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압의 계략(사무엘 하 14:1-20)
Ⅰ. 요압은 압살롬을 추방에서 소환시키고 그의 범죄를 사면시키기 위해 계략을 세운다(1절). 요압은 직접 이 일에 동분서주한다.
1. 그는 아첨하는 신하였다. 그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기 군주의 비위를 맞추며 왕의 총애를 더 얻어 보려고 가진 애를 다 썼다. 그는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한 줄 알았다." 그는 왕의 격노가 그치고 압살롬에게 대한 옛정이 살아나 화해를 조정해줄 사람이 곧 왕의 정의감을 손상시키지 않고 이 일을 주선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는 아들에게 대한 다윗의 그리움이 지극하다는 것을 깨닫자 이 좋은 역할에 발벗고 나선다.2. 그는 압살롬의 동조자였다. 그는 아마 압살롬에게 대해 특별히 호의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최소한 그는 압살롬을 떠오르는 태양처럼 간주했을 것이다. 압살롬의 마음에 드는 것이 그에게 이득이 되었다. 그는 다윗이 결국에 가서는 압살롬과 화해하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자기가 이 일의 성사에 주역이 된다면 다윗과 압살롬 양인에게서 다 환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3. 그는 국민의 복리를 염려하는 정치가였다. 그는 압살롬이 민중에게서 매우 인기를 얻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고 압살롬이 추방당해 있는 동안 다윗이 죽는다면 압살롬 지지파와 반대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모든 이스라엘이 다 그를 사랑했지만 그의 범죄 사건에 대해서는 의견이 양분되었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4. 그 역시 아브넬을 살해한 범죄자였다. 그는 피흘리는 죄를 범했고 그 죄를 스스로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압살롬에게 대한 은총을 얻어낼 수만 있다면 자기의 형 면제는 확실해질 것이었다.
Ⅱ. 그는 다소 비슷한 사건을 왕 앞에 제소함으로써 이 일을 이루려고 도모한다. 그가 이용한 여인은 이 일을 너무도 교묘히 해냈으므로 왕은 이것을 실제의 사건으로 생각하고 나단의 비유 때처럼 판결을 내렸다. 그 판결은 범죄자에게 유리한 것이었다. 이 여인은 압살롬의 일을 꺼내도 좋을만큼 왕의 기분이 호전됐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이 바로 왕가의 일이며 압살롬의 경우에 해당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험이었다. 그러므로 왕의 생각을 안다는 것은 몹시 중요한 일이었는데 그는 범죄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 여인은 아마 위장된 사건에 대한 왕의 판결이 가혹한 경우에는 더 이상 말을 끄집어내지 말라고 요압에게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1. 그가 고용한 이 여인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그냥 드고아의 여인이라고만 한다. 이 여인은 그가 이런 일을 맡기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여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윗이 자신의 금시초문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장소도 멀찍이 드고아로 잡아야 했을 것이다. 이 여인은 슬기있는 여인이라고 한다. 즉 그녀는 자기 이웃 사람들보다 기지가 많고 응구첩대를 잘하는 여인이었을 것이다(2절). 그리고 본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의심을 덜 받기 마련이었다.2. 이 여인은 위로받지 못하는 과부의 행세를 했다(2절). 요압은 그런 자가 왕에게 쉽사리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명예로운 칭호 중 과부의 재판장이시라는 것도 빼놓지 않고 언급하였다(시 68:5). 그러므로 그 자신도 슬퍼하는 자 특히 애곡하는 과부를 늘 기꺼이 위로하려고 하였다. 하나님의 귀와 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세상의 가장 자비로운 군주의 귀나 마음보다 고통받는 자의 부르짖음에 대해서 더 많이 열려 있다.
