즉 위대함(greatness)과 선량함(goodness)이였다.
Ⅰ. 압살롬이 위대하게 보임(1절). 그는 이스라엘 왕이 못가게 하는 그술 땅에 가서 자기 아버지가 타는 초라하게 보이는 암나귀 보다 자기를 돋보이게 장식할 멋진 말을 번식시키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 압살롬은 예루살렘에 있을 때보다 장엄하고 화려하게 보여 백성들은 그를 왕으로 삼으려 했다. 사무엘은 그가 임금이 되면 어떤 정책을 사용할 것을 예언했다. "가로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삼상 8:11), 이것이 압살롬의 정책이다. 화려한 제복의 마부 50명이 압살롬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다가 그 앞에서 황급히 달려가면 그의 교만은 더 한층 높아질 것이며 백성들은 더욱 우매해질 것이다. 그러한 행렬은 왕궁을 장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윗은 그것을 묵인한다.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의 오만스런 장난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그러나 다른 어떠한 나쁜 욕망보다 교만에 의하여 파산하는 젊은이를 많이 보았다.
Ⅱ. 압살롬의 이중인격. 압살롬은 매우 선하게 보이지만 매우 악한 정책을 보일 것이다. 만일 그가 선한 아들이고 좋은 계획을 가지고 아버지의 관심에 협조했다면 그는 현재의 책임을 이행했을 것이다. 그의 부친이 죽은 후에도 장래 영광을 받을 만한 가치를 손수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다스릴 줄 아는 자는 복종할 줄도 아는 사람이다. 선한 재판관이 되고 좋은 임금이 되려고 꾸미는 것은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게 되는 것뿐이다. 진실로 선한 사람은 남의 입장에서 선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처지에서 선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압살롬의 미덕에서 우리가 볼 수 있다.
1. 이스라엘의 재판관이 되기를 원함(4절). 그는 보통 사람이 누릴 수 없는 평온과 위안처럼 살 수 있고 원하는 모든 즐거움과 화려함 모두를 가졌다. 그러나 권력이 없으므로 이것들로 만족할 수 없었다. "내가 이 땅에 재판관이 되고" (4절). 그는 자신이 살인자라는 판결을 했을 것이면서도 남을 재판하는 자리를 겨냥하는 뻔뻔스러운 자다. 우리는 압살롬이 법률을 공부한 일도 없고 이에 관한 지식도 도덕도 없고 정의를 사랑하는 어떤 증거도 없으면서 그는 재판관이 되기를 원했다. 전연 감당하지도 못할 직책에 등용되기를 야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이 땅에 재판관이 되고" 라고 말한 압살롬의 정신도 나쁘지만 자격 있는 적격자의 지나친 수줍음도 좋지 않다.2. 소원성취를 위해 나쁜 과정을 택함. 겸손히 아버지에게 자기를 재판관리로 등용해 주기를 원했다면, 자신의 법률에 관한 적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더라면(출 18:21) 그는 확실히 재판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뽐내는 것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왕이긴 하지만 그가 원하는 최고 수석을 얻지 못하고 부하직에 속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를 찾아 송사하려고 온 사람들을 재판하고 싶었다. 송사하러 온 모든 사람들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왔는지를 생각도 전연 하지 않고 주관하려고만 했다. 모세도 이런 일을 주관하려고만 했다. 모세도 이런 일을 감당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이처럼 많은 일을 해결하는 것이 무슨 힘에 의한 것인지를 모르고 있다. 그 힘을 얻으려면 백성들의 마음 속에 그가 목적하는 것을 주입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1) 현직 관리의 단점. 그들은 정사에서 전연 무관심이었고 송사자들에게도 무관했다. 그래서 압살롬은 그들의 용건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법정에서 하는 일들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서 도와 줌으로 자기 지지자로 삼았다.