3. 그 여자가 왕에게 진술하는 사건은 몹시 딱한 사건이었다. 즉 법(결과적으로 모든 하급 법원의 판결)이 자기에게 불리하게 적용되므로 그녀로서는 왕의 가슴 속에 있는 최고 법원 외에는 구제받을 수 있는 기관이 없었다. 그녀는 왕에게 자기가 과부임을 말하고(5절) 저간의 사정을 얘기한다. 그녀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그들은 혼자 사는 그녀에게 힘과 위안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청년들에게 그런 경향이 있듯이) 불화하여 싸우다가 불행하게도 하나가 죽었다는 것이다(6절). 그녀로서는 살해자를 보호하고 싶었다(레베카가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고 했듯이). 그녀는 죽은 자의 최근친이었지만 피의 복수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다른 친척들은 남아있는 아들마저 율법대로 처형되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것은 정의감이나 피살자에게 대한 애정에서가 아니라 상속자를 죽임으로써 유산을 자기들 차지가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뻔뻔스럽게도 자기들의 목적이 상속에 있다는 것을 시인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다음 두 가지를 끊고자 했다.
(1) 그 여인의 위안. "저희가 내게 남아있는 숯불을 끄겠나이다. 그들은 내 소년의 유일한 희망을 내게서 박탈하려 하나이다. 내 기쁨의 전부는 바로 이 한 아들에게 있는데 그들은 이것을 끊어버리려고 하나이다."
(2) 그 남편에 대한 기억. "그의 가족은 완전히 멸절하게 될 것이며 저희는 내 남편의 이름과 씨를 세상에 끼쳐 두지 아니하겠나이다" (7절).
4. 왕은 이 여인에게 그의 은총과 아들의 보호를 약속했다. 이 여인이 왕의 동정어린 양보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살펴보자.
(1) 그 여인의 사정 얘기를 듣자, 왕은 그 일을 고려해보고 명령을 내리겠다고 약속한다(8절). 그가 그녀의 소청을 "currat lex-즉 법대로 집행할지이다. 피는 피를 부르니 그대로 행하라" 는 말로 일축하지 않은 것은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왕은 이 여인의 탄원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시간적 여유를 가지려고 한다.
(2) 이 여인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즉시 자기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려달라는 간청을 한다. 그녀는 만약 사실이 자기의 주장과 달라서 결과적으로 그릇된 판결이 된다면 자기가 그 허물을 뒤집어 쓸 것이며 "왕과 왕위는 허물이 없으리라" 고 말한다(9절). 그녀가 아무리 이렇게 말하더라도 사건을 정당하게 심리하지 않고 판결을 내린다면 왕에게 책임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었다.
(3) 이렇게 끈덕진 요구를 받자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녀가 아무에게도 피해를 입거나 모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며 모든 괴롭힘에서 그녀를 구해 주겠다고 약속한다(10절). 위정자들은 이와 같이 학대받는 과부들의 후견자가 되어야 한다.
(4) 그럼에도 이 여인은 자기 아들의 사면과 보호를 보장받기까지는 결코 물러서려고 하지 않는다. 부모는 자녀가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다 안전하게 되지 않으면 편치 못한다. "원수갚는 자로 내 아들을 죽이지 못하게 하소서(11절). 저를 잃으면 나는 파멸입니다. 그의 생명을 취하는 것은 내 생명을 취하는 것이나 다름 없나이다. 그러므로 왕은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생각하소서." 이 말은 곧 다음과 같은 뜻이다.
[1] "왕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 자비로운 판결을 확증하소서. 여호와께 대한 호소로 이 판결이 논란의 여지가 없으며 취소할 수 없다는 것을 맹세하소서. 그러면 내가 안심하리이다" (히 6:17, 18 참조).