[1] 크던 작던 송사가 있으면 "네 일이 옳고 바르다." 라고 인정해 주었다. 한쪽 말만 듣고 처리하는 이가 어찌 좋은 재판관이 될 수 있으랴! 아무리 그는 모사자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가 나쁜 동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좋은 재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2] 왕위에 대한 야심이 없는 것처럼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셨다" 라고 말했다. 왕은 집무할 수 없을 만큼 늙었고 송사에 관심도 없으며 그의 다른 아들들은 이름있는 관리자들이지만 연락에 빠져서 자기들에게 맡겨진 책임도 하지 않는다라고 암시했다. 더욱이 그는 자기가 없는 동안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했는가를 선동했다. 이것은 사실 그의 아버지 다윗이 사울 왕이 통치할 때 한 말이다. "악인의 권세가 의인의 업에 미치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으로 죄악에 손을 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시 125:3)라고 그는 거짓말을 했다. 그 땅 거민들은 모두 속았다. 만약 이 사람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파멸 위기를 당할 것 같다. 모든 항소인들은 압살롬이 부왕이나 재판장이 되지 않으면 그들의 송사를 들어 줄 자가 없을 것으로 믿게 되었다. 정부를 비난하기 위하여 열성분자들을 교란시키고 파당을 일으키는 방법을 취했다.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 아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벧전 2:10), 선왕 다윗도 백성의 악을 피할 수 없었다. 압살롬처럼 강탈하려는 자는 불평의 소리를 지르며 아무런 음모도 없는 것처럼 다만 시정하려는 것처럼 행하는 것이다.
(2) 압살롬의 장점. 그는 백성들로 하여금 "압살롬이여 당신은 우리의 재판관이라" 라고 말하도록 했다.
[1] 근면.
그는 일찍 일어나서 다른 왕자들을 설득하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또 그는 재판정 성문 곁에 서서 공사를 급히 행하고 열성으로 공의 베풀기를 원했다.
[2] 관심.
모든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호기심을 가지고 노력했다. 그는 송사하러 온 사람들에게 "너는 어느 성 사람이냐" (2절)라고 자기의 관심을 표명했다.
[3] 친숙과 겸허.
이스라엘의 어떤 사람이던 그에게 절하려 하면 친구처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5절). 루시퍼처럼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서는 사람을 다스릴 수 없다. 야심있는 행위는 자주 겸손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골 2:23). 그는 겸손과 친절, 관대함이 얼마나 유익하고 이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 수 있었던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만일 그러한 친절에 진실까지 있었다면 그는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모든 사람을 실망시킨 것은 그가 지독한 위선자였기 때문이었다.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저가 구부려 엎드리니 그 강포로 인하여 의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 (사 10:9, 10).
헤브론에서의 즉위식(사무엘 하 15:7-12)
여기서 오랫 동안 계획한 압살롬의 반란이 중단된다. "40년만에(다른 번역 4년) 압살롬이 왕께 고하되" (7절) 이 말은 들어보지 못한 연수다. 다윗 통치가 시작되던 때부터 계산된 연수는 아니다. 확실치는 않으나 다윗이 사무엘에 의해 통치 7년 전에 첫 번 기름 부음받은 때부터인지, 아니 본인 생각으로는 다윗이 통치하기 40년 전 쯤에 있었던 군주 정치의 변화를 갈망하는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던 때를 기준한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변화를 찾던 들뜬 마음이 40년 전에 작용하여 새로운 모델을 찾던 것처럼 지금은 새 사람을 찾을 때라는 것이다. 40년만에 똑 같은 사건이다. 다윗의 정권은 30년쯤에 붕괴됐다. 압살롬의 음모는 실현의 시기가 무르익어 갔다.