[2] "왕은 이 일에 대해 자비로운 판결을 내릴 만한 이유가 얼마나 충분한지 심사숙고하소서. 그러면 왕 자신이 이 판결을 확고히 하게 될 것입니다.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얼마나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죄인에게 대해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지 기억하소서. 그는 죄인에게 그들의 행위대로 갚지 않으시고 기꺼이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인을 어떻게 살려두셨는지 기억하소서. 그는 자기 형제를 살해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원수갚은 자들에게서 보호하지 않으셨나이까?(창 4:15)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아의 일로 당신께 용서하신 것을 기억하소서. 그런즉 자비를 얻은 왕이여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는 것보다 적절하고 강력한 자극제는 없다는 데 유의하자.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함으로써 우리 의무 특히 모든 자비와 친절 행위를 이행하게 된다.
(5) 이 끈덕진 과부는 이처럼 강요하다 시피 하여 결국 자기 아들에 대한 완전 사면을 얻어내고 자기가 바라던 대로의 맹세로 그 사면을 인준시킨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즉 네 아들이 이 일로 어떤 해도 입지 않도록 내가 조처하겠노라." 다윗의 아들 예수는 그의 보호에 의탁하는 모든 자들이 비록 그를 위해 죽음을 당할지라도 그들의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을 것이며(눅 21:16-18) 그들이 그를 위해 잃을지언정 그로 말미암아 잃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언하셨다. 다윗이 이처럼 도피성도 보호하지 못할 살인자의 보호를 떠맡고 나선 일이 잘한 짓인지 아닌지 나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본 이 사건에는 과부를 측은히 여길 만한 이유도 크거니와 그 아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릴 만한 여지도 충분히 있었다. 그는 자기 형제를 살해했지만 본래 미워함은 없었던 것이다(수 20:5). 그 일은 갑작스런 도발에 발끈하여 일어난 사건이었으리라. 아마 자기의 정당 방위로 야기된 살인이었을 것이다. 살인자 자신은 이 일을 말하지 않지만 재판관은 죄인의 정상을 충분히 참작해야 했다. 그러므로 이 때는 자비가 공의와 심판을 이기고 기뻐하였던 것이다.
5. 사건이 이처럼 여인의 아들에게 유리하도록 판결되었으므로 그것을 왕의 아들 압살롬에게 적용할 시기가 이르른 것이다. 가면은 여기서 벗겨지기 시작하고 다른 장면이 전개된다. 겸손히 탄원하던 여인은 갑자기 왕의 책망자, 왕의 최고 모사꾼, 자기 아들을 위한 변호자, 그리고 여론을 대언하는 백성의 입으로 돌변하자 왕은 놀랐다. 그러나 추호도 노여워하지는 않았다. 여인이 자기가 하려는 말에 대한 왕의 용서와 인내를 구하자(12절) 왕은 그녀의 재치와 익살이 마음에 들어 그녀의 발언을 허락했다.
(1) 여인은 압살롬의 경우가 사실상 자기가 소청한 아들의 경우와 동일하다는 암시를 던진다. 그러므로 왕이 형제를 살해한 여인의 아들을 보호하려고 한다면 하물며 자기 아들 압살롬을 보호하고 "내어쫓긴 자를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야 더 당연하지 않는가!(13절) mutato nomine de te fabula narratur-즉 이름만 바꾸면 그 이야기는 바로 네 이야기이다. 여인은 압살롬이라고 지칭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을 들먹일 필요도 없었다. 다윗은 압살롬을 너무나 그리워하고 너무 생각하고 있었기에 여인의 내어쫓긴 자란 말을 곧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 한 마디 말 속에는 왕의 인자한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추방당해서 삼 년간 수치와 공포 그리고 추방에 따르는 온갖 고생을 겪었나이다. 물론 그런 자에게는 이런 벌이 족합니다. 그러나 그는 왕의 내어쫓긴 자입니다. 당신의 아들이며 당신 자신의 일부이며 당신이 사랑하는 자식입니다." 압살롬의 경우는 사실 여인이 소청하던 사건과 판이하다. 압살롬은 화김에 살인한 것이 아니라 묵은 원한에서 악의를 품고 계획적으로 살인했다. 증인도 없는 들판에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잔치에 청함 받은 모든 손들 면전에서 죽였다. 압살롬은 여인의 아들과 달리 독자가 아니었다. 다윗에게는 더 많은 아들이 있었으며 늦게 태어난 아이는 압살롬보다 왕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더 많았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으므로 여디디야라 불리운 까닭이다. 그러나 다윗은 두 경우의 불일치점을 눈여겨 보기에는 너무나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자기 아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얻으려던 여인의 심정보다 더 간절히 압살롬의 사면을 원하고 있었다. 그는 여인의 아들에 대해서는 유리한 판결을 내렸었다.