Ⅰ. 그의 일당들이 채택한 집결지는 헤브론이었다. 압살롬은 거기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가 거기서 왕이 되었고 몇 해 동안 거기서 처리했다. 헤브론이 행정 도시임은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거기서 음모를 모의했다. 아마 그의 관심사인 지파들의 세력강화는 결정적인 유다의 운명이 거기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Ⅱ. 그가 헤브론에 가서 친구를 초대하고 하나님께 예배한 것은 모두 가면이다. "압살롬이 왕께 고하되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으니 청컨대 나로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하소서. 종이 아람 그술에 있을 때 서원하기를 만일 여호와께서 나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내가 여호와를 섬기리이다" (7,8절). 우리는 그가 그렇게 진실한 사람이 아님을 안다. 그런 맹서를 한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살인과 폭동에 몰두하는 그는 자기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이런 거짓말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만약 그가 이런 맹세를 사실로 했다면 아무도 그를 논박할 자가 없을 것이다. 이 가면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그는 아버지를 떠나 헤브론에 가고자 함이었다. 방랑 중에 압살롬이 아버지가 있는 성일 뿐만 아니라 사시는 하나님이 계신 예루살렘에 돌아오고자 사모했다는 소리를 듣고 다윗은 기뻐했을 것이다. 하나님을 공경하기 때문에 그가 돌아왔다. 즉 지금까지 무관심하던 주께 예배하려고 돌아왔는지 그가 돌아와서 그의 서원했던 것을 이제 기억하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했는지 알 수 없다. 만일 헤브론에서 그가 그 일을 하는 것이 기브온이나 시온에서 보다 적합하다고 생각하면 선왕은 그 장소를 반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만사 뜻대로 되어 매우 기뻐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에 대해서 우수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으며 지극히 적은 좋은 점에 기대를 가지며 비뚤어진 자녀들에게까지도 회개하면 새로와질 것이라고 바라는 부모가 얼마나 많은가를 알라. 속기 잘하는 착한 부모들은 얼마나 쉽게 자라고 있는 자녀들이 거짓된 신앙으로 조정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다윗은 압살롬이 주께 예배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그래서 그는 곧 그를 떠나 헤브론으로 점잖게 가게 했다.2. 그를 따르는 유능하고 순수한 무리를 많이 얻었다(11절). 그의 축제에 초대된 예루살렘의 유지들은 200명이나 되었다. 그들 가운데는 압살롬이 유랑 중에 품었던 음모를 전연 모르는 순수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그들을 자기 음모에로 이끌어 넣으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아직은 다윗에게 충직하는 사람들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예루살렘 유지들이 압살롬의 모반에 관여하고 있으며 다윗은 그의 가장 가까운 측근들로부터 배반당했다고 민중이 믿을 수 있게 하려고 그들을 자기의 동료로 이끈 것이다. 이런 일은 선량한 사람들에게 처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모반은 옳지 않은 일을 음모하는 자들에 의하여 흔히 사용되어 왔다. 여기서 압살롬의 추종자들은 사탄의 함정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 마음에 혐오를 느끼면서도 그런 일을 장려하고 거짓된 무리에게 맡겨 버렸던 것이다. 종교는 엽마(stalkinghorse)처럼 약탈과 난동을 제압한다. 마치 우물터에서 어떤 사람이 종교에 감동된 것처럼 여기서는 압살롬의 추종자들이 위선자에 의해서 사탄의 깊이를 모르기 때문에 마음 속으로는 혐오를 느끼면서도 그 음모를 부추기는 데 빠졌다.
Ⅲ. 그의 계획은 모든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에게 나팔을 불면 자기가 임금이 되었다고 널리 전파하려는 것이었다(10절). 첩자들에게 기쁨과 환호와 만족을 가지도록 경고하여 전국에 보내서 자신들은 새 왕을 위하여 무장한 사람임과 이 일이 당연하고도 선한 일임을 백성들에게 믿도록 했다.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는 소식이 갑자기 퍼지자 어떤 사람은 다윗이 죽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가 왕위에서 물러났다고 추단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압살롬이 출두할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사건 진상을 즉시 납득했음인지 그의 조력자로 찾아와 압살롬이 보낸 첩자들의 생각을 증오했으나 그들 사상에 빠진 자들은 그에게 열성적으로 추종하려 했다. 야심이 있는 사람은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얼마나 끔찍한 술책을 쓰는가 보라. 정치 문제뿐 아니라 종교 문제에 있어서도 영마다 다 믿지 말고 그 영을 시험해 보라.