(2) 여인은 이를 들어 왕에게 논하며 압살롬에 대한 추방의 철회와 사면과 이전의 은총으로 받아들일 것을 설득한다.
[1] 여인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한 영향을 들어 변론한다. "그에게 불리한 일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불리한 것이 됩니다. 그들은 그를 왕위 계승자로 보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언약을 맺은 다윗 집안 전체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창 꽃피울 때 가지가 많이 꺾어져 다윗가가 위축되고 쇠퇴하는 것을 순순히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왕께서 이 말씀을 하셨으니 죄 있는 사람같이 되시나이다. 왕께서 내 남편의 이름과 기념이 끊어지지 않도록 조처하겠다고 하시면서 우리들 수 만 명보다 귀중한 왕의 소생이 위험 속에 있는데도 전혀 관심을 갖지 않으시니 말입니다."
[2] 여인은 인간의 숙명을 들어 변론한다(14절).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우리의 죽음은 예정되어 있나이다.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도 없고 연기할 수도 없나이다. 우리는 누구나 필연적으로 죽어야 할 숙명 아래 있나이다. 우리는 죽으면 땅에 쏟아진 물처럼 다시 모을 수도 없나이다. 아니,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불멸성을 상실하면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설사 압살롬의 손에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암논은 언젠가 죽어야 할 몸입니다. 이제 압살롬을 사형시킨다고 하더라도 죽었던 암논은 다시 살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빈약한 논리이며 살인자의 처벌을 막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할 말이었다. 그러나 이 말로써 보건데 암논은 민중에게 거의 존경을 받지 못하였고 그의 죽음을 슬퍼한 자도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암논처럼 존중받지 못하는 자의 생명 때문에 압살롬의 귀중한 생명을 찾는다는 것은 가혹한 처사라는 것이 대부분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3] 여인은 가련한 죄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를 들어 변론한다. "하나님은 생명 또는 영혼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자기에게 범죄하여 그 공의의 제물이 될 자녀(압살롬이 왕께 그렇듯) 곧 내어 쫓긴 자로 하나님께 영원히 버린 자가 되지 않게 하시나이다" (14절). 여기에는 죄인에게 대한 하나님의 자비의 큰 사례가 두 가지 나오고 있다. 이들은 자비를 간청할 이유로서 적당하다.
첫째, 죄인에게 대한 하나님의 인내이다. 하나님은 자기 법이 유린되는데도 유린하는 자들의 생명을 빼앗지 않으시며 죄인을 죽이지 않으신다. 범죄를 하는 죄인을 치셔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참으시고 은혜를 베풀기 위해 기다리신다(사 30:18). 하나님의 복수심은 압살롬을 살도록 허락하셨다. 그런데 다윗의 정의감은 왜 압살롬을 살리려 하지 않는가?