Ⅳ. 특별히 초대받고 이 일에 관련이 있었던 사람은 아히도벨이다. 그는 두뇌가 명석하고 다윗의 가장 친한 친구요, 안내자요, 모사였다.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시 55:13).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시 41:9). 다윗이 아히도벨을 역겹게 하니 그도 다윗을 대항했다. 그는 결국 추방되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시골에서 쓸쓸히 지내고 있었다. 다윗처럼 그렇게 훌륭한 수뇌와 아히도벨처럼 그렇게 낙후된 사람이 어떻게 오랫동안 마음이 맞을 수 있겠는가? 현직 내각에 불만이 있는 정치인을 좋은 장비로 얻는다는 것은 압살롬에게 있어서는 금시발복이 아닐 수 없다. 압살롬이 거짓된 공약으로 제사를 드리는 동안 이스라엘 각 지파 가운데 사람을 두루 보냈다. 그의 마음은 야심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제사가 끝나도록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음모 수행의 기회만 노리며 제사를 오랫동안 끌었다.
Ⅴ. 그에게 가담된 일당들은 드디어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이 점점 압살롬에게로 몰려와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음모단이 되었다. 불만이 있는 자들과 걱정이 있는 자(그 사건이 옳고 선한 것이라는 선전을 들은 자)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압살롬을 위해 관심 있는 자들을 수의 제한 없이 데려왔다. 압살롬은 단순히 이런 책략이 야심 때문인가, 아니면 지배욕 때문인가, 또는 아버지에 대한 적의 때문인가, 아니면 감금 추방에 대한 복수심인가, 이런 책벌은 지나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일반적으로 왕관에 목적이 있는 것은 왕관은 머리에 쓰기 때문이다.
망명에 오른 다윗(사무엘 하 15:13-23)
Ⅰ. 여기서 압살롬의 반란 소식이 다윗에게 전해진다(13절). 사건은 악화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은 언제나 지도자들에게 있다는 통념 때문에 민심이 압살롬에게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사실보다 더 불행해 보였다. 그러나 다윗은 압살롬이 백성을 꼬드기는 데 사용한 술책들을 생각하고 더욱 괴로워했다. 확실한 자신의 유리점을 살려 그의 술책을 좌절시키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을 것이다. 자기 추종자들의 마음에 확신을 넣어 주는 것이 왕자의 지혜다. 그들을 손에 넣었다면 그들의 심장도 능력도 손발도 모두 소유한 것이다.
Ⅱ. 다윗에게 주어진 경종과 그에 대한 해결 방안.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이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불법으로 배신하여 아버지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는 카이젤의 말을 잘 알았을 것이다. kai, su teknon-즉 아들이란 무엇인가? 부모는 자식에 대해서 너무 높은 지나친 기대를 가지고 키우지 말라. 높은 희망은 높은 절망을 가져온다. 다윗은 상담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자기 마음만 믿고 하나님만 의존했다. 예루살렘의 종말이 곧 다가왔다(14절). 그는 용사로서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해결책을 취택했다.
1. 참회자로서의 다윗.그는 징계를 받을 때 복종하고 채찍을 드신 하나님의 손에 매어 달렸다. 그의 양심은 우리아의 사건을 회상시켰다. 그 죄악 때문에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삼하 11:11)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내게 이루시니 내가 이 재화를 조절하거나 대적할 것이 아니라 오직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복종할 것 뿐이다" 라고 다윗은 스스로 생각한다. 다윗은 불법자 압살롬 앞에서는 의인이지만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을 참회하며 그의 의 앞에 복종했다. 그래서 그의 죄악에 대한 형벌을 달게 받았다.
2. 정치가로서의 다윗.예루살렘은 큰 도시이기는 하지만 질서가 잡힌 곳은 아니었다. 시편 51편 18절에서의 다윗의 기도문 가운데 보면 "주의 은택으로 시온의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이것은 그 성의 성벽이 무너져 이를 수축해야 할 것을 의미한다. 다윗이 가지고 있는 작은 병력으로는 너무 큰 일이라 수축할 수 없었다. 다윗은 대다수의 국민이 압살롬에게 빠져 있어서 다윗에게 진실로 응할지 그것이 의심스러웠다. 그가 이 성벽을 수축한다면 특별히 압살롬의 농간에 걸려들지 않은 순수한 동료를 뺏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을 아끼기 때문에 전쟁터에서 동료를 구하거나 공격의 비극을 만들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성을 쌓는 것으로써 반란이 제압되기를 원했다. 선한 사람들은 자기가 고통을 당할 때 남이 당하는 고통을 생각한다.
Ⅲ. 예루살렘으로부터 급거 도피. 그의 신하들은 그의 생각에 동의하며 성실하게 그를 따랐다(15절). 그래서 그는 그들의 충의심을 확인했다.
1. 그는 압살롬이 말과 병거를 타고 올 때 도보로 예루살렘을 피해 갔다. 외모를 화려하게 꾸미는 사람은 언제나 동기도 좋지 않은 사람이요, 불의한 사람이다. 이 장면을 보라. 반역자와 그의 종들은 말을 탔고 법적 권한이 주어진 임금은 걸어간다. "또 보았노니 종들은 말을 타고 방백들은 종처럼 땅에 걸어다니는도다" (전 10:7). 그는 하나님의 긍휼의 손을 붙들기 위하여, 동료들과 추종자들에게 겸손을 보이기 위하여 함께 살고 죽자는 뜻으로 자기를 낮추었다.2. 그는 가족을 데리고 갔다. 위기의 날에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슬픔의 날에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가장은 언제나 갑작스런 재난에서 가족을 돌보아야 한다. 그는 10사람의 처첩들을 집지키라고 남겨 두었다. 그들은 여자이니 정상을 참작하여 살인자나 강탈자들이라도 그들에게는 어떤 피해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은 이들을 조정하셨다.
3. 그는 경호원과 방백들을 데리고 갔다. 베나야의 지도를 만든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들 그리고 잇대의 지도를 받는 가드 사람들과도 동반했다. 그를 따르는 600명은 모두 블레셋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유대교를 신봉하는 자들로서 다윗의 덕담과 경건성에 감화된 사람들이다. 다윗은 그들로 자신을 경호할 수 있는 군대를 편성했고 그들은 열심히 따랐다. 다윗의 아들에게서는 로마의 백부장(눅 10:9)같이, 가나안 여인처럼(마 15:28) 그런 위대한 믿음을 찾아 볼 수 없었다.
4. 그를 따르는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너무 멀리 걸었기 때문에 정지를 요구했다. "왕이 나가매 모든 백성이 다 따라서 벧메르학에 이르러 머무니" (17절). 그는 아무에게도 강제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압살롬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억지로 가게 하고 곧 좋아질 것이라고 강권적인 언동을 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아무에게도 원조를 청한 일 없다. 다만 지원한 사람들뿐이다.
Ⅳ. 블레셋 개종자 600명의 인솔자 잇대와 가드에서 답론.
1. 잇대와 그가 이끄는 자들이 모두 다윗을 따르겠다고 했지만 다윗은 그 생각을 단념하라고 했다.(1) 다윗은 그가 압살롬에게로 가려는 생각은 없는지 아니면 자기를 따르면서 열심히 얼마나 있는가를 시험해보려 했다. 그래서 다윗은 그에게 돌아가서 새 왕을 섬기며 전직을 유지하라고 명했다. 만일 그가 좋은 군사가 아니었다면 다윗을 위해서 그렇게 최선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며 그들과 함께 압살롬편으로 갔을 것이다.