둘째, 죄인을 다시 자기 은총 속으로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준비이다. 비록 범죄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하나님한테서 자신을 추방시킬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이 영원히 버린 자가 되지는 않도록 준비하신다. 죄인들을 위해서는 희생 제물로 속죄가 베풀어졌던 것이다. 문둥병자와 의식법상 불결한 자로 간주되던 다른 여러 사람들은 내어 쫓김을 받았다. 그러나 일시적으로는 비록 제외되더라도 결국에는 버린 자가 되지 않도록 그들을 정결케하는 조치가 베풀어졌던 것이다. 죄인의 상태는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내어 쫓긴 자의 상태이다. 추방당한 가련한 죄인은 모종의 조치가 취해져서 이를 방지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히 버린 자가 되기 쉽다. 죄인이 영원한 포기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의사에 위배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어떤 죄인도 망하지 않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무한한 지혜자께서는 이를 방지할 적절한 수단을 강구하셨다. 그러므로 버린 자가 되는 것은 죄인들 모두에게 대한 하나님의 선의의 사례이다. 따라서 우리도 서로 자비롭고 긍휼히 여겨야 하는 것이다(마 18:32, 33).
6. 여인은 왕께 대한 찬사와 왕의 행위에 대한 확신의 표현으로써 자기 말을 끝맺는다. 즉 여인은 왕이 이 두 사건에 공히 자비롭고 공정한 일을 행하시리라고 믿는다는 것이다(15-17절). 여인이 그 사건이 실제 있는 일인양 여전히 자기와 자기 아들을 위해 탄원하지만 실은 압살롬을 의도하고 있다.(1) 여인은 왕을 이처럼 괴롭히려고 하지 않았지만 백성들이 자기를 두렵게 하였다고 말한다. 이 말을 여인의 일로 해석하면 여인의 모든 이웃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여인의 이웃은 피의 복수자로서 그 독자의 생명을 찾았고 따라서 여인은 자기와 아들의 파멸이 임박한 것으로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이처럼 대담히도 왕에게 직접 청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이 말을 압살롬의 일로 해석하면 왕의 가혹한 처사에 반감을 품은 백성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여인은 왕으로 하여금 전에 깨닫지 못하던 사실을 주지시킨다. 국민들이 압살롬에 대한 왕의 처사를 불만스럽게 여기며 그 정도는 가히 우려할 정도라는 것이다. 여인은 실로 대대적 폭동이나 봉기가 일어날까 두려워했다. 이런 큰 화를 방지하기 위해서 여인은 왕께 직접 품하려는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여인은 자기의 무례에 대한 변명으로 자신의 공포를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2) 여인은 왕의 지혜와 인자를 크게 신뢰하고서 이 말을 한다. "계집종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왕께 직접 여쭈고 아무에게도 나를 위한 대언을 요구치 않으리라고 했나이다. 왕은 나처럼 하찮은 인간의 말도 들으시며 학대받는 자의 부르짖음도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왕은 극히 불쌍한 백성이 하나님의 산업에서 끊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산업에서 끊긴 자는 곧 압살롬처럼 이스라엘 땅에서 추방되어 무할례자 중에서 보호처를 구하는 자이며 압살롬의 경우 그보다 더 악하다. 그는 하나님의 산업에서 차단되어 있으므로 회개에 이르도록 도와 줄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를 필요로 한다. 그는 자기가 체류하는 이방 땅의 우상 숭배에 감염될 위험에 처해 있으며 그 악습을 고국에 들여올 위험에 놓여 있는 것이다. 여인은 왕으로 하여금 자기 요청을 윤허하도록 하기 위해 왕의 대답이 자기 위로가 되리라는 것을 확실히 믿고 바란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왕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자들인 천사들처럼 선악을 분간하는 분이라고 칭찬한다. 이 여인은 찬사 형식으로 표현하는데 비해 선지자는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슥 12:8)고 약속 형식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내 주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과 같이 계셔 이 일과 모든 판결로 왕을 도우소서." 큰 기대는 큰 의무이다. 특히 존귀한 신분에 있는 자들은 자기들에게 의지하는 자들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7. 왕은 요압이 이 일에 관여되었을 것으로 눈치채고 여인의 자백을 얻는다(18-20절).
(1) 왕은 곧 눈치를 챘다. 그는 이런 여인이 자발적으로 이렇게 중요한 일을 직접 품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여인을 이렇게 내세울 자는 요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요압은 모략이 깊고 재사였고 압살롬과 친우였기 때문이다.