(2) 만일 잇대가 다윗왕에게 충성을 다 했었다면 그때 그렇게 곤란한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능한 한 평안을 추구하는 새로운 개종자, 전향자, 이방인과 유랑자에게는 다윗의 겸허한 정신이 답습하기 어려운 관례였다. 그래서 "내 어찌 너로 우리와 함께 유리하게 하리요" (20절). 관대한 사람은 자기의 고충보다 남의 고충을 더 생각한다. 그래서 잇대는 자기의 행복을 포기한다.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20절) 이 은혜와 진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것은 잡신 우상을 버리고 전능자 하나님의 날개 아래 서는 자에게 주기로 약속된 것이다. 이 말은 친구와 헤어질 때 사용하는 아주 정중한 송별사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안전하고 평안하리라는 말이다. 다윗의 이 나라 사랑하는 의지는 자신과 동료들을 보호하시는 평강과 행복의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진리에 의한 것이다(시 61:7 참조)
2. 잇대는 담대하게 다윗을 떠나지 않을 것을 결심했다(21절). 다윗이 있는 곳이라면 살든지 죽는지 위험하든지 안전하든지 추종을 하겠다고 자신의 결심을 맹서했다. 떨어지기를 싫어했다. 자신의 부귀도 영화도 모두 다윗왕을 위한 것이라고 그의 존재 가치를 오직 다윗왕에게 두었다. 낙화일로에 있는 그를 보면서도 어떤 처지에서도 변함없는 그의 미덕과 지혜 때문에 그는 결코 그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서 도 사랑할 수 있는 자가 진정한 친구다. 그는 역경 중에서도 우정을 굳게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도 죽어도 그의 사랑을 끊을 수 없노라" 라는 굳은 결의로서 다윗의 후손 그리스도에게 집착하려는 것이다.
Ⅴ. 백성들이 고난 중에 다윗을 동정함. 그와 그의 종자들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그리스도도 수난에 돌입할 때 같은 시내를 건넘. 요 18: 참조) 여리고와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광야로 향하니 온 성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었다(23절). 저들이 우는 이유.
1. 왕궁에서 세도 속에 살던 자기 나라 영주가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시시한 수행원과 광야에 나와서 은신처를 찾고 있는 초라한 모습을 보고 울었다. 다윗 자신이 싸우고 건설했고 번영시켜 놓은 다윗의 도성에서 자기 자신도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없게 된 광경을 보고 울었다. 악한 자식을 두었기 때문에 높은 영광의 자리에서 천민으로 하락한 것을 보면 이방인들까지라도 연민의 정을 느낄 것이다. 자기 자식들 때문에 파산당하고 학대받는 부모들은 자연히 동료들의 동정을 받게 마련이다.2. 자기 국토에서 번영을 누리던 영주가 불행하게 된 것을 보고 백성들의 존경을 몰수당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비탄 중에 있음을 보면 그를 도와 줄 대책이 없는 자들은 그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질 것이다.
다윗과 사독의 협상(사무엘 하 15:24-30)
Ⅰ.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충의와 다윗의 관심. 다윗은 곤궁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들에게 극진한 사랑을 나타냈다. 압살롬이 백성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취했던 방법은 그들에게는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에게는 전연 마음이 없기 때문에 다윗을 지지하게 되었다. 만일 사독과 아비아달과 그와 함께한 레위인들이 그에게 언약궤를 가지고 가서 그와 함께 한다면 하나님이 도와 주실 것이다(24절). 번영 속에서 언약궤를 가까이 했던 사람은 역경 속에서도 함께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다윗은 자신이 법궤를 안치할 만한 장소를 발견할 때까지는 평안하지 못했다. 만약 제사장들이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다윗이 환궁하기까지는 언약궤도 안치할 만한 곳이 없을 것이다.
Ⅱ. 다윗은 충성심이 있는 사람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냈다(24, 25절). 아비아달이 원래 제사장이었고 사독은 그의 조력자였다. 그래서 아비아달이 집무 중에는 언제나 사독이 언약궤 앞에 가장 가까이 참관할 수 있었다(24절). 그래서 다윗은 그의 말을 듣고 역경 중에서 견딜 수 있는 좋은 조언자가 되었다.
1. 다윗은 언약궤의 안전을 갈망했다 "하나님의 궤를 도로 성으로 메어가라" (25절). 하나님의 궤를 천막으로 끌고 다녀 어지럽히지 않도록 하라고 다윗은 말했다. 압살롬이 아무리 악할지라도 그것을 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윗의 마음은 엘리 제사장처럼 하나님이 궤를 두려워했다. 그는 자신의 안전이나 번영보다 교회의 안전과 번영을 더 생각했다. 자신의 기쁨보다 예루살렘을 더 기뻐했다(시 137:6 참조). 그는 어떠한 곤경에 빠져서도 자기 행복과 안전을 구하기에 앞서서 교회의 번영과 복음의 승리를 더 원했다.2.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의 특권 중에 희열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그는 법궤를 돌려 보내는 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것은 자신이 환궁하여 왕위에 복직되는 것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더 자신에게 만족스럽게 생각한 것이다.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자신의 안전과 편의를 도모한다. "히스기야 왕도 자신의 건강 회복을 바라고 성전으로 올라갔다" (사 38:22 참조).