(2) 여인은 아주 정직히 그 점을 고백했다. "왕의 종 요압이 내게 명령하였나이다(19절). 일이 잘 되었사오면 그로 그 칭송을 받게 하시며 일이 잘못 되었다면 나로 그 책임을 지게 하소서." 여인은 그 일이 왕의 마음에 매우 기쁨을 준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여인은 그 칭찬을 자기가 가로 채려고 하지 않고 사실대로 말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본이 된다. 우리는 교묘한 조작극을 은폐시키기 위해 거짓말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진실되어야 한다. 거짓말을 필요로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압살롬의 귀환(사무엘 하 14:21-27)
Ⅰ. 압살롬을 데려 오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여인이 다윗에게 가져 온 일은 왕의 마음을 흔쾌히 하였고 또 여인의 일 처리는 너무도 능숙하고 놀라와서 다윗은 요압에게 아주 친절히 말한다. "가서 소년 압살롬을 데려 오라" (21절). 다윗은 압살롬에게 은총을 베풀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정의의 체면을 위해서도 이 일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압살롬을 위한 중보자가 나서자 그는 이렇게 허락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방법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사실 하나님은 죄인이 망하는 것을 즐거워하시지 않으시며 불쌍한 죄인을 긍휼히 여기실 생각이 있으시다. 그렇지만 그는 중보자를 통해서 그들과 화해하시며 중보자께서는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대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중보자에게 "가서 저들을 다시 데려 오라" 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에게 화목케 하셨고 그는 내어쫓긴 우리를 하나님께 데려가시려고 이 추방의 땅에 오신 것이다. 이런 명령을 받은 요압의 행동은 다음과 같다.
1. 왕에게 치하한다. 그는 국가적으로 경사스러운 일에 자기를 부리시는 왕에게 감사를 드린다(22절). 요압은 이 일을 자기에게 대한 친절로 받아들였고(혹자가 생각하듯) 그가 범한 살인죄를 묻지 않겠다는 왕의 의사 표시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가 만약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라면 그것은 오산이었다(왕상 2:5, 6).2. 다윗의 명령을 지체없이 실행한다. 그는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왔다(23절). 나는 다윗이 어떻게 고대 율법의 시행을 유예시키고도 괜찮은지 알 수 없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다(창 9:6). 의로운 위정자는 자기 형제라도 알은 체 말며 자기 자녀라도 모르는 것이 고대법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작은 하루살이는 잡고 큰 것에게는 구멍이 뚫리는 거미줄법과 같다. 다윗은 미련하게도 긍휼심으로 압살롬을 살려 두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다윗의 채찍이 되게 하신 것은 지당하다. 다윗은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긴 했지만 궁궐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시켰고 그 자신도 압살롬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24절). 그가 압살롬에게 이런 금지령을 내린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1) 그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다윗은 자기가 그런 중죄인을 지지하거나 쉽사리 용서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하였다.
(2) 압살롬의 보다 큰 반성을 위해서 아마 다윗은 요압이 압살롬을 데리러 갔을 때 그가 취할 행동을 다소 귀뜸받았을 것이고 그 말 속에는 압살롬이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만한 점이 너무 많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았다는 표시로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는 압살롬으로 하여금 새삼스레 자기 죄를 깨닫고 그것을 슬퍼함으로써 하나님과 화해를 이룩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점만 눈에 띄면 두 말할 것도 없이 기꺼이 다시 자기 은총 속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다윗이었다.
Ⅱ. 여기에는 압살롬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압살롬의 지혜와 경건에 관한 설명은 한 마디도 없다. 그는 그토록 독실한 아버지의 아들이었지만 우리는 그의 신앙에 관한 언급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부모는 자식에게 좋은 교육을 시킬 수는 있지만 은혜를 전해주지는 못한다. 압살롬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1. 그는 매우 수려한 사람이었다. 모든 이스라엘인 중에서 아름다움으로 그에게 필적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25절). 그러나 고귀한 점이라곤 전혀 없는 자를 칭찬한다는 것은 초라한 칭찬에 지나지 않는다. 아름답게 행동하는 자라야 아름다운 사람이다. 아름답고 균형잡힌 몸매 속에 오염되고 흉칙스런 영혼이 기거하는 예는 허다하다. 피로 얼룩지고 자기 아버지와 군주께 대한 불만으로 일그러진 압살롬의 경우가 바로 그 증거이다. 그의 몸에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상처와 흠투성이였다. 아마 다윗이 그를 그다지도 사랑하고 공의를 어겨가면서 그를 보호하려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의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자녀의 미덕보다 자녀의 아름다움을 더 기뻐하는 자는 자녀로 인해 고통당할 것을 염려할 만한 이유가 있는 자들이다.2. 그의 머리털은 매우 많고 아름다웠다. 길이나 빛깔 때문이든 아니면 특별히 부드러워서든 그의 머리털에는 그를 돋보이게 하는 그 어떤 점이 있었다(26절). 그의 머리털에 대한 이런 주목은 나실인의 머리털(그는 그런 엄격한 생활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로서가 아니라 멋쟁이의 머리털로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견딜 수 있을 때까지 머리를 길렀다. 잘난 체하려고 추위도 더위도 아랑곳하지 않는 여자들처럼 그는 자랑하기 위해서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자기 머리털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그는 연말마다 머리털을 깎았다. 그는 뽐내기 위해 그것을 달았다. 이는 자기 머리털이 남의 머리털보다 얼마나 월등한지를 과시하기 위해서였는데 그 무게는 이백 세겔이었다. 혹자는 이것이 우리 무게로 삼백 파운드 이 온스에 해당한다고 한다. 교회사가 요세푸스의 말대로 머리털에 기름과 금가루를 뿌리는 것이 그 당시의 유행이었다고 한다면 머리털의 무게가 이렇게 나간다는 것도 믿지 못할 일은 아니라고 패트릭 감독은 생각한다. 이 아름다운 머리는 그의 교수형 밧줄로 판명되었다(18:9).
3. 그의 가정에는 식구가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아이를 얻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경과했을 법하다. 그리고 그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음을 한탄하여 비석을 세웠다는 것(18:18)도 바로 이때였을 것이다. 그 뒤에 가서야 그는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게 되었다(27절). 그렇지 않으면 그가 모반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그의 세 아들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손에 다 멸절당해버렸으므로 그는 그 기념비를 세웠을 것이리라.
압살롬의 알현(사무엘 하 14:28-33)
압살롬은 삼 년간 그술에서 망명자 노릇을 했고 고국의 본가에서 이 년간 죄인 노릇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마땅히 받을 벌보다 훨씬 가벼운 처벌을 받은 셈이다. 그럼에 도 그의 마음은 여전히 겸비하지 않았고 교만심은 억제되지 않았다. 목숨을 살려준 데 대해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는 이전의 모든 지위로 회복되지 않은 것을 아주 원통하고 부당한 대우로 생각하였다. 만일 그가 진심으로 회개했다면 궁중의 연락으로부터 멀리 떠나 자기 집에서 홀로 은거하는 것을 매우 즐거워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성이 아니었던가! 살인자가 살아 남으려면 영영 모습을 감추고 은거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압살롬은 이 공정한 은인자중을 견디지 못하였다. 그는 왕 앞의 알현을 갈망하였다. 그는 자기가 왕을 사랑하기 때문에 알현을 동경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은 다윗의 자리를 찬탈하기 위한 기회를 노려서 하는 수작이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자기와 화해하기까지는 그에게 위해를 가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의 반역음모의 제1단계였다. 이 뱀 같은 자는 자기 아버지의 따뜻한 품에 안기기까지는 다시 깨물 수가 없었다. 그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그러나 순정을 가장하고 개심을 약속함으로써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모욕하고 가해함으로써 자기 뜻을 이룬다.