3. 다윗은 자신의 당면한 불행을 하나님의 거룩한 뜻으로 알고 매우 겸손했다. 그는 모든 선에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시는 행복을 희망했다.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실 것이로되 그렇지 아니하면 가장 큰 불행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라고 하나님이 나를 거부하신다면 이에서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처분하시도록 하면 얼마나 만족스러운가를 고찰해 보자.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할 수 있었으나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했다(욥 9:12 참조). 그는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었으나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했다(욥 33:13). "종이 여기 있아오니" 명령을 기다리는 종처럼 법궤에 대한 처분을 하나님께 일임하려는 말이다.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반대 의사가 전연 없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모두 선한 것이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욥 23:13, 15) 그는 그의 뜻대로 하려고 했다. 이것이 우리의 관심사요, 의무이다. 어떤 일을 우리가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묵종해야 한다. 우리는 그의 뜻을 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의 뜻이 우리에게서 행하시도록 일임해야 한다.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장중에서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되어진 일에 대하여 불평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Ⅲ. 다윗은 자기가 예루살렘에 없을 동안 힘이 되어 줄 만한 제사장들과 비밀 체결을 한다. 그는 예언자 사독을 불렀다(27절). 그는 시대를 분간할 줄 알고 사명을 아는 지혜있는 사람이었다. "너는 선견자가 아니냐." 그러므로 적군의 동태에 대한 정보와 방안을 내게 알릴 수 있지 아니하냐, 이처럼 위급한 때 약삭빠른 한 사람의 선견자는 20명 이상의 가치가 있다. 그는 떨어져 있는 동안의 서신 교환을 약속했다.
1. 그에게 보냄을 받을 자는 아히마스와 요나단이다. 그들은 사독의 보호자요, 매사를 신중히 하는 충성스러운 경험자들이었다.2. 그들은 그곳으로 소식을 보내기로 하고 거기서 기별이 올 때까지 광야에서 기다리기로 했다(28절). 그리고 그는 그에게 전해지는 정보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그래서 그들은 성으로 돌아와 사건이 발생하기를 기다렸다. 어떤 혼란이 나라 안에서 일어나기를 왕과 제사장이 이처럼 호의로 비밀리 서로 모의할 수 있었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Ⅳ. 다윗과 그를 쫓는 백성들이 감란산 길로 올라갈 때 일부러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30절).
1. 다윗은 자신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수줍은 얼굴로 슬피 울면서 맨발로 죄수처럼 걸어 갔다. 그렇게 용감하고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명성이 높던 사람이 한 사람의 적의 일견에 그렇게 쉽게 어린애처럼 부르짖을 수 있는가. 그가 당하는 괴로움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1) 그의 아들의 고약성. 자기 태에서 나와서 자기 품에 안겨 자라난 자가 일어나 그의 발꿈치를 찬다는 것을 생각하면 울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자신도 자기가 키운 자식이 반역하기 때문에 이런 고통으로 슬퍼한다고 말했다(시 95:10 참조). 우상 숭배하는 마음 때문에 찢어지는 고통이 있다고 했다(겔 6:9 참조).
(2) 여기에 하나님의 노여움이 크게 나타났다. 내 고초와 재난이 쑥과 담즙으로 더욱 악화된다고 했다(애 3:19). 그의 죄가 항상 그의 앞에 있었지만(시 51:3) 지금처럼 불행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사울이 죽이려고 쫓아다닐 때도 그렇게 슬피 울지 않았다. 다만 마음의 상처가 그에게 무거운 고통을 주었다(시 38:4).
2. 다윗이 울 때 그의 고통과 슬픔에 감동되어 따르는 모든 백성도 울었다.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특히 우리보다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을 위해 울어야 한다. 우리는 죄 때문에 우는 자와 함께 울어야 한다. 히스기야도 자기 죄를 뉘우치고 예루살렘 모든 거민들과 함께 하셨다(대하 32:26 참조). 죄인들에게서 고통을 덜어 주는 길은 그들과 함께 울어 주는 것이다.
다윗과 후새의 협정(사무엘 하 15:31-37)
압살롬의 음모단에 아히도벨이 끼어있다는 것보다 다윗에게 위협적인 것은 다시 없다. 왜냐하면 이런 음모단에 하나의 좋은 두뇌를 가진다는 것은 천 개의 세련된 손을 가지는 것보다 유익하기 때문이다. 압살롬은 정치가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관심하는 일은 무엇이나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는 다윗의 과거 모사들과 친분이 있기 때문에 더욱 위협적인 사람이다. 그러므로 만일 아히도벨이 혼선을 일으키기만 한다면 압살롬은 진로를 바꿀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는 음모자의 두목을 제거할 것이다. 이것은 다윗이 바라는 것이다.
Ⅰ. 기도로 이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음모자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고 간단히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31절)라고 했다. 그는 길게 기도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많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여호와여 이 일을 행하시옵소서." 이 기도는 강렬한 기도였다. 하나님은 강청하는 자의 기도를 잘 들어 주신다. 다윗의 기도가 특별히 그런 기도였다. 다윗은 모략자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했다. 하나님은 근심과 두려움의 억눌림을 받는 우리에게 기도를 통해 겸손하고 자유스러운 그리고 특별한 관심을 끌 수 있도록 하셨다. 다윗은 아히도벨을 대적하는 기도는 하지 않았지만 그의 모략을 하나님께서 어리석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아무리 현명한 모사라도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어리석게 만들어지면 좌절되고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과 입술의 말을 다 아신다고 확실히 믿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모든 지혜자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시고 재판장을 미련하게 하실 수 있다(욥 12:17; 사 3:2, 3). 그는 그가 입은 상처와 그가 의로움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실 줄 굳게 믿었다.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열심으로 기도하면 어떤 모사도 하나님은 어리석게 하실 것이다.
Ⅱ. 정책으로 이 일을 이루려 했다. 우리는 열심히 기도에 힘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반역하게 된다. 기도는 교회의 원수들의 모략을 파괴하는 좋은 무기이다. 다윗이 언덕에 도착하자, 하나님께 예배했다(32절). 우는 것은 예배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배에 생기를 준다. 여기서 그는 세 번째 시를 썼다. 어떤 이들은 그가 드린 예배에서 부른 노래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후새는 다윗에게 왔다. 그가 말할 때 하나님이 들으시고 아히도벨을 어리석게 할 수 있는 사람을 그에게 보내 주었다. 후새는 다윗의 당면한 고충을 위안하기 위해서 와서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썼다. 다윗은 그를 압살롬에게 보낼 첩자로서 채용했다. 다윗은 후새를 데리고 가지 않으려 했다(33절). 그는 모사로서보다는 군인으로 돕는 것이 더 유익하므로 반역자 압살롬이 도착할 때를 기다려 자기를 돕도록 그를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냈다(34절). 다윗은 그의 책략을 후새에게 암시했다. 그는 후새가 압살롬을 충고로서 단념시키거나 그의 모략을 탐지하여 다윗에게 알려 줌으로써 아히도벨의 책략을 좌절시키고 다윗의 안전처를 찾으려 했다. 이런 흉악한 거짓이 어찌 정당하겠는가. 압살롬이 그의 아버지를 반역하면 인류를 반역하는 것이고 그를 속이면 인류를 속이는 것이라고 주지시키는 것을 모의에 최선책으로 삼았다. 다윗은 후새를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논의 대상자로 소개했다(35절). 또 동지로서 다윗의 심부름꾼으로 그들의 두 아들을 추천했다(36절). 그래서 후새는 예루살렘에 와서 압살롬이 군대를 거느리고 오는지 안오는지를 보고 했다(37절). 성과 궁의 주인이 어찌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혼란없고 튼튼한 나라를 찾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