1. 요압에게 무례히 행함으로써 그는 그로 하여금 자기를 위해 중재에 나서게 한다. 그는 요압이 자기에게 오기를 꺼리자 몇 번이고 사람을 보내서 이야기할 게 있으니 좀 와 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요압은 좀체로 오려고 하지 않는다(29절). 이는 아마 압살롬이 요압의 친절 행위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요압은 그를 예루살렘으로 데려 오기까지 그에게 무척 고맙게 해 주었다. 요압은 압살롬이 그 고마움에 대해 마땅히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압살롬은 그것을 시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자기에게 베푼 봉사를 빚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압살롬의 경우였다면 당연히 요압에게 감사의 말과 함께 큼직한 선물을 보냈을 것이다. 감투 쓴 사람들은 고상한 선물을 기대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압살롬은 자기 종에게 요압의 보리밭에 불을 놓으라고 명령한다(30절). 이것은 극히 심술궂은 행위였다. 삼손은 이 방화 행위를 블레셋인에게 대한 최대의 가해 행위로 생각하였다. 압살롬이 요압에게 해를 입힘으로써 그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이상하다. 남의 밭에 방화한다는 것은 자신의 악의와 심술을 보이는 짓이며 자기가 공익의 원수임을 드러내는 짓이다. 왜냐하면 불은 다른 사람들의 밭으로 번져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요압의 밭에 방화함으로써 그의 호의를 얻어내고 왕과 백성의 총애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는 이렇게 하여 요압을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31절). 하나님께서도 이와 같이 자기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자를 환란으로써 데려오신다. 압살롬은 율법에 의해 보상해 줄 의무가 있었다(출 22:6). 그런데도 그가 배상했다거나 요압이 배상을 요구했다는 기록은 없다. 요압은 자기의 방문 거절을 변명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압살롬은 이런 식으로 그를 데려온 것을 변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요압은 아마 압살롬의 대담함과 격노에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또 그는 압살롬이 극히 대담한 일을 저질러도 민중이 그를 지지할 만큼 민중의 세력을 등에 업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을 것이다. 요압은 이제 이 피해를 참을 뿐만 아니라 압살롬의 일로 왕에게 가기까지 한다. 위협과 고압적 자세는 얼마나 대단한지 유의하자.2. 그는 오만불손한 전언을 왕께 드려 자기의 지위를 되찾고 왕과 대면하게 되며 왕의 추밀고문이 된다(에 1:14).
(1) 그의 전갈은 오만불손했고 주제 넘었으며 자식이나 신하로서 할 말이 아니었다(32절). 그는 자기를 추방에서 소환하고 그의 집, 그것도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 집으로 복귀시킨 왕의 은총을 과소평가했다.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그는 자신의 범죄가 극히 악명 높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부인하고 있다. 그는 자기에게 죄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는 따라서 자기가 받고 있는 견책이 부당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는 왕의 공의를 무시하여 "왕이 나를 죽일 의향이 있으면 죽이라고 하라" 는 뜻으로 말한다.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왕이 그를 너무 사랑하기에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2) 그러나 그는 이 전갈로써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33절). 다윗은 압살롬을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이 모든 말이 아버지에게 대한 존경과 은총에의 갈구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 말들은 전혀 반대로 해석해야 했다. 즉 이 말들은 전혀 반대로 해석해야 할 언어이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지혜롭고 선량한 부모라도 맹목적으로 자녀를 사랑할 때는 얼마나 쉽사리 속아넘어가는지 유의하자. 만일 에브라임이 스스로 슬퍼하면 하나님께서도 곧 그와 같이 슬퍼하며 아버지의 온갖 자애어린 말로 위로하실 것이다. "그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렘 31:20).